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김안로
유형: 문헌
시대: 조선
-----
[정의]
조선전기 문신 김안로가 35가지의 이야기를 수록한 야담집.
[내용]
모두 35가지의 이야기를 소개하였으나 따로 제목을 달지 않고 연속하여 서술하였고, 전개 순서도 일정한 기준 없이 생각나는 대로 전개하여 나갔다.
『용천담적기』의 맨 처음에는 정몽주(鄭夢周)의 사당에 얽힌 이야기를 소개하였다. 칠휴공(七休公)이 영천의 정몽주 사당을 지나가고 있을 때에 정몽주가 현몽하여 사당을 고쳐달라고 하였다는 내용이다.
또, 세조 때에 폐해진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능을 이장할 때에 일어난 신기하고 기이한 일 등의 이사(異事; 기이한 일. 또는 별스러운 일)·기문(奇聞; 기이한 소문)에 관한 것을 많이 싣고 있다.
또, 세종·문종·성종·연산군 등 군왕에 관한 이야기와 김시습(金時習)·성현(成俔)·허종(許琮) 등에 관한 인물담과 고금의 이름난 화가와 그림에 관한 이야기, 중국 사신과 시를 주고받던 이야기 등의 김안로가 들은 이야기를 많이 옮겨 놓았다.
그리고 조수(潮水)의 출입과 지각의 변동에 관한 학설을 소개하고,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는 등의 내용이 있어 여러 방면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의의와 평가]
『용천담적기』는 당시에 전승되던 야담을 기록한 문헌설화로서의 의의와 함께 자연과학 및 예술 전반에 관한 인식을 보여 주는 자료로서 가치를 지닌다.
『용천담적기』는 1971년 민족문화추진회에서 펴낸 『국역 대동야승』Ⅲ에 원문과 번역문이 실려 있다. 규장각도서에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용천담적기 [龍泉談寂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용천담적기 자서]
내가 귀양살이한 이래로 과거의 잘못을 깊이 생각하여 고치려고 스스로 뉘우치고 많이 조심을 하였다. 그렇지만 어리석은 내가 둥근 구멍에 따라서 네모난 장부를 고치거나, 남에게 잘 보이려고 부엌에 제사 지낼 수는 없었다. 내 뜻으로는 본질을 지키며 충심을 다하여 험악한 일을 무릅쓰고 한 길로만 달리면서 거의 실낱같은 충성을 바치려 하였으나 목을 움직여 말만하게 되면 남의 시기를 받게 되고 발을 들어 행동하기만 하면 함정에 빠져 당실(집안 식구)과 폐부(일가 친척)가 모두 구기나 고가가 되었다.
한 사람이 제창하는 것이 마치 불을 부채질하는 것 같고 거기에 천 사람의 의심이 바람같이 호응하여 칼을 갈고 물을 끓이는 자가 용맹을 떨치며 나를 급히 밀어 넣으려 하니, 어찌 나의 미치고 어리석은 성질이 힘을 돌아보고, 자신의 재주를 헤아리지 못하고서 시대에 합당하지 못하였던 것을 요량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나, 구구한 내가 나라에 몸을 바친 죄가 만 번 죽어도 속죄받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도 임금께서 밝게 살펴주시고 당시의 여론이 특별히 용서하여 요행히 피 묻은 이빨에서 벗어나게 되어 형벌 받은 나머지 목숨을 잇게 되었으니 은혜가 지극히 두텁다. 죽을 뻔하다 남은 혼이 아직도 떨려서 진정되지 않는다. 외로운 몸뚱이가 떠돌아다니면서 엎치락뒤치락하여 습지와 더러운 것에서 발생하는 열병 등 백 가지 독을 받아 죽음과 이웃이 되어 있노라.
그러나 몸을 버리기로 결심하여 스스로 화를 밟으려고 결단하였으니, 비록 구렁텅에 빠져 죽더라도 또 후회할 것이 무엇 있겠는가. 천지의 귀신들이 위에 벌려 있고 옆에 나열하여 있으니 나를 죄에 얽어매려는 사람들에 대하여 나의 마음속으로는 아무것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 횡액으로 당한 환난은 옛날 사람들도 미리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조용히 조그마한 방을 쓸고 향을 피워 마음을 고요히 하면 내 마음을 온전히 하고 남은 생명을 마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마음을 쓰지 않는 것은 군자가 병폐로 생각하는 바라, 백번 귀양살이한 사람이 정신이 피로해서 성인의 글을 보아도 두어 줄을 읽지 못하고 마음이 심란하여 푸르고 붉은 색이 다르게 보여 문득 그 장도 마치지 못하고 걷어 치워버렸다. 긴 밤과 기나긴 낮을 뜻 둘 곳이 없으면 때로 예전에 친구들이 하던 이야기를 기억하며 붓 가는 대로 기록하여 친구들과 이야기하고 농담하는 것에 대신하였다. 또한 새로 얻는 것이 있으면 그 끝에 보충하여 번민을 덜고 적적함을 위로하는 데 도움이 되게 하였다.
