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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16. 연중 제20주일. 묵상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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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나는 이방인들을 나의 거룩한 산으로 인도하리라.>(이사56,1.6-7)
1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공정을 지키고 정의를 실천하여라.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의로움이 곧 드러나리라. 6 주님을 섬기고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며 주님의 종이 되려고 주님을 따르는 이방인들,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않고 나의 계약을 준수하는 모든 이들. 7 나는 그들을 나의 거룩한 산으로 인도하고 나에게 기도하는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하리라. 그들의 번제물과 희생 제물들은 나의 제단 위에서 기꺼이 받아들여지리니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리리라.” 제2독서<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의 은사와 소명은 철회될 수 없습니다.>(로마11,13-15.29-32)
형제 여러분, 13 나는 다른 민족 출신인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나는 이민족들의 사도이기도 한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14 그것은 내가 내 살붙이들을 시기하게 만들어 그들 가운데에서 몇 사람만이라도 구원할 수 있을까 해서입니다. 15 그들이 배척을 받아 세상이 화해를 얻었다면, 그들이 받아들여질 때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죽음에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29 하느님의 은사와 소명은 철회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30 여러분도 전에는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들의 불순종 때문에 자비를 입게 되었습니다. 31 마찬가지로 그들도 지금은 여러분에게 자비가 베풀어지도록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지만, 이제 그들도 자비를 입게 될 것입니다. 32 사실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을 불순종 안에 가두신 것은,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려는 것입니다.
복음<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마태15,21-28)
예수님께서 21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다. 22 그런데 그 고장에서 어떤 가나안 부인이 나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23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다가와 말하였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24 그제야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25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26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8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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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16. 연중 제20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8.16 05:30
- 힘의 한계 때문에 사랑의 경계를 짓지 않는
어제 광복절을 지내며 우리는 오늘의 이 광복을 누리며 지난날 우리의 불행했던 때를 돌아볼 수 있는 나라가 되었음을 생각하다가 그러나 아직 불행이 현재진행인 나라의 사람들이 있음을 문득 생각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광복만 챙기고 다른 민족과 나라들의 불행에 무관심한 저와 우리나라를 돌아보게 되었고 저의 사랑과 복음 선포에 어떤 경계가 있음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경계란 저의 사랑과 복음 선포에 나라와 민족이라는 경계, 나라와 민족이라는 경계는 아니지만 내 사랑과 복음 선포는 요 정도까지만이라는 경계가 있다는 자각과 반성이었습니다. 물론 제가 이렇게 경계를 짓는 데는 제힘의 한계가 큰 이유인데 주님께서는 한계가 없으신 분인데도 나라와 민족의 경계를 지으신 걸까요? 그리고 예수님이 이사야서가 오시리라고 예언한 메시아라고 우리는 믿는데 오늘 첫째 독서 이사야서가 말하는 메시아와 복음의 주님은 다른 분일까요? “나는 주님을 섬기고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며 주님의 종이 되려고 주님을 따르는 이방인들을 나의 거룩한 산으로 인도하고 기도하는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하리라. 