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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시대의 화두, 민족과 전통 - 1930년대 후반에서 1950년대까지의 시조 -
장성진(창원대 교수)
1. “민족”과 “전통”의 의미와 수렴과정
시조문학의 전개 과정을 설명할 때, 1930년대 후반에서 1950년대까지는 하나의 시기로 설정할 수 있다. 이 시기는 정치 사회적 변화가 워낙 급격하고 충격적으로 진행되었으므로, 문학 분야에서도 갈래에 따라서는 큰 폭의 변화를 보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시조의 경우는 그렇게 설명할 요소가 많다. 그것은 시조의 장르적 성격, 발표 매체와 여건, 작가들의 구성과 지향 등 여러 가지 요건이 시대상을 받아들이고 극복하는 과정에서 이루어낸 결과이다. 무엇보다 앞 시기의 시조에서 이룩한 성과가 전승된 면이 가장 크다. 그 성과란 “민족”과 “전통”으로 수렴될 수 있는, 근대시조 정체성의 핵심 요건 확립이다. 민족과 전통은 한국 문화의 여러 분야에서 발견되고 주장되는 요소이지만, 시조에서는 더욱 엄중한 검토를 거치고 진지하게 설정된 가치이다. 을사늑약 이후 근대 초기 문사들이 당대의 사명인 애국계몽운동의 효과적 방안의 하나로 시조와 가사 같은 전통 장르를 활용하였으며, 뒤이어 1920년대에는 폭넓은 민족문화 운동의 경향에 맞추어 국민문학으로서 시조부흥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렇지만 문단의 거친 풍토 속에서 곧장 프로문학가들의 공격을 받고 논쟁을 전개하였다. 직간접으로 부흥론에 참여한 작가들은 수세적 처지에서 시조의 가치를 천명하기도 하고 새로운 발전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하면서 민족과 전통의 의미를 명확히 하였다. 1920년대 중반에 시작된 논쟁 그 자체는 공격자들인 프로문학가들의 상황과 관심이 달라짐으로써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프로문학 내부에서 노선 갈등이 심해지고, 사회주의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자 그들의 관심이 시조 또는 전통문학에서 멀어졌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를 계기로 활성화된 시조의 창작과 이론화는 스스로 다양한 길을 모색하였으며, 광복 후에 또 한 차례의 논쟁을 겪으면서 다른 어떤 갈래보다도 자기 점검과 시조단의 결속을 이루게 되었다. 또 이 시기 시조 작가들이 대부분 이후에 오래도록 지속적으로 창작을 하였으므로 과제의 연속성이 더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민족”이란 본래 추상적이고 문화적인 개념이다. 국민처럼 제도적으로, 또는 종족처럼 과학적으로 규정되지 않으면서 필요에 따라 이들과 동의어로 활용되기도 하고 포괄하기도 한다. 한민족, 동이족, 배달민족 같은 용어로 곧잘 대체되는 것도 그 추상성 때문이다. 그렇지만 한국 역사에서 집단을 규정하는 속성은 강력한 속인주의(屬人主義)에 기초한 민족개념이었다. 그리고 이 개념이 아주 명확하게 규정되면서 절대적 가치로 나타난 것은 역시 민족 전체가 몰락을 경험하는 식민지화의 과정이었다. 일제의 지배체제가 굳어진 192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 지식인들이 확립한 것은 문화민족주의였다. 이미 의병전쟁에서 3.1운동까지 갖은 역량을 동원하여 치열하게 전개한 싸움에서 국가민족주의는 단시일에 성취하기 어려운 것으로 판명났다. 그러기에 언어와 문자를 공유하는 문화민족주의는 더욱 중요한 정신이었으며, 한글 연구와 문예 창작 등으로 실현되었다. 이런 시기에 시조가 민족 시가의 한 양식으로 모색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여기에 “조선심”, “조선혼” 등으로 불리던 내용을 담는 “조선어”와 “조선운율”을 찾아 조선 민족의 양식이라는 의미를 통째로 부여하였다. “전통”도 역시 다양하게 해석되는 개념이다. 전근대에는 대체로 높은 가치와 권위를 가졌지만, 근대로 접어들면서 더욱 고수해야 할 규범이라는 견해와 폐기해야 할 인습이라는 상반된 실체로 평가되었다. 시조를 폐기해야 한다는 프로 작가들의 주장이나 국민문학으로 계승해야 한다는 부흥론자들 모두 전통에 대한 당대인의 한쪽 견해를 극대화한 발언이다. 그런데 시조에 긍정적인 작가들에게 있어서는 전통이란 것이 조선심 또는 조선혼을 지속시켜 나갈 방안으로 이해되었다. 이미 나라를 잃고 식민지가 된 지 20년이나 된 1920년대 중반 이후는 일본의 정책적 조작으로 인해 민족, 국가, 국민 등의 개념들이 일본과 차별화되는 조선이란 뜻으로만 쓰이기 쉽지 않았다. 이런 때 민족주의자들에게 전통이란 온전한 조선을 뜻하며, 그것을 내보이는 것은 한편으로 미래에 성취해야 할 과제로도 이해되었다. 이러한 민족과 전통을 구체화한 문학론이 1930년대 이병기가 체계화한 시조혁신론이다. 그는 1932년 초 동아일보에 “시조는 혁신하자”라는 시조론을 쓴 것을 계기로, 이전까지의 시조 운동을 종합하는 한편 “전통”을 핵심적으로 강조하였다. 이보다 다소 앞서 동아일보에서 문학 전반의 전망을 다수의 대가들에게 묻는 방식의 설문을 기획하였고, 거기에서 시조에 관한 항목에서 긍정론과 부정론이 제기되었으며, 특히 긍정론 중에서 새로움에 대한 요구가 많았던 것도 하나의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혁신이든 새로움이든 그렇게 되는 원재료는 과거의 문학이므로 자연스럽게 전통론이 제기되었으며, 시조의 혁신론은 바로 전통론이 되었던 것이다. 가람이 민족과 전통을 동시에 추구하고, 전통과 혁신을 연속의 과정으로 보게 한 계기는 1930년대에 더욱 강하게 추진된 일제의 조선 문화재 발굴 작업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작업이 아니라 그를 바라본 가람의 인식이었다. 일제 지배 전기간을 통해 조선의 문화재에 대한 발굴과 약탈은 계속되었지만, 특히 1931년 조선고적연구회 창립을 계기로 총독부의 사업이 활발해졌다. 그들은 조선의 대표적인 문화재에 대한 독점적 접근권을 가진 채, 그들 목적에 적합한 예를 들추면서 조선의 문화가 서구의 그것에 비해서 일본과 동질적인 것임을 주장하는 한편, 일본의 것에 비해서는 주변적인 것임을 증명하려고 하였다. 그를 통해 조선을 당연히 일본의 영역으로 편입시키면서 동시에 중심권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으려고 한 것이다. 이에 대응한 가람의 시조론이 민족 전통 문화의 인식과 혁신이었으며, 그 실체가 시조 작품이다. 한편 가람이 시조혁신론을 펼친 것과 거의 같은 무렵인 1932년 3월 30일부터 4월 10일까지 노산 이은상도 동아일보에 “시조창작문제”를 10회에 걸쳐 연재하였다. 시조의 형식과 내용은 물론 표현의 기법에 이르기까지 상세하게 기술하면서 고시조와 새로운 시조를 대비시켜 보였다. 이 또한 전통과 새로움에 대한 논의이다.
