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 노트 4
수행 노트는 1996년도부터 미얀마 마하시 명상원에서 수행을 지도하시는 스승과 한국인 수행자들의 수행면담을 해를 거듭하면서 기록한 내용입니다. < 참고 >는 수행자의 바른 이해를 돕기 위해서 별도로 보충한 내용입니다. 수행은 개인의 근기에 따라 다양한 방법이 있습니다. 하지만 총론에서 벗어나면 안 되므로 반드시 스승의 검증을 받아야 합니다. 또 스승에 따라 다른 수행방법도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1. 질문 : 다른 수행자와 말을 했더니 집중이 되지 않습니다.
답변 : 수행자는 묵언을 해야 한다. 말을 하면 말한 것이 망상으로 되살아나 명상에 장애를 준다.
참고 : 수행자가 묵언을 해야 한다고 해서 극단적으로 말을 하지 않는 것도 장애의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필요한 말을 하되 불필요한 말은 삼가는 것이 좋습니다. 지나치게 말을 억제하면 오히려 말을 더 많이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극단적인 억압은 자율성을 파괴하고 분노와 욕망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나 지나치면 작용에 대한 반작용이 일어나 오히려 역효과가 생깁니다.
내가 말이 하고 싶어서 다른 수행자에게 말을 하면 나의 장애는 물론 상대에게도 나쁜 영향을 줍니다. 수행자들이 말을 하면 이 말이 정보가 되어 좌선 중에 망상으로 떠오릅니다. 그래서 좌선을 하기 전에 경행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면 좌선을 할 때 한결 집중이 잘 됩니다.
수행자들이 자신의 수행담을 자랑하는 것은 서로에게 독이 됩니다. 수행자들끼리 수행을 비교해서는 안 됩니다. 수행자들은 각자의 업에 따른 근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직 자신의 내면을 통찰하는 것이 전부여야 합니다. 다른 수행자의 수행과 자신의 수행을 비교할 때 시기와 질투심이 생기며 수행이 퇴보합니다.
다른 수행자에게 수행을 지도하는 것도 위험합니다. 수행지도는 반드시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좋습니다. 수행자가 수행에 대해서 하는 말은 거의 잘못된 말일 수 있습니다. 수행은 큰 흐름에서 보아야지 당장의 문제에 국한해서는 안 됩니다. 수행자는 자신의 수행에 대해서도 옳고 그르다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판단은 스승의 몫입니다. 자신은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 외에 자가진단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 길은 그간 가보지 않은 길을 가는 것이라서 오직 경험이 있는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야 합니다. 잘못 판단하면 옳은 것을 그르다고 여기고 그른 것을 옳다고 여기는 잘못을 범합니다.
2. 질문 : 어떻게 하면 바른 수행을 할 수 있는지 가르침을 주십시오.
답변 : 호흡을 알아차릴 때는 일어남과 꺼짐의 전 과정을 면밀하게 알아차려야 한다. 경행을 할 때는 먼저 얼마동안 오른발, 왼발을 알아차린 뒤에 들어서, 놓음을 알아차려라. 이렇게 알아차린 뒤에 들어서, 앞으로, 놓음을 알아차려라. 발의 움직임을 차츰 더 자세하게 알아차리면 집중이 된다.
자는 시간은 4시간으로 하고 나머지 20시간은 알아차리는 시간으로 채워야 한다. 잠을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하루의 전 시간을 알아차림이 끊어지지 않도록 연결해서 알아차려야 한다. 우리에게 탐욕, 성냄, 어리석음과 교만심과 잘못된 견해가 있기 때문에 알아차리는 시간으로 가득 채워야 한다. 이런 것들이 있는 한 바른 체험을 하기가 쉽지 않다. 처음 시작하는 수행자들은 빈틈의 시간이 너무 많다.
참고 : 잠을 자는 시간이 반드시 4시간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초보수행자는 충분히 잠을 자지 않으면 집중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6시간은 자야 합니다. 수행이 향상되면 차츰 수면시간이 줄어듭니다. 그리고 하루 종일 알아차려서 깨어있었기 때문에 깊은 잠을 잘 수 없습니다. 이때가 되면 하루에 4시간으로 충분합니다. 붓다께서는 하루에 4시간을 주무셨습니다.
수행자는 다섯 가지가 구족해야 한다.
첫째, 알아차림의 확립이다.
알아차림의 확립을 사띠빠타나(satipatthana)라고 한다. 알아차림을 놓치고 아라한이 된 사람은 하나도 없다. 붓다의 제자 1250분의 아라한 중에서 알아차림을 여의고 아라한이 된 사람은 없다. 이처럼 알아차림을 확립하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아라한이 된 예는 결코 없다. 그래서 모든 수행자는 알아차림이 밀착되어야 한다. 알아차림이 계속 연결되지 않고서는 절대 도과를 성취하여 열반에 이를 수 없다. 아무리 지혜가 적은 수행자라도 알아차림만 유지되면 7일 이내에 아라한이 될 수 있다.