그들의 번제물과 희생 제물들은 나의 제단 위에서 기꺼이 받아들여지리니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리리라.” 그러므로 오늘 주님의 언행이 주님의 진심일까 생각게 됩니다. 사실 루카복음에는 오늘 얘기가 완전히 빠져 있고, 마르코복음에서는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라고 얘기합니다. 그렇습니다. 마태오복음의 주님도 이방인들에게 당신 사랑과 복음 선포의 경계를 지으시는 것이 아니라 먼저 뽑힌 이스라엘 백성에게 당신 사랑과 복음을 전하시고 그들이 당신의 사도로서 당신의 사랑과 복음을 전하게 하심입니다. 실제로 마태오복음 맨 마지막에 주님께서는 사도들을 이렇게 파견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사실 주님은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을 모은 것밖에 하지 못하셨습니다. 주님은 삼 년을 공생활 하시다가 돌아가셨고, 이스라엘 밖을 나가신 적이 거의 없고 대부분 갈릴래아 지방에서 활동하셨습니다. 마태오복음 18장까지 갈릴래아에서 제자들을 말씀과 행적으로 길러내시고 사도들을 뽑아 세우시고 그들에게 당신 교회와 선교를 맡기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오늘 가나안 여인에게 하신 행위도 이스라엘 백성과 제자들이 보라고 하신 겁니다. 너희들이 강아지라고 여기는 이방 여인의 믿음이 얼마나 대단한지 보게 하기 위해 주님께서는 이방 여인에게 부러 모욕적인 언사를 보이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당신이 자주 말씀하신, 꼴찌가 첫째 되는 구원론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첫째로 먼저 구원하고자 하시는 이스라엘은 교만하여 예수님을 몰라보고 구원을 걷어차는 데 비해 이방인들은 예수님을 구원자로 만나게 되는 것 말입니다. 그것이 잘 드러나는 것이 여인의 표현 곧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렇게 부르지 않는데 여인은 말끝마다 ‘주님’이라고 예수님을 부릅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이런 여인에게 주님께서 대단히 큰 칭찬을 하십니다. 사실 믿음에 대한 주님의 큰 칭찬은 다 이방인인 백인대장과 여인에게 하셨습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려는 우리 신앙인들은 제자들처럼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라고 말하지 말고 저처럼 사랑과 복음 선포의 경계를 짓지 말 것입니다. 나의 힘의 한계 때문에 사랑의 경계를 짓지 말고, 민족적 편견 때문에 구원의 경계를 짓지 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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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16. 연중 제20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태 15,21-28
이 가나안 부인을 우리는 지난번에 ‘담을 넘는 믿음’으로 만났습니다. 오늘 주님의 날에는 그 부인의 ‘인내’에 눈을 멈추어 봅니다. 그는 한 번이 아니라 ‘네 번’의 벽을 만납니다.
첫째, 주님의 ‘침묵’입니다.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둘째, 제자들의 ‘내침’입니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셋째, ‘이스라엘 집안의 양들’이라는 선 긋기입니다. 넷째, ‘강아지’라는 모욕에 가까운 말씀입니다. 이 네 번의 벽 앞에서 보통 사람이라면 등을 돌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부인은 좌절하지도, 발끈하지도, 떠나지도 않습니다. 침묵에도 다시 청하고, 내침에도 다가가 엎드리며, 모욕에 가까운 말마저 “그러나 강아지들도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라는 ‘믿음의 한마디’로 받아넘깁니다. 이것이 바로 ‘인내’입니다. 인내란 그저 ‘참는 것’이 아니라, 거절마저 ‘믿음의 지렛대’로 바꾸는 힘입니다.
성 예로니모는 이 부인에게서 ‘지치지 않는 기도’를 봅니다. 주님께서 침묵하실 때조차 그 침묵을 ‘거절’이 아니라 ‘더 깊이 청하라는 초대’로 알아듣는 것. 주님께서는 ‘늘 기도하며 낙심하지 말라’ 하셨습니다(루카 18,1). 이 부인은 바로 그 ‘낙심하지 않는 기도’의 모범입니다. 그리고 그 인내는 마침내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라는 탄복으로 보답받습니다.
평화·인내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은 ‘인내’가 ‘평화’로 이어짐을 보여 줍니다. 제1독서의 이사야 예언대로, 하느님께서는 이방인들마저 ‘거룩한 산’으로 인도하시어 ‘만민을 위한 기도의 집’에서 기쁘게 하십니다. 끝까지 견딘 이 부인의 인내가, ‘담 밖의 사람’을 ‘식탁의 사람’으로 바꾸는 평화의 문을 연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주님의 ‘침묵’ 앞에서 쉽게 등을 돌리지 않는가? 나는 거절을 ‘낙심’이 아니라 ‘더 깊은 청함’으로 바꾸는가? 나는 응답이 더뎌도 ‘낙심하지 않는 기도’를 이어 가는가? 나의 인내는 ‘만민의 평화’를 향해 열려 있는가?
