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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카야마和歌山 유학儒學의 비조鼻祖 이진영李眞榮·매계梅溪 부자父子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이진영은 고금의 책을 폭넓게 읽어 학식이 풍부했다. 고된 농노생활을 하다 풀려나 글을 가르치며 생계를 이었는데, 새 통치자 요리노부에게 정중하게 번정 건의문을 올렸다가 존경받는 시강侍講이 된다. 끝내 고향땅을 다시 밟지 못하고 죽었지만 그의 책과 원고는 장남 매계를 유신儒臣의 반열에 올려놓았고, 매계는 일본인의 교육헌장이나 다름없는 ‘부모장父母狀’을 만들어 이름을 날렸다.
이진영은 1571년 지금의 경남 창녕군 계성면 명리의 영취산 서쪽 산기슭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공제李公濟는 진사였다. 합천 이씨 집성촌인 이 마을은 벼슬길에 오른 사람이 꽤 여럿일 정도로 면학의 기풍이 잡힌 곳이었다.
어린 시절 이진영은 ‘천자문’ ‘동몽선습’, 그리고 ‘소학’ ‘사서삼경’에 이르기까지 한학을 두루 배웠다. 소년시절에는 주역周易도 깊게 배워 나름대로 괘卦를 빼보는 경지에 이르렀다. 물론 목표는 과거 시험이었을 것이다.
이진영이 22세 되던 해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1592년 4월 1만8700명의 왜병이 대마도에서 병선을 타고 와 부산성을 급습한 것이다. 진영은 의병장 곽재우 휘하에 의병으로 참여했던 것 같다. 그러다 진주성 전투 때 수비군으로 가담해 싸우고, 진주성이 함락되자 왜장 아사노 유키나가 부대의 포로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진영은 다른 포로들과 함께 부산으로 끌려갔다. 왜군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납치해서 끌고 갔다.
이진영은 부산에서 배로 옮겨져 대마도, 규슈의 시모노세키를 거쳐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를 통과해 오사카로 갔다. 밧줄에 묶인 채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이진영도 나니와(難波·오사카의 옛 지명)의 어느 농가에 배치됐다고 하나 어디, 누구 집이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농노 생활은 고단하고 힘들었다. 그렇게 6년여 세월이 흐르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1598)과 더불어 전쟁이 끝났다.
그러나 시련은 끝이 아니라 오히려 시작이었다. 돌연 다른 농촌으로 팔려가게 된 것이다. 나니와의 주인이 지금의 와카야마시 마쓰에니시초에 해당하는 기이구니 가이소군 니시마쓰에무라(紀伊國 海草郡 西松江村)에 사는 니시유 에몬에게 그를 팔아넘긴 것이다.
낯선 주인을 섬겨야 하는 머슴살이는 더 고됐다. 거기서는 농사만 짓는 것이 아니라, 산에 올라가 나무도 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진영은 산에서 한 스님을 만났다. 이진영에게 말을 건 스님은 그의 말투가 이상하자 관심을 보였다. 이진영은 결국 “전쟁 때 포로로 잡혀와 지금은 니시유 에몬 집안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고백했다.
그런데 스님 사이요(西譽)도 조선 사람이었다. 스님은 ‘어떤 이유’로 일본에 건너와 지금은 인근 해선사海善寺라는 절의 승려가 되어 있었다. 두 사람은 금세 마음을 열고 대화를 나누었다.
이진영은 사이요에게 해선사에 데려가 달라고 애원했다. “농노 생활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면 참으로 백골난망입니다” 하며 매달렸다. 결국 스님이 주인을 찾아가 이진영을 풀어줄 것을 요청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하고 말았다. 스님은 해선사에 돌아와 주지 스님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진영의 학문적 자질이나 능력에 비추어 농노로 썩히기에는 아깝지 않으냐면서. 마침내 주지 스님이 허락해 절에서 니시유 에몬에게 몸값을 지불하고, 이진영을 절로 데려올 수 있었다.
이진영은 사이요를 만나 운명이 바뀐다. 해선사에서 불교를 공부하고 다소 안정된 삶을 되찾았다. 그는 유학을 했기 때문에 불학佛學의 진전도 매우 빨랐다. 정진을 위해 해선사의 본산인 소지지(總持寺)에 들어가 공부하기도 했다. 그 절은 해선사에서 멀지 않은 데 있었다. 이진영은 계율이 엄하기로 유명한 소지지의 생활도 잘 견뎌냈다.
