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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이 독립선언문을 초안한 사천 다솔사
경남 사천시 곤명면에 위치한 다솔사는 대한 불교조계종 제14교구 본사인 범어사의 말사이다.
경남 사천 곤양면의주산인 봉명산 기슭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경내에 있는 '영악사 중건비문'에 의하면 신라 지증왕 4년(503)에 조사(祖師) 연기(緣起)가 창건하여, 최초의 사명(寺名)을 영악사(靈嶽寺)라 하였으며, 선덕왕 5년(636)에 자장율사가 새로 건물을 2동 더 지은 뒤 중창하여 사명을 타솔사(陀率寺)라 하였다고 한다.
그 후 원효대사 의상이 문무왕 16년(676)에 세 번째로 중수하고 다시 사명을 운봉사라 했으며, 신라 말에 도선국사가 네번째로 중수, 사명을 영악사로 다시 개칭하였고, 고려 말 공민왕때(1352∼1372)에 왕사 보존제자 혜동이 다섯 번째 중수를 하면서 다솔사(多率寺)라고 부르게 되었다.
절 이름인 다솔(多率)에 대해서는 이 절에 소나무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솔'이란 글씨가 소나무(松)이 아닌 거느릴 솔(率)자를 쓰고 있어, 이 절의 주산인 봉명산(鳳鳴山)이 마치, 장군이 부하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듯이 많은 산봉우리를 거느리고 있다는 뜻에서 다솔이라 붙여졌다고 한다.
'봉명산(鳳鳴山)다솔사(多率寺)'라고 알고 있었는데 '방장산(方丈山)다솔사(多率寺)라 적혀있다.
방장(方丈)이란 '사방으로 1장(丈약 3m)이 되는 넓이의 방'이라는 뜻이나
불교에서는, 유마거사가 사방 1장의 협소한 방에서 3만 2,000의 좌석을 벌여놓았다는 데서 유래해,
법력(法力) 또는 도력(道力)이 특출난 스님을 의미하여 주지스님을 방장이라고 부르는데,
산에 방장이라는 이름을 왜 붙였을까?
절 주위에는 야생차밭이 감싸고 있으며 이곳에서 생산되는 죽로차(竹露茶)는 '반야로(般若露-'지혜의 이슬'이라는 뜻)'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명차이다.
▶ 대양루(大陽樓)
옆면에서 본 대양루
불자들의 집회장소로 쓰이는 대양루 내부
주차장에서 계단을 통해 올라가면 바로 마주치는 2층 누각이 대양루이다.
대양루는 영조 24년(1748)에 큰 불로 말미암아 불행히도 재앙을 겪고 영조 34년(1758)에 명부전(冥府殿)과 대양루 사왕문(四王門)을 중건했다. 1914년 12월에 또 한 번의 대화재로 모든 전각이 불타는 불운을 겪었으나 유독 대양루만은 화를 면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현존하는 건물중에 가장 오래된 것으로 정면 5칸 측면 4칸에 맞배지붕의 중층 누각이며 전체 건물 길이가
13m에 이르고 건평은 약 350㎡에 이른다.
누각 위· 아래층의 높이가 13m에 달하며 36개의 아름드리 기둥이 육중한 건물 전체를 떠받치고 있다. 큰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내부에 받침기둥을 많아 사용하지 않은 채 건물 가운데 10m가 넘는 대들보 하나만을 설치하여 엄청난 지붕의 하중을 유지하고 있는 점이 이 건물의 특징이다.
대양루가 기울어 중수를 할 떼 발견한 상량문에 의하면 영조 34년(1758)에 지어졌으며 방풍판을 단 18세기의 건축양식으로 지금으로 부터 약 270여년이 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아래층은 본래 출입문 구실을 하였으나 양 옆으로 새로 돌계단이 생기면서 출입로가 되고 지금은 칸막이를 하여 창고 및 기타 용도로 쓰이고 있다.
2층은 승려들의 수도 도장및 신도들의 집회장, 다도 전시관 등으로 활용되고 있다
대양루 편액 옆에는 '오통상서(吳統相書)'라고 적혀 있다. 편액을 쓴 사람은 성이 '오'씨이고 이름이 '통상'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통상(統相)은 이름이 아닌 조선시대 수군통제사의 벼슬 중 하나라고 한다.
따라서, 이 편액은 통상 벼슬을 한 오씨성을 가진 어느 분의 글씨라고 보면 된다.