주님, 당신의 침묵 앞에서도 등을 돌리지 않게 하소서. 거절을 더 깊은 청함으로 바꾸는 인내를 주시고, 그 인내가 만민의 평화로 이어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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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16. 연중 제20주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하느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리고 저는 누구입니까?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하느님, 당신은 누구이십니까? 그리고 저는 누구입니까?"라고 묻는 것은 우리를 성령의 현존 안으로 이끌어 줍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프란치스코와 클라라의 신비주의 하느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리고 저는 누구입니까? 2026년 8월 15일 토요일 저자 존 스위니(Jon Sweeney)는 우리에게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처럼 기도하자고 초대합니다. 우리의 모든 의심과 갈망, 그리고 인간적인 나약함까지도 성실히 봉헌하며 말입니다: 이것은 성 프란치스코에 관한 일화로서, 그 어떤 다른 종교적 인물보다도 제 마음 깊은 곳에 울림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이 그를 살아 있는 성인이라 부르기 시작했을 때에도, 프란치스코는 의심을 품었습니다. 그의 가장 가까운 제자들이 그를 가톨릭 교회의 모든 선함의 근원이라 믿었을 때에도, 그는 여전히 하느님께서 누구이신지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라 베르나 산에서 성 프란치스코가 사십 일 동안 단식과 기도를 드린 장면이 있습니다. 그가 고요함을 필요로 했음을 주목해 보십시오. 최근 한 연구팀은 "왜 고독(혹은 독거: solitude)이 모든 이들에게 잠재적으로 큰 힘을 지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고, 이렇게 결론지었습니다. "고독은 궁극적으로 당신이 원하는 것을 행하고(자율성), 당신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진정성) 자리라고 생각하십시오." [1] 이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에게 놀랍도록 참된 말이며, 우리가 그와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는 고독을 갈망했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분별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는 흔히 성인에 대한 경건한 가톨릭적 이해, 곧 더 이상 존재론적 질문을 던지고 답할 필요가 없다는 관념과는 대조적입니다…. 프란치스코는 형제 레오를 동반했지만, 하루에 한 번만 자신을 살펴보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레오는 프란치스코의 목소리와 그의 기도를 들었습니다. "하느님, 당신은 누구이십니까? 그리고 저는 누구입니까?" 프란치스코는 이 의심 어린 기도를 "그 외에는 아무 말도 없이" 계속 반복했습니다. 그것은 갈망이었고, 언제나처럼 하늘을 향해 찾고 손을 뻗는 행위였지만 동시에 반복되는 의식이기도 했습니다. 신앙인의 삶의 의미는 결국 단순하면서도 영원한 몇 가지 질문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데서 드러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영원하고 단순하며 하느님을 향해 뻗어가는 기도는 단순히 인간의 필요와 갈망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느님으로부터 솟아나는 하느님을 향한 갈망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당신은 누구이십니까? 그리고 저는 누구입니까?"라는 물음은 영과 성령을 이어주는 연결 조직과도 같고, 더 나아가 하나로 일치된 영이 마치 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18세기 우크라이나의 초기 하시딕 랍비인 코레츠의 핀하스(Pinchas of Koretz)는 때로 "당신이 드리는 기도가 곧 하느님의 현존입니다."라고 가르쳤습니다. References [1] Netta Weinstein, Heather Hansen, and Thuy-vy T. Nguyen, Solitude: The Science and Power of Being Alon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24), 53. [2] Jon M. Sweeney, Experiencing God: 36 Ways According to Saint Francis of Assisi (Monkfish, 2026), 53–54, 55.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Pouya Hajiebrahimi, untitled, 2025,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안개 속에 홀로 서 있는 우리의 모습은 변모를 기다리며 성녀 클라라가 말한 거울 앞에 고요히 서 있는 모습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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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16. 연중 제20주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은총의 작은 부스러기"라도... 2026.08.16. 05:24
