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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인질 외교'의 승리(미 월스트리트저널·WSJ) vs 미국의 외교적 승리(미 뉴욕 타임스·NYT)
러시아와 미국이 자신의 동맹국(벨라루스, 독일과 슬로베니아, 노르웨이, 폴란드)까지 동원해 성사시킨 1일의 대규모 수감자 교환에 대한 성적표는 '윈윈'이다. 푸틴 대통령과 바이든 미 대통령-해리스 부통령이 야밤에 석방자들을 태운 특별기가 도착하는 공항에 직접 나간 걸 보더라도 분명하다.
푸틴 대통령과 바이든-해리스 미 행정부와 각각 맞서는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나 (11월 대선에 출마하는) 트럼프 공화당 후보(전대통령)는 심기가 불편하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대놓고 석방의 대가로 러시아 측에 돈을 준 게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우크라이나 측도 이번 대규모 수감자 교환 합의가 향후 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식을 위한 협상으로 이어지고, 그 과정에서 자신을 '패싱'할까 두렵다.
이번 수감자 교환은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미-러 양국 뿐만아니라 독일과 슬로베니아 폴란드 노르웨이 벨라루스 등 7개국 정부(정보기관)가 관여했고, 모두 24명(자녀 둘 포함 26명)이 자유의 몸이 됐다. 맞교환은 튀르키예(터키)의 앙카라 공항에서 이뤄졌다. 터키 TV 채널 TRT 하버(Haber)은 이번 교환에는 7개국 수감자 26명이 포함됐으며, 10명은 러시아로, 13명은 독일로, 3명은 미국으로 향했다고 전했다.
바이든 미 대통령은 "이번 석방은 외교와 (정상간) 우정이 만들어낸 큰 성과이며, 동맹국들의 도움 없이 불가능했을 것"이라며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에게 특히 감사를 표했다. 러시아와 미국 간의 수감자 교환은 지난 2022년 12월 미국 프로농구 선수 브리트니 그라이너와 러시아 출신의 무기 판매상 빅토르 부트를 맞바꾼 게 마지막이었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에 따르면 미 CNN은 이번 교환에 앞서 윌리엄 번스 CIA 국장이 터키를 방문해 물밑 협상을 마무리했으며,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 역시 지난 2월 뮌헨안보회의에서 두 차례숄츠 총리 등과 대화를 하며 문제 해결에 주력했다고 전했다.
◇ 철저한 보안 속에 진행된 교환 협상
협상은 철저한 보안 속에 진행됐다. 마귝과 인질 협상에 동원됐던 러시아 연방 보안국(FSB) 소속 특별기가 역외영토 칼리닌그라드에 도착하는 바람에 언론의 관심은 그쪽으로 쏠렸으나, 정작 수감자 교환은 앙카라 공항에서 이뤄졌다. 러시아 측이 풀어준 수감자 16명, 돌려받은 8명 등 모두 24명이 기다리던 항공편에 올랐다. 한때 26명으로 알려진 것은 슬로베니아에서 풀려난 러시아 부부에게 미성년 자녀가 둘 있었기 때문이다.
모스크바 브누코보 공항에 도착한 특별기의 트랩을 내려오는 러시아 석방자들/사진출처:크렘린.ru
다국가 간에 성사된 이번 맞교환을 가장 먼저 보도한 곳도 슬로베니아의 TV 채널 N1이었다. 이 채널은 지난 31일 "슬로베니아가 러시아와 수감자 교환의 일환으로 스파이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복역중인 러시아인 2명을 추방한다"면서 다국가 간의 수감자 교환을 처음 알렸다. 아르헨티나 부부로 위장해 간첨활동을 벌이다 체포된 아르춈, 안나 둘체프 부부는 슬로베니아에서 1년 6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크렘린이 공개한 영상을 보면, 푸틴 대통령이 모스크바 브누코보 공항에서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는 (유이한 여성인) 안나 둘체바와 그녀의 딸에게 꽃다발을 안기며 귀국을 환영했다. 그는 알렉산드르 보르트니코프 FSB 국장, 세르게이 나리시킨 대외정보국(SVR) 국장, 안드레이 벨로우소프 국방장관 등과 함께 공항에 직접 나가 (애국자들의) 귀환을 축하하고 감사함을 전하면서 "국가 유공자로 대우하겠다"고 약속했다.