2. 『문장』지와 시조단의 강화
2.1. 고전론과 추천제
1930년대 후반의 식민정책은 가파르게 포악해져 갔다. 일제의 동아시아 영구지배 정책이 식민지 한국에 각종 억압으로 추진된 것이다. 문학과 결정적 관계가 있는 것으로도 이미 31년과 34년에 있었던 두 차례의 카프 주요인물 검거, 37년 중일전쟁 발발과 함께 국어로서 일본어 의무적 사용, 학교에서의 조선어 폐지 등이 자행되었으며, 지식인 탄압책으로 신간회 해산, 중앙정보위원회 설치, 시국대응 전선사상보국대 결성 급격한 정책이 시행되었다. 당시의 지식인들이 전통적 의미의 “문사”이거나 문예 활동을 하는 “문인”이었다는 점에서 일련의 식민지 정책은 문학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바꾸어 말하면 문인 또는 문학이 한정된 영역의 예술과 그 담당자의 위치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중일전쟁 승리로 동양에서의 패권을 확신한 일제는 이른바 대동아 담론을 급격히 확산시켰다. 이전까지 스스로를 근대 서구와 동일시함으로써 과거 중국 중심의 아시아적 사고를 극복하였는데, 아시아 안에서 적대 세력이 없어지자 오히려 동아시아 전체를 일제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면서 일본을 서양과 대립되는 미래의 동양으로 확대하였다. 다시 말해서 일본을 중심으로 하여 거대한 주변을 거느린 하나의 세계를 표방한 것이다. 식민지 조선에 대해서는 일본에 가장 잘 동화된 주변으로 두고 싶어 하였으며, 이때 언어와 문학은 매우 중요한 분야가 되었다. 언어와 문학을 중시하는 면에서 조선어학회와 그 사업은 일제시기 전체를 관통하는 민족 문화 운동으로 의미를 가진다. 지식인들이 근대 초기부터 언론 매체를 통해 애국계몽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면서 국문(國文) 국시(國詩)를 내세웠다. 나라를 잃은 이후 공표 매체가 없어졌지만, 3.1운동 이후 정세의 변화와 함께 1921년에 ‘조선어연구회’ 명의로 다시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1931년 1월에 ‘조선어학회’로 이름을 바꾸어 큰 성과를 내었다. ‘맞춤법 통일’, ‘표준말 제정’, ‘외래어 표기법 통일’ 등 원대한 계획이 추진되어, 1936년 10월에『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 공표함으로써 새로운 민족 문화의 시대를 예고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언론사와 공동으로 기획한 문맹퇴치 운동이 일제에 의해 제지되기도 하고, 다른 사건에 연루시켜 회원들을 탄압하기도 하여 상당히 날카로운 대립을 보이고 위기가 가중되었다. 조선어 교육을 단계적으로 폐지하고, 조선사상범 예방구금령을 공포하여 독립운동가를 언제든지 검거할 수 있는 길을 터놓았다. 일제가 국내적으로 동양론을 전개하면서 식민 지배를 포악하게 해 가고, 대외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 속으로 접근해 가는 상황에서 조선의 지식인들이 민족운동을 추진하기는 지극히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지식인들은 학술과 예술을 통해서 민족 문화와 정서를 확인하고 공감하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 특히 문학은 지식과 감성 양면에 걸쳐 다수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영역이다. 1930년대를 관통하면서 민족과 전통에 관계되는 학술과 창작을 지속하던 끝에 보다 집중적인 매체를 마련하였으니, 그것이 곧 『문장(文章)』의 발간이다. 이 잡지는 1939년 2월 1일에 창간되어 1941년 4월 통권 26호에서 일제의 강압으로 폐간되었다. 편집주간은 소설가 이태준이고, 정지용과 이병기가 시와 시조를 주관하였다. 동시대에 『인문평론(人文評論)』과 『신세기(新世紀)』가 있었지만, 필진이나 영역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문장이 주도해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문장에서는 이전의 문예지와 차별화된 몇 가지 뚜렷한 방식과 지향이 보인다. 고전문학에 대한 폭넓은 발굴 및 연구, 이념적 성향이 다른 작가들을 망라한 점, 추천을 통한 작가 발굴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상황으로 보나 지향으로 보나 상당히 긴밀하게 관련된 영역이다. 상황으로 보면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에서 은연중 경계하는 사안들이며, 지향으로 보면 일제의 검열을 다소 비껴가면서 민족과 전통이라는 가치를 추구할 수 있는 면이다. 고전을 발굴하고 연구하는 일은 전통 담론에 직접 닿는다. 문장지에는 고전소설과 수필 등이 다양하게 발굴 소개되었으며, 고전문학에 대한 연구물도 많이 수록되었다. 가령 창간호에 이병기 주해(註解)로 <한중록(閑中錄)>이 소개되었는데, 이에 대해 가람은 한중록이 얼마나 훌륭한 고전이며 얼마나 훌륭한 문장인지 기리면서, 이런 사장명품(死藏名品)이 얼마나 많을지 알 수 없다고 하여 고전의 질과 양에 대한 자부심을 은근히 드러내었다. 이태준도 역시 고전은 아득해서 좋으니, 시간적으로 아득함은 이국적이요 신비적인 가치라고 하였다. 고전에 대하여 가람이 공을 들인 대표적 업적은 『고시조선(古時調選)』의 편찬이다. 