지난 주일 복음에서 베드로의 기도는 세 마디로 간결하게 농축되어 있었습니다.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오늘 복음에서 가나안 여인의 기도도 정확하게 같습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베드로는 주님의 수제자였고, 가나안 여인은 이방인이었지만, 그들의 기도는 같았고 예수님께서는 두 사람 모두에게 응답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도우시는 데 다소 주저하시는 듯 보입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만 파견되었을 뿐이다."라는 말씀은 곧 "나는 유다인들을 돕기 위해 왔지, 가나안 사람들을 위해 온 것이 아니다."라는 뜻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자녀들의 빵을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좋지 않다."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자녀들"은 곧 "이스라엘 사람들"인 유다인을 가리키는 말이고, "강아지들"은 당시 유다인들이 모든 이방인을 낮춰 부르는 경멸적 별칭이었습니다. 사실 구약 시대에 이 지역은 가나안인들과 특히 페니키아의 도시인 티로와 시돈과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이곳은 이스라엘과는 종교적으로 크게 구별되었고, 이방의 신들을 섬기는 곳으로 알려져 있었기에, 이스라엘과 이 지역 사람들 사이에는 오랜 긴장과 갈등이 있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놀라운 믿음으로 응답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그러나 강아지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태 15,27). 이 여인의 말은 마치 이렇게 들립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저는 이방인으로서 계약의 특권 밖에 있는 존재임을 압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총은 경계를 넘어 흘러넘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저는 특별한 빵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은총의 작은 부스러기라도 제 딸을 치유하기에 충분하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 순간 예수님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였는지 알기는 쉽지 않습니다. "왜 처음에는 아무 응답도 하지 않으셨는지?" "왜 이 여인에게 경멸적인 언사를 쓰셨는지?" 등에 대해서는 복음은 침묵합니다. 다만 분명히 기록된 것은, 결국 예수님께서 그녀의 청을 들어주시고 그녀의 믿음을 칭찬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것도 이 이방인의 믿음을 말입니다! "은총의 작은 부스러기라도..." 이 믿음의 고백은 장벽을 허물었습니다. 종교적 편견도, 사회적 멸시도, 개인적 고통도 그녀의 담대한 믿음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침내 선언하십니다. "오,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마태 15,28). 우리도 이 여인처럼 굳건한 믿음과 끈질긴 인내를 지니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때로는 제자들의 목소리처럼 낙심시키는 말들을 듣기도 하고, 때로는 주님의 침묵에 괴로워하기도 하며, 때로는 기도가 거절되는 듯한 아픔을 겪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이 어머니의 믿음을 깊이 새기며, 이 어머니처럼 모든 장벽을 넘어 주님의 은총을 간절히 청하는 용기와 믿음을 지니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려움과 모순을 만날 때 그것을 부수려 하지 말고, 부드러움과 시간으로 그것을 굽히십시오." 물론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장벽에 부딪칠 때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당신 사랑 안으로 끌어들이시기 위한 특별한 계획을 각 사람마다 고유하게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 계획이 우리의 이성적 판단에 의하면 모순적으로 다가올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오로가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강조하듯이, "사실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을 불순종 안에 가두신 것은,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려는 것입니다."(로마 11,32). 우리 모두를 당신 사랑 안으로 모아들이시기 위한 하느님의 계획의 세세한 부분은 우리가 알 수도 없고 또 이해할 수도 없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분명히 그리하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가 이렇게 선언하는 것입니다. "과연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와,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로마 11,36). 그래서 우리 믿음의 여정에서 이 진리를 확신하는 것이 그리도 중요한 것입니다! 지금이 지나고 시간이 흐르면서 앞으로 우리에게 어떤 일이 닥칠지 우리는 모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마다 당신께로 나아가는 여정을 준비해 두고 계시다는 사실을 확신한다면 우리는 안심하고 용기 있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믿음 안에 살고자 한다면 우리에게는 언제나 "은총의 작은 부스러기"라도 주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그랬듯이요!!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 이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시는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분명히 믿음은 단순히 교리의 모든 조항을 정확히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그의 가장 가까운 제자들조차도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부터 유다인과 비유다인 사이의 구분이 아니라, 믿음을 가진 이와 그렇지 않은 이의 구분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다른 자리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이방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로마 백인대장에게는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마태 8,10; 루카 7,9)라고 하셨습니다. 