다솔사 주변의 야생차밭
대양루 내의 차 전시관
대양루는 다솔사 차 전시관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봉명죽로(鳳鳴竹露)란 이곳 다솔사 봉명산 아래 자생하는 찻잎으로 법제한 녹차를 말한다. 다솔사 녹차는 두 가지 방법으로 법제를 하는데, 하나는 찻잎을 솔에 넣고 솥 뚜껑을 덮어서 만드는 법이고, 다른 하나는 덖음차(부초차釜炒茶) 방식이 있다. 어떤 방법을 책하든 중요한 것은 첫 실청을 할 때 찻잎 줄기 속까지 100% 잘 익히도록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한다
차(茶)를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多率寺를 茶率寺라고 불리기도 한다
다솔사에서는 매년 5월에 차 축제가 열리며, 다솔사 차에 관련된 다양한 전시물과 관련 서적 등이 내부와 벽면에 전시되어 있기 때문에 다솔사 차에 관련한 역사와 지식을 자세히 접할 수 있다
'서백의 사찰이야기-다음 블로그 http://blog.daum.net/kimcs5/1279' 에
"한 때, 이 대양루에 하얀 아기 기저귀가 널려 있을 때도 있었다'는 일화가 있어서 적어본다.
1968년 어느 날, 연세대 사학과 대학원에 재학중이던 한 여대생이 다솔사로 효당스님을 찾아온다. 이름이 채원화라는 그녀는 원효대사에 대한 박사학위 논문을 쓰려고 하는데 지도교수 홍이섭박사가 자기더러 원효학의 대가인 효당스님을 찾아뵈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만난 60대의 스님과 20대의 여대생은 곧 제자에서 연인으로, 다시 부부관계로 발전을 했고 대양루 강당에는 얼마 안 가서 아기 기저귀가 만국기처럼 펄럭이기 시작했다.
이미 결혼하여 진주에 본부인과 자녀까지 두고 있던 대처승 효당이었건만 아리따운 아가씨 채원화의 매력에 퍽이나 이끌렸던 것 같다. 이것이 훗날 비구, 대처승 갈등으로 효당의 다솔사 축출의 한 빌미가 되리라곤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채원화보살은 현재 인사동에서 '반야로(般若露)'라는 찻집과 한국차연구원을 운영중이라고 한다.
▶ 적멸보궁(寂滅寶宮)
파초(바나나)가 있는 사찰은 드문데 적멸보궁 앞에 서 있다. 아주 오랜 예전에도 이 자리에 있었다
부처님의 열반상이 있다
창문을 통해 보이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불탑
적멸보궁은 원래는 대웅전이었으나 1979년 대웅전의 삼존불 금도금 불사를 하던 중 후불탱화 속에서 부처님의 진신사리 108과를 발견하여 대웅전 편액대신 적멸보궁이라는 편액으로 갈아 달았다고 한다.
(어떤 자료에는, 오른 편에 있는 응진전을 수리하다가 탱화 뒤 벽에서 사리가 발견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사찰 가운데는 본당에 불상(佛像)을 모셔놓지 않은 곳이 있는데 바로 적멸보궁이 있는 곳이다.
법당 안에는 단(壇.戒壇)만 있고 속이 텅 비었으며 법당 밖 뒤편에는 진신사리을 봉안하여 놓은 불탑이 있다. 이러한 곳을 적멸보궁, 또는 보궁이라 하는데 이는 사리탑에 부처님의 진신(眞身) 사리를 모신 보배로운 곳이란 뜻이다.
다른 곳의 적멸보궁은 대부분 법당 안에는 불상이 없고 건물 뒤에 사리탑을 건립하여 건물 뒷쪽 문을 통하여 사리탑이 보이도록 되어있는 형식이나 이곳 적멸보궁의 창 앞에는 열반에 드신 부처님을 형상화한 열반상이 있다
적멸보궁이란 부처님이 열반에 들어 항상 머물러 있는 곳이라는 뜻이니 아마 열반에 드신 부처님의 상을 모셔둔 것으로 보인다. 뒤쪽 투명 유리창를 통해 진신사리를 모신 사리탑이 보인다
(열반불을 흔히 누워있다는 뜻의 와불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이는 틀린 용어로 생각된다)
적멸보궁 건물 뒷편의 부처님 사리탑
사리탑 참배하는 법(사리탑을 오른쪽으로 도는 것은 시계바늘이 돌아가는 방향을 말한다)
▶ 극락전(極樂殿)
아미타불을 주전으로 모시고 있는 불전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신라 선덕왕때 건립된 극락전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그 후에도 여러번 중창과 소실을 거듭하다 1910년에 중건한 것이 지금의 모습이다
▶ 응진전 (應眞殿)
응진전은 아라한과 같은 의미의 불교용어로 다른 말로는 나한전(羅漢殿)이라 불린다.
나한(아라한)은 부처님을 따르던 수행자들로 최고의 경지에 다다른 스승들을 말하며, 이곳에서는 16분의 나한을 모시고 있다.
