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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안에 거하라 (요한일서 3.24-29)
의는 바른 관계
지난 주일에 우리는 구원의 길은, 하나님의 뜻을 묻고 찾고 행하고자 하는 순종의 길이어야 한다는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함께 읽은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그 구체적인 순종의 모습이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지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먼저 본문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은 29절 말씀이 나오는 ‘의’라는 단어입니다. 의란 무엇일까요?
29. 너희가 그가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여기서 말씀하시는 그는 우리 주 예수님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의로운 분이시기에, 그 분께 배운 말씀을 자기 안에 품고 있는 사람은 그도 의를 행하는 사람이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의란 무엇일까요? 헬라어로 의는 ‘디카오쉬네’ 라고 부릅니다. 이 말에서 공정함, 정직, 관대함 같은 말들이 파생되어졌다고 보는데, 한마디로 말하자면 의는 바른 관계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모두 관계 속에 삽니다. 관계란 서로 다른 존재가 만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삶은 자아와 세계와의 투쟁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 관계를 투쟁이라고 이해하는 사람도 있고, 협력이라고 이해하는 사람도 있겠습니다만, 어쨌든 우리는 모두 나라고 하는 자아와 나 아닌 모든 것 즉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관계가 건강하고 바른 관계일 때 그러한 모습을 일컬어 ‘의’라고 부릅니다.
삶은 곧 관계라고 정의할 수 있는데, 그 관계를 크게 세 가지 관계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 관계 속에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관계가 포함된다고 볼 수 있기에, 이 세 가지 관계가 곧 우리 삶을 규정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경외
첫 번째 관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사람은 모두 하나님과 어떤 형태로든 관계를 맺고 삽니다. 누구도 예외는 없습니다. 다만 어떤 이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식하고, 또 어떤 이는 보이지 않기에 무시할 뿐입니다.
최근 저는 어떤 청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야기 중에 올해 29살인 그 청년이 산티아고 순례를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시는 대로 산티아고 순례길은 스페인의 산티아고 성당에 묻혀있는 야고보 사도의 무덤을 향해 걸어가는 오래된 순례길입니다.
유럽 각지에서 산타아고 성당을 향해 가는 길이 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코스는, 프랑스의 생장피드포르라는 곳에서 출발하는 장장 800km에 달하는 길입니다. 이 길을 도보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부지런히 걸어도 40일 이상이 소요되는 긴 여정입니다.
이 여정은 관광이 아닙니다. 그 길에는 변변한 위락시설도 없을뿐더러 매일 자기 육체의 한계와 싸워야 하는 고단한 여정입니다. 발은 부르트고, 배낭을 맨 어깨는 욱신거리고, 햇빛 아래 땀을 흘리고, 비를 맞으며 그렇게 걸어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이 길을 걸어가는 것일까요? 무슨 이유로 이런 고생을 자초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영혼의 갈망이라는 말이 아니고는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이 속한 익숙한 세계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무언가를 찾기 위해 부러 낯선 세계를 걷는 것입니다.
흔히 삶의 의미라고 부르는 그 찾고자 하는 대상을 저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르든, 결국 그들 모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찾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제가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을 가리켜 하나님을 찾는 것이라고 보는 이유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의식되어지는 순간부터 삶이 의미를 회복하기 때문입니다. 살아온 이유 살아갈 이유가 분명해지고, 살아있음이 참 다행스럽게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삶 자체가 엄숙하고 복된 그 분의 명령이라는 것이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을 성경은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라고 표현합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로, 자기 안에 있는 영혼의 갈망,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틀어막고 보이는 세계 안에서의 삶에만 몰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그러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어떻게 더 인정받을 수 있을까?’ 그런 관심으로 자기 영혼의 갈망을 막아버린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가끔 TV나 영화에서 술을 마시고 미친 듯이 노래하고 육체의 쾌락에 탐닉하는 이들의 모습을 봅니다. 역설적이지만, 저는 그런 장면에서 그 영혼의 갈망을 보는 것 같습니다. 보이는 세계에 몰두해 사느라고 궁핍해진 영혼들이 그 빈 가슴을 무엇으로든 채워보려고 몸부림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위로는 충분하지 않아서 몸부림은 자꾸 반복되고 그럴수록 자신은 더 초라해지고 삶의 의미는 점점 사라져갑니다. 작가 밀란 쿤데라의 말처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느껴지게 됩니다.