또 제자들에게는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마르 9,3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교회 울타리 밖에서도 그리스도를 위해 많은 선한 일이 이루어집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Nostra Aetate, 2)에서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이 종교들 안에 있는 참되고 거룩한 것을 아무것도 배척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그들의 생활 방식과 규범, 가르침을 진지한 존경으로 바라봅니다. 그것들은 교회가 지니고 제시하는 것과 여러 면에서 다르지만, 종종 모든 사람을 비추시는 그 진리의 한 광채를 반영합니다." 오늘날에도 인류의 발전과 해방을 위한 수많은 움직임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이 그리스도께 반대하지 않는다면, 곧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진리의 빛을 비추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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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16. 연중 제20주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http://www.ofmkorea.org/ofmkfb/583688 2026.08.16 05:20
포르치운쿨라 다시 세상 속으로 첫 번째 이야기
포르치운쿨라에서 세상의 상처로 파견되는 작은 형제들 포르치운쿨라는 세상으로부터 도망쳐 숨어 있기 위하여 세워진 작은 성당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세상 한가운데로 다시 나아가기 위하여 마음을 비우고, 복음을 듣고, 형제들과 한 몸을 이루는 파견의 집이었습니다. 형제들은 포르치운쿨라에 머물렀지만 그곳을 소유하지 않았고, 그 작은 성당 안에서 하느님의 위로를 받았지만 그 위로를 자신들만의 것으로 간직하지 않았으며, 기도 안에서 평화를 맛보았지만 그 평화를 안전한 울타리 안에 가두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다시 길을 떠났습니다. 맨발로 먼지를 밟고,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채 마을과 도시와 들판을 지나며, 사람들의 집과 시장과 병든 이들의 자리와 전쟁의 경계로 걸어갔습니다. 그들의 손에는 무기도 없었고, 권력자의 허가도 없었으며,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해 줄 재산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지닌 것은 복음과 형제, 그리고 하느님께서 먼저 세상 안에 계신다는 믿음뿐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에게 세상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하여 떠나야 할 어두운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세상은 하느님께서 이미 몸을 취하여 들어오신 자리였고, 그리스도께서 가난한 이와 병든 이와 죄인과 함께 식탁에 앉으신 자리였으며, 성령께서 여전히 모든 피조물 안에서 새 생명을 일으키시는 거룩한 현장이었습니다.
육화하신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역사를 멀리서 바라보지 않으셨습니다. 고통을 설명하는 말씀만 보내지 않으셨고, 높은 곳에서 인간에게 올라오라고 요구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몸을 취하셨고, 인간의 눈물과 피로와 배고픔과 외로움 안으로 들어오셨으며, 우리와 같은 길을 걸으시고 우리와 같은 흙을 밟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세상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프란치스칸에게 선택 가능한 활동이 아니라 육화의 신비를 따르는 복음적 필연입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피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도 세상을 피할 수 없고,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상처를 자신의 몸에 받아들이셨다면 우리도 다른 이의 고통 앞에서 멀리 서 있을 수 없습니다.
기도는 우리를 세상에서 떼어놓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고통을 더 깊이 보게 합니다. 참된 관상은 눈을 감아 현실을 잊는 일이 아니라 마음의 눈을 열어 구체적인 실재 안에 숨어 계신 하느님의 현존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갈수록 우리는 사람들의 울음에 더 민감해지고, 피조물의 신음에 더 귀를 기울이며, 세상의 불의와 폭력 앞에서 더 깊이 아파하게 됩니다.
만일 우리의 기도가 이웃의 고통을 보지 못하게 한다면 그것은 아직 자기 위로에 머무는 기도입니다. 우리의 관상이 가난한 이의 울음과 연결되지 못하고, 공동체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의 삶을 외면하게 한다면 그것은 아직 복음적 관상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성이 세상을 판단하는 높은 자리를 마련해 주고, 상처 입은 사람 곁으로 내려가게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육화되지 않은 영성입니다.
프란치스코는 기도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세상 속에서 그분을 다시 알아보았습니다. 산 다미아노의 십자가에서 자신을 바라보시던 그리스도는 나병 환자의 일그러진 얼굴 안에서도 그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성체 안에서 자신을 빵으로 내어주시는 그리스도는 굶주린 사람의 빈손 안에서도 그에게 다가오셨습니다. 말씀 안에서 평화를 선포하신 그리스도는 전쟁과 적대의 경계에서 화해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얼굴 안에 살아 계셨습니다.
