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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2장 초나라도 굴복시키고 (5)
그 무렵, 제환공과 관중은 대군을 이끌고 채(蔡)나라 국경을 돌파했다.
이미 채목공(蔡穆公)으로부터 뇌물을 받아먹은 수초는 채나라 도성으로 진격하지 않고 그 근처에 머물러 있다가 제환공을 맞이해서는 자기가 채군을 무찔렀다고 자랑을 했다.
"네 공이 크도다."
아무것도 모르는 제환공(齊桓公)은 수초를 치하한 후 다른 나라 군대가 당도하기를 기다렸다.
다음날부터 송환공, 노희공, 진선공, 위문공, 정문공, 조소공, 허목공 등 7개 나라 제후들은 각기 군사와 병차를 거느리고 속속 채(蔡)나라 국경으로 모여들었다. 여기에 맹주인 제환공(齊桓公)까지 합치면 8개 나라 임금이 모두 한 자리에 모인 셈이었다. 8개국 연합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았다.
더욱이 허목공은 병중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먼저 채(蔡)나라로 달려왔다. 제환공은 그 의리에 감동하여 허목공을 조소공보다 윗자리에 앉게 했다.
그러나 너무 무리했음인가.
허목공(許穆公)은 도착한 지 며칠이 안 되어 병이 도져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제환공(齊桓公)은 허목공의 죽음을 애도하는 의미에서 3일간 채(蔡)나라 접경 지역에 머문 후 곧바로 서남쪽 초나라 국경을 바라보고 대군을 출발시켰다.
춘추시대 개막 이후 가장 큰 규모의 군대였다.
그 해 여름, 허(許)나라를 제외한 7개국 연합군은 초나라 국경을 통과하여 형산에 이르렀다. 형산은 초나라 땅으로 지금의 하남성 언성현 일대이다.
초나라 최북단으로 회수(淮水)의 3대 지류 중 하나인 여수(汝水) 상류에 위치해 있다. 또한 이 곳은 채나라 도성보다 북쪽이니, 당시 초나라 영토가 얼마나 광대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제환공(齊桓公)이 막 형산 기슭을 지나가고 있을 때였다.
형산 남쪽 저편에 의관을 바르게 갖추어 입은 한 사람이 수레를 길 한 편에 세우고 서 있었다. 그 사람은 제환공을 보자 귀한 손님을 맞이하기라도 하듯 공손히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
"대군을 거느리고 오시는 분은 바로 제환공(齊桓公) 아니십니까? 우리 초(楚)나라 왕께서는 제환공께서 오실 줄 미리 알고 신으로 하여금 여기에 나와 기다리게 한 지 오래입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투곡어토의 비밀지령을 받고 밤새 달려온 초나라 공족 대부 굴완(屈完)이었다.
그가 투곡어토로부터 부여받은 임무는 두 가지. 하나는 언변으로써 제환공(齊桓公)의 초나라 침공이 명분 없음을 밝히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만약에 대비하여 제나라 등 7개국 연합군의 행군을 최대한 늦춤으로써 초군(楚 軍)이 완벽한 방어태세를 갖출 수 있도록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다.
반면 제환공은 굴완(屈完)의 출현에 안색이 돌변할 정도로 놀랐다. 중원 7개국 연합군의 초나라 침공 계획은 일급 군사기밀에 속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초(楚)나라로서는 무방비 상태라야 했다.
그런데 이게 무엇인가.
제환공(齊桓公)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었기라도 한 듯 초(楚)나라 안으로 발을 들여놓자마자 특사가 나타나 조롱하고 있질 않은가.
제환공은 샛노래진 얼굴로 관중(管仲)을 돌아보며 귓속말로 물었다.
"초나라는 우리 군대가 올 줄 어찌 알았을까?"
관중이 분개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우리 내부 사람 중 누군가가 기밀을 누설한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일이 이미 이 지경이 되었으니 그자를 알아낸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굴완(屈完)을 어찌 대하는 것이 좋겠소?"
