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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사망 | ? ~ 13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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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보(高龍普, ?〜1362)는 고려의 미천한 신분 출신으로 원나라의 환관이 된 인물이다. 그는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며 충혜왕 등 고려 왕에게 수모를 주었으며 고려의 정치에 간섭하고 고려인들에게 많은 피해를 주기도 하였다. 일개 환관인 그가 어떻게 고려를 괴롭힐 수 있었던 것일까? 고용보를 비롯해 원 간섭기 환관으로 원과 고려의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들에 대해 알아보자.
환관(宦官)이란 거세된 남자로서 궁중에서 잡일을 하는 자를 말한다. 원나라는 화자(火者, 고자)를 고려로부터 징발하여 환관으로 이용했다. 1300년 3명의 화자가 원나라에 바쳐진 이후, 약 100여 명의 고려인이 원나라에 들어가 환관이 되었다. 조선 역시 200여 명의 화자를 명나라에 바친 기록이 남아 있다.
끌려간 화자들은 황궁의 환관이 되어 각종 잡일을 했지만, 종종 황제의 총애를 받아 고위 관직에 오른 자들도 있었다. 일부는 사신(使臣)으로 뽑혀 고국인 고려와 조선에 칙사(勅使)로 파견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렇게 환관이 된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고국에 해악을 끼쳤다. 대표적인 인물로 임백안독고사(任伯顔禿古思, ?~1323), 고용보(高龍普), 박불화(朴不花, ?~?)가 있다. 박불화는 박티무르부카(朴帖木兒不花)로 불리며 원나라 역사를 기록한 [원사(元史)] <열전(列傳)>에 실린 반면, [고려사]에는 빠져 있다. 반면 고용보는 [원사]에는 빠졌지만, [고려사] <열전>에 실려 있다. 고용보가 박불화보다 더 크게 고려에 해악을 끼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고용보는 탄광(煤場)에서 일하던 사람으로, 본관은 전주였다. 환관이 된 자들이 대체로 그러하듯 고용보 또한 고려에서 낮은 신분으로 차별받는 자였다. 그가 환관으로 원나라에 간 것이 강제로 끌려간 것인지, 자발적으로 지원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고려에서 자주 화자를 원나라에 보내던 1310년대에 그도 원나라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원나라에서 투만티르(禿滿迭兒)라고 불리며 환관으로 일했다. 그의 인생이 달라진 것은 1333년, 공녀로 끌려온 고려인 기씨를 추천해 원나라 15대 칸인 토곤티무르(順帝, 惠宗, 재위: 1333〜1368)의 차를 담당하는 궁녀로 들여보내면서부터였다. 기씨는 얼마 후 칸의 총애를 받아 후비를 거쳐 황후가 되었다.
1340년 기씨가 후비에서 제2황후로 승진하자, 고용보의 출셋길이 열렸다. 기황후는 그녀를 위해 설치된 자정원(資政院)의 원사(院使)로 고용보를 임명했다. 자정원은 황후들의 재정 관리를 담당하는 기관이지만, 차츰 궁중의 사람과 물자, 사물을 관장하는 기관으로 변모했다. 결단력이 강하고 정치적 감각이 뛰어난 기황후는 곧 황제에 버금가는 권력을 갖게 되었다. 그러자 그녀를 보좌하는 고용보의 권세도 점점 커져갔다. 원나라 황실 가족인 친왕(親王)과 최고 신하인 승상(丞相)조차 그의 눈치를 살필 정도가 되었다.
고용보의 뒤를 이어 자정원사가 된 인물은 박불화다. 박불화는 기황후와 같은 고향 출신이란 인연이 있었다. 고용보는 박불화를 추천하였고, 두 사람은 협력하여 기황후의 수족이 되었다. 이들은 원의 국정에 간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려 조정에도 간여했다.
원간섭기의 고려는 원나라의 정치적 상황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다. 1341년 2월, 고려는 원나라의 새로운 권력자로 떠오른 고용보에게 삼중대광 완산군이란 작위(爵位)를 주었다. 천한 신분 출신인 그를 왕족, 공신이나 가질 수 있는 군(君)에 임명했다는 것은 그만큼 고려가 기황후와 그 측근 세력을 두려워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음해 6월 원나라는 고용보와 박불화 등을 고려에 보내 기황후의 모친인 이씨를 맞이하게 했다. 그러자 충혜왕은 고용보 등을 개성 교외에 나가 직접 영접하고, 연경궁에서 연회를 베풀기도 했다. 또한 고용보와 태감(太監) 박불화에게 왕이 직접 의복을 하사하기도 했다. 고용보는 충혜왕에게 격구(擊毬)와 씨름을 보게 해달라고 요구하고 왕과 함께 관람했다. 그해 11월 27일, 충혜왕은 그들이 원으로 돌아갈 때까지 극진하게 대접해주었다. 그럼에도 자신의 출신을 잊은 그는 철저히 원의 입장에서 충혜왕을 대했다. 그는 고려에서 매를 잡아오지 않는다고 충혜왕을 마구 질책하기도 했다.