프란치스코에게 세상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은 바로 앞에 있는 한 사람의 얼굴이었고, 길가에 버려진 병자의 몸이었으며, 성벽 밖으로 밀려난 가난한 이의 삶이었습니다. 세상은 전쟁으로 서로를 원수라 부르는 두 집단이었고, 소유와 명예를 위하여 형제를 경쟁자로 만드는 인간의 마음이었으며, 탐욕으로 상처 입은 땅과 물과 바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길은 언제나 구체적인 얼굴을 향합니다. 인류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내 곁의 한 사람을 피할 수 없고, 세상의 평화를 위하여 기도하면서 내 공동체 안의 오래된 적대를 외면할 수 없습니다. 가난한 이를 위한다고 말하면서 가까운 형제의 필요에는 무관심할 수 없고, 피조물의 보호를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소비와 편리함은 조금도 바꾸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복음은 언제나 우리에게 묻습니다. 오늘 네 앞에 있는 사람은 누구냐? 누구의 울음을 듣고도 지나쳤느냐? 누구의 상처가 네 계획을 불편하게 한다는 이유로 외면되었느냐? 어떤 생명이 네 편리함을 위하여 희생되고 있느냐? 어떤 관계가 네가 옳음을 주장하는 동안 무너지고 있느냐? 다시 세상 속으로 간다는 것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의 구원자가 아닙니다. 세상을 구원하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시며, 우리는 다만 그분의 사랑이 지나갈 수 있도록 자신을 내어놓는 작은 도구입니다.
도구적 존재로 산다는 것은 자신의 존엄과 자유를 포기하는 일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 이용당하거나 자기 자신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도구적 존재란 내가 삶의 주인이라는 착각을 내려놓고, 하느님의 선하심이 나를 통하여 관계 안으로 흘러가도록 기꺼이 자신을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나의 입이 상처를 더 깊게 만드는 말의 도구가 아니라 위로와 진실의 도구가 되고, 나의 귀가 소문과 판단을 모으는 도구가 아니라 말할 곳 없는 이의 이야기를 듣는 도구가 되며, 나의 손이 소유하고 지배하는 손이 아니라 굶주린 이에게 빵을 건네고 병든 이의 몸을 씻는 손이 되는 것입니다. 나의 발이 불편한 사람을 피해 가는 발이 아니라 외로운 이를 찾아가는 발이 되고, 나의 시간과 능력과 공간이 나만을 보호하는 성벽이 아니라 다른 이가 잠시 머물 수 있는 작은 포르치운쿨라가 되는 것입니다.
도구는 자신이 주인이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사용하시는 분의 뜻에 귀를 기울이고, 어디로 가야 할지, 언제 말해야 할지, 언제 침묵해야 할지를 묻습니다. 때로 사랑은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것이지만, 때로 사랑은 상대의 자유를 존중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때로는 불의 앞에서 분명한 목소리를 내야 하지만, 때로는 말보다 현존으로 곁에 머물러야 합니다. 참된 섬김은 내가 하고 싶은 선행을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묻고, 그의 목소리를 듣고, 그의 존엄과 선택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를 돕는다는 이름으로 그를 나의 선행을 위한 대상으로 만들지 않고, 그 안에 있는 지혜와 힘과 고유한 이야기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자신의 선함을 증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는 남들에게 보이기 위하여 봉사하지 않고, 자신이 옳은 편에 서 있다는 만족을 얻기 위하여 약한 이들의 고통을 이용하지 않습니다. 그는 선을 행하면서도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지 않고, 하느님께서 이미 그 사람의 삶 안에서 일하고 계심을 믿으며 조심스럽게 곁에 섭니다. 프란치스코는 가난한 이를 자신의 영적 성장에 필요한 도구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며 위에서 내려다보지 않았고, 자신이 가진 것을 베풀어 주는 사람으로만 서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들의 곁으로 내려가 형제가 되었고, 그들의 삶 안에서 자신이 받아야 할 복음을 발견했습니다.
