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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이어서 오늘도 오래 참음에 대한 말씀으로 잠깐 교제를 하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처음이신 분 네 마이크 좀 갖다 주실래요? 자리에 일어나셔서 내가 내가 가장 잘 못 참는 거 저 형제는 괜찮아요 교회 오래 다니신 분이라서 우리 교회만 오래 안 다닐 분이지 교회가 낯선 환경이 아니라서 괜찮습니다. 내가 가장 잘 못 참는 것 뭐예요? 먹는 거요? 절제가 안 된다는 거죠. 살이 별로 안 쪘네요. 저는 많이 안 먹는데 살이 이렇게 많이 쪘는데 감사합니다. 자리에 앉으십시오.
오늘 권사의 찬양 은혜 받으셨죠? 은혜 받았다 손 한번 들어보실래요? 이창문 집사님이 가장 먼저 드셔가지고 마이크 갖다 주십시오. 내가 가장 못 참는 거 가장 못 참는 거 최미영 권사님은 잘 아실 텐데 거짓말하시면 안 돼요. 내가 물어볼 거예요. 가장 못 참는 거 가장 못 참는 거 저는 거짓말하는 걸 가장 못 참습니다. 그러면 집사님은 거짓말 안 하세요? 안 합니다. 아내한테 물은 건데 아내가 안 한답니다. 감사합니다.
한 분만 더 물을게요. 보통 이 정도 되면 내가 꼭 답을 해야 되겠다 이런 분이 꼭 한 분 있더라고요. 한 분 누가 내가 나는 이걸 자작 못 찾는다 그러면 제가 지목하겠습니다. 우리 지명순 형제 마이크 갖다 주십시오. 내가 가장 못 참는 거 저는 자는 걸 못 찾습니다. 설교 시간도 자겠다는 의미예요. 그렇죠
저는 뭐를 가장 못 참을 것 같아요 우리 정혜자 권사님. 그리고 저를 가장 많이 보시는 제가 그냥 못 참는 거 지저분한 거 제가 잘 못 참아요. 그렇다고 제가 잘 씻는 건 아닌데 지저분한 거 잘 못 참습니다.
제가 왜 설교 시간에 물었냐 두 가지예요. 하나는 원래 우리가 신약 성경에 나오는 각론이라는 의미의 헬라어는 설교하다 개념보다는 토론하다의 개념이에요. 그러니까 설교를 토론식으로 하는 거죠.
이런 식으로 그래서 제가 한번 해봤고 두 번째로는 요즘 서울에서 설교를 할 때 이런 패턴으로 하는 분들이 좀 있어요. 젊은 분들 중에 여러분들은 접촉하기 어려운 좀 젊은 그룹의 목사님들은 저랑 비슷한 생각을 해서 그렇게 하는지 잘은 모르지만 이렇게 각론식으로 설교를 합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해봤습니다.
지난주에 제가 오래 참음에 대한 말씀을 드리면서 이 갈라디아서 5장의 오래 참음은 관계적인 것에 오래 참음이다라고 말씀을 드렸어요. 사람의 관계가 깨어지는 주된 이유가 우리가 참지 못해서인 거예요. 부부가 못 참아서 깨워지는 거고 형제 간에 못 참아서 의가 상하는 거고 성도들도 못 참아서 서로가 다투거나 분쟁이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참지 못해서 말을 하거나 참지 못해서 표현을 하거나 그래서 관계가 깨어지는 겁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참지 못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는 말을 하는 경우가 있어요.
