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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은 혈통(血通)과 어원(語源)이 같은 형제국
박병식 가야족(伽倻族)의 작은 집(日本) 1 내가 ‘야마토말 어원사전(語源辭典)’을 펴낸지 다섯달만인 2001년 8월,
일본에서 발행되는 세계일보(世界日報)에 다음 같은 서평(書評)이 실렸다. 기고(寄稿)한 사람은 일본 명문대학으로
손꼽히는 쓰쿠바대학(筑波大學) 명예교수 가도-에이이치(加藤榮一)씨였다.
★[‘야마토말 어원사전(語源辭典)’의 평가]‘
일본어와 한국어는 어원이 같다. 새로운 눈으로 역사를 배우자.’
서기 2001년은 한일관계사상 획기적인 해가 될 것이다. 박병식씨가 펴낸 ‘일본 어원사전’이 간행됐기 때문이다.
현대 일본어는 많은 한자어와 영어는 같은 외래어를 포함하고 있지만 그 근본은 ‘야마토’ 말이다.
그렇다면‘야마토’말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이 물음은 “일본 사람은 어디에서 왔는가?”와도 관련되는 중요하고도
근본적인 질문이다.물론 오늘까지 많은 학자들이 일본말의 어원에 대한 학설을 내 놓았으나 그 대부분이 의심스러운
것이다. 어떤 사람은 ‘히말라야’에서 쓰이는 ‘레프차’말이 어원이라고 하는가 하면, 또 다른 학자는 인도지방에서
통용되는 ‘타밀’말에서 일본말의 어원을 찾으려 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승복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런 말들은 일본으로의 민족이동도 없었던 멀리 떨어진 곳의 언어일
뿐 아니라, 그런 학자들이 예로 든 일본어의 대응(對應)은 전혀 규칙성(規則性)이 없고, 아무 원칙없이 이루어진 것
이기 때문이다.그런 까닭에 양심적인 학자들 사이에서는 “위험하다.
어원과 여성(女性)에게는 가까이 가지 말라”는 우스개 소리가 오갈 정도였다. 그런 가운데서 바르고 과학적인 방법
으로 일본어의 어원을 풀려고 시도한 사람은 무라야마시치로(村山七郞)씨 뿐이다.그는 ‘우랄알타이’제어(諸語)의
계통을 밝히려고 애쓴 ‘알타이스트’였다.
그의 방법이 과학적이였다고 하는 이유는, 그가 인구제어(印歐諸語)사이의 친척관계(親戚關係)를 입증한 방법을
보편적으로 활용했기 때문이다.그 방법이란“여러 언어 사이에 있는 공통조어(共通祖語)를 상정(想定)하고, 그것으로
부터 소리변화법칙에 따르는 규칙적인 변화를 경유하여 여러가지 언어가 성립됐다”고 보는 이론이다.
그 방법을 써서 어원을 밝히자면 조어(祖語)를 상정하기 위한 상상력이 필요할 뿐 아니라 소리변화법칙을 발견하기
위하여 많은 조사를 해야 하며 따라서 광범위한 언어의 지식이 필요하다. 무라야마시치로(村山七郞)씨는 '알타이’
제어(諸語)와 서구제어(西歐諸語)에 대하여는 광범위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깝게도 한국어에 대해서는,
적어도 그 사투리에 이르기까지의 지식은 갖고 있지 않았다.
일본어나 한국어를 대응시키려면 도쿄지방(東京地方)에서 쓰이는 일본 표준어와 서울에서 쓰이는 한국표준어를
비교하는 것 보다는, 지리적으로 서로 가까운 북규슈(北九州)나 산음지방(山陰地方)에서 쓰이는 사투리와 한국
남부지방에서 쓰이는 사투리를 비교하여야 서로의 근사성(近似性)을 발견하기 쉬울 것이다. 일제의 조선지배는
좋은 것이었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시기는 ‘기적(奇蹟)의 세대(世代)’를 배출했다. 즉 한-일 두나라 사투리까지를 아는 박병식씨 같은 세대
(世代)를 탄생시킨 것이다. 박병식씨의 오랜 세월에 걸친 연구로 일본어와 한국어는 같은 뿌리에서 탄생됐음이
밝혀졌다.그리고 보면 한일 두 민족은 형제다. 형제가 서로 싸우는 것은 좋지 못하다. 내가 첫머리에서 “한일관계
사상(韓日關係史上) 획기적이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러한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일본은 신무천황(神武天皇)의 건국 이래 2661년의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틀림없이 세계에서 제일 오랜 황통(皇統)을
지닌 나라다.그러나 신무천황 이전에는 신대(神代)가 있었고 천황의 조상이 내려왔다는 고천원(高天原)은 한국이었
다고 상정(想定)하지 않으면 안된다.
황실의 조상(祖上) 뿐 만 아니라, 천황의 선조와 함께 강림(降臨)했다는 천손민족(天孫民族)은 한국에서 왔다. 따라서 한-일 두민족이 형제라고 할 때 한국을 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은 아우이며 작은 집인 것이다.그러나 일본은 ‘갈대가 풍성한 성스러운 이삭의 나라(豊葦原瑞穗國)’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넓은 섬나라였던 덕분으로 작은집(分家)
이면서 큰집(宗主國)보다 더 번영할 수 있었다.
인구가 늘어나고 재력(財力)도 풍부해진 작은 집 일본은 번번히 큰집(宗主國)을 업신여기고 공격하기도 하고 지배
(支配)하는 일까지 일어났던 것이다. 그런 것이 한국사람에게는 못마땅하다.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많은 일본사람들은
왜 한국사람들이 일본사람들에게 노여움을 품고 있는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두 나라 사람들은 역사를 새로운 각도에서 고쳐봐야 한다. 미국 사람들은 자기들이 영국의 작은 집임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영국의 백과사전에는 영어가 독일어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것이 도표(圖表)로 실려있다. 일본사람도 그렇게
해야 한다.
이러한 낯 간지러울 정도의 과찬(過讚)이 매스컴에 떴으니, 제 아무리 고집스러운 일본 고대 사학계(古代史學界)나
국어학계(國語學界)일지라도 "한일 두 민족은 같은 줄기이며 따라서 두 나라 말도 같은 뿌리에서 비롯됐음이 분명
하다”고 말할 것이다....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나 몰라라하고 외면한 채 아무 반응도 보이질 않았다. 그로부터 만 2년 소리없이 세월만 흘렀다.
이제 그들에게 긍정적인 반응을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체념할 무렵, 생각지 않았던 낭보(朗報)가 뜻밖에도 일본 인류
유전학계(人類遺傳學界)에서 날아들었다. 다음은 2003년6월23일자 교도통신(共同通信)의 보도내용이다.
동경대학의학부(東京大學醫學部) 인류유전학교실(人類遺傳學敎室) 도꾸나가가쓰시(德永勝士)교수는 인간의 6번
염색체 내에 존재하는 ‘HLA유전자군’을 이용한 인간유전자(게놈)을 비교 연구한 결과, 일본본토인과 가장 가까운
집단이 한국인과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족으로 추정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도쿠나가’교수는 일본인, 한국인, 중국조선족, 만주족, 몽골족 등 12개 민족(집단)을 비교분석한 결과 일본 본토인은
오키나와인이나 홋카이도(北海道)의 ‘아이누'족보다 한반도에 사는 한국인과 중국의 조선족에 가까웠다고 밞혔다.
일본 본토인에게 가장 많이 나타나는 HLA유전자형태는 HLA-B52-HLA-DR2로, 북규슈지방(北九州地方)에서 야마
가다현(山形縣)에 이르기까지 12%이상 존재했고 몽골인에게는 5~8% 나타났다.
반면 HLA유전자는 오키나와인에게서는 2%,'야이누'족에서는 1%에 그쳤다. 이런 연구결과는 동경대학에서 곧 출간
할 예정이다.한편, 돗도리대학(島取大學) 의학부 이노우에다카오(共上貴央) 교수팀은 벼농사 도입과 청동기전래(靑
銅器傳來)로 상징되는 ‘야요이’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DNA가 현대 한국인의 그것과 일치한다는 연구결과를 냈다.
돗도리대 연구팀은 ‘야요이’시대 돗도리현 아오야가미(靑谷上) 절터(寺跡)에서 출토된 ‘야요이’인 유골 ‘미토콘드
이아(mitochondria)’DNA 염기배열을 분석한 결과 이같은 결론을 얻었다.
돗도리대 연구팀은 ‘야요이’인 유골 29점 가운데 7점으로부터 DNA를 추출하는데 성공한뒤 그 중 4점에서 ‘미토콘드리아’DNA 염기배열을 확인하는 과정을 거쳐, 한국의 현대인 및 혼슈(本州)의 일본인과 동일한 그룹에 속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와같은 보도는 오랜 세월동안 일본학자들이 은폐해 온 일본인의 혈통과 어원에 대한 비밀을 더이상 궤변
(詭辯)으로 늘어놓을 여지없이 밝혀줬다.
이런 사실은 저들이 늘 들먹이는 ‘고사기’나 ‘일본서기’를 비롯한 그들의 고문서(古文書)들을 선입견(先入見) 없는
눈으로 읽어왔던들 진작부터 알 수 있었던 뻔한 일이었다.
우선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적혀있는 그들의 건국신화부터 들여다 보자“하늘나라로부터 내려온 천손(天孫) ‘니니기
노미코도’일행은 가고시마현(鹿兒島縣) 노마반도(野間半島) 끝에 이르러, ‘가사사(笠狹埼) 허구리’ 앞을 바로 지난
데에 있는 이곳은 가라국(加羅國=伽倻國)를 향해 있을 뿐 아니라 아침해가 찬란히 쪼이고 석양빛도 아름답게 비쳐
주는 곳이니 매우 좋다고 하며 그곳에 대궐(大闕)을 지어 정착했다.”이 기록은 천손 ‘니니기노미코도’와 그 일행이
부모형제를 남기고 고향 가라(加羅=伽倻)를 그리워하는 심정을 잘표현한 대목이다.더구나 그들은 그들이 정착한
지역에서 가장 높은 산을 가라구니다케(韓國岳)라고 이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영국에서 ‘아메리카’대륙으로 이민온 사람들이 가는 곳마다 저들의 출신지 지명을 따서 ‘New England=
새 영국’‘New York=새로운 York’라고 이름붙인 것과 꼭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日本’이란 이름은 三韓사람들로부터 유래
일본황실(皇室)은 고대로부터 궁중(宮中)에 가라가미(韓神)를 받들어 모시고 해마다 봄-가을 두 차례에 걸쳐 가라
가미 마쯔리(韓神祭)를 지내 오고 있다.
서기 927년 당시 국무총리격이었던 후지와라 다다히라(藤原忠平)가 편찬한 연희식(延喜式)에는 신격(神格)에 따라
제사(祭床)에 올리는 제물의 종류와 제사의 절차가 자세히 쓰여있다.
여기서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연희식이 제정될 당시 전국에서 모셔지는 기년제신(祈年祭神)은 전부 3132분이 였는데
그중에서 가라가미(韓神)와 소노가미(園神)를 합친 세분 신(神)만은 신격(神格)이 가장 높은 까닭에 특별히 궁내성
(宮內省)에 모시고, 최상급의 제물을 바치도록 규정해 놓았으며, 봄-가을 두차례 가라가미 마쯔리를 모시도록 했다는
점이다.
일본 학자들은 가라가미 마쯔리는 중세때부터 쇠퇴하여 근년에는 폐지됐다고 사전마다 써놓고 우겨대지만 그것은
명백한 거짓이다.
왜냐하면 근년에 와서는 봄에 가라가미 마쯔리(韓神祭)를 지내던 2월21일을 일본의 건국기념일로 제정해 놓고
황실뿐 아니라 온 국민이 축제를 지내고 있으니 말이다.
천손이라고 하는 일본황실이 가라(加羅=伽倻)에서 온 가라족(加羅族=伽倻族)이 아니라면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가라족(加羅族=伽倻族)이 개척한 일본열도가 독립하여 스스로 '야마토(日本)’라고 일컫기 시작한 것은
서기 663년 백제가 라당 연합군에게 멸망한 후부터다.
‘야마토(日本)'는, 원래 ‘위지’한전(韓傳)에 기록돼 있는 야마국(邪馬國)을 가르키는 이름이며 경북 고령지방을 중심
으로 번영한 가라(加羅=伽倻)의 종주국 (宗主國) 우가야(上伽倻)를 지칭한다.
즉 자치령(自治領)이 되어 일본열도에 살게 된 그들은 종주국 ‘우가야’를 계승하는 나라임을 내세웠던 것이다.
★그것을 뒷받침해 주는 사례가 있다.
요시다도고(吉田東伍)가 펴 낸 ‘대일본지명사서’(大日本地名辭書)의 (국호론(國號論))과 명치(明治) 33년 1월에
발간된 역사잡지(歷史雜誌)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日本’이라는 국호는 원래 한국인들이 일찍부터 써온 것인데, 우리나라가 그 이름이 아름답기 때문에 국호로
정했다.(伴信友)
*‘日本’이라는 문자(文字)는 상고(上古)로 부터 사용해온 (히노모도)라는 말에 한자를 충당해서 쓴 것이며‘日本’
이라는 이름 그 자체는 삼한(三韓)사람들이 쓰기 시작한 것이다.(星野恒)
*‘日本’이라는 국호는 원래 한국인들이 쓰던 것이다.그것이 우리나라 국호로 더욱 적당하기 때문에 만세불변
(萬世不變)의 호칭이 됐다. (木村正辭) 메이지(明治)시대의 뛰어난 석학(碩學)들이 입을 모아 증언(證言)하고
있듯이 '日本'이라는 이름은 우리민족이 오래 전부터 써 왔다.
그런데 백제의 속령(屬領)이던 열도 사람들이 독립한 때부터 일본으로 국호를 삼았음을 알 수 있다.
'日本'이라고 한자로 쓴 것을 그 당시에는 '야마터'라고 읽었었는데 근세에 한자음(漢字音)으로 읽게 되면서부터
그것을 소리바꿈한 ‘닙뽕’이라고 하다가 지금은 ‘니혼’이라고 발음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메이지(明治)초기에 일본정부는 그것을 바로 잡아 ‘닙뽕’이라고 고쳐 발음하도록 긴급 결의(決議)한 적이 있다.
그 후 공식문서(公式文書)에는 ‘닙뽕(Nippon)’이라고 쓰지만, 일반에서는 지금도 여전히 ‘니혼(Nihon)’이 혼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것이야 어찌됐든 긴 넋두리는 이만 접기로 하고 이제부터 가라족(加羅族)이 독립하여 ‘야마토(=일본)’을 세우기
까지 어떤 사건들이 벌어졌는지 1만년 내지 1만2000년에 걸친 그 오랜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여러분을 안내
하기로 하겠다.