그러나 승려 생활과 불학에 깊이 빠지지는 않았다. 유생이 불도가 되는 데 한계가 있었을까. 어쩌면 유학의 불모지인 일본에서 자신의 유학 실력과 역학易學 재능을 살려 독자적인 삶을 개척하고 싶은 꿈이 움텄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사이요에게 자신을 놓아달라고 부탁했다. 사이요가 만류했지만 이진영은 뜻을 굽히지 않고 결국 오사카로 옮겨갔다. 그러나 9년 뒤 와카야마의 해선사로 돌아왔고, 죽은 뒤에도 해선사에 묻혔다.
이진영이 오사카로 진출한 것은 1605년 35세 때다. 그는 역학원을 개설해 생계를 잇고 한편으로 글을 가르쳤다. 그에 대해서는 고금의 책을 널리 읽어 견식이 풍부하고(博覽廣聞) 특히 역술에 뛰어나다(最精易道)는 평이 전해지고 있다.
그는 고국에 돌아갈 꿈을 품고 오사카에 갔는지도 모른다. ‘파신波臣의 눈물’의 저자 이상희 李相熙씨(前 내무부장관)는 몇 갈래의 추론을 제시한다.
첫째, 이진영이 일본 이름을 갖지 않고 그때까지 조선 성과 이름을 지니고 있었던 점.
둘째,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서른다섯이 되도록 살아온 점(결혼은 46세에 했다).
셋째, 와카야마에서 오사카로 간 것은 조선 정부의 쇄환(刷還)사절단이나 통신사가 지나가는 길목을 택한 것 아닐까 하는 점. 그리고 은인인 사이요가 만류하고, 승려 생활이 그다지 불편한 것이 아닌데도 굳이 오사카로 독립해 나간 것은 귀국 일념 때문일 것이라는 게 이상희씨의 의견이다.
1605년 사명대사가 쇄환사절을 이끌고 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담판을 벌이고, 납치된 조선인 3000명을 데리고 귀국한 사실이 기록에 나온다. 당시 조선의 쇄환사절이 왔다는 소문이 일본 열도의 조선인들에게도 널리 퍼졌던 것 같다. 1607년엔 여우길呂祐吉을 정사로 하는 쇄환사절이 일본에 와서 1418명을 송환시켰다. 그때의 기록에는 애절한 사연들로 가득하다.
이진영은 오사카에서 9년 남짓 살았다. 거기서 한학을 가르치고, 사람들의 운명을 예견해주며 지냈다. 그가 조선의 쇄환사 일행과 만났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그의 아들 매계梅溪가 훗날 조선통신사를 만나 아버지에 관해 “갖은 고생이 겹쳐도 호소할 데가 없고, 외로운 신세로 혼자 고독하게 지냈다(顚連無告 孤身獨守)”고 한 것으로 미루어, 쇄환사를 만나는 행운을 잡지 못했던 듯하다.
1614년 오사카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히데요시 정권의 명맥을 끊으려는 전쟁이 발발한다. 오사카는 아비규환의 수라장이 되고, 이진영은 다시 와카야마로 돌아갔다. 해선사의 스님 사이요는 다시 진영을 따뜻하게 맞아줬다.
그는 절 앞 구보초에 사숙私塾을 열어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오사카에서의 경험을 살린 것이다. 입소문이 번지고, 사숙은 번창해갔다. 경서와 사서에 조예가 깊은 그에 대해 좋은 평판이 번져나갔다.
그 무렵 이진영은 결혼 상대를 소개받았다. 아리타군(有田郡) 토호의 딸로, 39세의 과부였다. 1617년 46세이던 이진영은 그녀와 결혼했다. 포로로 잡혀 온 지 25년째 되던 해다. 그는 귀국을 포기했던 것 같다. 그 이듬해 아들 매계梅溪가 태어났다.
1619년 와카야마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열 번째 아들 요리노부가 입성했다. 기이국(紀伊國)을 다스릴 새 다이묘(大名)로 부임한 것이다.
이진영은 새 통치자 요리노부에게 1336자에 달하는 번정藩政 건의문을 올렸다. 정중한 방식으로 일종의 제왕학을 제시한 것이다.
“그는 민본정치와 덕치, 그리고 인화와 평화를 강조하고, 특히 인사관리의 중요성을 갈파했다. 또 지도자의 대범하고 큰 도량을 강조하며, 매사에 신중하고 사심邪心을 버리고 임할 것을 주장했다. 380년 전의 이 지침은 오늘날에도 고스란히 적용될 만한 정치사상을 담고 있다고 본다.”(이상희李相熙(前 내무부장관)의 설명)
이 건의문을 본 요리노부는 이진영에게 시강(侍講 : 예전에, 왕이나 세자 앞에서 경서를 강의하던 일이나 그 일을 하던 사람)이 되어주기를 청했다. 요리노부는 처음에 신하가 되어달라고 했다.
