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호(진행, 이하 유) : 오늘의 큰 테마는 한국 시단을 전체적으로 돌아보고 최근 작품들, 시인들, 잡지나 매체들을 포괄하면서, 그리고 구체적 사례를 들어가면서, 과연 좋은 시가 어떤 것인가 하는 문제를 논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좋은 시를 어떤 기준으로 읽어야 하는가, 그러한 수용적, 비평적 입장을 진지하게 들어보는 시간으로 설계했습니다. 가지신 견해를 격의 없이 들려주시길 바랍니다.
먼저 한국 시단의 현재적 지형을 전체적으로 진단해주시고, 그 흐름이랄까 주류 미학과 주변화되어 버린 미학들에 대해서 말씀해주십시오.
과거 시대와 비교하셔도 좋을 것 같고, 최근의 주류 미학 때문에 상대적으로 밀려난 것들에 대해서, 그리고 한국 시단은 어떤 흐름에 놓여 있는지 전체적인 진단을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홍용희 선생님께서 먼저 이야기해주시지요.
ㅡ현재 시단의 지형과 흐름 홍용희(이하 홍) : 우리 시단의 전체적인 흐름은 너무 크고 넓은 것 같아서, 일단 가장 큰 특징에 주목해보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오늘날의 우리 시단은 어느 때보다 양적 풍요를 보여준다고 할 것입니다. 이천 년대 들어 다양한 매체를 통해 등장한 신진들은 물론이고 원로들의 현역으로서의 활동도 왕성하기 때문이지요. 세대론적 스펙트럼이 넓고 제각기 다양한 매체를 통한 활동 역시 어느 때보다 활발해 보입니다. 그러나 폭 넓은 세대론의 스펙트럼이 세대론의 층위에 따라 변별되는 수직적인 시점이 아니라 수평적이고 동시적인 시점으로 보아야 하는 특이성을 드러냅니다. 동일세대라고 해서 동질성을 드러내지는 않는다는 것이지요. 이 점은 원로 세대나 신진 세대 모두 공통적입니다. ‘동일 세대의 비동시성’이라고 요약해볼 수 있겠군요. 원로나 중진 세대는 보수적, 전통적, 현실적이고 신진 세대는 진보적, 실험적, 도전적 성향을 지니는 세대론적 차이와 충돌의 양상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또한 진영론에 따른 계열화의 양상도 부각되지 않고 있습니다. 마치 요즘 정치판의 정치인이 여야를 오가듯이 시적 성향의 진영이 과거처럼 이항대립적으로 분류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주류 담론이나 주류 독법 역시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없어 보입니다. 이러한 변화의 자리에 인터넷 매체의 무중력 공간의 혼종성, 상호텍스트성, 문화주의적 감각 등이 채워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 시편은 형식 미학이 세련되고 매혹적이고 문제의식이 흥미롭게 개진되는 특성을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상당히 패턴화된, ‘다양함 속의 상투성’이 노정되는 것도 사실이라고 할 것입니다. 요즘 젊은 시인들로 저는 박성준, 김승일, 황인찬, 박준, 성동혁, 임경섭, 황유원 등을 주목하고 싶습니다. 이들 시편은 남성적이라 하기도 어렵고, 그러나 여성적이지도 않은, 일종의 초식성의 시라고 이름 붙여보고 싶습니다. 초식성의 상상은 나지막하면서도 호소력 있게 스며듭니다. 강한 주제론적 메시지나 임팩트는 약하지만 평온과 위안을 전하는 힐링의 언어에 가깝습니다. 현대 사회는 그 무엇도 불가능한 것이 없어 보이지만 그러나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피로 사회입니다. 우리도 모르게 우리는 정보 시스템, 커뮤니케이션 시스템, 생산 시스템 등의 현존하는 시스템의 지나친 비만 속에 살고 있지요. 문명적 이기가 소외를, 풍요가 빈곤을 가중시키는 역설적인 상황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그런 탓일까요. 힐링이 사회적 트렌드로 오랫동안 자리 잡고 있습니다. 문제는 힐링의 깊이겠지요. 지난해 교황 방문에서 보여준 전 국민적 열광이나 천칠백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영화 〈명량〉의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 있다면’과 같은 에피그램에 주목한 현상은 힐링의 시적 지향에 대해서도 적지 않은 시사점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감각적 위안과 격려의 힐링이 아니라 형이상학적 지평에 도달하는 힐링의 시편이 요구된다는 것이지요. 윤동주가 노래했던 “어둠 속에 곱게 풍화작용 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는 심원한 무한의 언어를 추구해야 할 것이란 생각을 해봅니다. 그때 진정한 개인사적, 사회사적 치유와 소생의 계기가 열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 : 홍용희 선생님께서는 달라진 세대론적 위상과 함께 매체적 다양성, 주류 미학의 부재, 그리고 그 대신 들어선 힐링과 위안의 언어에 대해 지적해주시면서 일종의 대안으로 영성이나 형이상학적인 차원으로의 지향을 언급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발언은 전체적 지형도를 그리는 것도 되지만, 우리가 나아가야 할 지향점까지 적극 포괄하는 것 같습니다. 동일한 테마로 이경철 선생님께서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이경철(이하 이) : 홍용희 선생님께서 밝고 낙관적으로 젊은 시인을 바라며 충고까지 해주신 것 잘 들었습니다. 물론 이 시대를 아파하면서도 위안이 되려는 그런 젊은 시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시대의 아픔만을 그들의 시적 문법으로 과장하며 불통에 빠진 시들도 많이 쓰이고 또 평가 받고 있는 것은 문제라고 봅니다. 현장에서 보고 느낀 몇 가지 말씀을 드려보겠습니다. 오늘의 한국 시단을 효율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이 아무래도 신춘문예일 것입니다. 시단의 흐름과 문제점들을 당선작과 심사평을 통해 잘 들여다볼 수 있으니까요. 먼저 올해 한 당선자의 당선 소감을 그대로 읽어 보겠습니다.
가끔 내 시를 들여다본다. 묵은 냄새가 난다. 수백 년간 궤에 담겨 있던 도자기 같은. 이 골동품의 가치는 아는 분만 알 터. 남들이 낡았다고 외면하는 시에 낙점해 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린다. 나는 늘 서정 빛을 띠는 나의 시심에 한숨짓는다. 이른바 미래파적인 시, 현란하고 실험적인 산문시를 보면 주눅이 들 때가 많다. 내 시는 고풍스러운 것인가, 촌스러운 것인가? 자주 반문해 본다. 당선 소식은 움츠러든 나를, 내 시의 제목처럼 어루만져 준다. 나는 시류(時流)를 따르지 않고 나만의 시를, 아래 같은 시를 쓰겠다고 다짐한다. 한글 맞춤법이 정확한 시, 인문학적 소양이 배어나는 시, 미학과 철학이 겸비된 시, 당대의 문제를 직시하는 시, 사회적 성찰이 깃든 시, 그래서 사유가 깊은 시. 누군가의 삶이 내재된 시, 타인을 배려한 시, 독자와 소통하는 시, 언어를 추구하지 않는 시, 화려함과 속됨에 기대지 않는 시, 무목적적인 시, 그래서 살아 있는 시.
나이도 적지 않은, 낙선도 많이 해보았을 당선자의 소감을 통해 시단의 현황을 엿볼 수 있습니다. 많은 시인들과 시학도들이 감히 내뱉지는 못했지만 하고 싶었던 말일 것입니다. 우리 시단은 이른바 미래파적인 시, 현란한 실험적인 시에 주눅 들어 있습니다, 특히 올해 신춘문예 당선작에선 위 당선자가 지향하는 시는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대신 그런 시를 주눅 들게 한 시들이 신춘문예도 휩쓸고 유수한 문학상을 타고 있습니다. 어느 해인가 내 눈엔 가당치 않은 시가 미당문학상을 수상하여 한 심사위원에게 “왜 이런 시를 뽑았는가” 하고 물어보니 “나도 모르겠다” 하더군요. 난해시, 지적으로 잘 조작된 시들이 시단 권력이 돼 아무 항변도 못하고 좇아가는 형국이 된 것입니다. 이런 작금의 시단 작태에 반항이라도 하듯 올해 한 신춘문예 심사평은 이렇게 썼습니다.
