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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설교에 대해 –
설교의 2대 요소
Information 정보 | Impression 감동 | |
지성적인 요소+ | 정서적인 요소 | =의지적 결심 |
내용 | 전달방식 | |
무엇을 전할 것인가? | 어떻게 전할 것인가? | |
주석,연구 | 설교학, 강연 |
몇 시간의 대지를 통해 뭔가 새로운 기별이 전달돼야 하죠.
두 번째는 Impression 설계는 굉장히 정서적인 서정적인 전달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이 Information이라고 하는 다분히 지성적인 요소와 Impression이라고 하는 다운의 정서적인 요소 이 두 가지 요소가 이루어질 때 마침내 인간으로 하여금 사람으로 하여금 결심을 하게 하는 그런 의지적인 열매를 도출하게 되죠.
그래서 그 의지적인 오늘 이제 하나님 뜻대로 살아야 되겠다 이제나 선생님 말씀대로 살아야 되겠다 하고 결심하게 하려면 Information & Impression 이 두 가지 요소가 다 작동을 해야 되는데 Information이 소위 내용에 관한 부분이라면 Information은 전달 방식에 관한 요소겠죠.
그래서 Information오늘 우리가 관심 있는 부분이 이 Information을 어떻게 얻어내느냐 하는 부분이죠.
Impression에 초점을 두고 우리가 듣는 수업이 설교학 혹은 강연법, 이런 거죠.
이 시간은 우리가 설교법 시간이나 강연법 시간이 아니고 말 그대로 이제 주석시간입니다.
설교학의 2대 과제라기보다 설교의 2대 과제
그래서 무엇을 전할 것인가? 어떻게 전할 것인가? 두 번째 Impression에 관한 부분이 오늘의 관심사는 아닙니다만 살짝 이제 짚어보고 한번 이 두 가지를 다 서론에서 간략히 짚어보고 넘어가 보겠습니다.
Information은 from God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Impression to people 사람에게 전달하는 거죠.
사람에게 어떻게 전달하느냐가 중요해요.
그런데 근원적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뭔가 메시지가 있어야 되거든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게 없는데, 사람에게 뭔가 전하려고 하면 이제 만들어지는 거죠.
내가 맨날 신학 속에 있을 때 신학과 1학년 학생들에게 1년 동안 신학생 됐다고
“집에 가면 설교하라고 그럴 텐데 절대로 설교하지 마라.
무슨 일이 있어도 설교하지 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기별도 없는데 뭘 이야기하라고 그러면 뭔가 말하기 위해서 다 말 만들고, 신문 쪼가리 가지고 무슨 정보 모집하고 인터넷 가서 뒤져보고 글 모으고 이런 거 절대로 하지 말라”
10년 동안 학생들한테 강조했던 이유도 이런 것 때문에 그렇죠.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기도를 받아서 사람에게 어떻게 전달하느냐
오늘은 이에 관한 부분은 우리가 언급을 안 하죠.
여하튼 이 두 가지 요소의 중요성을 확인해 보면 예를 들어서 Information이 없으면 굉장히 지성적으로 공허하죠.
반대로 Impression 이 없으면 정서적으로 건조합니다.
그렇죠 근데 정보만 전달하면 사람의 가슴에 닿지 않아요.
그 다음에는 Impression만 전달하면 그저 박수 치고 감동만 주고 교훈이 없죠.
저는 여기 음악하시는 분들이 계신지 모르겠습니다만, 요청할 때 특창하고 예배 같이 참석 안 하고 특창만하고 갈 사람에게는 특창시키지 말라고 그럽니다.
그러면 노래 부르고 쓱 가버리면 좀 공연하고 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죠.
그렇죠 기별을 받아야 되는데 노래만 주고 가버리는 거죠.
설교도 마찬가지죠.
감동 한 번 주고 아무런 메시지를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메시지가 전달하는 게 없거나 전달받는 게 없는 것은 대단히 건조해지죠.
설교가 뭐냐?
근본적으로 우리가 오늘 이 시대에 설교라고 말할 때는 다른 게 아니죠.
“하나님께로부터 우리가 영감을 통해 꿈과 계시로 직접 지배를 받는 게 아니기 때문에 결국 화가 하나님께로부터 기별을 받는다라는 말의 의미는 오늘 이 시대에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성서 텍스트를 해석해야 되는 거죠.”
그다음에 Impression을 전달한다는 말은 뭐예요?