사람도 하면 깨어지는 관계가 깨는 말이 있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도 하면 하나님과 우리의 사이를 깨는 말들이 있어요. 관계를 깨는 말 그러니까 이런 말들을 해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깨어진다는 거죠. 물론 우리의 구원이 훼손되거나 그런 의미는 절대 아니에요. 그렇지만 관계가 소원해지기는 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 유지되려면 우리가 해야 되는 것이 오래 참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에 대해서도 오래 참아야 하고 하나님에 대해서도 오래 참아야 된다. 그러니까 좋은 관계는 참음의 결과인 것이지 실은 사람이 좋아서 만들어지는 건 아니예요. 우리끼리 모이면 잘될 것 같잖아요. 예전에 서울에 이제 큰 교회 목사님들은 자기끼리 잘 놀아요. 우리는 한강 보트도 타기 어려워요. 왜냐하면 그것도 비싸니까 이분들은 이제 돈이 많으니까 막 크루즈 여행을 하고 지금은 이제 크루즈 여행이 일반인도 많이 하지만 제가 서울에 있을 때 15년 전이었죠. 그전에는 일반인들이 크루즈 여행을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에요. 지중해까지 가는 건 돈도 많이 들어요. 목사님들이 그렇게 긴 시간 동안 이렇게 크루즈 여행을 다니시더라고요. 자기 마음 맞는 사람끼리.
근데 이분이 와서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마음 맞는 사람끼리 여행을 하니까 너무 좋다고 이런 거죠. 마음 안 맞는 사람들끼리 어울리면 짜증이 난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게 맞는 말일까요? 근데 이분이 얼마 후 큰 사고를 치고 목회를 은퇴하셨어요. 은퇴한 건 아니지만 지금도 욕 먹고 목회를 하셔요. 엄청나게 욕을 드시면서 그러니까 관계가 좋다고 해서 사람이 좋다고 해서 관계가 잘 유지되는 건 아니에요. 참아야 하는 거예요. 참아야 관계가 잘 유지가 된다.
하나님은 인내가 없는 입술의 기도를 받지 않으십니다. 말로 가볍게 하나님을 욕하는 그런 사람들의 기도는 안 받아요. 따라 해볼까요?
인내가 없는 입술의 기도를 받지 않으십니다.
시작 이것도 기시죠 그죠? 우리 가방끈이 다 짧아가지고 한 번 더 따라하겠습니다.
인내가 없는 입술의 기도를 하나님은 받지 않으십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응답을 그르치는 것도 참지 못해서이고 일을 그르치는 것도 참지 못했어요. 참아야 잘 열매가 맺어집니다. 우리가 관계도 잘 참아야 되지만 어떤 상황에 대해서도 잘 참아야 돼요. 가난한 삶이 길게 이어지는 순간이 있어요. 인생에 살다 보면 왜 내가 이렇게 가난해질지 모를 정도로 힘든 순간이 와요. 그런 상황에 대해서도 우리가 잘 참아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상황을 참지 못해서 그 상황이 지나면 하나님 주신 열매가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열매를 누리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갈등의 상황, 어려운 상황, 가난 힘든 시간을 참지 못해서 기회가 사라지고 때로 어떤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미래도 사라집니다.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서 오래 참으시는 것.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에 대해서 오래 참으시는 것은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기 위함인 거예요. 그래서 우리도 상대방에 대해서 오래 참게 되면 그 사람에게 그 사람이 기회를 갖게 돼요.
성도에 대해서 오래 참으면 그 성도가 회복할 기회를 교회가 주는 것이 되는 거고, 우리가 가족에 대해서 오래 참은 것도 가족이 회복할 기회를 주는 의미가 되는 거예요. 참는 것은 그것은 기회를 주는 거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잘 참는다면 여러분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여러분에게 기회를 많이 얻어요.
근데 여러분이 못 참는 사람이라면 여러분의 주변의 사람들은 여러분에게 기회를 못 얻어요. 왜냐하면 기회 얻기 전에 우리가 비난하고 욕하고 그 사람을 정제하고 그 사람을 다 끌어내릴 것이 뻔하기 때문인 거예요.
참는 것은 기회를 주는 것이다. 한번 따라하겠습니다.