알아차림을 확립하려면 행주좌와에 모두 밀착해서 놓치지 말아야 한다. 만약 알아차림이 연결되지 않고 끊어지면 집중력이 생기지 않아 지혜가 나지 않는다. 그러면 도과를 성취하기 어렵다.
몸에서 일어나는 느낌은 무엇이나 알아차려야 한다. 잠자는 시간 외에 모든 마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몸이 움직일 때 모든 동작을 하나도 놓치지 말고 알아차려야 하고, 느낌이 일어나면 모든 것을 하나도 놓치지 말고 알아차려야 한다. 마음이 일어나면 모든 것을 하나도 놓치지 말고 알아차려야 한다. 이것이 구족하면 누구나 2달 안에 수다원의 도과를 성취할 수 있다. 만약 이렇게 되지 않았다면 바르게 수행을 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마하시 사야도께서 하신 말씀이다. 자기가 이렇게 수행하고 있는지 스스로 알아차려야 한다.
수행자가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면 항상 탐욕, 성냄, 이것이 내 것이라는 유신견, 교만심, 남이 잘되는 것을 질투하는 마음이 있다. 이상 5가지를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오직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참고 : 알아차림의 확립은 네 가지를 대상으로 합니다. 이것이 몸, 느낌, 마음, 법입니다. 네 가지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을 사념처라고 하는데 이것이 위빠사나 수행의 대상입니다. 알아차림은 불교와 수행을 대표하는 가장 상징적인 말입니다. 팔만 사천 법문을 줄이면 삼십칠 조도품이라고 하고, 삼십칠 조도품을 줄이면 팔정도라고 하고, 팔정도를 줄이며 계정혜라고 하고, 계정혜를 줄이면 알아차림이라고 합니다. 알아차림이란 표만 잊지 않고 가지고 있으면 결국에는 피안으로 가는 배를 타서 피안에 이를 수 있습니다.
둘째, 잊지 않음이다.
잊지 않음은 알아차림의 확립을 잊지 않음인데 아빠마다(appmada)라고 한다. 알아차림을 항상 잊어서는 안 된다는 말은 붓다의 법문 중에 한 번도 들어가지 않은 적이 없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수행을 하고자 한다면 붓다의 가르침을 항상 잊어버리지 않고 실천하는 알아차림이 필요하다. 알아차림의 확립과 알아차림의 확립을 잊지 말라는 것은 같은 말인데 사람에 따라서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한 말이며 알아차림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다.
참고 : 잊지 않음은 알아차리는 것을 잊지 않음입니다. 과거를 잊지 않거나 원수를 잊지 않는 그런 기억이 아닙니다. 알아차림이라는 뜻의 빨이어 사띠(sati)도 첫째가 기억이고 두번째가 알아차림입니다. 이때의 기억도 잊지 않음과 마찬가지로 알아차리는 것을 잊지 않음입니다. 그래서 아빠마다의 잊지 않음과 사띠의 알아차림은 같은 뜻으로 쓰이는 말입니다.
붓다의 마지막 유언도 “모든 것은 변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알아차림을 잊지 않고 열심히 노력해서 완성하라.”는 말씀에 아빠마다가 있습니다. 붓다께서 설하신 경전에는 아빠마다가 무려 1천 9백 70번이나 기록되었습니다. 아빠마다는 잊지 않음, 끈질기게 잡고 있음, 가볍게 넘기지 않음, 주저함 없이 알아차림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무엇을 잊지 않고 알아차려야 하는가 하면 몸, 느낌, 마음, 법이라는 네 가지 대상을 말합니다. 이것이 사념처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셋째, 빈틈없는 연결이다.
빈틈없는 연결을 까마딴(kamatan)이라고 한다. 수행을 하면서 대상을 알아차릴 때 찰나도 놓치지 않고 연결해야 한다. 알아차릴 때는 계속해서 밀밀하게 빈틈없이 순서대로 연결해야 집중력이 생기고 지혜가 난다.
참고 : 수행을 할 때 알아차림의 지속이 필요한데 앞선 마음과 뒤에 일어난 마음이 빈틈없이 알아차림을 연결되어야 합니다. 또 하나의 행위에서 다음 행위를 옮겨갈 때도 알아차림이 연결되어야 합니다. 좌선을 한 뒤에 경행을 할 때나 경행을 한 뒤에 좌선을 할 때는 하나의 행위에서 다음 행위로 옮겨갈 때도 알아차림을 밀밀하게 연결해야 합니다. 나무를 계속해서 비벼야 불이 나듯이 알아차림을 빈틈없이 연결할 때 지혜의 불이 일어납니다.