그는 청중들이 그들 나름의 라이프 세팅, 삶의 배경 속에서 처해 있는 그들의 context 성경의 text를 해석하고 그다음에 청중의 context를 해석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본문주석은 잘 하는데, 청중 주석을 전혀 못해가지고 지금 조는지 자는지 다른 생각하는지 아무 분석 안 해가지고 그냥 혼자서 막 이렇게 나가는 수가 있죠.
텍스트는 결국 성서 텍스트를 해석하고 청중 context를 해석해서 Information 정보를 전달하고, 하나님께로부터 혹은 성서 텍스트로부터 온 Information 정보를 Impression을 실어서 백성에게 전달하여, 흔들리는 사람은 위로하고 또 아무 생각 없이 제 자리에 딱 주저앉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은 뒤흔들어 놔야죠.
설교는 두 가지 개념을 다 해야 됩니다.
“나는 살 가치가 없어! 나 같은 인간이 뭘 해야 돼! 이런 사람은 아니야 이래서 살 만한 거야 하고 딱 채워줘야 되고,
나 정도면 됐지! 내가 뭐 부족하다고 난 이 자리에서 이렇게 나를 굳히고 살 거야 하는 사람에게 그렇게 살면 되겠어! 하고 흔들어놔야지
이 두 가지 기능을 다 1시간 안에 수행해내야 하는 거거든요.
이것이 설
교다. 설계에 대한 정의를 먼저 하고 근본적인 문제들 본질적인 문제를 한번 짚어보고 시작하려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1-2)
그 설교가 뭐냐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①하나님께로부터 온 Information을 ②사람에게 ③Impressive 하게 전달하는 거라면 그럼 설교는 뭐가 아닌지를 확인해 봐야 되겠죠.
설교는 개인 간증 요소나 경험담의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만 간증이나 경험담이 아니죠.
설교는 신학 강론이나 철학 강론이 아닙니다. 많은 경우에 특별히 대학에 있는 분들이 크게 잘못하는 경우 중에 하나가 설교를 강의로 오해하게 만드는 거죠.
차라리 어느 이론에 대한 학자들의 의견을 이름을 인용하지 않았었더라면 감동이 있었을 내용을 학자들의 이름을 인용함으로써 본인의 학문적 지식을 데몬 스트레이트 한 것 같은 게 이렇게 막 이렇게 무슨 쪽 무슨 쪽 이렇게 하면서 강의하는 철학적, 사상적, 물론 이 청중이 특정 청중일 때 그렇게 할 수는 있어요.
근데 늘 설교를 그렇게 하는 건 아니죠. 마찬가지로 종교적 연설이나 토크쇼도 아닙니다.
개인에 대한 독담과 미담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죠.
특정 대상을 놓고 질책하는 것도 아닙니다. 더군다나 도덕적 훈계나 권고도 아니죠.
특별히 어떤 관계 특강이나 처세술 특강이 아닙니다.
그런 요소를 갖고 있지만 그것만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 반드시 하나님께로부터 온 기회를 전해야 하지요.
한마디로 설교는 지금까지 드린 말씀을 다 요약하면 하나님의 기별에 대한 케리그마, 선포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하나님의 기별에 대한 선포! 즉 캐리그마가 뭐가 전달되기 위해 우리는 앞에서 말했던 간증 연설 그다음에 덕담 때로는 경고 질책 이런 것을 포함시킬 수 있지 캐리그마가 없는 채 그렇게만 전하면 자기 이야기되는 거예요.
자기 사상 전달이나 되는 거고 자기 이론 전달이나 되고 마는 거지요.
결국 설교는 성서 텍스트에 대한 해석을 통해 새로운 진리를 제시한 것입니다.
이 사진은 내가 40대 초반에 삼육대학교에서 교목으로서 기도 주일을 진행하면서 그때 찍었던 사진입니다.
제가 저도 이런 때가 있었습니다. 벌써 20년 전입니다.
이제는 설교에 대해 살펴봤다면 그러므로 설교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이별을 선포하는 케리그마라고 그러잖아요.
설교가 하나님의 기별에 대한 케레그마라면 그것을 전하는 설교자는 누굽니까?
한마디로 설교자는 메신저죠. 스토리 텔러가 아닙니다.
절대로 스토리텔링의 기능을 포함하고 있기는 하지만 설교는 절대로 설교자는 절대로 스토리 텔러가 아닙니다.
그건 철저하게 메신저이죠. 설교자가 메신저라고 정의하는 순간 무슨 뜻이 되나요?
