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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444. [역경의 열매] 손인웅 <1-25> 유교 전통 엄격했던 고향서 싹튼 신앙
‘땡그렁…’ 종소리 이끌려 교회로… 어린 나이에 복음의 맛 깨달아
손인웅 목사가 지난 19일 서울 성북구 덕수노인복지센터 앞에서 손을 흔들며 환하게 웃고 있다. 이 노인복지센터는 손 목사가 덕수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던 2007년 설립했다.
일생 목사로 살았다. 교인들을 목양하는 틈틈이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일’을 위해 힘썼다. 갈라진 교회를 하나로 묶기 위해 눈물의 기도를 했고 소외된 이웃을 돌보기 위해 구슬땀을 흘렸다. 2012년 전도사 때부터 42년 동안 섬기던 서울 덕수교회를 은퇴했지만 여전히 난 현역이다. 최근엔 한국자원봉사협의회 상임대표가 됐다. 우리나라의 자원봉사자들을 늘리고 수준을 높이는 걸 고민하는 자리다. 일할 수 있음에 늘 감사한다.
돌아보면 순식간에 지나간 인생이다. 나의 살던 고향은 경북 군위군 효령면 내리동이다. 매봉산 자락 중 하나인 안산을 병풍 삼아 100가정이 모여 살던 그림 같은 시골마을이었다. 농사 짓는 주민들이 서로를 의지해 사는 화목한 향리였다. 당시 군위엔 사과 과수원이 많았다. 지금이야 기후변화로 사과 산지가 북쪽으로 이동했지만 내가 어릴 때 우리 마을은 말 그대로 ‘동구 밖 과수원 길’이 펼쳐져 있었다. 내리동은 임진왜란 때 경주에서 이곳으로 피난 온 ‘경주 손씨’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어서 유교 전통이 강했다. 우리 부모님도 마찬가지셨다. 아버지는 문중의 어른이셨다. 인자하셨지만 엄격하셨다. 나는 9남매 중 여섯째였다. 집안의 제사를 직접 드려야 할 위치는 아니었어도 늘 제사를 드리는 문화 속에 살았다.
인생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붙잡히게 된 건 우연한 일 때문이었다. “땡그렁, 땡그렁…” 어느 날 갑자기 종소리가 들렸다. 1948년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형님, 종소리 어디서 나는지 아십니꺼?” “모린다.” 무뚝뚝한 경상도 사나이들의 대화치고는 길었다. 직접 찾아나서는 수밖에. 언제 다시 울리나 기다렸는데 그날은 울리지 않았다. 이튿날 새벽을 노렸다. 아직 어둠이 남아있던 시간, 종이 울렸다. 안산이었다. ‘그래 그 언덕 위에 교회가 있는데 거기 같다. 가보자.’ 후다닥 뛰어나와 어둠에 잠긴 마을을 달리기 시작했다. 누가 가라고 시킨 것도 아니었다. 그냥 왠지 가고 싶었던 게 전부였다. 도착해보니 ‘내리교회’라는 간판이 붙어있었다. 어디서 용기가 났는지 교회 문을 열고 들어갔다.
강대상에서 기도회를 준비하던 분이 날 쳐다봤다. “어서 오니라. 내리동 사는가보구나.” 나중에 그분이 전도사님이란 걸 알았다. 한쪽 다리가 불편하셨지만 늘 부지런하셨다. 가난한 시골교회를 섬기다보니 스스로 생계도 꾸려야 하셨다. 염소를 길러 장에 파셨던 기억이 아련히 난다. 종소리가 나를 교회로 불렀지만 신앙 안에 날 살게 하신 분은 전도사님이셨다. 아이들을 앉혀 놓고 성경 이야기를 너무 실감나게 해 주셨다. 턱을 괴고 성경 이야기에 빠져들던 기억이 사무치게 그립다. 찬송가도 가르쳐 주셨다. 초등학교 말고는 무얼 배울 곳이 없던 시골에서 난 새 세상을 맛봤다. 행복했다.
늘 교회 종소리가 날 교회로 이끌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종소리가 우리 마을을 채우고도 넘쳐 멀리 중리동과 불호동까지 은은하게 퍼졌던 것 같다. 그 마을에서도 이끌리듯 우리 교회에 나온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 나이에 이미 복음의 맛을 온 몸으로 깨닫다니, 주님께 감사할 뿐이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 쳐다보기도 무서웠던 아버지였다. 아버지를 넘어야 그 뒤에서 날 기다리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정리=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 [역경의 열매] 손인웅 <1> 유교 전통 엄격했던 고향서 싹튼 신앙
* [역경의 열매] 손인웅 <2> 한국전쟁 때 피난 가서도 교회 폭격 맞을까 걱정
* [역경의 열매] 손인웅 <3> "중학교 못 보낸다" 부모님 말에 지게 부수고 가출
* [역경의 열매] 손인웅 <4> '노는 아이들'과 어울리자 신앙 친구들이 기도로 붙잡아
* [역경의 열매] 손인웅 <5> 고교 입학 후 2년 넘도록 신문배달로 학비 벌어
* [역경의 열매] 손인웅 <6> 아버지, 소 판 돈으로 "대학 등록금 내래이"
* [역경의 열매] 손인웅 <7> 연탄가스에 중독… "주여" 세 번 외치고 쓰러져
* [역경의 열매] 손인웅 <8> 교내 기독교 진보-보수 두 단체 회장 맡아 화합 노력
* [역경의 열매] 손인웅 <9> 국립대에 기독학생회관·대학교회 설립 기적이…
* [역경의 열매] 손인웅 <10> 두 번째 죽음 체험 후 필사적 기도 끝에 목사 서원
* [역경의 열매] 손인웅 <11> '신학교 진학' 선언에 아버지 뜻밖에 "그래라"
* [역경의 열매] 손인웅 <12> 아버지 또 소 팔아 신학교 등록금 주셔 눈물
* [역경의 열매] 손인웅 <13> 장신대 첫눈에 원칙 없어 보여 저항의식 꿈틀
* [역경의 열매] 손인웅 <14> 교회 다녀갔던 무당, 아들 의식 잃자 "살려내라"
* [역경의 열매] 손인웅 <15> 봉사 갔던 교회 목사님 딸과 운명적 결혼
* [역경의 열매] 손인웅 <16> 교인으로 목회자로… 반세기 넘게 덕수교회와 동행
* [역경의 열매] 손인웅 <17> 목사 서원 10년 만에 1972년 '주의 종' 되다
* [역경의 열매] 손인웅 (18) 최거덕 목사의 내리사랑에 든든한 목회자로 세워져
* [역경의 열매] 손인웅 (19) 장로들 도움으로 순탄한 목회 중 개발 소문이…
* [역경의 열매] 손인웅 (20) 구석구석 답사 끝에 성북동 교회 시대 열어
* [역경의 열매] 손인웅 (21) 교회 유치원 개설 등 마을 공동체로 자리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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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경의 열매] 손인웅 (23) 복지문화센터 등 건립 지역사회 사랑방 역할
* [역경의 열매] 손인웅 (24) 2005년 기독교사회복지엑스포 열자 10만여명 찾아
* [역경의 열매] 손인웅 (25·끝) 화해·일치 위해 노력했던 여정에 감사
약력=1942년 경북 안동 출생. 경북대 사범대 및 장로회신학대 신학대학원 졸업, 미국 매코믹신학교 신학박사. 덕수교회 담임목사,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대표회장, 한국교회봉사단 이사장 역임. 현 세계결핵제로운동본부 회장, 서울시자원봉사센터 이사장, 한국자원봉사협의회 상임대표.
***[역경의 열매] 손인웅 <2> 한국전쟁 때 피난 가서도 교회 폭격 맞을까 걱정
학교는 불탔지만 교회는 무사해 안도, 초등 4학년 때 부흥회서 성령 체험
손인웅 목사(왼쪽)가 1957년 고등학교에 입학한 직후 찍은 사진. 손 목사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고향을 떠나 대구에서 유학 생활을 했다.
주님은 어느 곳에서도 역사하신다. 우연히 찾아온 교회 종소리가 그랬다. 그건 주님이 내게 주신 ‘자연계시’였다. 강력한 계기로 주님을 만났지만 아버지 앞에만 서면 작아졌다. 어머니는 내가 교회에 다니는 걸 아셨다.
“인웅아, 교회 나가지 마래이” “가고 싶습니더. 재미있고요” “아이고, 내는 모른데이. 아부지 아시면 클난다.”
아버지의 눈을 피하기 위해 꾀도 냈다. 수시로 드리는 제사 때 아버지는 늘 맨 앞에 서셨다. 그 뒤로 문중 어른들과 형님들이 섰다. 난 여섯째 아닌가. 내 자리는 그야말로 하단 말석이었다. 동생들이 내 뒤에 있었지만 철저히 입단속을 시켰다. 그리고 절을 할 때 조용히 두 손을 모으고 기도했다. 그 모습을 보며 발을 동동 구르셨던 어머니께는 지금도 죄송하다. 물론 초등학교 1학년의 꾀로 아버지의 눈을 계속 가릴 수는 없었다. 엄격했지만 인자했던 아버지가 매를 들었다.
“이 녀석, 바지를 걷어라” “아부지, 잘못 했심더” “교회 나가지 마라 캤나, 안 캤나” “아부지, 그건….”
형님들과 누님, 아우들이 다 보는 앞에서 회초리가 종아리에 감겼다. 물론 그때뿐이었다. 아버지에게 혼날 때마다 교회와 더 가까워졌다. 하루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혼비백산이 돼 짐을 싸기 시작하셨다. 남쪽으로 간다고 하셨다. 전쟁이 난 것이었다. 마을도 뒤숭숭했다. 모두가 피난을 떠났다. 우리 가족은 3개월 동안 남쪽으로 몸을 피했다. 전쟁이 났어도 형제들과는 즐거웠다. 산과 들을 뛰어 노는 게 그저 좋을 나이였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엔 내리교회가 떠나질 않았다. “교회가 폭격을 맞으면 우짜노.” 먼 곳에서 교회를 위해 기도했다. 고향에 돌아오자마자 안산 언덕을 향해 뛰었다. 멀리서 보이는 교회가 무사했다. 폭격을 피한 것이었다. 빈 마을을 지킨 교회는 피난길에서 돌아오는 우리를 반갑게 맞아줬다.
초등학교는 불에 타 사라졌다. 가마니 학교가 시작됐다. “하나님 감사합니데이. 교회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데이.” 기도가 절로 나왔다. 1951년 여름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이 됐다. 교회에 여자 전도사님이 오셔서 부흥회를 인도하셨다. 당시엔 철야집회가 일상적이었다. 자정이 지나도록 손뼉을 치며 찬송을 부르다 성령체험을 했다. 강대상 천장에서 불덩어리가 떨어지더니 그게 입으로 쑥 들어오는 게 아닌가. 옆에선 이슬이 내리고 백합 향기가 진동했다. 불덩어리가 가슴속에서 타오르는 바람에 뜨거워 견딜 수 없어 밖으로 뛰어나갔다. 이리저리 뛰다 교회 앞에 있던 작은 소나무를 붙들고 기도를 시작했다. 세월이 지나도 그 경험이 너무나 소중하다. 무엇보다 10세 어린이도 뜨거운 성령체험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참 놀라운 일이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확신하며 요셉과 같은 꿈을 갖는 계기가 됐다.
많은 간증거리가 내리교회에서 생겨났다. 연도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어느 날 키가 크고 눈이 파란 선교사님이 자동차를 몰고 교회에 오셨다. 온 동네 사람들이 서양 사람을 구경한다고 교회로 몰려들었다.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세월이 많이 흐른 뒤 그 분이 구의령(William Grubb) 선교사란 사실을 알게 됐다. 초등학교 시절 만났던 구 선교사님, 그분이 훗날 경북대 사범대에 다닐 때 나의 후견인이 돼 주신 것은 주님이 맺어주신 소중한 만남이었다. 내리교회에서 싹튼 신앙은 대구로 이어졌다.
***[역경의 열매] 손인웅 <3> “중학교 못 보낸다” 부모님 말에 지게 부수고 가출
“주님, 길을 열어 주이소” 늘 기도… 면사무소 중학교 과정서 공부 기회
손인웅 목사(뒷줄 오른쪽 여덟 번째)가 대구서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1956년 10월 23일 경주로 수학여행을 떠나 첨성대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결국 대구에서의 삶이 시작됐지만 그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지게를 부수고 가출했던 혁명적 사건이 인생의 변곡점이 됐다. 1954년 효령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부모님은 고민에 빠지셨다. 어려운 형편에 자식들 모두를 중학교에 보낼 수 없어 한 해씩 번갈아가며 진학을 시키고 있던 터였다. 내가 쉬어야할 차례가 됐다. “얘야. 1년만 농사일 도우래이. 중학교는 내년에 가래이.” 하늘이 무너지는 말씀이셨다.
