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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베스 부인의 몸 이미지의 의미와 한계
이 용 은
(고 려 대)
I. ‘몸’ 논의의 전제와 몸여성의 관계
본 논문은 ꡔ맥베스ꡕ에서 맥베스 부인을 분석의 축으로 삼아, 그녀의 행위가 갖는 함축성을 “몸 이미지”와의 연관관계 속에서 파악해보고자 한다. 서양 정신사에서 몸은 정신의 반대항에 위치한 것으로서 존재의 외형을 결정하는 것이다. 데카르트 이래, 몸은 비천하고 정신에 종속된 것으로서 파악되었으며, 몸을 복권시키려는 진보적 주장들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분법의 토대는 현실적 상황을 장악하고 있다고 할 정도로 구체적 현상을 굳건히 떠받치고 있다.
물론 셰익스피어는 데카르트보다 훨씬 앞선 시대의 작가이고 그가 속한 “르네상스 시대는 정신과 몸이 분리되지 않은 채 서로 교호작용을 했다”(강성원 273). ꡔ맥베스ꡕ에서도 “몸정신”은 각 주체 내에서 공명적 관계에 있다. 이는 정신이라고 부르는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이 몸으로 표현되기도 하며 또 몸에 각인된 것은 정신에 반향을 주어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ꡔ맥베스ꡕ에서 이 양자이면서도 양자가 아닌 총체는 그 공명성을 양방향으로 드러내보여주고 있다. 마녀의 말에 솔깃하고 의존하게 되는 맥베스와 그가 보내는 편지에 황홀해하면서 평상심을 잃는 맥베스 부인의 정신적 판단은 신체적 감각에 의존하고 있다. 듣고 보는 것이 그들의 결단을 촉구한다. 몸과 정신의 상호작용이 가장 집약적으로 드러난 예는 맥베스 부인의 증상을 목도한 전의의 대사에서이다.
심상치 않은 악행은 심상치 않은 고민을 낳는 법. 독에
전염된 마음은 그 비밀의 고통을 귀가 없는 베개에다 말
하는 법입니다.
Unnatural deeds
Do breed unnatural troubles: infected minds
To their deaf pillows will discharge their secrets. (5. 1. 6870)
“악행”은 몸으로 행하게 되고 그것은 마음의 “고민”을 낳게 되고 “독에 전염된 마음”은 베개에다 말한다. 말하는 것은 몸을 이용한 행위다.
그러나 몸과 정신에서의 교호성이 담보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여성을 몸으로 등치시킴으로서 여성을 권력의 하부 지위에 한정시키려는 측면에서 드러나는 여성몸, 남성정신의 이분법적 적용은 르네상스 시대에도 예외가 아니었다.1) 이런 측면에서 한 주체의 몸과 정신의 공명관계가 갖는 의미는 사실 그 진정한 의미를 잃는다. 이는 몸과 정신의 관계가 가장 현실적인 문제로 접근되었을 때는 상호성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여성을 몸으로 치환하는 서구 전통사상의 기저에는 여성을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로 규정하고 여성을 하위주체로서 영속화시키려는 남성들의 의도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여성에게는 남성에게는 없어도 족한 몸만을 부여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 남성은 여성의 몸을 남성 단일자에 귀속시키고, 감시와 규제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서, 여성은 아무 것도 소유할 수 없게 된 결과가 발생했다. 모든 여성을 모성적 여성으로 치환하는 남성 나르시시즘의 연장으로서 여성의 몸은 역할해왔던 것이다.
“셰익스피어 극중에서 가장 신체적 특성이 강한 이 극에서 우리는 몸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집착을 발견할 수 있다”(Turner 61). 그러나 이 시대에 몸은 질서와 연결시켜 파악되었으므로 한 주체의 몸 이미지의 변화는 그것만으로도 질서에 배치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 몸 이미지는 정신과 몸이 함께 작용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재자이다. 따라서 변화된 몸 이미지는 그 주체의 정신과 몸의 변화를 드러내는 징표로 볼 수 있다. 한 시대는 특유의 몸 이미지를 각 주체에게 할당하고 요구한다. 그러므로, 시대의 일반적인 틀이 용인하지 않는 몸 이미지를 지닌 인물은 그런 몸 이미지를 가진 것만으로도 국가의 무질서를 낳는 동인이 될 수 있다. 이는 몸 이미지가 단지 몸의 외형적인 형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체 의식과 사고를 매개하는 것인 관계로, 기존 질서를 위협하는 이데올로기를 생산하고 유포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도전적 여성 몸 이미지는 남성 나르시시즘에 쐐기를 박는 가능성이 될 수 있다.2) 맥베스 부인의 몸 이미지를 파악함으로서 그녀가 시대 이데올로기에 대해 맺고 있는 관계의 의미를 고찰해보겠다.
II. 맥베스 부인의 몸 이미지
맥베스 부인은 변화하는 몸 이미지를 지닌 인물이다. 몸 이미지는 주체의 정신과 몸을 연결시켜주는 매개체로서 타자는 그 몸으로 드러난 이미지를 통해 그 주체의 의도와 정신을 파악하게 된다. 주체가 상황에 의해 변화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 변화는 단지 외적 표현의 변화만을 시사하는 것이 아니므로 그 안에 수많은 의미를 함축하게 된다. 맥베스 부인의 변화하는 몸 이미지를 통해 그녀가 정말 가부장제와 절연할 수 있는 주체인가 아니면 자신도 모르게 가부장제에 타협하고 공모하는가를 도출해내고자 한다. 이것이 가능할 때 “몸여성”이라는 도식이 그녀에게 다시 재현되는지, 아니면 그 도식을 넘어서서 몸 이미지의 재구축을 통한 가부장적 시대 이데올로기의 변모에 일익을 담당하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주체는 몸 이미지를 갖는다. “몸 이미지는 정신분석학적 주체성의 개념에서 정신과 몸 사이를 중개하는 제 3자의 의미를 지닌다”(Grosz 62). 그러므로 몸 이미지라는 제 3자적 매개를 통해 우리는 보이지 않는 정신이라는 것과 보여지는 몸의 상관관계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또 쉴더(Schilder)에게 있어 “몸 이미지는 특정의 목표를 얻어내기 위해 필요한 움직임의 재현이고 또 몸의 현재의 상태에서 이 목적으로 향해가기 위해 몸을 움직이는 데 필요한 중개적인 행위들이다. 이는 전의식적인 것으로, 의식적인 것으로 전환될 수 있다. 그러므로 몸 이미지의 변화(disturbances)는 주체가 자신의 몸, 감각, 움직임을 경험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고, 현재의 자세와 갈망하는 목표를 연결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며, 또 주체가 타자들의 몸과 유관하게 자신의 몸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한다”(70). 한 주체는 태어나면서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시대 이데올로기 속에 던져지고, 성장하면서 그것을 자연스럽게 몸에 익힌다. 즉 자신에게 주어지는 몸 이미지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주체가 자신만의 욕망, 쉴더 식으로 표현해 ‘갈망하는 목표’가 생기게 되면 주체가 생각하는 자신의 몸 이미지와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의 자세에는 부조화가 발생하게 된다.