그러나 이진영이 “나는 조선에서 섬기던 임금이 있습니다. 두 임금을 섬기는 것은 천리에 맞지 않습니다”라며 시강만 맡겠다고 한 것이다. 그는 시강의 대가로 매년 쌀 30석을 받았다.
이진영이 1626년부터 2년간 대마도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번의 명령으로 대마도에서 조선국 사신과 응대한 일이 있다’(和歌山史要), ‘대마도에 가서 선박거래품에 관한 요무要務를 띠고 한상韓商을 만나고 구매 담당을 했다’(和歌山縣誌), ‘대마도에 건너가서 조선사람들과 대담하기에 이르렀다’(南紀德川史).
대마도에서 다시 와카야마로 돌아온 뒤에도 그는 요리노부의 시강을 계속했다. 그러다 1633년 63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일본인 부인과 17세의 매계梅溪, 그리고 13세의 입탁을 남긴 채.
아들 매계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에게 글을 배웠다. 매계는 호이고, 본 이름은 전직全直이지만, 일본에서는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다. 총명한 매계는 교토에 유학을 간 적도 있는데, 번주藩主 요리노부는 특별히 은 2관을 주어 그의 공부를 격려했다. 그리고 이진영이 죽은 뒤에도 그의 가족들에게 해마다 공미功米 30석을 주었다.
매계의 처는 나가타 젠사이(永田善齋·진영의 유학 제자)의 딸이다. 매계도 번藩의 유관儒官직을 맡아 요리노부를 도왔다.
1655년 매계는 조선통신사로 일본 에도(江戶·도쿄)에 도착한 남용익南龍翼 이명빈李明彬 일행을 찾아갔다. 남용익은 ‘문견별록聞見別錄’에 이렇게 적고 있다.
“이전직(매계)의 아버지 진영은 조선 사람이다. 전직은 사람됨이 순박하고 후중하며 다소 시율詩律을 알고 글씨와 그림도 꽤 정밀하였다. 우리나라 사람에 대해 말할 경우 유연하고 옛 인연을 느끼며, 근본을 생각하는 듯하였으며,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아마 천성으로 타고난 양심은 없어지지 아니한 것 같았다.”
“이전직은 두 번 절하고 조선 사절에게 아뢰옵니다. 나의 아버지 진영은 경상도 영산 사람입니다. 포로로 잡혀와서, 쇄환의 대열에 끼지 못하고 귀국의 희망이 좌절되었지만, 죽을 때까지 고국을 그리는 마음은 변치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죽고, 저는 아버지가 물려준 책과 원고를 읽으며 공부해서 번의 유신儒臣 반열에 있고, 동생 입탁은 의술을 배워서 의관으로 있습니다.
이제 다행스럽게도, 여러분께서 이곳에 오셨으니 저의 선조의 내력이나 그 언행을 아시는 것이 있다면, 저의 이 심정을 불쌍히 여기시어 한 자, 한 줄이나마 써주시되, 각인이 어느 고을에 살고 어떤 관위에 있었던가를, 자字는 무엇이고 호號는 무엇인지를 기록하여 제게 주시면, 선조의 흔적으로 알고 보존하겠습니다. 오직 이렇게 간절히 아뢰나이다.”(‘문견별록’에서)
매계가 나중에 일본의 교육헌장이 된 ‘부모장父母狀’을 짓게 된 데는 사연이 있었다.
도쿠가와 요리노부가 다스리는 구마노(熊野) 지역에서 아버지를 죽이는 살부殺父사건이 발생한다. 그런데 범행을 저지른 청년이 참회하는 빛이 없이 “방탕하여 가족을 괴롭히는 아버지 죽인 것이 무슨 대단한 죄인가? 남의 아버지를 죽인 게 죄라면 몰라도 내 아버지는 죽을 짓을 했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요리노부는 “짐승도 저지를 수 없는 대죄를 범하고도, 뉘우침이 없는 것은 나의 부덕의 소치요, 효도의 정신을 함양케 하지 못한 내 탓도 있다”고 자탄했다. 그러면서 즉각 처형하기보다 스스로 회개케 한 후에 형을 집행하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요리노부는 매계를 불러 그 청년을 가르쳐 깨우치도록 하라고 당부했다. 청년은 매계에 의해 마침내 크게 뉘우치고 대죄를 깨닫게 되었다. 요리노부는 크게 기뻐하면서 “법은 법이니 형을 집행하라”고 명령한 뒤, 매계에게 “이번 일을 계기로 영민領民에게 인륜의 요도要道를 담은 교훈이 될 글을 지어주시오” 하고 청했다. 이렇게 해서 ‘부모장’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 가르침은 와카야마를 넘어 일본 전역의 자녀 교육 지침이 됐다.
