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이 지정한 성지가 있다. 세계평화와 자유를 위해 6·25 전쟁에 참전했다가 장렬히 산화한 세계 각국 용사들의 유해가 안장된 곳이다. 유엔사령부가 유엔군 전사자 매장을 위해 조성한 묘지다. 내가 인근의 대학에 재학할 때는 ‘유엔묘지’라 했다. 현재 정식 명칭은 ‘재한유엔기념공원’이다.
기념공원에는 미국, 영국을 비롯한 5개국의 전투병과 스웨덴을 비롯한 5개국의 의료지원국 장병들의 유해가 안장되었다. 전사한 장병들을 나라별로 안장하고 공원을 조성한 후 참전국의 국기를 게양하여 세계평화와 자유를 위한 숭고한 정신을 기린다.
완만한 언덕에 유엔군사령부가 묘지를 조성하려 할 때는 1월이었다. 겨울철에다 인가가 없는 황량한 곳으로, 띄엄띄엄 작은 나무들이 선 나지막한 언덕이었다. 이런 곳에 녹색 묘원을 조성하려는 것이 유엔의 의도였다. 한겨울이라 녹색 묘원을 조성하는 것이, 불가능하여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이때 과감히 나선 이가 고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였다.
용감히 녹색묘지를 조성하려고 나섰지만 난감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녹색을 찾아 나섰다. 녹색을 발견한 곳이, 경남 창원시 낙동강 변의 보리밭이었다고 한다. 파릇파릇한 보리싹을 보고 이것으로 녹색묘지를 조성키로 작정했다. 보리싹을 매입하여 묘지 예정지에 옮겨 녹색 유엔묘지를 조성했다. 봄날 잔디에 싹이 트면 보리싹을 걷어내고 잔디로 바꿔 심으면 될 것이라는 기지가 떠올랐다고 한다. 보리싹으로 그럴듯하게 녹색묘지를 꾸며 유엔군사령부의 승인과 호평을 받았다. 봄이 되어 잔디가 녹색으로 움트자 보리싹과 잔디를 교체하여 녹색 유엔묘지가 조성됐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젊은 시절 이런 지혜와 배포로 조선소를 건립하기도 전에 50원 주화에 새겨진 거북선을 증거로 선박 건조를 수주했다고 하는 일화도 유명하다. 산업발전에 큰 공헌과 발자취를 남기고 타계하신 분이다.
학생 시절, 학교 인근 완만한 언덕에 참전국들의 국기가 펄럭이는 유엔묘지를 바라보며 등하교했다. 묘지라는 선입견과 닦여지지 않은 들길을 걷는 것이 선뜻 내키지 않아 참배를 차일피일하다가 졸업했다. 퇴직 후, 미뤘던 부담을 덜기 위해 오래 벼르던 묘지를 참배했다.
공원 전체에 잘 다듬어진 조경이 경탄할 정도였다. 유해는 나라별로 가지런히 안장되었고 봄 햇살이 묘지 위에 고루 내려앉았다. 자유와 평화를 위해 산화한 전몰 용사들을 위해 묘지를 조성한 유엔의 역할이 고마웠다.
묘지 통로를 따라 걸었다. 비둘기 네 마리가 어디서 날아왔는지 앞장서 아장아장 걸었다. 내가 빨리 걸으면 녀석들도 빠르게 걷고 느리게 걸으면 느리게 걷는 것이 꼭 안내인을 자처한 것 같았다. 평소 주거 인근의 산길에서 비둘기가 날아가지도 않고 앞에서 아장거리면 보행에 방해가 되어 소리를 질러 날려 보냈다. 주거지 환풍기 위에 배설하여 성가시게 하고 청승스럽게 우는 소리가 듣기 싫어 내겐 귀찮은 해조였다. 어쩐지 이곳 비둘기는 평화의 전령사처럼 보였다. 내 발걸음이 보행로 끝에 이르자, 임무를 완수했다는 듯 뒤도 돌아보지 않고 휙 날아갔다.
유엔군 장병들의 영령을 영원히 추모하기 위해 삼각형 지붕을 조성한 추모관이 보였다. 정면은 유리창 대신 스테인드글라스로 전쟁의 참상, 사랑과 평화의 의미를 새긴다. 이곳에서 한국전쟁과 유엔기념공원에 관한 다큐맨터리 영상을 방문객을 위해 상영한다.
주 묘역 아래에 도은트 수로가 보였다. 옥수 같은 물이 흐르는 수로에는 비단잉어 무리가 평화롭게 놀고 있었다. 수로 아래에는 전몰 용사 4만여 명의 이름이 새겨진 추모 명 비가 보였다. 미국 국적의 전몰 병사들은 주별로 이름이 새겨져 있어 자유와 평화를 위한 전쟁의 기록이 철저함을 보여준다. 입구에는 이해인 수녀의 헌시가 새겨져 더욱 경건하고 숙연하다.
“우리의 가슴에 임들의 이름을 사랑으로 새깁니다.
우리의 조국에 임들의 이름을 감사로 새깁니다.”
부산지역 위수부대 병력이 정문과 동문을 지킨다. 주간 경계 근무와 유엔기 게양식과 하강식을 맡아 믿음직스럽다. 영령들과 유엔에 대한 예우인 것 같다.
6.25 전쟁 때에는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벤 프리트 장군 등 장성들의 아들이 참전하여 전사했다. 이들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이다. 온갖 구실로 합법을 가장하여 국방의 의무를 꺼리는 나라의 지도자가 허다하다. 지난날 군 복무를 마쳐야 공직에 취업할 수 있었는데 슬며시 이 제도가 없어져버린 것이 안타깝다. 백령도에 북한이 포격한 피해 상황 시찰에 공교롭게 군에 가지 않았던 고위직이 참여했다. 불에 탄 보온병을 보고 포탄 피(皮)라고 말한 보도를 보고 실소를 금치 못했다.
유엔공원 곁에는 부산의 역사가 담긴 부산박물관, 부근에는 문화와 예술의 전당인 부산문화회관과 부산예술회관이 자리하고 있다. 가까운 곳에는 학문의 전당인 세 개 종합대학이 있어, 학생들의 봉사활동으로 공원의 청결 유지에 도움이 된다. 주변에는 울타리처럼 평화공원과 조각공원이 가꾸어져 있다. 사계절 내내 아늑한 명당이다.
꽃다운 나이에 산화한 영령들이 그들의 유해가 모셔진 곳을, 살뜰히 보살피는 광경을 천상에서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다. 숭고한 희생을 잊지 않을 공원묘원으로서 역사의 쉼터가 되었으면 한다.
첫댓글
다녀 가셨군요. 잘 지내셨나요? 이제 더위도 한 풀 꺾이는 추세입니다.
이럴 때 더욱 조심하셔야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