나병 환자는 프란치스코에게 자선을 베풀 대상이기 전에 회심으로 이끄는 스승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나병 환자를 껴안으면서 그를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변화되었습니다. 역겹게 보이던 것이 달콤함으로 바뀌었고, 피하고 싶었던 얼굴 안에서 자신을 기다리시는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세상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이렇게 우리 자신이 변화되도록 허락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가난한 이를 돕기 위해 다가가지만 그들에게서 가난의 지혜를 배우고, 아픈 이를 위로하기 위해 곁에 머물지만 그들의 인내를 통하여 삶의 깊이를 배우며, 소외된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주려 하지만 오히려 그들을 통하여 우리가 얼마나 좁은 세계 안에 갇혀 있었는지를 깨닫습니다.
세상은 우리가 일방적으로 무엇을 주기만 하는 장소가 아닙니다. 세상은 하느님께서 수많은 얼굴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의 눈을 열며, 우리의 거짓 자아를 깨뜨리시는 계시의 자리입니다. 낯선 사람은 우리에게 새로운 하느님의 얼굴을 보여 주고, 상처 입은 피조물은 우리가 잃어버린 절제와 돌봄을 가르치며, 가난한 이의 빈손은 우리가 무엇을 움켜쥐고 살아왔는지를 드러냅니다. 다시 세상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우리의 안전한 해석과 익숙한 질서가 흔들리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포르치운쿨라의 문을 나서는 순간 우리는 예상하지 못한 사람을 만나고, 우리가 준비한 답으로 해결되지 않는 고통을 마주하며, 무엇이 옳은지 쉽게 판단할 수 없는 복잡한 현실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겸손을 배웁니다. 세상의 모든 문제를 설명할 수 없고, 다른 사람의 삶을 몇 가지 원칙으로 판단할 수 없으며, 선한 의도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배웁니다. 사람의 상처는 깊고, 사회의 불의는 복잡하며, 오랜 시간 쌓인 분열은 한 번의 말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속의 작은 형제는 모든 답을 가진 사람처럼 행동하지 않습니다. 그는 먼저 듣고, 배우며, 사람들과 함께 길을 찾습니다. 자신이 구원자라는 교만을 내려놓고, 이미 그곳에서 일하고 계시는 하느님의 발자취를 발견하려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도착하기 전부터 그곳에 계십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상호 돌봄 안에 계시고, 전쟁 중에도 자녀를 지키는 어머니의 손 안에 계시며, 불의에 맞서면서도 폭력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용기 안에 계십니다. 상처 입은 땅을 다시 살리려는 작은 노력과, 소외된 이들을 위하여 문을 여는 공동체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리에서 생명을 지키는 사람들 안에 하느님의 선하심은 이미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의 사명은 그곳에 하느님을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계시는 하느님을 알아보고, 그분의 일에 우리의 작은 몫을 보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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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부베드로 묵상방
생활묵상 : 신앙으로 힘을 주시는 형제님을 생각하면서..... 2026.08.08
신앙의 힘이라는 말을 사용하면 다양한 의미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세상적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을 마치 신앙이 있기 때문에 신앙의 힘으로 견디어낸다든지 아니면 극복을 할 때 흔히 표현하기도 합니다. 신앙수기공모전에도 이와 같은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때 신앙은 자신이 가지는 신앙의 의미를 재해석해야 합니다. 신앙은 오로지 자신의 믿음을 바탕으로 성장하기도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신앙은 남의 눈치를 살펴서 남의 눈을 의식해서 하는 그런 의미의 신앙이 아니라 다른 신앙인의 격려라든지 응원의 힘으로 나약한 신앙을 좀 더 견고하게 만들 수 있다는 걸 경험해 본 적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핍박을 해도 아주 극소수이지만 응원하고 믿어주는 형제자매들이 있다면 말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비난을 하고 손가락질을 해도 그게 어떤 유언비어로 인해 그렇다고 해도 절대 그 사람은 그럴 일이 없을 거라고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인간적으로뿐만 아니라 신앙 안에서도 잘 살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우리는 신앙이라는 걸로 서로 맺어진 영적인 형제자매이지만 실상 인간적인 시각으로 그 내면을 자세히 살펴보면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고 사는 사람은 아마 극히 드물것입니다. 