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민족통일을 바라는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김덕신
<환단고기>을 중심으로 고고학적 내용과 함께 단군조선을 기술해 보았습니다.
|
|
② 가림토 문자는 훈민정음의 원형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가림토 문자는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한글의 원형이다. 그리고 근세조선 시대 세종 때에 이르러 훈민정음(訓民正音) 28자로 재창제 되었으며, 최근에는 주시경 등에 의해 24자로 재정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가림토는 단군조선의 강역이었던 일본에도 전해져 신대문자(神代文字)인 아히루(阿比留)문자가 되었다. 또 가림토 문자는 단군조선의 분국이었던 몽고로 건너가 "파스파"란 고대문자가 되었으며, 배달국의 분국이 있었으며 그 후예들이 살고있는 인도로 건너가 산스크리스토 알파벳과 구라자트 문자의 원형이 되었다.
▶ 가림토 문자 창제동기
단군조선 제3대 갸륵단군 경자2년(B.C, 2181년)에 갸륵 단제께서 하신 말씀은 다음과 같다. "아직 풍속은 하나같지 않았다. 지방마다 말이 서로 틀리고 형상으로 뜻을 나타내는 진서(眞書)가 있다해도 열 집 사는 마을에도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백리 되는 땅의 나라에서도 글을 서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에 삼랑 을보륵에게 명하여 정음 38자를 만들어 이를 가림토(加臨多)라 하니 그 글은 다음과 같다." (한단고기 - 단군세기편)
▶ 훈민정음 재창제의 증거
① 언문은 모두 옛 글자를 본받아 되었고, 새 글자는 아니다<非新字也>. 언문은 전조선 시대에 있었던 것을 빌어다 쓴 것이다. (세종실록 103권 ; 세종 23년에 발표한 글)
② 이 달에 상감께서 친히 스물여덟자를 지으시니, 그 자는 고전(古篆)을 모방한 것이다.(세종실록 25년 ;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첫 발표문)
③ 언문은 모두 옛글자를 근본삼은 것으로 새로운 글자가 아니며 곧 자형은 비록 옛날의 전문을 모방했더라도 용음과 합자가 전혀 옛것과 반대되는 까닭에 실로 근거할 바가 없는 바입니다. (한글 재창제를 반대하는 최만리와 당대 유학자들의 집단 상소문 중에서)
▶ 해외에 남아있는 가림토 문자의 흔적들
그러나 가림토 문자의 흔적들은 한단고기 뿐 아니라 일본, 인도, 몽고 등 단군조선의 강역이었던 나라들에 풍부하게 남아 단군조선 시대와 그 영향력을 지금도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다. 다만, 우리만 가림토 문자의 존재를 공식화하지 않고 있을 따름이다.
▶ 일본의 신대(神代)문자
일본에는 한글을 닮은 고문자가 있다. 대마도의 아히루 가문에서 전해져왔기 때문에 아히루 문자라고 하며 신들의 시대에 신들이 쓰던 문자라 해서 신대문자라고 한다.
신대문자는 지금도 일본 대마도 이즈하라 대마역사 민속자료관과 일본의 국조신인 천조대신을 모신 이세신궁 등에 아직 보관되어 있다.
일본 이세신궁에 소장된 신대문자의 기록은 서기 708년의 유물이다. 서기 700년 무렵은 대조영이 고구려 멸망 후 발해를 건국했을 무렵이며, 세종대왕은 1446년에야 훈민정음을 창제했다.
단군조선 시대가 신화였고, 가림토 문자도 한단고기에 나왔으니 믿을 수가 없다고 전제한다면, 1446년의 훈민정음에서 708년의 신대문자가 나왔다고 말할 수는 없고, 그렇다면 일본의 신대문자에서 훈민정음이 나왔는가?
실제로 일본의 오향청언(吾鄕淸彦 고쿄 기요히코)이란 학자 등도 708년의 신대문자의 유물을 증거로 들면서 "일본의 신대문자가 조선으로 건너가 훈민정음을 낳게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한단고기가 세상에 나오고 그것을 연구한 결과, 자신의 "일본의 아히루 문자가 조선 훈민정음의 뿌리다."는 주장을 철회하고 "신대문자의 원형인 원시한글이 한단고기에 수록되어 있다."고 인정했다.