참는 것은 기회를 주는 것이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우리에게 참으사 우리를 기회에 주신 것처럼 우리도 성도들에 대해서 참으면서 서로의 기회를 줘야 됩니다. 교회 안에 기회가 사라지는 것. 지금은 세상이 기회가 자꾸 사라지죠. 좋은 대학을 나오고 돈의 여유가 있고 또 이런 몇몇의 상위 한 10%의 사람들에게는 기회가 더 주어질지 모르지만 이제 하위 한 20~30%, 40%의 사람들에게는 점점 더 기회가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요. 그것을 막 사회학적으로 여러 개 분석할 수 있지만 목사인 제 입장에서는 사회가 참지 못하는 거예요. 가난한 사람들 또 배우지 못한 사람들, 지식이 부족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마음이 아픈 사람들에 대해서 못 참는 거예요. 그게 참지 않아서 기회를 못 주게 되고 그분들은 기회를 얻지 못하게 되니까 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도 오래 참아야 기회가 만들어지고요. 가정도 오래 참아야 기회가 만들어지고 직장도 오래 참아야 기회가 만들어집니다. 참지 못하면 기회는 사라지게 됩니다. 또 더 나아가서 참아야 열매가 맺어집니다. 모든 결실은 긴 인고의 시간을 지나고서야 맺어진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목회도 참지 않아서 열매가 없는 거예요. 인생도 못 참아서 열매가 없는 것이고 가정도 못 참아서 열매가 없는 거예요.
여러분 가장 안타까울 때가 다 익은 열매가 익어가는 열매가 떨어질 때예요. 그러니까 사과가 이글쯤 되면 태풍이 불어요. 이 열매들이 나무에 잘 달라붙어 있어야 돼요. 인내하고 참으면서 이게 못 달라붙어 있으면 떨어지잖아요. 그러면 결국 열매가 맺을 수 없게 되는 거예요. 이처럼 대부분의 내 인생이 왜 열매가 없을까 못 참아서 그래요. 제가 잘 참는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평상시에 성격 보면 되게 못 참는 것 같기도 하고요.
여러분 그래서 제가 혹시 저를 길거리에서나 차량 운전하다가 만날 때 저를 이렇게 보시면 저분은 우리 교회 목사님이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시고 저를 보시면 돼요. 일단 인상이 별로 안 좋아요. 여러분 없는 자리에 제가 차를 몰 때 인상이 안 좋아요. 두 번째 성질을 잘 내요. 제가 생각보다 성질을 잘 내요. 이게 성질이 좀 장착이 돼 있어요. 여러분은 저의 성도니까 제가 성질을 안 낼 뿐이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제가 성질을 잘 내요.
근데 이런 제가 잘 참을 수 있을까요? 근데 이게 참 이게 원래 이렇게 상황이 전환되면서 여기랑 여기랑 모습이 같아야 되는데 목사가 그렇게 잘 안 돼 그만큼 제가 거룩하거나 의인은 아니더라고요. 살아보니까요.
그런데 확실히 세상의 열매보다 교회의 열매는 조금 더 많은 것 같아요. 왜 그러냐 이렇게 돌아봤더니 제가 잘 참는 거예요. 잘은 모르지만 어떤 참아요? 근데 제가 세상에 대해서는 잘 안 참은 것 같아요. 그래서 원래 목사가 교인과도 관계가 좋아야 되지만 세상 사람과의 관계가 되게 좋아야 되잖아요. 주변분들하고는 관계가 좋지만 저는 잘 모르는 분들에 대해서는 잘 못 찾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는 것 같습니다. 만약에 제가 끝까지 잘했다면 정말 좋은 목회자일 거고 그분들을 통해서도 많은 열매가 제가 맺어지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을 가끔 합니다.