푸틴 대통령이 공항에서 가장 감격적으로 포옹을 한 이는 독일에서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던 FSB 특수 '알파 부대' 출신인 바딤 크라시코프다. 크라시코프는 2019년 독일 베를린에서 그루지야(조지아) 출신의 전 체첸 반군 야전사령관 젤림칸 칸고슈빌리의 머리에 총을 쏴 살해했다. 독일 검찰은 그가 암살 등 해외 비밀 작전을 수행하는 FSB 부서에서 일한 것으로 파악했으며, 법원은 살인 혐의로 그에게 종신형을 선고했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미국 WSJ은 푸틴 대통령이 교환을 가장 원한 수감자가 바로 크라시코프라고 2일 보도했다. 그는 푸틴 대통령과 함께 FSB 특수부대의 훈련소를 방문했을 정도로 절친한 사이라고 한다. WSJ은 러시아 내부 소식통을 인용해 "푸틴 대통령이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장실에서 근무하던 시절, 크라시코프와 처음 만났다"면서 "그는 독일에서 체포된 뒤 한사코 실명은 밝히지 않았다"고 전했다. 그는 또 교도소 근무자들에게 "러시아는 나를 여기(감옥)서 썩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으로 장담한 것으로 전해졌다.
특별기의 트랩을 내려오는 바딤 크라시코프/사진출처:크렘린 공개 영상 캡처
일각에서는 그가 푸틴 대통령의 구동독 드레스덴 주재원 시절, KGB의 동료였다는 설도 흘러나온다. 또 독일 타블로이드 일간지 빌트는 "크라시코프가 2000년 푸틴 대통령의 정치적 대부로 꼽히는 아나톨리 소브차크 전상트페테르부르크 시장의 암살에 가담했을 수도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위키피디아(러시아어판)에 따르면 소브차크 전시장은 1990년대 후반 러시아 중앙 정치무대로 진출한 푸틴 대통령 덕분에 프랑스 파리에서 입원 치료를 받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장 시절의 부패 및 공권력 남용 혐의를 법원에서 소명하는 데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정치적 재기에 실패한 그는 푸틴 대선 후보(당시 대통령 권한 대행)의 선거 캠프에서 활동하던 중 2000년 2월 칼리닌그라드에서 갑자기 사망했다. 공식적인 사망 원인은 심장마비였다.
푸틴 대통령이 2021년부터 서방 측과 접촉하는 FSB에게 크라시코프의 귀환을 독촉하는 바람에 서방 측은 그를 푸틴의 개인 경호원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러나 페스코프 크렘린 대변인은 그의 석방 후 크라시코프가 푸틴 대통령의 경호원 여러 명과 함께 FSB 알파부대에서 복무한 장교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는 또 러시아와 서방 간 수감자 교환에 관한 협상이 FSB와 미 CIA 사이에서 이뤄졌다고 인정했다.
◇불리한 협상 조건을 받아들인 러시아는 왜?
스트라나.ua는 2일 러시아가 서방 측에 수감된 자국인 10명(8명과 자녀 둘)을 받고 반체제 인사 등 16명을 풀어주는 '불리한 맞교환'을 수락한 것은 바로 크라시코프 존재 때문이라는 서방 측 분석을 소개했다. 러시아는 당초 '살인범' 크라시코프의 석방에 반대하는 독일을 설득하기 위해 푸틴 대통령의 정적인 알렉세이 나발니를 내세웠으나, 그가 교환 성사 직전 옥사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 나발니의 정치적 동지들인 릴리야 차니셰바와 크세니아 파데예바, 바딤 오스타닌의 석방안을 제시했고, 러시아-독일 이중 국적자인 케빈 리크와 이웃 벨라루스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독일인 리코 크리거도 포함시켰다. 크리거는 지난 6월 24일 열린 벨라루스 비밀 재판에서 테러와 용병 활동 등의 혐의로 총살형을 선고받았다.
