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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유정(江湖有情)
야(夜)!
달마저 흑운(黑雲)에 가려진 지 오래였다.
산(山)도 나무도 하늘도 분간이 되지 않는 흑야(黑夜).
바람마저 잠이 든 절대정적(絶代靜寂) 가운데, 냉풍을 일으키며 치달리는 일단의 흑포인들이 있었다.
허리에는 장도(長刀)를 하나씩 찼고, 얼굴은 흑립으로 가리고 있다.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수십 장씩 지나쳐 가는 가공할 신법을 지닌 사람들.
광야(曠野)를 까맣게 뒤덮으며 치달리는 사람들의 몸에서는 온기(溫氣)가 전혀 흘러 나오지 않았다.
지하에서 솟아오르는 바람처럼, 수백 명의 흑포인들은 소리도 내지 않고 어둠을 갈랐다.
눈빛마저 어둠을 닮은 일단의 신비인들, 이들은 무엇인가를 끝없이 추적해 가고 있었다.
만리추종(萬里追從), 벌써 꽤 여러 날째였다.
"만리향 내음이 점점 흐려진다."
"으음, 자칫 잘못하다가는 총수의 행방을 놓치고 만다!"
"우리도 지독하나, 요즘 어린 것들은 더욱 지독하다. 크크, 그러고 보면 마가의 제자임에는 틀림이 없군!"
"한가하게 말할 때가 아니네. 총수의 무공이 비록 초절하시나, 놈들의 수는 수십만에 달하네!"
흑포인들의 신법은 점점 빨라졌다.
이들은 미세한 향기를 쫓아 움직이고 있었다. 그 향기는 어떤 사람의 몸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끝없이 향기를 따르는 사람들, 이들은 대체 누구를 추적하고 있는 것일까?
"조심조심 옮겨라! 지금은 비록 수인(囚人)이나, 머지않아 우리들의 상전이 되실 분이니까!"
어둠 속, 괴인들이 부산히 움직이고 있었다.
팔인교(八人轎)에서 사람 하나가 끄집어 내졌고, 팔인교는 지옥연(地獄淵)이라 불리는 연못 안에 빠뜨려졌다.
노학(老鶴) 같은 노인, 그의 두 눈은 손바닥 너비의 검은 안대에 의해 가려져 있었다.
'위사들이 고생하겠는데… 이들은 천 리를 갈 때마다 방향을 바꾸고 운송 도구를 바꾼다.'
노인의 입가에는 미미한 웃음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의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 장식용 가락지라고 보기에는 모양이 흉측한 묵철환(墨鐵丸) 하나가 끼워져 있었다.
빛이 검고 투박하게 생긴 가락지.
아아, 그것은 마무정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었던 뇌화탄(雷火彈)이 아닌가?
그렇다면 낙척유룡(落拓遊龍)은 이미 마무정으로 뒤바뀌어졌단 말인가?
그렇다. 미미한 웃음을 짓는 노인은 바로 마무정이었다.
'내게는 숨겨진 솜씨가 많다. 그것이 새록새록 기억난다. 나는 이틀 전, 그 솜씨 중 하나인 흑풍잠은(黑風潛隱)의 절기를 발휘해 팔인교 안으로 잠입했다.'
마무정은 얼마 전, 하나의 절기를 발휘했다.
검은 바람을 모공에서 일으켜 상대를 현혹시키는 수법.
그것은 정녕 마가의 비전수법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정파의 수법도 아닌, 그것은 유례를 찾지 못할 가공할 비법이었다.
'하여간…….'
마무정은 부축되어 가며 쓴웃음을 흘렸다.
'나는 나의 과거에 빚을 많이 지고 있다. 부정하려 해도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진실이다.'
마무정은 운명을 느꼈다.
운명(運命), 그것은 끊지 못할 사슬과도 같았다.
이슬(露)이 차가웠다.
마무정은 두 사람에 의해 부축을 받았다.
오른쪽에 선 자의 몸에서는 지독한 노린내가 풍겼다. 그것으로 보아 그는 중화인(中華人)이 아닌 듯했다.
"……!"
"……!"
두 사람은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마무정을 이끌었다.
'어디로 옮겨질까? 구마존이 예측한 대로… 유정이놈이 새로 일으킨 장소로 옮겨질 것인가? 구마존이 토설한 대로라면 그 곳은 패황봉이라고 했는데, 하지만 가 봐야 한다. 마가에는 소굴이 무수히 많다. 타초경사(打草驚蛇)가 아니라, 건곤일척(乾坤一擲)하기 위해서는 놈의 심장 속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어느 한순간, 그는 지독한 악취를 맡게 되었다.
구역질을 울컥 일으키는 악취.
'시체 썩는 냄새다!'
마무정은 인상을 찡그렸고, 돌연 나무판자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눕혀라!"
"혼수혈을 찍고 눕혀라. 그 다음, 관뚜껑에 나무 못을 박아라!"
"정보에 따른다면 두 무리가 우리를 추적하고 있다."
어둠 깊은 곳, 사방에서 두런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한 무리는 정법열사(正法烈士) 중 최강이라는 청청위사(靑靑衛士)들이고, 또 한 부류는 신비세력이다!"
"이 일은 절대 비밀 가운데 이루어져야 한다!"
"마화삼 나으리의 특명에 따른 일이니,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그런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마무정은 물컹한 고깃덩어리 위에 놓여졌다.
부패한 시체, 그것도 남자가 아닌 여인의 시체였다.
'관(棺)이다.'
마무정은 아차함을 느꼈다.
'만리향 내음은 어떤 것에 섞여도 흐려지지 않으나, 오직 하나! 시체 썩는 냄새에서만은 흐려진다. 위사들이 꽤나 골치를 썩이겠군.'
마무정은 흠칫했고, 또다시 나무판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마무정은 큰 나무관 속에 눕혀진 것이다. 묘지에서 끄집어 내진 여자의 시체가 담긴 나무관 안에.
관은 살아 있는 마무정을 담은 채 뚜껑이 폐쇄되었다.
'대단한 기밀유지다. 하여간… 중대한 일임에 틀림없다.'
마무정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는 철저하게 낙척유룡 행세를 하는 것이다.
이틀 후, 마무정은 배(船)에 옮겨졌다. 그리고 그는 좁은 공간에 갇혔는데, 공간은 술 향기에 찌들어 있었다.
술통이 가득 쌓인 창고일까?