그러자면 먼저 ‘가라족(韓族)’이라고 불리우는 우리민족이 언제 어디서 형성 됐는가부터 말해야 할 것 같다.
(우리 민족의 형성) 도대체 우리 민족의 고향은 어디였을까?우선 그것부터 생각해 보자.그러자면 먼저 현대 인류의
조상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언제쯤, 어디에 나타났을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인류학자들은 ‘아프리카’에 처음 나타난 원시인이 ‘유럽’으로 진출한 때를 지금으로부터 약 10만년쯤 전이라고 한다.
그들이 진화를 거듭해 네안데르탈인이라고 불리워지게 되는데, 현대인과 생김새가 거의 비슷한 그들은 지금의
‘터키’와 ‘이라크’지역을 중심으로 살고 있었다. 그러나 약 3만5000년전 쯤 것으로 추정되는 그들의 유골을 조사한
결과 그들은 현대인과 같은 언어생활은 하지 못했음이 확인됐다.
서로가 알아 들을 수 있도록 말을 하자면 혀가 자유롭게 움직일수 있도록 인후(咽喉)가 넓어야 한다.
그런데 그들의 후두(喉頭)는 현대인보다 높게 자리잡고 있었던 탓으로 인후(咽喉)가 좁을 수밖에 없었음이 밝혀
졌다.그러나 그들은 이미 현재의 우리와 다를 바 없는 따뜻한 애정에 넘치는 가족생활을 하고 있었음도 확인됐다.
이라크의 ‘샤니달’동굴에서 발견된 무덤은 여러 가지 들꽃으로 장식됐던 사실이 주변 흙에서 채취된 많은 꽃가루로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네안데르탈인은 비록 현대인과 같은 정도로 복잡한 발음으로 구성된 말은 못할 망정 가족사이의 애정을 교환할
정도의 원시조어(原始祖語)는 쓰고 있었음이 짐작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현대인의 신생아도 태어났을 때는 네안데르탈인과 다름없이 후두(喉頭)가 높으며 인후는 좁다.
신생아의 후두(喉頭)가 낮아지고 인후(咽喉)가 넓게 되는 시기는 다소의 개인차는 있지만생후 2년 쯤 되어 어지간한
발음을 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다.
이 사실로 미루어 아기가 엄마의 입 움직임을 쳐다보면서 엄마의 말을 흉내내려고 애쓴 노력이 아기의 후두를 자극한
결과 인후가 넓어졌음을 알 수 있다. 3만년에서 3만5천년 쯤 전에 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춘 네안데르탈인들도 생활
환경에 큰 변동이 생긴 것에 자극이 되어 딴 사람들과의 협동을 가능케 하기 위한 필요성이 생겼기 때문에 그것이
후두를 자극하여 신생아처럼 인후가 넓어져 말을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됐을 것이다.
그렇다면 네안데르탈인을 자극시켜 그들의 생활활동에 대변동을 일으키게 한 원인은 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재배생활의 시작이다. 원시생활을 위한 활동의 대부분은 수렵과 채취에 의한 식량확보였는데 그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계절의 변동과 날씨 불순으로 짐승이나 식물의 채취가 여의치 않을 때는 심한 굶주림과 싸워야 했고 그 때문에
유아의 사망률은 극도로 높았다.
그런 그들이 식물을 재배하여 식량을 마련하는 방법을 터득했을 때의 기쁨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겠는가. 그것은
우주선을 달에 착륙시킨 것 같은 사치스러운게 아니고 식생활의 근본을 바꿔준 대혁명이었으니 어떠했겠는가?
지금은 농사를 위한 장비가 있어서 많이 나아졌지만 청동기시대가 시작되기 훨씬 이전인 시대에 부부만의 힘으로
산야를 개간하여 식물을 재배한다는 것은 이만 저만 어려운 게 아니었을 것이다.
자연히 다른 사람들과의 협동이 필수가 됐다.그에따라 서로간의 의사소통이 절대조건으로 등장한다.
네안데르탈인들에게 말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일깨운 것은 바로 재배생활을 위한 협동작업이었다.
네안데르탈인이 지구상에서 사라진 것은 3만-3만5천년 전인데 보리농사는 네안데르탈인들의 주된 생활지역이 였던
아나토리아 고원지대에서 시작되어 그 농법이 정착한 때는 지금으로부터 약 1만년 전이라고 고고학자들은 말한다.
즉 네안데르탈인이 지금과 같은 말을 쓰게 된 때는 3만5천년-1만년전 사이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민족
이라고 부르는 끈끈한 집단이 형성된 것도 식물재배가 시작된 때와 평행했다고 봐도 큰 잘못이 아닐것이다.
(가라민족(韓民族)의 탄생)원시인들에게는 자연의 모든 것이 경이와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것이 원시신앙을 사람들의
마음에 싻트게 했다.
식물재배 시대가 시작되면서 자연적 추세로 만물을 키워주는 태양을 숭배하는 태양신앙족(太陽信仰族)들이 많아졌다.
★그 가운데 하나가 우리 가라족(韓族)이다. ‘가라’의 어원은 ‘하라=태양’이다.
우리가 스스로를 태양의 자손이라고 자처하는 데서 비롯된 말인데, 지금은 ‘하라=태양’를 ‘해=태양’이라고 부른다.
그렇게 된 까닭을 잠시 설명해야겠다.
사국시대(四國時代·高句麗·加羅·百濟·新羅時代)에는 ‘바다라’라고 하던 말이 지금은 ‘바다(海)’가 되고 '가라!' '해라!'
'둬라!' '서라!'등의 말들은 각각 '가!' '해!' '둬!' '서!'라고도 한다.
‘하라’(=태양)도 그와 같은 이유로 ‘라’소리를 잃고 ‘하’(=태양)가 된 다음 ‘아기’-‘아비’가 각각 ‘애기’(幼兒)-‘애비’(父)로
모음교체된 것처럼, ‘하’(=태양)도 지금은 ‘해’(=태양)으로 발음되는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를 ‘해’(=태양)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런 분은 왜 우리가 어린 자식을 ‘아해’(=어린 해-태양)이라고 하며 처를 ‘안해’(=안에 있는해-태양)라고 부르는지
생각해 보면 우리가 스스로와 가족 구성원을 모조리 ‘해’라고 하고 있다는 사실을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즘 맞춤법으로 ‘안해’(=안에 있는 해-태양)를 ‘아내’라고 적고 ‘아해=어린해(태양)’에서 소리 바꿈된 ‘아히’를 ‘아이’
라고 표기하는데, 그것은 어원을 모르는 데서 비롯된 잘못이다.
이와 같은 요새 맞춤법의 잘못은 적지 않지만 여기서는 말할 것이 못된다.
본론으로 돌아가자.이와 같이 우리는 예로부터 스스로 태양의 자손인 하라족(태양족)이라고 자처해왔다.
그런 우리이기 때문에 우리 조상은 해(태양)가 있는 곳으로 동쪽으로 향해 먼 행로에 올랐다.
★우리는 몽고를 거쳐 중국 동북부를 흐르는 송화강과 흑룡강 유역에 이르러 단국(檀國)을 세운 것은 보리재배가
정착하기 이전이니까 아마도 1만5000년에서 1만2000년 사이인 듯 싶다.
우리가 우리 민족의 첫 임금으로 모시는 분을 단군(檀君)이라 부른다.
그러나 단군은 어느 한사람에게 붙여진 고유명사가 아니다.
왜냐하면 한문자로 쓴 ‘檀’은 우리말로 ‘박달’인데 그 어원은 ‘밝달’(=밝은 땅/해의 땅) 즉, ‘하라족의 나라’(=檀國)을
뜻한다.
‘밝’은 ‘태양빛’을 상징하는 말이며 ‘달’은 ‘양달=陽地’ ‘음달=陰地’ 할때의 ‘달=땅(地)·곳’이다.
따라서 ‘단군’(檀君)은 ‘가라족의 나랏님’이라는 뜻이다.
‘하라족=태양족’이라고 하던 우리가 ‘가라족’이라고 불리기 시작한 것은 단국(檀國)을 세운 뒤부터인듯 싶다.
일본사람 DNA수치, 한국인-조선족과 일치
사마천(司馬遷)이 중국에서 가장 권위있는 ‘史記(사기)’를 저술한 때가 기원전 104년께였다.
★그 속에서 그는 처음으로 우리나라를 ‘구려(句麗)’라고 불렀다.‘구려(句麗)’는 곧 ‘가라(加羅)’의 소리바꿈된 호칭
( 呼稱)이다.
우리 민족의 이름이 왜 ‘가라족(加羅族)’또는 ‘가야족(伽倻族)’이라고 불리고 ‘한족(韓族)’이라고도 하는지 그 이유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래야 역사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
우선 ‘하라족=태양족’이라고 하던 우리를 ‘가라족(加羅族)’이라고 부르게 된 까닭부터 알아보자.우리말의 ‘하’ 줄 소리는 ‘가’ 줄 소리와 교체되기 쉽다.
‘한=長~大’이 ‘큰=長~大’로 바뀌고, ‘한쇼(古語)=大牛’가 ‘큰소=大牛’라고 불리워지는 것도 그런 자음교체의 본보기이다.
‘하라족=태양족’이 ‘가라족=태양족’이 된 것도 마찬가지 이유이다.
그 ‘가라족=태양족’을 연대(年代)가 내려오면서 ‘가야족(伽倻族)’이라고 부르게 됐는데, 그것은 ‘라’ 줄 소리는 ‘아’ 줄
소리와 교체되기 쉽기 때문이다.
예컨대, ‘理(리)’ ‘李(리)’ ‘利(리)’ 등으로 발음하던 것을, 근세(近世)에 이르러, 각각 ‘이발(理髮)’ ‘이씨(李氏)’ ‘이익
(利益)’ 등으로 발음하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가라족’ 이 ‘가야족’ 으로 변한 것은 그런 자음변화법칙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우리를 ‘한족(韓族)’이라고 하는 이유를 설명하자. 한문자 ‘羅(라)’ ‘螺(라)’ ‘理(리)’ ‘李(리)’ ‘利(리)’ 따위를 각각
‘나남(羅南)’ ‘니발(理髮)’ ‘니씨(李氏)’ ‘니익(利益)’ 등으로 발음하는 것도 우리말의 자음교체성 때문임은 물론이다.
‘하라족=태양족’은 그와 같은 이유로 ‘하나족=태양족’이라고 발음하게 된다.
연대가 내려옴에 따라 모음의 탈락현상이 일어나면서 우리 글에 받침이 씌어지게 되자, ‘하나족=태양족’이라고 하던
것이 ‘한족(韓族)’으로 변했다.
그 때문에 ‘일본서기’와 ‘고사기’에는 ‘韓族(한족)’이라고 한문자로 적어 놓고, ‘가라족’ 이라고 읽도록 토를 달아 놓고
있는 것이다.
흑룡~송화강 유역 정착태양족인 우리는 태양이 솟는 동쪽을 향해 민족이동을 계속했지만, 다른 종족들도 중앙 아시아
지역에서 이동해 출발했다. 그들이 이동하기 시작한 가장 큰 이유는 기후의 변화다. 빙하기(氷河期)가 끝날 무렵,
북반구(北半球)의 기후와 기온은 크게 바뀌었다. 적당히 비가 내려 식물재배도 하고 수렵할 여러가지 동물들도 흔하던
지역이 우량부족현상(雨量不足現象)으로 사막화(砂漠化)가 진행돼 갔다. 식물재배도 불가능해지고, 수렵도 어려워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곳을 버리고, 더러는 서쪽으로, 더러는 동쪽으로 향했다.
서쪽으로 향한 사람들은 별 어려움 없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으나, 동쪽으로 향한 사람들은 히말라야 산맥과 천산
(天山) 산맥 따위의 험한 산줄기를 만나게 되어 더러는 남쪽으로 더러는 북쪽으로 진로를 바꿨다.
남쪽을 택한 사람들은 오늘날 동남아 사람들의 조상이 됐고, 북쪽을 택한 사람들은 우리가 속한 ‘몽골로이드=蒙古人種’
가 됐다.
우리민족은 몽고지역을 지나 계속 동쪽으로 가다가 흑룡강(黑龍江)에 이르러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일부는
점차 남하하면서 송화강(松花江) 요하(遼河) 유역에까지 다달아 머물렀다.
단군이 처음 나라를 세운 지역이 바로 흑룡강(黑龍江)과 송화강(松花江) 요하(遼河)에 이르는 유역이다. 史記(사기)에 “구려(句麗)족은 큰 물가에서 살고 있다”고 적혀있는 까닭이 바로 이 것을 뒷받침해 준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들이 지금은 요하(遼河)라고 부르는 강도, 옛날에는 구려하(句麗河)라고 했었다.
그것이 요하(遼河)로 이름이 고쳐진 것은, 요나라(遼國) 성종(成宗)4년, 서기 1345년 이후다. 흑룡강(黑龍江) 송화강
(松花江)이라고 한음(漢音)으로 불리우는 강물도, 예전에는 우리말로 ‘가마(黑)마라(水)=고구려의 물’ ‘솔호물(松花江)=
한민족의 물’이였다.
지금도 만주어로 우리를 ‘솔호(solho)’라고 하고, 몽고말로는 우리를 ‘솔코(solkho)’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일본의 가나가와현(神奈川縣)에 있는 高句麗神社(고구려신사)를 지금도 ‘고마신사’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고구려를
옛날에 ‘가마’라고 불렀던 것이 모음교체된 형태이다. 가나가와현( 神奈川縣)에 있는 큰 도시의 이름 가마쿠라(鎌倉)는 (가마골=고구려 사람들의 고을)이라는 사실을 아는 일본인은 한사람도 없다.
거기에 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말할 기회가 있을것이다.
지금은 섬인 일본열도(日本列島)가 대륙으로부터 분리된 것은, 지리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빙하기(氷河期)가 끝난 1
만년에서 1만2000년 전 쯤이라고 한다. 따라서 그 이전에는 대륙의 일부였던 관계로 걸어서 어렵지 않게 일본열도에
이주할 수 있었다.
승문전기(繩文前期)에 일본열도로 건너오는 길은 크게 나누어 넷이 있었다.
우선 동남아쪽에서는 지금의 대만과 오키나와 열도를 따라 오는 방법이다. 그러나 그쪽은 빙하시대에도 대륙과 연결
돼 있지 않았기 때문에, 배를 이용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그쪽에서 일본열도로 건너온 사람의 수는 많지
않았다.
다음은 한반도를 따라 도보(徒步)로 지금의 후쿠오카(福岡) 지방을 거쳐 혼슈(本州)쪽으로 북상(北上)하는 길이다.