1343년 충혜왕의 황음무도(荒淫無道)함이 원나라에 알려져 그의 폐위가 논의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용보는 황제가 충혜왕에게 내리는 옷과 술을 주기 위해 그해 10월 고려에 왔다. 그런데 다음 달에 원나라에서 도치(朶赤)와 베시게(別失哥) 등을 파견해 교사(郊祀, 천지에 지내는 제사)를 지낸 후 사면을 베풀라는 조서를 보냈는데, 충혜왕이 병을 핑계로 영접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자 고용보는, “황제께서 늘 고려 왕이 공손하지 못하다고 하시는데, 만약 영접하러 나가지 않으시면 황제의 의심이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라고 경고했다. 충혜왕은 신하들을 거느리고 원나라가 고려에 설치한 관청인 정동성(征東省)에 나가 조서를 접수하려는데 도치 등이 왕을 발로 차고 결박했다. 영문도 모른 채 다급해진 충혜왕은 고용보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는 도리어 충혜왕을 꾸짖었다. 도치는 충혜왕을 잡아 원으로 되돌아가면서 고용보에게 고려의 내정을 맡겼다.
고용보는 사람을 보내어 충혜왕을 따르던 박양연(朴良衍)을 비롯한 십여 명의 고려 신하들을 체포해 감옥에 가둬버렸다. 하지만 송명리 등 평소에 그와 친하거나 뇌물을 바친 자들은 봐주었다. 그는 원나라의 힘을 바탕으로 고려를 뒤흔들었던 것이다.
원나라로 돌아간 고용보는 충혜왕을 모함하여 그를 멀리 악양으로 유배시키고 죽음에 이르게 했다. 1344년 2월 고용보는 이제 8살에 불과한 충혜왕의 원자 흔(昕)을 안고 들어가 황제를 뵙게 했다. 흔이 고려 왕위를 계승하니 충목왕(忠穆王, 재위: 1344~1348)이 되었다. 그해 5월 충목왕은 고용보에게 12자로 된 공신호(功臣號)를 내려줄 수밖에 없었다. 고용보가 원 황제 가까이에 있으면서 마음껏 권세를 누렸기 때문이다.
고려에서는 고용보의 권세를 믿고 거기에 기대어 행패를 부리는 자들도 있었다. 첨의평리 신예(辛裔)라는 자는 자신에게 뇌물을 바친 아전 이적이란 자에게 타인의 관직을 빼앗아 준 적이 있었다. 벼슬을 뺏긴 자가 감찰사에 고소하자, 신예는 이에 앙심을 품고 감찰대부를 모욕하고 관리를 구타하기도 했다. 이런 만행은 신예가 그의 매부(妹夫)되는 고용보의 권세를 믿고 저지른 것이었다.
해평부원군에 봉해지고, 좌정승 벼슬에 있던 윤석(尹碩)이란 자는 충목왕이 즉위한 후, 고용보에게 부탁해 진국상국군 고려대원수라는 직위를 받았다. 고려의 1급 관리가 더 높은 벼슬을 받기 위해 고용보에게 의탁할 정도로 그의 위세는 막강했다.
하지만 그가 지나치게 권세를 부리자, 많은 사람들의 질시를 받게 되었다. 마침내 1347년 6월 관리들의 비리를 조사하는 어사대(御史臺)에서 그를 탄핵했다.
“고용보는 고려에서 석탄이나 캐던 자인데, 폐하의 총애를 입자 그 권세를 믿고 제 마음대로 일을 행하니 친왕(親王)과 승상(丞相)이라도 고용보의 모습이 멀리 나타나기만 하면 달려가 절을 올립니다. 뇌물을 긁어모아 금과 비단이 산처럼 쌓여 있으며 권세는 천하를 좌우할 지경입니다. 그를 처형해 천하 사람들의 마음을 통쾌하게 하소서.”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요, 세불십년장(勢不十年長)이라 했던가. 원나라 황제의 최측근으로 기황후를 천거하고, 충혜왕을 유배 보내 죽게 하였으며, 고려의 국정을 주물렀던 고용보였지만, 어사대의 탄핵은 피할 수가 없었다. 황제는 어사대의 간언을 잠재우기 위해 그를 고려 금강산으로 유배시켰다. 하지만 4개월 후 황제는 그를 다시 원나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영록대부(榮祿大夫)에 제수했다. 그러나 한번 유배를 다녀온 고용보가 원나라에서 다시 예전만큼의 권세를 부리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날개가 한풀 꺾인 고용보는 고려로 와서, 기황후의 오빠인 기철(奇轍, ?~1356) 일파와 결탁해 갖은 횡포를 부렸다. 그는 무고한 사람을 죽인 일도 있었다. 법과 형벌을 맡은 관청인 전법사(典法司)에서 그의 죄를 벌하고자 했지만, 대충 조사 후 석방되었다.
