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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4장 26-40절. 방언과 예언의 질서, 여성의 발언권 문제. 요약설교
26-33절. 먼저 공 예배 시에 방언 사용의 질서에 대한 말씀입니다.
26절.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1. 방언의 문제를 세칙으로 다루기 전에 먼저 신약시대 당시의 공 예배에 대해서 먼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공 예배는 26절을 볼 때, 찬송을 부르고, 성경 말씀을 가르치고, 또 성령의 직접적인 계시와 방언과 통역함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초대교회는 후대교회처럼 형식화된 예배 보다는 상당히 역동적인 예배를 드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2. 그러나, 다른 교회는 지금처럼 질서 있게 예배를 드렸으나, 특히 고린도 교회는 역동적인 면을 넘어서 아예 무질서한 예배가 되어버렸습니다.
이처럼, 고린도 교회의 예배가 무절서 하고, 오히려 은혜를 떨어뜨리는 예배가 되자, 바울 사도는 예배를 드리되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 예배의 질서면을 강조하여 권면하고 있습니다.
3. 그런데 참 희한한 것은 어디든지 자유를 주어서, 분위기가 좀 과열된다 싶으면, 꼭 또라이(crazy, wacko, dork: 분별력 없는 사람)같이 분위기를 깨뜨리고 자기만 잘난 사람인 양 분위기를 망치는 사람이 나옵니다.
이런 사회적 정신병리 현상이 심지어 교회 예배 시에도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방언을 개인적으로 많이 하는 것은 좋은 일이나, 공적인 예배 시에 통역도 없이 방언을 무질서하게 함으로써, 전체 교인들이 은혜로운 예배를 못 드리도록 방해하는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4. 어려운 표현으로 ‘찬송시, 말씀, 계시, 방언, 통역’ 등은 고린도 교회 공 예배시의 순서들이었는데, 은사의 다양성(diversity)과 상호보완성(complementary nature)을 질서 있게 유지하라는 말씀입니다.
즉, 성령님께서 주신 은사를 가지고 오직 하나님을 예배하고, 또한 무질서하게 자기를 나타내는 은사 활동을 하지 말고, 만일 집회 시에 은사 활동을 하려면, 질서 있고 적당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27-28절. 방언할 때의 질서를 다음과 같이 세밀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27절.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28절.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1. 즉, 방언을 할 때는 ① 2-3인을 초과하지 말고, ② 한 사람씩 차례대로 하고, ③ 반드시 통역하라는 것입니다.
(1) 방언은 2-3인을 초과하지 말라는 것은 공 예배 순서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찬양과 기도와 말씀 중심의 예배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2) 한 사람씩 차례대로 하라는 것은 역시 신비주의자들의 무질서한 분위기를 자제하고 정상적이고 질서 있는 예배로 드리기 위함입니다.
(3) 공적인 자리에서 방언을 하려면, 반드시 방언 통역사가 통역을 하라는 것은, 공적인 자리에 참석한 성도들이 그 방언의 내용이 과연 성경적인가를 성도들이 판단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혹시 방언자들 가운데는 귀신의 방언자도 있고, 주님을 저주하는 방언자도 있고, 인간의 정욕을 발산하는 방언도 있으므로, 반드시 통역을 세워서 잘못된 방언을 제재하라는 것입니다.
2. 하여튼 은사를 사모하는 은사파 성도들이 교회에 많더라도, 모든 은사 활동은 ‘덕을 세우기 위하여’(for edifying) 즉 ‘다른 성도를 격려하기 위하여’(for encouraging) 시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언(預言)에 관한 교훈의 말씀입니다.
성령의 은사로 주어진 예언은 귀신의 예언과는 달리, 인간의 정상적인 인격적 의식 활동을 하게 하심으로, 예배의 질서를 문란시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29-32절에서는, 예언을 어떻게 질서 있게 할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29절.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30절. 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31절.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32절. 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1. 예언의 절서는 ① 2-3인이 하고, ② 다른 예언자는 분별하고, ③ 새 예언이 시작하면 먼저 하던 사람은 자제하여 중단하라는 것입니다.