이 길은 대륙과 직결 돼 있은 관계로 많은 사람이 이 길을 거쳐 이주해 왔다. 한반도 따라 대거 일본이주그 다음으로는
흑룡강 하구(河口)쪽으로부터 지금 ‘사할린’이라고 불리우는 곳에 당도한 후, 남하하여 혼슈(本州)로 가는 방법이다.
이 길은 흑룡강과 송화강 유역에 정착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손쉽게 택했던 길이다.
끝으로 잊어서는 안될 또 다른 집단이 있다. 그들은 우리가 흑룡강에서 걸음을 멈췄을 때, 계속해 북쪽으로 이동한
무리다. 그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광대한 분지(盆地)였던 베링해 지역을 가로질러 알래스카에 도달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험준한 빙산(氷山) 매킨리 산맥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들은 더러는 캄차카 반도를 따라
사할린을 경유한 다음 혼슈(本州) 쪽으로 남하했고 더러는 치시마열도(千島列島)를 따라 배로 이동하여 남하했다.
그러나 마지막 경로로 일본열도에 도달한 사람의 수는 한반도와 흑룡강 하구 쪽에서 유입한 사람들에 비하면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적었다.
이미 소개한 동경대학의학부(東京大學醫學部) 인류유전학교실(人類遺傳學校室)과 돗도리대학(鳥取大學)의 연구
결과에서 한반도의 한국인과 중국에 사는 조선족만이 일본의 본토인과 DNA수치가 일치한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은
이러한 민족이동의 경로를 입증해 주는 셈이다.
한반도 남쪽으로부터 북규슈(北本州)로 넘어간 사람들이 한반도에 살고 있는 지금의 한국인의 선조이고, 흑룡강
하구로부터 사할린을 거쳐 혼슈(本州)쪽으로 남하한 사람들은 옛 조선족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시기에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을 통틀어서 ‘승문인(繩文人)’이라고 부르며 그 시대를 ‘승문시대(繩文時代)’라고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미국 동물학자이자 고고학자이기도한 E.S.모스가 1877년 도쿄(東京) 오모리(大森)에 있는
조개무덤(貝塚)에서 그 시대에 살던 사람들이 만든 토기(土器)를 발견했다.
그는 토기표면에 있는 새끼줄무늬(繩紋)가 특징이라 하여 영어로 줄무늬토기(cord marked pottery)라고 이름지었다.
그것을 일본 학자들이 ‘승문토기(繩紋土器)’라 하고 아울러 그시대를 ‘승문시대(繩文時代)’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러한 승문토기가 남겨진 지역은 주로 일본열도의 동북부였다.
한반도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정착한 오사카(大坂)이남 지역에는 비교적 따뜻하여 한반도 남부에서 온 사람들이 살았다.
두 지역 사람들의 특징은 남쪽 사람들보다 추운 지방 사람들이 불을 다루는 기술이 뛰어났다.
토기(土器)는 진흙으로 빚은 것을 불가마에 넣어 구어낸 것인데 불가마의 온도가 높을수록 단단하고 좋은 품질의
물건을 만들 수 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남쪽 사람들보다 추운 지방 사람들의 승문토기(繩紋土器) 생산기술이 월등했던 것이다.
여기서 또다른 의문이 떠오른다.
추운 지방에서 추위 때문에 고생한 사람이면 당연히 따뜻한 지방으로 남하했을 터인데 왜 그들은 추운 지방에 머물렀을까? 연해주 화살촉, 일본서 유래그 까닭은 화살촉을 만들기 위해 없어서는 안될 흑요석(黑曜石)이 동북부 지방에 풍부
했기 때문이다.
승문시대 초기(初期)인 기원전 8000년 내지 1만년전에는 아직 재배기술이 그다지 발달되지 않았었고 주로 동물을 활로 잡아서 식생활을 했던 때다. 추위보다 식량확보가 근본 문제였던 때이므로 화살촉을 만드는데에 필요한 흑요석이 많은 동북부 지방에서 자리잡은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흑요석이 발견되기까지는 돌로 만든 화살촉을 썼으나, 흑요석을 알게 되면서부터 더 예리할 뿐 아니라, 가볍고 멀리
날아가는 화살을 만들기 위해서 흑요석이 매우 귀중하게 여겨졌다.
세계적으로 알려진 흑요석의 산지(産地)는 아프라카, 북아프리카, 멕시코, 뉴질랜드 등이며 동양에서는 오직 일본
뿐이다.
얼마전에 일본과 옛 소련 고고학자들이 공동으로 조사한 결과 연해주 지역 유적에서 발견되는 화살촉은 일본에서
생산된 것임이 확인됐었다. 이런 사실은 흑룡강 지역에서 살던 가라족(韓族) 사이에 일본 동북부 지방에서 나는 흑요석
이 사용되었음을 입증하고도 남는다. 그것은 또한 그들을 일본 동북부 지역으로 끌어들인 것이라고 하겠다.
한자는 은(殷)시대에 우리민족이 만들어 쓴 글
92년, 일본 혼슈(本州)의 최북단에 자리잡고 있는 아오모리(靑森)에서 야구장 건설공사가 시작됐다. 그런데 그 공사는
야구장을 건설하는 대신 4000년 전에 번영했던 사람들이 남긴 엄청난 유적(遺跡)을 되살리는 결과를 낳고 중단됐다.
그것이 세상에 알려지자 일본 전국은 말 그대로 흥분의 도가니가 됐다. 왜냐하면 그 유적에서 모든 사람들의 눈을 의심
할 만치 놀라운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지금 그 유적을 산나이마루야마(山內丸山)유적(遺跡)이라고 부르는데, 이 유적은 1986년에 규슈(九州)의 사가현
(佐賀縣)에서 발굴된 요시노가리(吉野里) 유적과 더불어 일본 전국을 들끓게 만들었다.
어림잡아 500명에서 1000명 정도의 인원이 생활했으리라고 보이는 약 38만㎡에 달하는 넓은 유적에서 사과상자 4만개 분량의 유물이 발굴됐다. 이렇듯 많은 유물을 남긴 산나이 마루야마 지역 사람들은 기원전 2000년 쯤에 돌연 자취를
감추어 버렸고, 그 문화도 그들을 따라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이 정설이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일본 학자들 가운데는 “큰 해랑(海浪)이 몰려와서 부락이 송두리째 쓸려가 버렸던게 아닐까”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화산폭발로 눈깜짝할 사이에 파묻힌 것”이라고도 말한다. 그밖에도 “지진(地震)으로 산사태가 일어나
한순간에 묻혀 버렸을 지도….”하는 사람, “아니 그게 아니라 무서운 전염병이 번져 모두 죽었을 께야”, 또는 “외적
(外敵)의 습격으로 주민전부가 몰살 됐을런지…”라는 등 갖가지 억측(臆測)이 나돌고 있다.
그러나 일본사람들이 미처 생각지 못했으면서도 가장 있을 법한 중요한 원인은 벼농사 전래(傳來)이다. 식량문제
때문에 고민하던 그당시였던 만큼 벼농사 전래로 말미암아 동요가 일어났던 것으로 추측할 수도 있다.
벼농사(水稻)는 중국 남서부지방에서 약 7000년 전에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반도에는 산둥반도(山東半島)로
부터 황해를 넘어 전래됐다. 옛 고구려 영역인 중국 동북부는 온도가 낮은 탓으로 벼농사는 불가능했으나 따뜻한 경기
(京畿) 이남에는 급속도로 보급돼 갔다.
★십제(十濟)가 백제(百濟)로
마한(馬韓)의 좁은 땅을 얻어서 십제(十濟)라고 불리던 나라가 급속한 속도로 성장해서 백제(百濟)라 칭하는 큰 나라가 되었는데 이처럼 마한이 전역을 집어삼키며 팽창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벼농사의 보급 때문이었다.
백제왕들은 벼농사를 권장하기 위하여 일찍부터 저수지(貯水地)를 여러곳에 만들었을 뿐 아니라 태양신앙마저 버리고 비를 내리게 해주는 검은 구름을 상징하는 ‘곰(熊)’을 섬기기 시작했다. ‘곰(熊)’은 비를 내리게 하는 검은 구름을 뜻하는 ‘가마(黑)’가 ‘거마(黑)’를 거쳐 ‘고마(黑)’로 소리바꿈 된 다음, 받침화 현상으로 ‘곰(熊)’이 된 것이다. 이것이 짐승이름인 ‘곰(熊)’으로 전용(轉用)되었다.
그들이 곰숭배사상에 흠뻑 빠졌던 사실을 대변하듯 백제가 팽창해 가면서 영역을 넓힌 지역에는 ‘곰(熊)’이란 글자가 붙은 지명이 숫하다. 그들이 멸망해 가면서 도읍지(都邑地)로 쓰던 공주(公州)의 원래 이름 역시 곰나루(熊津)다.
사람들의 교류가 자유로웠던 그 시대니 만큼, 벼농사는 일본열도에도 곧 전달됐다. 극히 최근까지만 해도 일본 고고학자들은 도쿄(東京)지역까지 보급된 것은 약2300년 전쯤이라고 말하며, 그 시기를 ‘야요이시대(彌生時代)’가 시작된 때라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보다 300년쯤 앞선 2600년쯤에 ‘야요이시대(彌生時代)’가 시작됐다고 학설을 고쳤다.
그런데 사실은 그보다 훨씬 앞선 3800년전쯤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약3000년 전 아오모리(靑森) 지방 승문유적(繩文遺跡)에서 입쌀 7알이 출토된 것이 그것을 입증해 준다.
3000년 전에 그곳에서 벼가 생산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 시대에 벼농사에 관한 정보가 아오모리(靑森) 지방에까지 전해졌다는 사실은 그것을 말해주고 있으며 아오모리(靑森) 지방으로부터 과히 멀지 않은 곳까지 벼농사가 보급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벼농사 소식이 전해지자 산나이마루야마 지역 사람들은 더이상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유혹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혼슈(本州)의 최북단인 추운 아오모리지방에서는 벼농사가 힘겹다는 것을 알아차린 그들은 거기에 눌러앉아 추운지방에서도 키울 수 있는 개량종이 나오도록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이런 사정을 참작할때 산나이마루야마 지역 사람들이 정든 그곳을 버리고 앞을 다투어 남쪽으로 이동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라 하겠다.
★2만3000년전 중국정착
일본열도에서 승문시대라고 불리는 오랜 세월이 흐르고 있는 동안 흑룡강으로부터 요하(遼河)에 이르는 유역에 정착한 가라족(加羅族)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우선, 우리 민족이 중국대륙에 정착한 때는 언제쯤일까?
그것을 추산(推算)하자면 아나톨리아 지방부터 중국 동북부에 이르는 사이에 있는 험준한 산맥과 거리를 참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추산의 근거로 보리농사의 전파(傳播)속도가 흔히 거론된다.
보리재배 기술이 아나톨리아 지방으로부터 영국에 전달되는 데는 약6000년이 걸렸다고 구미(歐美) 고고학자들은 말한다.
그런데 아나톨리아 지방으로부터 영국쪽으로 가는 도중에는 험준한 산맥이 없을 뿐 아니라 거리도 중국 동북부에 이르는 사이보다 훨씬 가깝다.
그런 물리적 조건을 감안하면 아나톨리아 지방에 있던 우리의 먼 조상이 중국 동북부까지 많은 무리를 이끌고 이동하는데는 영국까지 이르는데 걸린 6000년 보다 약2배인 1만2000년이 걸렸다고 봐도 크게 빗나가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민족이 중국 동북부에 도달한 시기는 기원전 2만3000년 전쯤이리라는 계산이 나온다.
2만3000년 전쯤에 중국 동북부에 정착한 한족(桓族=韓族=加羅族)은 그 수가 급증하면서 여러 갈래로 갈라져 제각기 독립된 부족을 구성하더니 드디어는 구한(九桓)이라고 불리는 아홉부족이 됐다.
그러면서도 이때까지만 해도 이들은 모두 태양을 조상으로 섬기는 신앙(信仰)에는 변함이 없었으며 그것을 구심(求心)으로 한데 뭉쳐 행동했다. 그들이 처음으로 나라를 세운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1만년 전쯤이었고 나라 이름은 한(桓)이었다.
중국 고대사에서는 우리를 동이(東夷), 즉 동쪽에 사는 오랑캐라고 부르고 그 부족이 아홉으로 갈려 있다고 해서 구이(九夷)라고도 했다.
한자(漢字)는 은(殷)나라 시대에 우리민족이 만들어쓰기 시작한 글자이다. 이것은 은(殷)나라 유허(遺墟)에서 발견된 갑골문자(甲骨文字)로 이미 밝혀진지 오래다. 그런 글자가 아직 없었을 때의 우리부족 이름이 우리 고유의 말이었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문자가 없었던 시절이었던 만큼 딱히 뭐라고 발음됐는지 지금으로는 알 수가 없고 후세의 중국인들은 견이(田犬夷)·방이(方夷)·황이(黃夷)·백이(白夷)·적이(赤夷)·현이(玄異)·풍이(風夷)·양이(陽夷)·우이(于夷)등이 아홉 오랑캐의 이름이라고 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예맥(濊貊)-숙신(肅愼) 따위와 같이 우리말의 뜻을 멋대로 해석했을 뿐 아니라 고의적으로 좋지 않은 뜻을 가진 한자를 적용해서 만든 예도 많다. 왜 중국 사람들이 고의로 좋지 않은 뜻을 가진 한자를 적용했을까?
고대 중국사람들은 기원전 2707년에 즉위한 것으로 알려진 우리민족의 신시시대(神市時代) 제 14대 치우천황(蚩尤天皇) 때에 이르도록 많은 시달림을 받았기 때문에 뼈에 사무치는 원한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여기서 ‘고대 중국 사람들’이란 어떤 사람을 뜻하는가를 똑바고 알고 넘어가야 한다.
왜냐하면 중국 역사가 왕동령(王桐齡)이 그의 ‘중국민족사’에서 지적했듯이 지금으로부터 약4000년전까지 중국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사람들은 우리민족이기 때문이다.
현재 중국민족이라고 불리는 사람들 가운데는 발해(渤海)사람들처럼 ‘중국민족’이란 이름속에 흡수된 수많은 가라족(加羅族)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고대 중국인은 대부분 가라족
그런 사실을 입증해주는 것 가운데 하나가 삼국유사(三國遺事)이다.
그 속에 있는 고조선(古朝鮮) 대목에 대략 다음과 같은 구절이 보인다.
