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경기도 가평 출생 서라벌예대 및 경희대 졸업. 1965년 "돛대없는 장선"이 경향신문에 당선. 그는 70년대 소외된 노동자 빈민의 삶을 '난장이'로 암시하여 폭로한 작가이다.
주요작품 : 전12편으로 된 연작 소설이 있음.
* <뫼비우스의 띠>, <칼날>, <우주 여행>,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육교 위에서>, <궤도 회전>, <기계 도시>, <은강 노동 가족의 생계비>, <잘못은 신에게도 있다>, <클라인씨의 병>,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 <에필로그> (이상 연작 12편의 제목들)
요점정리
갈래 : 단편소설
배경 : 1970년대
경향 : 사회 고발적
시점 : 1인칭 주인공 시점. (1·2·3부가 각각 영수·영호·영희의 시점에서
서술됨)
주제 : 도시 빈민이 겪는 삶의 고통과 좌절
인물 : 아버지 - 변두리 생활로 전전(轉轉)함. 삶의 절망 끝에 공장 굴뚝
위에서 '달나라'를 향해 종이 비행기를 날리고 작은 쇠공을
쏘아 올리다 추락사한다.
어머니 - 노동 현장에 뛰어들어 어렵게 가계를 꾸려 나간다.
큰아들(영수) - 공장을 전전하다가 노동 운동에 뛰어든다.
둘째 아들(영호) - 노동자. 은강 전기 회사에서 연마(硏磨) 일을 한다.
딸(영희) - 온갖 궂은 직업을 경험한다.
구성 :
1부(서술자는 영수) - 철거 통지서를 받는다. 가족들의 생활이 과거·대과거·
현재로 교차되면서 중첩되어 묘사되고 있다.
2부(서술자는 영호) - 영희의 가출. 입주권을 투기업자에게 팔고 철거반원에
의해 집이 철거된다.
3부(서술자는 영희) - 투기업자에게 순결을 빼앗긴 영희는 금고 안에서
입주권과 돈을 들고 나와 입주 절차를 마치나 아버지의 죽음을
확인하고는 사회에 대해 절규한다.
이해와 감상
1976년 <문학과 지성>에 발표된 이 작품은 같은 제목의 연작 12편 중, 네 번째에 해당하는 중편 소설이다. 1970년대 한국 소설이 거둔 중요한 결실로 평가되는 작품으로서 전혀 낙원이 아니고 행복도 없는 '낙원구 행복동'의 소외 계층을 대표하는 '난장이' 일가(一家)의 삶을 통해 화려한 도시 재개발 뒤에 숨은 소시민들의 아픔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은 도시 빈민의 궁핍과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그리고 있는 작품으로서, 특히 노동자의 현실 패배가 우리 사회의 어떤 구조적 모순에서 비롯되고 있는가를 추적하고 있다. 사실 이 작품에 담겨 있는 소외된 도시 근로자의 여러 문제는 우리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현실의 문제이다. 즉, 생존에 필요한 최저 수준에도 못 미치는 저임금, 열악한 작업 환경, 고용자로부터 강요되는 부당한 노동 행위, 노동 조합에의 탄압, 폭력으로 저항할 수밖에 없는 그들의 극한적 심리 상태, 그리고 가진 자들의 위선과 사치, 그들의 교묘한 억압 방법 등 산업 사회의 부정적 측면들이 제시되어 있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이러한 사회적 문제점을 환기시키는 데만 호소력을 지닌 게 아니라, 문학만이 가능한 정서적인 면을 강하게 갖고 있다. 이를 통해 현실 제시라는 반영적(反映的) 기능과 암시와 함축이라는 정서적(情緖的) 기능을 모두 만족시킨다. 가령, 다음과 같은 대목을 보자.
나는 햇살 속에서 꿈을 꾸었다. 영희가 팬지꽃 두 송이를 공장 폐수 속에 던져 넣고 있었다.