친구들이 입학시험을 치른 날에 난 밤새 울었다. 6년 동안 개근에 우등상을 받고 수석으로 졸업한 나였다. 그런 내가 중학교 진학시험에 응시도 못하고 농사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날 위해 지게를 만들어 주셨다. “안산에 올라가 땔감을 구해 오니라.” 친구들이 군위중학교 교복을 입고 내 곁을 지나갈 때면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안산에 올라 우두커니 있다가 지게를 부수기 시작했다. 무슨 생각이 있어서 한 일은 아니었다. 박살을 내 버렸다.
그리고 가출을 했다. 돌아보면 내 삶에 있어 출애굽과 같은 사건이었다. 모범생으로 자라온 내가 아버지가 만들어 준 지게를 부숴 버리고 가출하다니. 그 길로 난 높은 산을 넘어 20리 길을 걸어 구미 장천면에 있던 천우고아원엘 찾아갔다.
“제가 일을 잘합니더. 열심히 일할 테니 밥만 먹여 주심 됩니더. 저녁에만 공부하게 해 주심 정말 감사하겠심더.” 원장에게 눈물로 호소했다. 하지만 원장은 단호했다. 부모가 있는 아이를 받아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밤중에 왔던 길을 따라 다시 걸었다. 비참했다. 동네와 가까워져서야 얼마나 큰 일이 벌어진 건지 알게 됐다. 동네가 발칵 뒤집혔다. 아버지 생각을 하니 겁이 덜컥 났다. 단단히 각오했다. 그런데 웬 일인가.
“이리 오니라. 미안하데이. 내년에 꼭 중학교 보내 줄 테니 1년만 기다려 달래이.” 내게 간청하셨다. “아부지. 안됩니더. 전 공부하고 싶어 견딜 수가 없습니더.” 눈물에 묻힌 말이 좁은 방을 갈랐다. 하지만 가난한 현실을 눈물만으로 극복할 수는 없었다. 아버지는 그날 밤 다시 지게를 만드셨다. 난 소년 나무꾼으로 돌아갔다.
늘 기도했던 기억이 난다. “주님.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하셨심더. 길을 열어 주이소.” 4월의 어느 날이었다. 기쁜 소식이 들렸다. 효령면사무소에 중등과정을 교육하는 학교가 신설됐는데 장차 중학교 학력을 인정받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소식이었다. 부모님도 우선 그곳에서 공부하다 정규 중학교로 전학할 길을 찾아보자고 하셨다. 정식 중학교는 아니었어도 중학교 과정이었다. 난 그곳에서 영어와 수학을 공부하며 학구열을 불태웠다.
지게를 부쉈던 사건이 인생을 개척해 나갈 수 있는 혁명적 사건이 됐다. 내 삶의 출애굽 사건이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 아니겠는가. 면사무소에서 시작한 공부가 발판이 돼 훗날 대구로 유학을 떠날 수 있었다. 대구에선 대구서중학교(현 협성경복중학교)에 입학했다. 공부는 즐거웠다. 교복도 멋있었다. 친구들과도 늘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내리동이 그리워졌다. 사실 그리웠던 건 내리교회였다. 아련했던 기억이 점점 뚜렷해졌다.
***[역경의 열매] 손인웅 <4> ‘노는 아이들’과 어울리자 신앙 친구들이 기도로 붙잡아
객지서 홀로 지내니 고향 교회 그리워 대구 달서교회에 등록하고 의지
손인웅 목사가 신앙생활을 시작했던 경북 군위군 효령면 내리교회의 옛 모습. 교회는 1983년 개축됐다.
지게를 때려 부수고 가출한 것만 생각하면 오싹하다. 대구에서 중학교를 다닌 매 순간이 감사함으로 가득했다. 공부도 재미있었다. 기적과도 같은 순간을 살고 있다고 항상 생각했다. 하지만 감사함과 동시에 외로움도 커졌다. 어린 중학생이 부모님의 곁을 떠나 객지에서 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음엔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그리움이 자라났다. ‘와 이리 헛헛하노.’ 그리움의 근원을 따라가니 그 끝에 내리교회가 있었다. 내 신앙의 모판, 바로 그곳이었다. 눈을 감으면 안산 중턱에 있던 교회의 모습이 그림처럼 펼쳐졌다. 너무나 따뜻했던 교회 어른들이 보고 싶었다. 그중에서도 손달근 영수님이 가장 보고 싶었다. ‘영수’(領袖)는 미조직교회에서 교회를 인도하던 임시직분을 말한다.
영수님은 내리교회를 설립하신 분이었다. 일찌감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던 영수님은 유교가 지배하던 마을에서 많은 어려움을 당하다 마을을 떠나셨다. 어쩔 수 없이 길을 떠난 영수님은 옆 마을에서 신앙생활을 하다 극심하게 반대하던 문중 어른이 돌아가신 뒤에야 고향에 돌아올 수 있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예배공동체를 만든 것이었다. 장소는 사랑방이었다. 이 모임이 훗날 내리교회가 됐다. 객지에서 이분이 그리워진 건 결국 신앙생활에 대한 갈급함 때문이었다. 지금도 교향교회인 내리교회를 늘 생각한다. 내 신앙의 고향이기 때문에 잊을 수 없는 곳이다. 안타까운 건 고향교회가 여전히 미자립 상태라는 사실이다. 50년 가까이 고향교회를 후원하고 있다. 자립하지 못한 고향교회를 멀리서 지켜보는 마음이 편하질 않다. 늘 마음으로 운다. 더 많은 이에게 복음의 종소리를 전하게 해 달라고 항상 기도한다.
대구에서의 생활도 그럭저럭 적응해 갔다. 고향만 그리워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대구에서도 신앙생활을 해야 했다. 외출복도 따로 없어 검은색 교복을 입고는 시간이 날 때마다 집주변을 정탐하며 교회를 찾아 다녔다. 그러다 대구 달성공원에서 비산동 쪽으로 가는 길에 있던 교회가 눈길을 끌었다. 바로 달서교회였다. 교회에 등록했다. 중학교 3학년이 되니 유석준 목사님이 부임하셨다. 참 인자하신 분이었다. 훗날 아내(유인주 사모)를 만나 결혼한 뒤에야 알게 됐다. 유 목사님이 아내의 작은아버지란 사실을. 하나님이 이끌어 주시는 삶의 여정에선 이 같은 극적인 만남이 많다. 주님이 내 삶의 인도자이시자 설계자이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확신한다. 우연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서울 청운교회 이필산 담임목사가 아내와 사촌지간이다. 게다가 이 목사의 부인이 내 딸 세라와 대학 동창이기도 하다.
하지만 중학교 3학년이 됐을 때 난 주변의 ‘노는 아이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자칫 그 길로 빠질 뻔했다. 아예 주님과 멀어질 수도 있었던 그 순간 달서교회 신앙의 친구들이 날 기도로 붙잡아줬다. “인웅아. 교회에서 한 발짝도 못 나간데이. 기도하자. 니가 있을 곳은 바로 교회인기라.” 그 친구들이 없었다면 난 거리를 헤매다 그저 그런 인생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모두 주님의 돌보심이었다. 결국 신앙 안에서 무사히 중학교를 마치고 1957년 대구서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눈물겨운 사연이 날 그 학교로 이끌었다.
***[역경의 열매] 손인웅 <5> 고교 입학 후 2년 넘도록 신문배달로 학비 벌어
가난한 부모님 짐이 되지 않겠다고 다짐… 법대 진학 원했는데 담임은 사범대 권유
1960년대 대구와 인근 마을 사이를 연결하던 버스의 모습. 손인웅 목사도 이 같은 버스를 타고 효령면의 고향집을 오갔다.
내가 다녔던 대구서고등학교는 지금은 사라졌다. 당시에도 명문 고등학교는 아니었다. 단지 학비가 쌌다. 이 학교로 진학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큰 결단을 한 일이 있었다.
1956년 11월로 기억된다. 중학교 졸업을 앞둔 시점이었다. 집안 형편이 지게를 부수던 3년 전이나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 효령면의 고향집을 찾았다. 대구와 효령면을 잇는 시외버스가 있어서 다니는 길은 어렵지 않았다. 버스로 한 시간 남짓이면 도착하는 거리였다. 집에 가는 길이 멀지 않았기 때문에 몸은 힘들지 않았다. 다만 마음이 편하질 않았다. 가난한 부모님을 지켜보는 게 힘들어서다. 그래서인지 주말에만 잠깐 들렀다가 바로 돌아오곤 했다. 그날도 내리교회에서 예배를 드린 뒤 일찌감치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부지, 저 대구로 돌아갈랍니다.” “같이 가재이.” 작별인사를 하면 늘 아버지가 나보다 먼저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어깨엔 어김없이 쌀 두 말이 든 가마니가 들려 있었다. 집에 들렀다 돌아갈 때면 항상 아버지가 챙겨주시던 ‘선물’이었다. 굶지는 말라는 간절한 바람이 담겨 있던 눈물겨운 선물이었다.
늘 반복되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그날따라 아버지의 어깨가 좁아보였다. 아버지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됐다. “쌀을 모은다고 얼매나 힘드셨을꼬. 고등학교는 아부지에게 절대 짐이 되지 않을 거래이.” 그런 다짐을 했다. 스스로 진학하겠다고 결심한 것이었다.
원래 가고 싶었던 학교는 따로 있었다. 대구 계성고였다. 미션스쿨이었고 명문이었다. 하지만 사립학교로 학비가 비쌌다. 꿈만 꿨지 현실적으론 너무 멀었다.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내 힘으론 절대 갈 수 없었다. 그래서 생각한 곳이 바로 대구서고였다. 다니던 중학교와 같은 재단이라 익숙하기도 했다. 야간 과정이 있어서 여차하면 오전에 일을 할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학비가 쌌다. 그땐 젊었다. 뭐든지 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해 2년이 넘도록 신문배달을 했다. 모두가 자고 있을 새벽 4시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추워도, 비나 눈이 내려도 어김없이 기상시간은 그때였다.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내 힘으로 학비를 번다는 생각에 자랑스러웠다. 신문배달은 속도가 생명이었다. 지국에서 신문을 받으면 그때부턴 뛰었다. 2시간 가까이 신문을 돌렸다.
처음엔 신문을 품에 안고 뛰어다녔던 기억이 생생하다. 1년쯤 지났을까. 지국에서 자전거를 한 대 내줬다. 내 몸에 비해 큰 대형 자전거였지만 신문을 받아 페달을 밟기 시작하면 불어오는 바람이 늘 시원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하루에 300부 정도 돌렸던 것 같다. 신문을 다 돌리면 비 오듯 땀이 쏟아졌다. 고단한 일상이었지만 한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보람이 컸다. 내 손으로 돈을 벌어 공부를 하고 있다는 자부심 덕분이었다.
공부는 적성에 맞았다. 국어와 영어, 수학이 다 재미있었다. 나중엔 역사에 푹 빠져 역사교사를 꿈꾼 적도 있었다. 주요과목을 다 잘했으니 대학은 자신 있었다. 법대를 목표로 뒀다. 하루는 진학상담을 했는데 담임선생님은 생각이 달랐다. “인웅아, 니는 경북대 사범대에 가래이. 명문인 기라. 졸업하면 바로 교사 발령도 받을 수 있대이.”
***[역경의 열매] 손인웅 <6> 아버지, 소 판 돈으로 “대학 등록금 내래이”
혁명의 해 1960년 경북대 사범대 입학, 시위하며 자율치안 활동… 정신없이 지내
경북고 학생들이 1960년 2월 28일 대구 시내를 행진하며 “학생들을 정치의 도구로 사용하지 말라”고 외치고 있다.
법대에 가서 사법고시를 보고 싶었다. 하지만 담임선생님의 권유는 큰 도전이 됐다. 경북대 사범대의 명성은 대단했다. 졸업하면 모두 교사로 발령 받았다. 가난한 부모님께 경제적으로 도움을 드릴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교사에 대한 존경심이 컸다. 진학 상담을 마친 뒤 발길을 북구에 있는 경북대로 돌렸다. 사범대는 대학 본관 오른쪽에 있었다. 단과대 중 가장 오래됐다. 여의도 국회의사당처럼 생긴 대학 본관이 너무 멋있었다.
사범대 국어교육과를 새로운 목표로 삼았다. 목표가 생기니 공부가 수월해졌다. 신문배달을 하느라 새벽부터 뛴 덕분에 건강도 좋았다. 피곤할 법도 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새벽까지 공부하다 바로 일어나 신문을 돌리는 생활이 반복됐다. 아침에 일찍 일어난 덕분에 하루가 무척 길었다. 건강한 삶의 습관이었다. 당시는 대학들마다 시험문제를 직접 출제했다. 시험을 치르는 날이 하루하루 다가왔다. 그날이 다가올수록 웬일인지 담담해졌다. 자신이 있었다. 시험 결과는 좋았다. 합격이었다.
꿈에도 그리던 경북대 사범대 학생이 된 것이었다. 입학 전 아버지가 불러 고향엘 갔다. “인웅아. 대학 등록금 내래이.” 신문지로 싼 벽돌만한 덩어리 안엔 돈이 들어 있었다. 어디서 이런 큰돈이 났을까 생각하다 항상 보이던 황소 생각이 났다. 아버지가 소를 팔아 등록금을 마련한 것이었다. 눈물이 났다. 아버지의 큰사랑에 감동했다. 조용히 아버지의 손을 맞잡았다.