전사의 화면이 커가지고 이게 무슨 화면인지 잘 모르겠어요. 그쵸? 저보고 잘하는 라면인지 면을 지금 아멘 하신 거 아니죠? 그 아멘도 잘하셔야지 그렇다면 우리가 못 참는 이유가 뭘까요? 왜 못 참을까요? 사랑이 부족해서입니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참는 건 사랑이 장착돼서 그래요. 그렇죠. 사랑이 부족해서 못 참는 거예요.
교회를 사랑하면 참아요. 성도를 사랑하면 참고, 목회자를 사랑하면 참고 세상을 사랑하면 참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한다고 하셨는데 우리도 세상에 대해서도 잘 참아야 돼요. 세상의 무례함 제가 이런 말할 자격은 별로 없지만 우리가 좀 더 신앙이 성숙해지고 완성되어져 가려면 세상에 대해서도 잘 참아야 됩니다.
교회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교회에 대해서 참지 못해요. 요즘은 교회에 대해서 못 참잖아요. 잘 그쵸? 우리 목사님 왜 그래요? 우리 왜 그래요? 막 이런 말 하잖아요. 잘 못 참아요. 그 이유가 성도들이 똑똑해지거나 아니면 뭔가 막 교회 비리가 많아서 못 찾는 게 아니라 그 근원에 들어가 보면 사랑이 식은 거죠.
가족 대해서도 이거 안 참잖아요. 왜 사랑이 식어서 그래요? 교회에 대해서도 못 참는 건 사랑이 식어서 그런 겁니다. 고린도전서 13장 4절에 보면 사랑은 오래 참고라고 돼 있습니다. 아가페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십자가의 사랑이 있으면 오래 참는다는 거예요.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이 내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덧입고 그 사랑을 내가 장착하고 있으면 나는 교회에 대해서 오래 참을 수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인간을 입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래 참으신 것처럼 우리도 오래 참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가 좀 잘 참는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할렐루야 그러면 기회도 주어지고 열매도 만들어져요. 우리가 잘 참아야 청년들에게 기회가 돌아가잖아요. 저 요즘 청년들을 보면 마음이 되게 혼란스럽고 좀 고민스러워요. 우리가 어떤 기회를 청년들에게 안 줬을까 이런 생각도 해보고 참 그렇습니다.
오늘 설교 조금 길어지는데 우리가 50 목장이 있어요. 원래는 3명 정도 시작했는데 지금은 이제 가끔 오시는 분까지 아직 등록하지 않은 분까지 하면 14명 15명 정도예요. 남 잘 됐다고 여러분들은 별로 기쁘지도 않으신가요? 그렇죠 저는 되게 기뻐요. 근데 실은 저희가 뭐 아무것도 안 하거든요. 모여서 열심히 떠들고 노는 게 전부예요. 전 커피만 타드리고 우리 집사님들이 몇 분 계셔서 잘하시긴 하지만 안에서 근데 우리 청년들도 이렇게 교회 안에서 떠들고 놀고 이렇게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청년부를 지나갈 때마다 또 오후 예배 청년부를 참석하는 형제들을 볼 때마다 그 마음이 계속 들어요.
우리가 만약에 청년들에 대해서 못 참은 게 있다면 앞으로는 잘 참아야 청년들이 우리 교회에 정착하고 이 싱글들이 우리 교회에 정착할 수 있다는 건 어떻든 앞으로 많은 싱글들이 우리 교회에 올 수 있다는 의미잖아요. 얼마나 좋은 상징이에요. 청년들이 우리 교회에 정착했다는 건 앞으로 우리 교회 청년들이 어마어마하게 올 수 있다는 의미예요.
근데 이 사인을 우리 교회가 좀 가줬으면 좋겠어요. 여러분들이 이후에 주일 학교에서 늘 기도하시지만 특별히 청년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셔서 다시 한 번 우리 교회 청년부에 우리가 잘 참으면 분명히 이 아이들이 기회를 갖게 될 것이고 또 좋은 열매를 맺게 될 거라고 믿습니다.
우리 교회가 주님이 우리를 위해 참으신 것처럼 잘 참는 교회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