“위서(魏書)에 이르되 지금으로부터 2000년전에 단군(檀君) 왕검(王儉)이 있어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고 나라를 개창(開創)하여 조선(朝鮮)이라 일컬으니 요(堯)와 동시(同時)라 했다. 왕검(王儉)이 나라를 세운 것은 당(唐)의 요(堯)가 즉위한 지 50년이 지난 때다”
사대주의(事大主義) 사상에 흠뻑 물든 일연(一然)이 지은 삼국유사의 이런 기록은 왕동령(王桐齡)이 갈파(喝破)한 “‘치우왕(蚩尤王)’이 다스리는 구려(九麗)가 지금으로부터 약4000년전까지 중국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에 명백히 모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뿐 아니라 당(唐)나라 요왕(堯王)은 치우천왕(蚩尤天皇)보다 적어도 400년 뒤에 즉위한 사람임이 분명하다.
지금의 중국민족 가운데 많은 가라족(加羅族=枷倻族)이 섞여있다는 사실은 앞으로 중국에 살고 있는 여러 민족의 DNA를 비교조사하면 분명히 밝혀낼 수 있을 것이다.
일본 지명에 담긴 숨길수 없는 가야의 발자취
구한(九恒)족의 인구가 증가하면서 그들의 영역은 급속도로 확장돼 갔다. 처음에는 지금 베이징(北京)이라고 불리는
낙랑군(樂浪郡)지방으로부터 랴오둥반도(遼東半島)와, 산둥반도(山東半島)에 이르는 지역까지 세력을 넓히더니,
나중에는 홍콩(香港)에 가까운 장시(江西)지방까지를 차지하게 됐다.
이런 사실은 사기(史記)에도 적혀있으며, 왕동령(王桐齡)이 저술한 ‘중국민족사’에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4000년전… 현재의 후베이(湖北)-후난(湖南)-장시(江西)등지는 이미 묘족(苗族)이 점령하고 있었고 중국에 한족(漢族)이 들어오게 된 후에 차츰 이들과 접촉하게 되었으며 이 민족의 나라 이름은 구려(九麗)이며 군주는 치우(蚩尤)이다”
여기서 구려는 ‘구려’라는 우리말 소리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며. ‘九黎’ 또는 ‘句麗’라고도 했다. 그 ‘구려’는 가라(加羅=
伽倻)의 모음교체된 꼴임은 말할 것도 없다.
지금부터 약 4000년전에 한족이 중국 본토에 다다르기 이전에 이미 중국 중앙지방에 자리잡고 있던 한족(恒族) 사이에선 골육상쟁(骨肉相爭)이 오랫동안 계속됐었다. 그 이야기는 정원석씨가 번역한 ‘중국의 고대신화(古代神話)’에 자세히 적혀있다.
그 영향으로 치우라는 이름은 병란(兵亂)을 일으키는 별 이름으로 씌어지게 되었으며, 중국 고대국가의 하나인 제(齊)
나라에서는 군신(軍神)으로 모셔지고 있었다.
★가라족 대륙서 밀려나
보리농사기술이 전해지고 갖가지 식용(食用) 식물재배가 보급되면서 원시신앙(原始信仰)사회에서는 이단(異端)이 생기기 시작했다.
예로부터 태양숭배를 고집하는 무리와 농경(農耕)을 하자면 비가 내려야 하니 태양에만 매달릴 순 없다는 주장이 정면으로 부닥치게 됐기 때문이다.
하기야, 인구는 늘어만 가고 식량은 부족하니 비를 내리게 하는 하느님을 모셔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게된 것은 당연한 추세(趨勢)였다.
그러면서 비를 오게 하는 것은, 검은 구름이라고 생각한 무리들 사이에 새로운 종교, ‘곰신앙(熊信仰)’이 급속도로 퍼져가니, 태양신족인 ‘가라족’의 설 땅은 자꾸만 좁아져 갔다. 태양숭배를 고집하는 가라족(加羅族)이 쫓기고 쫓겨서 남하(南下)하다가 마지막으로 터를 잡은 곳이 경북과 경남을 종단(縱斷)하는 낙동강(洛東江) 유역이다.
오늘날의 우리 고대사에는 삼국시대는 있어도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신라에 삼면을 둘러싸이면서도, 서기562년
신라에게 멸망당할 때까지 존속했던 가라(加羅), 즉 우가야(上伽倻)는 무시당하고 있다.
‘위지(魏志)’나 ‘후한서(後漢書)’에는 변진(弁辰) 제국 가운데 하나라고 뚜렷이 적혀 있는 것이 야마국(邪馬國)이다.
우리 역사학자들의 경솔한 행동 탓으로 일본열도를 개척한 위대한 나라 야마터(邪馬國)는, 우리 민족사에서 환상처럼
허무하게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가라족의 이동은 홍수처럼 한꺼번에 일어난게 아니고, 서서히 이뤄져 나갔다. 그러한 그들의 발자취는 그들이
정착한 곳의 지명에 남았다.
‘위지(魏志)’ 왜인전(倭人傳)과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을 들여다 보면 다음같은 구절이 보인다.
“<일기(壹岐)>로부터 다시 바다를 건너 천리(千里)를 가면 말로국(末盧國)에 이른다. 인가(人家)는 4000호 남짓하고
사람들은 산기슭이나 해변을 따라 살고있다”
이 말로국(末盧國)은 ‘고사기’에 말라국(末羅國)으로 적혀있는 고장이다. 옛날에는 마즈라(萬豆良)라고도 했으며 옛부터 한국과 중국을 왕래하는 길목이었으며 규슈(九州) 서부에 있는 오늘날의 가라츠(唐津)라고 불리는 항구가 그곳이다.
그 가라츠는 사가현(佐賀縣)의 옛 이름 ‘히노미치노구치=태양의 길 입구’이다.
일본학자들은 ‘히노미치’를 ‘불의 길’이라 해석하고 그것을 ‘火의 道’라고 표기해 왔다. 그러나 ‘규슈’ 전역이 화재가 난 곳도 아닌데 그런 이름을 붙였을리 있겠는가? 그들은 해(太陽)를 뜻하는 ‘히=日’와 불(火)을 뜻하는 ‘히=火’를 혼돈(混沌)했음을 알 수 있으며 일본사람들은 지금도 ‘규슈’를 ‘불의 나라’라고 부르면서 ‘肥國(히노구니)’라고 표기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스스로를 해(太陽)라고 자칭하는 가라족(加羅族=伽倻族)이 이곳을 경유하여 일본열도에 이동하기 시작했음을 시사해주는게 ‘히노미치노구치=태양의 길입구’의 원래 뜻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을 다시 다짐해 주는 것은 만요슈(萬葉集)에 있는 벼개말이다. 츠쿠시(筑紫)의 벼개말( 枕詞)은 ‘시라누히’다. ‘시라누히’의 어원은 ‘시라노히=新羅의 곳’이며,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츠쿠시(筑紫)라는 지명의 어원은 ‘닿는 곳’, 한반도로부터 오는 가라족이 와 닿는 곳이라는 뜻이다.
어디 그뿐인가! 지금 후쿠오카(福岡)의 곁 하카다(博多)라 불리는 지명의 어원이 ‘배ㅅ가=배의 곁’과 ‘터=곳’으로 이뤄진 ‘배가 닿는 곳’임을 깨달으면 옛사람들이 지금의 후쿠오카 지역을 ‘히노미치노구치=태양의 길 입구’라고 부른 이유를 납득할 수 있을 게다.
이런 사실은 ‘고사기’에 적혀있는 일본 건국신화가 더욱더 확실히 풀이해 준다. 왜냐하면 ‘고사기’에는 “창조신(創造神)이 규슈을 창조하고 나서 그 이름은 ‘시라누히와케’라고 붙였다”라고 돼 있기 때문이다.
‘시라누히와케’의 뜻은 ‘시라누=신라의’와 ‘와케=갈라진 것(分家)’가 어우러진 ‘신라로부터 갈라진 곳’이다.
더욱이 서기527년조 ‘일본서기’에는 신라를 침공하려는 6만명의 왜군(倭軍) 앞을 막아서서 2년에 걸친 격전 끝에 전사한 츠쿠시의 이와이(磐井)라는 장군의 기록이 자세히 적혀있다.
그 기록은 이곳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신라를 위해 충성을 다한 ‘신라로부터 갈라진 곳’ 즉 ‘신라의 분가(分家)’ 사람들이었음을 설명해 주고도 남는다.
이쯤하면 지금의 후쿠오카 지역을 ‘히노미치노구치=태양의 길 입구’ 즉 ‘가라족의 길 입구’, 고쳐 말하자면 ‘가야족이 일본열도로 이동한 길의 입구’라고 부른 이유를 알만하다.
★밀양사람의 땅 ‘말라국’
이제부턴 말라국(末羅國)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고대사를 파헤쳐 보자. 말라국이라는 이름은 옛날에 경남 밀양(密陽)지방에서 ‘규슈’ 서부로 건너온 사람들이 남긴 발자취이다.
그걸 어찌 알 수 있을까? 모든 이름에는 그 이름의 유래가 담겨져 있게 마련이다. 말라국이라는 이름의 뜻을 캐내자면 말라국이라는 것이 우리말을 한자로 빌려서 표기한 것임을 우선 깨달아야 한다.
말라국의 ‘말’’은 용(龍)을 뜻하는 ‘밀(辰)’의 고형(古形) ‘마라’에서 소리바꿈된 꼴이다. 그 뒤에 붙어있는 ‘라’는 곳이나 땅-나라를 뜻하는 옛말이다. 따라서 말라의 원래 뜻은 진나라(辰國)임을 알 수 있다.
지금 밀양이라 불리는 지역은 ‘위지’나 ‘후한서’에 변진제국(弁辰諸國)중의 하나에 적혀있는 미동국(彌凍國)이다. 그 변진(弁辰)은 고깔모자(弁)를 쓰는 진나라(辰國)사람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이로써 말라의 원래 뜻이 진나라임이 확인된다. 그리고 그 말라를 지금 밀양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라’가 태양신(太陽神) ‘라’와 같기 때문에 양(陽), 즉 태양으로 바꿔서 표기한 것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서 밀양은 밀라(辰國)를 다른 글자로 표기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사가현지방으로 진출한 옛 밀양 사람들은 일찍부터 수리사업(水利事業)에 눈을 돌리고 벼농사에 앞장섰다.
밀양 지역에는 그곳 주민 손정태(孫正泰)씨가 1986년 11월 24일에 처음 발견한 수로(水路)가 있다. 이 수로는 총연장 1004m, 현재까지 확인된 수문(水門)의 길이는 20m, 폭은 약 110~152㎝, 입구의 기준 높이는 18㎝나 된다. 단단한 암석층을 지금 같은 기계장비가 없던 시절에 어떻게 이토록 굴착(堀鑿)할 수 있었는지 감탄사가 저절로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수산제(水山堤)라고 불려지는 이곳은 그 지역 사람들이 일찍부터 벼농사에 눈을 돌렸다는 증거라 하겠다.
나는 미국에 살던 때, 뉴욕으로부터 그곳을 찾아 손정태 씨의 안내와 설명으로 이 사실을 내눈으로 확인했다.
그토록 벼농사에 관심있던 옛 밀양 사람들이었기에 가라츠를 경유해서 사가현 지방으로 진출한 그들은 벼농사에 알맞은 고장 즉 충분한 냇물이 흐르는 평야를 찾아 이동하여 지금 요시노가리라고 하는 곳에 이르러 정착했다.
그곳에는 넓은 땅에 풍부한 물이 흐르는 냇물줄기도 셋이나 있었기 때문이다. 1986년 5월 공업단지를 조성하기 위한 발굴작업이 요시노가리(吉野里)에서 시작됐다. 그 고장 사람들 가운데서는 ‘여기는 옛부터 고적지(古蹟址)로 알려진 곳인데 함부로 파헤치는 것은 삼가야 한다’는 소리도 있었지만 지역발전을 위해서는 공업단지를 조성하는 것이 우선돼야 한다는 중론에 밀려 발굴작업은 강행됐다. 그로부터 불과 한달이 지난 6월, 일본 전국을 뒤흔들어 놓은 사태가 발생했다. 땅속에서 2000년 전쯤 것으로 보이는 옹기 관(棺)이 여러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게 발단이었다. 발굴이 계속되면서 고대사를 바꿔쓰지 않을 수 없도록 가지가지 유물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치 한없이 쏟아져 나오니 학자들만이 아니라 몇년 안되는 사이에 어림잡아 1000만명이 넘는 인파가 전국에서 몰려들었다. 이 고장에서 일찍부터 벼농사로 부유한 삶을 누렸던 밀양 사람들의 선조가 2000년의 오랜 잠에서 깨어난 셈이다.
★‘소치마’는 김천군 조마면
밀양 사람들 뒤를 이어 경북 김천군(金泉郡)에 있는 조마면(助馬面) 지역 사람들이 ‘규슈’ 남부지방에 정착하니 그곳 이름이 사츠마(薩摩)다.
‘일본서기’ 긴메이천황(欽明天皇)2년(서기 541년)4월(四月)조에 “가라(加羅)의 아라왕(安羅王)을 보필하는 사람과…소치마왕(卒馬王)…등이 백제로가서…”라는 구절이 보인다. 일본학자들은 그 소치마(卒馬)를 김해군(金海郡)에 있는 솔리마(率利馬)일 것이라 하지만 실제는 김천군에 있는 조마면 지역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일본서기’에 ‘가라(加羅)’라고 적힌 곳은 일본학자들도 인정하듯 고령(高靈)에 자리했던 우가야(右加羅=上伽倻)이므로 우가야지역에 속했던 김천군(金泉郡)의 조마면(助馬面)이지 아라가야(下加羅=下伽倻)지역인 김해(金海)지역에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조마면 사람들의 조상이 정착한 지역은 지금의 구마모토현(熊本縣)이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 되기 전까지도 사츠마( 薩摩)라 불렸던 이곳은 곰숭배 신앙으로 전향(轉向)한 사람들의 근거지가 된 후로부터 구마모토 즉, 곰숭배(熊崇拜)의 일곱 아들이 상륙한 가사사(笠沙)가 있는 고장이라는 뜻으로 불렸다.
나라현의 ‘나라’는 우가야가 세운 나라서 유래
★우가야(上伽倻)란 ‘가야족의 종가’를 뜻한다.
지금의 고령(高靈)지역을 중심으로 존재했던 우가야는 중국 동북부지방에 자리를 잡았던 태양신앙족 가운데서 끝까지 태양숭배사상을 버리기를 거부한 무리를 이끌고 남하해 오다가 낙동강 유역에 정착한 우두머리 집안이다.