"초나라가 굴완을 특사로 보낸 것은 틀림없이 주공을 설득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굴완(屈完)은 반드시 우리가 초나라를 침공한 까닭을 물을 것입니다. 그러니 주공께서는 여기에 가만히 계십시오. 신이 대의명분으로써 굴완을 꾸짖어 부끄러움을 알게 한 후 돌려보내겠습니다."
그러고는 제환공(齊桓公) 대신 수레를 몰아 앞으로 나갔다.
이윽고 관중과 굴완이 서로 수레 위에 앉아 토론을 벌였다. 굴완(屈完)이 먼저 입을 열어 선공(先攻)을 가했다.
"우리 나라 왕께서는 귀국을 비롯한 중원 7개국 연합군이 여수(汝水)를 넘으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먼저 이 굴완을 보내셨습니다. 제나라와 초나라는 본시 북남(北南)으로 갈라져 있어 풍마우불상급(風馬牛不相及)입니다. 그런데 제환공께서는 무슨 이유로 우리 땅에 발을 들여놓으셨는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풍마우불상급(風馬牛不相及) - 여기서 풍(風)은 암내를 낸다는 뜻.
그러므로 '풍마우불상급'이라는 말은 '마소의 암컷과 수컷이 발정하여 서로를 찾으려 하나 도저히 만날 수 없으리만큼 멀리 떨어져 있다'라는 뜻이다. 이것이 점차 변하여 대개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 제와 초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 아무런 은혜와 원한도 맺은 바 없는데, 제나라는 어찌하여 대군을 몰고 남쪽 초나라 땅까지 쳐들어왔는가?
굴완(屈完)은 제나라 명재상 관중(管仲)을 맞이하여 이같이 당당하게 따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그런 말이 나올 것을 예상한 관중(管仲)은 기다렸다는 듯이 호기롭게 말했다.
"옛날 주무왕께서 우리나라의 선조 태공망(太公望)에게 제나라를 내려주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제나라여. 대대로 국방을 맡아 주왕실을 도우라. 동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기까지, 서쪽으로는 하수(河水)에 이르기까지, 남쪽으로는 목릉(穆陵)에 이르기까지, 북쪽으로는 무체에 이르기까지 왕의 신하로서 직분을 다하되, 만일 그렇지 못한 자가 있으면 모든 제후와 힘을 합해 그자를 용서하지 말라'하셨습니다. 그런데 주왕실이 도성을 동쪽으로 옮긴 후 모든 제후들이 방자해졌습니다."
관중(管仲)은 연이어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서 우리 주공께선 왕명을 받들어 맹주가 되어 옛 왕업을 다시 일으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네 초(楚)나라는 남방에 있으면서 마땅히 공물인 포모(제사 때 쓰이는 풀)를 바쳐 왕의 제사를 도와야 하거늘, 초무왕 이래 지금까지 일체의 공물을 바치지 않고 있습니다. 이에 우리 주공께서는 이 까닭을 알아보기 위하여 지금 7개국 연합군을 거느리고 초나라로 가는 중입니다."
본래 초나라는 주왕실로부터 자작(子爵)의 작위를 받은 제후국이다.
당시 각 제후국은 주왕실에 자기네 나라 특산물을 공물로 바쳐야 하는 의무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초나라는 초무왕 대에 이르러 왕호를 참칭하면서 진공(進貢)의 의무를 거부했다.
- 너희 초(楚)나라는 어찌하여 공물을 바치지 않는가. 그래서 우리가 주천자를 대신하여 초나라를 문책하기 위해 내려온 것이다. 사정이 이런데도 '풍마우불상급(風馬牛不相及)'이라고 할 것인가.
절묘한 역공이었다. 어찌 관중(管仲)의 입에서 공물 얘기가 나올 것을 짐작이나 했으랴.
🎓 다음에 계속........
출처 - 평설열국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