일본의 천황가 자체를 비롯, 일본이 단군조선이래 한국인이 건너가 세운 나라라는 것은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을 뿐 일본인들에게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그것을 인정하기를 기본적으로 꺼릴 뿐 아니라 오히려 기회만 있으면 거꾸로 왜곡하려고 애를 써왔다. 그런데 그런 풍조 속에서 일본의 학자가 그때까지 자신의 주장을 뒤엎고 가림토 문자에서 일본의 아히루 문자가 나왔고 그 뿌리임을 학자적 양심으로 인정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정통 사학계와 국어학계에서는 아직도 "훈민정음이 세종대왕 혼자서 만들었는지 신하들과 함께 만들었는지" 논쟁 중인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가림토 문자는 단군조선의 역사적 실제를 입증해준다. 단군조선이 있었다면 단군할아버지도 실제하셨던 민족의 조상임을 믿을 수 있고, 가림토 문자가 발견되는 곳은 단군조선의 강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단군조선의 가림토가 일본에 보급되어 아히루 문자가 된 것이다.
(5) 문화와 교육
▶ 천문역법
단군조선에도 태음력(太陰曆)과 태양력(太陽曆)에 의한 달력이 있었다. 2대 부루단제 12년(B.C. 2229년)에 신지 귀기가 칠회력(七回曆)과 구정도(邱正圖)를 만들어 바쳤다.
5대 구을단제 4년(B.C. 2096년)에는 처음으로 갑자(甲子)를 세수로 세는 육십갑자(六十甲子)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19대 구모소단제 54년(B.C. 1382년)에는 지리숙이 태양을 중심으로 달과 별이 그 궤도를 한 바퀴 도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태양력인 주천력(周天曆)과 팔괘상중론(八卦相重論)을 저술했다.
▶ 단군조선의 노래
2대 부루단제 때의 어아가(於阿歌), 16대 위나단제 때의 애한가(愛桓歌), 34대 오루문단제 때의 도리가(兜里歌)등이 즐겨 부르던 노래이다.
▶ 저술
3대 가륵단제 6년(B.C. 2177년) 신지고결의 배달유기(配達留記 : 최초의 역사서)
19대 구모소단제 51년(B.C. 1385년) 목아득의 우주원리론, 40세 달음단제 때 윤지복의 도덕경
42대 을우지단제 때 백호돈의 지리학(地理學)과 광물학(鑛物學)
43대 물리단제 때 장자학의 설명학(說明學)
44대 구물단제 때 최화덕의 동물학(動物學)과 식물학(植物學), 서백원의 태양-태음-소양-소음의 사상의학(四象醫學), 황운헌의 백과서(百科書), 류종득의 이재학(理財學), 적우순의 심리학(心理學)
45대 여루단제 때 장소부의 의학대방(醫學大方), 홍문선의 태학조문(太學條文), 조대휴의 자본론(資本論)
47대 고열가단제 때 소정국의 건축학(建築學), 구로선의 종수학(種樹學)
▶ 단군조선시대의 교육
단군과 신하들의 관계는 스승과 제자들이었으며, 백성들은 단제를 깨달으신 성인으로, 한인 할아버지-한웅 할아버지-단군 할아버지로 이어지는 얼의 어버이로 믿고 섬겨왔다. 그러므로 역대 단군으로부터 제자들로써 법(法)을 전수받고 100% 순종하는 마음으로 따랐기에 단군조선과 같은 방대한 신성제국이 2000년이 넘게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온 나라의 백성들 남녀노소 모두 신선도를 수련하여 몸과 마음을 닦았으며, 단군조선이란 나라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학교이자 수련장이었다.
▶ 단군조선 교육의 특성
단군조선시대에 이루어진 교육의 특성은 신선도를 전국민이 닦음으로써, 신성을 깨닫고 하늘과 통하는 종교교육과 지덕체를 연마하는 사회교육이 한꺼번에 이루어질 수 있었다는데 있다. 그래서 제천행사를 주관하는 성소(聖所)인 소도(蘇塗)옆에는 교육기관인 경당이 함께 설치되어 청년들을 교육시켰다.