1690년(숙종6년)에 죽마대사가 중건한 것을 건물이 노화하여 1930년에 만해 한용운선생이 다시 중수한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이며 천장은 우물천장으로 되어 있다
▶ 석탑 부재와 귀부
적멸보궁 서편에는 석탑의 부재와 귀부가 놓여있다.
지금은 없지만 예전의 탑 설명서에는 이 곳에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스님들이 대웅전 탱화 뒤에 숨겼다가 해방 후 현재의 사리탑으로 모셨다고 적혀있었다.
탑 옆 기단석 위에는 규모가 작고 아담한 귀부가 있다. 목과 다리는 파손되어 없고 등과 말아올린 뒷꼬리만 보이는데 귀갑 무늬가 선명하다.
등의 형태로 보아 비석의 대좌는 아닌듯 한데 어떤 용도로 쓰여졌는지 모르겠다
산신각이 없이 언덕 밑에 세워져 있는 산신비.
귀부의 북쪽 한 단 높은 곳에 있으며 '만덕산왕위(萬德山王位)'라고 적혀 있다
▶ 안심료(安心寮)
독립선언서 초안, 김동리 소설, 등신불의 산실
다솔사의 안심료(安心寮)는 일제 강점기 때 불교계 항일운동의 거점으로 민족정신을 일깨운 곳이다.
만해 한용운스님이 은거하였던 안심료는 1930년대에 지은 단층의 평범한 요사채다. 만해 스님은 이곳에 12년간 은거하면서 항일 비밀결사단체인 만당(卍黨)을 조직, 운영하였고 국민계몽운동, 불교정화운동 등을 펼쳤다. 백용성등과 함께 불교계를 대표해 1919년 3.1독립선언에 참여했던 그는, 지인들과 교류하면서 이곳에서 독립선언문 초안을 작성했던 역사적인 곳이다
그 이후 김동리 선생이 약 4년간 거주 하면서 소설 '등신불' '황토기' '바위'등을 집필 하였다.
친형 범부를 따라 다솔사에 온 김동리는 만해 한용운과 석단사, 김범부가 '소신공양'으로 분신을 한 어느 승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영감을 얻아 쓴 소설이 역작 '등신불(等身佛)이다
고은 시인도 효당스님을 만나기 위해 자주 이곳 다솔사을 찾았다고 한다.
이렇게 다솔사는 독립운동, 근대문학 등 유서 깊은 발자취가 남겨진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안심료 앞 마당에는 3그루의 큰 편백나무가 있는데, 이 나무는 만해 한용운스님의 회갑잔치 기념으로, 함께 활동을 했던 사상가 범부 김정설(소설가 김동리의 친형), 화가 허백련, 정치가 김법린 등이 함께 심은 것이 지금까지 잘 자라고 있다고 한다
나혜석의 다솔사(1937년작)
이외에도 다솔사과 관련있는 인물들이 더러 있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 나혜석(羅蕙錫)이 이혼 이후 정신적 불안정으로 방황을 하며 다솔사에서 떠돌이생활을 하였고, 문화재청장을 지낸 유홍준교수도 학생운동을 할 때 동지들과 숨어지냈던 곳이기도 하다
요사체 이름 그대로, 누구니 안심하고 머무를 수 있는 그런 곳이었나보다
숙종 30년(1704)에 세워진 곤양 지리산 영악사(다솔사) 중건비
요사체 방문 위에 붙어있는 서각 '죽로지실'
추사(완당) 김정희가 초의선사에게서 곡우차를 선물받고 그 답례로 써 준 글씨인데
필사되어 전국에 많이 걸려있는 서각이다
'죽로(竹露)'란 '대나무 잎의 이슬'이라는 말로 대나무밭 주변으로 차나무가 많이 자라는데
대나무잎에 맺힌 이슬이 차나무에 떨어져 그 이슬을 머금고 자란 차잎으로 만든 차(茶)라는 뜻이다.
대(竹)향과 차(茶)향의 멋진 조화!
멋스러운 해우소
사찰 입구, 계곡물을 모아 만든 작은 연못
▶ 어금혈 봉표 (御禁穴封表) 바위
다솔사 조금 못미쳐 도로 오른편에 어금혈봉표(御禁穴封表)라고 쓰인 큰 바위가 있다. 화강암에 세로로 두 줄 '御禁穴封表'라고 음각을 한 뒤 붉은 색으로 칠을 해놓았으며 옆에는 광서 11년 을유 9월이라고 적혀 있어 고종 22년 1885년임을 알게 해준다
이 어금혈봉표는 다솔사 주변의 명당터에 세도가들이 묘를 쓰는 폐단을 막고자 어명으로 세운 표식이다
다솔사 홈페이지 도솔미디어에 어금혈봉표(御禁穴封表)에 대한 이야기가 있어 옮겨 싣는다
봉명산 다솔사 자리가 풍수지리적으로 장군대좌혈인데, 이곳에 부친의 묘를 쓰면 가문이 일어난다는 이야기를 들은 당시 경상감사가, 절에 사람을 보내 이장준비를 지시하면서 다솔사는 발칵 뒤집혔다.