*메신저는 메시지가 없으면 할 말이 없어지는 사람들입니다.
설교자는 메신저입니다. 메신저는 메시지가 없으면 할 말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메시지가 없는데 뭔가를 말하려고 하면 그게 스토리가 되고 강연이 되고 감각이 되고 토크가 되고 이제 이렇게 되는 거겠죠.
결국 설교자가 메신저 하면 강연법이나 설교 법이 아니라 메시지가 있느냐 없느냐로 설교자가 캐리그마를 전하는 메신저이냐 아니냐가 결정되는 사람들이다 이런 뜻이 되겠죠.
설교자는 메신저다. 메신저는 메시지가 있느냐 없느냐로 정체성이 결정된다.
메시지가 없으면 그 메신저가 아니고 강연자가 되는 것이다.
자기 일은 강연자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기별이 아니니까.
결국 그렇다면 이 시대 우리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하나님께로 받은 바 메시지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는 결국 이상을 받았느냐의 문제가 아니고 결국 누가복음 10장 26절에 주님께서 던져준 질문처럼 내가 어떻게 읽느냐? 성경을 어떻게 읽느냐? 어떻게 성경을 읽고 성경 텍스트에서 어떻게 기별을 도출해내느냐? 바로 이 문제 때문에 우리 오 목사님이 내게도 주문한 주제가 목회자들이 다 바빠서 주석 설교할 시간이 없는데 제목 설교가 아니라 주석 설교를 어떻게 할 수 있는 지라고 물었던 관심에 초점이 포크스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관심사에 대해 성경의 구절들을 모아서 내가 가진 생각을 성경 구절로 뒷받침하고 내가 가진 관심사를 성경 구절들을 이용해서 모양을 갖춰 전달할 수는 있어요.
그것은 결국 성경 텍스트, 성경 텍스트를 감싸고 있는 그 텍스트에 깊고 높고 오묘한 세계 속에서 끄집어 내는 것은 아니고 내가 가진 관심사를 성경 구절들로 꾸미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누가복음 10장 26절 내가 어떻게 읽느냐 하는 문제는 우리들에게 던져주는 큰 도전이 되겠죠.
결국 설교는 그런 의미에서 본문을 어떻게 받느냐, 본문을 어떻게 읽었느냐, 본문을 어떻게 해석했느냐 하는 열매를 백성에게 전달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내가 늘 해석학을 강의할 때 했던 말 하나를 잠깐 쉬어가는 페이지로 언급해 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성경 해석은 설(設)풀이” 이렇게 말하기를 좋아했습니다.
설풀이 설 맞습니다. 설 설풀이하니까 어디서 많이 듣던 이거하고 비슷한 느낌이 들죠.
무녀들 그런 사람들을 살풀이한다 그렇게 하잖아요.
이 살풀이한다는 말이 참 의미가 있어요. 살(殺)자 이렇게 한이 있고 원한이 있고 분노가 있고 이런 걸 다 해가지고 살풀이해서 사람을 평화롭게 살게 한다.
말씀을 잘 풀어서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바 기별을 백성들에게 전해주고 백성들이 뭐라고 반응해요?
은혜받았습니다. 이렇게 표현하죠. 은혜 받았다 하는 순간, 뭐가 풀어진 거예요?
그들이 안에 품고 있던 고난과 한과 아픔과 갈등 같은 살(殺)이 풀어지는 거죠.
우리들은 매순간 백성 그 기별을 통해 백성들의 살(殺)을 풀어줘야 돼요.
그러니까 말씀 풀이를 통해 설(設) 풀이를 통해 백성들의 살(殺)풀이를 해 줘야 하는 거죠.
이 “은혜받았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헤쳐 줘서 풀어줘야 하는 거죠.
지금 드렸던 말씀을 다시 반복하면
성경 텍스트와 설교자는 성경 텍스트와 백성들의 삶의 context, 지금 내 설교를 들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어떤 상황 속에 있는지 context를 붙잡고 텍스트와 내가 지금 보고 있는 본문 텍스트의 세계와 지금 백성들이 처해 있는 그 삶의 context사이에 오고 가는 그 두 세계의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별을 통해 이 백성들에게 전달되는 어떤 빛이 그들의 설을 통해 살이 풀어지도록, 설을 풀어서 살이 풀어지도록 그 두 텍스트를 붙잡고 설교자는 그 가운데서 몸살을 하는 거죠.
씨름을 하고 때로는 머리를 싸매고 가슴을 쥐어뜯으면서 그 문제를 풀어주고자 문장 하나하나를 다듬는 거죠.