출판사의 요청으로 200수 정도의 고시조를 가려뽑아 엮었는데, 그 서문에서 “말을 용하게 쓰고 그 세상을 잘 말하고 이땅의 정조를 잘 드러내고 한 아름다운 시풍을 이룬 것”을 찾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정신을 취하여 이걸 더 진부 침체케 말고 더욱 청신하게 청미하게 진전시켜야 한다는 방향도 제시하였다. 문장지는 그 이전에 나온 다른 문학잡지에서는 볼 수 없는, 신인 등용을 위한 본격적인 추천제를 마련했다. 이태준이 소설을, 정지용이 시를, 이병기가 시조를 주로 담당하였는데, 창간호에 이미 추천에 관한 규정을 분명하게 제시 공고하였다. 추천인을 명시하고, 추천작은 게재하며, 세 번 추천을 받으면 기성작가로 대우한다는 것이다. 뽑는 작품수가 아주 적은 데다가 추천은 매우 엄격하고 그 내용을 공개하였으므로 대단한 권위를 가졌다. 작품을 뽑는 데 그치지 않고 선후평(選後評)을 반드시 써서 투고자 뿐 아니라 독자들에게도 문학 학습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이 추천제가 현대의 창작에 적합한지 여부, 특히 후대 한국 문단의 조직화와 권력화에 끼친 영향 등에 대하여 꼭 높이 평가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은 후대의 일이고, 일제 말기의 상황에서는 전통과 관련하여 분명히 시대적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고려시대의 좌주문생(座主門生) 관계, 조선조의 사승(師承) 관계를 연상시키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즉 글을 뽑아 등용한 이와 뽑힌 이가 지속적으로 학문 교류를 한다든지, 학문을 통해서 맺어진 사제의 관계를 일생동안 유지한다든지 하는 한국의 전통적 상층부 구성체를 활용한 것이다. 실제로 가람이 제일 먼저 추천하기도 했고 이후에 활발하게 활동도 한 조남령(曺南嶺)은 가람에 대하여, “예술가로나 시조인으로나 으뜸가고 유일이신 가람님”이라고 표현하면서 가람을 시조에 관한 한 절대적인 인물로 추앙하고, 가람을 논하는 것이 곧 시조를 논하는 것이라고까지 하였다. 문장지에서 가람이 주도한 시조 분야는 엄격한 추천제 시행, 고시조 집성, 전통적 사유를 바탕으로 한 혁신론 등을 두루 갖추었다. 이는 이 시대의 중요한 지향인 “민족”과 “전통”을 구체화하는 한 방안인 셈이다.
2.2. 시조 혁신론의 확산
문장지의 추천제도가 생기면서 이병기는 역량 있는 시조 작가들을 차례로 등단시켰다. 물론 이때 추천된 작가들 중 상당수는 이전부터 다양한 방식으로 창작을 해왔고, 여러 종류의 매체에 작품을 발표해 왔기 때문에 동일한 지향을 가졌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추천을 계기로 시조단으로서의 성격이 강화되었다. 한 시기 시조가 지향하는 지점과 스펙트럼을 동시에 보여준 것이다. 창간에서 폐간에 이르기까지 총 26호로 발행된 문장지에는 8회에 걸쳐 6명의 추천작품 11편이 실렸다. 창간호에서부터 추천 작품을 공모한다는 공고는 있었고, 시와 소설은 제 3집에서부터 작품의 심사와 게재가 실행되었지만, 시조는 이보다 늦은 시기인 제 1권 6집부터 게재가 시작되었다. 그렇다고 시조에 대한 관심이 늦었다는 것은 아니다. 제 1권 2집에 이미 가람의 시조 <매화>와 수주(樹州:변영로)의 시조 <微想>이 실려 있음을 보아서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시조가 늦게 게재되기 시작한 것은 가람의 엄격한 태도에 반영된 결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응모 작품이 적어서 그랬을 가능성도 상정할 수 있지만, 후에 가람이 여러 차례에 걸쳐, 응모 작품의 수는 많으나 수준이 미치지 못한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제 추천된 작품과 그에 대한 가람의 선후평에 적용된 엄격한 기준을 살펴보면 이 시기 시조의 지향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발표된 시조에 민족이나 전통에 대한 지향이 직접 표면화되는 일은 적다. 그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는 외적 상황으로, 이 시기의 문학을 포함한 출판물에 대한 통제가 아주 강력했다. 문장지가 간행된 때는, 1937년에 시작된 중일전쟁이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는 이른바 전시체제였기 때문에 잡지 발간인들은 일제가 간섭할 빌미를 최소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하나는 문학의 예술성이 높이 요구되는 단계였으므로 시조가 구태의연하다는 비판에 대해서 미리 대비해야 하는 잠재적 요구가 있었다. 그렇지만 가람의 선후평을 통해서 시조의 지향은 당연함으로 나타난다. 선후평을 쓰는 자리에서 그는 시조를 응모하는 이가 많다는 사실과, 아직까지 시조의 특성에 대해서 잘 인식하지 못하는 이가 많다는 말을 자주 함으로써 시조는 차별화되는 장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리고 율격과 형식을 갖추는 것은 기본이기 때문에 문제삼을 일조차 아니라고 함으로써 그 양식의 정통성과 공인성을 말하고 있으니, 이는 곧 전통과 민족의 또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개별 작품평에서는 몇 가지 사실로 구체화한다.
내 살이 아니라고 어이 아니 아프겟소 내 몸이 아니라고 어이 아니 치웁겟소 덜덜덜 窓 떨 때마다 마음 저려 하외다.
눈보라 덧치던 눈 얼마나 억찼을가 窓 앞에 메웠던 덕대 부러 졌단말가 그래도 저 넝쿨에야 새 움 자라 나겠지.