마무정은 그 안에 갇혔고, 배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일각 후, 마무정은 처음으로 마가의 인물과 접촉할 수 있었다.
"그간 저지른 결례를 용서하시오!"
그의 목소리는 꽤나 낯익었다.
그는 암도를 통해 창고 안으로 들어왔는데, 그와 함께 들어온 두 명의 여인 중 하나가 마무정의 안대를 벗겨 주었다.
방은 매우 밝았다.
마무정은 눈을 뜨며 적이 놀랐다.
'분명 배 안의 술창고인데, 감쪽같이 위장을 했군! 그간 의식을 차리고 있지 못했더라면, 이 곳이 배 안임을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방 안은 매우 화려했다.
마무정 앞, 산해진미(山海眞味)가 차려진 탁자가 하나 있고 그 너머에는 과거 한때 그에게 구 배를 한 바 있던 사람 하나가 서 있었다.
천룡마객(天龍魔客)이었던가?
'유정이 녀석의 검위(劍衛) 중 하나였던 자다. 옷차림으로 보아 현재는 대순찰(大巡察) 지위인 듯하군.'
마무정은 상대를 보는 찰나 그의 이름과 별호, 그의 신분을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었다.
물론, 그는 전혀 모르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상대를 쏘아보고 있었지만.
"귀하는……?"
"소생은 천하제일 마화삼 나으리의 휘하인 천룡마객이라 하오!"
천룡마객의 태도는 지극히 정중했다.
야광주 빛이 화려한 방. 배는 너무도 조용히 움직이고 있어, 방 안의 기물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천룡마객은 나이 사십에 달한 자로, 지금의 그는 꽤나 화려한 옷을 걸치고 있었다.
"강호계의 십대은현(十大隱賢) 중 한 분이시고, 관북무림계(關北武林界)의 일대검호(一代劍豪)이신 낙척유룡 어르신네의 집사(執事) 노릇을 하게 되어 무상의 영광이오!"
그는 깍듯이 배례를 취했다.
"집사? 그대가 나의 집사라고?"
마무정은 매우 카랑카랑하게 말을 받았다. 그는 철저하게 낙척유룡 행세를 하는 것이다.
"훗훗… 노여워하지 마시오. 만에 하나, 마화삼 나으리의 원대한 계획을 아신다면 우리는 적(敵)이 아니라 동지(同志)임을 깨닫게 될 것이오!"
"고약한 놈, 네놈이 할 말은 둘 중 하나다!"
마무정의 언성이 높아졌다. 그는 눈에서 불길을 토하며 격하게 소리쳤다.
"하나는 나를 죽이겠다는 말, 또 하나는 자결하겠다는 말!"
그러나 그의 격분에 가득 찬 외침에도 상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낙척유룡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노야(老爺)는 좋은 사람이오!"
그는 묘하게 웃고 있었다.
좋은 사람! 그 말은 대체 무엇을 노리고 한 말인가?
"노야는 천하를 모르고 있소. 그리고 정법회에 얼마나 많은 마가의 마혼첩(魔魂諜)들이 머물러 있으며……."
"으음!"
"마화삼 휘하에 얼마나 많은 세력과 자금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소!"
"……."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고 합력하겠다고 말할 경우, 여생이 얼마나 화려해진다는 것도 알지 못하고 있소!"
"더… 더러운 수작 마라!"
마무정은 또다시 발끈 소리쳤다.
"훗훗… 정법회는 종이 호랑이오! 하긴 유령(幽靈)이 괴수이고, 죽어 가는 계집이 우두머리이며, 불구자들이 수뇌부를 이루고 있고, 자객들이 매사를 좌지우지하며, 긴급할 때 써야 할 전통적인 신위를 지닌 영패(令牌)도 없는 처지에 구파일방을 호령하려 하니… 일컬어 광인(狂人) 집단이 아니겠소?"
천룡마객의 눈빛이 강해졌다.
"무… 무슨 말이지?"
마무정이 말을 약간 더듬었다.
"훗훗… 정법회는 수십만 고수가 모였으나, 그 중 삼분지일은 이미 우리가 작성한 혈판장에 도장을 찍었다는 말이오!"
"그, 그럴 리가?"
마무정이 부르르 떨자, 천룡마객의 목소리가 점점 고조되었다.
"그 정도로 놀라면 아니 되오!"
그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마무정을 바라봤다.
"세칭 열사라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독약 중독자요."
"독약?"
"정법회의 주방에 우리들의 손이 미치고 있소. 다시 말해, 그들은 유야무야한 가운데 독에 당했다는 뜻이오!"
실로 놀라운 말이었다.
마가의 손은 너무도 깊은 곳을 건드린 후였단 말인가?
정법회, 백도의 상징이 되는 집단이다.
낙척유룡은 얼마 후, 그 곳의 장로(長老)가 될 사람이었다.
"그 두 가지 사실은, 내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사실에 비하면 빙산일각(氷山一角)이오!"
"빙산일각?"
"훗훗… 세월은 다수에 의해 정해지기보다 극소수 영웅(英雄)들에 의해 결정이 되오!"
"으음!"
"그리고 마가에는 정법회에 있는 고수보다 오십 배 많은 고수가 있소!"
"……!"
"게다가 정법회에는 허깨비들만이 있소. 그대는 정법회가 머리가 없는 거인(巨人)임을 아시오?"
"머리 없는 거인?"
"그들은 십천무후를 태상회주(太上會主)로 섬기고 있으나, 그는 실체가 없는 유령인간이오!"
십천무후, 그는 한 번도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었다.
"더욱이 그들 중 회주인 수정옥녀 단리음이라는 계집은 봄이 되면 죽을 처지요!"
천룡마객, 그의 말은 하나하나가 모두 사실이었다.
마가의 이목(耳目)은 개방을 능가했다.
'적어도 이 자는 여지껏 한 마디도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마무정은 어떤 섬뜩함을 느꼈다.
그가 아우로 여겼던 마유정, 그가 돌연 거인으로 여겨졌다.
'녀석, 꽤 많이 늘었구나.'
마무정은 씁쓸한 기분에 사로잡혔고, 천룡마객은 점점 고조되는 표정 가운데 눈을 부릅떴다.
"가장 놀라운 사실은……!"
그는 과거에도 알아주던 달변가였다. 그는 꽤나 숙연한 표정 가운데, 말을 던졌다.