대학에 들어가면서 교회를 대봉교회로 옮겼다. 이 교회는 1948년 설립된 교회로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장을 지낸 이상근 목사님이 사역하시던 교회였다. 하지만 당시는 혼란스럽던 때였다. 나는 60학번이다. 그 시절을 살았던 사람들은 ‘60학번’이 뭘 의미하는지 금방 이해한다.
1960년은 혁명의 해였다. 발원지가 대구였다. 대학 입학을 목전에 두고 있던 그해 2월 28일, 대구 경북고 학생 800여명이 결의문을 낭독한 뒤 거리로 뛰쳐나왔다. “횃불을 밝혀라, 동방의 별들아” “학원을 정치도구화 하지 말라”는 구호를 외쳤다. 이승만 정권에 대한 반발이 표출된 것이었다.
이날 시위는 4·19혁명의 기폭제가 됐다. 첫 시위는 고등학생들이 시작했지만 곧바로 대학생들이 시위를 이끌었다. 혁명의 기운을 온 몸으로 받아냈다. 늘 공부를 하고 싶었던 나였지만 세월은 그렇질 못했다. 입학과 동시에 시위에 참여했다. 사실 앞장섰다. 거리에서 맞기도 많이 맞았다. 하지만 굴하지 않고 연일 시위대의 맨 앞에 섰다. 3월 15일 ‘3·15 부정선거’가 터졌다. 불난 집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모든 권위에 대한 도전이 일어났다. 캠퍼스에선 총장 물러가라는 구호가 나왔다. 학생과 직장인들이 뒤섞인 시위대는 경찰서에 불을 질렀다. 도지사도 사의를 발표했다. 행정과 치안이 마비된 대구는 대학생들이 지켰다. 자율치안이 시작된 것이었다. 나도 원대동에 있는 한 파출소에 배치됐다. 거리질서와 교통질서 유지에 투입됐다. 시위에 참여하랴, 자율치안대 활동하랴 공부할 새가 없었다. 지금 돌아보면 정신을 놓고 살던 시절이었다. 신앙생활도 소홀해졌다. 하지만 주님은 그런 날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 시절 난 죽음을 경험했다.
***[역경의 열매] 손인웅 <7> 연탄가스에 중독… “주여” 세 번 외치고 쓰러져
대학1학년 말 입주 가정교사 생활 중 죽음 문턱 다녀온 후 복음의 삶 살아
손인웅 목사(뒷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1963년 2월 24일 대구 대봉교회 주일학교 졸업식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대학 입학과 동시에 시작된 정치적 소용돌이, 그 속에 푹 빠지고 말았다. 그렇게 1학년이 지났다. 그나마 다행인 건 2학기에 들어서면서 대구 시내에서 가장 큰 예식장 사장 집에 입주 가정교사로 들어가게 된 것이었다. 난 그 집 본채와는 꽤 떨어져있는 독립공간에서 지냈다. 운명의 날은 12월 26일이었다. 책상 앞엔 큰 창문이 있었다. 늘 그곳에서 공부하고 책을 읽었다. 아이들 과외도 그 자리에서 했다. 그 날도 책을 읽고 있었다. 매섭게 추웠던 겨울밤이었다. 자정이 가까워왔는데 갑자기 몽롱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어지러웠다. 시야도 흐려졌다. 힘겹게 창문을 열기 위해 놋쇠 잠금장치를 돌렸던 기억이 아련히 난다. 그 순간 잠금장치가 십자가로 보였다. 그리고 난 “주여”라고 세 번 외쳤다. 실제 소리를 냈는지 아니면 내 마음이 그랬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하지만 난 그 순간 주님을 불렀다. 그리고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이고, 선생님 아잉교. 젊은 사람이 와 이래 쓰러져있노. 일로 오소, 일로.” 다급한 목소리가 저 멀리에서 들렸다. 아이들 할머니가 산책을 하다 날 발견한 것이었다. 난 연탄가스에 중독됐다. 그땐 연탄가스에 중독되면 동치미국물을 먹였다. 몇 사발을 마신 뒤에야 병원으로 옮겨질 수 있었다. 죽음의 문턱에 다녀오니 주님 생각만 났다. 정신을 잃기 직전 보았던 십자가와 ‘주여 삼창’. 그건 내가 보고 내가 외친 게 아니었다. 주님이 그렇게 인도해 주신 것이었다. 몸을 꼬집어 봤다. 아팠다. “내가 살았구나. 살았대이.” 그리고 터져 나온 눈물, 죄인의 눈물은 서럽고도 길었다.
마침 입주교사를 하던 집 사장님이 대구 대봉교회 안수집사셨다. 그 주에 바로 대봉교회에 나가 등록했다. 맨 앞에 앉았다. 박맹술 목사님이 강단에 서셨다. 그날 설교 본문은 창세기 28장이었다. 야곱이 베델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이 담긴 본문이었다. 날 위한 말씀이었다. 그날 난 과거의 난 죽었으니 이제 새 삶을 살겠다고 기도했다. 방황은 끝났다. 그날부터 모든 예배는 내게 부흥회와 같았다. 뜨거웠다. 경북대와 대봉교회는 걸어서 1시간 이상 걸린다. 그 길을 걸으면서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다. 교수님이 늦게 오시는 날엔 강의실 앞에 나가서 “예수 믿으시오”라고 외쳤다. 수백 명 모인 큰 강의실에서도 어김없이 앞으로 나갔다. 그러면 여기저기서 수군거렸다. “저 예수쟁이 미친놈 또 나왔다.” 날 예수쟁이라고 봐주다니, 기뻤다.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는 경험을 한 것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복음에 빠진 자의 삶은 행복으로 가득하다.
기독학생운동에 참여하기로 한 것도 이때였다. 1959년은 장로교가 통합 측과 합동 측으로 분열된 해였다. 그 여파가 모든 교회와 대학 기독학생회에 미쳤다. 서로 어느 쪽인지 물었고 답 없는 싸움을 했다. 이건 아니지 않은가. 선교의 문을 막는 일이라 생각했다. 난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과 한국대학생선교회(CCC) 활동을 동시에 시작했다. 진보와 보수를 대변했던 대표적 기독교 단체에 가입한 것이었다. 아군이면서 적군인 날 곱게 볼 리 없었다.
***[역경의 열매] 손인웅 <8> 교내 기독교 진보-보수 두 단체 회장 맡아 화합 노력
1960년대 경북대 본관 앞에서 학생들이 대화하고 있다. 나는 캠퍼스 안에서 기독교인들이 하나 되게 하는 일에 힘쓰며 화해와 일치를 온몸으로 체험했다.
1959년 교단 분열의 여파는 컸다. 한 교회에서 오랜 세월 친하게 지내던 이들이 등을 돌렸다. 통탄할 일이었다. 어른들이 벌인 싸움이 모든 세대로 확산됐다. 캠퍼스도 마찬가지였다. 진보와 보수 단체가 서로 등을 졌다.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전도의 문이 막힌다고 생각했다. 시간만 나면 전도를 하던 내가 아니던가. 갈등과 다툼을 목전에 두고 보는 건 너무 고통스러웠다. 61년 대학 2학년이 되면서 교내에서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과 한국대학생선교회(CCC) 활동을 시작했다. KSCF는 진보적 기독교 단체였고 CCC는 정반대의 성향을 가진 단체였다. 극과 극의 단체에 가입한 것은 둘의 화합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두 단체에서 모두 날 경계했다. 곱게 보질 않았다. 그럴수록 열심히 활동했다.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 있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은 하나였다. 기도도 하나고 예배도 하나였다. 결국 우리는 같은 믿음의 사람들이 아닌가.
강의실과 두 곳의 동아리방, 교회를 오가는 삶이 시작됐다. 처음엔 경계하던 친구들도 내게 악의가 없다는 걸 알게 됐다. 동아리 회장은 3학년들이 맡았다. 난 두 단체의 회장을 함께하기로 결정했다. 사실 무모한 도전이었다. 주변에서도 걱정을 많이 했다. “인웅아, 니 괜한 일 벌이지 마래이. 결국 싸움만 부추길 끼다.”, “아인 기라.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나 되기 위해선 이 길뿐인 기라.” 공부하고 싶어서 지게 부수고 가출했던 고집 센 나였다. 누가 뭐라고 해도 목표를 수정하지 않았다. “결정은 동아리 아∼들이 할 끼다.” 호언장담한 뒤 기도했다. 떨어지면 망신이었다. 화합시키려다 오히려 더 멀어지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있었다.
선거가 시작됐다. 개표 결과 두 단체 모두 날 회장으로 선택했다. 인사말이 잊히질 않는다. “교단이 분열됐심더. 마음이 아픔니더. 캠퍼스 선교단체들이 어른들 맹키로 싸워서야 되겠는교. 안됩니더. 우린 하나가 되입시더.”
나는 연합모임을 자주 가졌다. 여기저기서 ‘이상한 놈’이라는 비난이 있었다. 선배들도 가만히 있질 않았다. 각자의 정체성이 있는데 그걸 깼다는 지적이었다. 내 생각은 달랐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원래 하나였는데 함께 만나 기도하고 찬양하고 나라가 처한 현실을 안타까워하는 게 뭐가 문제란 말이냐고 항변했다. 사실 내 말이 맞았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아니라면 누구와 하나란 말인가. 두 단체의 회장이 한 명이다보니 교류가 많아졌다. CCC 방에 가면 KSCF 회원들이 있는 식이었다. 그 전엔 상상할 수 없는 장면이 연출된 것이다. 우리는 두 단체의 연합 수련회에도 함께 갔다.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당연히 서로가 서로를 알아가는 기회가 됐다.
무모해 보이던 도전이었다. 하지만 이때 경험은 내게 ‘화해’ ‘연합’ ‘일치’라는 가치의 소중함을 가르쳐줬다. 훗날 ‘한국교회 연합을 위한 교단장협의회’의 원형이 경북대에서의 경험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후 나의 목회가 화해와 화합에 맞춰진 것도 모두 이 시절 경험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역경의 열매] 손인웅 <9> 국립대에 기독학생회관·대학교회 설립 기적이…
기독학생회관에 여러 학과 학생 입소… 공동체 생활하며 ‘연합’하는 법 배워
경북대기독센터의 모습. 1955년 설립된 경북대기독센터는 지역교회와 기독 교수, 동문들이 2000년 새롭게 건축했다. 국민일보DB
대학 때 진보와 보수를 대표하는 두 선교단체 회장으로 활동했던 경험이 훗날 화합과 화해의 목회를 하는 데 자양분이 됐다. 가장 큰 교훈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라는 확신을 가진 것이었다.
대학에서는 이것 말고도 ‘특별한 훈련’을 받았다. 당시 경북대 총장은 고병관 박사였다. 신앙이 좋았던 장로이셨다. 기독 학생운동에 관심이 많았던 분으로 기억한다. 이분이 1950년대 초반 해외에서 열렸던 ‘국제기독학생회캠프’에 참석한 일이 있었다. 당시 고 총장은 캠프에 참석한 전 세계 학생들에게 경북대를 소개했다. 이를 계기로 1955년 경북대에서 제4회 국제기독학생회 캠프가 열렸다. 당시로선 유치한다는 생각 자체가 힘들었던 국제적 행사였다. 이를 계기로 기독학생회와 지역교계가 의기투합했다. 그 결과로 세워진 시설이 바로 ‘기독학생회관’이다. 기독학생회관은 이후로도 지속적인 성장을 했다. 1977년 건물을 새로 지었고 2000년엔 약학대학 옆에 또 다시 건물을 지으면서 이름을 ‘경북대기독센터’로 바꿨다. 2005년에는 경북대학교회도 설립됐다. 당시나 지금이나 국립대에 기독교 학생들을 위한 별도의 시설이 마련된 것 자체가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3학년이 되면서 기독학생회관에 입소했다. 입소 절차가 매우 까다로웠다. 당연히 세례교인이어야 했다. 선배와 교수들이 면접관으로 참여한 가운데 까다로운 면접고사를 치렀다. 학점도 높아야 했다. 입소한 뒤에는 규칙적인 생활을 하도록 했고 새벽기도회에 세 차례 결석하면 방을 빼야 했다. 저녁 식사 후에는 학술 발표회도 열렸다. 순서에 따라 발표도 하고 토론에도 적극 참여해야 했다.
입소한 학생들은 자발적으로 생활비를 걷었고 매달 ‘생활총무’를 선출해 직접 살림을 살아보기도 했다. 지금 돌아보면 수도원 생활이나 마찬가지였다. 새벽기도회와 성경공부, 학술발표회가 매일 반복되던 삶이었다. 주말엔 각자 교회로 흩어져 봉사도 했고 때때로 고아원을 위로방문하거나 야학에서 교사도 했다. 한 방에 두 명씩 모두 24명의 기독학생이 생활했다. 두 가지가 유익했다. 우선 같은 종교를 가진 학생들이 규칙적인 생활을 함께하면서 신앙이 깊어졌다. 의대 사범대 법대 등 모든 학과 학생들이 참여하는 학술발표회를 통해 박학다식해졌다. 학업과 신앙생활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었으니 무척 유익한 공동체였다.