최종심까지 올라온 50여 편의 시를 읽고 느낀 점은 시를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 알기 어려울 정도로 두루뭉수리여서 쓴 사람 혼자만 읽고 서랍 속에 넣어두어야 할 시가 많았다. 가령 인용해 보자면, ”이전의 이후의 반물질과/ 무기체의 감각/ 물렁뼈에 속하는 밤/ 귀, 귀(鬼), 현실/ 가느다랗게 흐트러져가는 형상에 대한/ 신뢰는 얼마나 대단한가.“(이현정, 「벽에 걸어놓은 외투는 살아 있다」부분) 현란한 기교가 난무하고 몰이해를 바탕으로 한 산문성이 두드러진다. 다양성을 긍정한다 해도 지나칠 정도로 관념적이다. 이는 서정과 구체에 뿌리를 내린 비관념적 소통의 시는 이미 낡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시는 낡았든 새롭든 소통의 통로를 통해 써야 한다. 그동안 한국 시단은 뒤틀린 추상과 관념의 언어로 구축된 불통의 시를 새로움이란 이름으로 지나치게 관용하거나 방치해왔다. 행과 연 구분을 하지 않는 산문 형태의 시와 관념적 불통의 시가 현대시의 미래라고 여기는 잘못된 현상이다.
올해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을 심사한 문정희, 정호승 시인의 심사평입니다. 근래의 신춘문예 응모작과 당선작들이 얼마나 분통이 터졌으면 신인 등용을 축하해줘야 할 지면에 이런 불만을 노골적으로 토로했겠습니까. 보통 신춘문예라 하면, 시인 삼사백 명이 응모하고, 그중에서 오십여 편 올라온다고 하니 예심을 맡은 젊은 시인들이 그러한 시들만 올린 것입니다. 축하해주어야 하는 자리임에도 호통만 치는 이런 심사평이 나오는 것은 그러한 주류로 흐르고 있는 시들에 대한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반항이 시단에서 끓어오르고 있는 것으로 읽혔습니다. 올해 또 한 심사평에서는 “새로운 종의 시를 포획하기를 기대하며 무엇이든지 빨아들일 준비가 돼 있는 심사자들의 눈에서 그토록 쉽사리 빠져나가는 시들이라니”라는 위태로운 대목이 눈에 확 띄었습니다. 새롭기만 하면 어떤 시든 좋다니요. 이런 신춘문예 심사자들이 대부분이기에 감동의 소통을 본분으로 하는 시들은 아무리 좋아도 낡은 시가 되어 그들의 눈에 들어올 리 없겠지요. 동서고금 시의 강심수로 흘러내리는 좋은 서정시는 낡은, 빛바랜 시로 홀대받고 화제의 파랑이나 일으킬 머리로 짜낸 값싼 시들이 새로움, 실험시란 명분으로 대접받고 있는 게 현 우리의 시단이라 봅니다. 어지럽고 현란하고 난해한, 가슴이 아니라 머리로 짜 맞춘 시들, 딥 마인드 인공지능 알파고한테 무더기로 입력시키고 쓰라면 더 잘 쓸 시들이 난무하고 있는 것이, 과대평가 받고 있는 것이 우리 시단의 문제점입니다.
유 : 이경철 선생님께서는 신춘문예를 사례로 하여 난해성을 참칭한 실험적 시편들을 ‘새로움’이라는 비평적 수사로 옹호하는 흐름에 대해 비판해주셨습니다. 비평적 과잉 상태로 볼 수 있는 흐름을 진단해주셨고, 큰 틀에서는 서정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하는 입장을 들어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강인한 선생님께서도 의견을 주시지요.
강인한(이하 강) : 우리 시단이 다양하게 발전하고 있고, 그리고 서로 경쟁하는 자리에서 백화난만 하는 시의 경향을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2014년 문예연감에 한 해 동안 일만 칠천여 편의 시가 발표됐다고 합니다. 시단 인구가 일만 오천 내지 이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는데, 정식으로 발표하는 시인들을 저는 오백 명 안팎으로 보고 있습니다, 직접 시지를 운영하는 분들의 말을 들어보면, 한 이백 명의 시인들을 청탁 대상으로 할 수 있다 합니다. 여기서는 오백 명에 해당하는 이들에 대해서 말하고 싶습니다. 이들은 다양합니다. 세대적 경향도 강합니다. 우리 연배도 있습니다. 신경림, 고은 같은 윗세대 선배 시인들의 시는 불통에 대해서는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그다음에 우리 뒤로 1980년대 노동 문제와 민중 문제를 다루는 시인들이 있죠. 이들은 이후 서정 경향으로 바뀌었습니다. 백무산, 이시영, 김사인, 김준태 시인들이 이에 해당됩니다. 그다음 1990년대 시인들, 2000년대 이후 신진 그룹이 있으며, 최근 2010년대 신인들과 더불어서 신춘문예나 계간지에 등단한 나이 든 부류 신인들이있습니다. 요즘 신인들이 사실은 나이 평균이 오십대입니다. 이들은 사고방식이 온건하면서 현실을 예리하게 파악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비록 나이는 중년이나 시선은 신인 못지않게 예리한 편입니다. 그리고 요즘 대체적으로 시의 분량이 길어지는 경향도 한 흐름인 것 같습니다. 그 다음에 판타지와 발랄한 상상력이라 할까요. 이런 것을 추구하면서 말도 안 되는 것, 무조건 낯설다 못해 모호한 것을 추구해서 새로운 시의 전위로 나선다고 의식하는 부류가 있습니다. 그리고 온건한 시를 쓰는 박준이라든지 또, 1990년대의 나희덕, 심보선, 이영광, 우대식 이런 부류가 있습니다. 전체적인 독자들의 공감 형태를 보면 산문시나 난해한 시는 거의 안 읽고 비교적 소통이 잘 되는 것만 읽습니다. 어쩌다가 베스트셀러는 한 번쯤 살펴볼 뿐 깊게 빠져들진 않습니다. 출판사에서 의도적으로 앞세웠을지는 몰라도, 처음에는 그런 홍보 전략에 이끌려 둘러보지만 완전히 압도되지는 않습니다. 깊이 있게 오래 갈 수 있는 것, 소통을 전제로 해야만 생명력이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어떤 시인들은 “우리 시가 쉽게 써서 쉽게 이해되는 것은 우리로서 불편하고 창피한 일이다. 우리 시는 곱씹어서 음미되어야 할 시인데”라며 오히려 쉽게 이해되는 것을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게다가 평자들이 박학다식을 동원하여 난삽하고 모호한 시를 편들어 부추기는 측면도 있지요. 난해한 시를 위해서 굳이 시인 자신조차 모를 난해한 시를 추구하는 극단적인 경우, 그와 동시에 소통의 시도 간혹 보여주는 시인이 있지요. 예를 들면 이수명 시인입니다. 2014년에 나온 시집 『마치』는 대단히 난해하고 언어를 실험한다는 것은 알겠는데, 의미가 통하지 않고, 이미지도 분명치 않고 재미도 없는 시이며…… 한 마디로 이런 시를 읽는 자체는 절벽을 대하는 고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요즘에 이수명이 쓰는 연작시 「물류창고」를 보면 이해하기 쉬운 편이며 깊은 상징적 의미를 추출할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 시단은 다기 다양한 경향이고, 젊은 사람들은 너도나도 전위 의식의 강박에 이끌려서 새로운 것에 무비판적으로 경도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무슨 바람인지 시가 삼, 사 쪽을 넘는 분량으로 지루하게 긴 시를 쓰는 것도 하나의 유행인 듯합니다. 신인들의 전위적인 언어 실험, 내지 모호한 난해시들은 아직은 실험단계일 뿐이며 제 생각에 그 칠, 팔십 퍼센트 실험은 실패라고 느껴집니다.
유 : 강인한 선생님께서는 현 시단의 오백 명을 모집단으로 설정하여 다양화와 장형화 경향에 대해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독자들은 소통이 일차적인 기준이 된다고 말씀하셨고, 실험을 위한 실험 시편들은 대부분 실패작이고, 젊은 시인들이나 새롭게 시를 쓰는 사람들의 강박도 중요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고 보셨습니다. 또 매체나 비평이 그러한 현상들을 부추긴 것도 없잖아 있는 것이 우리 시단의 현상이 아닌가 하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이제 자연스럽게 우리 시단에서 가장 병폐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이 있는지 예를 들어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이번에는 강인한 선생님께서 먼저 말씀해주시지요.