모르겠어요. 많은 설교자의 어떤 유형도 있고 나름의 어떤 방식들도 있고 있겠습니다만 저는 개인적으로 설교 본문 없이 단상에 성경 한 권 탁 들고 올라가가지고 성경책 본인이 다 외웠다는 식으로 그냥 들고 내리 설교하시는 분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평생 이 강단에서 우리 신학교들에게 강의하면서 여러분들도 여러분 나름의 특징을 가지고 말씀을 전달할 수 있겠지만 화잇이 분명히 설교 본문에 얽매이지 말고 너무 완벽하게 준비하여 성령께서 역사할 요지를 차단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다.
근데 그것은 우리에게 아주 많은 정성을 기울여 준비했다는 걸 전제로 주시는 말씀이니 본문을 완전히 준비하고 다듬고 또 다듬어서 준비한 다음에 본문에서 그 설교 원고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마음으로 설교를 전했으면 좋겠다.
주님이 마태복음 13장에서 해변 설교를 하시죠. 마태복음 5장부터 6~ 7장에서 소위 산성 보훈을 하신 다음에 13장에 가보면, 해변에서 이 배를 띄우고 배를 배에 타시고 회중을 딱 바닥 갈릴리 바닷가에 이렇게 앉은 상태에서 천국은 천국은 천국은 쭉 말씀하시다가 제 끝에 마지막은 천국은 마치 이렇게 하지 않고 마지막 마무리에서 천국의 제자된 서지관마다 이렇게 하죠.
그래서 마태복음 13장에 천국 본질에 대한 비유를 통해 천국 본질에 대한 설명을 하십니다.
제일 마지막에 천국에 대한 설명이 아니고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에 대한 설명이 나오죠.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마 13:52)
“진리의 큰 보고(寶庫)는 하나님의 말씀 곧 기록된 말씀과 천연계의 책과 하나님께서 사람의 생애를 취급하시는 경험의 책 등이다. 이들 보고에는 그리스도의 일꾼들이 꺼내야 할 보화가 들어 있다. ”(실물, 125)
화잇은 실물교훈에서 곳간이 3개라고 그랬죠. 하나는 우리 개인의 신앙 경험의 곳간, 둘째는 천연계, 기록된 말씀의 곳간, 그러니까 천국에 비유해서 마태복음 13장에 비유해서 하늘의 속성에 대한 하늘의 본질에 대한 주님의 설명 다음에 마지막 그 마무리를 천국의 제자의 본질에 대해 설명했어요.
천국의 제자의 본질이 뭐냐 곳간에서 뭘 꺼내오는 건데 꺼내오는 게 뭐죠?
새것과 옛 것이에요.
우리 신앙 경험이 옛날 뿌리 된 것도 있지만 지금 오늘 여기서 또 경험되는 게 있어야 되고 세상을 바라보면서 이제 세계관이 되겠죠.
그렇게 되면 인생을 바라보는 눈은 인생관이 될 것이고 세계를 바라보는 세계관이 되겠죠.
그다음에 극복한 세 번째가 성경이라고 그랬잖아요.
소위 계시 성경에 대한 우리 성경과 계시가 그런 경험이 되죠.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옛날 설교, 옛적 설교도 해야지만 끊임없이 새 것을 건져내야 되죠.
실물교훈 131쪽 화잇은 바로 이 본문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는 같은 설교를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며 그의 마음은 성령의 비추어 주심을 받기 위해 끊임없이 열려 있을 것이다....힘 없이 되풀이되는 사상은 사라질 것이며 지루하고 재미없는 설교는 그치게 될 것이다. 옛 진리를 말할지라도 그것이 새로운 뜻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실물, 130)
다시 이 부분을 영어로 읽으면 훨씬 더 생생합니다.
We should not be satisfied to use the set discourses that we have preached over and over for the last ten, fifteen, or twenty years. We should draw fresh, new matter from the store-house of God's Word. We are desirous that the angels of God may impress the mind; that there may be glorious unfoldings of the truth; that it may be presented in the demonstration of the Spirit; that it may be meat in due season to the flock of God."-RH, June
4, 1889. [Ellen G. White, Pastoral Ministry, 187]
우리는 지난 10년 동안 15년 동안 20년 동안 반복하고 반복했던 그런 계속 설교했던 한 세트처럼 했던 어떤 그 연설들로 만족할 수는 없다.