공동체와 자립을 경험하면서 어울려 사는 법도 터득했다. 그야말로 ‘연합운동의 실제’를 살면서 배운 것이었다. 현재의 건물을 지을 때는 대구 지역 교계가 모두 자기 일처럼 나섰다. 한 교회는 개척교회에 지원할 자금 6억원을 경북대에 쾌척했다. 이런 정성이 모여 지금의 건물을 지을 수 있었다. 물론 특정 종교만을 위한 시설이어서 총장이 바뀔 때마다 문제가 됐다. 하지만 기독 교수들과 동문들이 번번이 지켜냈다. 지켜낸 것뿐만 아니라 키워갔다. 센터 출신 동문 중 김영호 전 산업자원부 장관과 옥수수 박사로 잘 알려진 김순권 박사, 김성수 전 고신대 총장 등이 기억난다.
***[역경의 열매] 손인웅 <10> 두 번째 죽음 체험 후 필사적 기도 끝에 목사 서원
CCC 수련회 갔다가 익사 위기 넘겨, 주님이 이끄신다고 확신… 성령 체험
한국대학생선교회(CCC)를 창립한 김준곤 목사가 1960년대 초반 말씀을 선포하고 있다. 김 목사는 1958년 CCC를 세우고 캠퍼스 선교에 앞장섰다.
대학교 3학년이던 1962년 여름까지만 해도 난 신앙 좋은 대학생일 뿐이었다. 졸업 후 빨리 국어교사로 발령 받아 교편을 잡고 싶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던 것 같다.
그해 8월 대구와 부산 지역 한국대학생선교회(CCC) 연합수련회가 부산 해양대학교에서 열렸다. 유난히 더운 여름이었다. 등록을 마치자마자 친구들과 해양대 본관 아래에 있는 아치해변으로 뛰어 들었다. 신나게 놀았다.
그런데 웬일인가. 파도가 강해지고 있었다. 주변을 보니 바다를 잘 아는 부산 친구들은 벌써 해변으로 몸을 피했다. 대구 친구들과도 3∼4m 떨어져 있었다. 바다에 홀로 남겨진 것이었다. 이미 발이 닿지 않았다. 하늘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겁을 먹었다. 살려달라는 말도 나오질 않았다. 상황이 심각했다. 파도가 날 덮치고는 조금씩 먼 바다로 끌고 나갔다. 수영을 잘하는 사람이라도 빠져 나오기 힘든 파도가 반복됐다. 짠물을 먹지 않으려고 입을 꽉 다물고 있던 기억이 생생하다.
날 부르는 친구들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물에 떠 있다가는 절대 나갈 수 없다고 판단했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바닥으로 내려가 기어보기로 했다. 2m가 채 되지 않았지만 파도가 칠 때마다 더 깊어지는 것 같았다. 돌이 많은 바다였다. 파도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돌을 움켜잡았다. 숨이 차면 올라갔다가 내려오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해변 가까이까지 기어갔다. 기진맥진한 나를 파도가 해변으로 밀어 올렸다. 거친 돌이 온몸을 할퀴었다.
친구들이 달려와 날 업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 희한하게도 연탄가스에 중독돼 ‘주여’ 삼창을 하던 대학 1학년 겨울이 떠올랐다. 정신을 차려보니 해양대 간호실이었다. 두 번째 죽음 체험이었다.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었다. 상처만 치료하고 기력을 회복했다.
운명의 시간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CCC 대표 김준곤 목사님이 집회에서 말씀을 전하셨다. 우리에겐 우상과 같은 분이셨다. 절규하듯 말씀을 전하시던 목사님이 강당 한쪽에 펼쳐져 있던 우리나라 대형 지도를 가리키셨다. 무슨 일인지 몰라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러분이 선교할 지역에 가서 서십시오. 그리고 그 자리에 서서 기도합시다.” 그때 나는 북한 지역 어딘가에 섰다. 우린 서로를 부여잡고 기도했다. 동역자라는 느낌이 들었다. 기도가 터져 나왔다. 기도를 하면서 두 차례나 죽음 체험을 하게 하신 일이 모종의 사인처럼 느껴졌다. 기도를 하면 할수록 하나님이 날 이끄신다는 생각이 확신으로 변했다.
그날 난 강력한 성령체험을 했다. 기도하다 쓰러지고 다시 일어났다 쓰러졌다. 필사적인 기도 끝에 목사가 되겠다는 서원을 하게 됐다. 두 차례의 죽음 체험 끝에 목사가 되겠다는 기도가 터져 나온 것이다. 그날 함께 기도한 친구들이 있었다. 무려 여덟 명이 목사로 서원했다. 그들 중 설삼용(안양제일교회) 김호일(서소문교회) 오창학(신촌교회) 원로목사가 기억난다. 이들은 그날 목사가 되겠다고 기도했고 그 길을 함께 걸었다. 이제 신학대학원에 입학해야 했다. 안정된 국어교사를 버려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효령면에 계시는 부모님 얼굴이 먼저 떠올랐다.
***[역경의 열매] 손인웅 <11> ‘신학교 진학’ 선언에 아버지 뜻밖에 “그래라”
그 뒤로 부모님 내리교회 나가기 시작… 큰 사랑 속에 1964년 장신대 입학
손인웅 목사가 학사모를 쓰고 있다. 손 목사는 1964년 2월 경북대학교를 졸업한 뒤 신학교에 입학했다.
목사로 서원기도를 한 뒤엔 외길뿐이다. 절대 진로를 바꾸면 안 된다. 그때나 지금이나 서원기도는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난 내가 한 서원기도의 의미를 반복해 생각했다. 생각할수록 확신이 들었다. 함께 서원했던 신앙의 동료들도 큰 힘이 됐다.
하지만 고향 마을엔 내가 국어교사가 되길 학수고대하시는 부모님이 계셨다. 생각만 해도 죄송한 마음뿐이었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도무지 답을 찾지 못했다. 대학 졸업반이던 1963년 가을은 고민과 번뇌 속에 흘러갔다. 학교는 서울 광진구에 있는 장로회신학대로 정했다. 신학교 진학을 알리는 걸 더 이상 늦출 수는 없었다. 노회 추천서도 받아야 했고 준비해야 할 일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대구 시내에서 버스를 타고 효령면으로 향했다. 버스 안에서 뭐라 말씀을 드릴지 수십 번 연습해 봤다. 그럴수록 마음이 답답해졌다. 미안해서였다.
인사를 드리자마자 말을 꺼냈다. “아부지, 죄송합니더.” 정적이 흘렀다. “저 목사 되는 학교에 가고 싶어예. 이미 하나님과 약속해서 바꿀 수도 없심더. 허락해 주이소.” 그리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라. 정 하고 싶으면 해야제. 이왕 할라 카면 열심히 하그래이.” 의외였다. 너무도 쉽게 허락을 해 주셨다. 이 말을 하시고는 마당으로 나가셨다. 허락은 하셨어도 아들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는 기분이셨을 것이다. 그때 마음먹었다. 좋은 목사가 되겠다고, 절대 내 욕심 차리는 목사가 되지 않겠다고, 복음만 전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내가 폭탄선언을 한 뒤 부모님께서는 내리교회에 나가기 시작하셨다. 어머니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세례도 받으셨다. 날 울렸던 종소리를 따라 새벽기도에도 나가셨다. 그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 부모님의 크나큰 사랑은 가늠할 수가 없다. 세월이 많이 흘러 임종을 앞둔 아버지는 문중 어른 중 한 분이신 손재명 장로님의 간곡한 기도와 권면으로 신앙고백을 확실히 하시고 하나님 품에 안기셨다. 유교식 장례도 거절하시고 기독교식으로 해 달라고 유언도 하셨다. 바다와 같은 사랑 속에 난 신학의 길에 들어섰다.
대학 선교단체에서 활동하며 야학교사로 봉사한 게 큰 도움이 됐다. 그 시절엔 교사 수급이 쉽질 않아 사범대 출신들은 일정기간 발령받은 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해야 했다. 난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다. 바로 신학을 시작하고 싶었다. 의무봉사기간을 야학교사 활동으로 대체할 수 있었다. 봉사활동을 열심히 한 덕이었다.
광나루(장로회신학대의 별칭)에 입학한 건 1964년 3월의 일이었다. 당시 장신대 신학대학원은 ‘학사원’ 1기를 뽑았다. 학사원은 학사 출신 입학생을 말했다. 그 전엔 지방 성서신학원 출신과 대학을 졸업한 학사들을 함께 뽑았다. 우리 때부터 분리됐다. 서울 안동교회 원로인 유경재 목사나 장신대 총장을 지낸 서정운 박사가 입학 동기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박정식(전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장) 김동익(전 새문안교회 담임) 목사도 졸업 동기로 광나루에서 함께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고민했던 동역자들이었다. 친구들과는 지금도 즐겁게 교류한다. 물론 신학교에 입학할 때까지는 감사와 감동의 사연들이 많았다.
***[역경의 열매] 손인웅 <12> 아버지 또 소 팔아 신학교 등록금 주셔 눈물
예의 갖추느라 갓 쓰고 교회 간 아버지 부흥사가 ‘실내서 모자 벗으라’해 충격
손인웅 목사가 장로회신학대 신학대학원에 입학했던 1964년 쯤의 장신대 캠퍼스 전경. 장로회신학대 제공
경북 군위에서 태어나 대구에서만 살던 사람이 서울 생활을 시작하려니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입학시험을 보고나니 설렘보다 걱정이 커졌다. 당장 등록금이 없었다. 가정교사를 하면서 모아둔 돈이 있긴 했다. 하지만 선교단체 활동을 하면서 이리저리 지출이 컸다. 한때 몸이 아파 병원비로도 많이 썼다. 사실상 빈털터리였다.
하루는 아버지로부터 전보가 왔다. 집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인웅아. 학교가 서울에 있다고. 등록금은 마련했나.” “아직…”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답을 했다. 그랬더니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그거 가져오소”라고 했다. 신문지로 싼 벽돌 크기의 덩어리였다. “등록금에 보태라.” 아버지는 또 소를 파셨다. 대학 들어갈 때도 소를 팔아 등록금을 주셨던 아버지였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아버지가 주신 돈으로 무사히 등록금을 냈다. 좋은 목사가 되기 위해 성실하게 훈련 받겠노라고 다짐에 다짐을 거듭했다. 지금이야 장로회신학대 주변이 번화해졌지만 그땐 그야말로 수도원 같았다. 나지막한 언덕에 있는 학교에선 멀리 한강 줄기가 훤히 보였다. 학교 뒷산인 아차산은 예나 지금이나 아름다웠다. 가난했던 신학생들은 시간이 날 때마다 산에 올라 산책을 했다. 밤에는 기도를 하러 올라가곤 했다. 신학교 생활의 백미는 같은 길을 걷기로 서원한 동료들과 함께하는 것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신학도를 꿈꾸며 대학생활을 마친 동료들은 그야말로 든든한 우군이었다.
더 감사한 건 아버지가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신 것이다. 어머니처럼 열심히 나가시지는 않으셨다. 그래도 그토록 완고하게 반대했던 아버지께서 가끔이라도 교회에 나가신다는 소식은 큰 기쁨이었다. 그러다 어머니가 놀라운 소식을 전하셨다. 아버지가 교회에 갔다가 망신을 당하셨단 이야기였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이제 겨우 교회를 나가시기 시작한 아버지가 큰 상처를 받았을 것 같아서였다. 내용은 이랬다. 어느 날 내리교회에 부흥사가 오셨고 주민들이 삼삼오오 교회로 모여들었다. 아버지도 어머니와 함께 부흥회에 참석하기로 하고 가장 깨끗한 옷을 꺼내셨다. 문중의 어른이셨던 아버지는 늘 예법을 강조하셨다. 그날도 의관을 정제하셨다. 갓도 쓰셨다. 이 갓이 문제가 됐다. 그토록 예의를 갖춰 예배당에 들어가 앉으셨는데 갑자기 부흥사가 “실내에선 모자를 벗어야 한다”고 말한 것이었다.
듣고 있는데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버지는 교회에 손님이 오셔서 말씀을 전하신다고 최대한의 예를 갖춰 옷을 입고 가셨던 것이었다. 큰맘 먹고 교회에 나가셨는데 대뜸 그런 이야기를 들으셨으니 아버지가 받았을 충격이 얼마나 컸을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이튿날 아침 아버지가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했다. “야소교 믿는 사람들이 예법을 모린다.” 이날 이후 아버지는 한동안 교회 근처도 가지 않으셨다. 그래도 어머니가 신앙생활을 하시는 건 막지 않으셨다. 늘 그리워하셨던 것 같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통해 느낀 바가 있었다. 교인들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목사가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자기의 상식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해선 안 된다는 것도 이때 깨달았다.