시단의 병폐와 문제점
강 : 병폐에 대해선 크게 네 가지. 첫째는 시 쓰는 시인들이 자기 주변의 시만 읽고 다른 시인들의 시는 안 읽으며 공부를 안 합니다. 둘째, 특히 중견 이상의 심사위원에 해당하는 시인들이나, 비평가는 근래에 배출되는 신인들의 작품을 잘 안 읽습니다. 표절작인지 모르고, 또 그런 경향의 시를 뽑는 웃지 못 할 사례도 있습니다. 셋째, 오늘의 우리 매체들— 월간지, 계간지, 이런 것들이 실은 따져보면 동인지나 다름없습니다. 동인지 성격이 뻔뻔하게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 문젭니다. 가령 《시인동네》에서 뽑아놓은 『올해의 시인들 101』의 시들을 보면 마치 옛날 우리들이 시단에 입문할 무렵 보았던, 『전후 문제시집』 이라든지, 『52인 시집』이라든지 이를 텍스트로 해서 뽑아본다고 준비하고 있는데, 실상 전체를 돌아보니까 말만 그렇지 그런 것도 아니었습니다. <시인동네> 출신들, 그 주변 시인들이 많이 뽑혀있더군요. 여기에 해당되지 않으면 뽑히지 않았고. 아까 홍 선생이 언급하신 김승일(현대문학 출신)은 여기 명단엔 없고 무크 『파란』창간호에 보면 동명이인 《서정시학》출신 김승일이 있습니다. 《시와 세계》에서도 자기네 출신 시인들을 뽑기도 하고, 그들과 가까운 사람들을 많이 뽑는 눈칩니다. 그 다음에 《푸른사상》에서도 해마다 『오늘의 좋은 시』들을 출간하고 있지요. 이은봉, 맹문재, 이혜원, 김석환 이런 분들이 중심이 되어 뽑습니다. 여기 나온 것들은 좀 더 현실적, 의미 소통과 이해 가능한 속성을 중심으로 뽑고 있습니다. 또 〈삶과 꿈〉에서 좋은 시를 묶어 해마다 내놓기도 했습니다. 좋은 시들 사화집에 중복되는 시인도 있지만 대체로 동인지 성격의 사화집 느낌을 강하게 받습니다. 이처럼 요즘의 시 잡지나 사화집들이 동인지 성격이 강한 편입니다. 그건 아마도 운영상의 어려움을 덜기 위한 자구책인 것도 같습니다만.
이 : 다들 동인지 성격이 짙다는 말은 맞지요. 하지만 A급 문예지는 동인지 성격이라고 할 수 있지만, C급에서는 동인지보다는 상업적, 난장판 장삿속이라고 말씀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유 : 예, 강인한 선생님께서는 문학적 공준이 느슨해지고 오히려 인간적 친소관계 쪽으로 많이 기울어졌다고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강 : 맞습니다. 비슷한 얘길는지 모릅니다만 네 번째 병폐를 말해 보죠. ‘패거리’ 문제, 예를 들어서 젊은 시인들이 그룹을 만들어서 (옛날 ‘구인회’와 같이) 자기네들끼리 힘을 모아 문단 권력에 가까이 다가서자는 의도가 분명히 보입니다. 시인의 출신 대학도 패거리 요인이 됩니다. 가령 작년의 경우 고려대 출신 심사위원들이 절반 이상인데 그 상이 고려대 출신 시인에게 주어졌다든지…….
유 : 예, 어쨌든 강인한 선생님께서는 크게 네 가지로 한국 시단의 병폐를 이야기해주셨습니다. 시를 안 읽고, 중견들이 최근 흐름 파악을 못하고, 잡지나 인적구성이 좁아지면서 문단 권력을 추구하고, 상업성을 추구하는 경향이 나타난다고 보셨습니다.
강 : 보충 설명을 하면, ‘안 읽는다’고 하는 것은 자기 또래 시만 읽는다는 겁니다. 심한 경우, 발표된 지면에서 자기 작품만 읽는 경우도 있답니다. 선배 시인이 후배 시인 작품 안 읽거나 신인들이 자기 또래 지인들의 작품만 읽거나 그러다 보니 세대 간에 소통이 안 되는 문제가 발생한다고 생각합니다.
유 : 그만큼 다 읽기엔 양도 많다고 할 수 있지요.
이 : 강 선생님 말씀은 체험으로 많이 와 닿습니다. 조금 더 크게 제도적으로 볼 때, 시인들을 대신해서 말해보자면, 요즘 대학교 문창과 강의나 개별적으로 시인을 모아두고 문학 강연을 할 때나 정통시를 가르치기가 힘듭니다. 문학상 수상작이나 신춘문예 당선작들을 내밀면서 항변하면 “시를 이렇게 써라. 가급적 짧게 써라. 운율을 이렇게 써라, 이미지를 이렇게 써라. 서로 내 가슴과 네 가슴이 통하는 그런 작품을 써라”는 말이 먹혀들 수 없습니다. 가슴이 아닌 머리로 쓴 시가 평가받으며 상을 타고 있으니까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시의 도도한 흐름에는 서정이 강심수로 흘러야 하나, 그런 서정시가 씨가 마를 지경입니다. 분명 작금의 우리 시단은 잘못 흘러가고 있습니다. 올 신춘문예 당선 시들을 보고 미국으로 이민 간 작가가 이런 글을 한 인터넷 신문에 올렸더군요.
소설도 그렇지만 시는 누가 읽어도 쉽게 그 뜻이 이해되어야 좋은 시다. 그런데 요즘 시라고 쓴 것들을 보면 마치 간첩 암호 같다. 도대체 무슨 소린지 쓴 사람 자기밖에 모를 소리를 늘어놓기 때문이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로 시작하는 김소월의 「진달래꽃」이나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로 끝맺는 천상병의 「귀천」같은 시들은 가방끈의 길이에 관계없이 누구나 이해하고 감동을 받는다. 그런데 왜 요즘의 자칭, 타칭 시인들은 누구나 알아듣기 쉬운 말로 시를 쓰지 못하는 것일까? 김소월이나 천상병 같은 시인들이 요즘 한국 신춘문예나 신인문학상에 응모하면 예심에서 탈락할 것이 뻔하다. 현대 한국문단에서 시를 심사한답시고 버티고 앉아있는 사람들은 전통적인 우리나라 시를 망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현대 한국 시인들이여, 제발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집어치우고 아름다운 우리 전통 시로 돌아가기 바란다.
너무 보수적, 수구적 시관으로도 들릴 소리 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해외에 있기 때문에 한국문학을 객관적으로 보고, 무엇보다 동료 문인들, 특히 문학권력 눈치 볼 필요 없이 곧이곧대로 한 말이어서 후련했습니다. 신춘문예 심사위원들, 겹치기 심사도 마다 않는 이 몇 안 되는 심사위원들이 신춘문예는 물론 유수의 문학상 및 관변의 문학지원 심사 등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들이 장악한 문단에서 감동의 소통이니 휴머니즘이니 하는 문학의 미덕은 좀체 찾아보기 힘듭니다. 대신 뒤틀림, 난해함, 비인간성 등이 새로움이란 이름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신춘문예나 문학상, 문예지원 등에서 그런 작품만 평가해 뽑아주니 정통 서정시는 주눅들 수밖에 없고 그런 새로움만 찾아 기웃거리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 작금의 소통 불능의 문학과 문단이 돼가며 비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가령 비근한 예로 시 전문지에 아주 좋은 시를 발표하던 시인이 ‘창비’나 ‘문지’에서 청탁이 오면 이상하게 시가 어려워집니다. 이러한 예 많이들 보았을 것입니다. 아주 뼛속까지 문단권력이 침투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소위 4.19세대들로부터 비롯된 문학 권력의 층은 두텁고 탄탄하기만 합니다. 문학상 심사는 물론 대학 강단부터 중고등 문학 교과서까지 교수 시인, 평론가로서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런 문학 권력의 실상과 폐해를 단적으로 드러낸 글 한번 인용해보겠습니다.
그래, 문학이여, 미안하다! 순정한 독자 제위를 속이고 잰 체 목에 힘을 주고 살아온 자칭 문학도인 척 했던 내 얼굴에 먼저 침을 뱉어주마! 그러고 나서 문학에게, 천박한 유행과 시대에 굴종하여 이빨과 발톱을 다 뽑힌 채 멸시와 천대의 굴레에 떨어진 문학의 얼굴에, 힘껏 침을 뱉어주마! 문학의 신을 유폐시키고 마침내 죽여 버린 우리 시대의 문학 교수, 평론가, 작가, 출판사 기획자, 사장, 신문 기자들, 너와 나를 향해서도 마음껏 침을 뱉어주마!
