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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고비아 Segovia
마드리드에서 북서쪽으로 약 95km 떨어진 세고비아에는 디즈니 영화 <백설공주>에 나오는
성의 모델이 된 알카사르가 있다. 이 성은 스페인 특유의 중후함 속에서도 우아한 향기를 풍기고 있다.
또다른 볼거리는 로마 인이 축조한 거대한 수도교. 모국인 이탈리아에서 한참 떨어진 이 지역에
아직까지 그들의 발자취가 생생이 남아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알카사르 (Alcazar)
세고비아 市는 두 江이 만나는 계곡 위에 솟은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도시의 형태는 마치 배가 흐르는 것 같은데, 그 깎아지른 듯 솟아있는 뱃머리에는
알카사르(城)가 우뚝 서있다. 성의 주변은 온통 절벽이다.
13세기 초 로마 시대의 요새가 있던 곳에 이 성을 축성하였으며,
그후 수세기 동안 역대 왕들을 거치면서 증개축을 거듭했다.
1474년 알카사르 안에서 엔리케 4세의 부고를 전해들은 이사벨 라 카톨리카는
카스티야 왕국의 여왕으로 즉위함을 선언하고 이후부터 스페인 재정복을 위해 활약하게 된다.
또 신대륙 발견 후 스페인의 황금기인 16세기에 펠리페 2세가 여기 '왕좌의 방'에서
오스트리아 안네 공주와 결혼식을 올렸다
.
이 일카사르는 1764년부터 1862년 화재로 성의 대부분이 타버릴 때까지
'왕립 포병 학교(Royal Artillery School)'였다. 그후 재건되어 무기, 가구, 회화 등을 보관하고 있다
성 앞의 광장에는 이 왕립 포병 학교를 졸업한 두 장교가
'1808년 5월 2일 봉기'를 시작한데 대한 경의를 표하는 동상이 우뚝 서 있다.
이 조각상에는 역사와 영웅시를 담당한 뮤즈(Muse)인 클레이오(Kleio)가 함께 있다.
1808년 5월 2일 마드리드 시민들은 도시를 점령하고 있던 프랑스군에 저항을 시작한다.
이 당시 마드리드에는 스페인 병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막사에 가만히 있었다.
스페인 부대 중 몽텔레온에 있던 포병부대만이 명령을 거부하고 봉기에 참여하였다. 이들 부대의 장교는
루이스 다오즈(Luis Daoiz)와 페드로 베라르데(Pedro Velarde) 두 명이었는데 이들은 아직도
봉기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이 두 장교들은 프랑스군의 반격으로 인해 봉기가 주춤했을 때
막사로 공격해온 프랑스군에 의해 전사하고 말았다.
이 저항을 야만적으로 진압한 프랑스 근위대에 대한 분노로 인하여 봉기는 널리 퍼져나갔고,
이 사건은 스페인 독립 전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 봉기에 대해 고야가 그린 유명한 그림이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에 있다.
성을 수호하는 해자(垓字)
해자(垓字) 위에 놓인 오직 하나뿐인 다리를 들어올리면
외부와 성이 차단된다
해시계가 보이는 안마당
앞 건물 상단의 창과 창 사이에 해시계가...
분수대가 있는 안마당
안마당을 둘러싸고 있는 회랑에서의 여유...
古城의 방 (Old Castel Room)
고성에서 가장 오래된 방으로 알폰소 8세 때 건설되었다고 한다.
갑옷 입은 중세 기사들이 모여 있다.
벽난로의 방 (Fireplace Room)
펠리페 2세 때 재정비 된, 벽난로가 있는 방이다. 방에 있는 가구와 벽난로 위에 걸린
'성모의 약혼식을 표현한 대형 태피리스트'는 모두 16세기의 것이라고.
왕좌의 방 (Throne Room)
두 개의 왕좌가 캐노피 아래에 놓여있다. 캐노피에 "Tanto Monta"라고 쓰여 있는데
'대등하다''동등하다'는 뜻으로 이사벨과 페르난도가 동등한 권리를 가지는 왕임을 의미한다.
* Canopy = 닫집. 천개
1469년 아라곤의 페르난도와 카스티야의 이사벨라가 결혼했다.