"정법회는 구 일이면 무너질 사상누각이라는 것이오!"
"구 일? 모래 위의 집?"
"그렇소. 단 구 일이오!"
"……!"
"우리 쪽에서는 동영(東瀛)의 첩자들을 써서 정법회의 모든 것을 이 년에 걸쳐 조사했소!"
"……."
"결과, 파안대소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을 세 가지나 발견했소. 그것은 단리음이라는 멍청한 아이가 시한부 생명이라는 사실보다도 비중이 큰 사실이오!"
"으음……!"
"그리고 노야를 여기 모신 이유는, 그것을 말씀드리고 협조를 얻기 위함이오!"
천룡마객의 말이 거기에 이를 때였다.
혈월(血月),
편월(片月).
천룡마객이 거느리고 들어온 두 명의 시녀는 마무정의 어깨를 고운 손길로 정성스레 다독거리고 있었다.
그네들의 손길은 봄바람 마냥 나긋나긋했다.
미인계(美人計)는 동서고금을 통해 병법 중의 병법으로 통한다.
마가는 낙척유룡을 회유하는 동시에, 미인의 손길로 녹여 버리려 하고 있는 것이다.
뜨거운 손길이 마무정의 옷 속으로 마구 비집고 들어왔다.
그리고 끈적거리는 숨소리, 그 숨은 뺨을 화끈거리게 할 욕정의 바람이고 거절치 못할 유혹의 몸짓이었다.
천룡마객은 미묘한 눈빛을 띠며 시녀들의 거센 애무를 받고 있는 마무정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이것이오!"
그는 소매에서 금빛 배첩 하나를 꺼냈다.
<낙척유룡친전(落拓遊龍親傳).
마도맹주(魔道盟主) 친서>
화려한 꽃이 봉서 위를 덮고 있고, 그러한 글이 마무정의 눈길을 끌었다.
글은 그에게 얼굴 하나를 던지고 있었다.
오만하고 표독스러웠던 소년 유정(有情).
자신의 발전을 위해 가문을 무너뜨렸던 절대마인(絶代魔人).
그의 얼굴이 봉서 위에 드리워졌다.
"속하도… 그 내용은 모르오!"
천룡마객은 말하며 세 걸음 뒤로 물러났다. 자신은 그 내용을 볼 수 없다는 듯이!
이것은 모두 마화삼이 지시한 처세법이었다.
마무정은 고민하는 듯하다가 봉서를 뜯었다.
그 안, 그를 정말 경악케 하는 글이 적혀 있었다.
<이미 백도계는 본좌의 적이 아님을 귀하께 밝히려 한다!
백도는 본좌가 손을 씀과 함께 혈세(血洗)되고, 단 구 일 만에 멸망한다.
첫째 이유, 대접전이 시작되면 백도건 흑도건 수하(手下)된 자들은 동요한다.
그 때 신위로운 우두머리가 있어야 수하들을 안정시키는데, 백도에는 그것이 없다.
놀라지 마라! 백도의 장문영패(掌門令牌)들은 현재 사라진 상태이다!
둘째 이유, 최근 들어 정법회에 신풍(神風)을 일으킨 오 인(人)은 구린 구석을 갖고 있다.
그들은 슬프게도 자객행(刺客行)을 수십 년 해 왔었다. 그것이 폭로될 경우, 정법회는 싸움 없이도 지리멸렬되고 만다.
그들은 바로 인문오인(忍門五忍)이라는 것을 본좌는 이미 확인했다.
셋째 이유, 정법회의 고수들은 싸우지 못할 상태였다.
그들은 누군가에게 진원지기(眞元之氣)를 전수해 탈진상태이기 때문이다.
단 한 번 정도는 혼신공력으로 싸울 수 있을 것이나, 그 이상은 힘들다. 해서, 백도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본좌는 백도가 아니라 황궁(皇宮)과 이역(異域)의 무리, 그리고 마화성(魔花城)이라는 신흥세력을 조심하기에… 기왕이면 싸우지 않으려 한다. 그 일을 위해 그대가 필요하다!
이 글을 보고 본좌 휘하가 될 마음이 든다면 귀하를 마가서열 오십좌(五十座) 안에 넣어 주는 동시에, 구 일 내에 구파일방 중 일 파를 맡게 하겠다!>
패기(覇氣) 넘치는 글은 분명 마유정의 글이었다.
마무정은 글의 획만 보고도 마유정을 느낄 수 있었다.
'네놈은… 이미 거인(巨人)이 되었구나. 내가 마화삼 노릇을 했었다 해도, 이 정도까지는 잘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무정은 손바닥이 화끈거림을 느꼈다. 봉서가 천 근(斤) 이상인 양 무겁게 여겨졌다.
'하지만 너는 내 손에 죽는다. 내가 너를 죽일 작정이기에!'
그는 마유정에 대한 생각으로 번뇌하는데, 천룡마객은 나름대로 생각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충격이 큰가 보군.'
밀실의 협상, 그리고 두 여인의 간드러진 안마, 펴질 것 같지 않은 노인의 표정, 조용히 흐르는 배(船).
밤은 그렇게 깊어 갔다.
"이 밤을 즐겁게 보내시며 신중히 생각하십시오. 내일이면, 절대마가(絶代魔家)로 드시게 됩니다. 마화삼 어르신네를 뵙게 될 때, 이 글을 읽고 변화된 마음을 밝히기 바라오!"
천룡마객은 눈을 찡긋하며 뒤돌아섰다.
그는 선실 문을 열고 나갔고, 바로 그 순간 불이 꺼졌다.
팟-!
불 꺼지는 소리의 메아리가 흐르는 가운데, 두 여인은 끓어오르는 욕정을 이기지 못하는 듯 간절히 말하며 마무정의 몸에 아교처럼 달라붙었다.
"하아아……!"
"이제부터는 우리들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마무정은 이미 돌(石)이 된 후였다.
"어… 어서!"
"제… 제발 안아 주세요, 나으리."
여인들이 그의 몸 어디를 만지든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 밤의 환락이 미인계이기도 하거니와, 그가 진짜 낙척유룡인가 하는 것을 시험하는 함정이라는 것을!
'그는 삼매열화공(三昧熱火功)을 부단히 익힌 결과, 욕정을 상실했다. 그는 여자를 봐도 육욕을 일으키지 못한다. 마가 사람은 그의 특징을 알기에, 두 마리 암캐로 하여금 내가 그인가를 시험하려 하는 것이다.'