비록 이런 것으로 마음을 써서는 안 되겠지만 장기나 바둑을 두거나 낮잠을 자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패관소설도 충분히 박식을 돕고 잃어버리거나 떨어진 것을 주워 모을 수 있어서 역사의 편집을 맡은 사람들이 반드시 참고하여야 할 것이 있으니 어찌 끝끝내 감추어 두어 사유물로만 할 수 있겠는가.”
하니, 나는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아직 그렇게 할 수는 없고 다만 책상 안에 두어서 나의 자손들로 하여금 오늘날의 나의 불우하고 고생스런 상황을 알게 하여 자손들이 마땅히 힘쓰도록 할 뿐이다.”
하였다.
가정 전몽 작악, 즉 을유(을유_서기 1525년) 12월 상한에 인성당에서 적음.
-----
《용천담적기》-김안로 찬
포은 정문충의 사당이 옛부터 영천에 있었다.
손문정 순효 칠휴공이 일찍이 이 도의 관찰사로 있을 때 영천군 경계를 지나다가 말 위에서 술에 취하여 졸면서 몽롱한 가운데 포은 사당이 있는 마을을 지났다. 꿈결에 희미하게 한 늙은 노인을 보았는데 수염과 머리가 희고 의관이 아주 점잖았다. 노인이 말의 머리를 막아 서면서,
“내가 포은이라.”
하고, 또 말을 계속하기를,
“내가 있는 곳이 너무 퇴락하여 바람과 비를 막을 수가 없다.”
하는데, 마치 그에게 부탁하는 빛이 있어 보였다. 칠휴공이 놀라 이상하게 여긴 나머지 고로에게 물어서 그 옛터를 찾았다. 그리고는 그 고을 사람들에게 권하여 사당을 다시 지었다.
집이 이루어지고 물품들이 모두 비치된 뒤 칠휴공은 몸소 잔을 드리고 사당의 낙성식을 올렸다. 그리고는 스스로 큰 잔에 술을 가득히 마시고 취하여 마루의 벽에 글을 쓰기를,
“문승상(송나라 문청상)과 충의백 두 선생의 간담이 서로 비추어 일신을 잊고 사람을 기강을 세우시니 천만 세에 우러러 마지 않는다. 이권이 있는 곳에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분주히 모여드는데, 맑은 서리 흰 눈에 송백만이 창창한데 집 한 간을 지어서 비바람을 막게 하니 공의 신령도 편안하고 내 마음도 편하리다.”
라 하였다.
나는 의아스럽게 생각한다. 충성스런 혼과 굳센 넋은 천지 사이에 있어서 넓게 조화의 원기와 함께 흘러가는 것이니, 어찌 구구하게 사당의 성패로써 남에게 힘을 빌리는가. 아마도 이 노인[칠휴공]의 마음이 넉넉하고 아름다워 평생을 두고 충성과 관용으로써 마음을 삼았으므로 그 정신과 기맥이 혹 황홀한 사이에 감동된 것인가 보다.
내가 동도 경주의 부윤이 되니 이웃 고을이 곧 영천이라, 옛일들을 물어서 포은의 사당은 아직 있는 것을 알았으나 칠휴공의 글씨는 이미 다 떨어져 나가 흔적이 없어지고 돌 같은 데 글을 새긴 일은 본래 없었다.
아, 유유한 백 수십 년 동안에 칠휴공 한 사람을 기다려서 사당을 수리하였는데, 기록을 새긴 이가 아직 한 사람도 없었던가.
개연히 그 고을의 군수 장군과 모의하여 돌을 장만하는 역할은 그 고을에서 부담하고, 거기에 새길 글은 나에게 청하였는데, 내가 상주가 되어 갑자기 떠나는 바람에 일이 다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도 한탄스러워 잊을 수 없다. 그래서 뒤에 오는 군자에게 바랄 뿐이다.