이 대목에서 꽃을 던지는 영희의 행동이 영호의 꿈속에서인지 실제의 그것인지 분명하지 않은 가운데 '팬지꽃과 폐수', '귀여운 소녀와 꽃을 버리는 행위'의 대조적인 이미지를 통해 강렬한 시적 호소력을 보여 주고 있다.
작가는 난장이 일가로 대변되는 가난한 소외 계층과 공장 근로자들의 삶의 조건과 모습을 파헤침으로써 70년대 이 사회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였던 우리의 노동 현실을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있다. 여기에 과거와 현재의 중첩(重疊), 환상적인 분위기의 조성, 시점의 잦은 이동 등의 기법적 새로움과 함께 서정적인 아름다움까지 보여 준다.
줄거리
난장이인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와 영수·영호·영희는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며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도시의 소외 계층이다. 실낱 같은 기대감 속에서 천국을 꿈꾸지만 통장으로부터 재개발 사업으로 인한 철거 계고장을 받는 순간 비극은 시작된다.
영수네 동네인 낙원구 행복동 주민들 역시 야단 법석이다. 어느 날, 철거는 간단하게 끝나 버리고 그들의 손에 아파트 딱지만 주어진다. 입주권이 있어도 입주비가 없는 행복동 주민들은 시(市)에서 주겠다는 이주 보조금보다 약간을 더 받고 거간꾼들에게 입주권을 판다.
그동안 난장이 아버지가 채권 매매, 칼 갈기, 건물 유리닦이, 수도 고치기 등으로 어렵게 생계를 유지하였으나, 어느 날 병에 걸려 일을 할 수 없게 된다. 어머니는 인쇄소 제본 공장에 나가고 영수는 인쇄소 공무부 조역으로 일하며 생계를 이어나간다. 영호와 영희도 몇 달 간격으로 학교를 그만둔다.
투기업자들의 농간으로 입주권의 값이 뛰어오르고 영수네도 승용차를 타고 온 사나이에게 입주권을 판다. 그러나 명희 어머니에게 전세값을 갚고 나니 남는 것이 없다.
영희는 집을 나간다. 영희는 승용차를 타고 온 그 투기업자 사무실에서 일하며 함께 생활하게 된다. 그러다가 그 투기업자에게 마취 당한여 순결을 빼앗긴 영희는 투기업자가 자기에게 했듯이 그의 얼굴에 마취를 하고 가방 속에 있는 입주권과 돈을 가지고 행복동 동사무소로 향한다. 서류 신청을 마치고 가족을 찾으러 이웃에 살던 신애 아주머니를 찾아간다. 아버지가 벽돌 공장 굴뚝에서 자살했음을 알게 된 영희는 큰오빠인 영수에게 이렇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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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청주외고 1학년 반이선
방학 중 나는 좀 특별한 책을 읽고 싶었다. 여기서 특별함이란 것은 나이가 어느 정도 들어서 세상을 바라보는 나만의 가치관이 뚜렷해졌을 때 꼭 다시 읽어보고 싶은 그런 책을 의미한다. 그래서 학교에서 내 준 '휴가 중 권장 도서 목록'을 살펴봤다. 내가 읽은 책들도 있었고, 제목만 들어보았던 책들도 있었고 전혀 새로운 책들도 있었다. 그러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란 제목에 눈이 멈추었다. 나는 이 채의 제목을 처음 접해 보았다. 그런데 유난히도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라는 제목이 오래도록 나의 눈길을 잡고 있었고, 결국 그것은 내 독서 목록의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 책의 제목은 매우 동화적이라고 느꼈다. 그러나 내가 이 책의 일부만을 읽었을 때 이미 이 책은 낭만적인 동화와는 거리가 멀다는 걸 느꼈다. 해피 앤딩의 아름다움, 씩씩함이 이기는 것이 아닌 패배함으로써 절망적 분노를 적나라하게 표현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솔직히 내가 이 책을 다 읽었을 때는 이 책이 아닌 필독도서 목록의 다른 책으로 독후감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정말 나는 이 책을 이해하고 독후감을 쓸 자신이 없었다. 나에게는 아직 좀 어려운 책인 것 같았다. 