그때는 저 너머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저 너머에 계시는 보이지 않는 분을 향해야 합니다. 사람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영적인 갈망이 해소되지 못하면, 아무리 잘 먹고 잘 살아도 뭔가 빠져있는 삶이 됩니다. 흔히 사람들은 그것을 삶의 의미를 잃었다고 표현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사람의 마땅한 태도를 성경은 ‘경외’라고 표현합니다. 경외를 굳이 예배나 찬양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계시는, 모든 존재의 근원이신 분을 의식하는 모든 행위와 몸짓을 경외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늦은 밤 홀로 조용히 앉아 촛불 하나를 켜봅니다. 가만히 그 불꽃을 바라봅니다. 이런 순간도 경외가 될 수 있습니다. 보이는 세계를 감싸고 계시는 보이지 않는 분을 향하기 때문입니다.
산을 오릅니다. 정상에서 구름에 덮인 산자락들을 바라보니, 장엄함에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그 순간도 경외의 순간이 됩니다. 혹은 밀레의 그림처럼 석양이 지는 들판에서 감사의 기도를 드리기 위해 두 손을 모으는 순간도 경외입니다.
그 곳이 어디든, 눈을 들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하고, 나와 세계가 그에게서 왔음을 기억하고, 그 깊은 관계성을 느끼는 모든 순간이 다 경외입니다. 그리고 이 경외는 친밀함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보이지 않지만 그 분이 아주 가까이 계심을 느끼게 되곤 합니다. 이것은 거리가 가깝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까운 분 즉 따뜻하고 자애로운 분으로 느껴진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사람은 모두 하나님과 어떤 형태로든 관계를 맺고 삽니다. 누구도 예외는 없습니다. 어떤 이는 경외하고, 어떤 이는 무시할 뿐입니다.
보이지 않는 분을 향한 경외가 사라지면 삶은 그 생기와 의미를 상실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없이도 즉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서도 시간은 흐르고 삶은 계속됩니다. 그러나 그 삶은 더 이상 생명의 삶은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영원이 둘러싸고 있지 않은 삶은 삶 자체가 하나의 짐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므로 경외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안타깝지만 예배 중에도 경외가 사라질 수 있습니다. 방심하면 예배 행위가 사람들에 의해서 진행되는 공연처럼 될 수도 있습니다.
항상 보이지 않는 분이, 여기 우리의 시간과 공간 그리고 모든 사건과 만남들의 배후에 계시다는 것을 의식해야 합니다. 그래서 옷깃을 여미게 되고, 언행에 신중해지는 순간이 다 예배이며 경외가 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식하고 겸손히 서는 것이 경외이며 그 경외가 바로 디카오쉬네, 의입니다.
수용
모든 사람은 하나님과 경외 혹은 무시의 관계를 맺습니다. 그것이 모든 사람이 맺는 첫 번째 관계라면, 모든 사람이 맺는 두 번째 관계는 바로 자신과의 관계입니다.
모든 피조물 가운데서 사람이 가진 특별함 중 하나는, 자신을 가리켜 너라고 부를 수 있다는데 있습니다. 즉 자신을 상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사람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자기 자신과의 관계 속에 살게 되는데, 이 관계는 사람의 삶에 아주 깊은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저는 제 자신이 과거에 비해서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어느 때보다도 지금의 제가 좋습니다. 어린 시절도 그립고, 20-30대의 젊은 날도 한번쯤 돌아가고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제 자신이 제일 마음에 드는 시간은 지금입니다.