시초에는 지금의 함안(咸安)지역에 자리잡은 아라가야(安羅伽倻=下伽倻)만을 작은 집(分家)으로 거느리고 있었지만
해를 거듭함에 따라 작은 집의 수는 점점 많아져서 우가야가 신라에게 멸망당한 서기 562년쯤에는 11개나 되는 작은
집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 시기에, 가실왕(嘉實王)의 분부를 받들어 가야금을 만든 우륵(于勒)이 12가야를 노래로 불러 남긴 것과 ‘일본서기’
긴메이천황(欽明天皇) 23년조(서기 563년)에 남겨진 12가야의 이름이 그런 수효를 확인시켜 준다.
중국 동북부지역에 정착한 무리들 사이에 농경재배가 보급되어 가자 사람들 사이에 비가 내리기를 원하는 마음은 더욱 간절해지고 그 때문에 곰숭배신앙은 한층 더 힘을 얻게 됐다.
맹렬한 속도로 증대되는 그 세력에 밀려 태양숭배신앙을 고집하는 가야족이 낙동강 유역까지 내려온 시기는 아마도
지금으로부터 4000년 전쯤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런 추정을 가능케 하는 것은 우가야가 일본 열도에 왕조를 세운 때를 지금으로부터 약 3800년 전이라고 기록한 일본의 여러 고문서 때문이다.
근년에 이르러 여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많은 고사서가 일본에서 발견됐다.
그 중에는 아직 위서(僞書)라고 무시하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츠가루외삼군지(東日流外三郡誌)?, 다케우치문수
(竹內文書),우에츠후미(上記) 등의 여러 책은 황실의 후예를 포함한 유서깊은 문중에서 비장해 온 문서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그 기록 속에는 마치 미리 서로 약속이나 했던 것처럼 이구동성으로 "진무천황(神武天皇)이 즉위
하기 전에 우가야와조가 72대 계속됐었다"고 적혀있다.
앞으로 차차 이야기 하겠지만 진무천황이 새로운 왕조를 시작한 것은 서기 420년경이니 지금부터 약 1600년 전이다.
따라서 우가야왕조가 72개 계속됐었다면 한 세대를 줄잡아 30년으로 볼 때 2100년이니까 지금부터 약 3700년 전에
왕조를 이르켰다는 계산이 된다.
동해를 건너 시네마현 쪽으로 이동해 온 우가야 사람들이 지금 나라(奈良)라고 불리는 곳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기
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육지와 연결돼 있던 승문시대와는 사정이 달랐다. 많은 사람이 무리를 져서 도보로 일본
열도로 옮겨갈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배를 이용한 이동이 반복됐다.
더러는 후쿠오카현(福岡縣)이나 시가현(佐賀縣) 쪽으로, 또 다른 무리들은 시마네현(島根縣) 쪽으로 일본 열도에
상륙했는데 시마네현 쪽으로 건너간 수효가 훨씬 많았다.
경남 해안에서 대마도(對馬島) 쪽으로 건너가려는 배는, 서쪽으로부터 동해로 흘러드는 해류에 밀려 직진하지 못하고
시마네현 쪽으로 다다르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노를 저어 나가거나 돛을 단 배로 바람을 이용하던 시절에 항해는 대마도와의 사이에 역류해 오는 빠른 해류의 영향을
피할 수 없었다.
‘고사기’와 ‘일본서기’가 시마네현 지방에 존재했던 이주모국(出雲國)을 네노구니(根國), 즉 열도를 개척한 사람들이
거쳐온 (뿌리의 나라(根國))라고 부르고 있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낙동강 유역까지 이른 가야족이 큰 집(宗家)인 우가야와 작은 집 아라가야로 나뉘어 나라를 세웠지만 이 시기에 두
집안은 서로 형제애가 두터웠다.
저들이 일본 열도를 개척해 나가던 시기의 우애 좋은 정경은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신대(神代) 기록을 읽어보면 잘
알 수 있다.
다만 한가지 유의할 점은‘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신대 기록은 우가야왕조의 신대와, 진무왕조의 신대를 뒤섞어 기술한
것이기 때문에 불화스러운 장면도 다소 있다는 점이다.
어쨋든 가야족의 대부분은 시마네현에 있는 소노하마(園浜)라 적고 (소노하마)라 읽고 잇는 이 해변의 이름은
(첨=처음)과 (하마=海邊)이 결합된 것으로‘가야족이 처음 상륙했던 해변’이라는 뜻으로 부쳐진 것이다.
우리말 (첨=처음)을 일본어로 (소)라고 발음하는 것은 파열음과 받침을 표기할 문자가 없는 탓으로 (조메) 또는
(소메)라고 하거나 받침이 없는 (조) 또는 (소)로 기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해가 바뀐 다음 처음으로 붓글씨를 쓰는 것을 일본말로는 (가키조메)라 하고 낮 모르던 사람이 얼굴을 처음 익히는
것을 (나레소메)라고 하는데 그때에 씌어지는 (조메)나 (소메)가 바로 우리말 (첨=처음)을 뜻하는 말이다.
일본 황실이 해마다 봄 가을 두차례 모시고 있는 가라가미마츠리(韓神祭)는 한반도로부터 이 해변에 도착한 (스쿠
나히코)와 (소노가미(始祖神))를 받드는 제사이다.
그렇게 소중히 모셔지고 있는 (그쿠나히코)라는 신은 석탈해(昔脫解)의 후예로서 신라 제16대왕 석흘해(昔訖解)의
아들 보(甫) 또는 손자 념(恬)이나 성(性)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 (스쿠나히코)에 관해서는 수로왕의 후예가 혁명을 일으켜 우가야왕조를 쓰러뜨리고 황위에 올라 진무천황이라 일컫게 되는 이야기를 할 때 자세히 말할 것이다.
여하간, 약 4000년 전쯤에 시마네현을 거쳐 지금 나라현이라고 불려지는 지역에 다다른 우가야족은 그곳에 나라를
세웠다.
현재 그 지역 일대를 (나라)라고 부르며 그 현청(縣廳) 소재지를 나라라고 하는 것도 그런 역사적 사실에서 유래된다.
그리고 그들은 지근의 나라현 덴리시(天理市) 나가라(長柄)로부터 가이치(海知)에 이르는 일대를 경북 고령에 있었던
우가야족의 나라이름을 그대로 본따서 나리이름을 (야마터)라고 했다.
그들이 도성(都城)을 쌓았던 곳은 현재 교-도부중(京都府中)과 교-도부(京都府) 남부에 이르는 일대이다.
옛 사람들이 그곳을 (야마시로=야마國의 재(城))라고 불렀으므로, 서기 794년부터 한자로 (山城)이라고 표기하고
(야마시로)라고 부르고 있다.
우가야왕조는 서기 420년경에 수로왕의 후예인 진무천황에게 굴복할 때까지 약 2100년 동안 유지됐다.
그 사이 도성을 꽤 많이 쌓았을 테지만 지금 알려져 있는 곳은 단 둘 뿐이다.
그중 하나는 (이가루가(斑鳩))라 하고 또 하나는 (가츠라기(葛城))라 부른다.
일본학자들은 ‘그 일대에 (이가루)라는 산새가 많이 몰려와 울었던 것에 연유해 그곳을 (이가루가)라 부르게 됐다’라고
풀이하고 있지만 그건 억지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왜 그게 틀렸느냐 하면 (이가루)라는 새는 일본전국 어느 곳에나 많은데 왜 굳이 그곳만 골라서 (이가루가)라고 불렀을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이가루)의 원형은 원래 (우가라(=우가야))였다.
그것이 세월이 흐르면서 모음교체되어 (이가루)라고 발음하게 된 것이다.
이 지역 사람들이 (우고쿠=움직이다)를 (이고쿠)라고 발음하고 있는 게 그것을 입증해 준다.
따라서 (이가루가)는 우가라(우가야)의 가(곳)이라는 뜻임을 알게 된다.
(가츠라기)라는 이름의 어원은 (가라(加羅) 기(城)), 즉 가야족의 재(城)다.
그런데 처음에 그것을 한자로 표기한 사람은 (가)소리를 한자 (갈(葛))로 나타냈는데, 후세사람이 (갈(葛))의 받침(ㄹ)
까지 발음한 탓으로 (가츠)로 표기하게 됐다.
왜냐하면 받침을 표기하는 수단이 없는 일본어에서는 받침(ㄹ)은 (치) 또는 (츠)로 표기하는 게 통례이기 때문이다.
일본말로 (달(達))을 (다치) 또는 (다츠)라고 표기하고 (돌(突))을 (도츠)라고 읽는 것도 그 예다.
▲아라가야(安羅伽倻=下伽倻) 종가(宗家)인 우가야 사람들은 나라현 쪽으로 이동해 갔지만 아라가야(安羅伽倻=
下伽倻) 사람들은 그곳에서 멀지않은 하가와(?川) 유역에 자리잡았다.
저들은 흑룡강과 송화강 유역에 정착한 옛 조상들의 지혜로움을 본 땄을런지도 모른다.
결과적인 이야기가 되겠지만 훗날 벼농사 기술이 전해졌을 때 이곳이 곡창지대가 된다.
이 지역은 한쪽은 동해를 바라보고 삼면은 주고쿠(中國)산맥에 둘러 쌓인 관계로 (이두모)라는 별명으로 불렸었다.
(이두모)의 (이)는 우리말 (이다지),(이토록)할 때 쓰이는 부사로서 뜻을 강조하기 위해 쓰인다.
그리고 이어지는 (두모)는 모음교체가 되어 요새 (두뫼)라고 발음되는 말의 옛 꼴인데, (산에 둘러 쌓인 곳=산골)을
뜻한다.
즉 (이두모)란 (산에 둘러 쌓인 산골)이라는 뜻으로 부쳐진 별명이었는데 어원을 알지 못하게 된 후세 사람들이
그것을 이 고장 이름으로 삼게 돼 버렸다.
일본 고대사에는 그것이 모음교체된 (이즈모(出雲))로 표기돼 있다.
우가야 사람들이 이곳을 마다하고 다른 곳을 찾아 이동해 간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없었던 게 아니다.
왜냐하면 이 고장은 이름 그대로 두뫼 산골이었을 뿐 아니라 면적도 매우 좁았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아라가야 사람들이 이곳에 정착한 후 제일 먼저 시작한 사업이 영토확장이었다.
그때 상황은 이즈모풍토기(出雲風土記)에 재미있게 묘사돼 있다.
이즈모풍토기는 서기 753년에 김태리(金太理)라는 사람의 손으로 완성된 것이다.
일본 ‘오로치 신화’는 석탈해의 비밀을 푸는 열쇠
-'고사기와'와 '일본서기'에는 '오로치'를 머리와 꼬리가 각각 여덟 개 달린 큰 구렁이로 묘사돼 있기 때문에 일본사람들은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가야에서 '이즈모'에 건너 온 사람이 기지를 써서 '고시(高志)'에서 매년 내습하는 고구려족을 물리친 사실(史實)을 우화로 엮은 것이다. 그런 사실을 왜 사실대로 기록하지 않고 중요한 국사(國史)속에 일부러 우화화(寓話化)해 놨을까를 생각해 보면서 이 신화의 어떤 점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를 따져 보는 게 좋겠다.
일본열도로 이주하던 고구려족은 한번에 큰 떼를 져 오지는 않았지만, 그 수효는 꾸준히 증가해 갔다.세월이 흐르면서 남쪽으로부터 북상하는 가야족과 남하하려는 고구려족 사이에는 끊임없는 분쟁이 일어났다.머리 수로 따지자면 가야족이 훨씬 많았지만, 가야족은 고구려족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그도 그럴 것이 고구려족은 철제 무기와 갑옷으로 무장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추운 중국 동북부 지방에서 생존해 오는 동안 어느새 터득한 불을 다루는 기술은 고구려족의 뛰어난 제련법을 개발하게 했다.그 덕에 일찍부터 철제무기를 갖게 된 고구려족을 청동기만 쓰고 있던 가야족이 어찌 당할 수 있었으랴. 벼 농사가 일본열도에 전해진 3800년 전쯤에 들어서면서 가야족에 대한 압박은 더욱 심해져 가더니 드디어 (이즈모)평야마저도 고구려의 세력하에 들게 됐다.
고구려족은 매년 추수가 끝날 무렵이 되면 (노도반도)쪽으로 처 내려와 가야족이 한해 동안 땀흘려 수확한 벼를 강탈해 가곤 했다.겁에 질린 가야족은 그들을 (오로치)라고 부르게 되고 즐거워야 할 추수 때에 눈물에 젖어 지냈다.
(오로치)의 (치)는 요새말로 (저 치=저 사람)?(이 치=이 사람)이라고 할 때의 (치=사람)이다.그리고 (오로)는 고구려족을 지칭하는 (솔호 solho)에서 변화된 말이다.그런 소리변화는 (아)줄 소리와 (사)줄 소리가 서로 바뀌기 쉽기 때문에 자주 일어난다.(솔호 sol-ho)가 리에존(連音)으로 (sol-ho 소로)로 발음되고, (소)소리가 (오)로 바뀐 탓으로 (솔호=고구려족)을 (오로)라고 부른 것이다.그런 소리변화는 (아)줄의 소리와 (사)줄의 소리가 서로 바뀌기 쉽기 때문에 자주 일어난다.예컨대 요새말로 (손수=스스로 직접)이라는 말은 이조(李朝) 때까지만 해도 (손소) 또는 (손오)라 했으며, (무우)는 지금도 (무수)라고 발음하는 사람이 적지않다.
예부터 지금의 함북(咸北)지방이나 연해안 지방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배를 타고 일본열도를 향하면 배는 으레 (노도반도)에 도착하기 마련이었다.그런 탓으로 발해국(渤海國)에서 일본으로 보낸 사절은 언제나 (노도반도)에 닿았다.그 때마다 일본조정은 “우리는 외국사절을 (하카다(博多))에 마련한 영빈관에서만 받아드린다”고 항의했지만, 발해사절이 도착한 곳은 여전히 (노도반도)였다.나중에야 그것이 역류(逆流)하는 대마난류(對馬暖流) 때문임을 알게 된 일본조정은 서기 804년 (노도반도) 섬에 발해사절을 맞이하기 위한 영빈관을 건립했다.이런 이유로 (노도반도)주변으로부터 니가타현(新潟縣)지방에 이르는 넓은 지역은 고구려족의 근거지가 됐다.그 때문에 일본사람들은 그 지역을 (고시국(高志國)이라고 부르게 됐으며, 급기야 (고시국(越國))이라고 불리게 됐다.
