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깍발이 선비의 일생>(창비)은 일석 이희승(1896~1989) 선생의 회고록이다. 선생은 학문에 부지런하고 가르침에 염증을 느끼지 않기[學不厭 敎不倦]로는 표본 같은 이였다. 회고록에는 선생이 서른에 경성제대 조선어문학과를 택해 입학한 일이 기록돼 있다. 그 전에 선생은 이미 연희전문 수물과數物科에 재적 중이었다. 그럼에도 우리 어문학 연구를 위해 경성제대 진학을 원했던 것이다. 선생은 하루 두어 시간 정도로 잠을 줄인 끝에 목적을 달성했다고 한다. 제자를 가르칠 때 선생의 진면목은 어느 때보다 잘 드러났다. 선생은 두 시간 연속 수업에 앞서 반드시 5분 전에 강의실에 들어왔다. 그리고는 120분이 다 차기 전에 강의를 끝내는 법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선생은 구세대의 품격을 고루 갖춘 이였다. 생활은 검소하고 차릴 인사는 반드시 법식대로 하였다. 당신이 숙아宿㢌(오래된 질병)로 고생하는 때에도 모친상을 당한 제자를 위해 빈소에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두루 알려진 것처럼 선생은 평생을 교직에서 얻은 수당으로 청빈하게 살았다. 그럼에도 죽음을 앞두고 평생 아껴 갈무리한 돈을 후학의 장학금으로 희사했다.
선생의 평생은 문자 그대로 곧 진솔한 말씀과 행동으로 일관했다. 특히 지킬 것은 지키고 삼갈 것을 삼간 점에서 선생의 평생은 우리 시대의 누구도 추종할 수 없는 전범으로 남는다. 그러나 이 책에 나타난 선생의 일생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회고록에 따르면 선생의 일생에는 몇 차례의 가파른 고갯길, 세상살이의 진흙탕 같은 체험이 있다. 그중 하나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홍원경찰서에 구금된 일이다. 우리 민족의 말살을 획책한 일제는 선생을 형틀에 올려 혹독하게 고문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는 악형에 살점이 튀고 뼈가 어긋났다. 더욱이 고문을 자행한 자는 우리와 피를 같이한 동족이었다.
또 1•4 후퇴 때 선생은 비도강파非渡江派로 분류된 신분이었다. 차편을 구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아무도 선생을 알은 체하는 이도 없었다. 그래서 선생은 도보로 피란지 부산까지 가야 했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선생이 부역했다는 이유로 징계위원회에 회부하겠다고 했다. 평생 교단을 지키고 우리 어문을 사랑한 선생에 대한 정부나 사회의 보답이 이랬던 것이다. 선생의 회고록에는 어디에도 이런 일에 대한 불평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