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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6일 [사순 제2주간 토요일]
복음: 루카 15,1-3.11ㄴ-32
그리스도교 신앙 3단계
오늘 복음은 ‘돌아온 탕자’ 이야기입니다. 이 비유를 말씀하시는 대상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을 받아들이시는 것을 보고 투덜거립니다.
그 이유는 행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자신에게 염소 새끼 한 마리 주신 적이 없는데 아우에게는 암소까지 잡아주는 아버지가 불공평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큰아들이 기쁘지 않은 이유는 아버지의 것이 모두 자신의 것임을 믿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분명 큰아들과 작은아들에게 공평하게 아버지의 가산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큰아들은 아버지께 의무를 다해야만 그 유산이 자신에게 오는 줄 착각했습니다.
아버지는 큰아들을 설득할 때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하느님을 아버지라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영성이 3단계로 나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바리사이-율법학자적인 사람들로서 그들은 의무를 다해야만 하느님께서 축복을 주신다고 믿는 이들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자신들처럼 하지 않는 이들을 비판합니다.
술과 담배도 하지 않고 십일조도 철저히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은 구원에서 멀어져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처럼 열심히 의무를 하지 않는 타 종교들을 비판합니다.
정신의학 전문의사인 이무석 교수의 책에 보면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믿었던 첫째 딸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녀는 자신이 쌍꺼풀이 없는 것이 아버지가 동생을 더 사랑하는 이유라 믿었습니다.
아버지께 잘 보이려고 공부도 잘하고 사회에서도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무언가 잘하려고만 합니다.
이 열등감에 남편도 힘들게 만들고 눈이 작은 것 때문에 남편이 자신을 떠날 것이란 두려움으로 살아갑니다.
하지만 부모는 조금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자녀를 모두 사랑한다고 믿어야 합니다.
무언가 잘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자녀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교회에 당신 살과 피, 그리고 죄의 용서 권한을 주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자비로우십니다.
두 번째 단계는 하느님의 자비를 너무 과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해성사만 보면 된다고 믿고 의무는 게을리 하는 단계입니다.
아버지 유산을 받아 흥청망청 사는 단계입니다.
술에 취하고 게으르게 생활합니다.
실제로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두었다는 만족감으로 세상에서의 삶을 더 중시하는 신앙인이면서 죄인인 상태가 됩니다.
전에 소개해 드렸던 미자하와 임금의 이야기와 같습니다.
미자하는 임금이 자신을 너무 사랑하는 줄 알고 임금의 마차를 마음대로 사용하고 자신이 먹던 복숭아를
임금이 먹으라고 내밀었습니다.
아무리 사랑을 받더라도 임금과 신하, 부모와 자녀 사이에 지켜져야 하는 선이 있습니다.
그 선까지 무시하며 회개도 없이 고해성사를 보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하느님의 은총을 남용하는 상태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단계는 회개한 탕자의 단계입니다.
무엇이든 다 주시는 하느님의 은혜에 너무 감격하여 자신도 뭐라도 하려고 하는 단계입니다.
한국전쟁 당시 신실한 가톨릭 신자인 어머니는 징집되어 가는 아들에게 새벽 5시에 꼭 무릎 꿇고
엄마가 기도하고 있겠다고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아들은 어머니께 고마우면서도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날도 새벽 동이 터 오고 있었습니다.
그는 보초를 서고 있었습니다.
‘아, 어머니가 기도할 시간이구나!’
그는 처음으로 어머니처럼 무릎을 꿇어보았습니다.
그때 총성이 울리고 총알이 머리 위로 날아갔습니다.
어머니 기도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 기도에 나도 반응을 할 때 생명을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 있었던 선악과가 바로 우리가 하느님께 해 드려야 할 최소한의 예의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돌아온 탕자는 아버지께 돌아가며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우리는 이미 하느님 자비를 굳건히 믿는 두 번째 단계에 와 있습니다.
가톨릭교회에 속함으로써 첫 번째 단계는 뛰어넘은 것입니다.
그러나 탕자의 모습으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 아버지는 하느님이시면서도 우리를 위해 생명을 내어놓으십니다.
그러면 우리도 적어도 그분 앞에서 무릎을 꿇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범입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3월6일 [사순 제2주간 토요일]
미카 7,14-15.18-20
루카 15,1-3.11ㄴ-32
괜찮다, 다 괜찮다!
탕자의 비유는 어쩔 수 없는 죄인인 오늘 우리에게 더없이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도리를 무시하고 막나가던 둘째 아들이었지만, 아버지는 그리 개의치 않습니다.