제가 과거에 비해 더 고상해졌거나 도덕적인 성취를 이루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점은 별로 다를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20대가 도덕적으로 더 순수했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지금의 제 자신이 가장 마음에 드는 이유는, 제가 제 자신을 드러내는 일에서 좀 더 자연스러워졌다는 점입니다.
얼마 전 남녀선교회 수련회에서 우리는 춤 테라피 시간을 가졌습니다.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몸을 흔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리고 목사인 저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과거에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과거의 저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짐짓 점잔을 빼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과거의 점잖은 제 모습 속에는 사실 감추어져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점잖아서가 아니라 나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마음, 내 자신이 드러날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숨어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감추려는 마음 깊은 곳에는 늘 자신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자기혐오가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내가 보기에도 초라한 나, 내가 보기에도 부끄러운 나를 누구 앞에서 드러낼 수 있었겠습니까? 짐짓 점잔을 빼고 있었지만 사실은 내가 나의 초라함과 무능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과거에 정말 초라하고 부끄러움을 느낄만한 사람이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제가 저를 그렇게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 보다 자연스러워진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인데, 어느 순간부터 제가 그런 제 자신을 받아들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과거에 비해 유능해졌거나 거룩해졌거나 더 고상해진 것은 아닙니다. 다만 나의 무능함을, 나의 조급함을, 나의 우유부단함을, 그리고 나의 도덕적인 모순을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그게 나다.’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못난 나를 사랑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런 나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문제가 안 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직도 감정을 잘 다스리지 못하고 곧 후회할 만한 일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도 너무 절망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이 저의 현재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는 아직 이런 아이입니다. 저를 도와주세요.’ 그리고 가급적 빨리 인정하고 사과하려 합니다.
자신의 허물과 실수에 지나치게 실망하거나 혹은 그런 자신의 부끄러움과 약함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너무 애쓰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삶의 영원한 동반자인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입니다.
우리는 아무도 없는 곳으로 피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소리가 들리지 않고 인기척이 느껴지는 않는 시간과 공간으로 물러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서도 늘 함께 있어야 하는 존재는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먼 여행을 하는데, 같이 다녀야 하고 한 방을 써야 하는 동반자가 불편하다면 그 여행이 어떻게 즐거울 수 있겠습니까?
자신이 아이임을 인정하고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태도, 그런 자신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삶의 두 번째 관계에서 이루어야 할 디카오쉬네 즉 의입니다.
공감
우리가 삶에서 맺게 되는 세 번째 관계는 모든 타자와의 관계입니다. 제가 타인이라고 하지 않고 타자라고 표현하는 것은, 우리가 관계 맺는 대상이 꼭 사람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나를 제외한 모든 대상이 바로 이 세 번째 관계의 대상이 됩니다. 하늘도 땅도 산도 나무도 새도 짐승도 그 모두가 우리가 관계하는 타자입니다. 그러나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관계의 대상은 바로 다른 사람들입니다.
이 세 번째 관계에서 디카오쉬네, 바른 관계는 어떤 것일까요?
주님께서 이 땅에서 공생애를 사실 때, 주님의 마음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복음서의 한 구절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9장 35-36절입니다.
35.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주님께서 천국복음을 전파하시고 모든 병자를 고치시고 결국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쉬지 않으셨던 그 사역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불쌍히 여기시니’ 입니다. 모든 존재를 향한 연민과 긍휼이 주님 사역의 동기였던 셈입니다.
주님은 이로써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타자와의 관계에서 디카오쉬네, 바른 관계는 바로 ‘불쌍히 여김’ 즉 긍휼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풀어서 쓰면, 남의 아픔에 공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 아픔은 아니지만 남의 아픔과 눈물을 보면서 함께 아파하는 것, 이것이 모든 타자와의 관계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바람직한 태도입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웃는 자들과 함께 웃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권면합니다. 이것이 모든 타자와의 관계를 여는 열쇠가 됩니다.
