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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청나라 황제 강희제의 명으로 1696년 만들어진 <어제경직도(御製耕織圖)〉중 뽕잎을 따는 모습을 담은 그림. 강희제는 이 작품의 서문과 시를 손수 지었다. |
모든 나무는 세상을 바꾼 존재이다. 인간은 나무 없이는 한 순간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산업혁명 이전까지 나무는 인간의 삶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다. 나무가 인간의 삶에 미친 영향력은 물질적인 혜택과 비례했다. 인간에게 물질적으로 큰 혜택을 준 나무는 국가마다 다르지만, 한 국가를 벗어나 세계적으로 인간에게 큰 혜택을 준 나무도 적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나무는 뽕나뭇과의 갈잎 큰 키 뽕나무이다.
뽕나무는 세계 전역에서 살고 있지만, 아시아의 뽕나무 중 중국의 뽕나무는 세계인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중국의 뽕나무가 세계인의 삶에 미친 영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실크(Silk)이다. 중국의 실크는 은나라 갑골문에 등장하는 뽕나무 상(桑)의 잎에서 생산한 것이다. ‘상’은 중국인들이 야생 뽕나무를 개량한 나무이다.
중국산 실크는 이른바 ‘실크로드’를 통해 유럽으로 건너갔으며 유럽, 특히 당시 세계제국이었던 로마의 귀족들 의복패션을 바꿔놓았다. 로마의 귀족들은 점차 중국산 실크 마니아가 되었다. 유럽인들은 중국을 실크의 나라로 인식했다. 중국을 의미하는 ‘차이나(China)’가 바로 비단과 관련 있는 단어이다.
중국의 뽕나무는 전국시대 맹자가 왕도정치의 물적 토대로 삼을 만큼 중국인의 삶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고, 유목민족이 세운 북위(北魏, 386~534)의 균전제 실시로 국가정책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 북위부터 당나라까지 실시한 균전제에서는 국가에서 강제로 일정한 규모의 땅에 뽕나무를 심도록 했다.
이 시기의 비단은 단순히 의복의 원료가 아니라 화폐였기 때문이다. 중국산 비단은 우수한 뽕나무의 개량으로 생산량이 늘어나 중국인은 물론 세계인의 의복 패션을 바꿔놓았다.
중국에서 새롭게 개량한 뽕나무는 절강성 호주부의 뽕나무, 즉 ‘호상(湖桑)’이었다. 명대부터 본격 재배한 호상은 뽕잎을 많이 생산하기 위해 뽕나무의 열매인 오디를 없앤 품종이었다. 호상의 등장으로 중국 강남은 벼농사 땅에도 뽕나무를 심는 농가가 많아졌다. 강남의 농가 중에는 호상 재배로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 늘어났다. 호상의 재배로 비단 생산량도 늘어나 강남에서는 비단을 전문으로 생산하는 공장이 등장했다. 강남에서 생산한 중국의 우수한 비단은 이전보다 한층 많이 외국으로 수출되었다.
서양의 배들은 중국산 비단을 구입하기 위해 광동성 광주 황포항에 앞다투어 들어왔다. 네덜란드는 1653~1657년에 중국의 생사(生絲)를 구입하기 위해 광주에 사절단을 보낼 정도였다.
잠실은 ‘누에 치던 곳’
조선시대의 잠상 정책을 알려주는 흔적은 잠실, 잠원동, 창덕궁의 뽕나무(천연기념물 제 471호)를 비롯해서 전국에 많이 남아 있다. 그 중 잠실은 누에를 치는 장소를 뜻한다. 세종 때에는 경복궁과 창덕궁에 내잠실, 낙천정에 외잠실이 있었다. 원단동(圓壇洞·현 잠원동)의 잠실은 성종 때 만든 것이다.
관직을 가진 사람 중에서 부지런하고 조심성 있는 사람 1명을 택하여 양잠관으로 삼고 수령이 그 업적을 평가했다. 중국 한나라의 사마천은 잠실에 갇혀 세계 최초의 역사 개론서인 《사기(史記)》를 집필했다. 그래서 사기를 ‘잠사(蠶史)’라고 부른다.
뽕도 따고 임도 보고
두 가지 일을 동시에 달성할 때 사용하는 속담 중 하나가 ‘뽕도 따고 임도 보고’이다. 이러한 의미는 중국의 고전 중 《시경(詩經)》에 처음 등장한다.
유교사회에서는 여자가 밖에 나갈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었다. 다만 누에를 치는 일은 여자의 몫이었기 때문에 뽕잎을 따는 시기는 여자가 밖에 나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여자들이 뽕잎을 따러 가는 날, 남자들은 미리 뽕밭으로 가서 여자를 기다렸다. 무성한 뽕잎은 남의 시선을 피할 수 있는 안성맞춤의 데이트 장소였다. 그래서 봄철 뽕잎이 무성한 밭은 전통시대 청춘 남녀가 밀회를 즐기는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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