어제 드디어 볼까 말까 하던 영화 '미나리'를 관람했습니다. 이미 관람을 한 가족이 있어서 혼자 가서 보았습니다. 관람을 한 소감은 한 마디로, '보기를 잘했구나'였습니다. 혼자 보느라 감성의 선(線)이 민감해서였는지는 모르지만 서너번 울컥하는 내 가슴을 느낄 수 있었지요. 감동을 안겨주는 장면들이 분명 연출되고 있었습니다.
내 자신이 기독교인이라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전체적인 맥락은 기독교적인 요소가 바탕색을 이루고 있는것이 아닌가 하고, 나름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미국에 이민을 와서 기껏 병아리 감별이나 해 가면서 근근히 먹고 살지는 않겠다, 그야말로 '아메리칸드림'을 이루어 보겠다는 야심찬 꿈을 가지고 도전하는 그 가정의 가장인 제이콥. 그는 '한국인의 정신'을 앞세워 그 지방의 민속적인 풍습을 따르기도 거부합니다. 그 지방 특유의 전래하는 수맥을 찾는 방식을 따르지 않고 자기 신념을 좇아갑니다. 그러다가 결국 낭패를 당하게 되지요. 자신의 의지와 신념, 그리고 자신감, 용기만 있으면 자신의 꿈이 계획대로 다 이루어질줄 알았습니다. 편견과 고집은 아픔을 낳게 됩니다.
제이콥은 자신의 일을 돕는 백인 폴이 열정적인, 잘못 생각하면 광신적인듯 하기도 한 기독교인, 그 폴이 자신에게 신앙적으로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만 제이콥은 코웃음을 칠 정도로 거절하는 태도를 보입니다. 단지 자신의 아내가 친구나 이웃이 없어서 외로움을 겪고 있는 것이 마음이 쓰여서 동네의 백인 교회에 주일 예배에 참석을 하게 됩니다. 그 교회에서도 미국 사람들 일색이다 보니까 아무래도 겉도는 듯한 어색함을 떨칠 수 없었지요.
그러다가 제이콥의 아내의 어머니이자 자신의 장모인 배우 윤 여정이 합류를 하게 됩니다. 한국에서 딸을 돕기 위하여 온 것이지요. 그녀도 전통적이며 토속적인 한국 어머니이자 외할머니의 인상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딸에게 주고자 종이로 돌돌 감싸서 가지고 온 두툼한 돈 봉투, 아마도 달러로 바꿔서 가지고 왔겠지요. 그녀에겐 돈이 인생의 버팀목이다, 하는 신앙적인 신념이 투철한 것 같았지요. 어느 주일 예배에 딸이 출석하는 교회에 온 가족이 참석을 했습니다. 헌금을 하는 시간에 옆에 앉은 딸에게 헌금쟁반이 사위로부터 전해지자 딸이 100불 짜리를 준비했다가 쟁반에 올려 놓았습니다. 딸은 집에서 오기 전에 이미 마음에 작정을 하고 하나님께 그 액수를 드리기로 작정을 한 것입니다. 미국에서 100불은 큰 돈입니다. 그런데 딸은 대출 받아서 농장을 이끌어가는 자기 가정의 형편임에도 그 돈을 아깝게 생각지 않고 헌금을 한 것입니다. 자기 가정을 지켜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이 자기 마음을 주장했기 때문이지요. 딸은 욥의 고백처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욥기 1장 21절)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장면이 바로 연출되었습니다. 헌금 쟁반을 딸에게서 넘겨받은 친정 엄마인 윤 여정은 그 쟁반 위에서 딸이 올려놓은 100불 짜리 지폐를 살며시 밑으로 숨기는 것이 아닙니까? 절박한 삶의 환경에서 이제 의지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시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딸을 그녀는 이해하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 보다 그리고 딸의 간절한 신앙심 보다는 당장 현실적인 100불의 가치가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그 돈을 감추는 것을 설교 단상의 목사가 못 보았을까요? 옆에 앉은 손자, 손녀가 보았을 것이며, 하늘의 하나님이 보고 계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었던 친정 어머니로서는 당장 현실적인 도움이 되는 그 100불의 가치가 클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비기독교인의 어머니로서는 지극히 정상적인 마음 쓰임새이지요. 그러나 만유의 주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운 것입니다.
