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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산 설명
조지서의 묘비는 명성에 비해 그 크기와 형태가 뛰어나지 않으며 비석이 사암으로 이루어져 보존상태가 양호하지 않으나 남명이 찬술한 묘갈명이 있어 사료적으로 그 가치가 높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하여 관리하고자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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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문화유산자료
하동 오천정씨 정려각 (河東 烏川鄭氏 旌閭閣)
하동 대곡리 오천정씨 정려각
해당 국가유산의 정보입니다. 분류, 수량/면적, 지정(등록)일, 소재지, 시대, 소유자(소유단체), 관리자(관리단체)로 구분되어 있습니다.분 류수량/면적지정(등록)일소 재 지소유자(소유단체)관리자(관리단체)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 인물기념 |
1동 1,388m2 |
2009.03.12 |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대곡리 152 |
임천조씨지족당공파종중 |
임천조씨지족당공파종중 |
시도지정 및 문화·자연유산자료는 각 지자체 담당부서에서 국가유산정보를 입력·수정 관리하고 있습니다.
문의사항이 있을 경우, 아래 지자체 담당부서로 연락하시기 바랍니다.
· 상 세 문 의 : 경상남도 하동군 문화체육과 055-880-2368
국가유산 설명
오천정씨 정려각은 중건된 지 250년이 된 전면 및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지어진 건축로서 건물의 크기에 비해 지붕이 큰 특징을 지니고 있고, 그것을 받치고 있는 공포는 균형을 가질 수 없을 정도로 큰 특징을 지닌 건축물로서 사료적 가치를 인정하여 보존관리 되어야 할 건축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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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冥先生集卷之二 / 墓誌 / 中訓大夫侍講院輔德贈通政大夫承政院都承旨趙公墓銘
嗚呼。有明朝鮮侍講院輔德趙公之墓也。延陵季子之墓無他贏。聖人之辭幹矣。兒童君實。走卒司馬。國乘有傳。人口有銘。庸詎贅焉。獨痛夫彼燕山兮。不與我好。君亡身死。爲當日蕭望之。爲異時伍子胥。呱呱之慟。呌呌蒼蒼者矣。侈公之石。不於女媧之家而徵燕石。諸從以余王母爲輔德之姊也。謂余爲郭子儀墓中之人也。辭不獲焉。公諱之瑞。字百符。世居林川。其始也。天赫。中中朝進士。仕高麗。六世孫門下祗候淳。生石堅。爲門下侍中。封嘉興伯。子益爲殿中。生司醞寺直長敏原。敏原有子曰諱瓚。中進士及第。爲司憲府監察。贈執義。寔公之皇考。娶生員鄭參女。生公。公於成化甲午年。中生員第一。進士第二。文科丙科。調授承文院正字。己亥年。中中試第一。授刑曹正郞。歷弘文館校理,應敎,侍講院弼善,輔德。爲燕山師。及卽位。知不克負荷。乞昌原府。退而家食十餘年。猶不得免。甲子歲。市于身。沼其家。投屍于江。丙寅改玉。贈通政大夫承政院都承旨。繼室鄭氏。生員允寬之女。允寬。乃文忠公夢周之曾孫。甲子之亂。夫人沒爲城旦。流離草野。子琛在襁褓。理在腹。手拾木實。烹爨瓦甌。朝夕奉奠。中廟朝褒旌門閭。長子珵再栲禁獄。百死一生。謫南海。中廟舒寃。拜軍資監參奉。仕一年歸第。有子曰得璜,得璫,得瑜。二子早世無嗣。得瑜有女壻曺元佑。元佑有子景胤,景弘,景贊。參奉獨有庶子得璉承祀。琛中生員。有子光璲,光玹,光玉。女壻二人。門人鄭希鳳。萬戶梁淑。理爲內禁衛。有子曰光珝。壻曰士人南泰亨。泰亨有子曰曄。承旨諸孤皆早世。唯有庶子名曰孫者。尙存。孫之子曰光海,光富。子産之沒。仲尼出涕曰。古之遺直也。植繼之曰。輔德亦古之遺直也。銘曰。晉之山兮桐之谷。狐首丘兮龜毁匵。身百碎兮藺之玉。家雙節兮湘之竹。羊公一石。淚可目也。比干七竅。口不可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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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冥先生集卷之二 / [錄] / 遊頭流錄
夕到旌樹驛。館前竪有鄭氏旌門。鄭氏。趙承宣之瑞之妻。文忠公鄭夢周之玄孫。承宣。義人也。高風所擊。隔壁寒慄。知燕山不克負荷。退居十餘年。猶不得免。夫人沒爲城旦。乳抱兩兒。背負神主。不廢朝夕祭。節義雙成。今亦有焉。看來高山大川。非無所得。而比韓鄭趙三君子於高山大川。更於十層峯頭冠一玉也。千頃水面。生一月也。海山三百里。獲見三君子之跡於一日之間。看水看山。看人看世。山中十日好懷。翻成一日不好懷。後之秉鈞者。來此一路。不知何以爲心耶。且看山中題名於石者多。三君子不曾入石。而將必名流萬古。曷若以萬古爲石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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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 280권, 성종 24년 7월 9일 신축 3번째기사 1493년 명 홍치(弘治) 6년
참판 신종호 등이 이창신의 일로 부름을 받다
참판(參判) 신종호(申從濩)·보덕(輔德) 조지서(趙之瑞)·사인(舍人) 민사건(閔思騫)·전첨(典籤) 이거(李琚)가 부름을 받고 와서 함께 아뢰기를,
"지난 을사년875) 에 신 등이 홍문관(弘文館) 관원으로 있으면서 마침 한재(旱災)로 구언(求言)876) 하는 것을 인하여 본관(本館)에서 상소하여 한재를 이루는 이유를 논하면서 말이 영의정(領議政) 윤필상(尹弼商)에게 미쳤었으나, 좌중(坐中)의 은밀한 의논을 외부의 사람이 아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상소한 이튿날 윤필상이 갖추 알고 있으므로, 함께 의논한 자가 누설한 것이라고 생각했었으나 어떤 사람의 소행인지는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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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 281권, 성종 24년 8월 6일 무진 5번째기사 1493년 명 홍치(弘治) 6년
세자가 《사서》를 진강하도록 사부와 의논하게 하다
시강원 설서(侍講院說書) 정여창(鄭汝昌)이 이사(貳師)·빈객(賓客) 등의 의논을 가지고 아뢰기를,
"《명신언행록(名臣言行錄)》은 매우 많으므로 한두 해를 지나야 바야흐로 읽기를 마칠 수 있는데, 근본이 되는 책은 모름지기 젊을 때에 진강(進講)해야 할 것이므로 《언행록》을 강(講)하지 말고 《사서(四書)》를 진강할 것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다시 사부(師傅)에게 의논하여 아뢰라."
하였다.
오천정씨정려각
경남 하동군 옥종면 대곡리 산 152
조지서묘비
경남 하동군 옥종면 대곡리 61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