맥베스 부인이 출생하면서, 또 맥베스와 결혼하면서 자연스럽게 얻은 몸 이미지는 ‘고전적인 몸 이미지’ 일 것이다. 이는 그녀의 지위에서 추정 가능하다. 근대초기 영국에서 귀족 여성은 침묵과 정숙이라는 여성의 명예를 지킬 것을 보다 강력히 요구받았다.3)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여성으로서의 명예를 박탈당하는 것으로 훈육되었으며, 체재 내에 귀속되는 통념적 여성 이미지에서 벗어날 때는 수치가 뒤따랐다. 귀족 여성에게 요구된 위의 사항은 그녀의 생명과 같은 가치를 지닌 것이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맥베스 부인은 그런 면모를 처음부터 드러내지 않으며 남편인 맥베스에 의해서 그녀의 일탈적 특성은 제재받지 않는다. 가정은 작은 왕국이었고 그 왕국의 군주는 남편이었으므로 그녀를 규제할 수 있는 사람은 맥베스 뿐이지만 맥베스 자신이 군주의 권한을 얻고 싶어하는 사람이고 그 목적을 위해 그녀가 큰 도움이 되고 있으므로 그녀의 일탈성을 막을 이유가 없다. 그녀는 규제밖에 놓인 여성이다. 처음부터 그녀에게 주어졌을 몸 이미지는 그녀의 주체적 태도에 의해 거부되며 그것이 상징적으로 표현된 것이 유아살해를 상상하는 이미지이고, 현실적으로 표현된 것이 던칸 살해에 중추 역할을 하는 그녀의 모습이다.
그녀는 가부장제의 두 가지 큰 이데올로기에 순응하지 않는 데, 공적 권력에 대한 욕망과 모성성에 대한 거부를 밝힐 때이다. 이 두 영역은 셰익스피어의 시대 여성에게는 접근금지 구역이었으므로 그에 대한 거부는 그녀를 그 시대의 이데올로기에서 상당히 거리를 둔 여성으로 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물론 맥베스 부인이 직접 공적 영역에 들어서는 것은 아니다. 텍스트에서 그녀가 자신이 왕이 되려고 하는 등의 공적 지위를 직접적으로 갈망하는 내용은 찾을 수 없다. 그녀는 남편을 통해 코더의 영주 부인에서 절대군주의 부인, 즉 왕비의 자리를 갈망할 뿐이다. 그러나 스스로 왕의 자리를 욕망하지 않았다고 해서 맥베스 부인이 공적인 지위에 연연하는 인물이 아니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여성이 남편의 공적 지위의 향상을 통해 사회와의 관계맺음으로 들어가려는 태도는 공고한 가부장제의 옹벽 아래서 여성에게 주어진 거의 유일한 출구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부장제의 견고한 성벽아래서 여성이 직접 처음부터 공적인 영역으로 이동하기란 극히 예외적이었을 것이므로 맥베스 부인의 경우 역시 그 나름의 방식으로 공적 영역을 욕망했던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녀는 결국 영주 부인에서 왕의 부인으로 격상하게 되고 이 격상은 그녀에게 현실적 파워를 상당히 많이 제공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보다 맥베스 부인이 지배 이데올로기로부터 이탈하는 보다 강력한 지점은 모성적 몸 이미지의 거부로 드러날 때이다. 맥베스 부인은 맥베스에게 던칸을 살해하도록 종용하면서 일견 무관계한 것으로 보이는 환유적 이미지로서 그와 자신을 설득한다. 그때 언급되는 것이 모성에 대한 거부이다(I would, while it was smiling in my face,/Have pluck’d my nipple from his boneless gums, /And dash’d the brains out, 1. 7. 568). 스코트랜드 왕이 되고는 싶지만 던칸왕을 죽일 수는 없다는 맥베스의 남성성을 북돋우는 방법으로 선택되는 이미지가 자신에게 내재한 모성성을 완전히 거부하겠다고 설파하는 것은 환유적이다. 그러나 이 환유적 이미지는 내적 근거없이 갑작스럽게 등장한 것이 아니다. 여성에게 모성이라는 영역은 남성에게 요구되는 명예, 용기와 같은 특질로 대변되는 남성성 만큼이나 여성의 기본 범주에 속한다는 점에서 모성성과 여성성은 접점을 갖는다. “근대초기에 사회적, 종교적 기대는 모든 여성이 모성성을 기쁘게 받아들일 것을 준비시켰다”(Coch 426). 모성성은 여성이라면 누구라도 벗어날 수 없는 한계 지점이었던 것이다. 이는 당시 사회의 주변인이며 남성 중심적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희생양으로서 기능했던 마녀의 구성조건이 무엇이었는지를 파악할 때 확인할 수 있다. “근대초기에 생식에 적합한 여성 즉 어머니라는 한 예외를 제외하고는 모든 여성이 고발당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필요한 조건이라 해도 생식 역시 여성을 신성재판(마녀재판)에서 면제하기에 충분하지 못했다. 오직 ‘훌륭한’ 어머니만이 그 사회의 여성혐오증에서 면제될 수 있었다”(Thurer 206). 훌륭한 어머니란 아들을 낳아 가부장제를 공고히하는 데 공헌하는 여성이었고, 그런 여성만이 마녀사냥에서 유일하게 안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유럽의 마녀사냥은 대부분의 경우 가난하고 못 배우고 입이 걸고 늙은 여성들을 상대로...남성들이 벌였던 전쟁이나 마찬가지였던 것”(Yalom 93)이며, “마녀들은 과장된 가부장적 두려움의 투사”(Loomba 79)이므로 마녀들을 처단하는 것은 제도를 유지하기 위한 남성들의 필사적 태도의 결과였다.
이렇게 볼 때 가부장제라는 제도는 여성을 단지 남성을 위한 쓸모로서 파악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쓸모가 없어진 여성은 사회 전체에서 배척받고 소외될 뿐만 아니라 제도를 강화하기 위한 스펙터클의 대상이 된 후, 죽음을 당하는 운명에 놓이기도 하였다. 생식력을 상실한 그 대표적인 인물군인 마녀들은 ꡔ맥베스ꡕ에서 일단 기존 질서를 전복시키는 역할을 담당하는 것처럼 보인다. 극의 진행과 함께 맥베스 부인이 맥베스로 하여금 주어진 자신의 사회적 위치에 불만을 갖게 하고, 그래서 도리어 사회가 요구하는 남성성을 상실하게(I dare do all that may become a man; /Who dares do more, is none. 1. 7. 467)하는 것은 곧 그녀가 상징적 마녀가 되었기 때문이다. 마녀로서의 그녀의 기능이 집약적으로 표현되는 때가 모성에 대한 자발적 거부의 강력한 시사이다.
왜 모성은 여성의 쓸모와 유관한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재생산 기능으로서의 여성은 경제적 교환가치를 갖는 상품이지만 남성에게 모성의 기능이 단지 경제적 역할만을 하는 것은 아니다. 모성은 남성의 감정적 피난처이며 모성의 희생이 중개되어 남성적 자아가 확립되기 때문이다. 라깡의 이론을 따르는 프로쉬는 “여성이 남성의 환상이며 모성성은 가부장제의 환상 영역에 불과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여성의 비실재성 덕분에 남성은 일관된 주체의 가능성을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을 갖게 된다”(Frosh 202)고 라깡의 이론을 설명한다. 여성과 모성은 분리 불가능한 것으로 여성의 가장 깊은 사회적 층위가 모성이다. 여성이 비실재성으로서 남성의 환상 기능을 한다는 것은 이리가레이의 모성이해와 동일 맥락에 놓여있다. 이리가레이도 어머니를 가부장제 사회질서의 침묵하고 있는 기층으로 위치시키면서 “여성이 존재하지 않는 이 남성적인 가상적인 것은 (남성)동성애적인 것이라고 명명한다. 이러한 환상 체계 안에서 여성은 남성 나르시시즘의 물질적 토대이자 남성 주체성의 조건이다”(Irigaray 294). 즉 어머니는 사회적 질서와 욕망의 질서를 떠받치고 있지만 그 자신은 단지 재생산자들로서 사회적인 구조틀에서 아무런 역할도 부여받지 못한 존재들이다. 어머니는 남성의 환상으로 기능함으로서 아들아버지의 상징적 질서를 받쳐주는 한편 아이가 아버지와 동일시해서 얻은 삶이 제공하지 못하는 자아의 통합성을 가능하게 해준다.4) 그러므로 근대초기에 여성이 모성성을 유지한다는 것은 남성 환상으로서의 여성 역할과 기능을 반박하지 않고, 도리어 이를 체화한 태도로 수행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여기서 맥베스 부인의 모성성에 대한 상징적 거부 천명은 그 의미가 명료해진다. 그녀가 남성이 허여한 재생산자로서의 안전한 자리가 지닌 그 안전성의 환상을 거부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또 여성 자신은 환상/꿈이 부재한 상태로 남성의 환상만을 부추키고 그에 기생하는 역할에 대한 거부가 그녀안에 적어도 무의식적으로 내재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그녀의 태도는 가부장제에 대한 도전이다. 이 때 맥베스 부인의 몸 이미지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정반대항에 서 있음으로써 남성에 의해 악마적 평판을 받는 여성이 되는 데, 이는 맬콤(Malcolm)이 맥베스를 패배시킨 후 맥베스 부인을 “악마같은 왕비”(fiendlike queen, 5. 9, 35)로 규정하는 데서 확인된다.
