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오신 날의 참뜻
정우頂宇 스님
월간붓다 발행인
前, 영축총림 통도사 주지 / 現, 구룡사 회주
오늘은 사월초파일!
부처님께서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싯다르타 태자로 오신 날입니다.
불기 2557년은 부처님의 열반 일의 년호年 입니다.
부처님께서 룸비니 동산에 오셨을 때,
동서남북東西南北 사방四方으로 각각 칠보七步를 걸으시고,
오른손은 하늘을 가리키시고 왼손은 땅을 가리키시며
『천상천하天上天下에 유아독존唯我獨尊이요,
삼계개고三界皆苦하니 아당안지我當安之하리라.』 하셨다고
전해져 옵니다.
부처님 탄생게誕生偈인 이 말씀은
세상의 눈으로 보면 이해를 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욕심의 세상인 욕계欲界 6천六天
(地獄·鬼道·畜生·阿修羅·人間·天神),
물질의 세상인 색계色界 18천十八天
(梵衆天·梵輔天·大梵天·少光天·無量光天·光音天少淨天·
無量淨天·遍淨天·無雲天·福生天·廣果天·無想天·無煩天·
無熱天·善見天·善現天·色究竟天),
비물질의 세상인 무색계無色界 4천四天
(空無邊處天·識無邊處天·無所有處天·非想非非想處天)을
안목 있는 인식의 눈으로 보시면 이해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신 탄생을 후대의 조사 스님들은
수많은 게송偈頌으로 지어 사바세계에 오셨음을 찬탄하였습니다.
『진묵겁전 조성불塵墨劫前早成佛이었건만
위도중생 현세간爲度衆生現世間하셨네.
위의덕상 월륜만威儀德相月輪滿하사
어삼계 중작도사於三界中作導師이시니라.』
부처님께서는
무시겁래無始劫來로 무시무종無始無終한 세상에서
일찍이 깨달음을 이루셨지만,
우리를 제도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32상相 80종호種好의 위의를 구족 하신 부처님은
마치 허공에 보름달과 같으며, 저 삼계三界 가운데 가지가지
종성種姓을 지닌 중생衆生들을 인도引導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큰 스승이십니다.
삼계三界는
태란습화胎卵濕化의 사생四生으로 이루어져 있고,
두 발 가진 것, 네 발 가진 것, 여러 발 가진 것, 생각 있는 것,
생각 없는 것, 생각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 없는 것도 아닌 것 등,
모든 생명을 포괄적으로 말하는 삶의 현장입니다.
그 모든 중생을 인도하기 위하여 개시오입開示悟入이라,
진리를 열어서, 보이시고, 깨달음으로, 들게 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
하늘 위 하늘 아래, 시방세계十方世界에 있는
모든 이들은 모두가 다 존귀합니다.
그러나 세상에 있는 이들이 고통과 괴로움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이들을 다 편안하게 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사바세계에 살고 있는 중생들이 고단한 세상에 살고 있지만,
그러나 고달픈 인생은 살지 말라고 경계하셨습니다.
사대육신四大六身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 몸은 언제든지 힘들 때가 있지만,
그것은 고달픈 것이 아니라 고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휘말리면 고달프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정신적으로 고달픈 인생을 살아가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사바세계의 중생들에게 안심安心과 평안平安을 주시고자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KBS에서 해인사 대장경 천 년 기념 특집으로 제작한
다큐멘터리 4부작 중, 제3부의 「환생과 빅뱅」에
“불교의 근본은 자비慈悲와 연민심憐愍心이다.”
사무량심四無量心은
대자大慈 대비大悲 대희大喜 대사大捨인데,
이것을 말하면 애민심哀愍心이요, 연민심憐愍心입니다.
불교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제악막작諸惡莫作하고 중선봉행衆善奉行하라
(모든 악은 짓지 말고 모든 선은 받들어 실천하라.)
‘자정기의自淨其意하면 시제불교是諸佛敎니라
(스스로 그 뜻을 헤아릴 줄 알면 이것이 바로 모든 부처님이 가르침이다.)’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이 사무량심四無量心을 실천하는 연민심으로
이루어져 있는 불교의 근본정신이 자비심慈悲心입니다.
그런데 이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야칭스 사원은
동티베트에 있는 사찰로 불과 30년도 안 된 절입니다.
28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소나 양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던
협곡 사이에 있는 허허벌판의 평원이었는데,
한 스님, 두 스님, 모이기 시작하더니 불과 28년 만에 1만 명이 넘는
사부 대중이 수행터로 삼아서 수행 정진하며 살아가고 있는 사찰이 되었습니다.
《벽암록碧巖錄》에
‘가장 행복한 날은 언제인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은 언제인가.
바로 오늘이다.
내 삶에서 절정의 날은 언제인가.
바로 오늘이다.
내 생애에서 가장 귀중한 날은 언제인가.
바로 오늘 지금 여기이다.
어제는 지나간 오늘이며
내일은 다가오는 오늘이다.
그러므로 오늘 하루하루를
이 삶의 전부로 느끼며 살아야 한다.
불자들과 함께 공부할 때,
“불교를 학문적으로 얘기하면 뭐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런 질문을 종종 받습니다.
저는 스스럼없이 “불교는 인간학人間學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근본과 도리를 가르쳐 주신 덕목德目이다.”고
답答 합니다.
“그러면 부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다시 묻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편안하며, 넉넉하고,
너그러우신 분이 부처님이시다.
우리도 부처님같이 세상을 살아가고자 한다면,
편안하고 따뜻하며 넉넉하고 너그러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는 모습이 자비심이다.”고 합니다.