마무정은 마가 사람들이 나는 하늘보다 한 단계 높은 하늘을 날고 있었다.
뜨거운 바람, 하나의 거인(巨人).
결국 떨어진 쪽은 두 여인이었다.
울다가 지친 개구리 마냥 발랑 누워 버린 우물(尤物)들.
그녀들의 몸은 진득한 체액으로 인해 번들번들거리고 있었다.
"그대는 진짜 낙척유룡이군요?"
"가짜이기를 바랐는데, 우리들과 뜨거운 밤을 만들 진짜 남자이기를 바랐는데!"
두 여인은 이미 녹아 버렸다. 이유는 하나, 여자를 사갈시하는 노인의 두 눈이 너무나도 매력적이기 때문이었다.
빨아들이는 두 눈, 그 눈 아래 가슴이 뛰지 않을 여인이 또 있을까?
"그대의 눈은 환우제일(還宇第一)입니다!"
"노야는 그 아름다운 눈만으로도 청춘(靑春)이십니다. 이 말은 일개 요물(一個妖物)로 하는 말이 아니라, 사내를 많이 겪어 본 한 여인으로 드리는 말입니다!"
여인들은 욕정을 터뜨릴 수 없자, 몸이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듯 옷 조각을 뱀의 허물 마냥 내버려 두고는 엉금엉금 기어 문 밖으로 빠져 나갔다.
아마도 머지않아 두 명의 고수가 몸살을 앓게 될 것이다.
열 개의 조롱, 열 마리의 신조(神鳥).
지금, 거만한 눈빛이 번뜩거리고 있다.
"모든 준비는 완벽해졌다. 북황 휘하(北皇麾下) 십만 고수(十萬高手)와 더불어 본좌 휘하 이십만(二十萬)이 일시에 일어날 것이다. 내일 새벽에!"
자신만만한 웃음이었다.
청사(靑紗)로 얼굴을 가린 금포인, 그는 열 마리 신조를 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만리통신! 훗훗, 마가의 저력(底力) 중 하나이지! 내가 명을 내리는 찰나, 척살령(擲殺令)을 담은 비조는 떠오를 것이고……!"
그는 뒷짐을 진 채 말했다. 음사하고 거만한 목소리로.
"비조는 십로(十路)에 흩어진 이십만 고수를 움직일 것이며, 그들이 움직이는 찰나 외인검대(外人劍隊)들도 일어난다!"
자신만만한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는 도열한 뭇사람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구 일이면 나의 독보천하(獨步天下)이다! 프핫핫……!"
수많은 사람들이 절하고 있다.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감히 금포인의 허리 위쪽은 바라보지도 못한 채.
아아, 마화삼(魔花衫)!
전지전능한 힘을 가진 마가의 젊은 절대자(絶代者)!
그는 신형을 천천히 틀며 허공을 쏘아봤다.
"마가의 선조들은 후대에 내가 있음을 영광으로 여길 것이다. 억조창생(億兆蒼生)을 지배할 대영웅이 마가에서 탄생함을, 그네들은 저승에서나마 기뻐하게 되리라!"
그는 저벅저벅 걸었다.
화원(花園) 사이를 뚫고 만들어진 백석로(白石路).
벌거벗은 미녀들이 나비를 희롱하며 뛰어놀고 있고, 그림같이 아름다운 누각에서는 악기 소리가 흘러 나왔다.
저 먼 곳, 향무(香霧)에 싸인 누각이 한 채 서 있었다.
칠층고루(七層高樓)!
여황루(女皇樓)라는 누각의 현판을 만든 사람은 바로 마화삼이었다. 그는 용(龍)에게 조화를 준다는 여의주(女意珠)와 같은 신비녀 무선(巫仙)을 위해 직접 현판을 만든 것이다.
창(窓), 언제나 반쯤 열려진 창이었다.
창 안,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미녀 하나가 마화삼을 보고 손을 쳐들고 있다.
떨리는 섬섬옥수(纖纖玉手), 활짝 웃는 미녀는 마화삼을 부르고 있었다.
밤의 정사(情事)는 시시하다. 기왕이면 햇살 아래 살을 섞어야 맛이 난다.
하루에 세 번 정사하는 것, 그것은 이미 마화삼의 오랜 습관 중 하나였다.
무선은 세 번의 정사를 모두 독점한 지 오래였다. 마화삼과 무선은 이미 하나의 몸이라 할 수 있었다.
"기다리고 있습니다. 호호……!"
무선은 오백여 장 먼 곳에서도 마화삼을 정확히 알아보고 손짓을 한다.
교태가 뚝뚝 떨어지는 미물(美物).
남자로서 누가 그녀를 거절할 수 있을까?
색에는 더 이를 데가 없다던 혈발미랑 음요홍을 한 마리 촌닭으로 만들어 마화삼 곁에서 추방한 절대우물.
그녀는 변황쌍미(邊荒雙美) 중 하나라던가?
그녀의 풍만하고도 농염함은 이미 여자의 맛에 통달한 마화삼에게는 끊지 못할 아편이 되어 버렸다.
무선(巫仙), 그녀는 마화삼이 옥황루 쪽으로 다가서는 것을 꽤 먼 곳에서 발견하고 나서 살포시 신형을 틀었다.
거울(鏡)을 보고 얼굴을 치장하려는 것일까?
그녀는 구리 거울 하나를 보고 묘한 표정을 지었다.
"저 놈은 정법회가 무너지는 그 순간, 죽는다! 천하에서 가장 멍청한 놈!"
차디찬 목소리다.
죽다니? 대체 누가 죽는단 말인가?
"내가 바라는 것은 중원의 혼란이지, 강호 제패가 아니다. 호호! 놈은 모든 것을 얻었다 여기는 찰나, 죽고 만다!"
무선의 얼굴빛은 푸르스름했다. 너무나도 잔혹한 얼굴, 한 번 보면 소름이 오싹 끼치는 얼굴이다.
자주색 기운이 피어나는 피부에, 두 눈에서는 청광이 번뜩이고, 입가에는 악랄한 웃음의 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거울 속, 이 세상에서 가장 잔혹한 여귀(女鬼)의 얼굴이 떠오르고 있었다.
웃는 무선(巫仙), 그녀의 입술 사이에서 너무나도 차고 잔혹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리고 나는 북황(北皇)께 돌아간다. 중원대란을 주도한 공로로 나는 일등공신이 될 것이다!"