▶ 교육제도
나라의 인재를 양성하는 제도로 국자랑(또는 천지화랑)이 있었으며, 화랑의 총사령관이 국선(國仙)이었다. 제천기간 동안에는 화랑들이 하늘에 제를 지내는 소도의 행사를 주관하였으며, 평소에는 소도가 화랑들의 회의장소로 쓰여졌다. 이렇듯 단군조선시대 교육의 역할을 담당했던 기관으로는 소도, 국자랑, 경당 등이 있었으며, 14대 고불단제 때(B.C. 1670년)는 국립대학이 설치되었다.
▶ 소도(蘇塗)
소도에서 지내는 제천(祭天)행사와 의식은 곧 고구려를 교화하는 근원이 되었다. 그로부터 어려운 일이 있을때는 힘을 합하고 이웃을 위하여 있는 이와 없는 이가 서로 도와 문명한 나라를 이루고, 개화 평등하여 온 세상에 제사의 예를 숭상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소도가 세우지면 그 안에서는 계를 지켜야하는데 바로 충(忠) 효(孝) 신(信) 용(勇) 인(仁)의 오상(五常)이며 천지화랑들의 계명이기도 했다. 소도의 곁에는 반드시 교육기관인 경당이 세워진다.
|
(6) 단군조선의 강역
단군조선의 영토는 치대 캄차카반도, 연해주를 비롯한 시베리아, 만주, 한반도와 제주도, 일본, 몽골, 티베트와 중국의 중동부(하북성, 하남성, 산동성, 안휘성, 강소성, 절강성, 산서성, 섬서성, 감숙성, 호북성, 호남성 등)까지, 그리고 최소 만주대륙 전체와 한반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동북아시아 대륙을 대통일한 민족국가였던 것이다.
단군왕검은 천하의 땅을 삼한으로 나누어 다스렸으며, 삼한은 5가(加) 64족(族)으로 이루어졌다. 삼한은 진한, 마한, 변한을 말하며, 진한은 단군왕검께서 직접 다스리셨고, 마한은 고시씨의 후손인 옹백다를, 번한은 치우천황의 후손인 치두남을 봉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7) 단군조선의 대외관계
① 중국과의 관계
단군조선 시대에 요나라를 비롯한 역대왕조는 모두 단군조선의 도움을 받으며 성장했고 당연히 친선관계에 있었다. 조선은 자비와 의로움(仁義)로써 주변국들을 대했으며, 항상 아낌없이 도움을 주었다.
시대적으로 요-순-하-은-주나라로 왕조가 바뀌어갔으나 이 국가들이 모두 중국의 한족(지나족, 서토족, 하족)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며, 대부분 동이족의 국가가 많았으므로 현재 중국 한족의 시조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 나라들은 지도층에 불의한 일이 있어 민심을 얻지 못하고, 살기가 어렵게 되면 멸망의 길은 걸으며, 여러 왕조가 바뀌어갔다. 중국 역사상 3백년 이상 지속된 나라가 없었다.
최초의 봉건국가로 알려져 있는 주나라는 단군조선의 체제를 모방해 여러 봉토를 왕실의 친척에게 나누어주고, 공·백 등의 작위를 주어 제후로 다스렸다. 그러나 단군조선의 경우 단제께서 성인(聖人)이었으며, 동시에 제후들과 신하들의 스승이기도 하여 군신간에 절대적인 믿음으로 연결된 관계였었기에 한 나라가 2천년이 넘게 유지될 수 있었다. 이와 달리 주나라의 제후들은 그러한 신뢰들이 없었으므로 세월이 흐르면서 왕실을 무시하고 다른 욕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주나라는 270여년 만에 멸망하고 수많은 나라들로 분열, 마침내 춘추전국 시대로 들어가게 된다.
그들은 서로 전쟁을 벌이면서 이합집산을 계속하다가 뿌리 국가인 단군조선을 침범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전국시대의 7개 국가중 가장 동쪽에 위치했던 연나라와 제나라가 주로 조선에 도발을 하였다. 그러나 한번 조선을 침략하면 그들 국가의 수도까지 함락당하는 등 철저하게 응징당하는 것이 통례였다.