게다가 유아살해는 근대초기의 유럽에서 주로 마녀들의 행위로 간주되고 마녀들을 처벌하는 조건이었다. 흔히 맥베스 부인과 동일시되는 마녀들이 주문을 걸기 위한 젯밥인 가마솥 국물에 던지는 물건들 중에는 창녀가 낳아 목을 졸라 죽인 갓난애의 손가락(Finger of birthstrangled babe,/Ditchdeliver’d by a drab, 4. 1. 301)도 들어있고, “비극적인 일이지만 구 잉글랜드에서 이런 내용물을 구하기가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을 것”(Thurer 207)이므로, 여기서 마녀, 창녀와 같은 사회 변방에 위치한 여성들과 유아살해라는 죄명은 밀접한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이 도출된다. 여기서 맥베스 부인마녀창녀의 고리가 도출된다. 유아살해의 이미지에서 제시된 맥베스 부인의 몸 이미지는 가부장제에 대한 저항을 마녀와 창녀와 결부되는 방식으로 했다는 점에서 과격할 정도로 강력한 이미지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다. 이런 맥베스 부인은 기존의 여성이미지가 아닌 변화하는 주체로서의 이미지를 드러냈다는 측면에서, 그로테스크한 몸 이미지를 가진 여성으로 규정할 수 있다.5)
한편 자신의 젖을 담즙으로 치환하는 태도 역시 그녀의 몸 이미지를 구성하는 기능을 한다(Come to my woman’s breasts,/ And take my milk for gall, 1. 5. 478). 근대초기에 여성의 유방은 여성성을 대표하는 여성 몸의 부분이자 남성 소유의 상징이었다.6) 맥베스 부인은 유방의 생산물인 젖 대신 담즙으로 바꿔 놓고 있는 데, “독물과 담즙은 젖의 상징적인 대체물, 즉 여성성의 본질에 가로놓여 있는 유독한 액체”(Yalom 125)를 뜻한다. 이는 여성성을 거부하는 발언(unsex me here, 1. 5. 41)이며 “어머니의 몸의 이면에는 남성들의 마음 속에 공포심을 불러 일으키는 전투적인 여성상이 숨어 있다”(Yalom 125)는 것, 즉 여성 유방의 새로운 이미지를 시사한다. 또 “젖이 피로 대치되는 것이나 악마적인 동물/아이는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아이를 사용하는 엄마의 악마적인 본능”(Coch 442)으로 볼 수 있다. 맥베스 부인이 젖의 자리에 담즙을 위치시키는 것은 그녀가 모성성보다는 자신의 욕망 실현을 더 중시하는 여성임을 확인시켜준다. 이렇게 볼 때 맥베스 부인은 남성을 두렵게 하는 전투적 몸 이미지를 가진 시대적 재현체로서 그녀의 이미지가 그로테스크하다는 것은 명백하며, 이는 특히 맥베스가 언급하는 이미지와 대조되어 더욱 강화된다.
1막 7장에서 맥베스는 인덕과 과업을 공유한 던칸에 대한 역모를 주저하면서 만약 그를 살해하면 세상의 동정이 그에게 쏠릴 것을 우려한다. 이 때 그는 갓난아기와 동자의 이미지를 제시한다.
그의 인덕은 천사가 부는 나팔처럼 대역무도한 악행을 만천하에
호소하는 것이 되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세상의 동정은 광풍을
탄 벌거숭이 갓난애기 또는 눈에 띄지 않는 하늘의 준마를 탄
동자처럼 무서운 악행을 만인의 눈 속에 불어넣어 폭풍마저 누그러뜨릴 눈물을 억수로 쏟게 할 것이다.
that his virtues
Will plead like angels, trumpettongu’d, against
The deep damnation of his takingoff;
And Pity, like a naked newborn babe,
Striding the blast, or heaven’s Cherubins, hors’d
Upon the sightless couriers of the air,
Shall blow the horrid deed in every eye. (1. 7. 1824)
여기서 아이는 준마를 타고 광풍을 몰고 오는 존재로서 바로 이전에 언급된 천사이미지의 연장이다. 아기 천사는 “대역무도한 악행을 만천하에 호소하는 존재”로서 맥베스가 저지르게 될 악의 반대항을 상정하는 존재다. 반복되는 아이에 대한 언급에서 맥베스와 부인이 ‘아이’라는 동일 이미지를 중요한 함의를 갖고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맥베스에게 아이는 절대 선의 대리인이고 맥베스 부인에게 아이는 그 절대 선이 자신의 뜻에 따라 파괴될 수 있는 대상이다. 던칸을 죽이겠다는 생각과 야심을 양인이 공유하고 있지만 맥베스 부인의 체제를 전복하려는 뜻은 남편을 능가한다.