★오로국은 고구려의 나라
여기서 왜 고구려족이 사는 곳인 (오로국)을 (고시국)이라고 했느냐를 설명해 두어야 할 것 같다.원래는 (오로국=고구려족의 나라)라고 했었지만, 해를 거듭하는 사이에 모음교체을 일으켜 (오리국)이 됐다.그런데 그후 차차 (아)줄 소리와 (가)줄 소리의 교체현상이 일어나 (오리)가 (고리)로 변했다.그러한 (아)줄의 소리와 (가)줄의 소리의 교체는 요새 말 (알고저=알기를 원해서)를, 이조 시기에는 (알오져)라 했고, 요새 말 (알고사=알게 되어서야)를 이조 시기에는 (알오사)라 발음했던 것이다.
그와 때를 같이해서 (라)줄의 소리와 (사)줄의 소리의 교체현상도 나타났다.예컨대 빠르다는 뜻으로 쓰이는 (날래다)는 (날쌔다)라고도 하는 게 그 좋은 예다.그런 자음교체(子音交替) 현상 탓으로 (고리)는 (고시)라고 발음하게 된 것이다.지금도 센다이(仙臺)와 이오데현(岩手縣) 가마이시(釜石)지장에서는 (고시)지역을 (오리) 또는 (오로)라고 부른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에는 신화(神話)가 여러개 있다.그런 가운데서 서민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것은 뭐니뭐니 해도 ‘(오로치)를 퇴치한 신화’와 ‘이나바(因幡)의 하얀 토끼 신화’다.‘(오로치)를 퇴치한 신화’는 고구려족으로부터 시달림을 받던 아라가야 사람들을 구한 (수사노오)의 이야기이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에는 (오로치)를 머리와 꼬리가 각각 여덟 개 달린 큰 구렁이로 묘사돼 있기 때문에 일본사람들은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다.그러나 사실은 가야에서 (이즈모)에 건너 온 사람이 기지(奇智)를 써서 (고시(高志))에서 매년 내습(來襲)하는 고구려족을 물리친 사실(史實)을 우화로 엮은 것이다.그런 사실을 왜 사실(事實)대로 기록하지 않고 중요한 국사(國史)속에 일부러 우화화(寓話化)해 놨을까를 생각해 보면서 이 신화의 어떤 점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를 따져 보는 게 좋겠다.왜냐하면 이 이야기는 신라사(新羅史)에 오늘날까지도 감춰져 있는 석씨왕족의 비사(秘史)를 풀어주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고구려족을 구렁이 우화화
우선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실린 그 신화의 요점만 추려 간단히 소개하고 그 가운데 번호를 부친 부분에 숨겨진 뜻을 다시 풀이해 보기로 하자.
①(스사노오)는 하늘나라에서 신라에 내려와 처음에는 (소시머리)에 계셨다.그러나 곧 ‘이곳엔 있기 싫다’라 하시며 진흙으로 배를 만들어 타고 동쪽으로 가,
②(이즈모)의 히가와(?川)상류에 있는 도리가미고개(鳥髮丘)위에 이르렀다.
이때 상류에서 젓가락이 떠내려 오는 것을 보고 ‘윗쪽에 사람이 사는구나’고 짐작되기에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니 노부부가 소녀를 가운데 놓고 울고 있었다.우는 사연을 묻자 ‘우리에게는 딸이 여덟이 있었는데,
③고시국에서 머리와 꼬리가 여덟 달린 (오로치)가 매년 와서 잡아먹어, 마지막 남은 얘도 잡으로 올테니 그게 서러워 웁니다’라고 대답하는 게 아닌가. 그 말을 들은 (스사노오)는 큰 항아리 여덟에 독주를 담아 놓고 기다리라고 일렀다.아니나 다를까 머지 않아 머리가 여덟 달린 (오로치)가 와서 준비된 여덟 항아리의 독주를 머리 하나씩 박아넣고 몽땅 마시더니 모두 취해 잠들었다.그 기회를 놓칠세라 (스사노오)는 허리에 찼던 칼을 뽑아 (오로치)를 잘라버리니 히가와가 핏빛으로 물들었다.이때
④(오로치) 꼬리를 자르니 제 칼날이 톱날처럼 흠집이 났다.이상히 여겨 꼬리를 갈라 열어보니,
⑤칼이 한자루 나왔는데 이상하게도 그 칼에는 아무 흠집도 생기지 않았는지라, ‘이건 신검이므로 천황에게 바쳐야겠다’며,
⑥6대 손자로 하여금 천황에게 바치도록 했다.그때
⑦그가 살려 중 여성의 이름은 이나다히메(稻田姬)였으며, 그녀의 아버지는 아니다미야누시(稻田宮主)였다.(스사노오)는
⑧이나다히메를 아내로 삼고 보금자리를 만들만한 좋은 곳을 찾다가 어느 곳에 이르러 ‘이곳이 내 마음이 스가스가(淸淸)하다’고 하고 그곳에 궁을 짓고 살았다.
대충 이상이 중요한 줄거리인데 우선 이 신화를 일부러 우화화해 놓은 이유부터 설명해야겠다.이 신화의 내용은 철제 무기를 가진 고구료족을 지혜로 물리친 가야족의 자랑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앞에서 말했듯이 일본열도의 주인공은 가야족이다.그러나 고시 지방을 점거하고 강력한 힘을 자랑했었던 고구려족을 무멸(무멸)하는 것은 절대금물이었다.왜냐하면 그것은 곧 내전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많았으며 그럴 경우 왕조의 가반이 무너질 염려가 많았기 때문이다.
‘고사기’과 ‘일본서기’를 편찬한 시기는 석씨문중 일파인 덴무천황(天武天皇)이 무력혁명으로 새 왕조를 세운지 얼마 안된 때였다.그런데 그 군사혁명의 주력을 이뤘던 게 바로 고시 지방의 고구려족이었다.따라서 고시 지방 사람들을 물리친 자랑을 가야족이 노골적으로 늘어놓으면 그들의 반감을 사게 될 것이 두려웠다.그 때문에 고시 지방 사람들인 고구려적을 현실에 있을 수 없는 구렁이로 표현한 후화를 만들었다고 여겨진다.
★석씨의 본관은 미츠에시
①(스사노오)는 하늘나라에서 신라에 내려와 처음에는 (소시머리)에 계셨다고 했다.여기에서 (하늘나라)라고 한 부분은 우가야(上伽倻)를 뜻한다.어떻게 그런 단정을 할 수 있느냐 하면 첫째로, 일본 고대사에 (하늘나라)로 표현돼 있는 곳은 거의 모두 가라(韓國)임을 문맥으로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내려왔다’는 말은 우(上)로부터 아래로 이동하는 생동을 말하는 까닭에 우가야에서 (소시머리)로 내려온 게지, 아라가야(安羅伽倻=下伽倻)에서 올라왔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다음으로 ‘신라로 내려와 처음엔 (소시머리)에 계셨다’는 (소시머리)는 우가야가 자리했던 곳에서 가까운 가야산을 이르는 말이다.지금도 그곳을 ,소시머리)라 한다.
②(이즈모)의 히가와(?川)상류에 있는 도리가미고개(鳥髮丘)위에 이르렀다고 했다.여기서 ‘도리가미고개’라고 표기한 것은 (소시머리)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鳥髮)는 우리 고어인 (사=鳥)와 (머리=髮)를 결합해서 만든 (사머리)임이 분명하고 소유격 조사인 (시)가 생략된 형태다.그 모음교체 꼴인 (소머리)는 한자로 (牛頭) 또는 (牛首)라고 표기되기도 하며 춘천(春川)의 (소시머리=牛首)처럼 우리나라 지명에도 보인다.
③고시국에서 머리와 꼬리가 여덟 달린 (오로치)가 매년 와서 잡아먹었다고 했다.여기에 나온 (고시국)은 고구려족의 근거지역이었던 지금의 후꾸이현(福井縣)으로부터 니가타(新潟縣)주변에 걸친 넓은 지역을 가리킨다.(오로치)가 매년 찾아와서 잡아먹어...라는 부분은 ‘고구려족이 매년 내려와서 가져갔다’는 뜻이다.
④(오로치) 꼬리를 자르니 제 칼날이 톱날처럼 흠집이 났다고 했다.‘칼날이 톱날처럼 흠집이 났다’는 것은 그가 찼던 칼이 잘 단련된 쇠가 아니였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대목이다.
⑤칼이 한자루 나왔는데 이상하게도 그 칼에는 아무 흠집도 생기지 않았다는 것은 (오로치)가 지닌 칼이 잘 단련된 철검이었음을 말해준다.
⑥6대 손자로 하여금 천황에게 바치도록 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진무천황의 즉위연대가 서기 420년쯤인 것으로 미루어 6대 손자라고 칭하는 것이다.오늘날 천황이 황위(皇位) 인계할 때 황위(皇威)의 상징으로 전수하는 구사나리노츠루기(草?劍)라고 불리는 검이 바로 이때 (오로치) 몸에서 나온 칼이다.
⑦그가 살려 중 여성의 이름은 이나다히메(稻田姬)였으며, 그녀의 아버지는 아니다미야누시(稻田宮主)였다는 대목은 (수사노오)가 살려준 여성의 이름 이나다히메와 그 아버지 이름 이나다미야누시에 쓰인 (稻田)은 고구려족이 매년 빼앗아간 것이 아라가야 사람들이 추수한 벼(稻)였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는 표기이다.
⑧이나다히메를 아내로 삼고 보금자리를 만들만한 좋은 곳을 찾다가 어느 곳에 이르러 ‘이곳이 내 마음이 스가스가(淸淸)하다’고 하고 그곳에 궁을 짓고 살았다는 대목은 석씨(昔氏)의 원래 본관이 지금의 시마네현(島根縣)에 있는 현청소재지 마츠에시(松江市)임을 깨닫게 해준다.
(스사노오)가 마음이 스가스가(淸淸)하다고 한 것은 ‘마음을 상쾌하게 해주는 좋은 곳이다’라는 뜻이며 그가 궁을 짓고 정착했다는 곳에 스가신사(須賀神社)가 있다.그 (스가=상쾌한 곳)은 모음교체로 (서가)로 변음된 후 (소가(蘇我))라고 표기되기도 한다.석씨의 (석)은 중성(中聲)이 생략되어 받침이 생긴 형태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 기록은 ‘왜(倭)나라 동북 1000리(4000km)에서 태어났다’는 석탈해(昔脫解)의 탄생지가 (이즈모)였다는 사실(史實)과 김씨성을 가진 나물와(奈勿王)에게 왕좌를 뺏긴 흘해왕(訖解王)의 자손이 바다를 건너 돌아온 곳이 이즈모시(出雲市)였다는 것을 재확인시켜주는 중요한 사료이기도 하다.
석탈해가 탄생했다는 단바(丹波)는 이즈모
-시련을 겪으면서도 끝끝내 태양숭배신앙은 곰숭배사상(검은 빛을 숭배하는 신앙)으로 전향한 수로왕의 후손이
'이즈모'를 침공한 서기 400년 후에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들의 굳은 태양숭배신앙은 수로왕의 후손인 진무천황(神武天皇)에게 나라를 빼앗긴 후 산골짜기로 피신한 서민들 후손에 의해 오늘날까지 전해져 온다.
흘해왕(訖解王)의 자손에 대해서는 우리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한마디 말도 없다.그러나 ‘고사기’와 ‘일본서기’에는
바다를 건너 ‘이즈모’로 돌아온 그들의 이야기가 자세히 적혀있다.수백년 동안에 걸쳐 한-일 두나라의 수십만 아니 수백만 백성의 목숨을 잃게 한 흘해왕의 후예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는 수로왕의 후손 이야기와도 관련이 깊다.아무튼 종가(宗家)인 우가야(上伽倻)는 동해로부터 멀리 떨어진 나라현(奈良縣)에 위치했던 탓으로 대륙쪽에서 바다를 건너오는 새 문명은 먼저 이즈모에서 소화(消化)된 연후에야 우가야로 전달되게 마련이었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에는 벼, 조, 보리, 콩 따위 곡물재배 기술은 더 말할 나위 없고 도요(陶窯)에서 구워내는 각종 토기나 기와(瓦)는 물론이고 제철기술도 모두 이즈모로부터 전수됐다고 적혀있다.풀이나 짚으로 지붕을 잇던 그들에게 썩지 않고 오래 견디는 기와가 얼마나 소중했는지, 기와신사(瓦神社)라고 불리는 신사가 있는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이것을 요새말로 바꿔 말하면 이즈모는 첨단기술을 먼저 익힌 선진국이었던 셈이다.비록 작은집이긴 했어도 종가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의 지혜를 가르쳐오는 동안 아라가야 사람들 마음에 적지 않은 자부심과 우월감이 누적돼 간 것도 사실이다.
불멸의 태양숭배신앙(太陽崇拜信仰) 가라족은 태양숭배신앙을 고집한 탓으로, 빗물 없이는 수확을 기대하지 못하는 농사가 보급되면서부터 점차 따르는 사람의 수효가 적어졌기 때문에 흑룡강 유역을 떠나 한반도 남부까지 이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런 시련을 겪으면서도 끝끝내 태양숭배신앙은 곰숭배사상(검은 빛을 숭배하는 신앙)으로 전향한 수로왕의 후손이 이즈모를 침공한 서기 400년 후에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상가는 우리말의 '상것'
그들의 굳은 태양숭배신앙은 수로왕의 후손인 진무천황(神武天皇)에게 나라를 빼앗긴 후 산골짜기로 피신한 서민들
후손에 의해 오늘날까지 전해져 온다.다른 사람들과 같은 정상적인 생활을 마다하고 정부의 꾸준한 설득도 뿌리친 채
현재도 계곡에 숨어사는 이들을 일반사회 사람들은 ‘상가’라고 부른다.
상가는 요새 우리말로 비천한 사람을 지칭하는 ‘상것’을 뜻한다.지금도 상가라고 멸시받고 있는 이들은 대체 어디서 사는 사람들일까? 서기 1875년 2월 시마네현의 어느 순경이 남긴 기록에서 보면 상가는 이즈모(出雲), 돗도리(鳥取), 이와미(石見)지방 변두리에 있는 심산유곡에서 살고 있다고 쓰여있다.
그의 기록에 나타난 이 지역은 바로 옛 ‘이즈모국’의 영역이다.그 기록에 따르면 상가는 ‘오게’ 또는 ‘덴바’라고도 불린다.오게란 바로 ‘오=오우’지역의 ‘게=것’, 즉 이즈모의 수도라고 할 ‘오우고을(意宇郡)것=오우고을 사람’임을 뜻한다.그리고 덴바는 ‘뜬=떠다니는’+‘보=사람’, 즉 한 곳에 정착해 있지 않고 떠돌아다니는 사람이란 뜻이다.