시인이자 소설가이며 실천문학사 대표를 맡았던 김영현 씨가 인터넷신문 〈프레시안〉에 2008년 기고한 「문학이여, 나라도 먼저 침을 뱉어주마」의 한 부분입니다. 한 작품의 표절 논란을 보며 한국문학을 죽이고 있는 문학 권력의 뻔뻔스런 커넥션에 용감하게 침을 뱉고 있는 대목입니다. 대다수 문인들이 그 독재 카르텔에 숨죽이며 치를 떨고 있던 그 사실을 참다 참다 후련하게 뱉어낸 것입니다. 이 글을 발표하고 그는 문단을, 서울을 떠났습니다. 떠나지 않으면 문학 권력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왕따 시키고 문단에서 제거했을 것입니다. 우리 문단, 시단의 문제점과 병폐는 결국은 지금 우리 문학을 좌지우지하며 관리하는 문학 권력으로 수렴될 수밖에 없습니다.
유 : 이경철 선생님께서는 한국 시단에 지나치게 소통이 안 되는 작품들이 너무 횡행하고 있고, 시인들의 행동 준거의 최종 심급이 권력에 있다고 진단해주셨습니다. 홍 선생님은 어떠신지요?
홍 : 병폐란 앞서 두 선생님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조금 다른 표현으로 한다면, 시 창작의 주체가 상상하는 시인이 아니라 사유하는 지식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옥타비오 파스도 시적 언어에 대해 자석이 모래밭에 닿으면 철 성분이 있는 모래알들이 질서정연하게 스스로 일어서서 줄을 서는 형상에 비유하곤 했지요. 시는 시인이 쓰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와 언어의 자력이 스스로 작용해서 형성해나가는 생성의 장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중국의 석도가 ‘일획이 만획’이라고 도 했지요.한 획이 획을 불러 그림을 완성시켜 나간다는 이치의 지적이지요. 지식인으로서의 시인은 이처럼 이미지와 언어의 자연스런 교감과 생성의 질서를 작위적 자의식으로 부자연스럽게 왜곡, 굴절, 파탄시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살아 숨 쉬는 시적 소통의 질서, 창조적 여백과 리듬이 경직되거나 닫히게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되면 국적 없는 시적 어법, 과도한 난해성, 산문화, 소통 불능 등이 심화되게 되는 것 같습니다. 특히 시의 산문화와 관련하여 지적해 볼 것은 언어 과소비에 대한 경계입니다. 언어, 이미지, 수사의 과소비는 본래 시의 길과는 반대 방향이지요. 시는 말하지 않기 위해 하는 말, 자발적 가난의 언어에 해당하지요. 세속적 과소비와는 반대되는 영도의 지점을 향하는 것이 시적 삶의 본령이라고 할 것입니다. 자발적 가난의 언어를 통해 세속적 물량주의의 사회에 청빈의 기품과 의미를 몸으로 보여주는 것이 시 양식이지요.
유 : 우리 시단의 병폐에 대한 의견에서는 공통분모가 참으로 많군요. 지식인적 감염 시의 증가, 산문화, 과소비의 문제는 이경철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서정의 본령과 통하고, 강인한 선생님이 말씀하신 소통 지향성과도 다양하게 연관되는 것 같습니다. 이를 뒤집으면 시의 방향이 나올 것인데 뒤에서 말씀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적 경향에는 평론의 책임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비평이라는 것이 견인 역할도 하지만 뒤에서 후원과 덕담, 추임새를 넣기도 하는데, 전자를 지도 비평, 후자를 주례사 비평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비평은 작품 해설부터 현상 비판까지 다양한 기능을 하지요. 최근에는 해설 편향이 있는 것 같고, 주제나 담론적인 다양한 형태의 비평도 확장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선생님들께서 한국 시 비평의 현황과 문제점에 대해 비판적으로 진단해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시 비평의 지향과 지형
이 : 김종길 시인에 대해서 글을 쓰다가 자료를 조사해보니 이런 말씀을 하셨더라고요. 우리 시단의 원로이며 점잖고 염결하고 줏대 있는 시 쓰기로 정평이 난 김종길 시인이 한 대담에서 한 말이 떠오릅니다. 그 자신도 1960년대 서정주 시인과 논쟁을 벌이는 등 활발하게 비평 활동도 하고 문학상 심사도 많이 맡았던 시인이기에 체험에서 우러난 말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요즘 젊은 시인들은 옛날의 고전 시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자기 동료들과 바로 위의 연장자들의 시만 보고 시를 쓰는 것 같아요. 시의 고전으로 돌아가서 좋은 시를 다시 많이 읽으라고 권하고 싶어요. 또 하나는 좀 더 실제적인 제안인데, 특히 비평가들이, 시를 잘 아는 비평가들이 아주 엄정하게 비평 활동을 하고, 특히 시와 관련된 상이 많은데 그것을 공정하게 운영을 해야 해요. 어떤 것이 좋은 시인가 하는 기준을 현실적으로 내걸 수 있다는 점에서 문학상이 중요하고 문학상 심사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좋은 수상작을 하나 낸다는 것이 수십 명의 평론가들이 쓰는 수백 편의 평론보다 오히려 더 큰 일을 하는 거예요. 근래 신춘문예 시도, 내 자신 과거에 신춘문예 심사를 많이 해봤지만, 왜 이 작품이 당선작이 됐는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태반입니다.
어때요. 뜨끔하지요? 평론 활동이 공정하고 줏대 있게 이뤄졌으면 합니다. 휘둘리지 말고 정말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은 좋다고 쓰고 말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문예지나 심사평에 얼토당토 않는 말들이 나오면 거기에 대해 용감하게 비판할 수 있는, 작품을 두고 논쟁성의 평론 활동이 좀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유 : 근대 이후 작품집에 딸리는 서(序), 발(跋), 후기 같은 것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들은 대개 비평적 견해라기보다는 축제에 동참하는 협업자로서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창작집 해설까지를 그 사람의 비평 정신으로 보기 어려운 까닭이지요. 일단 창작집 해설은 주례사 비평이 될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창작집 해설이 아닌, 문예지나 공적 매체에 자기 이름을 걸고 주제 비평을 할 때 조금 더 정직하고 논쟁적인 글을 썼으면 좋겠는데, 그동안 그렇지 못했다는 진단을 해주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현장 비평의 중심에 계신 홍용희 선생님의 견해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홍 : 요즘 평단은 어느 때보다 조용한 것 같습니다. 문학 생산의 장이 세대론적, 이론적 경합과 투쟁의 역동적인 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 서로 차등적인 힘의 경합이 이루어져야 서로서로가 거울 같은 성찰과 진전의 계기를 찾을 수 있을 텐데, 오늘날 지나치게 조용한 평화가 불안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날 전면에서 논의해나갈 문제의식들로 거시적으로는 지구 공동체 시대에 대응하는 지구 문화론으로서 문명적 어젠다, 우리 문예 미학의 세계적 보편성의 가능성 등이 전면에 등장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k-pop이 떠오르듯 k-poem이 포스트 한류를 주도해나가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 방법론과 가능성은 무엇이며 어떻게 펼쳐나갈 것인가 등의 논의가 요구된다고 생각합니다.
유 : 시 비평의 병폐보다는 앞으로의 과제에 대해서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동안 우리 시 비평은 분석 비평, 기술 비평으로 치중된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비평가들의 역할 분화랄까, 직능 분화도 눈에 띕니다. 미시와 거시 양쪽의 역량을 다 가지면 좋겠지만, 어쨌든 워낙 양도 많아지다 보니 역할이 분화되는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 그 말은 좀 위험해 보입니다. 평론에 있어서 미시평론과 거대 평론은 나누어 보아야 한다는 말은요. 작품의 속맛은 하나도 못 느끼고 자신의 지론대로만 평하는 평단의 거장들을 보면요.