그런데 단군조선이 멸망하고 조선이 열국으로 분열하여 힘이 급속도로 약화되어 갈 때, 반면 중국은 주로 200년 주기의 왕조의 변화 속에서 팽창을 계속하게 되었다. 이 왕조들도 한족(漢族) 만의 역사가 아니라, 동이계열이나 거기서 갈라져 나간 유목민족의 왕조가 많았다. 중국역사는 한족에 의한 왕조와 동이족 출신 유목민족에 의한 왕조<연(燕), 수(隨), 위(魏), 원(元), 금(金), 청(淸) 등> 간의 투쟁사였다고 말할 수 있다.
② 주변국과의 관계
캄차카반도, 연해주를 비롯한 시베리아, 만주, 한반도와 제주도, 일본, 몽골, 티베트와 중국의 중동부에 이르는 동북아시아 대륙 전체를 장악하고 있던 단군조선은 그 영토의 크기만큼 주변국과의 크고 작은 관계도 활발하였다.
몽고, 말갈, 흉노, 선비, 돌궐(투르크)등 모두 동이의 혈통에서 갈라져 나갔으며 각 지역의 토착종족들과 문화와 혈통이 섞이면서 근본을 잃어버리고 야만화되었다. 그러나 단군조선은 넘볼 수 없는 뿌리의 나라요, 스승의 나라였다.
기준으로 지구촌 곳곳에 정신문명을 전파하여 스승의 역할을 해왔고, 그렇게 면면히 이어진 전통이 찬란하게 꽃피운 나라가 단군조선이었다. 이렇듯 모든 것이 천도(天道)에 기준을 두고 행해졌던 아주 특별했던 나라였으며, 그것이 바로 오늘날에도 적용될 수 있는 강대국의 모범이었다.
▶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의 기원
전체적으로 볼 때 단군조선 2천년의 역사 가운데 24회의 대소전란과 군대파견이 있었다. 그중 외국과의 싸움이 14회가 있었는데, 그것도 대부분 무도한 나라에 대한 징벌이요, 침략에 대한 응징이었다. 그러나 백년에 한번 꼴로 전란이 있었다는 이야기이며, 단군조선의 폐관이래 지금까지 2천년간 1000여회의 외침과 전란이 있었다니, 단군조선 시대가 얼마나 태평성대였는지 알 수 있다.
(8) 여러 민족과 각국의 기원
▶ 티벳
배달국 15대 치액특천왕은 티베트 즉 치액특에 신선도를 전해주었으며, 티벳의 신선도가 인도로 전해지고 힌두교의 사상이 합쳐져 불교가 탄생하게 된다. 티벳(西藏)의 수도는 장당경으로, 치우천황 때부터 8백년간 티벳을 직접 통치하였다고 한다.
(일붕 서경보 박사의 증언)
단군조선때에는 3대 갸륵단군 이래, 5대 구을단군, 22대 색불루단제, 43대 물리단군, 44대 구물단군(B.C. 425)까지 장당경으로 수도를 이전하는 등 긴밀한 관련이 있었다.
삼국유사에도 기원전 425년(44대 구물단제 무렵) 나라이름을 대부여라 바꾸고 수도를 장당경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다.
티벳의 신선도가 인도로 전해진 후 인도의 불교가 거꾸로 티벳에 전해져 티벳불교(라마교)가 되었으며, 그 라마교가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의 국교가 되어 다시 우리나라의 고려조에 들어왔다. 결국 근원을 따져보면 모두가 동족간의 교류였다.
▶ 몽고족
<한단고기>에서는 "4대 오사구단제 원년(B.C. 2137년), 큰아들 구을(丘乙)을 태자로 삼고, 아우 오사달(烏斯達)을 몽고지역의 왕으로 삼으니, 오사달은 몽고인의 조상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훗날 몽고의 부족장들이 테무진을 징기스칸으로 추대한 것은 1206년이며, 원나라는 한족의 송나라를 멸망시킨 후 1279년 인류역사상 전무후무한 세계최대의 제국을 이루었다.