우리 모음(ㅡ)를 표기할 수단이 없는 일본사람들은 ‘뜬’을 ‘덴’으로 나타내고, ‘뚱보=뚱뚱한 사람’, ‘잠보=잠만 자는 사람, 잠꾸러기’라고 할 때 쓰는 ‘보=사람’의 모음교체 꼴이 ‘덴바’의 ‘바’임을 알 수 있다.그토록 비참한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도 이들은 태양을 숭배하는 신앙은 결코 버리질 않았다.‘상가’연구로 유명한 미스미히로시(三角寬)씨는 “상가들은 아침인사를 마친 후 개울에 세수를 하러가는 도중에 동쪽에 뜨는 태양을 향해 합장하고 기도를 드린다”고 보고했으며, ‘대지에 산다’의 저자 시미지세이이치(淸水精一)씨도 “상가들은 어린아이들까지도 태양을 향해 절하는 게 특징이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미스미씨의 일본 전국 33개소에 있는 상가 공동체의 우두머리를 두루 만나보고 그들 상가의 생활신념의 요점을 물어
그 결과를 대충 다음 같이 기록했다.
①사람의 태양에서 태어나고, 태양의 힘에 의해서 살아간다.
②태양은 불과 물의 근원이며, 만물을 살아가게 하는 주인이시다.
③태양이 없어지면 만물은 죽는다.
④우리들의 선조는 태양으로부터 태어났으며, 태양으로 돌아간다.
★아라가야족 태양숭배 간직
지금도 ‘상 것’이라고 멸시받으며 세상을 등지고 살아가는 이즈모의 아라가야족 유민(遺民)이 얼마나 철저한 태양숭배사상을 간직하고 있는가를 이런 그네들의 생활신념에서 엿볼 수 있다.
우리를 더욱 감동시키는 것은 미스미씨의 다음 같은 기술(記述)이다.[내가 소화18년(서기 1943년) 니와(丹羽)의 가츠라가와(桂川)유역에서 상가 우두머리 가운데서도 최연로자를 만나 들은 그들의 전승(傳承)은 정말 놀라웠다.그것을 요약해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①그들의 원조 이름은 ‘미가라와케노 나스도’라 했다.
*첫머리의 ‘미’는 ‘신성(神聖)한’을 뜻하는 접두사. *‘가라’는 ‘가라(加羅)’임이 틀림없다.*‘와케’는 갈라진 것, 즉 작은집(分家)을 뜻하며, 우가야의 작은 집은 이즈모를 가리킨다.*‘노’는 소유격 조사이고, *‘나스도’는 '하는 사람', 즉 집행자다.이것을 종합하면 “‘상가’는 태양신앙을 실천하는 아라가야사람이다”라고 후손에게 전하는 말임을 알게 된다.
나는 그후 소화23년(서기1948년), 도쿄 ‘아야다치 단바(丹羽)’로부터 또 다른 상가의 전승을 들을 수 있었다.
②아야다치들은 ‘수사노오노미코도’가 ‘이나다(稻田)’ 아가씨와 결혼하기 전부터 수사노오노미코도에게 귀순한 이즈모사람들의 후예로 아야다치 또는 ‘아야츠치’, ‘스가츠치’라고도 불린다.그들의 별칭 아야다치, 스가츠치의 ‘아야’는 아라가라(下伽倻)를 뜻하며, ‘라’줄 소리는 가라(伽羅)가 가야(伽倻)로 바뀌듯 ‘야’줄 소리로 소리바뀜 된다.‘츠’는 소유격 조사이고, ‘치’는 고구려사람을 ‘오로치’라고 불렀듯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아야다치의 ‘다’는 고대 한국어 소유격 조사 ‘나’가 ‘다’줄 소리로 바뀐 것이며, 아야츠치,스가츠치의 ‘츠’는 그 ‘다’의 모음교체 꼴이다.즉 아야다치, 스가츠치는 ‘아라가야 사람’이라는 뜻이고, 저들이 ‘스사노오노미코도’가 ‘오로치’를 퇴치를 하기 전부터 이즈모에 따라 온 가야사람이라는 자부심을 나타내는 이름임을 알게 된다.스가츠치의 ‘스가’는 스사노오노미코도가 정착하게 된 곳을 (스가=좋은 곳, 상쾌한 곳)이라고 부르게 된 것에 연유한다.그 스가는 우리나라에서는 중성을 잃고 받침화 했기 때문에 ‘석(昔)’이라고 발음되고 있으며, 일본에서는 훗날 모음교체 되어 ‘소가(蘇我)’라고 불리게 됐다.
우리는 이상과 같은 상가들의 전승에서 아둔하다고 할만치 태고로부터의 태양숭배신앙을 고집하고 있는 아라가야족의 신념을 실감하게 된다.미스미씨의 기록속에 자주나온 니와(丹波) 또는 니와(丹羽)는 석탈해(昔脫解)가 탄생했다고 전하는 ‘삼국유사’의 ‘단바(丹波)’ 즉 이즈모를 가리키는 말임을 간과할 수 없다.
한-일 역사의 비밀을 캔다
-신라사의 기록은 저들의 우위를 내세우려는 의도에서 왜곡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민족의 건국시기는 중국의 요왕(堯王)과 같은 시기(사실은 그보다 훨씬 빠르다)라고 한 삼국유사의 말대로라 해도 5000년전이고, 중국사학자 왕동령(王桐齡)이 저술한 '중국민족사'에는 '지금부터 약 4000년전까지 호북(湖北), 호남(湖南), 강서(江西)까지는 치우왕(蚩尤王)이 다스리는 구려(句麗)들의 영역이었다'고 저술돼 있다. 이것을 봐도 구려, 즉 고구려족이 신라보다 몇 천년 앞서 건국했음을 알 수 있다.
★가야족의 본가 '임나'
■‘님의 나라’ 임나(任那)
일본학자들은 임나를 서기 350년 무렵 이후부터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점거해 경영하던 식민지라고 우겨댄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한 탓에 저지른 착오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임나라는 이름이 우리역사에 처음 등장한 것은 마한(馬韓)의 혜종(惠宗) 원년인 BC157년이니, 저들이 주장하는 4세기 후반보다 자그만치 500년 이상이나 앞선 때임을 알 수 있다.
조선조 영조(英祖)때 완성된 ‘동사강목(東史綱目)’에 ‘혜종 원년에 임나가 조공(朝貢)을 바쳤다’고 적혀있으며,‘효왕(孝王)27년(BC57년)에는 한 줄기의 10가지가 달린 산호(珊瑚)를 임나가 공헌했으므로, 왕이 그것을 희귀하다고 여겨 태묘(太廟)에 바쳤다’고 기록돼 있다.
그뿐인가. ‘양왕(襄王)원년(BC73년) 임나의 대인을 만나 임나의 우두머리를 삼았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자, 그러면 임나란 무슨 뜻이며, 누가 지어냈고, 또 어디를 지칭하는 이름인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나(那))는 예부터 씌여진 우리말 (땅, 나라)를 뜻한다.
따라서 임나란 거기에 쓰인 한자 뜻 그대로 (님의 나라)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임나란 어디를 가리키며, 누구의 (님의 나라)란 말일까? 임나는 ‘일본서기’의 긴메이천황(欽明天皇)조에 기록돼 있듯이 낙동강 유역에 자리잡았던 가야(伽倻)전역을 지칭하며, 일본열도에 건너가 새롭게 우가야와 아라가야를 세운 가야족이 그들의 본국을 높여 부르는 이름이다.
■(왜구(倭寇) 시작되다)
왜(倭)가 처음으로 신라를 침범해 온 것은 BC50년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즉위한지 8년째 되는 해라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그땐 ‘왕께서 신덕(神德)을 갖추신 분이다’라는 이야기를 듣고 별 말썽없이 물러갔다고 적혀있다.
왜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그 이후부터인데, 그들이 무슨 이유로 내습하기 시작했을까? 그 물음에 답하기 전에 우리 역사학자들이 깨닫지 못하고 지내온 놀라운 맹점을 지적해야겠다.
그들이 무심히 지내온 맹점이란 다름이 아니고 ‘왜는 역사상 한번도 백제를 침범한 일이 없으며, 고구려와도, 그들이 신라를 돕기 위한 구원군을 남쪽으로 보내온 때 외에는 싸움을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바꿔 말하면 ‘왜침의 원인은 신라가 제공했다’가 된다.
신라가 어떤 짓을 했기에, 왜가 신라만 표적을 삼아 공격하기 시작했을까? 그것을 알아내자면 신라사(新羅史)를 자세히 드려다 볼 필요가 있다.
다음은 왜침의 원인이 된 사건과 그후에 일어난 사건들을 골라낸 것인데, 연대는 신라사에 따른 것이어서 왜곡돼 있음을 염두에 둬야 한다.
BC57년 시조 박혁거세가 진한(辰韓) 육부(六部) 사람들의 옹립으로 13세 란 나이에 왕위에 올라 나라이름을 ‘서라벌’이라 일컬었다.
BC50년 일본이 내침(來侵)했는데, 왕이 신덕(神德)이 있는 분이라는 말을 듣고, 곧 물러났다.
BC39년 변한(弁韓)이 투항했다.
BC14년 일본이 해변을 침범했다.
서기57년 석탈해(昔脫解)라 왕위에 올랐다.
서기59년 왜와 우호관계를 맺었다.
서기73년 일본이 목출도(木出島)를 침범하니, 각한(角干) 우오(羽烏)가 당 하지 못하고 죽었다.
서기77년 아손(阿飡) 길문(吉門)이 가야와 싸워 공을 세웠음으로 파진손(婆 珍飡)의 관작(官爵)을 받았다.
서기80년 파사왕(婆娑王)이 즉위했다.
서기94년 가야병(伽倻兵)이 마두성(馬頭城)을 포위했으나 물리쳤다.
서기96년 가야사람이 내습했지만 왕이 격퇴했다.
서기97년 가야를 치고자 했으나 그 왕이 사죄를 하므로 그만 두었다.
서기106년 마두성주(馬頭城主)로 하여금 가야를 정벌시켰다.
서기115년 가야가 내습했다.
서기116년 가야를 공격했으나 성을 굳게 지키므로 회군했다.
서기121년 일본이 동쪽 해변에 내습했다.
서기122년 일본이 둔산곡(遁山谷)에 와서 싸웠다.
서기123년 일본과 우호를 맺었다.
독자들 가운데는 ‘무엇 때문에 아무 재미도 없는 이런 기사를 길게 나열했을까?’라고 의아하게 생각하실 분도 있겠지만, 재미없어 보이는 이 기사에서 역사의 수수께끼를 풀어보는 재미 또한 적지않다.
①BC50년 일본이 내침을 했는데 왕이 신덕있는 분이라는 말을 듣고 곧 물러났다를 되새겨 보자. 별 뜻이 없어 보이는 이 기사야말로 왜가 신라만을 표적삼아 공격하기 시작한 동기를 밝혀주고 있다.
원래 신라는 변진(弁辰), 즉 가야의 조그만 부족국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신라가 혁거세의 출현으로 진나라 육부족의 왕이 됐다는 기사가 BC57년에 기록돼 있다.
그런데 왜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일본열도로 건너간 변진족, 즉 가야족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여지껏 가야국에 소속돼 있던 신라(서라벌)가 종주국을 넘보는 듯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하니, 왜는 바짝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혁거세가 왕위에 오른지 7년만에 신라에 온 왜는 혁거세의 본심을 탐색하려는 속셈이었는데 그가 신덕을 갖춘 사람이라는 말을 믿고 그대로 돌아갔다.
②BC39년 변한이 투항했다.그런데 그로부터 불과 11년후 서라벌은 변한의 투항을 받는다.
드디어 왜가 걱정하던 사태가 현실화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즉 이 대목은 속국이었던 서라벌이 종주국인 변한을 압박하여 가야전역의 주인노릇을 하게 됐음을 시사하는 기록이다.
변한이란 가야제부족을 일컫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신라가 국사, 즉 신라사를 편찬한 것은 서기 545년 진흥왕 6년이다.
그것을 바탕으로 고려 때 편찬된 삼국사기에는 신라의 건국을 BC57년이라고 적어놓았고, 고구려는 그보다 20년 뒤진 BC37년, 백제는 세 나라중에서 제일 늦은 BC18년에 각각 건국했다고 적혀있다.
그러나 그런 신라사의 기록은 저들의 우위를 내세우려는 의도에서 왜곡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민족의 건국시기는 중국의 요왕(堯王)과 같은 시기(사실은 그보다 훨씬 빠르다)라고 한 삼국유사의 말대로라 해도 5000년전이고, 중국사학자 왕동령(王桐齡)이 저술한 ‘중국민족사’에는 ‘지금부터 약 4000년 전까지 호북(湖北), 호남(湖南), 강서(江西)까지는 치우왕(蚩尤王)이 다스리는 구려(句麗)들의 영역이었다’고 저술돼 있다.
이것을 봐도 구려, 즉 고구려족이 신라보다 몇 천년 앞서 건국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현재 동해 한 가운데에 있는 오키섬(隱岐島)의 향토사(鄕土史)인 '이미자유래기(伊未自由來記)’에는 ‘나무 잎을 엮어 만든 옷을 입은 부부가, 서쪽으로 천리 떨어진 곳에 있는 가라(加羅)의 서라벌에서 왔다’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것 역시 서라벌이 가라(가야)의 속국이었음을 밝혀준다.
그런 서라벌이 변한, 즉 가야전역의 주인 노릇을 할 기세를 보인 이 기록이 가야의 작은 집인 왜를 자극한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③BC14년 일본이 해변을 침범했다.왜의 첫 번째 공격이 시작됐다.
그러나 아직 한반도에 남아 있는 가야의 힘이 그다지 약하지 않을 때라 그들의 내침은 경고적 성격에 불과했다.
④서기57년 석탈해가 왕위에 올랐다.
더구나 (이즈모)에서 넘어온 석탈해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니 그들의 걱정도 한풀 꺾였다.
⑤서기59년 왜와 우호관계를 맺었다.
(이즈모)의 아라가야족이 서라벌과 우호관계를 성립시킨 것은 너무도 당연한 추세였다.
서기94년 이후 빈번해진 가야의 신라에 대한 공격은 점점 강대해지는 서라벌의 위협에 맞선 가야족의 몸부림을 잘 나타낸다.
한반도에 남기고 온 가야를 서라벌이 노골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하자 왜침이 점점 빈번해졌음을 그 이후의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님의 나라)인 가야를 신라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려는 왜는 벡제가 멸망한 서기663년까지 신라에 대한 공격의 손을 잠시도 느투지 않았음을 ‘일보세기’가 웅변으로 전해주고 있다.
★제육부 연기처럼 사라진 흘해왕(訖解王)의 자손
1. 석씨족보(昔氏族譜)의 수수께끼
흔히들 말하기를 ‘신라의 화백에 의해 박씨, 석씨, 김씨등 세 왕가가 피를 흘리지 않고 왕위를 승계했다’고 한다.