신선한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 깊은 해석을 어떻게 해내느냐 결국 이게 그게 우리의 근본적인 도전 과제죠,
우리가 보통 설교를 제목 설교, 주제 설교, 강해 설교, 주석 설교 이렇게 표현하죠.
그 각각의 설교가 어떻게 하는 것인지에 대한 설명은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우리 주석 설교와 제목 설교와 주제 설교와 강해 설교와 주석 설교를 해놓고 여러분의 생각을 보시면
제목은 말 그대로 내가 관심 있는 주제를 하나 놓고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성경에 본문들은 내가 활용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 그리스도인의 성실 이렇게 제목을 붙였다.
믿음으로 사는 삶, 그럼 그 제목에 맞춰서 내가 인용하는 성경 구절들이 어떤 그 텍스트 예를 들어 요한복음 3장 16절이 3장 15절과 17절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아무 관심 없어요.
그냥 3장 16절 하나 딱 인용하고 또 창세기 가서 인용하고 출애굽기 가서 인용하고 쫙 성경절을 모으는 거예요.
옛날 우리가 연결식 성경 교리 공부 많이 했던 그 방식입니다.
그 다음에 주제 설교는 제목 설교보다는 조금 텍스트와 가깝습니다.
성경에서 같은 주제에 텍스트를 모은다고 하는 차원에서
강해 설교는 텍스트에 집중합니다만 회중들의 칸 텍스트를 더 깊이 고려하면서 적용을 계속 의식하면서 하는 거죠.
물론 주석 설교도 그렇게 합니다. 근데 주석 설교는 좀 더 텍스트에 집중하죠.
그런 의미에서 소위 설교자와 본문 사이의 관계를 순서대로 표현한다면 제목 설교는 설교자의 관심사와 가장 가깝습니다.
설교자 | 본문 | ||
제목▶ | 주제▶ | 강해▶ | 주석 |
성서 텍스트 나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정말 말씀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라고 하려면 주석적 관심에서부터 비롯될 때 우리는 가장 텍스트로부터 더 깊이 더 넓게 케리그마를 찾아낼 수 있죠.
여기까지 강의를 듣고 나니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듭니까? 아이고야 부담이 커지니까 도전을 받습니까?
이제 근본 아주 근본적인 문제로 그러면 이제 주제 설교에서 벗어나서 적어도 강해설교나 주석 설교를 통해 본문의 뜻을 바르게 나타낼 수 있을까? 우리가 다 알고 싶은 것은 방법론이잖아요.
어떻게 본문으로부터 기별을 끄집어내느냐 하는 방법이 바로 관심이 우리들의 관심이니까
그렇게 하려면 성경 텍스트에 대한 이해부터 선행되어야 하죠.
모든 텍스트는 다음 같은 세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①TEXT
②TEXTURE
③CONTEXT
이 안에 텍스트가 있어요. 근데 모든 텍스트는 TEXTURE가 있습니다.
참 영어 표현이 기가 막혀요. TEXTURE라는 말이 무슨 뜻이죠?
직물로 비유한다면 모든 직물을 씨줄과 날줄이 있어요. 하나의 옷이 되려면 반드시 날줄과 씨줄이 있어요.
어떤 텍스트도 날줄과 씨들이 없는 텍스트가 없어요.
다시 말해 TEXTURE가 없는 텍스트가 없습니다. 이 TEXTURE가 발견되지 않으면 텍스트를 바로 이해할 수가 없어요.
이게 목회자들하고 평신도하고 다른 부분이에요.
이게 신앙을 공부하시고 그저 성경 내용을 읽거나 혹은 증언의 말씀 그냥 읽어서 내용 중심으로 꾸며가는 사람들하고 이걸 전문적으로 이 부분을 공부한 사람들하고 결정적인 차이예요.
TEXTURE를 알아야 텍스트가 보이거든요. 그래서 이 텍스를 찾아내는 것을 이제 이해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그 모든 텍스트를 감싸고 있는 제일 바깥에 뭐가 있냐면 컨텍스트가 있어요.
모든 텍스트에는 컨텍스트가 있어요. 무슨 말이에요?
롯이 성문에 앉아 창세기 19장에 예를 들어서 그런 말이 있을 때 롯이 성문에 앉았다 이렇게 말하면 그 시절에 성문에 앉았다는 말이 그 시절에 어떤 역사적 정황을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한 한 컨텍스트가 있거든요.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날이 뜨거울 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창 18:1)
“저녁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아 있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려 절하며”(창 19:1)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은 장막문에 앉았고, 창세기 19장 1절은 롯은 성문에 앉아 있어요. 히스토리컬 컨텍스트만 알면 이것이 전혀 다른 이야기라고 하는 사실을 금방 캐치할 수 있어요.