바이든 대통령도 이번 거래의 성사를 숄츠 총리와 수차례 접촉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결과, 에반 게르시코비치 WSJ 특파원과 알수 쿠르마셰바 자유유럽방송(RFE) 기자, 미 해병대 출신 폴 휠런이 미국행 비행기에 탔다. 또 러시아의 반체제 정치범(서방 측 표현)으로 수감중인 일리야 야신 전 모스크바 지방의회 의원과 인권 운동가 올레그 오를로프, 퓰러처상 논평부문 수상자인 블라디미르 카라-무르자, 반전활동을 벌인 알렉산드라 스코칠렌코 등이 석방됐다.
서방 전문가들은 크렘린이 이번 거래를 통해 “조국(러시아)은 절대로 자국민을 버리지 않는다”라는 대국민 명분을 확보한 것으로 보고 있다.
수감자 교환과정에서 주목은 끈 사람은, 단연 한 여성의 손을 잡고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는 여자 아이였다. 여성은 안나 둘체바였고, 아이는 그녀의 딸이었다. 페스코프 대변인은 "둘체바 부부는 앙카라 공항에서 비행기가 이륙한 뒤 자녀들에게 러시아인이라는 사실을 알렸다"며 부부가 슬로베니아에서 철저하게 아르헨티나인으로 살아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어를 모르는 아이들에게 스페인어로 '좋은 저녁'이라는 인사를 건넸다고 한다. 페스코프 대변인은 "아이들은 자신에게 꽃다발을 준 사람이 누구인지 몰라 부모에게 물었고, 푸틴 대통령이 누구인지도 몰랐다"고 말했다. 그는 "부부가 계속 슬로베니아 감옥에 갇혀 있었다면 부모의 권리를 박탈당할 수도 있었다"며 수감자 교환의 인도주의적 측면을 강조하기도 했다.
둘체바 부부의 딸이 엄마의 손을 잡고 들어오는 모습. 다른 손에는 푸틴 대통령이 건넨 꽃다발을 들고 있다/사진출처:크렘린.ru
또하나 관심을 끄는 것은 러시아에서 석방된 게르시코비치 WSJ 특파원이 푸틴 대통령에게 사면 요청서를 작성하면서 그에게 직접 인터뷰를 요청했다는 소식이다. 페스코프 대변인은 "그러한 요청이 접수되면 고려할 것"이라며 "대통령은 외국 언론과 인터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의 인터뷰 요청이 성사될지 흥미롭다.
◇ 대규모 수감자 맞교환 이후에는
페스코프 대변인은 "해외, 특히 미국에 수감 중인 모든 우리 시민의 운명은 우리 관련 기관이 지속해서 관심을 두는 문제"라며 "(고국으로 데려오는) 작업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러시아 일간 이즈베스티야에 따르면 유력한 다음 교환 대상자로는 알렉산드르 빈니크가 꼽힌다. 그는 온라인 가상화폐 거래소를 운영하며 최대 90억달러(약 12조원) 규모 자금을 세탁 혐의로 미국에서 기소됐다. 형이 확정되지 않아 이번 교환 명단에서 제외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상대로는 마약 밀수 혐의로 체포된 주러 미국대사관의 전 직원 마크 포겔이다.
러시아 항공우주 관련 기밀을 취재한 반역 혐의로 징역 22년형을 선고받은 언론인 이반 사프로노프, 우크라이나 특수 군사작전(우크라이나 전쟁)을 비판한 저명한 사회학자 보리스 카가를리츠키 등의 추가 석방 여부도 관심사다.
페스코프 대변인은 이들에 대한 교환 논의가 있었는지 여부를 묻는 기자들에게 "협상의 비밀스러운 세부 내용은 공개할 수 없다"며 답변을 거부했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공항에서 석방자들을 만난 바이든 대통령은 이번 교환을 계기로 러시아와의 관계를 개선할 수 있을지를 묻는 질문에 “(내 여동생이 말했듯이) 당신의 말이 하나님의 귀에 닿을 것”이라고 답변했다. 이는 '간절하면 통한다'는 긍정적인 의미로 해석됐다.