물무 뒷산에는 진달래 폈답니다. 구름다리 시냇가엔 살구꽃 피겠지요. 그꽃잎 나의 발인양 살窓 속에 너리까. 조남령의 窓 - 어느 스승님께 -, 제1권 제6호(1939. 7. 1)
『문장』에 추천된 첫 시조이다. 작자인 조남령은 일찍부터 시조에 관심을 가지고 창작과 보급운동에 참여해오던 인물이다. 같은 고향의 선배인 조운에게 시조를 배우기도 하였는데, 조운은 고향인 영광에서 이미 1920년대 초반부터 시조 보급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이후 계속 독서회 등 문화 단체 활동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조남령이 시조를 배웠으며, 조운이 가람을 초빙하여 시조 보급 운동을 하기도 하였으므로 조남령도 가람의 영향을 일찍부터 받았을 것이다. 위의 시에서 “어느 스승님께”라는 부제가 붙었는데, 그 스승은 바로 조운이다. 특히 “구름다리”는 조운의 집 앞에 있는 다리이고, 이것은 곧 그의 필명이 될 정도로 애정을 가진 공간이다. 조운은 1937년 9월에 영광체육단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1939년 2월에 출옥하였으니, 이 작품은 조운이 감옥에 있을 때와 출옥하여 은거할 때를 다 상정하여 지은 것이라고 하겠다. 이런 사정을 잘 아는 가람은 선후평에서도 다소 참작하였다. 시조는 우리 고유의 정형시이기 때문에 그 자수와 음조가 다 맞아야 함을 당연한 전제로 세우고, 이 작품에 대해서는 우선 투식(套式)을 벗어나서 자연․자유스럽게 표현하였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면서 “때를 벗었다.”라고 하였다. 지금까지 투고 작품 중 모방이 많다는 사실과 대조시켜서 자유롭고 새롭게 지은 것임을 강조하였다. 창은 일상에서 늘 대하지만, 눈보라치는 것과 살구꽃 핀 것을 보고 친구를 생각한 것인 바, 친구의 쓰라림은 자기의 쓰라림 같이 말하였으며, 그 말은 절실 강렬한 느낌을 주니, 이는 겪어본 이가 아니고는 쓸 수 없다고 하였다. 결국 그의 평소 시론인 실감과 실정에 충실한 점을 높이 평가하여, 시조혁신론의 한 성취로 보았다. 혁신이야말로 시조를 당대의 문학으로 살아 있게 하는 관건이니, 전통을 지속시키는 일이라는 논리에 부합한다.
비오자 장독간에 봉선화 반만 벌어 해마다 피는 꽃을 나만 두고 볼것인가 세세한 사연을 적어 누님께로 보내자
누님이 편지 보며 하마 울가 웃으실가 눈앞에 삼삼이는 고향집을 그리시고 손톱에 꽃물 들이던 그 날 생각하시리
양지에 마주 앉아 실로 찬찬 매어주던 하얀 손 가락가락이 연붉은 그 손톱을 지금은 꿈속에 본듯 힘줄만이 서노나 김상옥의 <鳳仙花>, 제 1권 9호(1939. 10. 1.)
김상옥은 어려서부터 문학을 포함한 예술의 여러 영역에 걸쳐 폭넓은 교유와 활동을 하였으며, 이로 인해 일제의 감시와 수난을 받은 작가이다. 17세 때 일경에 체포된 뒤 고향을 떠나 함북 천진 등지를 전전하면서 젊은 작가들과 동인 활동을 활발히 하였다. 1939년 20세의 나이로 위의 작품이 가람에게 추천되었으며, 이 해 말에는 동아일보에 시조 <낙엽>이 당선되기도 하였다. 이듬해 고향에 돌아왔으나 여전히 일경의 감시를 피해 다니다가 광복을 맞았다. 가람은 선후평에서 이 작품과 작가를 극찬하였다. 여러 차례에 걸쳐 많은 응모작이 있었지만 이번에 겨우 한 분의 것을 뽑았다고 하면서, “워낙 흔할 수 없는 그 시재(詩才)가 발견되는 것”을 기뻐하였다. 셋째 연의 중장과 종장을 적시한 채, 이런 정이야 누구나 가질 수 있지만 이런 표현만은 타고난 시인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다고 하여 실감과 실정에 대한 그의 시론을 내보였으며, “새로운 말법! 우리 語感, 語例를 새롭게 살리는 말법을 쓰는 것이 더욱 용하다.”라고 하여 표현미를 극찬한 것이다.
쩌르렁 伐木소리 끊어진지 오래인데 굽은 가지 끝에 바람이 앉어 운다 구름짱 버러진 사이로 달이 半만 보이고.
낮으로 뿌린눈이 삼고골로 내려덮어 古木도 亭亭하야 뼈로 아림 일러니 風紙에 바람이 새어 옷깃 자로 여미도다.
뒷山 모롱이로 바람이 비도는다 白雪이 皚皚하고 밤도 여기 못오거니 저홀로 무엇을 쫓어 저리 부르짖느냐. 장응두의 <寒夜譜>, 제2권 4호(1940. 4. 1.)
장응두는 한학을 수학한 바탕에, 20대 초반부터 고향 통영에서 문화 활동에 활발하게 참여하여 자유시를 다수 발표하였다. 동아일보 통영지국 기자로 근무하기도 하고, 문학 활동으로 여러 사람들과 함께 일경에 체포되기도 하였다. 시조 창작도 문학활동 초기부터 했던 것 같은데, 이미 두 해 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조가 입선된 경력이 있다. 가람은 선후평에서 이 작품의 시풍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한 작가가 남의 칭찬 여부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의 짐작에 굳어버리지 않고 나아가는 경지가 한정없음을 소동파의 예를 들어가면서 강조하였다. 그처럼 사람의 바디는 인공으로 만들어지지 않고 타고나야 하는 것인만큼 누구나 자신의 역량에 충실한 시를 써야 한다고 하였다. 이 작품을 읽으면 몸에 소름이 칠 것 같다고, 가득 쌓인 눈으로 몹시 부는 그 밤의 바람소리가 귀에 솔것같다고 실감을 극찬하였다. 그런 바람은 고사하고 천지가 다 움직여도 꼼짝않을 그 마음, 이는 과연 우리 인생을 위한 시이자 장쾌(壯快)한 시풍이라고 평하였다. 여기서 그는 이런 시를 읽으면 초조한 우리의 마음이 유연해진다고 하여 효용을 강조하였다. 이는 일반적인 발언일 수도 있지만, 바람과 눈과 밤을 겪어내면서 정정하게 서서 그 무엇을 좇아 부르짖는 나무의 기상을 통해, 또 그에 옷깃 여미는 화자의 태도를 통해 어두워가는 시절에 대한 지사적 풍모를 읽은 것이다. 시풍이라는 용어를 자주 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시풍이 곧 전통에 닿아 있다는 뜻이다.
洛東江 빈나루에 달빛이 푸릅니다 무엔지 그리운밤 지향없이 가곺어서 흘르는 금빛 노을에 배를맡겨 봅니다
낯익은 風景이되 달아래 고쳐 보니 돌아올 기약없는 먼길이나 떠나온듯 뒤지는 들과 山들이 돌아돌아 뵙니다
아득히 그림속에 淨化된 草家집들 할머니 趙雄傳에 잠들든 그날밤도 할버진 律지으시고 달이 밝았더이다
미움도 더러움도 아름다운 사랑으로 온세상 쉬는숨결 한갈래로 맑습니다 차라리 외로울망정 이밤 더디 새소서 爾豪愚의 <달밤>, 제 2권 6호(1940. 7. 1.)
