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운사
서정주
선운사 주지화상 배성원 씨의 말씀을 들으면, 선운사에 있는 만세루라는 집을 처음 와 본 어떤 권위 있는 늙은 일본 사람 건축 전문가 하나는 이 집을 향해 절을 수없이 되풀이하더라 한다.
“왜 그러느냐”고 물으니, 여전히 그 집을 향해 “고맙기도 하시지…
고맙기도 하시지….” 웅얼거리면서 대답하기를,
“보시오. 이집이 보통 집인가를…. 이집은 이를테면 무명 헝겊을 조각조각 주워 모아 꿰매어서, 어떤 온전한 비단 옷보다 더 곱고 훌륭한 옷을 짓듯이 지은 집이오. 모두 세 토막, 네 토막씩 못도 나무못을 쳐 이어 맞춰서 기둥들도 세우고 들보도 했지만, 자세히 좀 보시오. 그 토막토막 이어 맞춘 들보의 틈틈이 또 천장 그득히 한 획의 허튼 수작도 없이 성실하게도 아름다이 새겨놓은 저 목조의 조각들을…. 저렇게도 아름다운 예술을 하던 이들이 만든 집인 걸 생각하고 보자니, 저절로 발걸음이 거듭 멈춰지고 또 절이 저절로 나옵니다.” 하더라는 것이다.
짧은 나무토막을 이어서 누더기 집을 지어 그걸로 정교하고도 아치 있는 예술품을 이룬 예는 한국의 이 만세루와 같은 것 아니고서는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이 절 법당에 모셔놓은 향나무로 새긴 등신대(等身大)의 세 분의 부처님과 보살상도 이곳 아니고서는 더 볼 수 없는 것이다. 순금으로 꽤 두껍게 입힌 도금술도 완전하여서 처음 만든 그대로 한 점의 상처도 아직 보이지 않은 채로, 그 눈과 눈썹들의 선연한 각성은 우리 영원 가운데서 제일 맑게 새어오는 아침을 우리 보는 이의 눈에 늘 불러일으키어 여간 반갑지 않다.
이 세 분의 몸은 또 향나무 중에서도 좋은 향나무로 되어 있어 공기가 축축한 날에는 은은히 향기를 온 법당 안에 풍기고 밀려나와 절 뜰까지 적시곤 한다니, 세상의 부귀영화, 또 세상의 많은 고민 다 귀찮고 좀 더 급수가 높은 냄새가 소원인 사람은 꼭 궂은 날을 가려 가서 한번 맡아보는 게 좋을 것이다.
이 세 부처님과 보살님의 눈의 새벽을 느끼는 이들에게 나는 서른세 개 불교의 하늘 중의 맨 위 하늘을 상징하는 이 산골의 제일 높은 데 있는 암자, 도솔천 내원궁으로 올라가 보기를 권한다. 도솔암에서 남쪽으로 기어 올라가는 절벽의 비탈길에 쌓아올린, 벌써 천몇백 년은 좋이 지냈을 아흔 몇 갠가의 폭이 좁은 돌층계를 현기증이 들지 않도록 조심해 가려 디디고 올라가면 거기 미륵보살의 처소인 내원궁이 있는데, 이 미륵보살은 또 우리나라 태생이 아니라 인도에서 옛날 만든 것의 하나다.
검당선사라는 중이 이 선운사를 세울 무렵, 우리 황해바다의 이 언저리 해변에 자주 출몰하던 외국 해적들한테서 얻은 것으로, 우리 좋은 불상들에 비긴다면 많이 미련스레 뵈고, 갖은 어둠이 많아 답답한 느낌이긴 하나, 그래도 누구나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외국풍의 한 맛은 지닌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 내원궁에 가 보기를 권하는 것은 물론 이 상대(上代) 인도제의 미련스러워 뵈는 보살의 모양 때문이 아니다.
우리의 하늘에다가 불교는 서른세 개의 하늘의 계급을 두고, 사람 가운데 정신이 맑게 갠 사람은 그 맨 위의 하늘 도솔천에 사는 것으로 생각해 오고 있거니와, 이 선운사의 도솔천의 내원궁은 그 놓여진 상징적 실감이 내가 본 어느 암자에서보다도 희한했기 때문인 것이다.
내 피와 살이 아직 마음에 다 붙어 있는 연유로 다시 무거워져, 선운사 큰 절로 내려오니, 주지스님이 “도솔암 동백꽃은 벌써 피었지요?” 한다. “피었습니다. 여기보단 훨씬 높은 곳이라도 거기는 추위가 적고 햇빛이 잘 쬐게 자리를 잡아서 그렇죠?”
내가 이렇게만 대답하고 만 것은 그 이상의 딴 것들 이때 나는 동백꽃을 두고 더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선운사를 하직하고 5리를 다시 걸어 내려 버스가 다니는 한길가에 왔을 때, 나는 그 엉터리 대답을 불가불 마음속으로 지워버리고, 다음과 같이 역시 고쳐야만 하였다.
“아! 거기는 좋은 귀신이 많이 깨어 살고 있어라우.”
왜냐하면 이날(1964년 3월 7일) 오후 한 시쯤, 내가 서 있던 여기는, 내가 이로부터 22년인가 23년 전의 스물여섯 살인가 일곱 살 때, 이슬비 오는 어떤 가을 오후 지나가다가, 한 채의 주막집을 발견하고 들어가 한나절 술을 마시던 곳임이 분명한데, 이날 여기를 찾아보니 그날의 그 집은 날아간 듯 어디로 없어지고 그 자리엔 실파만 자욱이 나있고, 누가 “그 집 주모는 벌써 죽었어라우.” 한 마디 한 때문이었다.
사실은 이 자리엔 스물 몇 해 전의 그땐, 육자배기를 내게 잘 불러 준 훤칠하게 생긴 40대의 한 주모가 있었기에, 나는 이번 이 고을 학생들의 토주 잔치에 불리어 올 때 은근히 그와 다시 만날 것을 기대했던 것인데, 같이 가던 고려대 학생 조군이 나를 대신해 나서서 물으니,
“여자가 사나와서 6·25 사변 때 빨치산들한테 찔려 죽고, 집도 탔어라우.” 한 마디 한 때문이다.
그래, 나는 이 매운 실파만 남은 빈터 위에 육체 없이 있는 것이 이 근처의 어느 육체 가지고 있는 것보다도 대견했기 때문에, 그것을 예부터 내려오는 말로 ‘귀신’이라 하고, 마음속으로 ‘아!’ 소리를 쳤고, 또 높디높은 도솔암에서 지대가 낮은 큰 절보다도 그 핏빛 동백꽃을 훨씬 더 일찍 피게 하고 있는 것도 그 좋은 귀신의 힘들임을 겨우 다시 알아차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