강 : 최근 시의 문제점으로 대두된 것은 시가 길어졌다, 산문시가 범람하고 있다는 점이겠습니다. 이것을 이젠 평론가들이 정리 정돈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산문시라고 시인이 발표하고 있지만 시가 아닌 에세이 혹은 잡문 수준의 글이 많습니다. 물론 자유시 형태로 행갈이를 한 시가 사실은 일기나 수필에 불과한 산문인 것도 중견 이상의 작품에서 곧잘 볼 수 있습니다.
이 : 제가 기자 시절, 평론가 몇 분에게 산문시에 대해 물어봤지만 다들 얼렁뚱땅 넘어갔습니다. 산문시에 대한 연구가 많이 이루어져 그냥 산문이 산문시란 이름으로 시에 들어오는 것은 막아야 할 것입니다.
강 : 그 점에 대해서 2007년 《현대시학》 1월호에서 신작시로 발표된 두 사람의 산문시를 보고 제 카페에 「‘벌거벗은 임금님’이라고 말하라」는 글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 하나는 「빨간 볼펜」이라는 산문시였고, 또 하나는 「권정생 선생님」이라는 산문시였습니다. 「빨간 볼펜」은 보통의 짧은 수필 분량의 시였습니다. 「권정생 선생님」은 단적인 인상기— 원고지 두 장 분량이 채 못 되는, 이는 산문시가 아니라 단편적 수상이었습니다. 평론하는 이들이 대가의 산문시라도 시가 아닌 산문은 산문이라고 당당히 밝혀야 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시의 속성인 함축성, 이미지, 운율, 알레고리 등 여러 가지 측면이 역시 산문시에 들어가야 그게 시라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시인이 썼다고 해서 에세이가 갑자기 시로 바뀔 수는 없잖겠어요.
유 : 사실 산문시의 가장 큰 문제점은 지나치게 범속한 산문을 시라고 내놓는 경우일 것입니다. 긴장도나 이런 것을 보아야 하지만 명확한 경계선이 없는 것이 사실이지요.
강 : 평론가들이 시가 아닌 것은 시가 아니라고, 안내자로서의 책임을 다해줬으면 좋겠습니다. 허름한 시를 무조건 추종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래전에 좋은 시를 발표한 시인이 오늘 태작을 발표해도 평론하는 이들은 뭔가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려 듭니다. 요즘 발표되는 시들을 평론가들이 책에서 찾아 읽고 좋은 시를 발견해 내려는 책임 의식이 있으면 좋겠어요. 과거에는 대가(大家)였을지라도 현재는 찌그러진 소가(小家)의 시를 발표하는 이들을 눈감아서는, 아니 그걸 특별한 양 의미를 부여하는 추임새를 넣어서는 안 되잖을까요. 덧붙여 요즘 시집의 해설은 비평이라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 주례사 비평 같은 성격의 글이 시집 해설이라고 보입니다.
유 : 비평은 명료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비평을 또 해석해야 하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하는데, 어떻게 보십니까?
강 : 가령 어떤 시집 해설은 시집에 실린 난해시보다 더 난해한 글인 경우도 있더군요. 난해한 시보다 더 난해한 해설, 이런 건 곤란합니다. 시집에서 해설의 역할이 독자들에게 시에 대한 길 안내가 되어야 할 텐데 말입니다.
유 : 평론가들은 대부분 대학에서 고고학적 근대문학 공부와, 현장 공부를 함께 합니다. 예전보다 훨씬 텍스트가 늘어나 공부해야 할 분량은 어마어마하지요. 또 한 가지 말씀드리면 평론은 거의 주문 생산이기 때문에 타의에 의해 텍스트가 결정되는 속성이 강합니다. 그러니 사실 문예지에 쓰는 글조차 시집 해설투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좁히면 자기 이름 건 주제 비평만 비평이고, 나머지는 전부 주문 생산 같은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홍 : 비평이란 무엇이며 어떤 위상을 지녀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너무도 원론적이어서 새삼 환기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비평의 위상을 균열시키는 요인들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몇 가지 지적해보기로 하지요. 비평가의 위상을 떨어뜨리는 요소들은 비평가뿐만이 아니라 문예지와 시인의 책임도 크다고 할 것입니다. 가끔 서평이나 시집 해설을 쓰고 나면 시인으로부터 ‘내 시를 정확하게 읽어주어서 고맙다’는 칭찬의 평가를 듣곤 합니다. 이때는 은근히 자괴감이 듭니다. ‘그렇게 자신의 시를 잘 알면 자기가 직접 해설이나 비평을 쓸 일이지’ 하면서 말입니다. 자신보다 의사가 자신의 건강을 더 정확히 진단하고 치료한다는 건 알지만 비평가가 자신의 시를 자신보다 더 잘 비평할 수 있다는 건 묵시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지요. 비평가를 시인의 조력자 정도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명 시인일수록 비평가의 비평을 관리, 감독하는 역할을 자임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또한 문예지에서도 이 점은 크게 다르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정 문예지는 특정한 경향의 시들을 높이 내세우니까 그곳에 글을 쓸 때에는 시인들도 그렇고 평론가들도 그 매체의 경향에 맞추어 서구적 이론, 번역투의 문어체, 문화주의적 감수성을 동원해가면서 글을 쓰기도 하지요. 평론이나 시 작품의 완성도보다 매체의 브랜드에 편승하는 풍조도 경계해야겠지요. 특히 ‘문지’를 비롯한 주요 매체의 경우 ‘작품으로서의 시’보다 ‘텍스트로서의 시’에 편중한 경향이 노정됩니다. 그래서 시적 진정성과 감동보다 분석 대상으로서의 미적 형식과 의미에 주목한 경우가 많았지요. 공적 매체권력을 차분하게 직시하고 성찰하면서 이를 극복해나가는 성찰적 대안 논리의 모색이 요구된다는 생각입니다.
유 : 세 분 선생님께서 비평의 존재 방식, 병폐, 문제점, 과제를 제시해 주셨습니다.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이제 실명을 거론해주시면서, 가장 좋은 시와 그 이유를 말씀해주시는 코너 입니다. 지면 관계상 두세 명만 언급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먼저 홍 선생님께서 해주시지요.
좋은 시인은 누구인가
홍 : 저는 김지하, 이성복, 장석남을 꼽고 싶습니다. 김지하는 우리 시사에서 누구보다 자신의 시적 삶과 사상의 새로운 혁신과 변화를 통해 부단히 새로운 지평을 개척해나간 대표적인 시인이라는 점에서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그는 ‘타는 목마름’에서 ‘생명의 바다’를 향해 나아가고, 다시 ‘살림’의 문화, 네오르네상스 문명을 향한 시적 예언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민족 미학으로서 시김새, 탈춤, 판소리 등을 가로지르는 ‘흰 그늘’의 미학적 특성과 미적 가능성을 추적하고 이를 문명사적 신생의 언어로 벼리는 도저한 집중과 탐구가 놀랍습니다. 또한 그는 우리 현대사에서 드물게 좌익과 우익의 한계를 동시에 질타하고 일깨울 수 있는 역동적 중도자이지요. 역동적 중도는 특히 우리나라와 같이 교조적으로 경직된 좌우 대립 구도의 허상을 비판, 성찰, 각성, 통섭시키는 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앞으로 그의 지배 권력에 대한 지지도 이러한 자각 속에서 재생산되어야 하겠지만요. 한편 그의 이러한 문학 외적 활동이 시적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게 하는 요소가 되고 있기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산알 모란꽃』 『시김새』 등을 비롯한 근작 시집은 노년기의 겸허한 모심의 언어를 체험적 울림으로 숙연하게 펼쳐내고 있습니다. 이성복은 거의 모든 작품이 빼어난 시적 밀도와 완성도를 성취해내고 있지요. 그의 시집에는 허술한 태작이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그의 시편들은 매혹적이고 치열하고 아름답지만, 정작 낭만주의자나 신비주의자와는 거리가 멀지요. 그는 “시는 목적도 방법도 아닌 괴로움의 현재 진행형이다”라는 자신의 어느 산문집에서 기록한 명제를 일관되게 실천적으로 보여주는 ‘영구 혁명가’입니다. 이 점은 초기의 분열증의 언어에서부터 높은 나무 흰꽃으로 표상되는 경이와 금기의 꽃, 화해와 사랑의 신화를 노래하는 과정에서도 지속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장석남은 우리말의 신경조직과 마디 절을 절묘하게 잘 활용할 줄 아는 시인입니다. 시적 주제나 내용을 시적인 신경조직이나 마디의 넌출거림을 통해 정서적으로 호소, 감응 시키는 주술을 부릴 줄 아는 것이지요. 자기만의 ‘수묵정원’의 세상을 자기만의 보폭과 목소리로 거닐며 노래하는 시인인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그의 시편들은 의미와 전달 이전에 독자들로부터 마음의 공감과 정화를 일으키는 주술 공감의 염력을 지니는 특성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시단에서 시적 언술의 본령과 가장 가까운 지점에 있는 시인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유 : 세대별로 안배가 되었구요. 강인한 선생님 말씀 듣겠습니다.