이호우는 1912년생으로, 향리의 학당을 거쳐 신식학교에 입학하고, 일본 유학을 하는 등 이 시기 지식인의 한 전형에 속하는 인물이다. 20대 중엽에 시조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줄곧 시조를 발표하였다. 위의 작품은 가람이 그때까지 이호우의 작품을 보고, 엽서를 통해 추천제를 안내한 뒤 투고를 받아서 추천한 것이다. 이호우가 작가가 되기 위해 투고한 것이 아니라, 가람이 투고를 권유하고 추천하였다. 그만큼 시적 지향을 공유하였다는 뜻이다. 가람은 이 작품을 설명하기 위해 동일한 제재를 쓴 고시조 세 편을 나열하고, 고시조는 작가의 독특한 느낌과 用語를 쓰지 못하고 그저 한시에서 항용 쓰는 것을 되풀이하였다고 지적하였다. 이에 비해 이호우씨의 달밤은 이호우로서의 느낌과 用語를 써서, 새롭고 깨끗하고 술술하며, 아무 억지도 없고 꾸밈도 없고 구김도 없다고 하였다. “과연 이 달밤은 凡常한 題材를 가지고 이와 같은 좋은 시를 지은 건 그의 天稟과 造詣가 어떠함을 능히 짐작하겠으며 우리 詩壇의 한자리를 그에게 許與않을수 없다.”고 하여 이호우를 당대의 대표 시인으로 추천하였다. 문장지를 통해 추천된 작가와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경향은 이러하다. 우선 작가들은 1910년대이거나 한두 해 벗어난 시기 출생자들로서, 어릴 때 한학 등 전통 학문에 접한 이들이다. 이후 신식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지역에서 문화운동의 하나로 시조에 관심을 가지거나 보급 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들은 격렬하게 사상운동에 투신하지는 않았지만, 사회 의식을 비교적 높게 가진 사람들이다. 문학에도 열정과 함께 역량을 발휘하여 문장지 추천 이전에 이미 전국적 성취를 하였으며, 가람은 이들을 엄선하여 작가적 위상을 높여 주었다. 여기에 추천된 작품들과 가람의 선후평을 보면, 시조를 민족 전통 양식이라는 관점에서 선택하였다. 끊임없이 실감 실정을 강조하여 새로움을 추구한 것은 이미 민족 전통 양식으로서 시조를 받아들였으므로, 새로운 표현과 풍모를 창출하는 일이야말로 전통을 당대에 살리는 길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3. 분노 속의 저항, 옥중시
문장지에 시조를 게재함으로써 민족문화를 표방하고, 실감 실정을 표현함으로써 전통을 새롭게 하려는 노력은 이 장르를 지속시키는 큰 동력이었다. 그러나 1941년 4월 문장이 폐간됨으로써 발표 매체를 잃게 되었다. 더구나 이후 광복될 때까지는 전시체제 아래서 한글은 물론 한국어의 사용까지 완전히 금지된 상태에서, 일제가 금지하는 어떤 글도 쓸 수 없었고, 일제가 요구하는 어떤 글도 써야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 민족과 전통을 근간으로 삼는 시조가 발표될 지면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어떤 작가들은 순응하고, 어떤 이는 저항의 수단으로 절필을 하였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적극적으로 한글과 그 활용을 위해 일하다가 고초를 겪었으니, 그것이 곧 1942년부터 광복될 때까지 이어진 조선어학회 사건이었다. 조선어학회와 그 사업은 이 시기를 포함하여 일제시기 전체를 관통하는 일련의 활동으로 의미를 가진다. 애국계몽기 때부터 국어 연구를 위한 활동을 다각도로 펼치던 단체가 1921년에 조선어연구회로 이름을 바꾸고 다시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10년 뒤인 1931년 1월에 조선어학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1930년 12월 ‘맞춤법 통일’, ‘표준말 제정’, ‘외래어 표기법 통일’ 등을 결의하고, 맞춤법제정위원을 두어 1932년 12월에 원안이 이루어졌다. 이 원안은 1년 동안의 수정작업을 거쳐 1933년 10월 19일 임시총회에서 결정되고, 그 해 10월 29일 한글날 기념식에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발표하였다. 이는 약 3년에 걸쳐 제정한 것으로, 한국어 정서법의 근간이 된다. 조선어표준어사정위원회도 1935년 1월부터 1936년 8월까지 표준말 사정을 끝내고, 그 해 10월 28일 한글날에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 공표하였다. 이 과정에서 회원들이 언론사와 공동으로 기획한 문맹퇴치 운동이 일제에 의해 제지되기도 하고, 다른 사건에 연루되어 탄압을 받는 등 상당히 날카로운 대립을 보이고 위기를 맞았다. 조선어 교육을 단계적으로 폐지하고, 조선사상범 예방구금령을 공포하여 독립운동가를 언제든지 검거할 수 있는 길을 터놓았다. 조선어학회도 사전의 편찬을 서둘러 1942년 4월에 그 일부를 인쇄를 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조선말을 쓰는 학생을 단속하는 것을 기화로 그에게 영향을 준 인물이 포함된 조선어학회를 대대적으로 탄압하였다. 10월 1일, 첫 번째로 최현배 등 11명이 서울에서 구속되어 다음날 함경남도 홍원으로 압송되었으며, 뒤이어 1943년 4월 1일까지 모두 33명이 검거되고, 증인으로 불려나와 혹독한 취조를 받은 사람도 48명이나 되었다. 사건을 취조한 홍원경찰서에서는 사전 편찬에 직접 가담했거나 재정적 보조를 한 사람들 및 기타 협력한 33명을 모두 치안유지법의 내란죄로 몰았다. 3년 가까운 기간에 걸쳐 구금과 재판이 이어지면서, 16명은 기소, 12명은 기소유예, 일부는 석방되었으며, 이윤재와 한징 같은 이는 옥사하기까지 하였다. 상고와 그 각하 등 재판 절차가 광복 이틀 전까지 계속되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대단한 민족운동이었음을 알 수 있고, “고유 언어는 민족의식을 양성하는 것이므로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은 조선민족정신을 유지하는 민족운동의 형태다…… .”라는 함흥지방재판소의 예심종결 결정문은 그러한 사실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회원 중 이병기와 이은상은 대표적인 시조 작가였으며, 여타의 학자들 중에도 최현배나 이희승 등이 다수의 시조 작품을 남기고 있다는 점에서, 한글학회 운동이 민족과 전통이라는 이 시기 시조의 지향과 일치한다는 사실도 잘 알 수 있다. 실제로 이때 창작된 시조 작품들은 훗날 간행된 시집 속에 그 일부가 수록되었다. 특히 옥중에서 쓴 시는, 비록 작품 수가 많지는 않지만, 개별 작가의 경향을 확장하였을 뿐 아니라, 이 시기 문학의 중요한 자산이기도 하다.