매계는 1682년 64세에 사망했다. 결혼 후 후사가 없어 청헌淸軒이라는 일본인 제자를 양자로 삼았다. 청헌도 유관이 되어 번의 서적 사무를 맡았다. 청헌은 1700년 사망해 해선사의 선조 옆에 봉안됐다.(출처 : 동아일보 ‘열도의 한국혼⑩’(김충식 동아일보 논설위원)에서 발취)
근래에 진영眞榮의 관향인 합천이씨 문중에서 와카야마에 있는 ‘일노 진영·매계 부자 현창비一怒 李公 眞榮·梅溪 父子 顯彰碑’를 복제하여 죽어서도 돌아오지 못한 진영의 고향 '경남 창녕군 영산면 동리 134-2. 연지 硯池 연못가'에 세웠다.
그의 일족은 일본 땅에서 번성하지 못하고 근대에 이르러 대가 끊기고 말았다.
현해탄에 핀 매화(공연내용)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晉州城 전투에서 포로가 된 이진영李眞榮(22세 합천이씨陜川李氏)은 오사카大阪, 와카야마和歌山 지방地方을 전전하다가 기슈紀州 성주城主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賴宣(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제10번째 아들)에게 훌륭한 유학자儒學者로 인정받아 일본日本 귀화歸化를 종용 받지만 ‘선비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불사이군不事二君)’하여 거절하고 시강侍講으로 추대를 받아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賴宣의 인격人格과 정치政治에 큰 영향影響을 끼쳤다. 또한 그의 아들 매계梅溪의 작품作品인 부모장父母狀을 통하여 와카야마和歌山의 정신적精神的 지주支柱로 400년을 이어 지금까지 조선인朝鮮人의 긍지를 지켜 존경 받아온 전설적 인물이다.
포로의 몸이었지만 오히려 와카야마和歌山의 사랑과 존경을 박아온 아름다운 실화實話를 통하여 국경國境을 초월한 사랑이 펼쳐진다. 또한 조선의 선비정신과 일본日本의 무사도정신武士道精神이 함축된 본 작품은 세계명작世界名作으로 승화昇華될 것이다.
宮崎家의 여성女性과 결혼結婚한 이진영李眞榮은 매계梅溪와 입탁立卓 형제兄弟를 낳아 행복幸福한 가정家庭을 이루고 생활生活을 하나 조선朝鮮에 있는 부모父母를 섬기지 못한 불효不孝를 조석朝夕으로 통렬痛烈히 고민하는 이진영李眞榮을 본 부인夫人 미야사키宮崎는 남편을 조선朝鮮으로 탈출脫出시키기 위하여 밀선密船을 준비準備한다.
배를 타고 조선朝鮮으로 탈출하는 이진영李眞榮, 그러나 사랑하는 부인夫人 미야사키宮崎를 뒤돌아보는 순간瞬間, 비닷물에 뛰어들어 미야사키宮崎의 품에 안긴다.
이진영李眞榮은 그 후後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賴宣의 시강侍講이 되고 매계梅溪는 부父의 뒤를 이어 紀州의 유관儒官이 되고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賴宣의 세자. 미쓰사다光貞의 시강侍講이 된다.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賴宣은 극極히 혼란상태混亂狀態에 빠진 당시當時 사회社會의 수습책收拾策을 고심한 결과 매계梅溪로 하여금 부모장父母狀에 의한 번민교화蕃民敎化를 반포케 하는데...(출처 : 2002년 한일 월드컵 공동개최 기념 창극 '현해탄에 핀 매화'(원작: '파신波臣의 눈물') 팜플렛)
* 「波臣」이란 「풍파를 겪은 나머지의 신하」라는 뜻으로 원래 「莊子(장자)」 外物篇(외물편)에 나오는 말인데, 李梅溪가 부친 李眞榮이 타계한 후 일본을 찾은 조선통신사 일행에게 건네준 율시에서 인용
* 父母狀의 원문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法度(법도)를 지키며 겸손하여 사치하지 않아야 한다. 각기 맡은 바 직무에 힘쓰고 정직을 근본으로 삼아야 하나니, 이는 누구나 잘 아는 일이지만 항상 경계하여 본으로 삼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