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색소음
황유원
지우개를 한번 갖다 댈 때마다
흰
공터가 생겨나고
거기 빛이 들어요
졸려요
엄마 품에 안기기엔 너무 나이 들어버렸으니
말랑말랑한 지우개 가루 만지며
잠이 들까요
방금 막 열심히 지운 지우개의 가루는
따스해요
건조기에 넣고 돌린 수건들처럼
졸려요 안고 있으면
꿈은 여전히 온갖 선과 색채 들로 가득하겠죠
꿈에서도 지우개가 필요할지
꿈에도 몰랐나요
몰랐나요
'존재는 소음으로 가득하다'라는 그 유명한 명제를?
몰라도 돼요
제가 방금 만든 거니까
건조기 돌아가는 소리 같은 생각들이 자꾸 쿵쾅거리며
머릿속을 들락거리는 밤
지우개를 손에 쥐고 잠을 자볼까봐요
꿈의 한쪽을 하얗게 지워주고 나올까봐요
너무 열심히 지우면 꿈 한쪽이 뜨거워지겠죠
그럼 전 또 집에 불이 난 꿈을 꿀 테고 ······
괜찮아요
시커메진 곳엔 다시 새 지우개를 갖다 대면 되고
다 타서 재가 된 곳을 위해서라면
지우개를 수백수천개라도 사 오면 될 테니
좋아요 좋아 다 못 지워도 좋아
어차피 다 지울 수 있을 리 없잖아
백색은 못 되더라도
어쩌면 백색소음에는 이를 수 있다는 믿음으로
밤새 흰 눈이라도 내린 듯
하얗게
하얗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