그녀의 눈길은 탁자 위로 쏠렸다.
그 곳, 책이 한 권 있고 책갈피에 종이 한 장이 끼워져 있었다.
<중원밀단주(中原密團主)에게 명한다!
황군(皇軍)을 한시빨리 장성(長城)에서 멀어지게 하라.
무림대혼란이 시작되면 자연히 그렇게 될 것이다.
기왕이면 정사 대접전이 천하 도처에서 벌어지게 하고, 마가(魔家)에서도 파란이 일게 하라.
이즈음의 때를 놓치면 아니 된다!>
무선은 손을 내밀어 쪽지를 취했다.
"밤새 마화삼을 죽일 꾀를 생각해 봤었지!"
말과 더불어 손바닥이 혈옥처럼 붉어지며, 종이는 일순 흰 재로 화하고 말았다.
분가루처럼 고운 재를 툭툭 터는 무선, 그녀는 마화삼이 삼백 장 안으로 다가섰음을 느끼고 있다.
"저 멍청한 놈은 시세(時勢)를 모르고 있다."
또다시 웃는 무선.
아아, 이것이야말로 그녀의 진짜 모습일까?
"놈은… 처단될 것이다. 호호! 놈을 찢어 죽이고자 하는 강호 여인에게!"
무선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주렴(珠簾), 그녀는 보라색 주렴을 촤르르 걷어 낸다.
주렴 뒤에는 새조롱이 하나 있고, 조롱 안에는 마조(魔鳥) 한 마리가 들어 있었다.
무선은 융단을 즈려 밟고 조롱 쪽으로 가며 품에 손을 넣었다.
"이 한 장의 밀지(密紙)면 된다! 그러면 오천 고수(五千高手)가 몰려와 놈을 찢어 죽이리라!"
무선의 손에는 다시 한 장의 밀지가 쥐어졌다. 그 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져 있었다.
<존모하는 나으리께!
절대마가의 한 사람으로 그간의 치욕을 견디다 못해 결국 이 글을 전합니다!
그대께서 쳐 죽이려 하는 그 추악한 가짜놈은 정법회가 피에 씻길 때 귀모애(鬼母崖) 위에 있을 것입니다!
위대하신 옥화삼(玉花衫)이시여!
나타나시어 가짜 마화삼을 찢어 죽이십시오!>
무선은 쪽지를 네 번 접는다.
쪽지는 마조의 목에 달린 철통에 들어가고, 조롱은 깨어지고, 마조는 위로 날아올랐다.
마조가 창 밖으로 힘차게 떠오를 때, 갑자기 문이 어두워졌다.
체구가 당당한 청년 하나가 조양(朝陽)을 가로막으며 문 사이에 섰다.
"무선, 어디로 날리는 새요?"
그는 미소지으며 다가섰다.
"호호… 잡혀 오래 지내면 날개 힘이 약해지는 것이 새의 천성이지요. 그래서 가끔 자유롭게 날개하는 것입니다."
무선은 상냥히 말하며 그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가는 허리가 흔들리는 가운데, 아아 불타오르는 듯하던 홍색 궁장은 그녀의 요염한 몸뚱이에서부터 구름이 벗어지듯이 흘러내렸다.
찰떡 반죽같이 윤기 나는 둔부는 산같이 컸다.
좌우로 흔들거리며 돌아가는 둔부, 건드리기만 해도 터질 듯 팽만한 허벅지.
무선은 걸어가며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으로 화했다.
"최근 너무 피로하신 듯합니다. 오늘은 제가 특별한 쾌락을 드려 그 피로를 거둬 드리고 싶습니다!"
"그래, 나는 지금 흥분하고 있다. 너 때문이기도 하고, 나의 벅차오르는 야망(野望) 때문이기도 하다! 아무도 이루지 못했던 무림일통을 내가 이루게 될 줄이야!"
웃는 자, 그는 마화삼이었다.
"훗훗… 두 가지만 해결하면 된다. 구신(舊臣)들을 설득하는 것과, 십대은현을 세뇌시키는 것! 모두 오늘밤 안으로 끝날 것이다."
"흐응! 여기서는 공적인 이야기는 마세요. 그냥… 태워버리기만 해요. 우리의 젊음을!"
"훗훗… 그러자꾸나, 무선!"
말이 오가는 가운데, 둘은 하나로 엉켰다.
그리고 바람… 너무나도 뜨거운 바람이 타오르는 태양 가운데 치솟기 시작했다.
"정… 정말 세다, 너는!"
사내의 목소리가 들리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야… 저의 진짜 솜씨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아아, 며칠 잠을 자지 않았더니… 꽤나 급해지는군!"
"마음대로 하세요! 쭉 그랬듯이!"
"네… 네가 무섭다, 무선!"
"무섭다고요?"
"너는… 나를 태울 계집이다. 어떻게든!"
"흐응! 바… 바로 보셨어요!"
"사내 천 명은 잡아먹을 년!"
"……!"
더 이상의 말은 없었다. 입술과 입술이 포개졌으니, 말을 하고 싶어도 할 도리는 없다.
문가, 일녀이남(一女二男)이 장승처럼 서 있었다.
얼굴빛이 푸른 여인 하나, 그리고 신색이 누추해 보이는 두 명의 왜인.
이들은 방 안에서 벌어지는 정사에는 무신경한 듯했다.
너무도 많이 보아 왔기 때문일까?
아니면, 실혼인(失魂人)들이기 때문일까?
"너희들은… 다 죽는다!"
여인은 입에서 피를 토하고 있었다.
얼굴이 잿빛, 피부에는 고름 주머니가 덕지덕지 매달려 있었다.
여인은 들것에 들려 옮겨지고 있었다.
"죽는다. 모두… 그에게! 내가 기다리던 그에게……!"
여인의 얼굴 위로 햇살이 떨어졌다.
여인은 너무나도 오랫동안 해를 보지 못했다.
눈동자가 축소될 정도로 어둠에 익숙해진 여인, 그녀는 햇살이 떨어지자 눈을 질끈 감고 만다.
그러나 꽤나 오랫동안 눈을 부릅떠 왔기에, 눈을 감으려 해도 눈은 잘 감겨지지 않았다.
설향(雪香).
인문주(忍門主) 설향이 폐인이 되어 모처로 옮겨지는 것이다.