우리가 곧 수요독서모임에서 읽을 책은 서강대에서 영문학을 가르치셨던 고 장영희 교수가 쓴 ‘문학의 숲을 거닐다’입니다. 그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암 치료를 위해 대학병원 방사선 치료실 앞에서 기다리던 장영희 교수는 환자복을 입은 예닐곱살 난 남자아이를 만나게 됩니다.
유난히 흰 얼굴에 파리하게 깎은 머리가 안쓰러워 보이는 아이는 옆자리에 앉더니, 그녀와 그녀의 목발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드디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묻습니다. “아줌마, 이 목발들을 짚어야 걸을 수 있어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럼 어깨가 너무 아프겠어요.”
병원에서 돌아온 장영희 교수는 그 아이가 어린왕자였다고 생각합니다. 자신도 소아암과 싸우는 아픈 환자이지만, 남의 고통이 그 눈에 보였던 아이, 저마다 살아남기 위해 무관심과 이기주의로 무장한 이 세상에서 마음의 눈으로 남의 아픔을 알아보는 어린왕자였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참으로 성숙한 사람은 하늘의 아픔 땅의 아픔을 느끼고, 산허리가 잘려나가고 강이 파헤쳐질 때 그 비명소리를 듣는 사람입니다. 나무와 새와 짐승들의 탄식소리는 말할 것도 없고, 무엇보다 내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사람일 것입니다. 아프다고 우는 사람을 보면 ‘아! 아프겠구나! 힘들겠구나!’ 그렇게 공감해주는 사람입니다.
7일 동안 욥과 함께 울어주었던 세 친구들처럼 말입니다. 그것이 타자와의 관계에서 우리가 이루어야 할 디카오쉬네입니다.
그의 안에 거하게 하라
본문 24절은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처음부터 들은 것을’ 이라는 표현은 영지주의자들과 같이 그릇된 가르침을 전하는 이들의 말에 현혹되지 말고, 사도들을 통하여 주님께서 보여주시고 가르쳐주신 그 본래의 말씀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4절의 이어지는 말씀은 더욱 흥미롭습니다.
24.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하리라.
주님께서 보여주시고 말씀하셨던 그 본래의 말씀을 가슴에 품고 살면 그것이 바로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와 매우 비슷한 말씀을 요한은 이미 그의 복음서인 요한복음 15장에서 기록한 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유명한 포도나무와 가지의 이야기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너희가 내게 붙어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거기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즉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곧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보여주셨고 들려주셨던 그 말씀이 우리 안에 있으면 그것이 곧 우리가 주님 안에 있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그리스도 안’이라는 말도 그런 의미를 담고 있는 말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이 보여주시고 들려주셨던 말씀, 그래서 사도들이 우리에게 전하여준 그 말씀을 가슴에 품고 살면, 그것이 곧 주님 안에 사는 것이며, 이렇게 주님 안에 사는 사람은 주님이 의로우신 분이시듯이 그도 의를 행하는 사람이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것을 요한복음 15장은 열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이처럼
저는 인간의 성숙과 신앙의 성장은 정확히 비례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이 같은 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성숙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마태복음 18장에서 주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1.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2.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3.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
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주님은 우리가 되어야 할 사람의 모습을 어린아이라고 하십니다. 아이처럼 되는 것이 신앙의 삶이 지향하는 목표라는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경외, 자기 수용, 공감 이것이 바로 아이들의 모습이 아닌가요? 오히려 어른들이 어리석게도 보이는 것만 믿으려 하고, 자기를 못마땅해 하면서 감추고, 남의 아픔에 아랑곳하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아이들은 보이지 않아도 믿고, 자기를 드러내고 도움을 청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한 아이가 다치면 다 모여들어서 같이 걱정하고 아파합니다. 심지어는 집에서 키우는 짐승이 아파도 우는 게 아이들입니다.
아이처럼 되는 것이 바로 의로운 사람 즉 천국에 합당한 사람이 되는 길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려면 ‘그의 안에 거하라.’는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