“몸 이미지는 한 주체를 구성하는 장식물, 머리모양, 그리고 자세를 모두 포괄하는 것이다”(Grosz 80). 의복 역시 주체의 몸 이미지를 구성하는 한 요소이다. 맥베스와 그 부인의 몸 이미지의 차이, 나아가 사회 유지적 측면과 저항적 측면의 대립은 의복에 대한 태도에서도 파악할 수 있다. 앵거스(Angus)가 지적하듯이 맥베스가 입은 왕의 옷은 그에게 맞지 않으며(now does he feel his title / Hang loose about him, like a giant robe, 5. 2. 201), 맥베스는 그 “거인의 옷”을 걸친다는 것에 대해 처음부터 고민한다. 맥베스에게는 최근에 된 코더(Cawdor)의 영주로서의 지위에 만족하려는 심산이 있다(Which would be worn now in their newest gloss,/Not cast aside so soon, 1. 7. 345). 코더의 영주로서 얻은 명성(golden opinion)은 정당하게 얻은 것으로 그에게 충분한 명예를 제공하고 있는 상태다. 그에게 코더 영주의 의복은 그의 사회적 명예를 대변하는 것이다. 그러나 왕위를 찬탈해서 왕의 의복을 걸쳤을 때 그 옷은 그에게 맞지 않는 큰 옷일 뿐이다. “아주 작은 사람이 자신에게 너무 큰 코트를 감싼 모습만큼 그렇게 이상하게 모욕적이고 품위를 떨어뜨리는 효과를 내는 것은 거의 없다”(Spurgeon 176)고 할 정도로 왕의 의복은 그에게 맞지 않는 것으로 반복적으로 표현된다. 마녀의 예언을 같이 듣고 있던 뱅코우도 맥베스가 왕이 된다는 말에 “어울리지 않는 옷” (1. 3. 143)이라고 하며, 맥베스 자신도 코더의 영주가 될 것이라는 마녀들의 예언에 그것을 “남의 옷”으로 간주한다(The Thane of Cawdor lives: why do you dress me/In borrow’d robes? 1. 3. 10809). 이런 그의 입장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던칸 살해 직전까지 그는 자신에게 딱 맞는 옷을 바라는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반면에 맥베스 부인은 좀 큰 옷이어도 나쁠 것이 없다는 입장이다(Was the hope drunk,/Wherein you dress’d yourself? 1. 7. 356). 그녀에게 왕의 옷은 “인생의 장식물”(ornament of life)이다. 자신의 명예와 과시를 위해, 환언하면 자신이 의도하는 몸 이미지의 강화를 위해 필요한 부가물이다. 그것은 던칸을 죽임으로서 그녀가 원했던 것이 “야망”의 실현이었으므로 왕의 옷이라는 장식물을 통해 자신이 절대권력의 담지자라는 것을 타자에게 확인시키고 싶었을 것임을 추론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녀가 욕망하는 몸 이미지는 권력있는 존재로서 보여지는 것이다. 던칸 살해를 추동하는 그녀의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의 힘은 그녀가 맥베스에게 끼치는 영향력으로 나타난다. 맥베스는 던칸 살해로 기존 질서를 재편성하므로 그녀의 새로운 이미지가 맥베스를 축으로 하는 권력동향에 영향을 미칠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주어진 몸 이미지 대신 의지적으로 획득한 새로운 몸 이미지는 그녀에게 맞춘 옷처럼 편안할 수 없다. “근대 초기의 극에서, 질서의 은유로서의 신체는 농담에서, 적절치 못한 외양, 위장...그리고 광기에서 현저하게 결렬된다. 그리고 여기에 전복의 잠재성이 놓여 있다”(Salkeld 58). 모성적 몸 이미지가 침묵하며 헌신적이고 공적인 장소에서 자신을 의도적으로 은폐하는 것이라면 모성적 몸 이미지를 거부하는 모습은 샐켈드의 주장처럼 농담에서, 광기에서 즉 의식의 비무장 지대에서, 무의식적 도발의 순간에 나타나게 된다. 맥베스 부인의 신체가 지배 이데올로기와 일치하는 때는 심신이 상호 교통하고 있는 때로서, 그녀에게 심적 부담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에서 와해될 때 놀람과 당혹감이 그녀를 압도한다.
그녀에게 주어진 몸 이미지와 갈망하는 몸 이미지 사이의 갈등은 지배 이데올로기와 그녀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재생산하고 싶은 이데올로기간의 갈등이 그녀의 몸으로 드러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변화도상의 몸 이미지는 그녀에게 생각지도 않았던 감각의 자극을 경험하게 하고 그것은 놀라움이나 공포, 강박증과 같은 양상으로 심리적 차원에서 경험된다. 마녀의 예언을 듣고 황홀해진(rapt 1. 3. 57) 맥베스가 그 기쁨을 알리기 위해 보낸 편지를 접한 그녀는 좋은 일에 대한 기대감에 제 정신이 아니다(Thy letters have transported me beyond. 1. 5. 56). 그녀가 마녀의 예언에 얼마나 큰 기대를 하고 있는가는 던칸이 자신의 성에 묵으러 온다는 사자의 전언에 대한 반응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자 : 오늘 밤 폐하께서 이곳에 거동하시옵니다.
맥베스 부인: 무슨 얼빠진 소리냐!
Mess: The King comes here tonight.
Lady M : Thou’rt mad to say it. (1. 5. 31)
“무슨 얼빠진 소리냐?”고 질책하는 것은 마녀의 예언이 수월히 이루어질 가능성에 대한 강력한 기대에서 나온 표현이다. 위의 대사는 “진짜냐?”라는 물음으로, 맥베스 부인은 왕의 행차 소식을 접한 짧은 순간에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현실적인 추진력을 발휘한다. 죤 터너(John Turner)는 맥베스와 그 부인의 이 심리 상태를 이데올로기와 연결시켜, “갑자기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은 너무 놀랐다는 것이며 환상에 빠지는 것으로, 던칸이 유지하려고 애쓰는 시간과 공간의 훈육들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파악된다”(Turner 61)고 지적한다. 즉 터너는 이들의 몸을 스코트랜드의 몸 정치학적 질서가 각인된 텍스트로 간주한다. 맥베스 부인의 흥분된 감정상태는 공명하던 몸과 정신의 균열을 시사한다. “위대함”에 대한 환상을 촉발시키는(Great Glamis! worthy Cawdor! / Greater than both, by the allhail hereafter! 1. 5. 545)부인의 이 흥분된 감정은 그녀의 환상과 욕망의 정도를 보여주는 가늠자이다. “이 ‘위대함’은 맥베스와 그 부인의 가장 개인적인 환상의 공적 원천을 누설하는 것”(67)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던칸을 살해한 후 맥베스가 후회와 자책의 감정에 매몰될 것을 경고하면서 “생각에 그렇게 빠지지 말라는” 충고를 한다. 맥베스는 던칸 살해 후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데서 나오는 당황스러운 감정에 휩싸이는 데(How is’t with me, when every noise appals me? 2. 2. 57), 이 때 그녀의 충고는 주목할 만하다.
맥베스: 왜 난 “아멘” 소리를 하지 못했을까? 나야말로 하느님의 구 원이 필요했는데, “아멘” 소리가 목에 걸려 나오질 않다니.
맥베스 부인: 이런 일은 그런 식으로 생각해서는 아니 됩니다. 그러다간 미치게 됩니다.
Macb: But wherefore could not I pronounce ‘Amen’? I had most need of blessing, and ‘Amen’ stuck in my throat.
Lady M: These deeds must not be thought after these ways: so, it will make us mad. (2. 2. 3033)
맥베스 부인은 자신들의 광기를 자신도 모르게 예측하고 있다. 미칠 수도 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은 이 상황이 자신들이 감당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이며, 이 때가 무척 이례적인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 당황스러운 감정의 크기는 맥베스 부인이 이전의 몸 이미지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반증한다. 즉 그녀의 당황감, 광기가 덥쳐 올 것에 대한 우려는 무의식의 순간적 부상이다. 이것을 무의식적 인식으로 보는 것은 자신들의 행위가 속을 숨기는 부드러운 표정만 하고 있으면 무리없이 끝날 수 있다고 아직도 강력하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점은 맥베스 부인에게 있어 기의와 기표가, 무의식이 언어를 배반하는 최초의 순간이면서, 동시에 그녀는 아직 자신의 무의식을 자각하지 못한다.
맥베스 부인이 모성성에 안존하지 않기로 하는 것과 왕의 살해에서의 역할은 그녀의 선택에 의한 것이고, 그녀의 의식이며 이상적 자아의 표현이다.7) 즉, 그것은 그녀의 이상화된 이미지이다. 그녀는 자신의 이상화된 몸 이미지를 기표적 차원에서 유지하려고 노력하며 욕망을 현실화시키는 데 주력한다. 그녀의 새로운 몸 이미지 구성을 위한 갈망은 맥베스를 안정시키려할 때 드러난다. 맥베스 부인은 맥베스가 미칠 것을 우려하고, 위로한다. 던칸 살해 직후의 위로나 3막의 연회에서 유령을 보고 헛소리를 하는 그에게 남자답게 처신하라는 질책을 비롯해서 그녀는 지속적으로 그에게 정신적 지원을 보낸다.
유령 앞에 혼란스러워하는 맥베스로 인해 던칸 살해가 폭로될 것을 두려워하면서 그것을 저지하려는 태도는 자신이 변화시킨 상황을 유지하려는 의식의 주장이다. 그러나 그녀는 억압을 느끼고 있다. 그녀는 의식하지 않고 있다 해도 그녀 내부에서 저항과 억압은 공존한다. 억압은 상징계의 통제이고 또 대타자가 주체에 관여하는 힘이며 지배 이데올로기의 세력이다. 그녀의 몽유병은 몸으로 겪어내고 있는 이 두 범주 사이의 갈등이 노출된 것에 다름 아니다.