모든 것은 마화삼의 명에 따른 것이었다.
"이 계집은 어디로 보내진다던가?"
"글쎄, 아직 죽이지는 않은 것으로 보아 한 번의 이용 가치는 있다고 보이네만… 이 다 썩은 년이 무슨 가치가 있을지? 하여간, 가는 곳은 귀모애(鬼母崖)라네!"
"아, 마화삼께서 군막(軍幕)을 치신다는 장소 말인가?"
"그래, 거기서 이 계집이 한 번 쓰여진다더군!"
둘은 힘들이지 않고 들것을 날랐다.
설향은 너무나도 앙상히 말랐다. 인문 사람이 아니었다면 벌써 굶어 죽었을 것이다.
독녀(毒女), 마가 사람들은 그녀를 독녀라고 불렀다.
온갖 악형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독종 중의 독종.
그녀는 마가의 밥은 먹지 않았다. 뇌옥 바닥을 기어다니는 벌레는 잡아먹어도 마가의 밥은 먹지 않았다.
저벅- 저벅-!
"그가 온다! 그가!"
설향의 목소리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였다. 그리고 무사들의 걸음걸이는 보다 빨라졌다.
"인문제십좌는 어찌 되었다던가?"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죽었겠지?"
"큿큿… 그 놈이야말로 무서운 놈이었지. 정말로!"
"그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강한 자였네!"
"아니야! 최근에는 마화성주라는 초강자가 있지 않은가?"
"시시한 자일 걸세. 소문은 그럴 듯하나 별것 있겠나?"
저벅- 저벅-!
"훗훗… 곧 악마천하(惡魔天下)가 될 걸세!"
"우리는 지금보다 십 배 더 잘 살 것이네. 백도의 계집을 마음대로 후리고, 백도인들의 너른 장원을 측간으로 이용하게 될 걸세!"
"한데, 구신(舊臣)들은 어이해 저항일까?"
구신들이라? 대체 어떤 사람들을 말하는 것일까?
"글쎄?"
"오늘 밤까지 승복하지 않는다면 모두 참수(斬首)된다던데?"
"하긴, 살려둘 수야 없겠지."
"훗훗… 이 곳은 곧 봉해질 예정이라며?"
"다들 떠났으니, 봉해질 만도 하지. 그리고 머지않아 온 세상이 다 우리 것이 될 텐데, 무엇하러 이 좁은 곳에 눌러 살겠는가?"
거한들은 떠들며 걸어갔고, 설향의 몸이 흔들거린다.
이 곳은 형옥(刑獄)이 외성(外成)과 통하는 길이다.
설향은 비밀리에 외부로 옮겨지는 중이었다.
설향, 그녀는 햇살을 눈(雪)으로 보고 있었다.
천진(天津)을 휘감던 눈송이처럼…….
"이처럼 시린 눈은 처음이야!"
햇살은 그녀의 얼굴을 은비늘처럼 반짝이게 했다. 그녀는 일순, 환상에 잠기는 듯했다.
독기 말고는 갖고 있는 것이 없는 여인,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가운데 수년을 보낸 여인.
그녀는 지금 햇살 가운데 무엇인가를 보고 있다.
두 눈(雙眼).
철창에 둘러싸인 가마 하나가 지나가고 있고, 철창 사이에서 두 눈이 침착히 그녀를 보고 있었다.
형옥으로 들어가는 어귀, 꽤 먼 곳에서 잡혀 와 형옥에 막 갇히는 노인이 하나 있었다.
설향은 나가고, 그는 들어가고, 두 사람의 눈이 부딪치는 시간은 거의 일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은 왠지 영원(永遠)으로 통하는 것 같았다.
"그래, 저 눈이야!"
설향은 갑자기 생기를 찾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 눈, 그녀가 단 한 번도 잊지 못했던 어떤 남자의 눈이 그녀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야! 바로… 바로 백무엽(白武葉)이야! 그가 왔다."
그녀는 외치는데,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목이 쉴 대로 쉰데다가 기력이 빠져, 소리를 친다 해도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이다.
'낯익은 눈빛이었다. 누구일까? 다 썩은 몸을 가졌으나, 여인인데.'
마무정은 낙척유룡 행세를 하며 절대마가(絶代魔家)의 지하밀도(地下密道) 어귀로 잡혀 들어가고 있었다.
한순간 스쳐 지나간 들것 위의 여인, 그녀의 눈빛이 이상하게 낯익었다.
'늘 꿈에서 보던 그 눈이었다.'
마무정은 중얼거리다가 문득 제정신을 차렸다.
"열라!"
그를 호송해 가던 천룡마객의 호통이 벽력치듯 울려 퍼지는 가운데, 사방(四方)이 일순 뒤흔들렸다.
꽈르르르- 릉- 꽝-!
우레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철벽이 열리고 있었다.
벽이 갈라지며 굴이 나타났다.
썩은 냄새가 풍겨 나오는 굴, 바로 절대마가의 철혈뇌옥(鐵血牢獄)이 이 곳이었다.
벽이 갈라질 때 마무정은 철책에 갇힌 채 수레에 올라, 철혈뇌옥 안으로 이끌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빛이 차단된 거대한 지하동굴, 한 번 들어가면 살아 나올 수 없다는 지옥의 감옥.
그 곳을 웃으며 들어가는 사람은 마무정뿐이리라!
"결국… 왔다! 그 놈 곁으로!"
그는 웃음을 억지로 참아야 했다.
그르릉-!
기관 열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호령 소리가 들렸다.
"낙척유룡(落拓遊龍) 입옥(入獄)이오."
한순간, 천지개벽의 소리가 들리며 뇌옥 도처에서 반응이 시작된다.
첫번째 반응, 그것은 일단의 철갑(鐵甲)고수들이 쌍검을 어깨에 멘 채 서 있다가 일제히 발검(發劍)하는 것이었다.
차앙- 창-!
"입옥, 환영!"
"절대마가, 영세무적(永世無敵)!"
"우우… 우……!"
이천 자루의 장검이다. 결국, 통로 좌우에 서 있는 사람의 수는 일천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드넓은 철혈뇌옥의 형리(刑吏)들 중 십분지일(十分之一)에 불과했다.
두 번째 반응, 그것은 뇌옥치고는 화려한 대전 안에 머물러 있는 아홉 사람의 씁쓸한 반응이었다.
