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은 수필을 정리하다가 오래전
한국수필작가회 문학기행 내용이 있어
반갑게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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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의 즐거움
류인혜
여행은 일상이 확장되는 즐거움이다. 이번의 떠남은 「한국수필작가회」의 문학기행이기에 기대가 컸다. 오랜만의 여행이라 동인들과 함께 보게 되는 모든 것을 친근할 것이라 여겼다. 우리가 갈 곳에 대한 예비지식을 얻기 위해 여러 자료를 찾아 모아두었다. 주관하는 분이 답사지에 관한 자료를 준비했다고 하니 새 옷을 입고 도포까지 얻어 걸치는 격이 되었다. 모임 장소인 사당역에 도착하니 문형동 회장이 반갑게 맞아준다. 회원들의 자유로운 복장도 여행 기분을 상승시켜주었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이용한다기에 처음 지나는 곳이라 기대하였는데 고속도로로 올라가자 좋은 날씨를 예견하는 듯 안개가 자욱했다. 그러나 안개는 감성에 젖도록 아련하게 흐르는 것이 아니라 앞이 보이지 않는 농무였다. 차창 밖이 내다보이지 않는 덕분에 잠깐 눈을 감을 수 있어 새벽부터 설친 피곤이 사라진다. 시야를 막는 농무와 함께 달려 이차 집결지인 대천휴게소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아산의 회원 홍성욱 교장 선생이 일행과 합류하였다.
대천 나들목으로 나와서 다시 국도를 타고 거슬러 올라가 관창 공업단지(이문구의 관촌수필 배경지)쪽으로 길을 잡았다. 대천은 아이들이 어렸을 적에 해수욕장에 왔기에 친근한 곳이다. 즐거웠던 추억이 서린 곳이라 대천이란 말만으로도 마음이 풍성해져 다른 곳은 보지 않아도 괜찮을 듯했다.
한산 이씨들의 재실을 거쳐서 근처의 토정 이지함 선생의 묘를 찾았다. 나직한 산허리에 10여 기의 묘가 어우러져 있다. 여러 시대를 살다간 집안끼리 모여 오순도순 정담을 나누고 있는 형상이다. 그 정다움 때문인지 장례 문화가 화장으로 바뀌어 봉분이 없어지는 추세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고 누군가 말했다. 내려오다가 개펄이 시원스레 펼쳐진 전경을 바라보며 단체 사진을 찍었다.
그곳에서 건널목을 지나고 봉당천에 놓인 배다리를 건너 주교 휴게소를 지나가는데 멀리 굴뚝이 보인다. ‘보령화력발전소’의 높이 솟은 6개의 굴뚝을 버스가 달리는 방향에서 왼편으로 목이 아프게 쳐다보았다. 바로 근처에 ‘미산조선공업’이 있고 오른편 길에 ‘갈매못 순교성지’의 팻말이 있다.
그곳은 1927년부터 성지로 관리되기 시작하여 1975년에 순교비가 세워졌고, 1999년에는 경당과 사제관 수녀원이 완공되어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있다. 멀리 바다가 보이는 아름다운 곳이다.
예정된 시간보다 훨씬 지체되어 오천면의 오천항과 오천성은 지나가면서 바라보는 것으로 대신했다. 올려 보이는 오천성 입구의 관아는 자그마한 개인 집 같은 규모다. 언덕 위에 비석이 줄을 지어 서 있다. 성을 구경하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 않지만, 다시 대천으로 돌아가서 점심을 먹는 일정이고, 12시가 지난 시장한 시간이라 그런지 머물러 가자는 의견은 나오지 않았다.
오천은 보령 북부권의 삶과 생활의 중심지였는데 지금도 천수만 일대의 주요 어항으로서 역할을 다하고 있고 키조개와 큰 홍합이 특산물이라 한다. 그곳에는 1자와 6자가 들어간 날에 오일장이 선다. 다녀와서 생각해 보니 시간이 허락되었다면 어항에 서는 장 구경도 재미있었을 것이란 아쉬움이 있었다.
다음에 방문할 도미사당(정절사)은 주포로 가는 길에서 산을 조금 올라간 그곳에 있어 대형버스가 오르내리는 데 긴장이 필요하다. 입구에 주차할 공간이 있다. 버스에서 내려 시선이 조금 올라간 위치에 왼편으로 사당의 지붕 끝이 보인다. 건물이 숨어있지만 찾을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둔 것이다. 길을 따라 조금 걸으니 사당으로 올라가는 가파른 계단이 나왔다. 어디선지 맑고 투명한 새소리가 들린다. 도미 부인의 혼령이 새가 되어 우리를 반긴다고 모두 즐거워했다. 모셔진 영정은 정절을 지킨 여인답게 정갈하고 곱다. 여러 곳에 실린 도미 부인 설화를 모아서 안내서에 친절하게 실어 주었다. 그러고 보니 이곳이 문학기행의 대상지가 된다.