***[역경의 열매] 손인웅 <13> 장신대 첫눈에 원칙 없어 보여 저항의식 꿈틀
주일성수 않고 산업시찰에 학내 시위… 출석 교회는 덕수교회로… 운명적 만남
서울 정동에 있던 덕수교회 전경. 손인웅 목사는 1964년 장신대 신대원에 입학하면서 이 교회에 출석했다.
서울 생활이 시작됐다. 낯선 도시였다. 늘 부모님 생각이 났다.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근면 성실하고 정직하게 사신 분들이었다. 그런 부모님의 성품이 신앙생활과 결합됐다. 늘 나를 돌아보는 삶을 살았고 부끄럽지 않으려 노력했다. 교회는 서울 정동에 있던 덕수교회로 정했다. 교회와 나의 운명적인 만남이 이미 신학교 1학년 때 시작된 것이었다.
1964년 3월 2일이 신학교의 첫 날이었다. 월요일이었다. 예배를 드리고 하루 일찍 서울에 도착했다. 기차를 타고 서울역까지 와 버스를 몇 번이나 갈아타고 천호동으로 갔다. 천호동에선 강 건너 신학교가 보였다.
천호동에서 하루 자고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나 학교로 갔다. 광진교를 건너 광나루를 향하는 길이 무척 운치 있었던 기억이 난다. 아차산 중턱에 있는 아담한 학교를 보며 ‘저곳이 바로 내가 신학 수업을 들을 곳이구나’ 생각했다.
우리 기수는 모두 30명이었다. 학사원 1기들의 학벌은 꽤 좋았다. 서울대 출신이 여러 명이었고 연세대와 고려대를 비롯해 나 같은 지방 국립대 출신도 많았다. 하지만 큰 대학에 다니다 온 동기들의 눈에 비친 장신대는 너무도 초라했다. 캠퍼스가 초라한 건 둘째 치고 뭔가 원칙이 없어 보였다.
우리가 누군가. 1960년 4·19혁명을 경험한 이들 아닌가. 잠자고 있던 저항의식이 꿈틀거렸다. 그러다 사달이 벌어졌다. 박정희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대학생들을 산업현장으로 보냈다. ‘산업시찰’이라는 명목이었지만 일종의 견학 프로그램이었다. 우리학교에선 학생회장이 시찰단에 발탁됐다. 그런데 학생회장 선배가 시찰을 떠난 날이 하필이면 주일이었다. 이게 기폭제가 됐다.
“신학생이 어떻게 주일성수를 하지 않고 산업시찰을 갈 수 있느냐.” 구호가 선지동산에 가득 찼다. 1학년을 중심으로 학내시위가 시작된 것이었다. 당시 학생과장은 김규당 교수였다. 면담도 여러 차례 진행됐다.
“교수님. 어떻게 신학생을 주일에 산업시찰 보내실 수 있습니까. 그걸 가는 학생회장은 정상입니까.” 학생과장은 흥분한 우리를 달랬고 품어 줬다. 그리고는 며칠 후 채플에 설교자로 나서셨다. 설교 제목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였다. 주일에 산업시찰을 보낸 것에 대해 우회적으로 사과를 한 것이었다. 시찰 중이던 학생회장도 서둘러 학교로 돌아와 학생들 앞에서 사과했다. 정부에도 불만이 많았던 우리들은 학생회장이 다시 시찰단으로 돌아가는 것을 막았다.
하지만 신학교의 현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매일 시위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몇 명이 의기투합했다. “우리 잡초부터 뽑자. 그리고 나무도 심자. 환경미화를 우리가 해보자.”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는데 조를 짜서 캠퍼스 관리를 시작했다.
여름방학을 앞두고 선교팀을 조직해 전국 각지로 흩어지기로 했다. 나도 친구 3명과 함께 거제도 다대교회로 내려갔다. 호주 선교사였던 변조은 목사가 우리를 맞아 주셨다. 그때 우린 변 선교사의 랜드로버 자동차를 타고 거제도 곳곳을 누볐다. 열정이 넘치던 시절이었다. 온 동네가 선교지였다. 주변 학교에선 여름성경학교를 열었고 밤엔 야학교사로 활동했다. 낮엔 마을을 순회하면서 전도를 했다. 그러다 믿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역경의 열매] 손인웅 <14> 교회 다녀갔던 무당, 아들 의식 잃자 “살려내라”
마을 전도 물거품 위기에 간절한 기도 “주님 살려 주세요”… 마침내 깨어나
손인웅 목사(오른쪽 아래에서 두 번째)가 1965년 군복무 하던 경남 밀양 15육군 병원에서 입원한 환자들과 함께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거제도 다대교회 마당에서 쉬고 있던 어느 주일 오후였다. “큰일 났어요. 무당집 아들이…” 다대교회 교인이 말을 잊지 못하고 다급하게 손짓만 했다. 얼굴은 상기돼 있었다. 우리 넷은 서둘러 신발을 신고 달리기 시작했다. 무당이라면 그날 처음 교회에 나온 주민이었다. 무당이 교회엘 나오다니, 다들 믿지 못하고 있던 터였다.
무당집 평상에 그 집 아들이 누워있었다. 초등학교 1학년이나 됐을까. 의식이 없었다. 무당은 오열했다. “내가 오늘 교회에 나갔다고 장군신이 우리 애를 데려갔다. 교회 나갔다고 이런 일이 벌어진 거다. 너희들이 날 전도했으니 우리 애를 살려내라.” 당황스러웠다. 이 집 아이가 이대로 세상을 떠나면 이 마을 전도는 물거품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살릴 능력도 없었다. 무서웠다. 그러다 하나 둘 아이를 붙잡고 흔들다 기도하기 시작했다. 땀과 눈물이 비처럼 쏟아져 범벅이 됐다. 목소리가 다 쉴 정도로 하나님을 불렀다. “주님. 이렇게 이 아이 데려가시면 안 됩니다. 살려 주세요.” 넷의 절규가 뒤섞였다. 얼마나 기도했을까. 아이가 꿈틀거렸다. 의식이 돌아온 것이었다. 놀랐다.
세월이 많이 흘러 다대교회 김수영 목사를 만나 당시 일을 물어봤다. 김 목사도 이 마을에서 그 이야기가 유명하다고 했다. 당시 무당집 아들이 깨어난 덕에 다대교회 출석교인이 늘었고 그 무당집은 부산으로 이사 간 뒤에도 신앙생활을 하고 있노라고 했다.
주님의 능력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 넘는다. 당시 그 아이가 의식을 잃었는지, 아니면 정말 잠시 숨이 끊어졌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간절히 부르짖었고 그 가운데 아이의 의식이 돌아왔다. 모든 게 은혜였다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주님이 하신 일이었다.
신학교 1학년을 우여곡절 속에 보내고 군에 입대했다. 경남 밀양에 있던 15육군 병원이었다. 편한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가보니 상상과 달랐다. 결핵환자 요양원이었다. 당시 결핵은 불치병과 같았다. 나는 행정병이었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곧바로 군목이 전출을 갔다. 후임은 오지 않았다. 내가 신학교에 다니다 왔다는 걸 모두 알았다. 그날부터 군종 겸 군목이 됐다. 시키니까 시작한 일이었지만 대충할 수는 없었다.
신앙이 뜨겁던 때였다. 환자교인들이 교회에 가득 차기 시작했다. 이들을 진심으로 돌봤던 게 부흥의 이유였다. 겁도 없었다. 간호장교들이 수시로 찾아와 예방약을 먹으라고 권했지만 거절했다. 야학도 시작했다. 사범대 출신 아닌가. 대학에 다니다 온 동료들과 아이들을 만났다. 야학을 차린 곳은 동사무소였다. 우리가 열심히 하자 부대에서 차도 내줬다. 그러다 한 학생이 청와대에 감사편지를 보냈다. 군인 아저씨들 덕분에 공부를 하는데 학교를 지어달란 내용이었다. 육군본부에서 실사단이 내려왔다. 곧바로 당시 부산에 있던 군수사령부에 가서 자재를 수령하라는 연락이 왔다. 덕분에 교실 3동과 교무실을 지었다. 이 내용이 신문에 기사로도 실렸다. ‘군인 선생님’들의 활약에 대한 내용이었다. 야학 졸업생들은 검정고시를 치르고 부산의 정규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나는 군 생활을 통해 실천신학 훈련을 철저히 경험했다.
***[역경의 열매] 손인웅 <15> 봉사 갔던 교회 목사님 딸과 운명적 결혼
목사님이 “내 딸 만나보면 어떻겠나” 주님이 예비하신 평생 동역자 만나
손인웅 목사가 1971년 3월 대구 대봉교회에서 박맹술 담임목사(가운데)의 주례로 유인주 사모와 결혼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결혼 이야기를 해 보려 한다. 사실 그 안에 임재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말하고 싶다. 1965년 입대해 2년 반 동안 군 생활을 마친 뒤 67년 9월 제대했다. 복학은 68년 봄 학기에 하기로 했다. 복학 전까지 시골에서 봉사를 하기로 결심하고 구의령 선교사님과 의논했다.
소개받은 곳은 경북 청도군 청도읍 주변이었다. 정확한 교회는 청도신읍교회에 가서 추천받을 요량으로 금요일 새벽 집을 나섰다. 저녁이 돼서야 청도신읍교회에 도착했다. 이 교회 유정순 목사님은 대학 때 기독학생운동을 하면서 알게 된 분이었다.
“목사님, 저 왔습니다.” 인사를 드렸더니 기다렸던 것처럼 반갑게 맞아주셨다. 자초지종을 설명 드렸다. 곰곰이 들으시더니 “여기서 쉬고 혹시 토요일에 교회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집회를 인도해 줄 수 있겠나”하고 물으셨다. 당연히 하겠다고 했다. 집회는 은혜 가운데 마무리됐다. “목사님, 저 주일예배 후 시골로 가보겠습니다.” 그랬더니 목사님이 이런 제안을 하셨다. “손 전도사, 총각이 시골에 혼자 들어가 사역하는 게 생각처럼 쉽질 않네. 이러면 어떨까. 복학 전까지 우리 교회에서 학생들 지도하며 목회를 배우다 서울로 올라가지. 배울 게 많을 거네.” 왠지 싫지 않았다.
뭐든 열심히 했다. 아이들과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함께 기도하고 상담하며 공부도 봐줬다. 6개월이 순식간에 지났다. 유 목사님과 아쉬운 이별을 했다. 아이들과도 눈물의 작별을 했다.
68년 3월 학교로 돌아왔다. 2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많이 배웠고 덕수교회에서도 열심히 봉사했다. 졸업식을 앞두고 부모님을 뵈러 고향에 갔다가 청도신읍교회 생각이 나 ‘졸업 신고’를 하러 방문했다. 유 목사님은 언제나처럼 반갑게 맞아 주셨다. 그러면서 이렇게 묻는 게 아닌가. “손 전도사, 자네 이제 결혼해야 되지 않나. 전임 전도사로 나가려면 결혼해야 하는데. 혹시 만나는 처자가 있나. 막내딸이 유학 가겠다는 것을 붙들어야 되겠는데 한번 만나보면 어떻겠나?”
운명은 늘 우연을 가장해 찾아온다. 존경하던 유 목사님이 딸을 만나보라 하시니 사양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유인주 사모를 만났다. 그녀는 부모님이 소개한 신랑감을 거절할 수도 없고 유학도 가고 싶어 고민에 빠졌다. 오빠들이 미국에 살고 있어서 초청도 받은 상태였다. 그러나 막내딸을 외국에 보내야하는 노부모의 마음은 너무나 섭섭하셨다. 그래서 좋은 짝이 나타나면 일찍 결혼을 시켜야겠다고 생각하던 터였다. 그러다 6개월 동안 날 유심히 살피신 것이었다. 아내는 아름다웠다. 성품도 좋았고 목사와 결혼하는 데 감사하는 마음도 있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배필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결혼은 1971년 3월 대구 대봉교회에서 했다. 주례는 박맹술 담임목사님이 해 주셨다. 내가 30살, 아내가 23살 때였다. 나이 차는 있었지만 할머니와 어머니의 사모생활을 평생 보면서 자란 아내는 내 목회를 곁에서 조용히 도운 평생의 동역자다. 지금도 기도로 헌신적으로 조력한다. 지면을 빌어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다. 하나님의 섭리는 측량할 수가 없다.
***[역경의 열매] 손인웅 <16> 교인으로 목회자로… 반세기 넘게 덕수교회와 동행
최거덕 목사 매력에 이끌려 출석… 설교 기회 줘 훗날 목회에 많은 도움
덕수교회가 1981년 3월 1일 서울 중구에 있던 옛 예배당에서 교회창립 35주년 기념예배와 교육관 봉헌식을 진행하고 있다.
덕수교회와 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인생의 흔적이 굵게 남아 있는 곳이자 목회의 자리였다. 지금은 서울 성북구에 교회가 있지만 원래는 중구에 있었다. 교우들은 옛 예배당을 ‘정동 덕수교회’라 부르며 지금도 추억하고 있다. 교회가 있던 자리에는 조선일보 사옥이 들어왔다. 이 이야기는 별도로 소개할 예정이다.