마치 교과서적인 내용에 불과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현실을 뛰어넘어서 만약 신앙으로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여러 차례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이름만 신자라는 꼬리를 달고 있을 뿐 그 꼬리로 신앙인이라고 불리어질 수 있을 뿐이지 진정한 신앙인이 되려면 그저 신앙을 가진 것에 만족할 게 아니라 진정으로 내가 신앙 안에서 신앙을 모토로 제대로 신앙인인지를 항상 확인하는 과정을 거쳐야 할 것입니다. 만약 그 과정이 없다면 그는 명목상 그저 허수의 신앙인에 불과할 뿐입니다. 저는 오늘 이와 같은 묵상을 태평양을 건너 살고 계신 최 마르코 형제님에 대해 묵상을 하면서 이런 묵상을 하게 된 것입니다. 형제님은 어떤 경우에는 제 글에 긴 답글을 올려주시고 코멘트를 해 주십니다. 그 코멘트를 읽으면서 마음은 길게 저 역시 코멘트를 해 드리고 싶은데 개인 사정으로 할 수 없는 경우가 있어서 또 시간적인 이유로도 하지 못했습니다. 저 역시 그 코멘트를 통해 또 제가 묵상한 내용을 다시 한 번 더 다른 시각으로 묵상을 해보곤 합니다. 바로 이게 상생의 원리인 듯합니다. 형제님께서는 제가 표현한 걸 바탕으로 해서 다시 묵상을 하시고 또 그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해 주신 내용으로 저 역시 다시 한 번 더 새로운 시각으로 다시 묵상을 하게 되면 좀 더 사고가 명확해지기도 합니다. 마치 이런 효과를 신앙에 적용하면 아주 좋은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로에게 힘이 되어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독불장군처럼 해서는 제대로 하느님께 갈 수 없습니다. 신앙은 함께 공동체를 통해서 성장해야 합니다. 공동체라고 해서 무리를 뜻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성당 공동체만을 뜻하는 것도 아닙니다. 최소한의 둘 이상만 되어도 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렇게 구성이 되어도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셔주시기 때문입니다. 공동체라고 해서 규모가 거대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작은 소규모의 그룹이라도 그 그룹 자체가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름값을 톡톡히 발휘하면 그 공동체는 위대한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태평양 너머 미국에 계신 최 마르코 형제님과 굿뉴스에서 비록 글로 서로 소통을 하지만 이 소통은 저희 둘만의 소통의 장으로 되는 게 아닐 것입니다. 직접 소통하는 주체는 저희가 되지만 그런 소통의 장을 간접적으로 다시 소통의 장 속으로 들어오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바로 그분들은 저희와 직접 소통은 하지 않으시지만 간접적으로 저희가 소통하는 내용을 지켜보시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건 단순히 방관하는 게 아닙니다. 이를 통해서 서로 교감을 할 수도 있고 때로는 교감이 안 될 수도 있습니다. 결국은 두 사람이 소통을 하는 것 같지만 사실 이 소통 속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많은 분들이 함께 참여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건 소규모의 공동체의 의미보다도 더 큰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마치 새로운 여론의 장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정말 이건 건전한 또 다른 신앙으로 새로운 만남의 장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를 통해서 서로에게 힘이 되어준다면 그 모습이야말로 예수님이 보시면 정말 기뻐하시지 않을까 하는 묵상을 해봅니다. 이건 두 사람만이 누리는 효과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이건 달리 생각해보면 아주 많은 분에게 선한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한쪽이 미비한 생각을 했을 때 다른 한쪽이 그냥 지적하듯이 보완하는 게 아니라 나는 이런 점에서는 이런 생각을 한다고 하면서 예를 다해서 표현한다면 그 예는 겸손으로 서로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아름다운 신앙인의 모습이 될 거라고 확신을 합니다. 이런 모습이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이지 서로 반목을 하려고 하고 세상처럼 누군가를 짖밟고 신앙 안에서 경쟁을 하려는 사람만큼 그 사람처럼 불쌍한 신앙인이 있을까도 싶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나로 인해서 모든 사람은 아니더라도 자기 주변 사람들에게만이라도 정말 제대로 된 신앙인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예수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실 것입니다. 마르코 형제님, 항상 힘과 용기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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