넷째, 마음의 계발이다.
마음의 계발을 수행, 또는 명상이라고 하는데 바와나(bhavana)라고 한다. 마음의 계발은 수행의 향상을 계속 키우는 것이다. 알아차림을 키우지 않고서는 마음이 계발되지 않아 수행이 향상되지 않는다. 수행을 뜻하는 마음의 계발도 끊임없이 알아차리는 것을 말한다.
위빠사나(vipassana) 수행의 위(vi)는 분리, 다르다는 뜻으로 무상, 고, 무아를 말한다. 빠사나(passana)는 통찰, 알아차림을 말한다. 위빠사나 수행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수행으로 무상, 고, 무아라는 삼법인이 일어나는 것을 놓치지 않고 알아차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몸의 호흡을 끊임없이 알아차려야 하며, 느낌을 끊임없이 알아차려야 하며, 마음을 끊임없이 알아차려야 하며, 마음의 대상인 법을 끊임없이 알아차려야 한다. 이것이 사념처 수행으로 마음을 계발하는 위빠사나 수행이다. 이러한 완성을 위해서 빈틈없이 연결해서 알아차려야 한다. 수행자는 이렇게 되도록 노력하고 반드시 이렇게 되어야 한다. 이렇게 노력하면 2개월이면 수다원의 도과를 얻을 수 있고 결국에는 아라한이 되어 모든 번뇌에서 해방된다.
참고 : 2개월이면 수다원의 도과를 성취한다는 말은 마하시 사야도께서 직접 수행자들을 지도한 결과로 나온 말입니다. 보통 바른 수행을 하면 미얀마 수행자들은 2개월 만에 수다원의 도과를 성취한다고 말합니다. 외국인 수행자들도 알아차림의 확립을 지속시켜 집중력이 생기면 2개월 이내에 수다원의 도과를 성취합니다. 반드시 2개월 만에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알아차림을 2개월 정도의 지속시켜 집중이 되면 무상, 고, 무아의 법을 볼 수 있어 마지막에 도과를 성취합니다.
다섯째, 불법승 삼보의 공덕이다.
불법승 삼보의 공덕은 붓다와 붓다의 가르침과 승가의 공덕이다. 이 법은 좋은지 안 좋은지 와서 직접 수행해보라고 초청하는 것이다. 그런 뒤에 여러분의 지혜로 조사해 보아야 한다. 이렇게 해서 자기가 직접 법을 체험한 사람은 스스로 스승이 되는 자신감이 생긴다. 이것이 법의 공덕이다. 이러한 법의 공덕이 생기면 가까운 사람에게 확신을 가지고 이 법을 알려주려고 한다.
도과를 성취한 수다원이 되면 첫째, 살생을 하려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둘째 남이 주지 않는 물건을 가지려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셋째, 음란한 행위를 하려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넷째, 자기 자랑을 하기 위해서 남을 나쁘다고 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다섯째, 정신을 흐리게 하는 음식물을 먹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붓다의 법을 확신한다. 그 뒤에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을 없애는 도가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그리고 붓다의 가르침을 믿는 승가가 대한 믿음이 생긴다. 이것이 수다원이 갖게 되는 마음이다.
참고 : 삼보는 세 가지 보배로 붓다의 가르침과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실천과 붓다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승가를 말합니다. 붓다의 가르침만 있어서도 안 되고 반드시 붓다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수행이 필요하며 이러한 가르침을 계승하는 전통적인 승가가 있어서 가르침이 유지됩니다. 이러한 삼보의 조건이 충족될 때 맹목적인 믿음이 아닌 확신에 찬 믿음이 생겨 도과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 올리는 삼배는 어떤 특정한 개인에게 올리는 것이 아니고 불법승 삼보에 예경을 올리는 것입니다.
수다원의 도과를 성취하여 열반에 이르면 욕망의 세계에 존재를 붙들어 매는 족쇄 3가지가 사라집니다. 유신견, 회의적 의심, 계율이나 금지조항에 대한 집착이 사라집니다. 유신견은 내 몸과 마음이라는 잘못된 견해입니다. 회의적 의심은 모든 것이 원인과 결과로 인해서 생긴 것이라는 알아 의심에서 해방되는 것을 말합니다. 계율이나 금지조항에 대한 집착은 관념적이고 형식적은 모든 행위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수다원이 되면 반드시 일곱 생 이내에 아라한이 되어 괴로움뿐인 윤회가 끝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