몽유병적 증상을 보이기 이전에 벌써 맥베스 부인의 분열은 시작된다. 다만 그것을 억압할 수 있을 정도의 자기 통제력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그녀의 분열은 한 대사에서 전혀 다른 내용을 발화하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
야망은 이루어졌건만 만족을 얻지 못하니. 살인을 하고도
불안이 진드기처럼 따라 붙는다면 차라리 살해당한 피해자
가 되는 것이 더 마음 편하리라. (맥베스 등장) 웬일이세요,
폐하? 왜 늘 하찮은 공상에 매달려 홀로 계십니까 ? 그런
생각은 깨끗이 떨쳐 버리셔야 합니다. 이미 죽어버린 사람이
아닙니까 ! 돌이킬 수 없는 일에 집착하는 건 죽은 아이 나이
세기와 같습니다. 이왕지사 저지른 일은 이미 과거지사입니다.
Where our desire is got without content:
‘Tis safer to be that which we destroy,
Than by destruction dwell in doubtful joy. Enter Macbeth
How now, my Lord? why do you keep alone,
Of sorriest fancies your companions making,
Using those thoughts, which should indeed have died
With them they think on ? Things without all remedy
Should be without regard: what’s done is done. (3. 2. 512)
독백과 맥베스에게 하는 대사의 이 엄연한 차이는 그녀의 분열을 암시하며, 또 그녀가 어느 정도 주체성을 확보하는 여성인가를 재론하게 하는 지점이다. 귀족부인으로서 맥베스 부인이 확보했을 몸 이미지가 정신과 몸의 공명성을 뫼비우스의 띠처럼 반영했었지만, 이제 그녀는 의식과 무의식의 분열이라는 형태로 그 정신과 몸의 상관성을 교란하고 있다. 정신은 의식만이 아니라 무의식도 포함하는 것이므로 의식과 무의식의 결렬은 정신과 몸의 결렬을 초래하게 된다.
그녀의 분열과 무의식의 내용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은 몽유병적 증상을 보이는 맥베스 부인의 모습이다. 이때 그녀의 몸 이미지는 모성성을 거부할 때의 그것과 같을 수 없다. 필립 매과이어는 “그녀의 증상에서, 즉 그녀가 마지막으로 모습을 보이는 장면에서 그녀가 앞부분에서 모습을 보였을 때 자신으로부터 축출해내려고 했던 ‘후회하는 자연의 방문’이 더 강하게 주장되고 있다”(Maguire 125)고 지적하는 데, 이는 그녀의 몸 이미지와 유관한 측면이다. 그런 맥베스 부인의 모습을 자책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볼 수는 없다. 만약 그녀가 초반부에서처럼 “잠자는 사람이나 죽은 사람은 그림이나 마찬가지”라며 던칸을 철저히 사물화할 수 있었다면 그녀가 의도하는 몸 이미지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의 증상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증상은, 전의가 말하듯이 “심한 정신착란”이다. 신경증세가 생겼다는 것은 초자아의 검열을 벗어나는 현상이 발생했다는 것이고, 또 그녀의 정신(inside)이 몸으로 투사되었음을 뜻하므로 그녀의 몸 이미지가 이전과 동일할 수 없다.
그러나 매과이어의 주장은 그녀의 의식적 측면과 무의식적 측면이 분리되었음을 간과하고 있다. 맥베스 부인은 의식적으로가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자책한다. 맥베스 부인의 몽유적 증상이 강박증의 소산이고 강박증의 뿌리에는 죄책감이 놓여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던칸 살해에 주역을 맡았다는 사실, 살해당하기 직전의 자신의 아버지와 닮은 던칸이 죽은 광경(sight)으로 그녀의 내부에 형성된 피의 이미지 등이 그녀를 반복적으로 던칸 살해 장면으로 회귀시키고 있다는 것은 확연하다. 게다가 1막의 실제 행위 시의 언술과 상반되는 언급은 분명 그녀의 분열된 자아의 표출이다. “그녀의 언어는 문자 그대로 그녀에게 저항한다. 그녀는 마치 그녀의 몸에 다른 사람이 들어있는 것처럼 말한다”(Tennenhouse 130). 테넨하우스의 지적은 그녀의 분열을 시사한다.
증상은 저항이다. 그러나 증상을 단지 이데올로기, 간단히 상황에 대한 저항으로 보는 것은 그 증상이 발생한 원인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증상은 양면성을 갖는다. 먼저 저항적 측면을 파악해보겠다. 저항은 대타자에 대한 저항이며 동시에 대타자의 목소리를 환영으로 듣게 된 자신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다. 모든 신경적 증상은 양면성을 갖고 있다. 그것은 대타자에 속하지 않을 수 없는 주체의 한계이기도 하면서 또 대타자를 주체를 구속하는 힘으로 파악하고 그것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으려는 성향의 결과이기도 하다. 먼저 대타자의 구속력과 맞서려는 투지를 보이는 맥베스 부인의 태도는 집요하다.
그녀가 던칸 살해를 기억하는 몽유적 증상은 닫힌 구조이다. “이 과정에서 놀라운 것은 그 사이클이 완전히 봉쇄되었다는 점이다”(Salkeld 112). 맥베스 부인은 의식이 있을 때는 하지 않을 말을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행위를 거의 그대로 반복하는 데 그 점에서도 강박적이다. 이는 그녀가 비록 꿈속에서라도, 자신의 정신과 몸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현실의 상황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경향을 시사한다. 이미 발생한 일이라는 닫힌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고 싶다는 것은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것이고 던칸 살해로서 얻은 왕비의 지위를 유지하려는 것을 의미한다. 그녀는 꾸준히 던칸이 정점에 위치했던 가부장제에 저항하고 있다.
또 그녀가 몽유병적 증상 속에서 하는 말을 듣는 시녀와 전의의 태도에서 그녀의 봉쇄된 구조가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녀와 전의는 맥베스 부인의 말을 통해 왕권 찬탈의 비밀을 알게 된다. 시녀는 이미 오래 전부터 그것을 알고 있었다(It is an accustom’d action with her. 5. 1. 27). 그러나 둘 다 그 사실을 발설해서 맥베스 부인이 우려하는 결과인 그녀의 비행이 소문나도록 하지 않는다(I think, but dare not speak. 5. 1. 75). 전의가 그것을 소문낸다면 맥베스 부인의 몽유적 증상은 그녀의 행위로만 끝나게 되지 않고 결국 그녀의 몰락을 초래하는 데 일조할 것이다. 그러나 전의는 감히 그 말을 퍼뜨리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은 왕과 왕비로서의 맥베스 부부의 권력을 인정하는 것이다. 전의는 모든 인간의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말로서(God, God forgive us all! 5. 1. 72), “희생양이 된 인물에게 자신의 죄를 투사하지 않고 공동의 죄를 고백한다”(Turner 102). 전의는 맥베스 부인의 문제를 모든 인간이 범할 수 있는 일로 바라보고 있다. 그녀의 증상 자체가 봉쇄적이듯이 타자에 의해 파악된 그 현상도 봉쇄적이다. 그녀의 권력은 그녀의 무의식적 노출로 인해 방해받지 않으며 그녀의 의식은 무의식의 힘 앞에 승자이다. 그러므로 모성적 몸 이미지까지 벗어버림으로서 얻은 그녀의 저항적 권력은 아직 현실적으로 유효하다. 주체가 몸 이미지를 변화시키는 데는 그것으로 사회변화를 의도하는 것이 내포되어 있다. 즉, 맥베스 부인이 모성적 몸 이미지를 거부하는 것은 적어도 여성의 제한된 영역에 대한 거부의식이 내포되어 있다. “16, 17세기의 여성은 적어도 자신들의 몸을 권력과 저항의 장소로서 발견하기 시작했다”(McGrath 30). 그러므로 기존의 모성성을 대변하고 상징하는 여성의 몸에 대한 맥베스 부인의 거부는 몸을 통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몽유병적 증상을 보일 때도, 즉 국가의 전복을 타자 앞에서 인정한 때에도 그녀는 처벌되지 않고 그녀의 왕비로서의 권리는 유지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녀의 변화된 몸 이미지는 아직 어느 정도 그 사회적 효력이 유효하며, 그녀는 비록 분열된 상태이기는 하지만 아직 새로 어렵게 획득한 몸이미지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III. 가부장제에 대한 도전의 한계
그러나 언급한 바와 같이 증상은 대타자에 대한 저항적 측면만 갖는 것은 아니며, 맥베스 부인의 증상도 그와 같은 측면을 노출시킨다. 몽유병적 증상을 보일 때의 그녀의 몸 이미지는 모성성의 상징적 거부를 피력할 때의 그것과 동일하지 않다. 또 꿈속이기는 하지만 그녀는 증상을 발현했다는 것은 무의식적인 측면에서는 대타자의 요구를 감지하고 있고 그것을 완전히 거부하지 못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 때의 몸 이미지는 분열된 존재로서의 그것이며, 유약한 여성은 그녀가 가장 버리고 싶어했던 것을 회상할 떄 그녀가 제시하는 몸 이미지는 기존의 여성성으로 다소 회귀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결과는 맥베스 부인이 초반에 보인 태도를 생각할 때 갑작스럽다. 그러나 모든 증상은 그 발현이 갑작스러울 뿐 그 원인은 누적된 감정들의 결과이다.