대천 시내의 [대흥식당]에서 된장찌개와 우럭찜으로 점심을 먹고 잠시 자유시간을 가져 시장 구경도 했다.
배가 든든하니 생기가 난다. 버스도 힘이 나는지 산길을 오르는데 거침이 없다. 성주터널을 지나자 갑자기 시야가 넓어진다. 계곡이 깊고 산새가 아름다운 곳이라고 이번 여행에서 안내를 맡은 임창순 선생이 소개한다. 가와 바다의 소설과 유홍준 교수의 답사기까지 예를 들면서, 터널을 빠져나와서 처음 대하는 경관의 느낌을 강조했다. 그만큼 절경이다. 나뭇잎은 없지만, 잔가지가 많은 나무에 봄기운이 흐릿한 안개처럼 돋고 있다.
경치 좋은 곳에 당연히 모여 있는 온갖 음식점을 지나 삼거리에서 좌회전하니 성주사지 입구다. 주차장에는 군청 직원이 핸드 마이크를 들고 있다. 그의 친절한 안내를 받으며 넓은 절터 위에 세워진 유적들을 구경했다. 주변의 마을과 눈높이를 나직하게 맞추어 조화를 이룬다. 잔디 위에 듬성듬성 서 있는 나무들이 평화롭다. 단체 사진을 찍으려고 앉은자리에서 바라보이는 산의 모양도 그림처럼 단아해 그대로 주저앉아서 마냥 바라보고 싶어지는 곳이다.
성주사지 한쪽의 미륵불은 코가 이상하다. 코를 갈아서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로 모두 코를 갈아가서 불심이 많은 사람이 그것을 방지하느라 시멘트로 발라 놓았다고 한다.
산골에 있는 절만 보다가 넓은 평지의 절터를 구경하여 건립 당시의 불교가 성행했던 시대 사항이 짐작된다. 경주 불국사, 해인사, 통도사 등의 신라권에 있는 절과 이곳의 절터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를 잠시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관심 밖의 일이라 금세 잊어버리고 시비(詩碑)가 많다는 성주 휴양림 구경을 기대해본다.
성주산 자연 휴양림으로 가는 길에는 탄광촌의 흔적인 모양이 같은 사택이 보였다. 시멘트 블록으로 쌓아서 지어진 집 벽에는 큰 글씨로 번호가 적혀 있다. 이제는 탄광이 없어지고 석탄 박물관이라는 관광지가 생겨있다.
휴양림의 다른 이름은 화장골이다. 성주산 일대에 모란형 명당이 8개소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이곳 화장골에 감추어져 있다 하여 화장골이라 하고, 한편으로는 꽃이 많다고 화장골이라 부른다는 얘기도 있다. 시비는 도선국사의 「성주산」이란 시를 시작으로 일정한 간격을 두어 산으로 오르는 길 양편에 세워졌다. 끝까지 가기에는 정해진 시간이 있어 몇 편 읽어보고 도중에 내려왔다.
무량사는 부여군 외산면 만수산에 있는 절이다. 외산 우체국을 오른편에 두고 삼거리에서 좌회전하라는 이정표가 붙어 있다. 그곳에서 2km쯤 더 들어가야 목적지가 나온다. 무량사의 볼거리는 매월당 김시습의 영정인데, 그가 1466년에 세운 산신각에 모셔져 있다고 다들 그곳으로 갔더니 영정은 없었다. 이미 다른 곳으로 옮겨진 것을 몰랐다. 이번 문학기행에서 기대했던 방랑으로 일생을 보낸, 방외인의 선구자 김시습의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이다.
또 다른 이야기는 무량사에 있는 천년 묵은 칡뿌리 기둥을 안으면 부자가 된다는 말이었다. 갑자기 욕심이 나서 기웃거리다가 어수선한 사찰의 마당에 심긴 나무의 특이한 모양새를 눈여겨보고, 일주문의 커다란 기둥을 칡뿌리로 삼아서 한번 안아 보았다.
돌아오는 길은 멀었다. 휴일에는 도로가 막힌다는 선입견으로 빠른 길을 찾아 돌고 돌아서 떠난 장소인 사당역까지 달려왔다. 일상에서 벗어나 마음껏 방랑하다가 늘어난 고무줄이 원래 위치로 돌아가듯 우리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한국수필》 2002년 7.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