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할아버지 문익환
문익환은 1918년 만주 북간도 명동에서 아버지 문재린 목사와 어머니 김신묵 권사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문익환의 부모님은 1899년에 두만강을 건너 간도로 건너가 독립과 국권 회복에 힘썼다. 문익환은 12세에 명동학교에서 송몽규, 윤동주와 함께 《새 명동》이라는 이름으로 문예 잡지를 냈다. 평양 숭실학교에 입학했지만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학교가 문을 닫았다. 이후에 일본신학교를 다니다가 군인으로 끌려가기 싫어 학교를 그만두었다. 28세인 1945년에 친구 윤동주와 송몽규가 감옥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윤동주와 송몽규가 죽은 뒤에 문익환 목사님은 복음동지회라는 모임에서 장준하 선생님을 만난다. 1968년부터 8년 동안은 가톨릭과 함께 공동 구약 번역 책임자를 맡았다. 문익환 목사님은 공부하고 가르치는 학자와 어울리는 분이었다. 그러나 청년 전태일이 노동자들의 처지를 알리려고 분신하고, 장준하 선생님이 의문의 사고로 돌아가시자 학생들을 가르치고 시를 쓰며 목사로, 학자로 지내던 선생님의 삶을 바꾸었다. 가만히 앉아 책만 보고 연구하는 학문이 아니라 이 땅에서 일어나는 가장 중요하고 절실한 문제에 뛰어들어 해결점을 찾는 신학을 시작한다.
박정희 정권에 대항하여 3․1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하고 구속된다. 감옥에 들어갔다 풀려나고, 다시 구속되었다가 풀려나기를 되풀이하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1989년에는 72세의 나이로 평양을 방문해서 김일성과 두 차례 회담을 하고 돌아오자마자 곧바로 구속됐다. 1991년에는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불타올라 강경대 열사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 죽는 일이 일어났다. 목사님은 장례 위원장을 맡아 활동하다 또 감옥에 갇혔다.
뉴스에서 문익환 목사님에 대한 소식이 나올 때마다 강원도 사람들은 빨갱이라고 계속 비난했다. 저 역시 대학생이 된 뒤에도 어릴 때부터 듣던 ‘문익환은 빨갱이’를 떨쳐내기 어려웠다. ‘굳이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 기독교 역사를 배우면서 문익환 목사님이 평화를 사랑하는 학자에서 투사로 변한 계기를 들었다. 그건 바로 장준하 선생이 하던 일을 자신이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