멕베스 부인이 맥다프 부인을 언급하는 장면은(The Thane of Fife had a wife: where is she now? 5. 1. 401)짧은 대사이지만 그것은 맥베스가 맥다프의 가족을 죽이기로 한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과, 여성간의 배려의 마음으로 읽을 수 있다. 그리고 그녀 역시 살해되었을 것에 대한 불편한 마음을 토로하는 것이다. 증상은 무의식의 발현이다. 그녀의 무의식은 흔히 여성성으로 간주되는 타자에 대한 동정과 두려움에의 굴복과 같은 특성을 갖고 있다. 더 나아가 자신의 행위가 용서될 수 없는 것이라는 무의식적 인식에 접한 상태이다. 그리고 몽유병, 즉 심리적 병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의식과 무의식의 싸움에서, 사람들의 시선에 노출되지 않는 밤에는 무의식이 이기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여기서 몸과 의식의 관계, 몸과 무의식의 관계가 도출된다.
맥베스 부인의 무의식은 그녀의 몸 이미지를 변화시킨다. 그것은 1막에서 보이던 몸 이미지와 동일할 수 없다. 여기서 맥베스 부인의 몸 이미지는 그녀의 엄청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로테스크한 몸 이미지를 그대로 유지하지는 못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몸 이미지는 타자에게 보여지는 것이고 무의식적인 드러냄도 타자에게 포착된다면 그것도 그녀의 일부이다. 그녀의 의도는 그녀의 몸을 완전히 통제하고 주체의 영역에 놓아 둘 수 없었고, 그녀의 무의식적 몸 이미지는 그녀가 선택한 몸 이미지를 지탱하기에 어려울 정도이므로 시대 이데올로기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장악력에서 온전히 벗어날 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몸 이미지를 통해 확인한 그녀의 태도는 결국 여성성을 몸으로 등치시키는 통념적 사고의 재현으로 귀결되고 만다는 인상을 준다. 맥베스 부인은 초반에 의도했던 몸 이미지, 즉 몸으로 드러난 남성적 파워를 온전히 얻지 못하고 기존 이미지를 재생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맥베스의 남성가계를 유지하려는 집요함에 은근히 합류하는 그녀의 태도는 모성성을 거부하면서 가부장제에 상징적 저항의 물고를 트는 것으로 보였을 뿐, 사실 가부장제에 대한 정면 도전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이 지점에서 맥베스 부인이 가부장제에 도전한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말을 기만하는 분열된 주체인 것은 아닌지를 정확히 파악해 낼 수 있다.
맥베스가 뱅코우, 특히 플리언스(Fleance)를 살해하려는 이유는 자기의 자손이 아닌 뱅코우의 자손중의 남아가 왕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사실 맥베스와 그 부인은 던칸이 죽은 것만으로도 권력의 정점에 서있게 됐으므로 더 이상 뱅코우 등을 살해하려고 할 필요가 없다. 이 필요이상의 살인으로 보이는 행위의 원인은 바로 가부장제의 뿌리깊은 유산에 기인한다. 맥베스 부부는 던칸의 자손이 왕이 되는 것을 막았지만 그것만으로는 자신의 가계로 물려지는 계보가 생길 수 있다는 확신이 없다. 그것이 이들의 반복되는 살해와 결과적 패배의 원인이다. 이때 맥베스 부인은 뱅코우의 살해에 직접 가담하지 않았지만 남편이 그를 살해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Banquo’s buried: he cannot come out one’s grave. 5. 1. 5960). 이는 그녀가 보이는 몽유병적 행동을 유발하는 동인의 하나였고 던칸을 비롯한 뱅코우의 살해, 또 맥다프의 가족의 생사에 대한 우려가 그녀의 증상에는 개재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녀가 뱅코우의 살해를 결국 알게 되었는가 끝까지 모르고 있었는가는 중요하다. 왜냐하면 뱅코우의 살해를 촉발시킨 동인은 가부장제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고, 알면서도 이들의 살해를 묵인, 공모했다면, 그녀는 던칸 왕이 상징하는 가부장적 질서에 반대했을 뿐 철저히 가부장적 핵심을 공격한 것으로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맥베스에게 처음 나타나 그의 앞길을 점쳐준 마녀들은 단서를 달아 그를 불안하게 하는 데, 그것이 바로 뱅코우의 자손이 군주가 될 것이라는 예언이다. 맥베스는 던칸을 죽인 후 부터는 뱅코우와 그의 아들에 대한 불안감을 보인다.
그래 그렇다면 뱅코우의 자손을 위해 이 손을 더럽힌 게
아닌가? 그들 때문에 인자한 던칸왕을 살해했단 말인가?
마음에 간직한 사랑의 술잔에 증오의 독주를 채운 것도 그
자들 때문이란 말인가. 그리하여 내 불멸의 보배를 인류의
적인 악마에게 내준 것도 모두가 그자들을 왕으로 하기 위
해, 즉 뱅코우의 자식들을 왕이 되게 함이었던가!
If’t be so,
For Banquo’ issue have I fil’d my mind;
For them the gracious Duncan have I murther’d;
Put rancours in the vessel of my peace,
Only for them; and mine eternal jewel
Given to the common Enemy of man,
To make them kings, the seed of Banquo kings! (3. 1. 639)
맥베스가 느끼는 불안감은 위의 인용문에서 확인되듯이 던칸 살육의 그 피비린내의 결과로서 자신은 엄청난 고통을 받게 되었는 데, 그것이 모두 뱅코우의 자손에게 돌아 갈 수 있다는 인식에 근거한다. 뱅코우와 그의 아들을 죽이려는 결정은 결국 맥베스 자신의 자손이 스코틀랜드의 군주로서 위엄과 권력을 행사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근거한다. 그렇게 되었을 때만이 그가 벌인 왕의 살해가 그나마 자신에게 납득할 이유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맥베스가 자신의 남아로 가계를 이어나가는 의미에 부과하고 있는 그 정도를 감지할 수 있다. “그는 하나의 왕조를 시작하기를 원하며... 그렇지 않다면 그의 행위는 모든 목적을 잃게 되며 파괴될 수밖에 없는 맹목적인 분노로 바뀌게 된다”(Freud 41). 그래서 맥베스는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향유할 수가 없다. 자손으로부터 유리된 권력은 진정한 권력이 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는 자신의 왕홀과 왕관을 모두 불모의 이미지로 제시한데서 극명하다(Upon my head they plac’d a fruitless crown,/ And put a barren sceptre in my gripe. 3. 1. 601). 자식에게 돌아가지 못하는 왕관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성과 비교되면서 무력한 느낌을 제공한다. 맥베스는 현재 왕이지만 왕의 권력이 없다. 그 이유는 남아에게로 남자 가장의 재산과 지위와 위엄을 모두 물려주는 것이 당연시되어 있는 가부장제 시스템에 기인한다.