묵직한 鐵柵門이 덜그럭 닫치는고나, 도몰아 이는 시름 가슴에 메어지고, 하룻밤 지내는 동안 적이 壽를 덜었다.
전혀 이 세계는 慈悲와 平等과 至情 숭도 허물도 세우고 다툼도 다 없고 궂브고 궂븐 눈물만 계워 계워 하여라
후리후리 후린다 골골 샅샅을 후린다 그 자디잔 그물에 아니 걸릴 놈 없다 만일 그 도마에 오르면 어이 할 길 있는가
법을 도가니 삼고 형으로 망치질하며 불로 녹이고 물로 식히고 하여 저대로 몸을 맡기어 강철도곤 닳린다.
가람의 <日記抄> 1942년 10월 22일자 일기에 이어 기록된 29편 중 일부이다. 이 다음 일기가 1943년 9월 12일 홍원 감방에서 영흥형무소로 이감된 일, 그 다음이 9월 18일 기소유예로 석방된 일을 적고 있는 점으로 보아 그 사이 여러 날에 걸쳐 쓴 시임을 알 수 있다. 내용 중 계절이나 해가 바뀐 데 대한 표현도 있고, 사건을 기술한 곳도 있다. 후에 다소의 개작을 거쳐 1969년 간행된『가람문선』에는 <洪原低調>라는 이름으로 실렸다. 첫 작품은 수감 첫날의 참담한 심정을 읊었다. 초장의 철책은 신체를 모든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단절시키며, 중장의 시름은 가슴을 메워버린다. 이러한 폐색이 하루 사이에 수명을 쑥 줄여 버린다고 하였다. 둘째 작품은 역설로 이루어졌다. 초장의 자비와 평등과 지극한 정은 정신적 완전함이고, 중장의 흉 허물 다툼 시새움 없음은 행위의 완전함이다. 간고한 감옥을 온통 온전함으로 설정하고도, 종장에서 “구쁘고 구쁜” 눈물을 “겨워 겨워” 한다는 것은 그만큼 간절하거나 원통한 무엇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민족적 과제인 한글운동이다. 민족운동은 구쁨 곧 허기짐이다. 셋째 작품은 왜놈들이 조선인을 검거하는 모습을 촘촘한 그물로 물고기를 후리는 데 비유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후려지는 고기를 나무랄 수 없듯이 한꺼번에 엮여간 동지들에 대해 신뢰를 유지한다. 도마 위에 오른 고기처럼 가혹한 운명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이다. 넷째 작품은 일제의 법과 형벌이 가혹함을 대장간의 담금질에 비유하였다. 화자는 그에 몸을 맡기고 강철보다 더 다루어진다고 하였다. 물론 여기에는 시련을 이겨내고 강철같이 강해지겠다는 의지가 들어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제의 강렬함이나 화자가 처한 처절한 상황, 굳건한 현실 대응 의지 등도 중요하지만, 가람의 시조론이 한 단계 발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실정 실감이 객관적 진술의 형태로 제시됨으로써 독자의 강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표현이다. 첫 작품에서 하룻밤 사이에 수명이 줄어드는 일과 끝 작품에서 형벌로 몸이 타는 일은 직접 자신이 겪는 일임에도 마치 관찰자처럼 진술하고 있으며, 둘째 작품의 눈물겨움과 셋째 작품의 도마에 오름도 대수롭지 않거나 그저 받아들일 일로 진술하였다. 한글 운동은 이 시기 지식인들에게 절대적인 민족운동이었고, 투옥은 이 세계와의 절대적인 단절이었다. 여기서 가람이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선택한 표현은 중세 시조의 “어떻다”, “두어라”, “아이야”류와 상통한다. 그것은 중세의 세계관이 인성과 우주의 절대성에 기초했던 점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는 가람 시조의 퇴행이 아니라 오히려 극단적 상황과 체험에서 발휘된 무의식적 전통 활용이라고 하겠다.
어머님 보내 주신 두둑한 솜이불 덮고 얼음 같은 마루방에서도 차운 줄을 몰랐습니다 겨우내 어머님 품속에서 코만 드렁드렁 굴었습니다 이은상, <어머님께 드리는 편지>
노산이 홍원 옥중에서 쓴 작품이다. 노산은 두 차례 감옥 생활을 하였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홍원경찰서와 함흥 형무소에 구금되었다가 기송유예로 1943년에 풀려났다. 가람과 같은 처분이다. 그 후 1945년 1월 사상범 예비검속으로 광양 유치장에 구금되었다가 광복과 함께 풀려났다. 위의 작품은 감옥 생활을 하면서도 어머니의 사랑과 어머니를 향한 사랑으로 극복하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전시 사상범의 감옥 생활이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큰 고통인데, 이 작품에서는 태연하게 아무 일 없었던 듯이, 남의 말 하듯이 묘사하였다. “차운 줄 몰랐습니다.”라는 한 행만 제외하면 모두 객관적 진술로 이루어졌다. 감옥의 냉혹함을 그보다 더 뜨거운 사랑으로 극복하듯이, 일제의 혹독한 탄압을 그보다 더 큰 열정으로 극복하겠다는 의지가 담담하게 표출되었다.
평생을 배우고도 미처 다 못 배워 인제사 여기 와서 ㄹ[리을]자를 배웁니다 ㄹ[리을]자 받침 든 세 글자 자꾸 읽어 봅니다.
제〔말〕지키려다 제〔글〕지키려다 제〔얼〕 붙안고 차마 놓지 못하다가 끌려와 ㄹ[리을]자 같이 꼬부리고 앉았소 이은상, 〔ㄹ〕字
일상적으로 쓴 시라면 기교가 뛰어나다고 할 수도 있겠고, 유희적 가벼움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러나 한글을 통해 민족 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갇혀서 쓴 시라는 것을 생각하면 한 편의 서사이자 명상록이다. 감옥에 갇혔으면서도 수인이 아니라 구도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첫수에서 평생을 배워도 미처 다 못 배웠다는 것은 흔히 지식인들이 말하는 겸손일 수 있지만, 여기서는 조선어연구회의 많은 사업을 채 완성하지 못하고 잡혀왔다는 안타까움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ㄹ”자 받침이 든 세 글자를 경건한 화두로 세웠다. 감옥 생활을 하는 동안 연구를 계속할 테마가 되는 것이다. 둘째 수는 그 화두를 지켜가는 어려움을 노래하였다. 제 말인 한국어, 제 글인 한글, 제 얼인 민족 문화 운동을 하다가 잡혀왔는데, 감옥에서 무릎 꿇고 구부려 앉은 모습까지도 “ㄹ”자 같다고 하였다. “ㄹ”을 탐구하다가 “ㄹ”자가 되었으니 글과 말과 얼이 바로 자기의 몸이요 삶이라는 깨달음이다. 이러한 깨달음과 결의가 노산의 탁월한 표현력에 힘입어 율독성 좋은 작품이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일제 말기 민족사적으로 가장 엄혹한 시기에 한글학회 활동을 하다가 투옥된 작가들은 전통 양식인 시조를 통하여 저항시를 썼다. 그러나 그 저항은 언사가 거칠지 않고, 태연한 진술과 순교자적 태도에 의해 세련되고 고양된 문학성을 획득하였다.