나는 신학교에 입학했던 1964년부터 지금까지 덕수교회와 함께 살고 있다. 처음엔 교인이었다. 이후 교육전도사를 시작으로 전임전도사와 강도사, 부목사를 거쳐 1977년 담임목사가 됐으니 각별하다는 말만으로 설명하기엔 부족함이 많다.
첫 정이 들었던 정동 예배당은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이 다니던 교회였다. 그들이 지은 교회이기도 했다. 무척 아담하고 고풍스러운 느낌을 줬다. 고향에 있던 내리교회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겼다. 해방 후 최거덕 목사님이 불하 받아 덕수교회의 역사를 쓰기 시작한 유서 깊은 공간이었다.
교회와 만난 건 운명이었다. 대학 때 기독학생운동을 하면서 종종 서울에 올 기회가 있었다. 한 번은 정동제일교회 젠센홀에서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 경북지역 수련회가 열렸다. 정동제일교회와 덕수교회는 이웃사촌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그때 KSCF전국연맹 임원들이 우릴 만나러 왔는데 많은 수가 덕수교회 교인이거나 그곳 출신이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호기심이 생겼다. ‘서울에서 생활하면 꼭 덕수교회에 출석해야겠다.’ 임원들을 보면서 이런 다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신학교에 입학하면서 덕수교회에 출석한 건 이런 인연과 다짐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최거덕 목사님이 청년들을 좋아하셨다. 그때부터 청년들이 바로서야 한국교회에 미래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분의 매력에 이끌려 교회에 나온 것도 사실이다. 함께 있으면 푹 빠져들었다. 말씀도, 인품도 모든 면에서 배울 점이 많았다.
그 시절 덕수교회엔 친구들도 있었다. 1962년 부산 해양대에서 열린 한국대학생선교회(CCC) 연합수련회에서 함께 목사가 되기로 서원기도를 했던 설삼용 안양제일교회 원로목사도 덕수교회 중등부 교육전도사로 있었다. 교회 분위기도 좋았는데 친한 친구와 함께 사역을 경험하는 건 큰 기쁨이었다.
나는 1969년부터 정식으로 교육전도사가 됐다. 그 무렵 최 목사가 피어선성서학원 원장이 되시면서 날 성서학원 안에 있던 야간 중·고교 과정 교사로 추천하셨다. 교사가 되지는 못했어도 재능을 썩히지는 않았다. 이 또한 감사한 일이었다.
1970년 신학교를 졸업했다. 나에겐 큰 산과도 같은 최 목사님은 교육전도사들에게도 설교를 하도록 기회를 주셨다. 믿고 맡겨 주셨다. 훈련을 시킨 것이었다. 이런 훈련이 훗날 목사가 돼서도 설교를 준비하고 교인들 앞에 서는데 큰 도움이 됐다. 목사님의 선견지명은 어린 교육전도사들이 목사로 훈련받는 데 자양분이 됐다. 지금도 그 분의 은혜를 생각하면 머리가 숙여진다. 목사님은 유독 내게 많은 기회를 주셨다. 이유를 물어 볼 수는 없었다. 그저 순종할 뿐이었다.
***[역경의 열매] 손인웅 <17> 목사 서원 10년 만에 1972년 ‘주의 종’ 되다
최거덕 목사, 뜻밖에 후임 나를 추천…30대 중반 목사에 담임 맡기는 파격
손인웅 목사(왼쪽 두 번째)가 1972년 서울 신촌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최거덕 목사님이 설교할 기회를 주시는 건 전도사들에게 큰 부담이었지만 묘한 설렘도 있었다. “내가 교인들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되다니…” 두려움과 기대가 섞인 복잡한 감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육전도사들은 열심히 준비해 단에 올랐다.
1970년 신학교를 졸업하면서 2년 동안의 전임전도사 사역이 시작됐다. 목사안수는 1972년 서울서노회에서 받았다. 지금이야 덕수교회가 서울강북노회 소속이지만 당시엔 서울서노회에 속해 있었다. 서울이 지금보다 작았다는 뜻이다.
드디어 목사가 됐다. 1962년 부산 해양대학교에서 바다에 빠질 뻔했던 소동 끝에 김준곤 목사의 설교를 들으며 목사가 되기로 서원한 지 10년 만에 주의 종이 된 것이다. 안수자가 머리에 손을 올리는 순간 효령면에서 들리던 교회 종소리가 가슴을 울렸다. 지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모든 게 주님의 계획하심이었고 인도하심이었다. 그 여정 끝에 무릎을 꿇고 있는 내가 보였다. “주님, 좋은 목사가 되겠습니다. 본 대로, 배운 대로 겸손히 실천하는 목사가 되겠습니다.” 눈물이 흘러 내렸다. 감사와 기쁨, 결단의 눈물이었다.
목사가 된 뒤 최 목사님은 설교 기회를 조금씩 더 주셨다. 훈련이라고만 생각했다. 훗날 생각해보니 교인들에게 날 선보이려는 배려였다. 1974년이 되자 최 목사님은 매달 한 차례씩 주일예배 설교를 하라고 하셨다. 열심히 준비해 열정적으로 설교했다. 75년 신년예배를 드린 뒤 최 목사님이 부르셨다. “손 목사, 올해부터는 매달 두 번씩 주일예배 설교하세요.” 그리고는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다. 더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저 시키는 대로 했다. 설교단에 오르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교인들과 눈을 맞추게 됐고 반응을 살필 수도 있게 됐다. 조금씩 여유가 생겼다. 76년이 되자 아예 매 달 세 차례씩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다. 최 목사님은 한 번만 단에 서신다는 것이었다.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목사님, 제가 부목사인데 매 달 세 차례나 단에 서는 건….” 물론 답은 없으셨다. 그저 웃기만 하셨다.
그렇게 또 다시 1년이 지나갔다. 그해 연말 당회는 12월에 열렸다. 당회엔 부목사들도 모두 배석한다. 최 목사님이 “이제 전 은퇴합니다”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덕수교회 후임목사를 모셔야 하는데….” 정적이 흘렀다. “저는 손인웅 목사를 추천합니다. 장로님들께서 추천하실 분이 계시면 말씀해 주시죠.” 귀를 의심했다. 그것도 잠시, 장로님들은 “너무 좋습니다. 찬성합니다.”라며 반색하셨다. 그렇게 덕수교회 담임목사로 결정됐다.
이듬해인 77년 서울서노회 봄노회 때 나를 청빙하는 안건이 통과됐다. 내 나이 35살 때였다. 최 목사님은 그해 7월 은퇴하셨고 난 위임을 받았다. 40여년 전이지만 30대 중반 목사에게 유서 깊은 교회의 담임을 맡기는 건 파격적인 일이었다.
당시는 부목사가 담임목사직을 승계할 수 있었다. 내가 마지막이었다. 그해 9월 서울 영락교회에서 열린 교단 총회에서 부목사가 담임목사 승계할 수 없도록 하는 법이 통과됐다. 교회 안에서 발생할 수 있는 혼란을 막자는 취지였다.
***[역경의 열매] 손인웅 (18) 최거덕 목사의 내리사랑에 든든한 목회자로 세워져
여름성경학교 인명사고 났을 때 목회 포기할 뻔한 위기 넘기게 인도
손인웅 목사가 1980년 서울 중구에 있던 옛 덕수교회 정문에서 가족들과 사진을 찍고 있다.
최거덕 목사님은 거장이셨다. 서울 묘동교회와 안동교회에서 담임 목회를 하신 뒤 1946년 덕수교회를 개척하셨다. 그분의 별명은 ‘복덕방’이었다. 교인들이나 이웃교회 목사들 사이에 다툼이 벌어지면 그들은 어김없이 최 목사를 찾았다. 분쟁 당사자들이 모두 최 목사에게 상의를 하러 왔던 것이다. 최 목사는 자연스럽게 중재를 했고 화해를 이끌어 내셨다. 자신의 덕을 나누신 것이었다.
그 분의 너그러운 품에 내가 안긴 일이 있었다. 덕수교회 담임목사로 정해진 그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일이 바로 그 일이었다. 1972년 여름이었다. 고등부 아이들이 여름방학이 시작되자 교외로 수련회를 떠났다. 그 해 봄 목사 안수를 받았던 난 책임자로 동행했다. 수련회 마지막 날 저녁이었다. 아이들은 모닥불 놀이를 준비한다고 분주했고 난 숙소에서 성경을 읽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아이들이 눈물 범벅이 된 채로 방문을 벌컥 열었다. “목사님, 목사님…” 눈물 섞인 목소리가 내게 닿질 않았다. ‘큰 일이 났구나’ 싶었다. 마음을 다잡고 아이들이 이끄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한 아이가 굵은 전선을 붙잡고 쓰러져 있었다. 감전이었다. 아이를 전선에서 떼어내기 위해 몸통을 안았던 기억까지 난다. 눈앞에서 큰 빛이 나고 정신을 잃었다. 여전히 전기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다행히 정신을 차렸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론 아이를 빨리 떼어내야 한다며 다시 다가가는 걸 교사들이 몸을 던져 막았다고 했다. 그날 17살, 꽃다운 나이의 학생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교회에 보고를 했다. 최 목사의 목소리가 떨렸다.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했다. 경찰서에서 조사도 받았다. 교인들은 술렁거렸다. 하지만 담임목사님이 적극 나서셨다. 사고 당한 아이의 부모를 찾아가고 교인들을 위로했다. 그리고 날 불렀다. “손 목사. 한 달 휴가를 주겠네. 잘 치료받고 돌아오게.” 그 말을 듣고 교회를 나오는데 눈물이 쏟아졌다. 쓰러져 있던 아이 생각이 났다. 부족한 나 때문에 세상을 떠난 것 같았다. 괴로웠다.
교회를 사임하기로 결정했다. “목사님. 사임하겠습니다. 제가 책임져야 할 일입니다.” 침묵이 흘렀다. “쉬고 돌아오게. 수습은 내가 하겠네. 장로님들과도 상의가 끝났네.” 그리고는 날 안아주셨다.
교인들은 위로헌금을 모아 유족들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얼마의 기금을 조성해 그 학생 이름으로 장학기금을 만들었다. 모두 침묵으로 서로를 위로했다. 교회는 큰 아픔을 이겨내면서 성숙했다. 난 감전으로 심장과 머리를 다쳤다. 입원 중이었지만 유가족을 방문하러 몰래 병원을 빠져 나갔다. 진심으로 위로했다. 아이의 가족들은 도리어 날 위로했다.
그 일을 겪으면서 난 견고해졌다. 목사로서 첫 출발하던 해에 겪은 이 일이 일생동안 나를 든든히 세워줬다.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목사가 흔들리면 안 된다는 것, 또 깊은 상처를 입은 교우가 있다면 진심으로 위로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최 목사님의 사랑을 통해 ‘내리 사랑’의 힘을 체험했다. 35세 젊은 나에게 덕수교회 강단이 맡겨졌다. 두렵고 떨리던 순간 이 생각이 난 건 어떤 일이 있어도 교회를 지키고 교인들을 목양하겠단 다짐이 아니었을까.
***[역경의 열매] 손인웅 (19) 장로들 도움으로 순탄한 목회 중 개발 소문이…
교회를 어디로 이전해야 하나 고민 중, 신문사서 “교회 부지에 사옥 짓고 싶다”
덕수교회 교인들이 서울 중구 정동에 있던 옛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 교회는 1983년부터 조선일보와 이전 협상을 시작했다.
신학대학원에 진학하던 1964년부터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던 곳이 바로 덕수교회였다. 그 세월이 13년이나 흘러 1977년이 됐다. 그동안 나는 교인에서 교육전도사와 전임전도사, 부목사를 거쳐 담임목사가 됐다.
매 주일 설교했고 심방과 목회계획들을 세워 나갔다. 젊었기에 용감하고 과감했다. 장로님들은 든든한 후원자가 돼 주셨다. 젊은 목사의 목회를 항상 지지해 주셨다. 오랜 세월 목회하면서 단 한 번도 당회 회의 중 큰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만큼 덕수교회 당회는 화해와 화합의 공간이었다.
78년 1월부터 교육관 건축을 위한 헌금을 시작했다. 어렵게 건축헌금에 참여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성도들은 자기 일처럼 적극적으로 응답해 주셨다. 그렇게 모아진 헌금이 1억원이었다. 이듬해인 79년 9월 기공예배를 드렸다. 담임목사가 되자마자 시작했던 교육관 건축은 80년 4월 마무리 됐다.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의 아담한 건물이었다. 이곳에선 교회학교 학생들과 대학생들의 예배와 모임이 끊이지 않고 열렸다. 젊음이 가득한 공간이었다.
83년이 되자 동네에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교회 주변이 도시개발 구역으로 정해진다는 이야기였다. 당시 정동은 주택과 사무용 빌딩이 섞여 있었다.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조용한 동네였다. 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개발로 정동의 풍경은 많이 달라졌다.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하는 건물은 교회와 이웃하고 있던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정도다.
개발 소식은 교회에겐 악재였다. 교육관도 짓고 교인도 지속적으로 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교회가 당장 철거될 처지에 놓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다만 동네 구석구석에서 공사가 시작되면 아무래도 좋지 않은 영향을 받을 게 분명해 보였다.