근데 이걸 모르면 성문에 앉으면 어떻고 장막 문에 앉으면 어때요?
그냥 그렇게 앉아 있다가 천사 만났나 보다 이제 이렇게 끝나는 거죠.
이런 부분들 역시 전문적으로 성경을 살펴보지 않는 일반인들은 쉽게 캐치할 수 없는 내용들인 거죠.
그리고 어쩌다가 전체적으로 보지 않고 어쩌다가 이런저런 자료 하나에서 그런 걸 보고 나면 그쪽으로 확 꽂혀가지고 그게 전부인 것처럼 또 이렇게 붙어서 너무 치우치게 강조하고 읽게 되고 또 이렇게 되는 거죠.
텍스트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TEXTURE를 이해해야 되고, TEXTURE를 보려면 반드시 칸 텍스트를 이해해야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한 것이 결여되고는 주석을 친절하게 해낼 방법은 사실 없습니다.
텍스터를 어떻게 찾아낼까? 그 칸텍스트를 어떻게 찾아낼까? 결국 이런 모든 과정을 거쳐서 우리는 신선하고 새로운 어떤 기별을 백성들에게 보이게 되죠.
제가 모든 주석 수업에 늘 하는 말 “나에게 새롭고 신선한 기별을 보여달라.”
제가 어떻게 교수라고 해서 모든 걸 다 알겠어요. 성경은 한 사람이 절대로 다 알 수 없는 책이거든요.
옛날에 메튜핸리 성경 주석,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한 사람이 다 주석했어요.
지금은 그걸 주석으로 여기지도 않습니다.
이제는 한 사람이 성경책 한 권을 주석서도 다 못 쓰는 시대라고 오히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잘 모르시는 분들이 뭐라고 이야기하는가 하면 누가 박사학위 받으러 신학 박사 성서학 박사학위 받으러 유학 갔대! 이 수천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박사학위 논문 쓴 게 뭐가 새롭게 겠냐고? 인간의 이론 다시 끌어모아 가지고 새로운 이론 하나 만드는 거지 그건 정말 뭘 모르는 이야기죠.
우리가 잘아는 증언의 말씀도 우리가 구원받고 난 다음에 영원한 시대 동안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을 연구한다고 그러잖아요.
그렇죠 한도 끝도 없는 깊이를 가진 세계가 성경의 텍스트의 세계이기 때문에 누구라도 이제 소위 고기 한 마리 잡은 게 아니라 성경을 읽는 방법이 조금만 익숙해지면 누구라도 썸팅 프레쉬 앤 뉴! 신선하고 새로운 것을 보여줄 수 있죠.
제가 이제 은퇴했습니다만 때때로 학생들이 내는 학기 과제 중에 그런 게 딱 담겨 있는 걸 보면 보람을 느끼는 거죠.
떻게 해야 하는지 그렇다면 텍스트를 둘러싸고 있는 TEXTURE, TEXTURE를 둘러싸고 있는 컨텍스트 그런 것들은 어떻게 찾아낼 수 있습니다.
워크샵 한번 해보는 그런 시간으로 보내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얘기를 너무 길게 하지 않을 겁니다.
2009년도인가 남대극 목사님이 동중한합회에서 목회자 성경 대회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나누어 주셨던 파일을 PPT로 만든 건데 그때 남 목사님이 주석 설교에 대해서 하신 건 아니에요. 근데 성경 연구 감동적인 설교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런 강연을 한 적이 있습니다.
파일을 내가 가져 있기 때문에 요 세미나가 마친 다음에 그 파일을 오늘 참석하신 분들에게 나눠드리겠습니다.
어떤 텍스트를 자세히 읽어야 하는 의미에 대해서 주자가 독서 백편의자현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
같은 글을 백 번 읽으면 의미가 저절로 드러나게 된다
이 의자가 옳을 의(義)자도 쓰기도 하고 뜻 의(意)자를 쓰기도 합니다.
책을 100번쯤 읽으면 옳은 게 하는 뜻이 저절로 나타났다.
이 부분은 정말 방법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저 자신에게 적용해 봐도 한 번 읽었서 뜻이 떠오른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다 바쁘지만 연차적으로 텍스트를 정해놓고 제가 출애굽기를 지난 석 달 동안 이렇게 목회자들과 일반인들에게 나눴는데요.
