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세정 「안녕, 안나푸르나 혹은 안티푸라민」평설 / 홍일표
안녕, 안나푸르나 혹은 안티푸라민
한세정
배웅은 필요 없어
다만 코끝을 마주대고 어깨를 다독여주면 돼
강렬한 태양 때문에 눈이 시릴 때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내가 장님이 된 것은 아니었으니까
내가 나를 떠난 건 아니었으니까
내가 아는 여자가 있었어
퍼렇게 멍이 든 눈가엔 항상 안티푸라민이 번들거렸지
여자는 하루 종일 식당 뒷문에 쪼그리고 앉아
고등어를 구웠어
이런 일과들이 여자를 스쳐가곤 했어
잘 달궈진 석쇠 위에서 고등어의 퍼런 껍질이
곪은 종기처럼 부풀다가 터지고
여자는 말없이 눈가에 안티푸라민을 덧발랐지
울음의 무늬를 기억하는 굴곡을 어루만지며
가파른 산비탈마다 멍멍한 귓속을 채우는
나귀들의 방울소리와
몸을 움츠려야만 닿을 수 있는 지상의 협곡들,
그러니까 배웅 따윈 필요 없어
난 단지 내 안의 굴곡을 벗어나
안나푸르나에 가고 싶을 뿐이야
아직도 눈가 가득 안티푸라민을 바르고 있을
내 몸 밖의 굴곡을 어루만지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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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굴곡을 넘어서는 시
건강한 시 한 편을 발견했다. 한세정 시인은 잠깐 반짝했다가 사라지는 별이 아니라 꽤 오랫동안 우리 시를 밝고 풍요롭게 할 별이 될 것이다. 그의 시에는 현실을 냉철하게 읽어내는 밝은 눈과 진정성, 다층적 사유와 자유로운 상상력이 내재되어 있다. 어설픈 시적 포즈나 유명 시인의 작품을 베껴먹는 식의 안이한 시작 태도는 찾아볼 수 없다. 일부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 발견되는 몰개성, 특이한 사유나 시의 문법도 없고, 남다른 감각의 촉수도 보이지 않는 작품들이 시읽기를 힘들게 한다. 지루하고 재미없는 시들, 아무런 정서적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시들은 지독한 회의나 절망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모조품이다. 그럴듯한 포즈만 있을 뿐 영혼이 없는 죽은 시들이 산재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안나푸르나와 안티푸라민의 절묘한 배합이 이 시를 살아 숨쉬게 한다. 두 대상은 전혀 다른 이질적 요소이다. 그러나 희한하게도 유사음이 반복되고 시인의 예리한 감각이 그걸 놓치지 않은 것이다. 풍요의 여신 안나푸르나는 히말라야의 고봉이다. 모든 산악인들에게 설렘과 도전의 대상인 안나푸르나, 한편 안티푸라민은 타박상, 관절통 등을 치료하는 소염 진통제이다.
시의 첫 행은 ‘배웅은 필요 없어’로 시작된다. 단호하다. 떠나야 하는 현실이지만 누구의 배웅도 위로도 필요 없다는 결기 어린 선언이다. 잠시 눈이 시릴 때가 있었지만 장님이 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홀로 서서 걸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2연에서는 굴곡 많은 한 여인이 소개된다. 식당 종업원인 그 여인은 ‘울음의 무늬를 기억하는 굴곡을 어루만지며’ 시퍼렇게 멍든 눈에 매일 안티푸라민을 바르며 사는 사람이다. 독자는 이쯤에서 사연 많은 여인의 삶을 헤아리게 되고, 안티푸라민이 삶의 통증을 가라앉히는(비록 일시적이지만) 기제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안티푸라민’ 같은 위로 기제를 통해 자기 삶을 방어하고 고통스런 상황을 뛰어넘고자 한다.
‘가파른 산비탈’과 ‘지상의 협곡들’을 거쳐 시의 화자가 지향하는 곳은 ‘안나푸르나’이다. 그곳은 단순한 유토피아가 아니다. 반드시 수많은 ‘내 안의 굴곡’을 넘어야 하고, ‘몸 밖의 굴곡’을 어루만지며 가야 하는 외롭고 고통스런 곳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상처투성이의 몸에 ‘안티푸라민’을 바르며 ‘안나푸르나’를 향해 홀로 걸어가고 있는 수많은 영혼들, 그들의 발자국마다 박하향이 가득한 이유이다.
홍일표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전문지 《시로 여는 세상》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