※ 기타 : 말갈족(숙신, 읍루, 물길, 동예, 맥), 흉노족(연나라를 세움), 선비족(돌궐, 터키의 뿌리, 선비족의 후예가 수나라를 세움)
(9) 단군조선의 멸망
그런데 후단군시대에 접어들면서 세력이 커지게 된 장수들이 차츰 말을 잘 안듣게 되었고, 개인적인 욕망에 따라 이합집산하게 되었다. 고열가 단제때에 이르러서는 그 법통으로 연결된 끈이 없어져 버렸으며, 종래에는 멸망에 이르게 된다.
단군조선의 마지막 단군인 고열가 단제는 어질고 순하기만 하셨다고 기록은 말한다. 고열가 단제께서는 천시를 보신 후 때가 지났음을 알고, 영적인 눈으로 새로운 천시가 이천년후에나 이 민족에게 다시 돌아올 것을 보셨다. 그리고 사람들을 보시고는 "너무나 타락해서 고귀한 법을 전수해 줄 수 없다."고 하신 후 고열가 단제께서는 절망으로 통한의 가슴을 안은 채, 2천년 신선의 역사를 폐관하시고 아사달 산으로 들어가셨다.(B.C. 238년 3월)
본래 단군조선의 방대한 강역은 후기에 들어 진조선, 번조선, 막조선의 세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그중 진조선은 단군의 직할통치 구역이었고, 번조선·막조선은 비왕을 두어 간접통치 했었다. 진조선은 B.C. 238년 47대 고열가 단제의 폐관으로 문을 닫았다. 번조선은 B.C. 194년 동이족의 모습을 한 연나라 사람 위만의 책략에 멸망했다. 마지막 42대 기자인 기준은 배를 타고 한반도로 피신하여 목지국의 금마군으로 가서 마한이란 나라를 세웠다. 제가(諸家)들은 한반도의 월지로 건너가 나라를 세워 익산 마한이 되었다.
막조선은 B.C. 238년 35대 비왕 맹남을 마지막으로 진조선과 함께 막을 내렸다.
위만조선은 번조선의 마지막 왕 기준의 정권을 찬탈한 위만으로부터 3대 우거까지를 말하며 내부분열 끝에 한나라에 항복했다.
|
첫댓글 예전에 제가 이 주장을 수업 시간에 했다가 아무의 호응도 얻지 못했습니다.
제가 국어학을 전공하는 바람에... -_-;;
당시 제 주장에 대한 반론은 이랬습니다.
중국이 국호가 아니라 나라의 중심을 이른다면
'동국정운'에서 '동국'은 어디냐? 였습니다.
동국정운은 통일된 한자의 발음을 달기 위해,
즉 발음 기호로 활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책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동국은 과연 어디일까요?
중국이 나라의 중심이라면... 동국은 강원도입니까? 일본입니까?
-_-;; 전 다시 오리무중 속으로 빠집니다.
이방원이 이성계(조선의 중국, 명이라고도 함)에서 떨어져 나와 다스린 강역을
동조선(동국)이라 칭하였지 않았겠나? 하는 설이 있더군요.
일본유학시 NHK일본국내일기예보를 보는데 뜬금없이 중국날씨라며 예보를 하더군요. 우리말로 중부지방이라는 뜻이였슴다. 현재의 일본도 일기예보뿐만아니라, 일본이라는 나라의 중간지역을 말할때,중국(中國,츄우고꾸)이라고 합니다. 물론 옛날엔 일왕이 있는 곳이었죠. 지금은 도쿄에 있지만....중국이란 서울을 말하는거죠.
것, 참~
의미있는 정보 감사합니다.
좋은자료감사합니다.
가림토문자가 궁금했었습니다.
한자나 한글이나 어느시대에 한 개인이나 집단이 뚝딱 만든것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오랜 세월에 동안 점진적으로 생성 발전 소멸 재생산 등등으로 계속되어왔겠지요~~
나라에도 家, 國, 邦 이렇게 격이 있다고 합니다.
家 는 씨족사회(국가)로 家門이나 門中이라고 표현하고,
國 은 출세한 사람이 있어서 세력이 있는 家門으로 제후국이라고 합니다.
중국역사에 나오는 나라이름이 이에 해당됩니다. 吳나라, 魯나라, 魏나라, 唐나라 등등 나라 이름이 모두 성씨입니다.