스페인으로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던 이 결혼은
이베리아 반도 내에 있는 중세의 모든 가톨릭 왕국을 통일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492년 1월 2일. 나스르 왕조의 마지막 왕 보압딜은
알함브라궁의 열쇠를 카톨릭 왕국의 공동왕인 페르난도 왕과 이사벨 여왕에게 넘겨주고
울면서 시에라 네바다 산맥을 넘어 아프리카로 떠나갔다.
북아프리카 베르베르족 출신의 타리프가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이베리아 반도로 진군해 왔던 711년으로부터 시작된 이슬람의 스페인 지배는
781년만에 드디어 막을 내렸다.
이슬람 양식의 천정 장식이 매우 세밀하고 화려한데 1456년의 것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왕좌의 방 벽에 걸린 이사벨라 여왕과 페르난도 왕의 초상화
갤러리 룸 (Galley Room)
서쪽 벽에 이사벨 여왕이 세고비아의 마요르 광장에서 카스티야왕으로 선포된 것을 그린 벽화가 있고
그 앞(줄 쳐 놓은 곳) 에는 17세기의 터키산 카페트가 깔려 있다.
배를 엎어놓은 모양의 천정 아래에 있는 띠는 무데하르 양식의 장식인데,
장식의 윗줄에는 라틴어 기도문, 아랫줄에는 방의 건설에 관한 정보가 새겨져 있다.
*Mudejar양식= 기독교와 이슬람의 건축양식이 혼합된 스페인 특유의 양식
스페인 남부에는 아직 이슬람 왕국 그라나다가 건재할 때인 1474년 이사벨라가 여기
알카사르에서 카스티야의 여왕으로 즉위했다. 원래 이복 오빠 엔리케 4세가 왕위에 있으면서
이복동생들을 경계하여 이사벨라의 친동생 알폰소를 독살했다. 이사벨라는 정치에 관심이 없는 척
행세하다가 1469년 오빠가 권하는 정략결혼을 피해 자신의 의지대로 아라곤의 페르난도와 결혼한다.
5년 후 엔리케 4세가 후사 없이 죽자 카스티야로 돌아와 여왕으로 즉위했던 것이다.
1479년 남편도 아라곤의 왕위에 오르니 다음 해부터 부부가 그라나다를 공격하기 시작하여
1492년 마침내 정복하니 이슬람 780년의 통치가 막을 내렸던 것이다.
이사벨라의 즉위식 그림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사람들 모두가 눈동자가 없다.
즉위식이 있던 12월 13일은 눈이 빼앗겨지는 죽임을 당한 루시아 성녀의 축일이라, 그녀를 기리기 위해
그림 속 사람들 모두에게 눈동자를 그리지 않은 것이다.
솔방울 방 or 파인애플 방 (Pine-Cone Room)
천정 장식이 솔방울(or 파인애플) 모양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천장 아래 띠를 두른 장식을 프리즈라고 하는데, 고딕 무데하르 양식으로 1452년에 새겨진 것이다.
스테인드 글라스에는 '알폰소 8세와 그의 딸 베렝겔라'가 표현되었다고?
Pine-Cone Room과 Royal Badroom 사이에 있는 문.
산 마르틴 성당 근처에 있는 엔리케 4세의 궁에 있는 문을 복제한 것이다. 네오 무데하르 양식.
왕의 침실 (Royal Badroom)
금실로 짜여진 비단 캐노피와 고딕 양식의 침대가 있으며, 벽은
궁중 생활을 그린 태피스트리로 장식되어 있다.
이복 오빠 엔리케 4세는 이사벨라를 5년간 이 성에 가두었다.
(이사벨라도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와 비슷한 형태로 여왕이 된듯하다)
캐노피는 금실로 짜서 썪지 않는다고 한다.
침대 길이는 2m.
통치의 방 (Room of Monarchs)
성에서 가장 중요했던 방이다.
의자 등받이의 조각이 품위와 아름다움을 겸비했다
기독교 국토회복 운동에 참가했던 카스티야와 레온의 군주 52명의 입체 조각상과
중요 전투 장면 .
예배실 (Chapel)
제대가 있는 방으로 왕이 기도하던 곳
제단 병풍에는 ,그리스도의 삶을 나타내는 그림들과
가운데에 포병의 수호성인(守護聖人) St. Barbara의 상이 있다.
성화를 보면 그림속 물건 등을 통해 어떤 성인인지 알 수 있다.