4. 광복 후의 성찰과 모색
4.1. 공소한 유무용론
1941년 문장지 폐간 이후에는 국내에서 실제로 문예 작품을 발표할 지면이 없어졌다. 시조를 포함한 문학 이론과 작품의 광장이었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이보다 앞서 1940년 8월에 폐간되었으니, 문장지의 폐간은 문학계에는 소위 “암흑기”를 초래하였다. 앞서 본 바와 같이 상당수의 작가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창작을 계속했지만, 근대 이후의 사회에서 작품의 존재는 발표를 필수 과정으로 삼는 까닭에 여러 가지 방식의 출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다만 외적인 압력에 의해 출판이 불가능한 상황 아래서는 작품을 숨기는 것도 발표의 하나의 방식이었던 것이다. 이 시기를 지나 1945년 광복을 맞으면 상황이 많이 달라진다. 식민지로부터 벗어나는 해방 과정이 자력에 의해 이루어지지 못하고 국제 관계 속에서 성취되었으며, 세계 질서가 재편되는 데 영향을 받아서 한국 사회는 좌우익 대립의 현장으로 전락했다. 문학도 여기에 적극 참여하여 극심한 대립상을 연출했다. 특히 좌익의 문인들은 문학의 독자적 미학 추구나 정치와 거리를 두려는 행위까지도 부정적인 정치 행위로 보아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좌익이든 우익이든 1940년대 전반 즉 광복 이전을 암흑기로 규정하고, 폭력에 억눌린 상황으로 규정함으로써, 그 기간에 현실에 타협했거나 추종했던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하였으며, 거리낌 없이 자기 주장을 하려고 하였다. 이들은 문학 단체를 결성하고, 정치성 짙은 성명을 발표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고 나섰다. 이런 가운데 시조의 유무용론이 가끔씩 일어났다. 그러나 그것은 다소 공소했다. 이유는 시조를 창작하거나 연구하는 데 원래부터 관심이 적었던 사람들이 주도한 인상적 논의라는 점과, 시조를 당대의 주류문학으로 여기지 않는 가벼운 태도 때문이다. 가장 이른 시기의 논의로는 1946년 1월에 몇 사람의 중진 문인들이 벌인 좌담일 것이다. 이 해 1월 1일 창간된 종합 시사문예지『대조(大潮』의 〈벽초(碧初) 홍명희(洪命憙) 선생을 둘러싼 문학담의(文學談議)〉에서 여러 가지 주제를 다루는 중 시조의 부흥 가능성에 대한 논의가 오갔다. 여기서 이태준이 시조를 일본의 와카(和歌)와 비교하면서 말문을 열자, 홍명희는 시조가 과거에는 시상을 표현하는 형식이었지만 현대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하였고, 이태준은 형태가 아름다워서 환경을 읊고 사상을 노래하는 노래로서는 좋다고 하였으며, 이원조는 시조가 귀족적 형식이라고 단정하였고, 김남천은 귀족들의 문학유희라고 하자, 이태준은 문학전문가 아닌 사람들의 문학유희로 계속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정도로 논의가 이어졌다. 문장지 간행을 주도하였던 이태준은 시조에 대하여 상당히 긍정적 시각을 보이는데, 이는 가람을 비롯한 시조 작가들과 문학적 교류를 하면서 확립한 문학관으로 보인다. 반면 대담에 참여한 이들은 대부분 카프 계열의 작가들로서, 1차 시조부흥론 때의 견해와 별반 다르지 않다. 이들은 시조 창작과 비평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로서, 시조 무용론을 전개하였지만 진지한 사유를 통해서 확립한 견해가 아니라, 중세적 유물이라는 선입견을 유지한 결과이다. 이후 개별시인론이나 민족문학론에서 긍정론이 제시되곤 했지만 전체로서는 시조에 대한 이해도는 높지 않았고, 그 가치를 인정하는 데 추상성이 보였다. 특히 1920년대 시조부흥론쟁에서 부정적 견해를 강하게 드러냈던 김기림이 이때에 와서는 긍정론으로 돌아섰다. 다만 시조가 당대에 꼭 필요해서가 아니라, 민족적 문화양식이기 때문에 현대적 감성과 의식을 담아 볼 수 있다고 하였다. 민족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민족의 전통양식을 살려야 한다는 논리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시조 창작에 합류하거나 작가를 양성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광복 이후 문단의 주된 흐름은 시조를 주변적인 갈래로 치부하고, 비주류적 향수의 대상으로 여기는 경향이 강해졌다. 그나마 앞 시기에 시조 작가들이 성취한 민족문학으로서의 가치 때문에 다소 긍정적 평가를 받았다고 하겠다.
4.2. 균형과 서정
좌우익의 작가와 이론가들, 특히 좌익 계열의 작가들이 활발하게 단체를 꾸리고, 이론을 내세우고, 창작을 독려하는 경향 속에서 시조 작가들은 대체로 차분하게 새로운 시대에 대응하였다. 그것은 이들이 앞 시기에 겪고 이루었던 성과와 관련이 있었다. 첫째, 시조 작가들은 1940년대 초반까지 전통과 민족을 지향하는 작품 활동을 전개한 신진들이거나 그 지도자들이었다. 전통과 민족 문제는 근대 시조가 시작되는 시기부터 오랜 기간에 걸쳐 추구해온 가치이자, 환경적으로 일제의 침탈과 대동아론에 대응하는 문화적 실체였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 상황이 바뀌었다고 급격하게 달라질 이유는 없었다. 둘째, 중요한 시조 작가들이 한글학회를 비롯한 사회 활동으로 일제의 탄압을 강하게 받았던 사람들이었다. 이병기, 이은상, 최현배, 이희승 등은 한글학회 사건으로 체포되어 투옥되었으며, 김상옥, 장응두, 조운, 이상화 같은 이들은 또다른 활동으로 구금되거나 탄압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굳이 앞 시기를 암흑기로 규정하여 외압 때문에 저항하지 못했다는 변명의 장을 마련할 필요도 없었으며, 새삼스럽게 정치적 선명성과 특정 이데올로기를 외칠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그러한 정치 과잉의 문학론은 그들이 추구해온 전통과 민족이라는 가치를 왜곡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여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경향을 보였다. 이 시기에 시조의 발표는 특정 성격의 문예지를 통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이 시기 문예지의 종류가 많은 대신 단명한 것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시조도 동일 성향의 문예지가 아니라 일회성의 기획물에 발표되곤 하였다. 따라서 이런 작품들은 시사적이기도 하거니와 상징성을 가지기도 한다. 그 상징성은 동시대 다른 작가들에 비해서 시조 작가들이 가지는 균형감각이다.