그저 돌아오기만 한다면 그걸로 만사 OK였습니다.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마치 밥먹듯이 일상적으로 소소한 죄를 짓고 살아가는 우리, 그뿐이 아니라 가끔씩 묵직한 죄들도
서슴치 않고 짓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탕자의 비유는 참으로 기쁜 소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복음은 반드시 기쁜 소식으로 전해져야 마땅합니다. 우리 가톨릭 신앙은 지극히 낙관적인 신앙입니다.
오늘 우리가 비록 죄인이어도 하느님 눈에는 그저 안쓰럽고 딱해보입니다.
측은해 보이고 사랑스러워 보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사랑 그 자체이십니다. 사랑 빼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 존재의 원천이요 근간입니다.
비록 우리가 합당치 않은 존재이지만 언젠가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의 집에서 그분께서 주관하시는 천상 잔치에 참여할 것입니다.
그 잔치는 영원할 것입니다.
언젠가 착하기만 하지 의지가 약한 한 형제가 마땅히 갈 곳 없다며 취직자리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저는 그 형제를 돼지 치는 농장에 소개시켜드렸습니다.
월급도 그만하면 괜찮고, 시골이라 돈 쓸 일도 없고, 금방 돈 모으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웬걸, 사흘 만에 전화가 왔습니다.“신부님, 저 여기서 도저히 일 못하겠어요. 냄새 때문에 돌아버리겠어요.
”제발 조금만 더 견뎌보라는 말에 그 형제는 제게 ‘빽’ 소리를 질렀습니다.“
신부님이 여기 와서 단 한 시간만이라도 일해보고, 그런 말 하라구요!”
그래서 저는 농장을 한번 찾아가봤습니다.
막상 가보니 돼지 치는 농장에서 일하시는 분들의 고충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더군요.
그 형제에게 주로 맡겨진 일은 하루 온 종일 돼지들이 생산해내는 막대한 배설물들을 치우는 일이었습니다.
잠깐 머물렀는데도 강력한 냄새에 금방 정신이 어질어질해졌습니다.
탕자의 비유에 등장하는 작은아들 역시 지니고 있던 막대한 돈을 다 탕진해버리고 살길이 막막해지자
돼지 치는 농장에 취직했습니다.
작은아들이 돼지 치는 농장에서 주로 한 일 역시 매일 쏟아져나오는 엄청난 양의 배설물들을 치우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강도높은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댓가도 주어지지 않았을뿐더러, 기본적인 끼니조차 제공되지 않았습니다.
인생의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간 작은아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립니다.
‘여기 계속 있다가는 굶어죽겠구나. 정말 염치없고 면목없는 일이겠지만, 그래도 아버지께 돌아가자!’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작은아들의 몰골은 가관도 아니었습니다.
제대로 씻기나 했겠습니까?
땀 냄새, 돼지 배설물 냄새, 별의 별 냄새가 하늘을 찔렀습니다.
신발도 어디로 사라졌는지 맨발입니다.
머리카락은 산발에다 떡진 머리입니다.
옷은 갈아입은 지 얼마나 되었는지도 기억 못합니다. 거지 중의 상거지꼴이었습니다. 그를 보는 사람마다 다들 코를 움켜쥐고 멀찌감치 피해갔습니다.
그가 지나가고 나면 다들 투덜거렸습니다.
“저게 사람이냐, 짐승이냐?”
아버지 집 가까이 이르러서는 따가운 눈총들이 더 심했겠지요.
“야, 저게 누구냐? 천하에 몹쓸 작은아들 아냐? 꼴좋다! 불효자식 같으니라구! 빈대도 낯짝이 있지. 그러고도 지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와? 인간의 탈을 쓰고 어떻게 그럴 수 있냐구?”
다들 한 목소리로 둘째 아들을 향해 손가락질하고 쌍욕을 해댔겠지요.
그러나 이 세상에서 단 한 사람, 유일하게 그러지 않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는‘왜 그랬냐?’고 따지지도 않았습니다.‘그러고도 네가 인간이냐?’며 다그치지도 않습니다.
‘돈 얼마 남았냐?’며 호주머니를 뒤지지도 않습니다.
그저 말없이 있는 힘을 다해 작은아들을 자신의 품에 끌어 앉았습니다.
한 손으로는 ‘내 이제 더 이상 너를 놓치지 않겠노라!’며 작은아들을 꼭 붙들었습니다.
다른 한 손으로는 ‘괜찮다, 다 괜찮다! 너만 살아 돌아왔으면 다 괜찮다!’며 토닥토닥 작은아들의 등을 두드렸습니다.