강 : 나희덕 시인, 송찬호 시인입니다. 비록 후배 시인들이긴 하나 존경스러운 시인들입니다, 나희덕이라는 이름을 알게 된 것은 1999년 무렵이었습니다. 그 당시 저도 ‘창비’에서 시집을 냈었지요. 출판사에서 선물로 그 무렵에 나온 시집을 주었는데, 그 중 나희덕의 『어두워진다는 것』이 있었습니다. 낯선 신인이기에 심심풀이로 누워서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이건 아니다 싶어서 벌떡 일어나 앉아 몇 시간 동안 독파하면서 속으로 대단하다고 느꼈고 그 자리에서 독후감을 썼습니다. 「나희덕, 푸르고 서늘한 언어의 감별사」라는 제목의 평론을 써서 카페에 글을 올렸지요. 그리고 본인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이걸 계기로 나 시인과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몇 달 지나 일산에서 광주로 나희덕이 직장을 얻어 내려왔고, 광주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지금도 나희덕 시인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좋은 작품을 쓰고 있습니다. 근래에는 개인적으로 시련을 많이 겪었지만 꺾이지 않고 좋은 시를 쓰고 있습니다. 예전엔 식물성 시를 썼다고 하면, 요즘은 광물성 시를 쓰고 있다고 할까요.
어떤 먼 것 어떤 낯선 것 어떤 무서운 것에 속한 아름다움
그것을 위해서는 더 많은 강물과 격랑이 필요하다
이곳은 수심이 깊어 위험하니 출입을 금합니다
돌을 외투 주머니에 채우고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간 버지니아 울프처럼
말의 원석에서 떨어져내리는 글자들처럼
식탁 아래 떨어진 빵 부스러기를 끌고 가는 개미처럼
부스러기만으로 배가 부르다고 했던 가난한 가나안 여자처럼
허기 없는 영혼처럼 불꽃 없는 빛처럼
마담 퀴리가 처음으로 추출해낸 0.1g의 라듐처럼
희고 빛나는 것들 그러나 검게 산화되기 쉬운 것들
—나희덕, 「라듐처럼」
저는 이 시를 광물성의 시라고 보고 있습니다. 2014년 가을호 《발견》지에 발표된 시입니다. 그리고 또 한사람은 송찬호입니다.
그러니까 그때가 언제였던가 마을 광장에 비둘기파가 결성되기 전, 피 묻은 돌멩이들이 통신처럼 날아다닐 때
꽃을 동지라 불렀을 때 가령, 마을 이장이 이런 식으로 방송할 때 오늘 아침 맨드라미 동지께서 피어나셨습니다
죽은 산과 강을 살리겠다고 노란 피부의 나무들이 세 걸음마다 하나씩 열매를 떨어뜨리며 마을을 지나갈 때
먼 곳에서 그때 처음 본 플라스틱 바가지가 떠내려 왔을 때 그것으로 목을 축이며 아이들이 돌로 된 가방을 메고 산 너머 학교에 다닐 때
그리고 심청이 집을 나설 때 내가 너를 팔아 눈을 뜬들 무슨 소용이 있겄느냐 심봉사의 넋두리 너머 새마을 외인 함대가 당도하였을 때
—송찬호, 「마을회관 준공식」
그러니까 그때가 언제였던가 마을 광장에 비둘기파가 결성되기 전, 피 묻은 돌멩이들이 통신처럼 날아다닐 때
꽃을 동지라 불렀을 때 가령, 마을 이장이 이런 식으로 방송할 때 오늘 아침 맨드라미 동지께서 피어나셨습니다
죽은 산과 강을 살리겠다고 노란 피부의 나무들이 세 걸음마다 하나씩 열매를 떨어뜨리며 마을을 지나갈 때
먼 곳에서 그때 처음 본 플라스틱 바가지가 떠내려 왔을 때 그것으로 목을 축이며 아이들이 돌로 된 가방을 메고 산 너머 학교에 다닐 때
그리고 심청이 집을 나설 때 내가 너를 팔아 눈을 뜬들 무슨 소용이 있겄느냐 심봉사의 넋두리 너머 새마을 외인 함대가 당도하였을 때
—송찬호, 「마을회관 준공식」
이 작품은 마을회관이 자치단체의 장이 선출됐다거나 혹은 새로운 정부, 새로운 정권이 탄생했을 때 이를 상징해서 풀어낸 것이라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령 첫 연에서 “피 묻은 돌멩이가 통신처럼 날아다닌다”는 데모 현장에서 돌멩이를 던지는 그 무렵 유비통신도 생각게 하며, 3연의 삼보일배하는 나무(국민들), 4연의 돌멩이를 가방으로 표현한 건 순진함이 무지로 통하는 희화를 연상시키는 둥 재밌는 시입니다.
이 : 시단에서 화려한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한 시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문학 권력과는 좀 떨어진, 지금은 다들 원로급이 된 허만하, 정진규, 천양희 시인의 시를 좋아해 눈여겨 봐오고 있습니다. 보수와 진보, 순수와 참여 등 문단 파벌이나 시류의 흐름과는 무관하게 자신의 시세계를 일구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일단 허만하 시인의 시 「그리움은 물질이다-아이작 뉴턴에게」의 한 대목을 읽어보겠습니다.
이론과 현실의 틈새는 아득하다. 꽃잎이 바람에 밀리고 있다. 거리를 사이에 둔 사물이 서로를 끌어당기는 것은 외로움 때문이다. 육체가 없는 물질이 머금고 있는 그늘진 외로움, 외로움의 극한에서 물질은 행동한다. 하르르 지는 꽃잎과 지구 사이에 서려있는 아득한 그리움을 시는 본다. 그리움은 틀림없는 물질이다.
사과가 땅으로 떨어지고 오늘처럼 벚꽃 잎이 하르르 하르르 지는 것은 뉴턴의 중력 이론 법칙이 아니라 그리움 때문이라 하고 있습니다. 허만하 시인의 시들은 인문학적 교양이 팽팽하게 부풀어 올라 서정적 각성으로 익어터지는 진경들을 보여줍니다. 동서양을 아우르는 폭넓은 지성이 각각 제 전문 분야의 전문적 지식에 갇히지 않고 서로 교류하며 인간과 소통하며 인문학적으로, 휴머니즘으로 교양화 돼 다시 우주적 감성으로 터져 나오는 것이 허만하 시인 시의 광채입니다. 《현대시학》을 오랫동안 주재하다 2008년 서울에서 경기도 안성으로 귀향해 자연과 더불어 살며 율려집 연작을 선보이기 시작한 정진규 시인의 그 연작 첫 편인 「조선 채송화 한 송이」를 보겠습니다. 산문시이며 이를 보면 산문시가 무엇인지 확연하게 알 수 있습니다.
