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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년 7월 11일 토요일 남한산성
나홀로 대중교통 이용
마천 지하철역 – 남한산성 서문(右翼門) – 북문 (全勝門) – 동문(左翼門) – 남문(至和門) – 서문 – 마천역
https://www.ramblr.com/web/mymap/trip/371711/2222239
거리 16.7 km
소요 시간 8h 44m 25s
이동 시간 6h 31m 39s
휴식 시간 2h 12m 46s
평균 속도 2.6 km/h
최고점 524 m
총 획득고도 652 m
난이도 보통
일 주일 내내 남부지방에 비가 많이 내렸다. 특히 부산에는 비 피해가 상당히 크다고 한다. 일본의 남부지방( 오끼나와 )에서는 급속도로 불어난 홍수로 인해 약 80 여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했고 중국의 후베이성을 비롯한 남부지방은 장강(長江)의 범람으로 인한 피해가 엄청 크다고 한다. 특히 장강의 상류에 있는 샨샤댐이 붕괴될 위험이 있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사상 최대 비피해가 발생했다고 한다.
박 원순 서울 시장의 비극
서울에는 비의 양이 그리 많지 않았다. 나는 상황을 살펴보다가 금요일 설악산 무박 산행을 예약했다. 그리고 지난 번처럼 너무 늦어서 버스를 놓지는 불상사가 없도록 일찌감치 잠실역으로 나가 버스를 기다렸다. 기다리면서 인터넷 뉴스를 살펴보는데 온통 박원순 서울 시장의 성추행과 사망 소식으로 시끌시끌하다. 그러나 아주 튀려고 작정한 정치인들 말고는 모두 말을 아끼는 분위기다. 대부분 어떻게 된 사연인지 짐작만 할 뿐 확실한 것이 없으니 선뜻 나서서 말 할 분위기는 아니다.
내가 갖고 있는 박 시장에 대한 이미지는 나이가 꽤 많다는 것이다. 알고 보니 나보다 4살 더 많은 1956년생이다. 그리고 사리사욕을 챙기지 않고 공익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다. 시민운동가 출신 인권 변호사였으니 또한 정의로운 이미지를 풍겼다. 더구나 부천 성고문 사건의 피해자였던 권인숙 씨 변호인단에 속해 있었다 하니 여러가지로 약자의 편에 서서 사회활동을 해 온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 전 비서가 박 시장으로부터 사 년간 지속적으로 성 추행 당했다고 고소하였고 이에 대해 박 시장은 아무런 일언반구의 말도 없이 집을 나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나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다.
버스를 기다리며 잠시 박 원순 시장의 명복을 빌면서 작은 소회를 적어본다.
만일 자신이 혼신의 힘을 기울여 무슨 일을 도모하다가 그 일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았다면 그는 어떤 행동을 할까? 더구나 그에게는 앞으로 살아서 새로이 의미 있는 일을 도모하기에 남은 기간이 너무 짧다고 느낀다면 그는 스피노자처럼 과연 또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을 수 있을까?
인간의 가치는 무엇인가? 자신의 유전자를 이 지구상에서 계속 유지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는 일일까? 그저 다른 식물이나 동물처럼 그게 전부일까?
남을 위해 사는 일, 인류공영을 위한다는 것은 이기심의 또 다른 표현일까? 인간은 평화를 꿈꾸지만 그 평화는 결국 남을 파괴해야 이뤄지는 꿈이 아닐까?
박원순 서울시장은 무엇을 꿈꾸었을까? 그는 무엇에 좌절했을까? 그의 죽음과 맞바꾼 보상은 과연 무엇이었나?
그가 여비서에게서 기대한 것은 단순한 육체적 위안이었나? 혹시 그가 꾸었던 꿈은 소년의 연애 감정이었을까? 자신의 사회적 위상과 신체적 노쇠함이 상쇄되리라는 환상을 가졌던 것은 아닐까? 상대가 인정할 수 없는 혼자만의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 상대의 일그러진 표정에서 그만 자신의 모든 것이 부질없었음을 깨닫고 끝없는 추락의 길을 택한 것일까?
설악산 무박 산행이 무산되고
11시 50분에 오기로 한 버스가 12시 자정이 넘었는데도 오지도 않고 평소 버스를 기다리는 산꾼들이 꽤 보였었는데 오늘은 하나도 안보인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전화했더니 카페 문자로 다 통보했다고 한다. 설악산 국립공원에 많은 비가 내려 입산이 통제되었다고 한다. 그런 중요한 일을 유선 전화나 문자로 통보해 줘야 하지 그냥 카페 문자서비스로 알려주면 어떻게 하느냐고 불평했지만 그에 대한 대답은 아주 간단하다. 죄송하다고 한다. 집으로 가는 전철은 이미 끊겼고 급히 버스정류장으로 가 보니 그나마 집으로 가는 4318 번 버스가 10분 후에 도착한다고 한다.