(左上)화살을 맞고 순교한 성인 세바스찬,
(左下) 젖가슴을 도려 내고 불에 굽는 고문에도 신앙을 지킨 성녀 아가타,
(右上) 십자가의 성 요한(1542~91), (右下)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 (1515~82)
아가타 성녀의 유방이, 그녀의 손과
마룻바닥에...
무기의 방 (Armoury Room)
이곳이 요새였던 만큼 석궁, 창, 칼, 대포, 갑옷 등 다양한 무기들을 볼 수 있다.
오른쪽 유리 상자에 들어 있는 석궁은 16세기의 것이다.
문위에 왕립 포병 학교 표지판이 걸려 있다
스테인드 글라스
정확한 설명인지? ... 좀더 조사해 보겠습니다
엔리케 4세(1425~1474) 엔리케 2세(1333~1379)와 페드로1세의 죽음
엔리케 3세(1379~1406)와 그의 가족 페르난도 3세(1199~1252)와 알폰소 8세의 딸 베렝겔라
알카사르 아랫 마을
알카사르 아랫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창
마을 뒷편에 베라 크루즈 성당이 보인다
베라 크루즈 성당
Iglesia de la Vera Cruz
템플 기사단이 13세기 초에 지었다는 이 성당은 '투루 크로스(베라 크루즈:Vera Cruz)'라고
불리우는, 예수님이 못 박혔던 바로 그 십자가의 조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인근의 다른 교회로 옮겨져 보관되고 있는데 부활절에만 볼 수 있다고 한다.
* 템플기사단(Knights Templar)이란? ...12세기 초 순례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결성된 기사단으로
십자군 전쟁에도 많은 공헌을 했지만 세력과 부가 엄청나게 커지자 끝내 견제를 당해
14세기 초 프랑스에서 대대적인 숙청 끝에 이단으로 몰려 괴멸(壞滅)되었다.
알카사르의 창문으로 내다 보았을 때는 8각형의 건물이려니 여겼다.
"예루살렘 성전산의 바위 돔은 팔각형 구조였기 때문에 템플 기사단은 팔각형을 자신들의 상징으로 채택했고,
크로아 파테를 교묘하게 도안하여 십자가의 모든 바깥 점들을 연결하면 팔각형이 되도록 하였다"는
이야기를 읽은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 베라크루즈는 8각형이 아닌12각형이었다.
성당의 뒷모습
13세기에 완공되었을 때에는 apse 3개에 타워가 없었는데, 나중에 apse 한 개와 타워가
증축되었다. 증축된 apse는 제의실로 쓰이고 타워에는 종이 매달렸다.
*앱스[apse]...직사각형 건물의 평면에서 입구의 맞은편 마구리 벽면에 설치한 반원형 혹은 다각형의 돌출부
12면 성당의 외벽에 맞춰 성당 내부에 12면을 가진 작은 내부 건물(ediculo)이 있다.
12면 중 한면을 장식하고 있는 이 제단화는 성당이 건립되고 300년이 지난, 1516년부터
이곳에 놓여졌다. 제단화의 내용은 예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담았다
'작은 내부건물'에는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어 2층으로 연결되고
계단 아래편에는 작은 공간을 두었다
'내부 2층 건물' 윗편으로 보이는 12개의 창과 12개의 아치
좁다랗고 둔탁한 로마네스크 창 아래 토속적인 느낌의 성모자상이 있다.
이 마리아를 '평화의 성모 마리아(Virgen de la Paz)'라고 부른다
중앙 제단에는 13세기에 만들어진 십자가상이 800년 넘게 성당을 지키고 있다
로마 수도교(Acueducto Romano)
로마인의 기술로 쌓은 높이에 절로 탄성이 터져나오는 이 거대한 수도교는,
15km이상 떨어져 있는 아세베다 강물을 마을까지 끌어들이기 위해 기원 1세기 전후에 지은 것이다.
전체길이는 728m에 이르며, 가장 높은 곳은 아소게호 광장 부근으로 28m에 달한다.
로마수도교가 지나가는 세고비아 시내
아치의 수는 모두 167개, 그 가운데 36개는 1072년 알마문(똘레도의 아랍왕)에게 파괴되었는데,
15세기에 오히바(뾰쪽 모양의 아치)로 복구되었다.
놀랍게도 이 수도교의 몸체를 이루고 있는 각 돌 사이에는 어떠한 접합재도 사용하지 않았으며,
물은 1884년까지 상부를 통해 세고비아로 공급되었다. 1928년부터는 같은 장소에 수도관이 설치되어
간접적이긴 하지만 지금도 수로 구실을 하고 있다.