제가 그 석 달 동안 시시때때로 출애굽기를 읽었습니다.
여러분 제가 출애굽기를 지금까지 평생 박사학위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몇 번 읽었겠습니까?
모르긴 해도 천 번은 읽었을 겁니다. 이번에 석 달 동안 출애굽기, 그다음에 출애굽기 끝나고 다음 내일부터 이제 레위기 강해 시작합니다.
이제 내일 저녁부터 일반인 레위기 강의 시작해서 수요일에는 목회자들에게 강의를 하는데, 계속 레위기 본문을 읽는 거예요.
읽을 때마다 새로운 것들을 발견합니다. 주목하는 포커스가 다르니까요.
제가 이걸 100편이라고 그랬습니다만 제가 개인적인 경험을 말하죠.
내가 한국에서 최우수 석사학위 논문상 받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대학에서 7년 동안이나 성경 선생을 하다가 영국으로 유학을 갔지 않습니까?
그다음에 그 사이에 내가 논문 많이 썼습니다. 발표하고 그렇게 논문 쓰는 일에 익숙하다고 생각하고 영국 가서 시편 11편이 6개 절 밖에 안 돼요.
시편 11편에 대한 분석을 지도 교수에게 가지고 갔는데요. 그분은 아직 살아있고 세계 넘버 원투 하시는 구약학자입니다.
그에게 시편 11편 주석 아티클을 써가지고 제출했습니다.
나 그 교수를 개인적으로 지도받기 위해 만났던 그날은 내 평생 잊지 못합니다.
서양의 교수들의 지도 교수실은 우리 삼육대학 교수실은요 호텔입니다.
어떤 교수에게도 우리 삼육대학 교수실 같은 방 안 줘요.
그거 한 반 정도밖에 안 됩니다. 연구실에 책을 싸놓고 책 사이에 이렇게 끼어 앉아가지고 둘이 대화하는데
나 실망했어. 이거 쓰레기야. 쓰레기 네 것이 하나도 없어.
성경본문 999번 읽어, 다른 것은 다 짜집기야!
아티클 던져놓고 쳐다보기도 싫어요. 쳐다보기도 싫어요.
얼마나 자존심도 상했는지 몰라요.
한 일주일 지나니까 이제 제정신 돌아오고 힘이 생겨 다시 붙들고 다시 시작하고 그리고 다시 써했던 그 논문은 SBL 세계 성서학회, 한 2만 명 이상 모이는 세계 최고의 성서 학술대회 거기에 논문 한 편이라도 발표하면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했다고 여기 각 대학의 학문적 수준을 그 SBL의 논문을 몇 편 발표 교수들이나 박사 과정 학생이 논문을 발표하느냐로 이렇게 평가하는 그 SBL에 그 논문을 발표하고
SBL에서 논문을 9편 발표할 수 있었죠.
성경을 999번 읽어라. 평생 잊을 수 없는 명언입니다.
학문에는 왕도가 없다. 우리가 주석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두 가지가 전재돼야 합니다.
첫 번째가 관찰이고요. 두 번째가 견해입니다.
한자의 한자 볼견(見), 볼관(觀) 한자가 참 기가 막혀요. 둘 다 보다라는 뜻인데 여기 볼관(觀) 할 때 하고 볼 견(見)자가 좀 다릅니다.
볼관(觀) 관찰할 때 아주 가까이 들여다보는 거예요. 현미경적 관찰입니다.
견해는 망원경, 멀리서 보는 것입니다.
멀리서 보는 거, 아주 가까이서 들여다보고 그 다음 멀리서 볼 때 이건 이거야 하고 견해(見解)가 나온다는 거지 이런 골관자 불 견자 이게 한자의 견자 옆에다가 이 권자를 붙여서 관자가 됐잖아요.
관찰을 통해 견해가 돼야 되는데 텍스트를 어떻게 관찰할 수 있는가 텍스트를 관찰하려면 필연 주의 깊게 읽을 수밖에 없습니다.
창세기 주석 강의를 시작하면서 출애굽기 주석 강의를 시작하면서 본문을 두 가지 방식으로 반드시 읽어내야 한다고 여러 번 강조했었습니다.
신대원 수업 시간에도 그랬고 이제 우리는 해석학적 방법론이 아니라 지금 주석에 초점을 맞춰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의 어떤 본문을 주석하려고 하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 인트라텍스투얼 리딩입니다.