영화는 아이들의 외할머니인 윤 여정이 치매 증상을 보이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됩니다. 가족이 시내로 나간 사이에 혼자서 불을 피우다가 그만 수확한 야채를 보관하고 있는 창고에 불이 나게 되지요. 제이콥은 그 창고에 보관되어 있는 야채를 시내의 한국인 교민이 운영하는 가게에 팔기로 약정을 한 상태인데 말입니다. 제이콥의 푸른 꿈도 그 불길에 익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꿈이 또 무산된 것입니다. 행운이 막 찾아 올 것 같았는데 금새 불운으로 뒤바뀌어진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 하십니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 날른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잠언 27장 1절).
농장 한 켠에 긴 트레일러 이동식 집에 거주하는 제이콥 가정에 폴이 식사를 함께 하게되었습니다. 그 때 폴은 그 집에서 역사하는 악령의 존재를 느끼게 되지요. 안그래도 친정 엄마가 묵고 있는 방의 설합장을 바라보면서 엄마가 무엇에 홀린듯한 모습을 보았던 손녀와 손자 그리고 딸은 폴에게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폴은 그 방에 들어와 금새 그런 기운을 느끼게 되고 마귀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쫓아내지요. 기독교인인 나 자신도 그 영화에서 그 장면을 보니까 약간의 거부감같은 어색함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현상입니다. 그런데 제이콥은 그런 폴의 모습과 그 폴을 인정하는 자기 아내를 못마땅하게 행동을 합니다.
영화가 종반부에 이르게 되자 제이콥의 변화된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 고장의 풍습에 따라서 수맥을 찾게 됩니다. 물론 돈이 드는 일이지요. 그런데 제이콥은 이제 자신의 고집스러운 의지를 내려놓게 되지요. 그러면서 장모님이 산자락 작은 시냇물가에 심어 놓은 미나리의 존재를 인정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딸과 그 가족을 먹이려고 먼 한국 땅에서 고이 가져온 미나리 씨앗이 심겨지고, 제이콥은 그까짓것이 무엇일까 생각했는데 잘 자라서 손으로 뜯을 수 있을 정도가 된 것을 보고 아들 데이비드와 함께 감탄하게 됩니다. 이 장면이 엔딩 부분이지요. 사소하게 보이는 것 부터 소중하게 여길 줄 아는 마음을 나타내려고 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자연 만물이 자라게 되고 그것을 거두게 되고 그래서 그것을 먹을 수 있게 되는 것이 결코 인간의 노력이나 힘이 아니라는 것을, 그 영화의 정 이삭감독은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절대적인 권능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는 메세지가 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미나리는 어찌 보면 보잘것 없는 것 같이 보이지만 그 미나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 그리고 선하신 하나님의 마음이 들어 있음을 하나님께서 이 영화를 통해서 친히 나타내시려고 하신 것은 아니었을까요?
'창세로 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로마서 1장 20절).
끝으로 이 영화에 대한 후기로는, 제이콥 가정이 모두 하나님을 가까이 하게 되고 기독교적인 미국 문화 풍토에 잘 적응이 되어서 제이콥의 '아메리칸드림'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그런 희망적인 여운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물론 영화의 내용을 토대로 극중의 미래를 상상해 본 것이지요. 아들의 병도 다 낫게 될 것이고, 아이들의 외할머니의 알츠하이머 증세도 호전이 되어서 가정의 웃음이 회복되리라 상상해 봅니다. 외할머니도 손주들에게 인정을 받을 정도로 한국적이면서도 미국적인, 그래서 정감과 교양이 어우러진 할머니로 변신을 하겠지요. 물론 다시는 하나님께 헌금 드리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고 오히려 믿음으로 많이 드리면 좋지 않겠느냐고 가족들을 채근하지 않을까요? 여하튼 그 가정의 미래는 주님 안에서 아주 희망적이다, 이렇게 상상을 해 봅니다. 아직도 관람하지 않으셨다면 관람하셔도 후회치 않을것으로 생각이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