그 시대의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웠고, 이 소설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기법을 이해하기도 어려웠고, 무엇보다도 추상화되어 있는 표현들을 이해하기가 가장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국 이 책을 선택했다. 그 이유는 그 내용을 모두 완전히 이해한다고 할 수 는 없었지만, 나름으로 가슴에 와 닿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난 후 가슴이 많이 아팠고, 가난한 사람과 장애인 등의 소외된 계층에 대한 나의 시각에 많은 변화가 왔다. 나는 그 동안 그들에 대해 조금의 동정심을 가졌을 뿐이었다. 솔직히 나도 모르게 그들을 무시하고 있었다. 그것 때문에 이 책을 읽고 가슴이 아파 왔는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은 후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그렇게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지만 무엇 때문인지 나의 머리는 매우 혼란스럽고 정리가 되지 않았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일고, 모차르트를 듣고 눈물을 흘려도 바로 가까운 이웃의 아픔에는 무심한 사람들'이라는 대목에서 나는 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지금 반성의 글을 쓰고있는 것일까? 아니면 가들을 또 다시 동정하고 있는 것뿐일까? 나는 정말 모르겠다. 난쟁이 아버지는 지구에서 행복을 포기하고 달나라를 꿈꿨다. 이 세상에서 정말 그는 행복해 질 수 없었던 것일까?
우선 이 소설들이 각각 독립적인 단편인 동시에 전체적으로는 장편소설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 소외 계층인 빈민들이 모여 사는 낙원구 행복동은 전혀 낙원이 아니다. 행복도 없는 곳을 낙원구 행복동이라고 한 것은 현실의 상황과 대비되는 주소를 설정하여 역설 법을 사용한 것이다. 도시 재개발 뒤에 숨은 소외 계층의 아픔을 더욱 강조하여 나타내 주고 있다.
뫼비우스의 띠부터 에필로그가지 경제, 인권, 소득 분배, 교육, 소회, 노동 문제 등 많은 문제들이 누적되어 있다. 요즘에도 가끔 TV를 보면 철거민들에 대해 방송하는 것을 볼 수 있다. 1999년을 사는 현 시점에서 난쟁이는 아직도 공을 쏘아 올리고 있는 것이다.
영희가 "아파트에 들어가야 할 사람은 저희예요."라고 말할 때, 난쟁이 아버지가 "그들 옆에는 법이 있다."라고 말 할 때, 영수가 끝이 뾰족한 사각형을 그려놓고 "우리는 이 맨 밑이에요. 우리에겐 잡아먹을 게 없어요. 그런데 우리 위에는 우리를 잡아먹으려는 무엇이 세 층이나 있어요."라고 말할 때 난 책을 잠시 밀어 놓고 하늘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내 머리는 여전히 책의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다시 책으로 눈을 돌린다. 그들의 아픔이 절절히 그려져 있다. 사회에서 소외됨을 극단적으로 표현한 것들이다. 칼날에서 신애가 한 말 "저희들도 난쟁이랍니다. 서로 몰라서 그렇지, 우리는 한편 이예요."라는 말이 잠시 나를 멈추게 했다. 순간 우리 모두가 난쟁이라는 것이나를 흔들었다. 그랬다. 우리 모두약자인 이 현실 속에서 정상인에 비해 약자일 수밖에 없는 난쟁이와 우리는 다를 바가 없다.
처음 나는 이 소설을 그 당시의 시대 고발적 성격이 짙은 사실적 소설이라고 해석했을 따름이었다. 누군가 어차피 해야 할 일을 글로 써낸 거시 이상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엄마가 나에게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에 대한 자료를 찾아 주셨다. 그 자료를 읽고 나서 내 생각이 참으로 짧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소설은 우리에게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현재 교과서적인 사고 방식에 젖어 있었다. 그 때문에 소설을 읽을 때 이야기보다는 시대를 먼저 읽는 것이 나도 모르게 나의 습관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 내가 느끼는 이 소설은 단지 고정된 70년대만이 아니다.