그 주어진 본문 내가 선정한 본문 안에 그 본문이 진짜 뭐라하는지, 안광이 지배를 철한다
안광지배철(眼光紙背徹) 이란?
안광지배철'은 바로 '눈빛이 종이의 뒤까지 꿰뚫어본다'는 뜻으로, 독서의 이해력이 날카롭고 깊음을 상징합니다.
INTRA TEXT READING 이 이게 익숙해지면요.
점점 시간이 단축돼요. 근데 이게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걸려요.
그래서 기독교 역사 전체로 보면 소위 교회 교의학시대가 있잖아요.
이렇게 다 변증적이에요. 그때는 우리가 믿는 바가 옳다 틀리다 이런 식이에요.
변증 시대가 있어요. 그러다가 조직 신학 시대가 오죠.
그러다가 성서 신학 시대가 시작됐잖아요.
교회 교의학 시대 (변증시대) ▶ 조직 신학 시대 ▶ 성서시대
근데 여러분도 우리가 목회자로서 기별을 제대로 전하려면 속히 교회 교의학 시대에서 조직 신학 시대에서 성서신학 시대로 가야 돼요.
근데 자꾸 교리 증명하는 교회 교리학 차원에 머물러서, 그냥 변증적 입장에만 머물러 있어 필요하지 않다는 거 아니에요?
필요해요. 근데 그것만 가지면 다분히 논쟁적이고 변증적이 돼요.
기별을 끄집어내지 못하죠. 조직 시작 당연히 필요하죠.
교회 교의학적 접근 제목 설교라면 조직 신학의 주제 설교일 수 있어요.
근데 주석 설교는 철저하게 성서 신학이거든요.
성서신학의 관점으로 가야 되는 거죠.
근데 이 조직이 예를 들어서 주제 성경 주제에 몇 가지 성경 구절 쫙 보도 해놓고 공부 다 했어.
저는 개인적으로 그렇게 정보를 모으는 공부에 대해서는 아주 식상해요.
이 시대 정보 다 공개돼 있는 시대에 뭐 하러 그걸 외워야 저는 그런 거 외우는 시험 문제 내지도 않아요.
외울 필요도 없어요. 더더군다나 우리 목사님들 20년 30년 목회하고 와가지고 뭘 외워서 시험 볼 것이 너무 시간 들이지 마세요.
Text 본문을 어떻게 보면 INTRA TEXT READING을 어떻게 내야 되느냐 이게 익숙해져야 되거든요.
그게 되고 나면 그 다음에 성서 본문과 본문 사이, 구약의 어떤 내용이 신약에 해석되어 있고 내가 그걸 뭐라고 표현하죠? 메타 주석이라고 그러잖아요. 구약에 대해 신약에서 설명해놓은 게 나와요.
그 신약의 본문을 다시 설명하는 거죠. 주석을 한 걸 또 주석하니까 메타 주석이 되는 거지요. 이게 관련 성경 구절들을 찾고 이때 그게 필요한 게 성구 사전, 성경 사전 이런 것들이 특별히 성구 사전이 대단히 용이합니다.
필요하지 않은 게 아니에요. 더더군다나 오늘날에는 컴퓨터로 성구 사전을 한꺼번에 짧은 시간에 접근할 수 있는 시대잖아요.
그래서 뭘 합니까? INTRA TEXT READING을 해야 되지 본문간 정독을 반드시 해야 돼요.
그래서 검증하게 되면 이게 이제 분석 내용을 담게 되죠.
Intra textual READING 본문내 정독
Inter textual READING 본문간 정독
Intra textual READING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제 우리 한번 워크샵 해보도록 할 겁니다.
제가 몇 년 전에 창세기 주석하면서 학기말 시험 두 문제를 냈었죠.
☐문제1/ 창세기 7장16절에서 “여호와께서 그를 닫아 넣으시니라”(창 7:16, 개역) 한 줄 주면서 a4 용지 10장으로 주석하시오.
☐문제2/신명기 전체를 a4 용지 반장으로 주석하시오.
“여호와께서 그를 닫아 넣으시니라” 그것을 가지고 a4 용지 10장에 뭘 써야 됩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한 여학생이 그걸 했습니다.
그렇죠 좋은 논문이 나왔죠. 우수 논문이 됐습니다.
대소
그 다음에 신명기 전체를 A4 반장으로 줄이라. 이게 되면 하나를 마음껏 넓히는 능대(能大) 넓은 걸 마음껏 줄이는 능소(能小) 능대 능소의 경지에 이른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