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마음이 번거로우면 세상이 번거롭고 마음이 맑고 깨끗하면 세상 또한 맑고 깨끗해진다.』고 하셨습니다. 또, 『과거에 게을렀어도 이제는 게으르지 않는 사람, 일찍이 자신이 지은 악업을 선업으로 덮은 사람, 그는 마치 구름 사이를 뚫고 나온 달처럼 세상을 비출 것이다. 마음이 번뇌에 물들지 않고 생각 생각이 흔들리지 않으며 착한 마음과 악한 마음을 초월해서 깨어있는 사람에게는 그 어떤 두려움도, 무서움도, 겁냄도 없으리라.』고 하셨습니다.
통도사 설법전(通度寺 說法殿) 마룻바닥 교체 불사(佛事)를 회향(廻向)하면서 되새겨본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함께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 통도사 설법전의 나무마루가 제가 주지 소임을 맡고 이 불사를 추진함으로 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깝게는 월하(月下) 대종사(大宗師)께서 통도사 방장(方丈)으로 계실 당시 방장스님과 소임스님들의 원력(願力)으로 설법전이 세워졌기 때문이요, 멀게는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 당시 자장율사(慈裝律師)께서 영축산문(靈鷲山門)을 여셨던 지중한 인연의 결과입니다. 거기에다 현재 통도사에 살고 있는 대중과 불자여러분의 불심(佛心)이 함께 어우러져 꽃을 피웠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지중(至重)한 인연(因緣)이 모이고 모여 이 불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생각을 하니, 더욱이 이 불사에 직? 간접적으로 동참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이 영광과 기쁨을 돌려드리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서두에서 말씀드린 부처님의 법문이 새삼 머릿속에 되새겨졌습니다.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는 버릇과도 같은 다짐을 했습니다.
누구나가 어떤 일을 수행할 때는 스스로 옳고, 바르고,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하겠지만, 기왕에 하려면 시주(施主)를 하든, 보시(布施)를 하든, 공양(供養)을 올리든, 봉사(奉仕)를 하든 어떤 일을 하더라도 조건 없이 하자. 주어도 준다는 생각 없이, 주었다는 생각 없이, 받을 것이라는 생각 없이, 삼륜(三輪)이 청정(淸淨)한 일들을 해보자. 첫째, 스스로 발심(發心)해서 해야 하고, 둘째, 상대가 원하기 때문에 해야 하며, 셋째, 남을 가르치기 위해서 해야 한다.
지장보살(地藏菩薩)님이 왜 지장보살입니까? 춥고 배고프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심지어 옷까지 다 벗어주고 결국 알몸으로 다닐 수가 없어서 땅에 몸을 묻었다고 해서 지장입니다. 또 왜 관세음(觀世音)입니까? 세상의 음성을 좋은 소리든, 싫은 소리든, 기쁜 소리든, 천수천안(千手千眼)으로 다 듣고 살핀다고 해서 관세음입니다. 그래서 밝은 눈으로 비춰보지 못할 것이 없고 밝은 귀로 듣지 못할 것이 없는데, 굳이 무엇 때문에 자기 이목만을 고집해서 미혹에 빠져듦을 자초하려 드는 것입니까? 보고 듣고 느낀 대로 표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즉, 세상 사람들의 이목(耳目)을 자신의 이목으로 삼을 줄 아는 지혜(智慧)가 있어야 합니다.
대만에 가면 육신보살(肉身菩薩)로 추앙받는 청엄(淸嚴)스님과 자항(慈航)스님이라는 대조적인 두 스님이 계십니다. 그 중 청엄 스님은 평생을 염불선(念佛禪)을 하셨는데, 신도들이 가져다주는 것을 거절한 채, 최소한의 양식으로 최대한의 삶을 살기 위해서 노력하신 분입니다. 지붕이 새는 것도 방치할 정도로 절 불사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백결선생(百結先生)처럼 사셨습니다. 그렇게 평생을 사셨던 스님은 열반(涅槃)하기 1년 전에 “자신이 죽게 되면 옹기장(甕器葬)을 해야겠다.”고 결심을 하고 스스로 옹기를 만드는 곳을 찾아가 자신이 들어갈 옹기를 맞춘 뒤 가격까지 지불해놓았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내가 죽거든 중국(中國)의 전통양식으로 옹기장을 한 뒤 6년 후에 열어보라.”고 유언을 남기고 앉은 채 돌아가셨습니다. 제자들은 유언에 따라 스님을 항아리에 넣어 모신 뒤 만 6년 만에 항아리를 열어보았는데, 열반 할 때 입고 있었던 가사장삼(袈裟長衫)이 곰팡이 하나 안 나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육신보살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그러한 스님이 계셨던 사찰인데도 그 절은 지붕의 슬레이트가 다 깨져서 비가 오는 날은 줄줄 샐 정도로 열악한 환경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구룡사(九龍寺)에 있을 때 그 절인 해장사(海裝寺)와 교류를 했는데, 한 해는 슬레이트도 갈아주지 않던 그 절의 신도가 구룡사에 교류 성지순례(聖地巡禮)차 오면서 옥(玉)으로 조성된 관세음보살님 한분을 모시고 왔습니다. 저는 그 옥관음상(玉觀音像) 앞에 불전함(佛前函)을 놓은 뒤, 거기에 모인 불전을 모아서 다시 그 절로 답방 성지순례를 가면서 그 동안 불전함에 모인 불전을 가져다 불사에 쓰라고 드렸습니다. 그것이 불종자(佛種子)가 되어서 그 절도 큰절로 변모하게 된 계기를 마련해준 인연이 있습니다.