시간은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갔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사고는 지나간 논리와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듯하다. 해결해야 할 삶과 복지의 문제들도 그 70년대와 똑같이 산적해 있다. 겉으로 보이는 우리 시대는 첨단 미래사회를 향한 교두보를 탄탄히 다져놓은 듯하다 .그러나 경제적으로는 문화적으로 이전보다 많은 것을 누릴 수 있는 것에 비해, 우리의 의식은 겉으로 나타나는 것에 발 맞추어 변화한 것 같지 않다. 우리는 덩치만 커지고 체력은 떨어진 거인의 시대에 살고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힘들었던 과거를 떠올리지 않는다. 그러나 저급한 경제 논리는 아직도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으며, 빈익빈 부익부의 상황이 당연시되고 있다. 여전히 우리 사회곳곳에는 또 다른 난쟁이들이 희생당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소설 속에 나온 노도 환경이 더 이상 은폐될 수 없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노동 환경은 열악하다.
전반적으로 우리는 중산층화 되어 가고 있는 것처럼 뵌다. 그리고 만족한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수치 노름일 뿐이다. 그럼에도 그것에서 만족을 얻는 것은 울의 의식이 서서히 경제 논리화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한 인간의 삶이 경제성으로 순위 매겨지거나, 모든 일에 경제적 가치부터 따지려고 드는 것이 바로 우리 시대의 왜소한 거인의식이다. 난쟁이가 경제 논리와 불합리한 사회 구조에 희생당한 인물이었다면, 우리는 스스로 거대한 난쟁이, 혹은 왜소한 거인임을 자처하고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는 과연 진정한 거인의 시대는 올 것인가의 대한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때에 살고 있다. 단순한 경제 논리로 개개인의 다양한 삶을 재단하는 일은, 그 불행했던 70년대의 오류를 내면적으로 되풀이하는 일에 불과하다. 탐욕스러운 중도적 상류층이 아니라, 소박하고 여유 있으며 삶의 근본적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중산층 이야말로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거인의 모습일 것이다. 거인이 두드러지는 것은 난쟁이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가 거인인 시대. 모두가 삶의 개별적 가치에 눈뜰 수 있는 시대를 지향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이 소설이 우리에게 주는 직설적이 충고인 듯하다.
나는 솔직히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 그러나 미래에 다시 이 책을 익어 볼 때는 지금보다 더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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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조세희의 소설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읽으면서 많은 점들을 배울 수 있었다. 소설의 구조에서나 상황적 갈등에서 일어나는 의문들, 그리고 이 작품이 가지는 문학사적 가치들, 또한 이 소설의 주제의식등 많은 것들을 앎으로서 단지 한 편의 소설을 읽었다기 보다는 한 세대에 살면서 서민들의 고통과 갈등에 대해서 직접 체험을 했다고 느꼈다. 그러면 이 소설을 읽고 난 후의 느낌과 소설 속에서 나타난 상징들은 어떤 것이 있으며 또 소설의 주제의식이나 갈등의 양상 그리고 구조적인 특징을 알아보고, 이 소설이 가지는 문학사적 가치는 어떠한가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다.