죄수치고는 화려한 옷을 걸친 구 인(人), 이들은 모두 독에 중독되어 있었다.
"낙척유룡, 그마저……."
"아아, 결국 우내십현(宇內十賢)이 모두 잡힌 셈이다."
"정법육우와 쌍벽을 이뤘던 우내십현이 모두 잡히다니……."
고개를 젓는 사람들, 이들은 은자(隱者)들의 우상이었던 사람들이다.
일컬어 우내십현. 이들은 속세의 명리에 초탈한 상고의 기인들이다.
태실은자(太室隱者) 철장법사(鐵杖法師).
배분상 철법신승을 능가하는 사람으로… 뿌리를 소림사(少林寺)에 두고 승적(僧籍)에 이름을 올렸으되, 그는 승려가 아니다.
그는 애초에 인간을 좋아하기보다 자연을 좋아했다. 그는 가장 거친 산세를 지닌 태실(太室)에 은거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아마 백 년 전 소림사 방장은 그였을 것이다.
"아미타불… 말세(末世)로다!"
그가 여기 있었다. 아마도 백 년 폐관이 깨어진 것이 분한 듯 그는 한숨만 거듭 쉬었다.
곤륜은자(崑崙隱者) 종대선생(鐘大先生).
기문포학(奇門布學) 화예술(花 術)의 제일인자.
그는 곤륜파의 속가 장문인을 역임하다가 곤륜산인(崑崙山人)들이 명리와 실리에 물듬을 한탄하며 설모봉(雪母峯)에 숨었다.
그는 거기서 단정학(丹頂鶴)과 백매화(白梅花)를 기르고 살았었다. 또한 그는 당세 곤륜장문인의 사백조(師伯祖)뻘이었다.
"과거, 낙척유룡과 바둑을 두곤 했었지."
그도 여기에 있었다.
천외사홍(天外四紅), 그들은 남북무림계(南北武林界)의 사은(四隱)이었다.
천산홍(天山紅) 만리비홍(萬里飛虹).
천산파(天山派)의 거성(巨星)이었던 사람.
칠금신법(七禽身法)을 가장 완벽히 시전할 수 있고, 인형설삼(人形雪蔘)이 무리를 이루며 자라고 있는 곳을 알고 있는 사람.
하지만 천산파를 지배하기보다 천산(天山)에 숨기를 택했던 사람이다.
그도 여기 있었다.
"쯧쯧, 이제는 아무 희망도 없구먼. 어쩌면 이제 흰 산(白山)이 되는 수밖에 없겠구먼!"
관산홍(關山虹).
북관제일인(北關第一人)이자 옥문관(玉門關) 일대의 초절정 고수로 육십 년 간 군림하다가 봉검(封劍)한 사람이다.
장천일자홍(長天一字虹).
그는 만 가지 검법을 익힌 후, 구천구백구십구 가지 검초를 버리고 오직 한 가지의 검초만을 남겼다.
일자홍(一字虹), 그것은 펼쳐질 경우 백 장 안이 초토화되는 검초였다.
독에 당하지만 않았더라도 그것을 시전해 봤을 것이다.
"오랜만이오, 노형!"
그는 웃고 있었다.
십만대홍(十萬大虹) 비홍제일객(飛虹第一客).
십만대산에 은거하여 묵죽(墨竹)을 기르며 늘 죽간(竹竿)을 호수에 드리우며 살던 노인이다.
그는 남화검파(南華劍派)의 태두였고, 남천제일검(南天第一劍)이었다.
그도 이 곳에 잡혀 온 지 벌써 닷새였다.
"오래 살다 보니, 결국 보게 되는구려. 훗훗……!"
그도 꽤나 쓴웃음을 흘렸다.
무유은(無遊隱) 천외비홍(天外飛虹).
늘 노새 한 마리를 타고 떠돌아다니던 백오십 세 노인.
그는 전진파(全眞派)의 제일고수로, 전진 최고절기라는 대마수(大麻手) 태극항마진결(太極降魔眞訣)을 완전히 익혔다.
그도 여기 잡혀 있었다.
"젠장, 노형마저?"
그는 고개를 젓고 만다.
천산노자(天山老子) 갈천풍(葛天風),
혈해신룡(血海神龍) 사마숭(司馬崇),
태극선옹(太極仙翁) 도복(桃卜).
그리고 통로를 따라 창노한 노인 하나가 부축을 받으며 나타난다.
가짜 낙척유룡 마무정.
하여간, 우내십현은 다 모인 셈이었다.
세 번째 반응, 그것은 묘한 야유였다.
"머저리 같은 백도 노괴들! 그래, 가짜에게 잡혀?"
"무공은 가져다 개(犬)에게나 줘라!"
"후후… 그리도 잡히지 않더니, 유정(有情) 애송이에게 잡히는군?"
"하여간, 유정 공자도 보통은 아닐세. 클클! 제 어미를 베고, 제 형을 죽이고, 제 집을 불사르고……."
"잠이나 자자!"
"후후… 하여간 이제는 구경도 못하게 될 것이다."
"오늘 우리 목이 떨어진다지?"
"크크… 이제는 지렁이나 지네 맛도 못 보게 되었네그려!"
자학적인 목소리들. 그 소리는 열반한 무사들 뒤쪽의 감옥 안에서 흘러 나왔다.
수백 개의 크고 작은 철실 뒤, 야수(野獸)인지 사람인지 모를 수천 명의 죄수들이 있었다.
몸이 반쯤 썩은 사람들, 배에서 구더기가 나오고 머리카락에서는 이가 튀는 죄수들.
비파골(琵琶骨)에 쇠줄이 박혀 멀리 걸어야 오 장을 걷고, 양 발목에는 백 근 무게의 쇳덩이를 달고 있어 거동이 불편스러운 상태이다.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정확히 칠천(七千)이었다. 이 곳에 갇힌 자들은.
죄수들은 하품을 하고, 욕을 하고, 멍한 표정을 하고 드러눕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눈빛만은 강(强)했다. 육체는 썩어도 이들의 혼(魂)은 죽지 않은 듯했다.
하여간 마무정은 대전 쪽으로 다가서게 되었다.
그가 대전 어귀에 이를 때, 그리고 마가의 형리들이 조금 긴장할 때였다.
우내구현의 표정이 일제히 달라졌다.
"이… 이상한데?"
제일 먼저 고개를 갸웃거리던 사람은 철장법사였다.