소리의 속살들이 보인다 날아가는 화살들만이 아니라 되돌아 다시 오는 화살 떼들이 보인다 한 몸으로 보인다 너와 나의 운동엔 순서가 따로 없다 사랑의 운행엔 시간이 따로 없어서 거기 다 있다 (중략) 제 혼자서도 날아가는 날아오는 빛의 도둑 떼들이여, 햇살들이여, 해 뜨는 이 아침 자옥하구나 명적(鳴鏑)을 듣는다 살 섞는 소리를 듣는다 마악 피어난 작은 조선 채송화 한 송이가 찰나라고 일러야 하느냐 언제 제 혼자 피어 저리 세상에 빼곡빼곡 쟁여 있느냐
지금 마악 피어나는 채송화 한 송이에서 삼라만상 생성의 비의를 보고 있는 시입니다. 쏟아지는 아침 첫 햇살에서 우주 운행의 리듬을 듣고 있는 시입니다. 마침표도 없는 문장들이 오고 가며, 순서도 따로 없이, 음과 양처럼 살을 섞으며 리듬을 빼곡빼곡 쟁이고 있습니다. 이 산문시의 어절과 문장들이 빚어내는 리듬 자체가 우주생성의 원리인 율려라는 듯이. 그러면서 그 리듬, 그 소리 속살들을 이미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햇살, 빛살들의 화살 떼로서. 초속(超速)으로 나는 햇살 속에는 너와 나, 시간과 공간의 구분도 없이 교접하며 몸 바꾸며 삼라만상이 윤회하고 있습니다. 서로 리듬을 타며, 살 섞으며 우주를 빛살로 가로지르는 자옥한 아침 햇살이 소리 내며 나는 화살인 명적의 소리와 이미지로 구체화되고 있습니다. 음양의 화음이며 우주 생체의 리듬인 율려는 시인 앞에서 지금 마악 자꾸자꾸 피어나는 채송화라는 실물로 구체화되고 있는 시입니다. 산문시 양식을 본격적으로 개발하고 이미지와 운율에 천착하며 마침내 시와 시인과 우주 삼라만상이 하나 되는 감동을 보여주고 있는 정진규 시인의 시는 마땅히 제대로 평가 받아야할 것입니다. 그리고 천양희 시인이 얼마 전 문학 강연을 했었는데, 거기서 천양희 시인은 독수리의 갱생 노력에 대해 이렇게 말하더군요. 길면 팔십 년까지도 산다는 독수리는 한 삼사십 년 되면 자신의 무뎌진 부리와 발톱, 그리고 깃털을 스스로 뽑아버린다, 높은 산꼭대기에 외롭게 둥지를 틀고 바위에 부리를 피나게 쪼아 뽑아내고 그 자리에 새 부리가 나게 한다, 그 새 부리로 발톱을 뽑아내 새 발톱을 나게 하고 허름한 깃털도 뽑아 부등깃 새끼 솜털로 갈아입고 그렇게 갱생한다, 그렇지 못한 독수리들은 사냥을 못해 그대로 말라죽는다고. 시집, 아니 시편을 선보일 때마다 독수리의 그런 필사의 갱신 노력 없이는 시인으로 살아남을 수 없다는 말과 함께요. 그 말을 듣고 왜 여성시인이면서 융숭한 포용력은 물론 깊이나 기개 면에서도 어떤 남성 시인에 꿀리지 않는 높은 시적 경지에 올랐는지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시인도 제대로 평가받고, 문단에서 인정해주어야 하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유 : 모두 여덟 분이 언급되었는데, 조감해보면 남성 여섯 분, 여성 두 분입니다. 모두 지속적인 시 쓰기에 마르지 않는 샘처럼 자신을 다독이고 이끌어 오신 중견 내지 원로들을 언급해주셨습니다. 지당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시집 한 두 권 낸 신인들이 언급되는 건 부적절하다고 생각했고요. 그리고 이분들이 우리 한국 시의 기둥임을 다시 확인하고, 이제는 반대로 우리 시단에서 과대평가를 받고 있는 시인이나 매체, 혹은 지나치게 과잉 생산되고 있는 속성들에 대해 이야기해주십시오.
과대와 과잉의 문제들
강 : 과대평가를 말한다면 김명인, 정현종 시인 등을 예로 들까요. 우리 또래 어느 여류시인이 이렇게 말한 걸 기억합니다. “저분들은 상이 미리 대기하고 있다가 그분들의 신작시집이 나오기가 무섭게 상이 쫓아간다”고. 동감입니다. 젊은 시인들 중에서는 황인찬, 유희경이 선후배 간의 친분 때문인지 과대평가를 받는 인상이 짙습니다. 특히 황 시인은 스스로 유명 시인임을 의식하는 제스처의 에세이 같은 글(「부서지지 않는」 《시인수첩》봄호)을 발표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 다음 과잉 생산에 대한 속성은, 문학상이 너무 잡다하게 많다는 것. 특히 지방자체단체에서 주는 문학상이 많아 상금을 사냥하려고 많은 사냥꾼들이 눈독을 들이고 서로 경쟁이 벌어지는 희극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중견시인이 본명을 버리고 필명으로 (또는 필명으로 활동하는 시인이 본명으로) 응모하여 가작이나 우수작을 받는다거나, 또 그보다 못한 신인이 대상을 받는 코미디 같은 상황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성복 시인에 대해서는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 『남해금산』까지는 적절한 평가를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이후에는, 특히 최근에 『래여애반다라』를 보면 향가를 통해 이를 해석하고 체득하는 내용의 시편들이라고 하나, 제가 볼 때 시인은 향가에 정통하고 있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또한 근작 산문투의 시들을 보면 시행만 자유시 형태로 늘어놨지 그냥 단순한 에세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깊은 시적 함축이나 상징이 결여되어 있으며 시적 긴장이 종전보다 월등히 떨어지고 있습니다. 이분에 대해서는 『남해금산』이후 심하게 과대평가가 이루어졌다고 봅니다. 또 한분 김지하 시인은 1991년 신문에 「죽음의 굿판을 집어치워라」는 칼럼을 쓰면서 그 스스로 시인의 자리를 떠나 큰 사상가 내지 철인으로 변신합니다. 그로부터 최근까지 그는 유연한 자세로 도인의 풍모를 유지하고 있으므로 시인에 대한 평가는 1980년대 말까지면 충분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특히 김 시인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시「타는 목마름으로」가 폴 엘뤼아르의 작품을 표절 혹은 모방했다거나 영향 받았다고 하는 말이 있지요. 이를 당당하게 평단에서 정리해줄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홍 : 예 좋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역시 시적 성취도를 평가하는 데에는 미적 주관성에 따라 차이가 크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군요. 이성복의 시집 『래여애반다라』를 읽으면서 저는 너무도 고유하고 낯익은 것이어서 오히려 낯설게 느껴지는 것을 통해 삶의 희로애락의 굴곡을 평이한 화법으로 가슴 먹먹하게 전달하는 새로운 창작방법론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시 장르에서의 표절 내지 모방에 대한 공준이 좀 더 섬세하게 설정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새삼 듭니다. 조지훈의 「완화삼」에 대한 화답이 박목월의 「나그네」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요. 그러나 저는 이것이 모방 내지 표절이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주제나 내용은 흡사하지만 미적 쾌감과 감응의 절조는 크게 다르지요. 시는 내용을 이해하는 장르가 아니라 즐기는 장르라고 할 것입니다. ‘말하지 않기 위해 하는 말’을 생리로 하는 시 장르는 하지 않은 말이 한 말보다 중요하다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하지 않은 말의 전달 방식, 미적 가치, 의미 등을 검토하면서 표절이나 모방을 논의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옛날 저희들 학창 시절에 불렀던 노래와 마야라는 가수가 부르는 노래가 완전히 다르게 들리는 것과 같은 이치이지요. 드러난 내용보다 드러나지 않은 내용이 우위에 놓인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서 시적 표절에 관한 이론이 정립될 필요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유 : 가장 비도덕적 용어로 ‘표절’이라고 있는데, 사실 동양미학에서는 ‘전고’라 하여 과거의 명구들을 자기 작품에 써도 아무런 도덕적 흠이 안 되었던 전통이 있지요. 표절도 근대 이후의 개념이고 ‘originality’ 이를테면 ‘원본성’이라는 것을 강조한 서구 미학의 강한 영향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물론 정도 차이도 있지요. 홍 선생님께서는 김지하 시인이 창의적 변형을 통해 미학적인 라이선스를 획득한 경우로 보시는 것 같습니다.
홍 : 예. 앞에서 언급한 바처럼 시에서의 모방, 소설에서의 모방에 대한 섬세한 이론적 정리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시적 모방이라고 하는 것, 시의 장르적 속성에 따라서 표면적 유사성과 이면적 유사성에 대한 문제를 살펴보는 논리가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을 때에는 자칫 우리의 문학적 자산을 우리 스스로 손실시키는 경우도 없지 않겠지요.
유 : 우리의 의제와 조금 벗어나는 것이 많지만, 정립할 것이 정말 많군요. 여하간 강인한 선생님께서 어려우시지만 실명들들 거론하시면서 견해를 주셨습니다. 물론 과대평가를 받는 분들은 한결같이 좋은 시인들이지요. 좋은데 너무 지나친 측면이 있으니까 균형을 잡자는 말씀 같습니다. 별 볼일 없는데 과대평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까. 매체와의 친소관계에 의해 플러스알파 되는 경향이 있으면 그것을 일러 과대평가라고 해도 좋을 듯합니다.