그러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왕권을 차지하기 위한 유혈참극이 없었던 민족은 없었다.
그런데 어찌 신라만 예외였단 말인가? 그런 미담은 김씨인 진흥왕(眞興王)이 꾸며낸 왕권 보존의 수단이었음을 깨달아야 한다.
어떤 이는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단정하느냐?’고 의아해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삼국사기가 입증해 준다.
김나물왕(金奈勿王)이 석씨의 마지막 임금인 흘해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게 된 것은 ‘흘해왕이 돌아가고 아들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삼국사기는 말한다.
그러나 월성석씨(月城昔氏)의 족보(중앙일보사 발행, ‘성씨의 고향’)에는 흘해왕에게 아들 보(甫)와 두 손자 념(恬)과 성(性)이 있었다고 분명히 적혀있다.
흘해왕은 재위 47년만에 서거했다.
그런 사실은 아들 보가 충분히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나이가 돼 있었으리라고 짐작하게 된다.
그런데도 ‘아들이 없어 김씨 성을 가진 나물왕이 뒤를 이었다’고 삼국사기가 말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한 걸음 물러나서 보가 요절을 했다손 치더라도 손자가 둘이나 남아있지 않았는가? 따라서 ‘아들이 없어 김씨 성을 가진 나물왕이 뒤를 이었다’는 말은 억지로 김씨 성을 가진 나물왕에게 왕좌를 넘기기 위한 구실을 만들려고 조작된 것이라는 의혹을 불러일으킨다.
‘그렇다고 아들과 손자가 멀쩡히 살아있는데 자손이 없다고 꾸며댈 수 있을까?’하는 분도 계실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대한 답은 보와 두 손자 념과 성을 끝으로 완전히 단절된 석씨의 족보가 대신해 준다.
즉 흘해왕의 후손은 족보마저 남기지 못하도록 나물왕 때에 철저히 탄압되고 말살됐다는 이야기이다.
1987년 12월에 발표된 국세조사(國勢調査)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성씨는 총 274성인데, 수효가 많은 순으로 보면 김씨 약 880만명, 이씨 약 600만명, 박씨 약 300만명, 최씨 약 190만명, 정(鄭)씨 약 180만명 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들 5대 성씨 가운데 3위까지는 우리나라 왕의 성인데 신라의 세 왕성(王姓) 가운데서 유독 석씨성만 희성(稀姓)이 되어 모두 8천명만 생존해 있을 뿐이다.
이런 사실은 흘해왕이 서거한 후 석씨와 김씨 사이에 왕위계승을 둘러싼 처참한 유혈소동이 벌어졌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김씨가 왕위에 처음 오른 것은 서기 262년에 즉위한 김미추왕 때다.
그러나 서기 284년 석유례와(昔儒禮王)이 들어선 후 서기 355년까지 다시 석씨가 왕좌를 지켰다.
우리는 왜 서기 262년에 김씨로 바뀌었다가 다시 석씨가 왕좌에 앉게 됐냐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왜(倭)의 삼한정벌’은 황국주의를 위한 날조된 역사
-'진구황후가 군사들을 이끌고 바다를 넘으려 할 때 그녀는 마침 산월(産月)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돌을 음부(陰部)에 꽂아넣고 신라를 정벌하고 돌아온 후에 아이를 낳게 해달라고 하늘에 기원했다. 한 나라의 국사를 포복절도하지 않을 수 없는 이런 대사로 장식해야 하는 이유는 '일본황실은 만세일계다'는 억지를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일본의 ‘고사기’와 ‘일본서기’는 덴무왕조(天武王朝)가 저들이 우가야왕조(上伽倻王朝)의 정통을 이은 정당한 계승자임을 강조하기 위해 날조한 사서(史書)다.따라서 그 역사책으로 교육받아온 일본국민은 일본황실(日本皇室)의 만세일계(萬世一系), 즉 태고로부터 한번도 혈통이 바뀐 일이 없이 이어져 천손(天孫)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바로 그런 교육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편집목표였으며 그것이 저 악명높은 황국주의 사상의 모체인 것이다.
그런 원대한 음모를 달성하기 위해서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편찬자는 무리수를 쓰지 않을 수 없었다.그 시작은 ‘진구황후(神功皇后)의 삼한정벌(三韓征伐)’이란 테마로 창작된 시나리오다.‘진구황후의 삼한정벌’이란 서기 360년 후반부터 시작된 왜-백제 연합군에 의한 신라공격을 일컬어 하는 말이다.즉 흘해왕(訖解王)의 장손인 념(恬)이 ‘다케우치스쿠네(武內宿?)’라는 별명으로 일으킨 신라왕좌 탈환전을 일본사람들은 ‘진구황후의 삼한정벌’이라고 교육을 받아왔으며 그것이 저들이 소위 미마나(任那)라고 일컬어온 남한내의 식민지가 생긴 시점임을 알아야 한다.
‘진구황후의 삼한정벌’이라는 시나리오는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된다.‘진구황후가 군사들을 이끌고 바다를 넘으려 할 때 그녀는 마침 산월(産月)이었다.그래서 그녀는 돌을 음부(陰部)에 꼽아넣고 신라를 정벌하고 돌아온 후에 아이를 낳게 해달라고 하늘에 기원했다.한 나라의 국사를 포복절도하지 않을 수 없는 이런 대사로 장식해야 하는 이유는 ‘일본황실은 만세일계다’는 억지를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고사기-일본서기의 '무리수'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편집자의 머리 속에는 장차 태양숭배사상인 우가야왕조를 곰숭배사상왕조로 교체시킬 때 혈통이 바뀌지 않았다고 할 수 있도록 미리 복선을 깔아두려는 계산이 있었다.즉 나중에 진무천황이라는 가명으로 등장시킬 곰사상족의 우두머리를, 진구황후가 한반도로부터 돌아온 후에 출산한 자식이며 따라서 그녀의 남편 주아이천황(仲哀天皇)의 혈통을 이은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포석이었다.이러한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무리수는 이후에도 여러번 나타나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에 다시 거론하기로 하고 왜군이 한반도로부터 철수하는 대목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백제와 왜군의 위협을 받게 된 신라가 고구려로부터 원군(援軍)을 얻기 위해 고구려의 실성(實聖)을 인질로 보낸 때는 서기 392년이라고 ‘삼국사기’는 기록했고 그가 풀려 신라로 돌아온 것은 서기 401년이었다.삼국사기는 신라가 그 다음해인 서기 402년 ‘나물왕의 아들 미시온(未斯欣)을 왜에 볼모로 보냈다’고 전한다.‘삼국유사’에는 서기 391년으로 적혀있으나 전후 사정으로 보아서 그것은 분명한 잘못이다.
왜는 신라로부터 인질로 잡은 후에도 고구려군과 교전을 했으나 서기 407년 대패(大敗)를 마지막으로 드디어 철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일본열도로 돌아온 다케우치스쿠네는 수로왕의 후손인 곰사상족(熊襲)의 우두머리와 약속을 지켜 우가야왕조를 타도하기 위한 작전을 개시했다.그 첫 전투는 그가 진구황후와 공모해서 암살한 주아이천황의 두 아들을 토벌하는 싸움이었다.
독자들 가운데 ‘주아이천황의 아들이라면 곧 진구-황후가 낳은 자식일텐데…?’하고 고개를 갸우뚱할 분도 계실 것이다.‘남편을 죽인 진구황후가 제가 낳은 자식마저 죽였다니…’하고 혀를 찰 사람이 어찌 없겠는가? 그러나 그 ‘주아이천황의 아들’들은 진구황후가 낳은 자식이 아니라, 주아이천황의 본처 소생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런 의문은 저절로 풀린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에는 ‘주아이천황은 즉위하기 이전에 외사촌 누이를 아내로 삼아 그녀와의 사이에 두 아들 ‘가고사카’와 ‘오시구마’를 낳았으며 다시 또 ‘구구마터(來熊田)’시조의 딸을 들여 ‘홈야와케’라는 아들을 낳았다’고 적혀있다.
편찬자가‘구구마터의 시조의 딸을 들여 홈야와케라는 아들을 낳았다’는 말을 미리 준비해둔 것은 장차 곰족(熊襲)의 자식을 천황자리에 올리기 위한 포석이었다.여기서 ‘구구마터 시조의 딸’이라고 돼 있는 여성은 사실은 진구황후의 위명(僞名)이다.
★'다라'는 '달=땅'의 일어표기
이렇게 두 아들을 낳은 아내가 엄연히 있으면서도 천황자리에 오른 다음해에 다른 여자를 얻어 그녀를 황후로 삼았다.
그녀가 바로 진구황후다.‘다른 여인을 소실로 맞이했다면 모르되 아들을 낳은 여자를 놔두고 왜 다른 여자를 황후로
삼았을까?’하는 의문에 대한 정답은 진구황후의 이름 ‘오키나가다라시히메’에서 발견할 수 있다.
‘다라시히메’의 ‘다라’는 음달(陰地), 양달(陽地)이라고 할 때 쓰인 우리말 ‘달=땅’을 받침이 없는 일본말로 표기한 것이고, 그 뒤에 놓인 ‘시’는 소유격조사다.‘시’가 소유격조사임을 입증하는 것은 ‘增訂 古歌硏究’(양주동저, 一潮閣)다.
그 속에 있는 혜성가(彗星歌)의 풀이는 ‘시’가 소유격조사로 쓰인 예를 알기 쉽게 설명해 주고 있다.그 뒤에 있는 ‘히메’가 아가씨(姬)에 대한 고어(古語)이므로, 남는 것은 ‘오키나가’의 뜻새김 뿐인데 ‘나가(中)’는 가운데를 뜻하는 일본어이니
마지막으로 남는 것은 ‘오키’다.
여기서 우리는 고구려족이 본거지로 삼았던 일본열도의 동북지방 ‘고시(越)’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 ‘고시’는 ‘오로치’퇴치 신화에서 설명했듯이 ‘오로’ 또는 ‘오리’라고도 발음되기 때문이다.‘라’줄 소리는 ‘가’줄 소리로 바뀌기 쉽다.예컨대, ‘벌레(蟲)’는 ‘벌게’라고도 발음하고, ‘거치게’‘거칠게’는 ‘거츠리’라고도 하는 것과 같다.즉 진구황후의 이름 ‘오키나가다라시히메’의 첫 머리에 보이는 ‘오키’는 ‘(오리)나라(高志國)’라는 뜻으로 쓰인 말임을 알 수 있다.다시 말하자면 진구황후의 이름 오키나가다라시히메는 ‘고시국의 중부지방 아가씨’를 뜻하는 것이다.이렇게 하여 주아이천황이 왜 아들까지 낳은 아내를 놔두고 ‘고시국의 중부지방 아가씨’를 황후로 삼았는가 하는 의문도 풀리게 된다.
★금은보화 얻으려 신라침략
일본황실은 막강한 세력을 온존하고 있는 고구려족, 즉 오로치를 무시하고서는 황위를 유지할 수 없었다.고구려족에게 승리한 자랑거리를 오로치 퇴치신화라는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로 가장(假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주아이천황이 황위에 오른 이듬해에 고구려족의 여성을 황후로 맞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도 고구려족을 외척으로 삼아두자는 계산에서 이루어진 정략혼(政略婚)임을 알 수 있다.
오로치 즉 고구려족은 오랫동안 가야족을 괴롭혀 왔었다.철제무기로 무장한 그들이 가야족에게 굴복당한 것은 오로치 퇴치신화와 이나바의 시라우사기 신화가 설명해주듯, 가야로부터 건너온 스사노오노니코도, 즉 오호나무치의 지혜를 당하지 못한 때문이었다.그런 과거사를 잊지 못하는 고구려족의 마음 속에는 언제나 가야족에 대한 원한이 남아있다는 것을 황실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고구려족을 외척으로 삼은 정략혼으로 주아이천황의 황후가 된 여성에게 신라땅에 있는 미마나, 즉 님의 나라에 대한 애정이 있을 리 만무했다.그녀가 다케우치스쿠네의 꾀임에 빠져 신라를 공격하기 위해 남편을 암살한 이유는 오직 신라에 가득하다는 금은보화를 얻겠다는 탐욕 때문이었다.일본서기는 그런 그녀의 탐욕을 다음과 같이 적나라한 표현으로 전하고 있다.
‘주아이천황이 신라를 치라는 신의 계시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죽음을 당하자, 황후는 신에게 청하여 재보(財寶)의
나라를 얻고자 했다....중략(中略)...그리고 말하기를 내가 서쪽에 있는 재화의 나라를 얻고자 함선에 군사를 싣고 험난한 바다를 건너 재보의 땅으로 향한다...중략...황후가 신라를 쳐들어가니 파사왕(破娑王)이 항복하여 왕자 미시흔(未斯欣)을 볼모로 내어놓고 보고(寶庫)를 열어 금은과 갖가지 채색 비단을 80척 배에 실어 바쳤다...이하략’
여기서 ‘신라를 치라는 신(神)’이라고 하는 것은 다케우치스쿠네, 즉 흘해왕의 장손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그러나 나물왕의 아들 미사흔을 볼모로 한 서기 402년의 사건을 서기 80년에 즉위한 파사왕의 왕자라고 기록한 일본서기의 진구황후기(神功皇后紀)가 얼마나 황당한 것인지 알만하다.
★'진구황후기'의 허구드러나
우가야왕국을 타도하는 일을 돕겠다고 한 곰숭배족과의 약속을 지켜야 할 다케우치스쿠네와 황후의 앞길을 주아이천황의 두 아들 가고사카와 오시구마가 막아섰다.그들은 다케우치스쿠네와 황후가 군사를 이끌고 수도(首都)로 진군해오고 있다는 말을 듣고 급히 방어선을 치고 대비했다.
일본서기는 ‘검은 색을 신봉(信奉)하는 곰숭배사상족을 이끌고 다케우치스쿠네군이 진격해 가자 낮이 밤 같이 캄캄하게 되는 날이 오래 계속됐다’는 말로 태양숭배사상족이 곰숭배사상족에게 패망하는 것을 암시해 놨다.그리고 가고사카와
오시구마 두 황자군과 마주친 다케우치스쿠네가 속임수를 써서 죽였다.
속임수로 주아이천황의 황자들을 죽이는데 성공한 다케우치스쿠네와 황후는 황후가 낳은 홈다와케를 황태자로 삼고
황후는 황태후라고 불리게 되니 드디어 곰숭배사상족의 왕조가 탄생했다.이것을 일본서기는 진구황후 섭정 3년조
(서기 365년)에 기록했다.그렇다면 수로왕의 후손인 곰족의 우두머리는 어떻게 됐다는 말인가?
(박병식 한-일어원연구가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