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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플레비언나비공동체 원문보기 글쓴이: 남산
◇ 2000년 호남신학대 교수들의 나들이, 장소 미상
호남신학대에서 만난 학생들과 다양한 교회에서 만난 교우들, 그리고 여유로운 성품의 교수들과의 사귐은 젊은 시절의 내 인생을 찬란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중 내가 만난 황승룡 총장님은 한국 예장통합 교단의 제2 신학교를 일구어낸 분이다. 학교의 모든 것이 서울 광나루에 있는 장로회신학대의 반 정도 규모였지만, 당시 호남신학대에 다니던 학생 중 여럿은 수도권에서 전라도까지 유학을 올 정도로 든든한 곳이었다.
무엇보다 호남지역은 기독교가 널리 전파되어 도시와 농어촌 지역에 골고루 교회가 세워져 있었고, 교회당마다 성도들로 넘쳐났다. 주일학교의 교사들 모임도 무척 활성화되어 있었기에 주일학교 교사를 위한 교육에 대한 열정도 대단했다. 학교 채플에 모여 목청을 다해 찬송을 부르던 학생들의 우렁차고 아름다운 화음은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아있다.
멋진 화음으로 찬양하던 젊은이들의 모습 속에서 한국교회의 미래를 꿈꿀 수 있던 시절이었다. 언젠가 학교에서 당시 유행하던 『야베스의 기도』를 읽고 말씀을 풀어 설교했더니, 학생 수백 명이 학교 서점으로 달려가 책을 구매하려는 통에 서점 주인이었던 집사님에게 멋쩍은 감사 인사를 받아야 했다. 그 이후 내가 읽고 소개하는 책마다 학교의 베스트셀러가 된다는 소문도 돌았다.
어느 날 익산 외곽에 문병윤 목사가 시무하는 왕춘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문 목사가 자신의 교회에 초대했을 때, 나는 그야말로 혈기 왕성한 40대 초반의 목사였다. 왕춘교회는 닭과 돼지를 사육하는 축사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때가 한여름이었는데 나는 차종순 교수가 선사해 준 보라색 액센트를 타고 교회 마당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나의 보라색 차를 발견한 문 목사는 사택에서 부리나케 나와 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예쁜 보라색 슬리퍼를 신고. 그 모습이 얼마나 정겹던지 아직도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시력이 유독 나빠서 두꺼운 안경을 쓰고 있던 그는 곁눈질하는 듯 나를 바라보며 “교수님, 멀리까지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하고 나를 사택으로 안내했다. 도자기로 빚은 다기에 노란 녹차를 따르고, 청량해 보이는 접시에 포도를 담아내 대접해 주었다. 바로 그때 생각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교회가 양계, 돼지 축사 한가운데 있는 곳이라 파리가 많은 게 당연했다.
그러나 세상에 태어나 그처럼 많은 파리가 포도송이 전체를 에워싼 장면은 본 적이 없었다. 포도는 보이지 않고 포도 겉면에 노란 꼬리를 한 쇠파리가 까맣게 앉아 있었다. 나는 파리로 뒤덮인 포도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며 먹기를 주저했다. 그 순간 파라과이에서 처음 선교를 시작하며 음식 위에 까맣게 앉은 쇠파리를 손으로 몰아내며 먹었다던 한 선교사님의 소중한 경험이 떠올랐다.
쇠파리로 뒤덮인 음식을 먹음으로써 선교사의 사역이 시작된 것처럼, 나도 쇠파리가 앉은 포도를 손으로 날려 보내며 먹어야겠다고 판단하게 된 것이다. 나의 손동작을 본 문 목사님은 포도를 좋아해서 다행이라며 나를 기쁘게 받아 주었고, 이후로 수년 동안 그가 하는 교회와 마을 사역에 기쁘게 동참할 수 있었다.
왕춘교회는 도시의 큰 교회가 아니었으나 농어촌 미자립교회와 마을에 존재하는 수많은 어린이, 청소년들을 위해 매년 수련회를 열어 말씀과 친교의 잔치를 열고 있었다. 나는 이종록 교수와 더불어 마을 어린이, 청소년 사역의 강사를 맡아 하나님의 사역을 즐겁게 하였다.
나는 호남지역을 신앙의 땅, 음식의 땅, 우정의 땅, 음악의 땅으로 기억한다. 위의 캐나다 매킨리 산맥에서 호남신학대 목회학 박사과정 친구 목사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그것을 증명한다. 특히 이동균 목사와 1997년에 맺은 친우 관계는 여태껏 진하게 이어오고 있다. 그는 호남의 선비다. 우리 녹차, 음악, 그림은 물론이고 마을 사람들과 같이 농사를 짓고 야학을 운영하며 실로 넓고 깊은 마을목회를 실천하고 있는 목회자다. 나보다 두 해 선배인 그는 정승모 목사와 함께 나의 둘도 없는 형이요, 친우다.