밝어 오는 이날 새로운 이뫼와 이들 도는 그 기운 가을도 봄이어라 시드던 나무도 풀이 도로 살어 나누나
다행이 아니 죽고 이날을 다시 본다 낡은 터를 닦고 새집을 이룩하자 손마다 연장을 들고 어서 바삐 나오라 이병기, <나오라>1․3연, 『해방기념시집』, 1945. 12.
성급히 빼든 칼은 가만이 도로 지어라 죽어도 넋이라도 우리를 못잊는 어버이 그피를 나누어 받은 나의 오누 아닌가
우리 가는 길이 점점 가까워 온다 손을 서로 들어 萬歲를 부르짖으며 내일의 에덴보다도 워싱톤을 바란다 이병기, <나의 祖國>2․3연, 『文化』창간호, 1947. 4.
혼란과 대립의 시기라는 점을 감안해 보면, 같은 사람의 작품인가 싶을 정도이다. 앞의 작품은 광복의 기쁨에 겨워서 희망을 외친다. 새날이 되자 강산도 새로워지고, 계절도 질서를 새로 정하였다. 새로운 세상에 새집을 짓고 새삶을 살자고 부르짖는 모습은 광복을 맞은 민중들은 물론,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감옥에서 풀려난 작자로서는 당연한 감성이다. 뒤의 작품은 또다른 모습이다. 격정에 겨워 광복의 열매를 독점하려는 무리들이 나뉘어 칼을 빼들고 서로를 겨누는 상황에 절망하면서, 어떤 이념보다 앞서는 혈육의 소중함을 깨우쳐 준다. 좌우익의 대립에 대한 경계와 경고이다. 그리고 희망이 점점 가까워 온다는 사실도 알려 준다. 그 희망이란 에덴이 아니라 워싱톤이라고. 에덴은 신이 창조한 행복한 세계이지만 워싱턴은 피흘려 세운 독립국가이다. 이 두 작품에서 보이는 것은 놀라운 균형감각이다. 참혹한 일제 식민지를 벗어난 감격과, 거기에 비례해서 민족의 분열은 곧 식민보다 참혹하다는 비판은 시조 작가들이 시조를 통해 추구해온 민족과 전통 의식이 드러난 것이다.
얼굴 얼굴의 바다 늠실거리는 이얼굴들
모도 몰으는얼굴 허나 모도 미쁜얼굴
視線이 마조칠때 그만 끼어안고 싶고나
전에 보든 얼굴 오 너도 同志더냐
쪼차가 손을잡어 꽉쥐고 흔들었다
그리고 눈으로 눈으로만 않던말을 다 했다. 조운, <얼굴의 바다-어느 大會場에서>, 『문학평론』3, 1947.
窓에서 窓에서 새는 꿈이 다 다르렸다 골목에서 골목으로 인애처럼 흐르는 꿈깰세라 살얼음 밟는 발가락이 가려워
허위허위 기어올라 재마루를 딛고 서니 냅다 쏘는 붉은 햇살 반갑고 저어워라 내가야 이렇듯 훤한 날잡아 이내 돌아오련다 조운, <탈출>2․3연, 『문학』3, 1947.
조운은 일찍부터 시조를 통해 광양에서 지역 문화활동을 열심히 하던 사람이고, 이런 일로 인해 검거되기도 하였으며, 끝내는 월북을 한 작가이다. 이 시기 시조 작가들 중에서는 대표적으로 사회의식이 강한 사람이기도 하다. 앞의 작품에서는 광복된 세상에서 느끼는 감격을 노래하되, 오직 사람에게서 그것을 발견하였다. 부제가 말해주듯이 어느 대회장에서 읊었으니 사람이 많이 모였고, 그들은 동질적 집단이기 때문에 더욱 강한 연대 의식을 가졌을 것이다. 실제로 이 작품은 조선문학가동맹이 주최한 전국문학자대회에 참석하고 지은 시이다. 여기서 사람은 누구도 구분되지 않는다. 모두가 동지이고 누구에게나 모든 말을 할 수 있다. 동족으로서의 친밀감과 함께 동지적 결속을 다짐한다. 뒤의 작품은 너무나 다르다. 창마다 새어나오는 꿈이 서로 다르고, 그것이 이내처럼 골목으로 흘러나오지만 화자는 살얼음 밟듯이 긴장한다. 뒤섞여 있는 서로의 꿈이지만 학인되면 너무나 무서운 그것, 곧 이념의 대립에 대한 공포이다. 그래서 그 이내가 없는 재마루에 기어올라서, 차별 없이 세상을 다 비추는 햇살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화평스럽게 공존하는 날을 희망한다. 이렇게 이 시기 작자들에게서는 새로운 세상이 된 데 대한 감격과, 이미 불거진 불화에 대한 서글픔과, 그것을 극복하고 진정한 민족국가가 되는 데 대한 간절한 염원이 균형을 이룬다. 그 근간에는 민족의식이 이념적 차이를 극복하게 해 줄 것이라는 희망과, 그것을 성취해 왔던 전통에 대한 믿음이 자리잡고 있다.
<참고헌문>
김복근, 노산시조론, 도서출판 경남, 2008. 민영, 김상옥 시전집, 창비, 2010. 여지선, 한국근대문학의 전통론사, 이회, 2007. 우리시대 현대시조 100인선 2-11, 태학사, 2000. 우은진, 1920-40년대 시조 담론 연구, 부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5. 이병기, 가람문선, 신구문화사, 1969. 이승하 외, 한국현대시문학사, 소명출판, 2010. 이지엽, 한국 현대 시조문학사 시론, 고요아침, 2013. 조운, 조운문학전집, 도서출판 남풍,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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