그러나 페스코프 대변인은 수감자 교환과 우크라이나 관련 대화는 '완전히 다른 영역의 문제'라고 고개를 저었다.
제이크 설리반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도 2일 브리핑에서 "우리는 역사상 가장 크고 복잡한 맞교환을 성사했다"면서 그러나 "이번 협상과,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된 외교적 현안 사이에는 연관성이 없으며, 서로 다른 궤도에서 이뤄지는 사안"이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향후 전망에 대한 긍정적인 해석이 없는 것은 아니다. 드미트리 노비코프 러시아 고등경제대 교수는 "이번 교환이 러시아와 미국 관계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겠지만, 우크라이나 사태의 평화적 해결책을 찾는 맥락에서 긍정적"이라고 내다봤다.
◇이번 협상의 루저는 트럼프? 우크라이나?
이번 교환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이는 트럼프 전 대통령이다. 미 NYT 등 언론이 "복잡한 막후 협상을 거쳐 성사된 이번 맞교환은 바이든 대통령에게 외교적 승리"라고 의미를 부여하자, 그는 곧바로 "돈을 주고 데려온 것 아니냐"고 비판했다. 바이든 미 대통령은 그동안 여러 차례 억류된 미국인들을 모두 집으로 돌아오게 하겠다는 약속했는데, 트럼프 전 대통령은 바이든-해리스 행정부 측에게 선수를 빼앗긴 셈이 됐다.
도착한 수감자들과 의장대 사이를 걸어나오는 푸틴 대통령/사진출처:현지 매체 동영상 캡처
또다른 루저는 우크라이나와 젤렌스키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
스트라나.ua는 2일 우크라이나는 이번 교환을 단순히 러시아와 서방 간의 수감자 맞교환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세르게이 레쉬첸코 우크라이나 대통령실 고문은 "푸틴 대통령이 이번 교환을 통해 자신은 협상 가능하고,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라는 점을 보여줘, 서방이 자신과 우크라이나 평화협상에 임하도록 유도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만약, 바이든 행정부가 러시아와 평화협상에 나선다면, 트럼프 대선 캠프로서는 '당선될 경우 전쟁을 24시간 내에 끝내겠다'는 핵심 공약이 허공으로 사라지게 된다. 우크라이나로서는 해리스 민주당 후보의 대선 승리를 위해 바이든 행정부가 수감자 맞교환에 이어, 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식을 위해 마지막 외교적 성과에 '올인'하는 시나리오를 무시할 수 없다. 동맹국들에 대한 설득 가능성은 이미 이번 포로 교환을 통해 입증한 바 있다.
맞교환의 타이밍이 갖는 의미도 적지 않다. 이번 교환의 홍보 효과는 분명히 서방 측에 유리하다. 그렇다면 푸틴 대통령은 나발니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어차피 맞교환 협상이 지연된 상태에서 몇 달을 더 기다려 미국 대선이 끝난 뒤 진행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푸틴 대통령은 미 대선 전 교환을 선택했다. 이는 서방, 특히 바이든 미 행정부를 향한 매우 적극적인 신호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게다가 키예프(키이우)에서는 평화 협상 이야기가 최근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1일 프랑스 일간지 르 몽드와의 인터뷰에서 점령지 영토의 반환을 전제로 하지 않는 러시아와의 직접 협상 가능성을 언급했다. 나아가 영토 (양보) 문제는 국민투표를 통해 해결가능하다고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상조차 못했던 태도 변화다.
물론, 그의 협상 발언에 대한 다른 해석도 있다. '24시간 내 전쟁 종식'을 공언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대선 승리를 대비한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제2차 평화정상회의의 11월 개최를 추진하는 것은 미국 대선의 결과에 따라 차기 평화정상회의의 방향을 결정하겠다는 뜻으로, 그때 러시아와 직접 협상을 하든, 전쟁을 계속하든, 택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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