칠휴공이 여러 군은 순행할 때, 길을 가다 효자나 열녀의 정문을 보면 반드시 말에서 내려 참배를 하고 지나갔다. 금오산 아래 길재 선생이 살던 곳에 가서 제문을 지어 잔을 드리고 말하기를,
“사당 아래서 절하며 뵈오니 당신 모습을 뵙는 것 같습니다. 금오산과 낙동강 물은 옛날과 같은데 선생은 어디에 계십니까. 초황과 여단을 드리오니 영령께서는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이 늙은 내가 문자를 다듬는 데에는 뜻이 없으나 가슴에서 나오는 말이 절로 이러한 정도였으니 가히 그 풍채를 상상해 볼 수 있다.
소릉이 폐해진 지가 정덕 계유년(서기 1513년)까지 58년 동안이었는데, 인심이 원통하게 생각하여 복구되기를 바란 지가 오래되었다.
어느 날 경연 검토관 소세양 군이 처음으로 그 주장을 하였다.
그러자 임금께서 슬피 여겨 대신에게 명하여 《춘추비기》에서 그 당시 폐한 이유를 찾아보도록 하니, 과연 정부의 요청에 의하여 폐하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공경들을 대대적으로 모아 의논하도록 하였다.
이 명령을 받고 대궐에 들어갈 때에 판상 장순손이 유영상 집에 들러,
“오늘 의논을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하고 물었더니, 유영상이 강건히 불가하다고 말하였다.
대궐 안에 들어가 의논하게 되어서 삼공 이하는 모두 어렵게 여기고, 오직 신용개ㆍ강혼ㆍ장순손과 나의 계부 충정공(김전)만이 마땅히 복구하여야 된다고 말하였으나, 끝내 시행되지 못하고 말았다.
대간과 시종들이 간하고, 태학생들도 소를 올렸으나 시행되지 않아 때가 지나도록 수합을 하였으나 형세가 잠잠해지고야 말 것 같기에 그때 내가 김국경 등과 속삼강행실청청에 있었으므로 동료들과 상의하여 말하기를,
“대간들이 중도에 중지하면 뒤에 가서는 복구될 기회가 없게 될 것이요. 우리들이 출위하는 것으로 혐의를 삼을 수 없으니 소장을 올려 대간의 형세가 누그러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고 하였다.
그때 마침 태묘의 나무에 벼락이 떨어지니, 임금께서 놀라고 두려워하여 그날로 태묘에 참배하고 공경과 대간과 시종을 급히 불러,
“들어와서 나의 잘못된 것을 말하라.”
하였다. 그때 소릉의 복구 문제를 말하는 사람이 있어서 의론들이 모두 이에 동의하자 드디어 임금이 허락하는 명을 내려 도감을 설치하여 그 일을 감독하도록 하였다.
처음 소릉이 폐해진 뒤에 바닷가로 옮겨서 장사지내고는 제사 지내고 수호하는 일을 폐한 지가 여러 해가 되었으므로 단지 무덤의 봉분만 있었으므로 여전히 사람들이 의심하였던 것이다.
악전을 설치하고서 묘를 이장하려고 깊이 파들어 갔으나 옥갑(관)이 보이지 않아 당황하여 어찌할 줄 몰랐다.
이날 밤 감독관이 선잠을 자는데, 꿈에 휘장을 치고 안석에 기대어 왕후의 모습을 갖추고 그 옆에 두 명의 시비[아환]가 모시고 있는데 감독관을 불러 위로하기를,
“너희들이 수고한다.”
하므로, 감독관이 엎드려 놀라 땀이 흘렀다. 꿈이 깬 뒤에 이상히 생각하고, 다음 날 아침에 두어 자 남짓 더 깊이 파니 홀연 손바닥만한 칠조각이 삽날에 붙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이것은 관의 두꺼운 칠이 떨어져서 올라온 것이다. 그리하여 이장하는 일을 잘 마치게 되었다.
안산 사람이 말하기를,
“소릉이 폐위되기 전날 밤에 울음소리가 마치 능 안에서 나오는 것 같이 들리는 것을 인근의 백성들이 이상하게 여겼는데, 다음날 역마가 갑자기 들이닥쳐 능이 드디어 옮겨졌다는 것이다. 또 민가에서 집을 지을 적에 폐해진 능에서 나온 석물을 가져다 쓴 사람은 반드시 병을 앓았으며, 양을 먹이거나 말을 놓아서 묘를 밟게 하면 맑았던 날이 갑자기 어두워지고 폭풍이 불게 되므로 사람마다 조심하고 신처럼 여겼다.”