그렇게 금요 무박 산행이 무산되었다. 토요일 아침 평소처럼 일찍 잠에서 깨어보니 날씨가 화창하다. 강 건너 아차산은 물론이고 멀리 도봉산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인다. 이런 날 설악산에 갔다면 어땠을까 하고 상상해 본다. 그리고 왜 설악산 국립공원은 통제를 했을지 의심만 든다. 그냥 집안에 앉아 있기에는 날씨가 너무 아까워 어디 가까운 곳이라도 다녀 와야겠다. 그리고 한 번 가보고 싶었던 남한산성(南漢山城)을 가기로 정했다.
꿩 대신 닭, 설악산 대신 남한산성으로
몇 년 전에 남한산성에 올랐던 코스를 따르기로 하고 마천역에서 출발했다. 그 때는 등산로 입구가 무척 복잡하고 사람들로 붐볐었는데 오늘은 한산한 느낌이다. 산 아래 굉장히 큰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있다. 저렇게 높은 아파트를 지으면 그 아파트에 사는 몇몇 사람들은 일시적으로 기분이 좋아지겠지만 장구한 세월 푸른 빛을 지켜왔던 숲은 점점 밀려나게 되는 것이 안타깝다.
같은 곳에서 출발해도 산으로 오르는 갈래 길이 여럿 있는 모양이다. 전에 가 보지 못한 코스로 오른다. 길 가에 산할아버지 동상이 서 있다. 이 산 길에 나무를 심고 다리도 놓고 계단도 만들만큼 산을 아꼈던 분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동상을 세운다는 설명문이 있다. 이 골짜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2006년에 세웠다고 써 있고 여느 표지석이나 팻말처럼 지자체 장이나 사람 이름은 없다. 그 분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평소 이 산길을 가꾸는데 많은 공을 들였던 분인가보다.
서문(西門) – 우익문(右翼門)
경사가 급한 나무계단을 한참 오르고 나니 서문(西門) 옆 성벽 아래 전망대가 나온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탄성을 절로 나온다. 눈부시도록 맑은 날씨에 하얀 구름이 파란 하늘에 떠 있고 미세먼지가 하나도 없는 듯 멀기만 한 관악산과 청계산 뿐만 아니라 북한산, 도봉산, 불암산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서 있다. 새로운 서울의 랜드마크가 된 롯데타워는 키 작은 건물 숲 한 가운데 우뚝 서 있고 그 롯데타워를 기준으로 눈길을 더듬어 가니 내가 사는 아파트도 보인다. 이렇게 날이 좋은데 설악산 탐방이 취소되었다는 것이 참 의아스럽다.
서문 안으로 들어가 왼쪽으로 성벽을 따라 걸었다. 그늘 아래 들어가면 시원하고 햇볕에 나서도 따뜻한 것이 최상의 날씨다. 오가는 사람들도 모두 좋은 날씨에 즐거워한다. 벤치에 앉아 바나나와 빵으로 요기하면서 북문을 거쳐 동문으로 향한다. 이 길은 몇 년 전(2016년 11월)에 걸었던 길이다. 오르내림이 이어지는 성벽을 따라 걷는 것은 산책하는 기분이다. 큰뱀무, 누리장나무, 딱지풀 등 야생화가 길 가에 많이 피어 있다.
북문을 지나 장경사(長慶寺)로
장경사(長慶寺)에 도착하여 절 안으로 들어갔다. 마당 한 켠에 피크닉 테이블 네 개를 설치해 놓았길래 배낭을 내려놓고 잠시 쉬어 가기로 했다. 주방 앞에 있는 수돗물을 페트병에 담으려 하자 보살님 한 분이 제사 떡이라며 떡 한 봉지 건네 준다. 팥 고물을 묻힌 시루떡을 먹기 좋게 잘라서 담아 놓았다. 마침 점심을 먹으려던 참이라 테이블에 앉아 떡과 자두를 먹으니 배가 불끈 일어난다. 서두를 일도 없기에 벤치에 누워 잠시 눈도 붙인다.
남한산성에는 장경사를 비롯하여 망월사 등 절이 여러 개 있다. 전에는 더 많았으나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소실되었다 한다. 나는 늘 절에 대한 한 가지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전국 어디를 가나 풍광이 좋은 땅에는 의례히 불교사원이 자리잡고 있다. 처음에는 속세를 떠나 조용한 곳에서 수도정진하기 위해 그렇게 외딴 곳에 절을 지었으리라고 생각했으나 그런 불교 사원에서 국립공원 등 큰 산을 차지하고 입장료를 받아가면서 주인 행세하는 것은 또 어떤 이유인가. 더구나 조선시대에는 억불숭유정책(抑佛崇儒政策)이라 하여 불교가 심하게 탄압받았다고 배웠는데 어째서 가는 곳마다 이렇게 큰 절이 세워져 있는가. 아마 이런 의문은 비단 나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닐 터이다.