홍 : 조금 더 덧붙여 말해보면, 과대평가나 매체 권력의 위세나 모두 세월 앞에서는 무기력해진다고 생각됩니다. 오직 좋은 작품이 살아남는 것이지요. 김소월이나 백석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이 점은 명약관화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자신의 시집 서평을 강권하거나 출판 매체 브랜드에 편승하려는 노력들은 사실 시적 삶의 본령과는 반대로 가는 행위들이라고 하겠지요. 어느 특정 출판사에서 시집을 내고 그것을 자신의 시적 위상이 높아진 것으로 이해하며 행세하는 것은 스스로를 기만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풍토는 우리 시단의 시적 에너지를 소모시키는 세속적 요소들로 보입니다. 이러한 풍토 개선의 혁신 내지 정풍 운동이 확산되었으면 한다고 하면 너무 과한 것일까요.
이 : 속 시원하게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문지’와 ‘창비’ 작가들 중에서 과대평가되는 작가들이 많이 보이고, 물론 좋지만, 좋은 것보다는 더욱 과대평가되는 시인들이 표 나게 눈에 띕니다. 특히 ‘문지’나 ‘창비’에서 S대 출신 몇몇 소설가들이나 시인들이 시 이론, 소설 이론에 의해 작가로 탄생하고 과대평가 받고 있는 것은 문제입니다. 학문에 빠져들어 그 패러다임에 시를 끌어당기며 시인의 좋은 상상력을 죽이는 예도 많습니다. 송찬호 시인의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에서는 바슐라르의 상상력 패러다임 자장이 너무 세 보였고, 나희덕 시인도 광주로 대학교수가 되어 가더니 그 좋은 상상력을 잃고 한 사오 년간 강의하는 수준의 시가 된 것을 보기도 했습니다. 강 선생님 말씀대로 이성복 시인도 심오, 오묘한 사상 쪽으로 시가 너무 기울지 않았나 하는 염려도 주고 있고요. 그런데도 시 작품 자체로서는 떨어지는 이런 부분까지도 평론으로서 떠받쳐주려는 그런 평론이 시를 왜곡시키지나 않을까 걱정입니다. 김지하 시인은 과대보다는 과소평가된 시인 중 한 명입니다. 시인으로서 마땅한 평가가 필요한데 시 이외의 것으로 평가돼 문제입니다. 김지하 시인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한(恨)의 정수와 영감, 시의 귀기나 한적인 측면에서는 미당 서정주의 그것을 쏙 빼닮았습니다. 정작 김 시인은 미당을 극구 배척하지만. 그러나 김지하의 시세계에 대해서 제대로 연구와 평가가 필요할 것입니다.
유 : 한국 시의 미래가 다양성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어떤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할지 그 핵심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비평과 매체, 사람 등 전반적으로 포괄하셔서 한국 시의 미래에 대한 제언과 방향 설정에 도움 되는 말씀을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한국 시의 미래
이 : 지난해 9월말 『미당 서정주 평전』을 펴낸 지 며칠 안 돼 시인이자 문학평론가 한 분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주로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시인, 평론가들 모임인데 미당 평전을 가지고 강의해 달라”고. 그래 고마운 마음으로 응해 서정주의 생애와 시, 그가 살아낸 시대와 문단, 그리고 서정주 시의 가치에 대해 세 시간가량 소신껏 밝혔습니다. 그 자리에서 평전 서문에도 나와 있는 이 대목을 특히 강조했습니다. “해방 이후 우리 현대시사의 지형도는 서정주를 중심으로 그 한쪽에는 김수영을 아버지로 삼은 참여와 진보, 그리고 지성의 시단이 있고 또 다른 쪽에는 김춘수를 아버지로 삼은, 그러나 제 아비도 부정해버리는 실험과 해체의 전위시단이 놓여 있습니다. 동서고금 시의 한가운데를 흐르는, 시의 강심수(江心水)로서의 정통 서정의 서정주 시는 친일(親日)과 어용과 순수로 매장당한 채 김수영과 김춘수 쪽만이 평가돼 오며 오늘날 문학의 난맥상과 나아가 인간성 상실을 부추기고 있지 않은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고 강의 후 이어진 장시간의 뒤풀이 자리에서 서정주를 이러저러한 이유로 문학교과서에서도 몰아내고 자신들 진영의 시 위주로만 싣고 있는 소위 ‘문학 권력’에 대한 성토가 이어졌습니다. 신춘문예 당선 시나 유수문학상 수상작들을 보며 학생들에게 제대로 된 시 공부를 가르치기가 쑥스럽고 두렵기까지 하다고, 이런 계기를 만들어 준 것이 서정주의 친일과 친독재의 잘못된 삶 아니냐고. 그걸로 서정주의 좋은 시들마저 매장시켜버리고 문학권력 입맛에 맞는 작품만 싣고 뽑고 가르치고 있으니 이젠 서정주를 복권시켜 어떻게든 시의 길을 바로잡아야 할 게 아니냐고. 그날 결론은 서정주 시의 복권으로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러기 위해 문학 권력에 맞서 문학을 살리는 작은 문학 운동부터 하자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물론 한국 문학 병폐의 병원균인 문학 권력을 치유하고 바꿔야 하겠지요. 자유와 지성, 그리고 비판을 내걸고 1960년대에 나와 반세기 이상 우리 문학을 지배하고 있는 《창작과 비평》이나 《문학과 지성(문학과 사회)》의 압제의 주눅에서 문학이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소통과 감동이 따스하게 피돌기 하는 문학예술의 본연으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에 수박당한 우리 시들을 풀어내는 운동이 소규모라도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유 : 이경철 선생님께서는 난해하고 긴 시들을 넘어, 그리고 지나친 현실 강박을 넘어 조금 더 자유롭게 문학의 본령이라고 할 수 있는 서정성을 회복하자는 말씀을 여러 차례 주신 적이 있는데요, 오늘도 한국 시의 미래를 서정성 회복에다 두신 것 같습니다.
홍 : 조금 우회적으로 의견을 개진해 보겠습니다. 공자는 논어에서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라 했습니다. 이것은 “책에서 배우고 때(시대 현실)에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로 해석하는 것이 옳습니다. 책에서 배우는 학이(學而)가 비평가의 역할에 가깝다면 시습(時習)은 시인의 영역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괴테의 『파우스트』에서도 “모든 이론은 회색에 회색을 덧칠하는 것이고 오직 살아 있는 것은 저 황금나무”라고 했던가요. 시인은 이론적 탐색을 통한 진리의 구현보다는 살아 있는 현실에서 진리를 구현하는 시중(時中)의 자리에 입지를 두는 것이 본령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시가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감동의 대상이 되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한 성향이 여기에서 찾아진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적 소통이라는 문맥의 연장선에서 우리 시의 리듬을 찾는 노력이 요구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시적 리듬은 그 작품의 고유한 숨결이며 상호 공명과 교감의 통로라고 할 수 있겠지요. 중국의 유종원이 소지욕기통(疎之欲基通)이라고 했습니다. 소통하고자 하면 성글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저는 요즈음 시적 리듬이 휘발되어 가는 경향은 작위적이고 이지적인 말이 너무 많아지면서 틈 혹은 창조적 여백이 막힌 데에 원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의 형식미학은 닫힌 텍스트가 아니라 외적 세계와 소통하는 열린 감응의 공간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좀 범박하게 말하면 시적 소통은 시의 육체를 회복하는 것과 연관된다는 말도 되겠군요.
강 : 요즘 보면 잘 쓴 시는 많습니다. 허나 좋은 시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우리 시가 지향해야할 방향은 잘 쓴 시보다는 좋은 시를 지향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좋은 시란 첫째 감동 있는 시, 둘째 새로운 미학을 탐구하고 있거나, 셋째 상상력의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시가 좋은 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초적인 감각에서 벗어나야할 것이고, 아방가르드 혹은 새로운 언어 실험에만 집착해선 안 됩니다. 한 마디로 큰 시를 지향해야 합니다. 무조건 길게 써야 큰 시가 되는 것은 아니지요.
우리의 손가락 다섯 개, 그 각각의 끝에 있는 스물일곱 개의 뼈, 서른다섯 개의 근육, 약 이천 개의 신경세포들. 『나의 투쟁』이나 『곰돌이 푸의 오두막』을 집필하기엔 이것만으로 충분하고도 넘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