아치의 니치(niche,壁龕) 부분에는 아기예수를 안은 성모 상이 안치되어 있다.
*니치niche. 벽감壁龕 = 벽면을 파내어 조각품이나 장식을 놓을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곳
수도교의 곡선 부분 (1층 부분과 2층 부분의 연결)
지대가 높은 곳은 1층으로...
앞쪽에 보이는 건물은 물저장소 역할을 하던 곳.
'에틱'이라고도 부르는 수도교 꼭대기의 U자 모양의 물길(水路)은 폭 1.8m에 깊이 1.5m이며
도시를 향해 물을 운반해 오던 일을 지금은 중단하였다.
대수로가 끝나는 지점
성 요한 기념성당
십자가의 성 요한 (1542~1591) = 성인, 교회학자, 신비가.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와 함께 가르멜수도회를 개혁한 인물이다.
세고비아에는 가톨릭 역사상 神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 간 인간으로 기억되는
'십자가의 성 요한 기념성당'이 있다. 안에는 성인의 무덤이 있고,
성당 뒤편 언덕에는 그가 수도했던 조그만 암자가 숨어 있다.
기념성당 안마당의 양옆으로 하늘 높이 자란 싸이프러스(Cyprus)가 도열해 있고
독특한 형태의 돌층계가 지그재그로 길을 내주고 있다
우리가 방문한 날, 때마침 성당에서 결혼식이 있어 성장한 하객들이 모여 들었다
이곳 성당의 중아제대는 여느 성당과는 다르게 특별한 그림으로 꾸며져 있다.
상하좌우의 네 가지 그림이 바로 성인의 유명한 시를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지하실에 묻혔던 성 요한의 석관
가르멜 개혁을 위해 애쓰던 성인은, 자신이 개혁한 가르멜 내부의 알력에 휘말려
온갖 박해를 받고, 오지를 전전하고, 가는데 마다 견제를 받다가 병을 얻어
안달루시아의 외진 산속에서 쓸쓸히 숨을 거두었다.
1951년 12월 4일, 49세로 생을 마치고 이곳에 묻힌 성 요한의 시신이, 1675년
시복식 때에 관을 열어보니 조금도 부패되지 않았다고 한다.
성요한의 무덤
저서로는 <가르멜의 산길><어둔 밤><영혼의 노래><사랑의 산불꽃> 등이 있다.
이 작품들은 스페인 문학사는 물론 중세 영성사의 한 획을 그었다.
성 요한이 그린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
아빌라 엔카프나씨온수녀원 소장
가톨릭 내의 개혁운동을 지향하던 성요한은
고난의 십자가를 져야만 했다. 온갖 박해를 받던 그가
오지의 성당에서 기도할 때, 문득 2층 창문 아래로 예수님의 모습이 보였다.
십자가에 달린 모습 그대로 였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지니고 있던 연필로 그 모습을 그렸다.
살바도르 달리는 성 요한의 스케치에 영감을 얻어
위에 계신 하나님이 바라보는, 십자가에 달린 아들의 모습을 그렸다.
십자가의 그리스도 ; 살바도르 달리 (1951년)
205 x116cm / 미국 글래스고우 미술관
스페인의 초현실주의 화가 달리(1904~1989)가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그렸다.
아래 부분에는 산으로 둘러싸인 저수지에 어부 두 사람과 배가 있다.
한 화면에 수직과 수평의 두 시점이 공존하고 있다.
십자가와 그리스도의 몸에서 명암이 극렬하게 대비된다.
하늘 위에서 쏟아져 내리는 빛이 구름을 지나 일상의 세계 속으로 들어온다.
구원은 그리스도로부터 온다. 예수 십자가의 극심한 고통을 지나온 빛을 통해
세상에서는 평화와 안식, 일상이 가능해진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앉아서 여행도, 공부도 많이했습니다.
세고비아 여행을 두 번하였지만 사진 찍기에 바빠 설명은 귓등으로 흘렸었습니다.
TV에서 '꽃보다 할배' 스페인 편을 보면서 "조금 더 조사해서 자세히 설명하도록 하자"는 생각이 들더군요.
해서, 사진에 등장하는 것 중에 몇 가지를 찾아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간다면 어디어디를 더 담아야겠다는 아쉬움이 불쑥불쑥 머리를 드는군요. 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