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씨년스러운 새해
2025년은 육십갑자 명칭으로 을사년(乙巳年)이다. 乙이 푸름을, 巳는 뱀을 뜻하니 올해는 푸른 뱀의 해다. 뱀은 허물을 벗는 동물이라서 새로움을 뜻한다는 긍정적인 의미를 가지지만 어째 그리스도인에게는 사탄의 이미지가 각인된 탓인지 생각하고 싶지 않은 짐승이다. 그래서일까? 을사년 새해는 미래의 밝은 희망이 공중에 높이 떠있는 애드벌룬처럼 부풀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한마디로 을씨년스러운 새해다. 역사는 수레바퀴처럼 돌고 돈다는데 지금부터 120년 전 을사년의 상황이 반복되는 듯하다. 1905년 을사년은 우리 근대역사에서 치욕스러운 사건이 있었다. 그해 대한제국은 일본과 불평등조약을 맺었다. 원래 이 조약문서에는 제목이 없어서 일본에서는 ‘일한교섭조약’, 대한제국에서는 ‘한일협상조약’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체결 내용이 일방적으로 우리가 불리한 조약이라고 해서 역사는 이 조약을 '제2차 한일협약', '을사조약', '을사보호조약', '을사늑약'이라고 지칭했다. 늑약(勒約)은 당사자 간의 합의에 의한 계약이 아니라 강제로 맺은 조약을 말한다.
을사늑약은 1904년 2월 8일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군이 9일에 인천에 상륙하고 다음날 서울을 점령하면서 시작되었다.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와 일본군 사단장이 대한제국의 대신들을 매수, 협박, 추방하고 2월 23일 일본군이 한반도 내 주둔과 사용을 허가하는 한일의정서를, 8월 22일에 제1차 한일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일본은 노골적으로 내정을 간섭하기 시작했다. 이후 일본이 러일전쟁의 승기를 잡자 미국은 1905년 7월 27일에 일본과 카츠라 데프트 밀약을 맺고 일본의 한국지배를 암묵적으로 동의해 주었다. 이로써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으로부터 이어진 한반도 침략 계획을 마무리하고 1905년 11월 27일 외교권만 관여한다는 조약의 강제 체결로 한국을 실제 지배하겠다는 늑약을 발표하였다. 이때 대한 국민들은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온 나라가 비통함과 비장한 분위기에 휩싸이고 말았다. 그날 이후 몹시 쓸쓸하고 어수선한 날을 맞이하면 마치 '을사년과 같다'고 했다. 이 말은 소설가 이해조(李海朝)가 1908년에 순우리말로 ‘을사년스럽다’라고 최초로 기록에 남겼고 나중에 '을씨년스럽다'라고 바뀌었다. 이제는 남 보기에 매우 쓸쓸한 상황, 혹은 날씨나 마음이 쓸쓸하고 흐린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 되었다.
그 후 을사년이 두 번째 돌아오는 새해 국내 상황을 보면 120년 전 을사년 때처럼 매우 을씨년스럽게 쓸쓸하고 흐린 상태로 열린 것이다. 지난해 갑진년(甲辰年) 용의 해가 저물어가는 때 무너져가는 민주주의 헌정 질서를 바로잡으려고 대통령실이 위치한 용산에서는 하늘로 웅비하는 용의 통치를 만방에 선포했다. 입법독재 하에서 정의가 실종되고 공정도 사라진 나라를 바르게 세우고자 용산 발 고도의 통치행위가 시행된 이래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사태는 을사늑약의 때와 너무나 흡사했다. 헌법 위에 군림하는 막강한 입법 권력의 횡포, 여기에 야합한 정치인들의 행태, 자신의 안일만을 도모하기 위한 배신이 난무했다. 여권의 잠룡들 역시 동상이몽을 꿈꾸며 야권의 분탕질을 수수방관했다. 법치국가 대한민국에서 헌법은 무용지물로 전락하여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 식 법해석으로 헌정질서는 무너지고 말았다. 주권자 국민이 직접 뽑은 대통령을 배출하여 집권 여당이 된 대표와 그 추종자들은 앞 다투어 탄핵의 강을 넘고야 말았다. 그 어디에도 자유 민주주주의 수호라는 국정 대과제를 위하여 고군분투하는 애국지사를 볼 수 없으니 개탄할 노릇이다. 여론은 국민을 호도하고 가짜 뉴스가 광란의 무대를 장식하며 국민의 눈과 귀를 막았다. 무엇이 진실이고 정의인지는 알길이 없다. 망망대해에 떠있는 대한민국 호(號)는 선장을 잃은 일엽편주처럼 표류하고 있다. 어쩌면 두 번의 육갑이 지나고 맞이한 오늘, 을사년스럽던 그날의 악몽이 고개를 쳐들고 온 국민은 다시 을씨년스러운 새해를 맞이하는 것은 아닌가?
그러나 갑진년 용이 을사년 뱀에게 먹히는 것 같아 을씨년스러워 보이지만 120년 전 을사년과는 분명 다르다. 을사오적(乙巳五賊) 같이 국가와 국민을 배신한 인물이 그 이상으로 존재한다지만 그때와는 판이 다른 상황이다. 자유를 열망하고 민주 수호로 국가 미래를 밝히고자 깨어있는 애국 시민들이 하나가 되었다. 혹한의 날씨를 애국의 열기로 녹이면서 나라와 미래 세대를 지키려고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는 그들의 헌신적 수고는 하늘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1950년 동족상잔의 비극적 전쟁이 터져 제2의 망국이란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연합군의 개입으로 전세를 역전시켰던 기적의 순간이 또다시 기적의 땅 대한민국 하늘 아래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지난 을사년은 을씨년스러웠고 절망적이었으나 오늘 을사년은 더욱 희망의 횃불이 하늘 높이 타오를 것이다. 지난 120년의 근현대사는 망국, 분단, 전쟁, 빈곤이란 총체적 국난의 과정이었지만 우리 민족은 극복(國難克服)이란 대역사를 만들었다. 세계는 놀란 가슴으로 우리나라를 바라보았고 부러운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이는 모두 국민의 저력이 만들어낸 우리만의 자랑거리다. 어둠이 가장 깊어지면 곧 아침이 밝아오는 것이 자연의 순리 아니던가? 그래서 2025년 을사년 을씨년스러운 우리의 처음 출발은 더욱 확실하게 빛날 소망의 새 아침을 강렬하게 기대하고 확신한다. 기도가 더욱 절실한 새해다.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혜는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편 30:5).
을사늑약을 체결한 후 기념 촬영(1905년)
을사오적(출처 위키 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