하지만 고용보의 위세도 곧 꺾였다. 1352년 공민왕이 즉위한 후, 조일신(趙日新)이란 자가 기철, 고용보 등 친원 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난을 일으켰다. 조일신의 난은 실패로 끝났지만, 이때 고용보는 난을 피해 숨어 살아야 했다. 그는 스스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가야산 해인사에 숨어들었다. 그렇지만 공민왕은 자신의 친형인 충혜왕을 죽음으로 내몬 고용보를 그냥 놔두지 않았다. 공민왕은 사람을 시켜 그를 찾았다. 1362년, 10년 만에 해인사에 숨어 살던 고용보를 찾아내어 마침내 처형할 수 있었다.
고용보가 고려의 왕을 먼 곳으로 귀양 보내고, 조국에서 온갖 만행을 저지른 구체적인 원인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다만 그가 고려에서 미천한 일을 하며 하대받고 살았으며, 남자로서 굴욕인 환관이 되어 고생하다가 출세를 하게 되자, 고려의 지존인 왕을 괴롭힘으로써 자신의 굴욕감을 만회하고 성취감을 가지려는 보상 심리가 있었다고 생각해볼 수 있겠다.
충혜왕의 부친인 충선왕의 경우, 고려 출신 환관인 임백안독고사의 모함으로 인해 머나먼 티베트로 유배된 바 있다. 노비 출신인 그는 원나라 인종을 태자 시절 섬긴 인연으로 총애를 받았고, 권세를 누리게 되자 충선왕에게 무례한 짓을 범했다. 화가 난 충선왕은 원나라 태후에게 청해 그에게 매를 치고 그가 남에게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원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이 사건은 임백안독고사가 충선왕을 모함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박불화는 동료인 고용보가 고려에서 죽자, 1364년 기황후를 꼬드겨 고려 공민왕을 폐위시키기 위해 원나라 1만 군대로 고려를 공격하게 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조국을 괴롭힌 임백안독고사는 사형에 처해졌고, 박불화도 결국 유배되어 죽음을 맞이했으며, 고용보 또한 공민왕에게 처형당하고 말았다.
고려는 원나라에서 출세한 고려 출신 환관들을 크게 우대해주었다. 1304년 이숙(李淑)이란 자가 원의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하자, 충렬왕은 그를 평창군(平昌君)으로 봉한 일이 있었다. 미천한 출신의 일개 환관이 군(君)에 봉해진 것은 고려인들에게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환관이 되어 고려에 사신으로 방문하면 그 가족이 부역에서 면제를 받는 것은 물론이고, 고려에서 벼슬을 받기도 했다. 또 그가 태어난 부곡(部曲)이나 속현(屬縣)이 현(顯)이나 군(郡)으로 승격되는 경우까지 있었다. 이 때문에 출세를 바라며 자발적으로 환관이 되어 원나라에 가려는 자들도 늘어났다. 이에 따라 원나라 환관 가운데 고려인의 숫자가 가장 많아졌고, 환관으로 출세한 자들은 고려에 사신으로 오기를 갈망하기도 했다.
원나라의 뒤를 이은 명나라에도 조선 출신 환관들이 많았다. 이들 가운데는 역시 조선에 사신으로 온 자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공녀나 화자를 뽑아서 데려가는 일을 하거나, 공물을 거두어가고, 새 국왕의 즉위를 승인하는 황제의 고명(誥命)을 전달하는 일을 했다. 조국의 사정을 잘 아는 만큼, 조선에서는 이들 조선 출신 환관 사신들을 대접하기가 더 힘들었다. 윤봉(尹鳳)이란 자는 무려 12번이나 조선에 사신으로 와서는 온갖 행패를 부려 악명이 높았다. 1429년 윤봉이 명으로 귀국할 때 그가 챙겨간 선물 궤짝이 무려 200개나 되었다고 전해질 정도다. 조선 정부는 그가 올 때마다 그의 본가에 선물을 주고 세금을 면제해주었고, 심지어는 인사 청탁까지 들어주었다. 정동(鄭同)이란 자도 5차례 조선을 방문했으며, 그때마다 엄청난 물건들을 요구해 조선 조정을 괴롭힌 인물이었다. 15세기 명나라는 의도적으로 조선에 보내는 칙사로 조선 출신 환관을 선발하기도 했다.
약소국인 탓에 자국의 백성을 지키지 못하고 화자를 바친 고려와 조선은, 결국 환관이 되어 돌아온 조국의 자식들에게 도리어 능욕을 당하는 비애를 맞보아야 했다. 패륜과 반역의 그 현장을 즐긴 것은 강대국 원나라와 명나라 사람들이었다.
역사는 국가가 그 백성들을 지켜낼 의지가 있을 때, 충신이 길러지는 것이라는 평범한 진실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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