‘교회를 이전해야 하나. 이전하면 어디로 가야 하나. 재정도 충분하지 않은데….’ 교회를 바라보며 수없이 고민했다. 쉽게 답을 얻을 순 없었다. 그러던 중 뜻밖의 곳에서 연락이 왔다.
“안녕하세요, 목사님. 조선일보입니다. 뵙고 상의 드릴 일이 있어 연락 드렸습니다.”
조선일보가 우리 교회에 무슨 볼 일이 있을까. 교회를 찾아온 직원은 놀라운 제안을 했다. 교회 자리에 신문사 사옥을 짓고 싶다는 게 아닌가. 교회 부지를 사겠다는 말이었다. 곧바로 장로님들께 알렸다. 장로님들이 온 동네를 다니며 수소문해보니 이미 교회와 담을 맞대고 있던 주택과 변호사 사무실로 쓰던 빌딩이 모두 조선일보에 매각된 뒤였다. 대충 보니 우리 교회가 사옥 예상 부지의 한 가운데에 위치해 있었다.
교회를 이전할 생각까지 하던 상황이라 신문사의 제안에 마음이 쏠렸다. 하지만 교회의 앞날이 걸린 일이니만큼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최대한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협상에 임하기로 했다. 장로님들도 교회에 유리한 결과를 이끌어 내자고 의기투합했다. 교회는 당시 국회의원과 기업 대표로 계셨던 장로님들과 함께 협상팀을 꾸렸다. 신문사 쪽에선 방상훈 당시 전무가 책임자로 정해졌다. 교회와 신문사 모두 각자의 운명이 걸린 협상에 나섰다.
***[역경의 열매] 손인웅 (20) 구석구석 답사 끝에 성북동 교회 시대 열어
이미 계약된 땅 해약 시켜가며 확보… 많은 장로·권사들 노력의 결실
서울 성북구 성북로 덕수교회 예배당 전경. 교회는 1984년 이전을 완료하고 85년 11월 봉헌예배를 드렸다.
덕수교회 담임목사가 되면서 한 가지 원칙을 정했다. 당회에서 다루는 모든 안건을 만장일치로 결정하자는 것이었다. 화합에 방점을 찍고 목회를 하자는 다짐이었다. 교회 이전도 당회에서 만장일치의 지지를 얻어 시작했다. 이 전통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새로 지은 교육관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새 건물을 버려야 한다는 사실이 믿기질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인이 늘면서 본당이 좁아졌다. 본당을 다시 짓기엔 전체 부지가 너무 좁았다. 교회의 미래를 생각하면 이전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조선일보와의 협상은 어려운 가운데에도 순항한 편이었다. 그나마 대화가 진전됐던 건 양측의 필요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교회가 이전할 장소였다. 서초구 예술의전당 앞을 비롯해 방배동도 가봤다. 삼성동과 잠실이 만나는 곳은 매우 유력한 부지로 떠올랐다. ‘리버사이드교회’라고 이름까지 잠정적으로 정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너무 시끄러웠다. 강북에선 평창동의 한 기도원이 관심을 끌었다. 이곳은 교통이 좋지 않아 무산됐다. 서울 구석구석에 땅이 나왔다는 소식이 들리면 모든 곳을 답사했다. 혼자 결정할 수 없는 일이다보니 장로님들과 늘 동행했다. 모이는 것 자체가 일이었다.
그럼에도 모두가 교회의 미래를 생각하며 솔선수범했다. 조선일보도 우리의 이전을 적극 지원했다. 지금보다 넓은 부지를 확보해야 한다는 데도 공감했다. 그러다가 성북동(현 성북로)에 살던 오춘희 권사님 가정에 심방을 가게 됐다. 오 권사님 부부는 성북동 고급 주택가를 개발한 분이었다. 누구보다 동네를 잘 알고 계셨다. 성북동 골짜기에 들어서는데 뭔가 느낌이 좋았다. 무엇보다 조용한 환경이 마음에 들었다. 숲속에 들어온 듯 했다. 한때 바랐던 전원교회의 모습이 그려졌다. 권사님께 대뜸 이렇게 말했다. “권사님께서 이 지역을 잘 아시니 혹시 2000평만 구해 주실 수 있으실는지요.” 알아보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권사님은 곧바로 동네 복덕방 사장들을 집으로 초대해 땅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하셨다. 이후엔 우여곡절의 연속이었다. 한 기업 회장이 살던 집이 물망에 올랐다. 하지만 마침 이 집은 다른 사람과 계약이 된 뒤였다. 권사님 부부가 찾아가 다른 땅을 주고 해약까지 해 확보하셨다. 이 집을 산 덕분에 덕수교회가 성북동으로 이전할 수 있게 됐다. 권사님 가정이 교회 이전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정말 많은 고생을 하셨다.
부지를 완전히 매입하기 전 교인들의 의견을 물어야 했다. 1983년 11월 23일 공동의회를 열고 이전을 결의했다. 부지 매입은 이틀 뒤인 25일에 했다. 새 예배당을 건축하기에 앞서 당회는 정동 예배당의 느낌을 최대한 살려 건축하자는 뜻을 모았다. 건축 중엔 경신고 강당에서 예배를 드렸다.
교회는 85년 11월 10일 봉헌했다. 성북동 시대가 열린 것이었다. 교회는 1984년 대한민국건축가협회 작품상도 수상했다. 조선일보와의 협상은 양측 모두가 좋은 결실을 맺어 상호 발전의 기회가 됐다. 지금도 서로 고맙게 생각한다. 교회는 성북동으로 이전한 뒤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아름다운 교회에서의 사역은 풍성한 결실로 이어졌다.
***[역경의 열매] 손인웅 (21) 교회 유치원 개설 등 마을 공동체로 자리잡아
노인학교·공부방 등 잇달아 설치, 주민들에게 한 걸음씩 다가가
손인웅 목사(왼쪽에서 다섯 번째)와 덕수교회 당회원들이 1987년 11월 서울 성북구 덕수교회 본당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윤종수 이구종 박종득 윤치영 장로, 손 목사, 김동한 김창희 장로.
새 예배당을 건축하고 모든 교우들이 감격스러워했다. 너무 아름다웠다. 이전 이야기가 나오고 불과 1년 만에 새 예배당을 만났으니 그 기쁨은 더할 나위 없이 컸다.
무엇보다 교회가 성북동의 분위기에 완전히 동화됐다. 원래 그 자리에 있던 건물 같았다. 성북동 초입에 있어 지역사회를 하나로 묶는 공동체의 중심이 될 수도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자연스럽게 사역의 방향이 주민들을 향했다.
교회를 봉헌한 이듬해인 1986년 초 교회 뒷산에 올랐다. 이 동산은 2017년 10월 덕수오색길로 새롭게 태어나 교인들의 큰사랑을 받고 있다. 당시엔 그냥 나지막한 동산이었다. 봄이면 온갖 꽃이 눈을 부시게 하고 가을이 되면 각양각색의 단풍이 눈을 즐겁게 하는 산이기도 하다. 그때는 길도 없어 만들어 가면서 다녔던 기억이 난다. 그곳에 올라 고개를 들어 길 건너편 언덕을 보면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부촌이 펼쳐졌다. 지금도 그렇다. 그야말로 대궐들이었다. 교회 건너편이 흔히 말하는 ‘성북동 부촌’의 초입이다.
하지만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위태롭게 서 있는 민초들의 삶의 자리가 펼쳐졌다. 지금은 그렇지 않아도 그 시절 성북동의 빈부격차는 상상을 초월했다. 상반된 광경을 보며 항상 기도했다. “주님, 덕수교회의 사명을 보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마을을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로 만들어 주세요. 그 일에 우리 교회를 사용해 주옵소서.”
기도를 하면 할수록 교회가 주민들과 호흡하기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첫 출발은 유치원이었다. 어느 날 산책을 하다 한 젊은 엄마가 아이들을 데리고 다급하게 내 옆을 지나간 일이 있었다. 처음엔 무심결에 지나쳤다. 그런데 그런 어머니들이 여럿 눈에 띄는 게 아닌가. 교회 직원들에게 물어보니 혜화동에 있는 유치원에 가는 길이라고 했다. 동네에 유치원이 없어 먼 곳까지 다닌다고도 했다.
86년 3월 10일 덕수유치원이 개원한 이유다. 마침 교회 창립 40주년이 되는 해였다. 여러모로 의미 있는 결정이었다. 유치원은 명문 교육기관으로 성장했다. 지역의 어린이들이 모두 거쳐 간 곳으로 지금도 “나 덕수유치원 출신이야”는 말이 통용될 정도다.
유치원을 시작으로 교회는 다양한 사역에 참여했다. 89년 3월엔 사회봉사관 부지를 마련했고 그해 10월엔 덕수노인학교와 덕수공부방을 개설했다. 교회는 조용한 주택가에 웃음을 전하는 공동체로 자리 잡아 갔다.
사역을 확장해 나가던 90년 11월 23일 내 인생의 멘토인 최거덕 원로목사님이 세상을 떠나셨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장을 지내신 최 목사님의 장례는 ‘총회장(葬)’으로 치러졌다. 가슴이 뚫린 듯 허전함이 밀려 왔다. 교인들도 최 목사님을 추억하며 그리워했다.
추모의 시간 중에도 사역은 이어졌다. 91년 11월 사회봉사관을 준공했다. 한 걸음 더 주민들에게 다가서는 계기가 됐고 92년엔 덕수어린이집을 개원했다. 이듬해엔 지역공동체생활교육원을 개원했고 주민들 사이에 소통을 위해 지역신문인 ‘성북골’도 창간했다. 성북동 사역의 초기, 덕수교회를 상징하는 시설 중 하나인 일관정을 만났다. 정말 우연한 기회에 교회의 품으로 들어왔다.
***[역경의 열매] 손인웅 (22) 수도회서 ‘일관정’ 매입… 사랑받는 공간 변모
처음 17년 동안은 사택으로 사용… 대대적 보수 거쳐 영성훈련원으로
덕수교회 끝자락에 있는 일관정 전경. 이 집은 1986년부터 2000년까지 손인웅 목사가 사택으로 사용하다 보수공사 후 영성훈련원으로 탈바꿈했다.
덕수교회는 우리교회 김한근 장로가 설계하셨다. 정동 예배당의 이미지를 잘 살려낸 명작이었다. 김 장로는 덕수교회를 설계한 뒤 전국의 20여 교회를 설계했을 정도로 유명세를 탔고 훗날 한국건축가협회 회장도 지내셨다.
그래서인지 새 교회는 더욱 각별했다. 어느 날부터 교회와 담장을 맞대고 있는 오래된 한옥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동네 어른들을 만나 누구 소유의 집인지 넌지시 여쭤봤다. 그랬더니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소유라고 하는 게 아닌가. 교회 건너편에 지금도 있는 복자수도원을 운영하는 곳이었다. 그 길로 찾아가 신부님을 만났다.
“신부님, 수도원 건너편에 있는 덕수교회 손인웅 목사라고 합니다. 저희 교회 끝에 있는 한옥에 관심이 많습니다. 혹시 파실 수 있으신지요.”
어렵게 말을 꺼냈는데 의외로 쉽게 답이 돌아왔다. “저희도 관리가 어려워 고민 중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1986년의 일이었다.
교회는 한옥 누마루에 붙어있던 ‘일관정’(一觀亭)을 이름으로 사용하기로 했다. 이 집의 정식 명칭은 ‘성북동 이종석 별장’(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10호)으로 1900년대 초반 집을 지었던 이종석의 이름을 땄다. 이분은 보인학교를 설립하신 분이었다. 시간이 흘러 이 집은 소설가 이태준, 시인 정지용 이은상, 수필가 이효석 등이 문학 작품 활동을 했던 유서 깊은 공간이었다.
교회는 이 집을 사택으로 사용하도록 허락해 주셨다. 이곳에서 우리네 식구는 17년을 살았다. 하지만 애초에 여름별장으로 지어진 집이다보니 조금만 쌀쌀해져도 냉골이 됐다. 난방은 되지 않았다. 겨울에 너무 추워 온 가족이 교회로 뛰어간 것도 여러 번이었다. 오래된 집이다보니 벌레도 많았고 천장에선 쥐가 뛰어 다녔다. 따로 사택을 마련하기에는 교회 재정이 넉넉하질 않았다. 물론 살다보니 점점 정겨워졌다.
이 집에선 2000년까지 살았다. 2003년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거쳐 이듬해 추수감사주일에 재개관했다. 보수공사 후 모두가 사랑하는 공간으로 변모했다. 지나던 손님들도 많이 찾아 한참 동안 앉았다 가곤 한다. 교회는 이곳을 영성훈련원으로 사용한다. 교회학교 학생들은 한옥체험도 한다. 덕수유치원 원생들은 이곳에서 다도(茶道)를 배운다. 무엇보다 교회에서 결혼식이 열리면 이곳이 폐백실로 사용된다. 덕분에 전국에 소문이 났다.