하였다. 새로 이장할 능터를 현릉(문종의 능) 왼쪽에 정하였는데, 두 능 사이에 잣나무가 빽빽이 하늘을 가리고 있던 것이 능의 역사를 시작하던 날에 갑자기 두서너 그루가 이유없이 말라버려 그것을 베어버리니, 두 능이 서로 마주 보는데 가리워지는 것이 없었다. 이것 또한 이상한 일이다.
예전에 기정 권숙달이 승정원에 숙직하던 날 밤 꿈에, 해평 정미수가 유영상과 서로 치며 싸우는 모습이 마치 큰 원한이 있는 것 같았으며, 영상이 대단히 곤욕을 당하는 것 같았다. 권기정이 놀라 남에게 이야기를 하였는데, 수일 만에 능을 복위하자는 의론이 나왔다. 그러자 유영상이 제일 먼저 난색을 표하였는데, 그 의론이 끝날 무렵 갑자기 병이 들어 조정에서 수레에 실려 나와 오래도록 앓다가 드디어 일어나지 못하고 죽었다. 그가 병들었을 때 자제에게 근일 조정에서의 정사를 묻기에, 소릉 일로 힘써 다툰다고 대답하니, 유공이 머리를 흔들면서 말하기를,
“이 일은 끝내 할 수 없는 일이다.”
라고 하였으니, 그의 고집이 이처럼 대단하였다. 불러 모아 대답하게 할 때 만일 유공이 있었더라면 임금의 뜻을 끝내 돌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해평은 곧 소릉의 외손이므로 사람들이,
“신령이 있다면 어찌 이 일에 원한과 통분이 없겠는가.”
하였다.
귀신이 갚는 것이나 남몰래 보답하는 것이 무리가 아님을 기정의 꿈에서 증험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은 진실로 황당한 것이므로 꼭 그러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우연히 일의 기회가 서로 감응된 바가 있는 것 같으니 이 역시 이상한 일이다.
영묘(세종대왕)께서 문화 정치에 뜻을 독실히 가져 인재를 육성한 미덕이 전대보다 훨씬 뛰어났다. 집현전을 설치하여 선비들을 모아 날로 번갈아가며 숙직하도록 하여 토론하는데 대비하고, 그들을 사랑하고 대접하기를 융성하게 하니, 세상 사람들이 영주(신선 있는 곳)에 오른 것에 비유하였다. 문충 신숙주)가 하루는 숙직 당번이었다. 밤 2경쯤 되어서 임금께서 환관에게 명령하기를,
“가서 숙직하는 선비가 무엇을 하는가 엿보고 오라.”
하니, 환관이 들어와서 아뢰기를,
“지금 촛불을 켜고 글을 읽고 있습니다.”
하였다. 이처럼 연달아 두서너 번을 엿보도록 하였는데, 글 읽기를 여전히 중지하지 않더니 닭이 울어서야 비로소 잠들더라고 보고하니, 임금께서 가상히 여겨 잘 갖옷[초구]을 벗어 잠이 깊이 든 틈을 타서 덮어 주었다. 문충이 아침에 일어나서야 비로소 이 사실을 알았다. 선비들이 이 말을 듣고 더욱 학문에 힘쓰게 되었다.
현묘(문종대왕)가 오래도록 세자로 있을 때, 춘추가 점점 높아가면서 학문에 빠져 낮과 밤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달이 밝고 인적이 고요할 때 혹은 손에 책 한 권을 들고 집현전 숙직실에 가서 그들과 어려운 것을 물었다. 그때 성삼문 등이 숙직을 하면서 갓과 띠를 밤에도 감히 풀어놓지 못하였다.
하루는 야반이 될 무렵에 세자가 나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옷을 벗고 누우려 하는데, 홀연히 문밖에 신발 소리가 들리더니 근보(성삼문의 자)를 부르며 들어오므로 성삼문이 놀라 일어나 얼떨결에 맞아 절을 하였다. 이때 임금의 부자의 학문에 부지런함과 선비를 독실히 좋아함이 진실로 천고에 듣기 드문 일이었다.
선묘(성종대왕)가 글을 좋아하여 윗 대 두 임금 세종과 문종을 이어 유림을 사랑하고 장려하는 것이 보통 규모에서 우뚝 솟아나서 당시에 문장에 뛰어난 선비들이 옥서(홍문관)에 가득 찼다. 매계(조위)ㆍ삼괴(신종호)ㆍ뇌계(유호인) 및 우리 선대부(김흔) 등이 더욱 융성한 사랑을 받아서 항상 지은 글을 달마다 적어서 올렸다. 매계와 뇌계는 모두 부모가 늙었으므로 지방관으로 나가기를 원하니, 특별히 쌀을 내려주어 그 부모를 넉넉하게 해 주었다. 뇌계가 올린 글 가운데,
북쪽을 바라보니 임금과 신하는 막혀 있고 _북망군신격
남쪽으로 오매 어미와 자식이 한데 모였도다 _남래모자동
라는 시구가 있었는데, 임금께서 조용히 읊으며 이르기를,
“호인(뇌계의 이름)의 몸은 비록 외지에 있지만, 마음은 임금을 잊지 않고 있다.”