알고 보니 조선시대의 불교는 단순한 수도 도량이 아니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그리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등 큰 난을 겪으면서 평소 탄압받던 중들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군대 조직으로 재탄생하였고 절은 군인들의 병참기지요 무기제조 창고였다. 군사 훈련도 하고 무기를 보관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승병들이 담당했던 일은 성을 축조하고 관리하는 일이었다.
남한산성은 온조가 백제를 개국할 때 근거지로 삼았던 성이었다는 얘기도 전해지며 삼국시대부터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고 한다. 400 미터가 넘는 고지에 넓은 분지가 있어 자체적으로 농사도 지을 수 있는 천혜의 요새였다. 이 청량산에 지금과 같은 성벽을 쌓은 것은 인조 2년 (1624년)부터 인조 4년까지 약 2년간 지속되었다. 두 차례의 왜란을 겪은 데다 인조 2년에는 이괄의 난까지 일어나 나라에 위기가 닥치자 인조는 벽암(碧巖) 각성(覺性) 스님을 도총섭(都摠攝)으로 임명하여 전국의 승병들을 불러 모았다. 이들 승병들이 성을 쌓는 동안 머물 수 있도록 기존에 있던 망월사와 옥정사 외에도 한흥사, 국청사, 동림사, 수종사, 개원사, 천주사, 장경사 등의 절을 새로 창건하였다.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이러한 축성(築城) 작업뿐만 아니라 성의 유지보수를 승병들이 맡았으며 유사시에 전쟁에 동원될 수 있도록 훈련과 무기제조 등도 도맡아 하였다. 이는 1894년 갑오경장으로 승병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한다. 그 뒤로 대부분의 절은 유지하기가 어려워 폐허가 되었으나 그나마 교통이 닿는 곳에 위치한 절들은 그대로 유지되어 현재까지 남아 있게 된 것이다.
장경사에서 다시 성벽을 따라 산 언덕을 가파르게 올라 송암정(松岩停) 터를 지난다. 옛날 황진이가 이 곳을 지나는데 멋드러진 소나무 아래에 있는 바위 위에 지어진 정자에서 뭇 남성 여럿이 기생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며 춤을 추고 놀고 있다가 황진이를 보고 희롱하려 하였다. 이에 황진이가 그들에게 불법을 설파하니 그 기생 중 한 여인이 자신의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 그만 바위아래로 몸을 던져 자결하고 말았다. 그 후 정조대왕이 여주로 능행을 갈 때 이 곳을 지나면서 바위에 나 있는 소나무에게 대부 벼슬을 하사하여 사람들은 그 소나무를 ‘대부송’이라고 불렀다 한다.
동문 (左翼門)
송암정에서 고개를 내려가면 차들이 드나드는 동문(좌익문)에 이르게 된다. 지난 번에 왔을 때 이곳에서 산행을 마치고 곧장 차도를 걸어 남문으로 갔었다. 하지만 오늘은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으니 좀 더 오래 성벽을 따라 걸어볼 참이다. 동문에서 찻길을 건너 다시 이어지는 성벽으로 향하는데 작은 공사가 한창 진행중이다. 남한산성은 북한산성과 함께 오랫동안 조선의 수도였던 한양을 남과 북에서 지켜주던 상벽으로 전통적인 성벽 축조방식이 인정받아 2014년 6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런 세계문화유산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보수하고 관리해야 하는 것 같다.
남문으로 가는 중간쯤에서 내가 잘 알지 못하던 나무 두 그루를 만났다. 그 중 하나는 다릅나무다. 콩과에 속하는 다릅나무는 봄에 돋아나는 새 잎이 특이하고 예쁜데 솜털이 다 사라지고 한 여름 짙은 녹색으로 크고 나니 어린 잎의 모습을 아예 찾을 수 없다. 꽃이 핀 모습을 보고 족제비싸리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릅나무는 이제 봄철 어린잎이나 나무표피나 여름날 꽃을 보아도 구분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다릅나무 곁에 잎이 무성하고 나무에 동글동글한 열매가 달려 있는데 아무리 상상력을 동원해도 무슨 나무인지 알 수가 없다. 잎은 아카시아 잎처럼 깃털모양으로 나 있고 열매는 왕머루 송이처럼 생겼다. 무슨 나무인지 궁금증을 안고 모야모에 올렸으나 아무도 답이 없던 차에 일초님이 소태나무 아니냐고 한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모양이 분명 소태나무다. 옛날에는 전국에 흔하게 자라고 있어 위장병이나 살충제 등으로 널리 쓰였다고 하는데 나는 이렇게 잎이 달린 모습을 처음 보았다. 지난 봄 동강에 갔을 때 고인돌 형님 지인께서 나뭇가지 하나를 주면서 씹어보라고 하여 맛보았을 때 그 쓴 맛이 강하고 오래 갔던 기억이 난다. 맛이 쓴 음식을 먹으면서 소태같다고 하는 말이 있듯이 소태나무는 쓴 맛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유식을 먹어야 하는 아이가 엄마젖을 고집할 때 소태나무 액을 젖꼭지에 바르면 아이가 한 번 맛보고는 더 이상 엄마젖을 먹으려 들지 않는다고 한다.