그런데 야칭스 사원의 스님들은 어렵고 힘든 환경 속에서도
자비심과 연민심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 제 몸속에 있는 마음 가운데 편안하고 넉넉하고
행복한 기운들은 모든 이들에게 전해질 수 있도록 하고,
세상의 불행과 험한 상태의 고통과 괴로움을 수반하고 있는 번뇌와
망상 같은 찌꺼기는 다 내 몸속에 들어올 수 있게 하려고 명상하며
숨을 쉬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오늘 대중 참회를 해야 하겠습니다.
내가 청년 시절,
참선하기 위해서 복식호흡법인 단전호흡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숨을 들이마실 때는 천지음양天地陰陽의 기운을 쫘~악! 들이마시고
숨을 내리쉴 때는 내 몸속에 있는 더럽고 탁한 기운들을 쫘~악! 뱉어내라.
그렇게 젊은 시절에 배웠는데, 티베트 불교를 통해서
새삼 부끄러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분들은 세상의 더럽고 탁한 기운은 스스로 가지려 하고,
내 몸속에 정화된 좋은 기운들은 모두에게 나누어 주려 하는
관법을 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하여 여러분께 제안하고자 합니다.
우리들은 보통, 동적動的인 것과 정적靜的인 것, 이理와 사事를,
정신과 육체를 구분 짓는 이분논법二分論法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어떤 이들은 작은 소음에도 아무것도 못 하는 이가 있고,
또 어떤 이는 음악이라도 틀어놔야 무엇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리가 거칠든지 쥐죽은 듯 조용하든지 주변 환경에 상관없이
경계를 찾을 수 있는 야칭스의 수행자들처럼 우리도 정진을 통해서
연민심을 가졌으면 합니다.
우리 사회는 향후 10년이나 20년 안에 평생 한 직장에서 근무할 수 있는
환경은 거의 사라질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 사회 환경은 100세 시대에
살아가게 하는데, 정년은 고작, 60세입니다.
물론 정년을 60세로 가정해 보아도, 전문직에 종사하는 이들조차도
평생 동안 그 일을 하면서 살기는 점점 어려워지고, 이처럼 우리에게는
직장에서 정년을 마친다 해도 집으로 돌아와서 머물러야 하는 시간이
너무 길어졌습니다.
우리가 사회에서 현실적으로 불행한 것은,
긴 시간을 할 일 없이 지내야 하는 그 시간을
막연하게 두려워하고 겁내고 무서워하는 데 있습니다.
부딪힙시다.
일어섭시다.
나아갑시다.
이 사회에는 지혜의 어머니와 방편의 아버지가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할 일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유마경에서 유마거사는,
“나고 죽는 세상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거기 물들지 않고,
번뇌煩惱가 일어나지 않는 열반涅槃의 세상에 있으면서도
생사生死의 바다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 보살菩薩의 행行이다.”고
했습니다.
어디에 살든 우리의 모습 잃어버리지 않고 살 수 있고,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으로 벌벌 떠는 인생을 살지 않으면 됩니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끊임없이 보아왔습니다.
『모든 중생을 사랑하면서도 사랑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보살행이다.』
나고 죽음의 세상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거기 물들지 않고
또 피안彼岸의 니르바나(nirvana, 涅槃寂靜) 세상에 있으면서도
나고 죽는 세상에 그대로 머물러 살 수 있는 삶,
이러한 인생이 우리들의 현실 속에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또 ≪대보적경大寶積經≫에,
『마음 마음 마음이라는 마음은 바람과 같다.
멀리 떠나므로 잡을 수 없으며 그 모습을 볼 수도 없다.
마음은 흐르는 물과 같아 머무르는 일 없이 일어났다가는 곧 사라져버린다.
그러나 파도와 물이 다르지 않듯 물과 거품이 다르지 않듯
우리들은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자기체험이 없으면,
마치 눈먼 장님이 등불을 들어서 남을 밝혀 주지만,
자기 스스로는 볼 수 없고 알 수 없는 것과 같다.』고 하신 것입니다.
《소품반야경小品般若經》에도,
『마음없는 마음이여! 마음이라는 마음이여!
참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한결같은 마음,
분별하지 않는 마음, 시비하지 않는 마음이다.』고 했습니다.
76년도에 통도사 벽암 노스님이 25살의 청년인 정우에게
그늘이 되어 주시고 울타리가 되어주시고 자양분이 되어주신
한편의 글이 있습니다.
정우를 보내고 궁금하던 차, 편지를 받아보고 반겨하였다.
공부를 위한 것이니 아무쪼록 공부를 착실히 하고 돌아와서
통도를 위하고, 또 불교를 위해서 크게 활약하고 훌륭한 승려가 되어라.
우리 불교는 현재 이 사회의 바램을 응수하지 못하고 있다.
젊은 세대는 반성해서 구습을 타파하여라. 이만.
76년 10월 12일 노승 벽암 답
한 장에 담겨 있는 이 한편의 답신答信이 어쩌면 내 평생,
자양분이 되어 주셔서 이렇게라도 살 수 있는
정우를 만들어 주셨다고 믿습니다.
어른들로부터 받은 은혜를 이 시대에 와서 다른 이들에게
얼마나 나누어주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연유도, 앞서 가신 수없는 선지식이
그렇게 사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흐트러짐 없는 견고한 신심信心과 원력願力으로
진지한 삶의 현장에서 나눔을 가질 수 있는 불자로서
더 많은 이들에게 부처님의 법음이 전해졌으면 합니다.
{월간붓다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