(1) 예언을 2-3인이 하라는 것은 아무리 현장감 있는 예언이 듣는 성도들에게 자극적이더라도, 선지자와 사도를 통해서 주신 성경 말씀이 예배의 핵심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2) 그리고, 예언을 분별하라는 것은 과연 예언하는 사람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일치하는 성령의 은사인가 아니면 귀신의 말인가, 혹은 인간의 정욕에서 나온 말인가를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을 수 있는 믿음의 대상은 예수님과 사도들의 말씀뿐이기 때문입니다.
(3) 새 예언이 나오면, 먼저 하던 사람은 중단하라는 것은 소위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서로 경쟁하듯이 시끄럽게 예언하면, 도대체 예배가 소란한 영적 싸움터같이 되어, 은혜가 안 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경건한 예배가 방해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언의 은사가 방언보다는 알아들을 수 있는 더욱 귀중한 은사이지만, 성경 말씀에 옳은가 비추어보아야 하며, 어디까지나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중심이기 때문에, 공 예배 시간에 이런 은사 활동은 가급적 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자유스러운 예배 분위기 때문에, 이 정도로 질서 있게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지금 교회들이나 당시에도 다른 교회였다면, 더욱 혼났을지도 모릅니다.
2. 폐일언하고, 33절에서는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 했습니다.
33절.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모든 성도가 교회에서 함과 같이
1. “어지러움”이란 무법, 무질서, 서로 대립함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창조 세계도 질서 있게 창조하신 분이시고( 우주를 뜻하는 코스모스도 질서란 뜻임), 영적인 세계도 예수님을 모신 곳에는 평화와 질서가 이루어집니다.
마귀가 지배하는 곳에는 혼돈과 싸움과 무질서가 있습니다.
2. “화평”이란 준법, 질서, 평화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불화한 인간 사이를 화목케 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도 화목이 이루어집니다.
마귀는 죽이고, 도적질하고, 멸망시키려고 하지만, 예수님은 생명을 주고 풍성히 주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3. 그러므로, 어지럽고 무질서한 예배는 마귀가 지배하는 것이고, 화평하고 질서 있고 사랑과 은혜가 넘치는 예배는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예배입니다.
과연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화평의 하나님이심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4. 참고로, 30절의 “계시”는 성경 계시와 같은 좁은 의미의 계시를 가리키지 않고, 넓은 의미의 계시를 가리킵니다.
(1) 즉 구약시대의 선지자, 신약시대의 사도와 준사도에 의해서 계시된 말씀은 좁은 의미의 계시로서, 오늘날까지 성경으로 수납되었습니다.
(2) 그러나, 고전 12-14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계시나 예언은 이런 넓은 의미에서의 계시이고, 성경 계시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① 사도행전 11장이나 21장에 나오는 아가보 선지자와 같은 일반 은사자들의 예언(豫言, 행 11:8, 21:10-11)이나, ② 사도행전 13장 초두에서 안디옥 교회에서 선교사를 세울 때 지시받은 하나님의 지시(행 13:1-3)나, ③ 고린도전서 14장 3절의 격려와 위로의 말씀 등을 가리킵니다. (NIV-SB, p.1754)
34-35절은 은사 문제로 교회를 시끄럽게 했던 고린도 교회의 ‘신령파 여성들’(the spiritual women)에 대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34절.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35절.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
1. 즉, 다른 모든 교회에서는 여성들이 시끄럽게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데, 왜 유독 고린도교회의 여성들은 시끄럽게 문제를 일으키느냐는 책망의 말씀입니다.
(1) 다른 교회들에서는 여성도들이 성령의 은사를 따라서 찬양대도 잘하고, 주일 학교 교사도 잘하고, 여전도회도 잘하고, 기도회도 잘하고, 교회에서 아무 문제가 없이 잘하고 있는데, 왜 유독 고린도 교회 여성도들만 이렇게 교회를 소란케 하느냐고 책망하신 말씀입니다.
(2) 그러므로, 바울은 이러한 소위 ‘신령파 여성들’(spritual women)에게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하십니다.
즉 원문에 ‘여자들’이라는 단어는 정관사가 있어서 <그 여자들>(αἱ γυναῖκες)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서 ‘그 여자들’이란 고린도 교회를 소란하게 만드는 ‘신령파 여성들’(the spiritual women)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New American Standard Bible에는 <그 여성들은 교회들에서 잠잠해야 한다>고 잘 번역했습니다. (The women are to keep silent in the churches).