이에 수도승인 봉암스님을 중심으로 이 같은 탐관오리의 비행을 조정에 직소하기위해 승려와 신도들의 연명을 받은 탄원서를 모아 상경을 결행한다.
기록에는, 때마침 청나라로 향하던 조공사신행렬(일명 동지사-조선시대에 해마다 동지에 정기적으로 명과 청에 보내던 사신)을 만나 그 관리에게 하소연했다고 돼 있으나, 그 시기를 고려할 때 동지사가 아니라 그해 8월 국경회담을 위해 청으로 향하던 토문감계사(土門勘界使)행렬을 만난 듯하다.
당시 감계사 대표는 이중하 공조참의가 맡았는데 성품이 강직하고 청렴하여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강직한 분이었다. 후에 을미의병 거사로 많은 관리가 죽었으나 당시 관찰사였던 이중하는 백성의 존경을 받던 분이라 봉변을 당하지 않았단다.
승려들로부터 이 같은 지방관리의 비행을 전해들은 감계사대표는 즉석에서 서찰을 적어주며 이를 경상감사에게 전하라한 뒤 행렬을 돌려 군왕께 후보고 하였다고 한다. 아마도 청으로부터 간도영역의 국경을 침탈하려는 청나라의 공세와 탐관오리의 사찰을 넘보는 행위가 같은 불의로 다가와서일까?
승려들은 기쁜 마음으로 문경의 한 주막에서 밤을 보내게 되었는데 우연하게도 곤양군수로 부임해 가는 신임 목민관을 만나게 되었단다. 인사를 고하고 그간의 사정을 아뢰자 그 군수는, 서찰을 자신에게 맡길 것과 부임보고를 할 때 전하겠다는 약속을 했단다.
부임보고를 마친 신임 곤양군수는 다솔사의 일을 논하자, 경상감사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한다. 하지만 신임군수는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어명이요!”라고 외치며 “어금혈봉표!”라고 외쳤고, 경상감사는 무릎을 조아리고 벌벌 떨며 일어나지를 못했다는 이야기다.
“御禁 穴封 表!”란 임금께서 무덤을 막을 것을 명한다는 친서인 셈이다. 이후로 다솔사 경내에는 어떤 분묘도 쓸 수 없었다. 따라서 '나랏님이 구한 다솔사'라는 표현이 틀린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데 현재 어금혈봉표가 있는 자리는 원래의 위치가 아니라고 한다. 원래 위치가 어디인지는 알 수 없으며 왜 옮겨졌는지 알 수도 없으나 지역주민들이 사찰측에 원래 자리로 이전할 것을 요구하였다고 하는 사실로 보아, 다솔사측에서 사찰의 격을 높이기 위해 다른 곳에 있던 봉표를 절로 오르는 길목 옆으로 옮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어금혈봉표 옆에 세워놓은 나무아미타불 비
효당스님
효당 최범술스님
효당(曉堂) 최범술(崔凡述·1904~ 1979) 스님은 불교 승려·독립운동가·교육자·차도인(茶道人)·정치가로 우리나라 근대사에 작지 않은 자취를 남긴 분이다
최범술 선생은 경상남도 사천 출신으로 12세 때 사천 다솔사(多率寺)로 출가했고,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일본 유학 중 무정부주의자 박렬과 함께 항일운동을 하면서 일왕 암살 계획이 들통나 옥고를 치렀다. 1932년 도쿄에서 불교계의 항일 비밀결사인 만당(卍黨)을 조직했다.
1933년 귀국 후 만해 한용운의 지도를 받으며 다솔사를 만당의 근거지로 만들어 은밀히 독립운동을 벌였다.
광복 후 해인대 설립과 제헌 국회의원 등 사회, 정치활동에도 참여했으나, 만년에는 다솔사에 차밭을 일구고 차 연구에 전념했으며, 일제강점기에 끊어진 한국 차도(茶道)의 명맥을 다시 살려낸 일등공신이다. 그러나 효당은 이런 활동에도 불구하고 대처승(帶妻僧 남자 승려 중 결혼하여 아내와 가정을 둔 사람↔비구승)이었다는 이유로 그동안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했다.
※ 다솔사역
전국적으로 사찰이름을 가지는 기차역은 많지 않다. 불국사역, 직지사역, 개태사역, 희방사역등이 있는데,
경상도와 전라도를 잇는 경전선에 다솔사역이 있다. 지금은 녹 쓴 철로 옆에 승강장만 남이있는 간이역으로 이제 곧 그 이름도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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