작은 것이라도 나눠 쓰고 나눠 먹고 같이 공부하려는 그들은 호남 땅이 얼마나 풍요롭고 여유가 넘치며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는지를 알려주는 좋은 예가 돼주었다. 월광교회에서 오랫동안 사역하다가 지금은 은퇴하여 함평 부근의 대안학교를 섬기며 행복한 가정, 마을 속의 다음 세대를 세우는 양육 사역에 삶을 바친 그와 나는 깊은 교제를 나눴다. 그는 나의 절친 고 황영훈 교수에게 논문지도를 받았으며 비록 연배가 아래인 나와 황 교수를 극진히 대해주었던 분이다.
◇ 호남신대와 미 하워드대 공동 목회학박사 프로그램 중 매킨리 산맥을 등반하다 사망한 고상돈, 이일교 등반가의 묘비 앞에서
그러고 보니 몇 년 전 황 교수가 하늘나라로 급히 떠나갔을 때가 떠오른다. 나는 친구의 별세 여정을 안내하고 모든 예식을 주관하는 가운데, 황 교수를 향한 김유수 목사의 마지막 초대를 기억했다. 황 교수가 육체의 힘이 거의 소진되었을 무렵, 김유수 목사는 내가 황 교수를 부축하여 자신이 섬기는 월광교회로 와서 황 교수가 설교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길 바랐다. 나와 김유수 목사는 알고 있었다. 이 땅에서 황 교수의 여정이 거의 끝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그때 황 교수는 “완전히 깨진 그릇도 사용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할 수 있었고, 나는 그의 꺼져가는 불꽃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며 김유수 목사와 함께 눈물을 흘렸다. 김유수 목사는 영빈관이라는 풍암동의 식당에서 우리를 정성껏 대접했고 그때 황 교수는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식욕을 다 발휘하여 삼합을 아주 맛있게 먹었다. 그것이 셋이 함께한 마지막 식사였다. 광주는 멋과 맛이 살아 있는 도시다. 그것을 김유수 목사, 황영훈 교수, 이동균 목사가 밝히 드러내 주었다.
나는 미국 이민교회를 떠나 생전 처음 광주의 호남신학대 정문에 들어섰을 때, 단기 선교사가 된 듯한 심정이었다. 이민교회에서 부르심을 받았고, 지금도 이민자들을 보면 눈시울을 붉히는 것만 봐도 분명 이민교회에 사명이 있다고 느꼈었다. 1997년 가을학기를 시작으로 나는 모국에서의 가르치는 사역을 시작했고, 안정되고 실력 있는 교수들과 열정적인 학생들 그리고 말씀을 목마르게 갈구하는 성도들의 뜨거움 덕택에 첫 삼 년을 하루처럼 보냈다.
금세 다시 이민교회로 돌아가야 한다고 믿었기에 기독교교육 영문 서적들을 하나씩 서둘러 번역했다. 호레이스 부쉬넬의 『기독교적 양육』, 마리아 해리스의 『종교교육과 상상력』, 토마스 그룸의 『생명을 위한 교육』, 매리 보이스 편 『제자직과 시민직을 위한 교육』, 월터 브루그만의 『창조적인 말씀을 통한 기독교교육』, 아이리스 컬리의 『성경과 기독교교육』, 랜돌프 크럼프 밀러의 『기독교교육의 단서』, 조지 앨버트 코우의 『종교교육사회론』 등 결코 쉽지 않은 원서들을 쉬지 않고 번역했다.
그때는 30대 후반과 40대의 나이였고, 50이 되기 전까지는 내 글보다는 선배 학자들의 글을 잘 해설하여
후학들에게 전하는 것이 나의 사명이라고 여겼다.
호남신학대의 황승룡 총장은 무척 온유하고 마음이 깊은 선배다. 차종순 교수도 넉넉한 호남인 학자로서 풍류를 아는 사람이다. 사람을 품고 사랑으로 돌보며 토속의 전통을 존중하고 즐기며 주변 사람들에게 전하는 사람들이었다. 학교와 지역사회를 사랑하는 그들 덕에 나는 IMF 금융위기 속에서도 미국에 남겨둔 빚을 조금씩 갚으며 이겨낼 수 있었다.
물론 미국에 있던 동서들이 나서서 남은 학자금 대출을 갚아준 사랑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1997~2001년 당시 호남신대는 학생들로 넘쳐나던 시기였다. 게다가 그 당시 모든 신학교가 다 잘 운영되었던 게 아니었다는 점은, 호남신대가 실력과 영력에 있어 출중한 하나님의 학교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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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일은 장신대 기독교교육학과 교수로 한국기독교교육학회 회장을 역임하며 다음 세대를 세우고, 가정교회마을연구소 공동소장으로 이 땅 위에 하나님나라를 확장시키는 일에 힘쓰고 있다. 이 지면을 통해 삶 속에 구체적으로 역사하시며 이끌어 오신 그분의 발자취를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김도일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 cnews1970@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