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젠 열 시도 되지 않아 잠이 들었다. 잠깐 누웠다 일어난다는 것이 눈이 뜨니 6시가 다 되었다. 습관대로라면 전화기 먼저 찾았을 텐데 이 책 생각이 났다. 눈을 비비며 마지막까지 칼 오베를 따라 갔다. 어느새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된 사십에 가까운 그는 여전히 아이들의 육아와 글쓰기 사이에서 자기 시간을 위해 안달하며 부인 린다와 말다툼을 하고 다시 화해를 하고 축구를 하고 글을 쓴다. 그의 삶을, 그리고 그의 삶의 기록인, 이 책을 가득 채운, “아, 그 뻔하고 일상적인 일들”(448). 그러나 그 “뻔하고 일상적인 일들” 없이 우리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는, 이 책은 또렷하게 보여준다.
칼 오베가 보기에, “지어낸 것은 가치가 없다. 심지어는 다큐멘터리적 글도 무의미하다.” 이 세상은 이미 픽션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지난 몇 년간, 문학에 대한 내 믿음은 점점 약해지기 시작했다. 책을 읽고 나면, 그건 항상 누군가가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우리는 픽션이라는 장르에 속박되어버린 건 아닐까. 지난 몇 년 동안 픽션은 인플레이션처럼 불어났다.....이것은 재앙이다. 나는 픽션의 핵심이 진실이냐 거짓이냐를 떠나, 수도 없이 범람하는 온갖 종류의 픽션과 현실 사이의 거리가 거의 같을 정도로 일정하다는 사실 때문에 온몸이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이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무기력해지고, 의식 속에서 부서져 산산조각이 나버리는 나 자신을 보는 것만 같아 고통스럽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픽션 속으로 일률적으로 재창조되고 있다. 우리가 독특하고 특별하다고 여기는 것들은 이미 사라져버린 지 오래다. 지금은 이주 다른 모습의 세상 속에서 살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시대다. 나는 그런 류의 픽션을 쓰고 싶지 않다.....”(437~8)
하기에 그는 픽션이 아닌 삶의 기록을 원한다. “내 삶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 글을 쓰고 싶”어 한다.(469) “태어나고 죽고, 사랑하고 말다툼을 하고, 먹고 싸고, 마시고 트림을 하고, 책을 읽고 잠을 자고, 텔레비젼을 켜고 꿈을 꾸고, 청소를 하고 사과를 먹으며 지붕 너머를 바라보는 사람들”(467)처럼 자기 삶의 전부인 여기. 다른 이들은 몰라도 그 삶에도 “높이 뻗은 소나무 사이를 스치는 가을바람이 불어”(467)오는 그의 삶.
그의 글은 그의 삶의 순간을 관통하며 기록한 일기요 수필이다.
“내게 가치와 의미가 있는 것은 일기와 수필밖에 없다. 지어낸 이야기가 아닌 문학, 무언가를 억지로 이야기하려 하지도 않고 오직 한 사람의 목소리와 인성, 삶과 얼굴과 눈빛을 그대로 담아낸 문학 말이다.” (437~8)
“무언가를 억지로 이야기하려 하지도 않고 오직 한 사람의 목소리와 인성, 삶과 얼굴과 눈빛을 그대로 담아낸 문학.” 이 책의 표지가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 그의 얼굴인 이유가 있다. 바로 그 자기만의 목소리, 자기만의 삶을 꺼내기 위해 그는 매일매일 아이들을 양육하고 린다와 말다툼을 하고 사랑도 하며 가끔 끔찍이도 싫어하는 강연과 인터뷰를 하고 친구들과 만나며 그리고 숨쉬듯 글을 쓴다. 아무리 싫고 힘들어도.
“나는 하루에 다섯 장을 쓰겠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매일 반항하듯 꾸역꾸역 글을 썼다.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를 혐오하고 증오했지만 살다 보면 구토를 하듯 싫은 일도 해야 할 때가 있는 법.”(478)
그러나 그 모든 시간들은 어쩌면 우리 삶이 빛나는 순간이다. 우리 삶이 존재하기에 가능한 빛의 순간. 시간이 흐르면 조금씩 희미해져 갈, 언젠가는 꺼져 갈,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이 더 소중하기도 한, 빛의 순간. 이 책의 맨 마지막 문장을 젊은 시절을 회상하는 어머니의 다음과 같은 말로 맺은 것은 그런 까닭에서일 것이다.
“참 행복한 기억이야. 공원 내의 햇볕과 잔디, 그림자를 드리운 나뭇가지들, 거기 있던 모든 사람....너도 알다시피 그때 우린 참 젊었지....맞아, 그건 동화였어. 동화의 시작, 그게 바로 그때의 느낌이었단다.”(483)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의 다음 책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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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세월호 참사 5주기가 되는 날이다. 5년 전 이날을 기억한다. 여전한 슬픔도, 하나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여러 일들도, 여전한 온갖 엉망진창의 우리 모습도 그대로다. 미안함과 슬픔과 분노를 누르며, 삶의 빛 제대로 환하게 밝히지 못하고 떠나간 우리 모두의 그 아이들과 희생자분들의 안식을 기원하며 남은 유가족분들을 향한 위로의 마음을 간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