이 고린도 교회의 신령파 여성도들은 교회 안에서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영지주의 이단에 가서 감염되어 와 가지고, 교회에서 자기들만의 파를 만들고, 예배 시나 기도회 시나 무슨 집회 시에도 꼭 교만하게 튀고, 다른 사람과 불화하는 골치덩이들이었습니다.
이 신령파 사람 중에는 심지어 남편을 무시하고, 교회에서 목사와 장로와 찬양대 등 예배 질서를 무시하고, 아무 때든지 성령이 주신다고 방언하고 예언하면서, 다른 성도들을 공격하고, 자기들만 하나님의 참된 종이라고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이런 ‘신령파의 문제’가 밖으로 터져나온 것이 고린도전서 5장에서 계모를 아내로 데리고 살면서 그것이 ‘신령한 자의 자유’라고 자랑하고, 고린도전서 6장에서는 신령한 권위로 사람들을 종 삼아서 교인들의 돈을 긁어모아서 떼어먹는 불상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3) 그러므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씀은 일반적으로 모든 교회에서 여성도들이 잠잠하라는 뜻이 아니고, 고린도 교회를 소란하게 하는 ‘신령파 여성도들’에게 교회를 소란스럽게 말고 잠잠하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여성도들이 교회에서 찬양대원을 하고, 교회 학교 교사를 하고, 구역에서 예배 인도를 하고, 여전도회 활동을 하고, 각종 회의에 참석하고, 각종 봉사 활동과 전도하는 것을 금하는 말씀이 전혀 아닙니다.
2. 즉 이 말씀은 고린도전서 11장 5절에 비추어 볼 때, 복종하는 표로 머리에 수건을 쓰고 질서 있게 기도나 예언을 하는 여성들을 두고 경고한 말씀은 아닙니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일반 여성도들은 장로님들과 교회의 질서에 따라서, 찬양대로 봉사 잘하고,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 잘하고, 여전도회에서도 봉사를 잘하는 모범적인 부인들이었습니다.
만일 교회에서 여성도들의 활동을 저지시킨다면, 교회는 마비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꼭 ‘신령파 여성들’같이 이단사상에 물들어 온 사람들이 교회에서 주권을 잡고 교회를 뒤흔들어 놓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덕 있고 모범적인 여성도들은 싸우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소수의 신령파가 온통 교회를 소란스럽게 만드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 장로님들은 여성 지도자들을 임명할 때, 문제 여성을 세우지 말고, 정상 신앙을 가지고 섬기며, 온유하고, 덕 있는 여성도를 지도자로 임명해야 하도록 주의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여성도님들은 모두 모범적인 신앙과 봉사 활동을 잘하고 계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36-38절은 바울이 교만하고, 무질서한 신령파 여성도들을 책망하는 말씀입니다.
36절.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37절.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은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는 이 글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38절.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
1. 과연 너희들이 신령한 자이면, 신령한 눈을 가지고 바울이 신령한 사도임을 깨닫고, 권위에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2. 38절. ‘그러나 만일 누구든지 이것을 무시하면, 그들도 무시될 것이다.' (But if anyone ignores this, they will themselves be ignored: NEB)로 번역이 가능합니다.
즉, 만일 어떤 ’신령파 여성‘이 바울의 권위를 인정치 않으면, 그 여성은 교회에서 ‘불신자’로 무시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39-40절. 방언과 예언 문제에 대한 결론의 말씀입니다.
39절.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1. 방언 문제에 대한 바울의 해결책은 방언을 금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은사를 적절히 질서 있게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NIV-SB p.1755)
결론은 예언을 사모하고, 방언을 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40절.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
1. 절제(11:22, 13:5, 14:30)와 질서(11:3, 12:19, 14:27)는 은사 세계의 2대 요소입니다.
그래야, 교회의 건덕(建德:edification)이 유지됩니다.
<나누어봅시다>
1. 바울은 은사 운동 자체를 경계하지는 않았고, 그 질서 있는 사용을 교훈했습니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 편견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까?
2. 나는 은사 활용에 있어서, 절제할 줄 모르는 무질서하고 무례한 자가 아닙니까?
3. 우리는 방언 운동과 같은 감정 운동은 경계해야 하겠지만, 한편으론 신앙적 감격과 열정을 잃고, 지성(知性)에 치우친 ‘냉혈신자’는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