일단 이 소설은 어떠한 주제의식을 가지고 썼는가. 우선 이 작품은 철거민 촌에서 벌어지는 인간들의 고달픈 삶과 빈익부 부익부의 자본주의의 모순을 비판하고 있다. 못가진자의 상징인물로 난장이인 아버지가 형상화되어 있다. 수대를 거치면서 가난함을 이어받아 점점 작아진 가난한 아버지들의 모습이 난장이 아버지로 투영된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한다면 '난장이'는 '희망'과 '사랑'의 상징일 수도 있다. 산업화되어 감에 따라 더욱 작아져 가는 사랑과 희망이 난장이에 더욱 투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가난한 아버지는 안 가져본 직업이 없을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그 결과 남는 것은 철거 보상금 25만원과 바꿀 가치밖에 없는 무허가 건물 한 채이다. 그러나 가진 자들은 못 가진 자의 무너져 가는 집을 이용하여 더욱 부를 늘려 간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병폐는 급성 장한 1970년대에 심했다. 난장이 아버지는 이러한 시점에서 꿈을 꾼다. 달나라에는 그러한 불평등 없이 모두가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갖고 그 희망을 쇠공에 실어 달을 향해 쏘아 올리고자 한다. 그러나 난장이 아버지는 그것도 못하고 종이 비행기를 날리다 공장 굴뚝에서 떨어져 죽는다. 이것은 가진 자와 못가진와의 골이 더욱 깊어짐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제의식으로 소설은
전개 되어간다. 소설의 전개 상황에 따라 갈등의 구조는 가진 자와 못가진자의 갈등이다. 이러한 갈등은 무허가 건물의 철거를 둘러싼 난장이 가족과 철거원들 사이에서 엿볼 수 있으며, 또한 영희와 부유한 사내가 갖는 육체적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그리고 난장이 가족 중 영호와 영수가 다니던 인쇄소에서 두 형제와 회사 사이에서의 갈등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 작품의 단락진 사건들은 모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갈등 양상으로 파악 될 수 있다. 상황적 배경인 '서울특별시 낙원동 행복동 46번지의 1839'의 허구적 배경은 도시 산업화와 기만적 근대화의 물결에 소외되어, 가진 자의 안락함을 위해 실존마저 위협 당하는 도시 빈민의 설움과 애환이 집약된 장소이다.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는 건드리기 어려운 부의 불평등과 계층화의 문제를 작가 조세희는 격렬하지 않는 문체로 꼬집고 있다.
조세희는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그 문체나 구성 비유의, 때로는 일탈되고 과장되며 왜곡된 데서 빚어지는 난해함과 함께 그 주제가 주고있는 것이 기존의 70년대 문학작품들과 다른 듯 싶다. 또한 난장이의 자식들인 영수, 영호, 영희를 번갈아 가며 시점이동이 이루어진다. 그들의 눈을 통해서 이뤄지는 사회적 갈등 또한 크고, 다양하게 움직인다.
이 소설은 70년대의 치열한 현실과 그것에 대한 진지한 문학 접근간의 유례없는 긴장 어린 자장 가운데에 하나의 폭탄처럼 '난장이가 소아 올린 작은 공'을 던졌다. 이것은 나에게도 큰 폭탄의 흉터가 자리 잡히지 않고서는 안될 작품이었다. 단지 70년대의 정치나 사회적으로 어려운 상황을 다룬 작품들과는 다르게 새롭게 다가오는 작품이었고 기존의 다른 문학작품들의 문학사적 가치에 대해서도 큰 차이가 있었다. 또한 70년대 소외된 노동자 빈민의 삶을 난쟁이와 연결하여 폭로한 작가 조세희에 대한 느낌도 새롭게 다가왔고 , 도전적이고 모험적인 인상을 내게 남겼다.
사회는 문학을 바꿀
수 있다 하지만 문학은 사회를 바꿀 수 없다. 이것은 사회가 가진 힘이 얼마나 큰지를 짐작하게 하는 것일 수 도 있다. 문학은 사회에 반영된다. 하지만 사회는 문학을 받아 안으려 하지 않는다.
소설은 단지 읽고 감동하고 하나의 이야기 거리로만 봐서는 안된다. 소설을 읽으면서 인물의 갈등 구조나 사회적 배경, 문학사적 가치, 또 그 소설이 가진 상징 등을 보면서 가슴으로 느끼는 것일 것이다. 나 또한 이 작품을 눈으로 읽은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읽었기 때문에 가슴깊이 또 하나의 감동을 만들었다. 내가 살고 또 배워가는 동안에 많은 도움이 될 거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