사회 변경에서 천대받으면서 중앙의 권력을 교란시키는 역할을 담당함으로서 스코틀랜드의 기본적 질서에 과감히 도전하는 것으로 보였던 마녀들의 예언도 사실 가부장제의 기본 골격에 도전하는 것을 결코 아니다. 그녀들의 예언이 맥베스의 전복에 초점이 가있다면 그녀들이 사회에 대한 전복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 되지만, 뱅코우의 자손에 대한 언급은 맥베스가 전복한 일의 결과를 예견한 것이다. 즉 전복은 성공할 수 없다는 한계를 이미 노정하고 있는 데다가 왕좌를 한번 얻는 것은 당사자 당대의 문제만이 아니라 후손들, 그것도 남아로 이어지는 가부장제의 영속에 있다는 것을 마녀들도 전제하고 있으며 그 사실 자체는 교란하려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그것은 마녀들의 권한과 역할 밖으로 보일 정도이다. 맥베스의 던칸 살해가 마녀들의 예언이라는 형태의 간접적인 촉구에서 비롯되었으므로 마녀가 뱅코우의 자손이 왕좌를 차지할 것을 거론한 것은 의미가 깊다. 미래를 좀 더 확실히 알기 위해 찾아간 맥베스에게 그녀들이 보여주는 것은 피흘리는 뱅코우가 그를 보고 웃고 있는 장면과 왕들의 모습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마녀들은 맥베스의 편이 아니며 가부장제의 편에 서있다.
뱅코우의 후손이 대대로 왕이 되는 것을 마녀가 염두에 두고 맥베스를 충동했다는 것이 가부장제의 영속과 연관되는 것은 마녀가 보여주는 왕들이 모두 남성이라는 데서도 알 수 있다. 또 던칸 왕 시절의 질서를 재편성하는 데 부인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한 것은 던칸 중심의 남성절대군주체제가, 비록 맥베스 부인이 공식적 권력을 점유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녀를 중심으로 재구성될 수 있는 가능성을 함축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맥베스를 철두철미 패배시키고 그 부인은 몽유병을 앓게 함으로서 극의 전복성은 힘을 잃는다. 결국 던칸 살해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만이 이 극의 유일한 향방인 것은 분명하다.
맥베스는 부인에게 찬탄과 경외감을 갖고 있다(Bring forth menchildren only!/For thy undaunted mettle should compose/ Nothing but males. 1. 7. 735). 인용한 대사는 또 한편 가부장제의 뿌리를 확인시켜주는 문장이다. 같은 막 5장에서 이미 아이의 머리통을 박살낼 수도 있다는 시사를 했음에도 맥베스는 그녀의 겁없는 태도에 대한 칭찬으로 아들만 낳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며, 이에 대한 부인의 반응도 전혀 없으므로 아들만 낳으라는 문제에 대해서 그녀가 부정적이 아니라는 것은 포착할 수 있다. 이 지점은 맥베스 부인의 상충되는 의식과 무의식이 표출되는 장소다. 맥베스 부인의 태도와 행동양식은 맥베스의 표현대로 남아만을 낳아야 합당할 만큼 남성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부인이 모성성을 거부한다는 것은 여성성을 거부한다는 것이고 또 한편 흔히 회자되는 의미로서의 남성성을 대신 체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맥베스 부인의 선택은 기존의 남성중심적 체제 속에서 여성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특성을 잠시 거부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며 나아가 남성성을 선호함으로서 남성성과 여성성을 엄연히 가르는 가부장제를 거부하는 마음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맥베스 부인은 순종적인 여성적 특성을 버릴 수 있지만 그것은 단지 남아를 통해 맥베스가 얻은 왕좌를 계승시키기 위한 데 있다고 추정가능하다.
결국 그로테스크한 것으로 보였던 맥베스 부인의 몸 이미지는 처음에 파악했던 만큼 그렇게 단일하지도, 강력하지도 않다. 가부장제라는 단단한 고리 위에서 출발하고 있는 이 극은 맥베스 부인의 분열을 통해 가부장제의 재확립이 그 목표임을 알 수 있게 한다. 부인의 언어는 곧 자신의 말을 배반하고, 부인은 남아를 통한 가계의 전승을 설파하는 맥베스의 태도를 공유하고 있다. 극의 큰 틀이라고 할 수 있는 가부장적 흐름은 맥더프의 아들을 죽이는 것, 또 뱅코우의 아들 살해를 중시하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맥베스 부인이 이런 커다란 흐름을 비판한다면 그녀의 전복 시도는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결국 실패하는 데, 이는 그녀 자신도 알지 못하는 이와 같은 모순에서 비롯한다.
맥베스 부인이 갈망하는 몸 이미지는 결국 그저 남성화된 여성이다. 즉 남성성과 여성성의 이분화된 구분을 그대로 수용한 태도이며, 여성스러움을 배태하는 몸은 열등한 것으로 상정하고 있는 태도이다. 즉 몸은 여성과 여성성을 대변하는 것이라는 남성 일반의 태도를 체화했다고 할 수 있다. 이때 그녀가 강력하고 전례없는 여성 몸 이미지를 구현하려 한다고 해도, 가부장제를 자신의 현실적 터전으로 삼고 있으므로 그녀가 원하는 것은 맥베스의 그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뱅코우와 맥더프를 죽이는 것에 그녀가 반대할 필요가 없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단지 맥베스를 정점으로 시작하는 새로운 가부장제의 구현일 뿐이었다. 결국 몸여성의 고리는 그녀에 의해 조금도 약해지지 않는다.
체제를 비난하지만 실은 그 체제를 보이지 않게 단단하게 받치고 있는 더 커다란 구도에 종속되는 것이 맥베스 부인의 한계이다. 그녀의 증상은 한때 무시하려고 했던 여성에 대한 일반적 요구가 주체를 장악하고 있는 힘의 정도를 시사한다. 대타자 내에서 자신의 자리를 보다 확고히 구축하려는 그녀의 자아이상(egoideal)은 무의식 깊이 작용하고 있다. 물론 그녀가 끝까지 의식적인 차원에서는 ‘자아이상’의 응시를 허용하지 않는 주체적 존재로서의 면모를 보이기는 하지만, 대타자의 응시에 현실적인 대안을 제공하지는 못한다. 자아가 강한 주체는 주체적이지만 타자에 의해 보여지는 자신을 바라보지, 응시하지 못한다. 이 때의 주체성은 오인에 근거한 것일 뿐이다. 맥베스 부인이 결국 자신의 오인을 스스로 인정하게 되는가는 극에서 드러나 있지 않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상적 자아’의 명령이 이 증상 속에서 주체성과 나르시시즘의 결합이라는 형태로 모습을 보인다는 점이다. 맥베스 부인의 주체성은 사회의 요구 속에 수렴되는 차원으로 발전하지 못한다. 그것은 단지 대타자의 응시를 알지 못하는 성숙하지 못한 주체의 나르시시즘의 결과이다.