하였다.
매계가 상주가 되었을 때 제물을 내려 영광스럽게 하여 은총이 산 사람과 죽은 사람에까지 미치게 하니, 사람마다 감격하여 흥기하였다. 인재를 고무시키고 사기를 진작시키는 것이 진실로 천고에 드물게 있는 일이었다.
영상 성희안이 홍문관 정자로서 상주가 되어 관직을 그만두었다가 상을 마치고 다시 그 자리에 복직되어 규례대로 은명에 사례드리니, 임금이 불러 합문 밖에 오게 하여 위로하고 중관에게 명하여 매 한 마리를 주면서 이르기를,
“네가 노모가 있으니 공사를 마치고 여가가 있거든 교외에 나가 사냥을 하여 반찬을 장만하라.”
하였다.
또 밤에 불러들여 술과 과일을 내려 주시니, 성희안이 소매 속에다 감귤 십여 개를 넣어두었다가 술이 취하여 엎어져서 인사불성이었다. 중관이 업고 나갈 때 소매 속의 감귤이 떨어져서 땅에 흩어지는 것도 몰랐다. 그 다음날 감귤 한 광주리를 옥당에 내려 주시고 전교하기를,
“어제 희안이 감귤을 소매에 넣은 것은 어버이에게 드리려고 하였던 것이므로 다시 주는 것이다.”
라고 하니, 성희안이 뼈에 사무치게 임금을 위하여 죽기를 결심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국난을 안정시키는 일에 앞장서서 은혜를 갚고 충성을 다하였다. 선묘가 선비를 대접한 성의와 인재를 알아보는 총명이 진실로 신하로 하여금 충성을 다하도록 한 것이고, 성희안이 위태로움을 제거하고 안정을 이루어 공훈이 사직에 있었으니, 또한 임금이 알아주어 대우한 은혜를 저버리지 않았다 할 수 있다.
문종ㆍ성종 두 임금은 해서로 쓰는 법에 정통하였다. 문종의 글씨는 힘차고 살아 움직이는 진기가 있어 진나라 사람의 오묘한 경지를 능가하였다. 그러나 돌에 새긴 두서너 가지만이 세상에 전할 뿐 지극히 보배롭고 신비한 글씨는 참으로 필적을 보기 드무니 애석하다. 성종의 글씨는 아리땁고 단정하여 조용히 조송설의 법도에 맞았다.
임금께서는 또 묵화에도 관심을 가졌는데 모두 천부적으로 타고난 재능이어서, 모방하고 연습하지 않아도 신묘하게 옛법에까지 나아갔다. 정사하시는 여가에 고요하게 혼자 계실 때가 있으면 때때로 붓과 먹을 잡고서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렸는데, 한 치 만한 종이나 한 자 너비의 베 조각이라도 세상에 흩어져 있으면 그것을 얻은 사람들이 완상하고 첩첩이 싸서 두기를 큰 구슬보다도 더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상사생 박원령이 글씨를 조금 잘 썼는데, 성종께서 보고 칭찬하여 그의 고향에 글을 내려 종이와 붓을 주도록 하여 장려하니, 그 고을에서 빛나게 되어 놀라 감동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러한 조그마한 기예가 어찌 임금의 감상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마는, 임금 자신이 능하다 하여 신하의 조그마한 기예도 버리지 않고 융성하게 권장하는 것이 반드시 이처럼 성심에서 나왔다.
이로 말미암아 문장과 서화와 백공의 기술을 게을리하지 않고 정밀하게 하였으니, 임금이 고무시키고 변화시키는 기틀이 단지 한 번 찌푸리고 한 번 웃는 사이에도 있다는 것을 알겠다. 만일 성의로써 좋아함이 보통 인정보다 뛰어나지 않았다면 비록 백방으로 권하고 엄하게 과정을 세워도 다만 시끄럽고 게을러지기만 할 것이다. 이러한 성의가 아니었다면 어찌 사람을 감동시키기를 이렇게 깊이 할 수 있었겠는가.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