일관정과 관련해 특별한 에피소드가 있다. 1987년 교회 정명훈 집사님이 세종문화회관에서 연주회를 열며 날 초대했다. 그때 아들 조훈을 데리고 갔다. 연주회 전 우연히 주변을 둘러보니 뒤편에 김수환 추기경이 혼자 앉아 계셨다.
“조훈아, 저기 김 추기경과 자리를 바꿔주겠니. 가서 이 자리로 모셔라.” 그래서 김 추기경과 나란히 앉아 대화를 했다. “추기경님, 덕수교회 손인웅 목사라고 합니다.”
그러자 바로 “아니, 여기서 만나네요. 사실 새 교회 부지 전체를 매입해 복자수도원과 구름다리로 연결하려 했습니다. 너무 아깝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한 번 만나려 했습니다. 혹시 저희에게 다시….”
추기경님도 아쉬운 마음에 하신 말씀이었다. 하지만 그날 연주회 중간 중간 추기경님과 일관정을 주제로 많은 대화를 나눈 게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그 덕분인지 교회는 이웃한 길상사나 복자수도원과 많은 교류를 하고 있다. 일관정이 그 중심이다.
***[역경의 열매] 손인웅 (23) 복지문화센터 등 건립 지역사회 사랑방 역할
주민과 친밀, 마을 목사로 사역 보람…종교 간 화합 이뤄 연합바자회도 열어
손인웅 목사가 지난 9월 서울 성북구 덕수복지문화센터의 어르신 주간보호시설을 방문해 대화를 나누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
덕수교회의 사계절은 아름답다. 그중에서도 단풍이 드는 가을엔 어느 곳을 쳐다봐도 걸작이다. 그 가운데 있는 일관정은 아름다움에 품격을 더해주는 공간이다. 미담도 많이 나왔다.
우리교회와 한국교회의 사회봉사 사역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교인들의 영성도 깊어졌다. 그중에서도 지역사회 종교 간 화합의 장이 된 일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교회 길 건너편엔 복자수도원이 있고 성북동성당도 가깝다. 교회 앞 도로를 따라 5분만 가면 길상사가 나온다. 한 동네에 있는 다른 종교인들이 모임을 가질 때도 종종 일관정을 사용한다. 그때마다 타 종교인들이 우리 교회 마당을 밟는 기회를 가졌다는 게 즐거웠다. 물론 내가 갈 때도 있다. 일관정에서의 모임을 통해 작지만 의미 있는 결실이 맺어졌다.
10여년 전의 일이다. “우리끼리만 모였다 헤어지지 말고 좋은 일 한 번 합시다.” 이러면서 의기투합했다. 그래서 시작한 행사가 바로 ‘3개 종단 연합바자회’였다. 평화로운 마을을 만들어 보자는 취지였다. 더불어 교회를 이 자리로 이전할 때부터 다짐했던 ‘하나님 백성 공동체’로 만들어 가는 데 중요한 여정이라 확신했다. 매년 10월이면 우리교회 목회자들, 신부님들, 스님들이 함께 모여 바자회 계획을 짠다. 당일이 되면 모두가 어울려 웃고 떠들며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이제는 주민들도 기다리는 행사로 자리 잡았다. 동네에 살다 이사를 간 분들도 찾아오는 축제가 됐다. 매년 여기서 얻는 수익은 3000여만원 수준인데 학생들 장학금으로 사용한다.
이런 모임은 내게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줬다. 덕수교회는 2006년 교회 맞은 편 골목에 연건평 3000㎡(약936평)의 복지문화센터를 지었다. 이 공간은 본격적으로 지역사회와 교회가 만나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2007년엔 어르신들을 위한 주간보호시설을 열었다. 지금 이곳은 어르신들에게 인기 만점인 명품 공간이 됐다. 지역공동체 교육원도 설립했다. 어린이와 청소년, 여성들을 위한 교육과정이 운영되는 곳이다. 종교는 관계없다. 하루 종일 주민들이 언제든 드나들 수 있는 사랑방이 된 것이다.
‘샬롬노인복지문화원’도 이곳에서 시작한 프로그램이다. 현재는 교회뿐 아니라 전국의 각 지역에서 ‘찾아가는 노인복지’를 실천하고 있다. ‘은솔 아카데미’도 진행된다. 은퇴한 목사들이 매달 모여 세미나도 하고 친교도 나누는 모임이다. 유경재 김종희 홍성현 목사 등 30여명의 은퇴 목사들이 모인다.
성북동으로 이사 온 직후 뒷동산에 올라 교회가 지역사회 공동체의 중심이 되게 해 달라며 했던 기도가 이렇게 성취된 것이다. 요즘도 교회 주변을 산책하면 주민들이 인사를 한다. 나도 반갑게 인사한다. 주변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 종종 대신 밥값을 내주는 분들이 계신다. 교인들이 대접하는 일이 많지만 주민들이 대접할 때도 꽤 있다. 감사할 것이 많은 삶이다. 이런 생각을 해 봤다. ‘난 덕수교회 목사이면서도 마을 목사로 사역했구나.’ 마을목회를 꿈 꿨던 작음 바람이 이렇게 결실을 맺었다.
***[역경의 열매] 손인웅 (24) 2005년 기독교사회복지엑스포 열자 10만여명 찾아
2007년엔 서해안 기름유출 사고 ‘서해안 살리기 교회봉사단’ 출범
손인웅 목사가 2005년 8월 서울광장에서 열린 제1회 기독교회사회복지엑스포 개회식에서 경과를 설명하고 있다. 손 목사는 당시 엑스포 조직위원장을 맡았다.
하나님께서는 이웃과 사회를 향한 그리스도인의 섬김과 봉사를 ‘산 제사’와 ‘영적 예배’로 여기신다. 야고보 사도도 구체적인 행동이 결여된 신앙을 ‘죽은 믿음’이라고 평했다.
성북동 골짜기에서 다양한 사회복지 사역을 시도했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지역 공동체에서 쌓은 노하우는 이후 ‘사회복지’ 사역을 확대해 나가는 데 자양분이 됐다.
2000년 들어서면서 교회들 사이에 사회복지사업을 함께하자는 공감대가 생겨났다. 지도자들의 만남은 결실로 이어졌다. 2002년 ‘한국기독교사회복지협의회’가 조직됐다. 이 일을 위해 많은 목회자들이 헌신했다. 옥한흠 김삼환 이영훈 오정현 목사님의 헌신이 돋보였다. 사실 한국교회 전체가 참여해 맺은 결실이었다. 목회자들과 사회복지학 전공 교수들 및 관련 학회, 교인들이 보탠 힘도 컸다.
나는 협의회의 초대 대표회장으로 심부름을 했다. 한국교회를 위해 봉사한 경험은 일생의 큰 보람으로 남았다. 협의회가 태동한 만큼 그에 어울리는 행사가 필요했다. 교회의 봉사 사역을 알리고 이를 통해 시민들과도 소통하며 사역의 영역을 확장해 나갈 필요성이 점차 커졌다.
지도부는 고민 끝에 사회복지엑스포를 열기로 했다. 대회장은 옥 목사님이 맡았고 나는 조직위원장으로 봉사했다. 이렇게 준비했던 첫 번째 기독교사회복지엑스포는 2005년 열렸다. 세미나 같은 학술행사들은 서울 영락교회에서 진행했다. 전시 부스는 시민들과의 접점을 확장하기 위해 서울광장에 마련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무려 10만명이 세미나와 전시 부스를 찾았다. 시민들은 한국교회의 사회복지 현황을 알게 됐고 협의회는 사회와 소통하자는 당초 목적을 달성했다.
첫 엑스포의 성공으로 지도부는 큰 자신감을 얻었다. 2회 행사는 2010년 서울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열렸다. 3회 행사는 2016년 서울광장에서 진행됐다. 2회 엑스포를 앞두고 연 기자간담회에서 했던 말이 생각난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과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란 말씀이 마태복음에 함께 있습니다. 겸손하게 봉사하면서도 선한 일을 널리 알리라는 선교적 의미를 담고 있는 구절들입니다. 이를 통해 교회들이 서로 네트워크를 하고 시민들과 소통할 수 있길 바랍니다.”
기독교사회복지협의회가 본격적인 활동을 펼쳐 나가던 2007년 12월에 서해안 기름유출 사고가 터졌다. 대재앙이었다. 당시 협의회 지도부는 긴급회의를 열고 대책을 논의했다. 그 결과로 ‘서해안 살리기 한국교회봉사단’이 출범했다. 훗날 한국교회봉사단의 모체가 되는 조직이었다. 기름을 닦아 내기 위해 현장으로 달려갔던 기독교인들의 구심점도 됐다.
무모한 도전처럼 보였지만 일일이 기름을 닦아낸 교회 지도자들과 교인들의 정성은 복구를 앞당긴 일등공신이었다. 봉사의 저력에 뿌리 내린 한국교회봉사단은 ‘섬기면서 하나 되고, 하나 되어 섬기자’는 기치 아래 10년의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어우러지면서 한국교회 사회복지의 든든한 반석이 됐다. 봉사를 통해 교회가 일치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한 기회도 됐다. 한국교회가 가야할 미래도 여기에 있다고 확신한다.
***[역경의 열매] 손인웅 (25·끝) 화해·일치 위해 노력했던 여정에 감사
한국장로교목회자협의회 등서 활동하며 연합운동, 무산됐던 연합기구 통합 꼭 이루길
손인웅 목사가 지난 23일 서울 덕수교회 일관정에서 못을 박아 만든 십자가 작품을 들고 희생과 겸손, 낮아짐을 통해 한국교회가 화해의 길로 나서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교회갱신의 결실은 연합과 일치다. 하나 됨이다. 1997년 10월 23일의 일이었다. 서울 사랑의교회 복지관에서 열렸던 한국장로교목회자협의회(장목협) 창립 기자회견에 나를 비롯해 전병금 옥한흠 윤희구 목사가 나왔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과 합동, 고신,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가 장목협에 참여했다. 상임회장은 옥한흠 목사였고 나는 공동회장 중 한명으로 봉사했다.
그날 이런 말을 했다. “주님이 오실 때까지 지상의 교회는 완벽할 수 없습니다. 지속적인 개혁과 갱신이 필요합니다. 각 교단마다 차이가 있지만 우리는 개혁과 갱신이라는 공통의 지향점이 있습니다. 이 모임이 교단들이 변화하는 출발점이 되길 바랍니다.” 그 자리에 함께한 목회자들의 뜻도 같았다. 함께 변화를 꿈꿨다.
13개월이 지난 98년 11월 16일 장목협은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한목협)로 외연을 넓혔다. 14개 교단이 참여했다. 내가 장목협 상임회장으로 있을 때였다. 90년대 말에 한국교회는 개혁과 갱신에 대한 갈망이 컸다. 그때 내건 기치가 ‘하나 되어(uniting) 거룩하고(renewal) 사랑하게 하소서(diakonia)’였다.
한목협 지도부는 흩어져 있던 교회연합기구를 하나로 합치기로 했다. 회원교단들도 동의했다. 98년 6월 16일 경기도 광주 소망수양관에서 열린 수련회에서 처음으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와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의 통합 추진이 선포됐다. 논의는 점차 구체화됐다. 2002년엔 한목협 주도로 ‘한국교회 일치를 위한 교단장협의회’(교단장협)가 태동했다. 본격적인 연합운동의 시작이었다.
교단장협과 NCCK, 한기총이 각각 6인의 대표를 파송해 18인 위원회를 구성했다. 나는 한기총 일치위원장 자격으로 회의에 참석했다. 논의는 빠르게 진전됐다. 3개 기관이 아홉 차례 회의를 가졌고 실무위원회는 열두 차례 모였다. 논의의 말미엔 3인 위원회로 압축됐다. 기구통합이 점차 가시화됐다.
통합 발표만 하면 될 상황까지 대화가 진전됐다. 2007년 11월 13일 연합을 위한 10차 공청회를 열기로 했는데 갑자기 이상기류가 감지됐다. 숨 고르기를 하자는 것이었다. 결국 공청회가 12월 13일로 연기됐다. 이걸로 끝이었다. 그날 늦은 저녁 옥 목사님을 찾아갔다. 보자마자 부둥켜안고 통곡했다. 화도 났다.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라는 안타까움이 컸다.
지금 돌아보면 화해와 일치를 위해 힘썼던 시간들이 한없이 그립다. 아쉬움도 크다. 끊임없이 갱신하고 자기와는 다른 상대를 섬겨야 한다. 자기 비움과 낮아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마땅히 해야 할 사명이다.
최근 교회 연합기구들의 통합논의가 다시 진행되고 있다.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다. 이 논의는 반드시 결실을 맺길 바란다. 보수기구들이 먼저 통합하고 NCCK와 대화해도 늦지 않다.
요즘 들어 옛 생각에 빠질 때가 많다. 삶의 자리를 하나하나 살펴본다. 화해와 일치를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던 여정이었다. 한국교회의 화해를 위한 중재자로서의 삶,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명이었다. 은퇴한 목사로서 늘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위해 기도한다. “주님, 교회가 하나 되게 하소서. 화해하고 일치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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