그는 돌연 허리를 쭈욱 폈다. 마치 면벽을 하다가 세존(世尊)을 만난 듯이.
"기(氣)가 다르다. 죽지 않았다. 살아 있다. 오오……!"
왜 그리도 놀라는 것일까?
"바로 금강(金剛)이라… 대유(大柔)라… 바로 소림혼(少林魂)이도다."
그는 감격해 부르짖었고, 곤륜 종대선생도 눈을 번쩍 떴다.
"아니야, 나와 바둑 두던 그가 아니야. 그의 손가락은 조금 특이한데, 저 사람은 너무도 아름다운 손을 지녔다."
"그… 그가 아니다."
"너… 너무도 강한 기운을 품고 있다."
"대… 대체 누구이기에……?"
우내구현은 들리지 않을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는데, 마무정은 그들의 놀라는 기척을 눈치채는 듯 일부러 상체를 휘청였다.
형리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그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어이쿠우!"
그가 나뒹굴자, 제일 먼저 천룡마객이 다가서서 그를 부축했다.
"조심하시오. 노야가 다치면… 내가 죽소!"
그는 재빨리 마무정을 일으키는데, 돌연 우내구현의 귀로 맑은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구현(九賢)은 모르는 체하시오!"
"나는 그냥 낙척유룡일 뿐이오!"
벽력처럼 뇌리를 때리는 옥음(玉音).
우내구현은 그 말을 듣고 다시 한 번 부르르 떨었다.
'소림절기 혜광심어공(慧光心語功)이다. 저 사람은 소림제자다. 아아, 역시 소림은 살아 있었던 것이다.'
가장 감격해하는 사람은 철장법사였다.
'무서운 사람이다. 임기응변도 빠르고, 화신술도 천하제일이다.'
'목소리로 보아 의혼(義魂)을 갖고 있다. 도와 주어야 한다.'
'하늘은… 백도를 버리지 않았다.'
'나는… 영웅(英雄)을 보고 있는 것이다.'
우내구현은 눈을 꾹 눌러 감았다. 눈을 뜨고 있다가는 감흥이 격해 무슨 말을 하게 될지 모른다.
다시 침묵(沈默), 일대는 다시 침묵하게 되었다.
마무정은 부축을 받고 정해진 자리에 앉게 되었다.
'고맙소, 아홉 노인.'
마무정은 우내구현이 입을 다물어 준데 감격해했다.
사람들에게 말을 전한 사람은 바로 그였다.
'백도에는 장점이 많소. 그것이 부럽소. 남을 위해 산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백도가 마도를 이기는 진짜 이유일 것이오. 그것이 부럽소.'
마무정은 조용히 고갯짓을 했다.
염화시중(拈花示衆)의 미소랄까?
우내구현 역시, 그의 심중을 알아차리고 미소를 따라 지었다.
'영웅! 우리는 그대의 편이오!'
'우리 걱정은 마오!'
'그대의 용기를 찬양하오!'
사람들의 눈은 그런 말을 전하고 있었다.
하여간, 깊은 침묵의 순간이 시작되었다.
'너무 많다. 그러나… 나는 실수하지 않으리라.'
마무정은 수많은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형리들이 어떤 곳에 서 있고, 어떠한 수비 형태를 취하고 있는가를 특히 유심히 살펴봤다.
'일만(一萬)! 그러나… 허점도 있다. 그것을 찾아야 한다.'
마무정은 찰나의 순간마다 수백 가지를 생각했다.
"제기랄, 저 구린 늙은이의 눈빛이 남다른데?"
누구의 말일까?
"그러게나 말일세!"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듯하지 않는가?"
"사형당하기 전, 춤사위라도 보게 될 듯한데?"
"큿큿… 팔 년 만에 뭔가 재미나는 일을 보게 되는 것인가?"
거인 목소리들, 그 소리는 쭉 늘어선 무사들의 뒤쪽에서 들려 왔다.
'저… 저 소리는?'
마무정은 일순, 가슴이 터지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불기름이 가슴을 활활 태운다고나 할까?
'이럴 수가? 저들이… 저들이 살아 있단 말인가?'
마무정은 무사들의 다리 사이로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짐승 같은 몰골이 된 사람들,
구더기가 살을 파먹고 있고 쇳덩어리가 몸을 결박하고 있는 칠천여 명의 죄수들,
팔 년 동안 이 곳에 갇혀 해를 못 본 탓에 얼굴이 눈처럼 희어진 산발괴인들,
죽음보다 더한 역경에서도 농담을 하고 웃는 사람들…….
그들 중 몇 사람의 얼굴이 너무나도 낯익었다.
"술 한 잔, 두 잔, 세 잔… 으음, 취하는데?"
허공에 손짓을 하는 노인, 그는 자신에게 최면을 걸고 있었다.
그는 제 손 안에 죽엽청(竹葉淸)이 가득 든 술잔이 있다고 여기며 계속 술을 들이키고 있는 것이다.
'혈우사(血雨邪)! 혈살검대장(血煞劍隊長)이다.'
마무정의 눈길이 부르르 떨렸다.
"저 놈 보게! 왜 나를 쏘아본단 말인가?"
머리를 긁는 노인, 그는 애꾸였고 매부리코였다.
얼굴 가득 칼자국이 그득한 자로, 몸에 쇠사슬이 칭칭 휘감겼는데에도 기세가 전혀 죽지 않았다.
'파풍위사(破風衛士) 철랑(鐵狼)이다. 무쇠 이리처럼 억세던 자. 나의 거처 뒤쪽을 지키던 사람이다.'
마무정은 주먹을 꽈악 쥐고 있었다.
"낙척유룡, 저 자의 눈빛이 이상한데? 그… 그분의 눈빛 같지 않은가?"
마무정과 눈을 부딪치며 몸을 으스스 떠는 청년이 있었다.
귀향(鬼香), 그는 마무정의 서재에서 식량을 전해 주던 소년이었다.
아아, 이럴 수가……?
죽지 못해 살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절대마가(絶代魔家)의 가신(家臣)들이 아닌가?
그들은 바로 진짜 마가 사람들이었다.
'죽었다고 여겼는데……!'
마무정의 눈가가 붉어졌다.
'유정(有情), 너도 최후까지 포악한 놈은 못 되는구나. 절대마가의 가신들을 아직 살려 두다니… 이 못난 녀석!'
마무정의 손이 땀에 축축이 젖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