맥베스 부인이 성공적으로 새로운 몸 이미지를 확보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분화된 남성과 여성의 카테고리를 그대로 차용하면서 여성다움 대신 남성다움을 선택대상으로 삼아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무의식적 차원에서 수렴했다는 데 있는 것으로 파악했다. 이는 이 극이 맥베스가 실패하도록 처음부터 조직되어있었던 만큼 맥베스 부인의 실패도 직조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맥베스 부인이 나갈 수 있는 있는 비상구는 처음부터 없었고 그녀의 죽음은 전제된 것이었다. 이를 뒷받침하는 가장 큰 요인은 그녀가 성차를 인정하는 방식이 아니라 성차를 부정하는 방식으로서만이 자신의 허약한 주체성을 피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성차의 인정은 양성간의 교호성을 발생시킨다.8)
그러나 이 극에서 맥베스와 그 부인의 관계는 단지 권력이라는 목적을 위해서만 일방적으로 진행된다. 권력은 르네상스 시대에 공적인 영역이었고 결국 부인은 공적 영역의 확보를 위해 사적 영역을 놓치고 있도록 설정되어 있다. 셰익스피어의 다른 극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측면인, 애정과 성적 욕망의 부재가 이들 부부를 특징짓는데, 이처럼 사적 영역을 온전히 공적 영역에 할당한 존재의 결말은 이미 예정된 것이었다. 셰익스피어는 이 극에서 모성성을 비롯, 여성성을 거부하는 여성에게 죽음과 사회적 질타 그 이상의 대안을 제공하지 않는다. “아버지로부터 페니스를 얻으려는 욕망은 아이를 가지려는 욕망에 의해 대체되므로”(Irigaray 41), 그녀가 모성적 몸 이미지를 거부한다는 것만으로도 페니스에 대한 갈망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있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즉 그녀는 주체적 여성으로서 남성중심의 이데올로기에 대해 의식적 저항정신을 놓지 않으려는 투지를 보이기는 한다. 그러나 모성성을 버리려는 상징적 의도가 가부장적 가계 유지에 보다 깊숙히 공모하기 위한 것이므로, 맥베스 부인은 고유하고 교묘한 방식으로 가부장제라는 큰 범주를 재생산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그녀의 몸 이미지는 여성을 몸으로 등치시키면서 정신과 지식 및 권력의 범주에서 여성을 배제시키는 남성 중심적 이데올로기를 대변하는 양상을 보이며, 변화하는 몸 이미지 생성에 실패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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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dy Macbeth and Her BodyImage: Its Meaning and the Limit
Abstract Lee,Yong-eun
Women have been placed only in the domain of ‘body’ which is the opposite place to the ‘spirit’ or ‘knowledge’. During the Renaissance, women’s condition was not different: women’s limitation in the patriarchal society was so evident that women were men’ belongings and basis for men’s spiritual wholeness. But Lady Macbeth is a unique and unequalled woman in the period because she seems to be successfully acquiring the ‘grotesque body image’ by discarding all the feminine traits demanded by the ideology of the period. Bodyimage means the subject’s spirit that is engraved in the body. Therefore bodyimage shows the coexistence and mutual relation of both body and soul.
This article firstly shows the process by which Lady Macbeth discards her bodyimage as an aristocratic woman, and attempts to acquire some different body image which was not allowed to any woman of that period. Therefore, it delves into how she can get an image contrary to the given image.
Secondly, this article also reveals how and why she fails in retaining her new image and shows the power of the Other that is deeply seated in her unconsciousness, which causes her symptom called ‘unnatural troubles’. Due to the force of her unconsciousness, her bodyimage partly changes back to her first image. Therefore, her subjectivity reveals its limitation.
The point is that her seeming retardation is in fact originally planned, because all her decisions against Duncan are not against the patriarchal system. Her determination to dismiss all the feminine traits is only to create another patriarchal line starting with the name of Macbeth. Therefore, the subjectivity of Lady Macbeth as an independent woman subject is limited by the dominant ideology of the age from the start.
1) Grosz는 여성을 몸에 한정시켜 놓음으로서 남성들은 두가지의 혜택을 얻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남성들이 생각하기에 순수하게 개념적인 질서를 남성의 것으로 전유할 수 있었으며 또 여성의 몸이 제공하는 서비스와 여성의 몸 그 자체에 대한 접근을 통해 육체적 접촉에 대한 남성들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었다.
2) 필자가 여성의 도전적 몸 이미지가 남성 나르시시즘과 연결될 수 있다고 보는 이유는 남성 나르시시즘이 여성의 순종적이고 모성적인 몸 이미지에 기초해서 발생하고 확대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Irigaray는 남성이 자신을 세계의 단일자로 파악하고 여성을 자신의 단일적 존재를 확대시키는 도구로 보고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남성이 요구하는 몸 이미지에서 벗어난 여성은 남성의 나르시시즘 체계를 공격할 수 있는 기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3) Stallybrass는 르네상스 시대에 남성은 여성에게 침묵과 정숙을 강요하는 동시에 집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함으로서 모든 공적 생활을 차단시켰다고 밝힌다. 특히 귀족여성에게 이와같은 규제의 요구는 더 강력했을 것으로 Ania Loomba는 파악한다.
4) 여성의 모성성에 관한 고찰에서 Lacan과 Irigaray가 여성의 모성성이 남성의 환상으로 기능한다는 생각은 공유하고 있지만 그에 관한 기본 입장은 다르다. Lacan은 남성의 환상으로서의 모성성을 현실적 상황으로 간주하고 있는 반면 Irigaray는 이와 같은 상황이 남성이 자신의 권력을 영속화하기 위한 것으로 보고 비판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5) Bakhtin은 ‘그로테스크한 몸’을 ‘변화하는 과정속의 몸’으로 정의한다. 즉 주어진 이미지에 자신을 한정시키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는 몸의 제한된 영역을 넘어서서, 폐쇄되고 부드러우며 침투할 수 없는 몸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한다. 맥베스 부인은 귀족여성이 가질 수 있는 규범적 몸 이미지를 이미 무시했고, 이를 통해 여성 몸의 제한된 영역을 넘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타자와 만나는 경계영역에서 발생하는 그로테스크 몸 이미지는 구분된 각각의 영역을 인정하기보다 그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므로 기존 이데올로기에 대한 도전적 요소를 가질 수 있다. 고전적 몸(ancestral body)을 거부하면서 시작한 맥베스 부인은 새로운 몸 이미지를 획득하고 있고, 이는 그녀를 바라보는 타자에게 새로운 영향력이 될 수 있다.
6) Yalom은 이 시대에 유방이 종교와의 연관성을 상실하게 되면서 에로틱한 유방의 이미지로 옮겨 갔으며, 유럽여성들의 90%가 젖을 주는 사람으로서의 역할을 했다면 나머지 10%만이 그들의 유방을 애지중지하면서 그들의 짝을 위해 남겨두었다고 한다. 즉 여성의 몸이 종교에서 벗어나 성애의 대상으로 다소나마 자리매김되기 시작했으나 그래도 유방의 제 일차적 유용성은 모성의 역할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7) 이상적 자아는 Lacan의 표현으로, 주체가 타자와의 관계속에서 자신을 바라보지 못하고 자신이 이상적으로 파악하는 이미지가 그 자신인 것으로 아는 자아를 의미한다. 상상계적 단계의 자아로 세계와의 싸움에서 이길 수 없는 허구적 자아이미지이다.
8) Irigaray의 성차를 인정하자는 주장은 여성과 남성을 생물학적으로 이분화해온 남성중심적 구분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다. Irigaray에게 몸은 생물학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이 교차하는 장소로서 이 때 여성은 남성에게 받은 육체로서의 몸만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서 육화되는 정신의 영역을 함께 담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성차의 인정은 그동안 사실상 남성의 것이었던 몸과 정신을 여성도 그 둘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녀의 주장은 이분법의 대안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