<대만 해장사에서 모셔온 옥으로 조성된 관세음보살>
반면 자항스님은 신도들이 가져다주는 재물은 한 푼도 쓰지 않고 꼭꼭 숨겨놓는 구두쇠였습니다. 절 밖에서 자항스님이 구두쇠라는 소식을 전해들은 한 도반(道伴)스님이 어느 날 자항스님을 찾아가서 자항스님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그동안 모아두었던 돈을 모두 가지고 사찰을 빠져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돈으로 가난하고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한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렇게 자항스님의 돈을 나눠주면서 그 스님은 “자항스님이 전해주라고 해서 왔다”는 말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 리 없는 자항스님은 도반스님을 원망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일이 있은 뒤 불자들이 자항스님을 꾸역꾸역 찾아와서 재물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보시행렬의 빈도가 갈수록 높아지더니 1년도 안 돼서 자항스님이 20년간 안 쓰고 모은 돈보다 더 많아졌습니다. 나중에 자초지종을 알게 된 자항스님은 크게 깨닫고 스스로 나눠주는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그로 인해 그 절은 사람들의 발길이 밤낮으로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루었으며, 나눠주면 나눠줄수록 오히려 절은 더 부자 절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 두 육신보살을 보면서 “복(福)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부처님께서 『함부로 다른 사람의 허물을 말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저는 두 스님의 허물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두 분 다 육신보살로 추앙받는 분이지만, 이러한 상반된 삶을 자신의 삶에 응용해서 잘 사는 방법을 찾아보라고 드린 말씀입니다.
언제부터인가 누가 저에게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라고 묻게 되면 “무재미로 살아.”라고 대답을 하곤 합니다. 살다보니까, 무색(無色) 무취(無臭) 무탐(無貪)…,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음을 보았기 때문에 그렇게 대답을 하곤 합니다. 끊임없이 변화되어가고 있는 그 존재(存在) 안에서 스스로 나라고 집착(執着)하고 고집했던 내가 본래 나눠질 수 없는 불일불이(不一不異)한 것인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존재하지도 않는 자아(自我)에 집착한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온갖 번뇌(煩惱)에서 벗어나고자하면 만족할 줄 아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야만 진정한 불자(佛子)라고 이름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대육신(四大六身)은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理)와 사(事)가 둘이 아닌 것처럼 이 속에 사가 들어있고 사 속에 이가 들어있습니다. 외호대중(外護大衆)이 있으니까 수행정진(修行精進)하는데 도움이 되고 바깥에서 울타리를 해주니까 한 가정이 따뜻하고 편안하고 숨통이 트이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없거나 아버지가 없으면 그 집안에 누군가가 또 그 몫을 해야 집안이 편안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을 한쪽에 치우치거나 매이거나 집착해서 제대로 못 본다면 안 될 일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병들고 늙고 죽는 것을 세월 탓으로 돌리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관념(觀念)일 뿐입니다. 죽는 것은 바람 따라 죽는 것입니다. 숨 안 쉬면 죽는 것입니다. 병든 것은 불기운이 제 마음대로 놀아서입니다.
또 어리석은 사람은 도(道)는 닦지 않고, 수행정진은 하지 않고, 복 닦는 걸 도 닦는다고 합니다. 보시와 공양의 복이 아무리 많아도 마음속에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쉬지 않으면, 원망하고 미워하고 시기(猜忌)하고 질투(嫉妬)하고 권모술수(權謀術數) 쓰고 수단방법(手段方法) 가리지 않는 이런 생각들을 쉬지 않으면, 그 사람은 도를 닦는 것이 아닙니다. 모래로 밥을 짓는 격입니다.
내가 거둬들이고 내가 쉬어야 합니다. 타던 불이 꺼져야 부글부글 끓던 물이 잠잠해지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