邦은 천자(황제)가 다스리는 나라이며 朝鮮 高麗 高句麗등이 해당된다고 합니다.
中國이라는 말은 훈민정음 서문만 이해하면 그 뜻을 정확히 압니다.
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字 不相流通
중국이라는 말은 윤봉길 의사 선서문에도 나옵니다.
중간부분 "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야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위 선서문은 인터넷 검색해보면 많이 나오는데,
관심도 없고 설사 본다고해도 한자가 나오니 그냥 지나치고 맙니다.
이것이 기득권 세력이 한자, 역사교육을 하지않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훈민정음은 창제 목적은 원래 한자 발음기호로 쓰기 위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드넓은 조선천지에서 한자의 뜻은 모두 같았으나, 그 읽는 소리가 제각각이라 이를 통일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東北을 한국사람은 동북, 지나족은 둥베이, 왜족은 토호쿠로 발음합니다.
이렇게 지역마다 다른 漢字音을 통일하기 위해 훈민정음을 창제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國之語音 異乎中國이란 글 뜻이 한자 읽는 소리가 수도권과 각 지방이 다르다는 뜻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투리 같다는 생각입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글자를 만들어서 백성들에게 가르친다면, 訓民正字라고 해야되는데, 훈민정음이라고 하였습니다. 한자의 소리통일 말씀에 동감합니다.
처음 접하는 글 ..
감사합니다. 또다른 세상을 보여주네요
우리의 역사를 바로 세우게 되는 날,
역사를 왜곡한 이 후레아들 너ㅁ들 만큼은 이 땅에서 반드시 추방해야 합니다.
어째 이곳 댓글이 전문가들보다 더 전문적인 것 같습니다.
국어학자들은 왜 이러한 사실에 눈을 감아 버린 건지...
이런 얘기 꺼내면 사실 혼납니다. -_-;;
한단고기에는 가림토 문자를 3세 단군 때 만들었다고 나옵니다.
그러나 한백대사님은 가림토 문자의 원형으로 보이는 문자가 이미 환웅시절에 있었다고 하시더군요.
무주에 소재한 신불사 천궁에 가면 비석에 이 문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 문자에는 각 자음의 된소리 문자가 모두 있더군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그렇군요.
언젠간 아이들에게 진실을 교육하는 때가 오길 바랍니다.
지나가 중국?
기미독립선언서에 支那 지나라는 말이 나오는데, 나라를 칭하는지 특정한 지역을 칭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현재 China (지나) 라는 이름은 중국과 인도차이나반도 등이 있는데, 임시정부가 있던 상해를 중심으로 보면 뭔가 짚일듯 합니다.
아래에 선언서 일부를 붙입니다...
또 二千萬(이천만) 含憤蓄怨(함분축원)의 民(민)을 威力(위력)으로써 拘束(구속)함은 다만 東洋(동양)의 永久(영구)한 平和(평화)를 保障(보장)하는 所以(소이)가 안일 뿐 안이라, 此(차)로 因(인)하야 東洋安危(동양안위)의 主軸(주축)인 四億萬(사억만) 支那人(지나인)의 日本(일본)에 對(대)한 危懼(위구)와 猜疑(시의)를 갈스록 濃厚(농후)케 하야,
그 結果(결과)로 東洋(동양) 全局(전국)이 共倒同亡(공도동망)의 悲運(비운)을 招致(초치)할 것이 明(명)하니, 今日(금일) 吾人(오인)의 朝鮮獨立(조선독립)은 朝鮮人(조선인)으로 하여금 邪路(사로)로서 出(출)하야 東洋(동양) 支持者(지지자)인 重責(중책)을 全(전)케 하는 것이며, 支那(지나)로 하여금 夢寐(몽매)에도 免(면)하지 못하는 不安(불안),恐怖(공포)로서 脫出(탈출)케 하는 것이며, 또 東洋平和(동양평화)로 重要(중요)한 一部(일부)를 삼는 世界平和(세계평화), 人類幸福(인류행복)에 必要(필요)한 階段(계단)이 되게 하는 것이라. 이 엇지 區區(구구)한 感情上(감정상) 問題(문제)ㅣ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