보십시오. 자비하신 우리 하느님의 얼굴을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는 장면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3월6일 [사순 제2주간 토요일]
복음: 루카 15,1-3.11-32: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비난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11절) 이 두 아들은 두 백성을 의미한다. 율법을 가지고 있었던 유대인이 큰아들, 어리석은 우상숭배를 하는 다른 민족은 작은 아들이다. 율법에 대한 이해가 큰아들과 작은아들로 구분을 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작은아들은 자신에게 돌아올 유산을 달라고 한다. 작은아들은 아들의 자격을 잃어 마땅하였다. 작은아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서 살아있는 아버지의 너그러움에 기대어 자기 쾌락을 좇기로 한 것이다.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13절)고 한다. 아버지에게서 떠났다고 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에게서 떠났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에게서 떠난 사람은 누구나 자기 고장에서 쫓겨난 사람이다. 그는 먼 고장에서 방탕하게 살며, 인자한 아버지이신 당신께서 주신 재물을 모두 허비하였다. 음탕한 욕정의 세계에 사는 것은 어둠의 세계에 사는 것이며 당신 얼굴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것이다. 작은아들은 이렇게 아버지를 떠난 삶을 살았다.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었다고 했는데, 이는 식량의 기근이 아니라, 선행과 덕행의 기근이었다. 하느님의 말씀을 떠난 자가 진짜 굶주리는 자이다. 그가 곤궁에 허덕이고 굶주림으로 고통받는 것은, 방탕한 쾌락에는 만족이 없기 때문이다. 영원한 양식으로 배를 채울 줄 모르는 자는 늘 굶주릴 것이다.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15절) 아버지에게 의탁하지 않고 낯선 사람에게 자신을 넘기는 사람은 가혹한 심판자에게 당하게 된다. 아버지의 사랑을 등진 그는 돼지 치는 신세가 되었다. 진흙투성이 돼지우리에 뒹굴며 더러운 오물을 뒤집어쓰니까 그는 아버지의 집의 평화로운 생활을 등지고 떠난 것이 얼마나 비참하고 괴로운 일인지 실감을 하게 된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17절) 그는 죄인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아버지의 아들로 남아있었다. 창녀들과 어울리며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했지만, 아버지를 떠나 남의 땅의 포로가 되었으나 그는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불렀다. 그는 아들이라는 영예로운 자격을 잃지 않았다. 성령께서는 죄를 지은 이에게서도 떠나지 않으신다는 말씀이다. 성령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21절) 작은아들은 아버지께 돌아오며 울부짖는다. 날마다 드리는 기도에서 교회는 작으면 아들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음을 증언한다. 아버지는 아들이 아직 멀리 있을 때 아들에게 달려간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20절) 아버지는 아들의 죄를 드러내거나 비참하게 만들지 않으려고 입맞춤으로 아들의 죄를 용서하고 포옹으로 덮어준다. 그렇게 상처의 흔적 하나 남지 않도록 말끔하게 고쳐 준 것이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22절) 가장 좋은 옷은 영원불멸하는 영광을 아들에게 입히고 반지를 끼워줌으로써 예전에 지녔던 명예도 되찾아 준다. 신발을 신겨 주는 것은 발도 헐벗지 않게 하고 신발을 신은 채로 옛날의 삶으로 돌아오게 해 준 것이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23절) 되찾은 작은 아들을 위하여 준비된 송아지다. 들에서 돌아온 큰아들, 율법의 백성은 아버지 집에서 춤추며 노래하는 소리가 들리는 데도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안에서 울리는 다윗의 수금 소리와 시편을 노래하는 소리를 듣고, 수많은 사람이 어울려 춤추는 것을 본다. 그러나 들어가려고는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동생 즉, 다른 민족 형제들을 심판한다.
아버지가 밖으로 나가 아들에게 말한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31-32절) 아버지의 것이 모두가 그의 것인데, 아버지와 함께 살던 모든 삶이 매일의 잔치였는데 그것을 알지 못하고 종같이 살아온 큰아들에게는 기쁨이 없었다. 더구나 이제는 시샘 때문에 형제가 파멸하기를 바라니 아버지의 잔치에 참여하여 기쁨을 맛볼 자격이 없다. 작은아들이 사랑의 모습을 되찾았기 때문에 기뻐해야 한다는 것이다. 작은아들이 아버지의 자비로우심으로 잔치에 참여할 자격을 얻었다면 큰아들도 아버지의 허락이 없으면 그 잔치에 참석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역시 모두 하느님의 사랑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