소태가 사람에게 있어 쓴 맛의 대명사라면 소에게는 고삼(또는 너삼)이 비슷한 효과를 낸다. 역시 맛이 쓰고 차다. 소가 입맛이 없어 기운을 차리지 못할 때 너삼 뿌리를 찧어서 만든 즙을 소에게 먹이면 금방 기운을 회복한다고 한다.
남문 (南門) - 지화문(至和門)
남옹성(南甕城)을 지나 얼마 가지 않아 남문이 나타난다. 남문은 달리 지화문(至和門)이라 부른다. 예부터 동문과 남문은 사라들이 주로 드나드는 주요 통로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옛날 사진을 보면 마차가 드나들 정도로 문이 넓고 길이 평평했다.
성문 주위를 대략 살펴보고 가파른 산길을 올라 서문으로 향한다. 잠시 성벽에서 조금 떨어져서 안쪽 길을 걸으니 평이한 시멘트 포장이 된 길이다. 다시 숲 속으로 난 비탈길을 올라 성벽을 따른다. 저녁때가 되니 구름이 조금 더 끼었지만 여전히 공기가 깨끗해 멀리까지 시선이 닿는다. 커다란 사진기를 들고 있는 사람이 서쪽을 보면서 청계산과 관악산 너머 조금 오른쪽으로 희미한 마루금을 가리킨다. “저게 강화도 마니산이에요.” 정말일까? 아무리 날씨가 좋아도 강화도까지 거리가 얼만데 맨눈으로 강화도가 보이겠는가 싶어 다시 물으니 틀림없다고 한다.
병자호란 (1636년 12월 ~ 1637년 1월) 때 인조는 긴급히 피난길에 나서면서 소현세자 등을 먼저 강화도로 보내고 인조 자신도 곧 바로 강화도로 가려고 길을 나섰으나 남대문에 이르러 이미 청군이 강화도로 가는 길목(마포)이 막혔다는 보고를 받는다. 이에 인조는 급히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다. 1636년 12월 14일 남한산성에 피난하여 이듬해 1월 30일 먹을 양식이 다 떨어지고 더 이상 추위를 피할 길이 없는 처지에 이르러 삼전도에 나와 청 태종에게 항복할 때까지 약 45일간 인조는 이 남한산성에 갇혀 있었다. 인조가 항복하기 열흘 전인 1월 20일 이미 강화도가 함락되고 피난 갔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뒤에 효종이 됨)을 비롯한 세자빈 등 약 200 여명이 포로로 잡혔다.
남한산성의 높은 지대에 위치한 수어장대가 바로 곁에 있고 청나라 군사들의 집결지였던 삼전도도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이다. 이 곳에서 인조는 멀리 강화도 방향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오로지 종묘사직을 잇기 위해, 그의 왕으로서의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청나라 태종 홍타이지 앞에 무릎을 꿇고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땅에 이마를 찧는 삼궤구고례를 치러야 했던 인조는 과연 어떤 심경이었을까?
성을 한 바퀴 돌고 다시 아침에 출발했던 서문(右翼門)으로 돌아왔다. 인조가 청 태종에게 항복하기 위해 남한산성을 나섰던 문이다. 이미 두 나라 간의 강화 조건이 합의된 상태에서 그런 비참한 행사가 펼쳐질 삼전도로 향하는 발걸음이 얼마나 무거웠을까?
서문에서 마천으로 가는 길은 경사가 무척 급하다. 가끔 나무계단이 설치되어 있어 걷기에 불편하지 않고 나무가 울창하게 그늘을 만들어 놓았다. 오후 5시 40분 마침내 산에서 내려와 하루 산행을 마무리하였다.
사니조은 님과 약속하여 밤에 설악산으로 출발한다. 내일도 날씨가 오늘만큼만 좋으면 하는 바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