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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5. 묵상글 ( 성주간 월요일. - 사랑의 순환.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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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5. 성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사랑의 순환
오늘 주님께서는 삼백 데라리온 어치의 향유를 발에 바르는 마리아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아 그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지 않는다는 항의와 비판을
받으시는데 제 생각에 이 비판은 날카롭고 정의롭기도 하여 참 뼈아픕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마리아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으신 것은,
유다의 비판이 옳지 않기 때문이 아닐 것입니다.
주님도 같은 생각이셨을 겁니다.
그 비싼 향유를 당신 발에 바르는 것보다
그것으로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을 더 원하셨을 겁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우리가 믿는다면
주님께서 그 행위를 마리아에게 허용하신 것도
당신이 아니라 마리아를 위해서 허용하신 것일 겁니다.
사랑의 허용,
사랑의 수용,
사랑을 귀히 여김.
이것이 주님의 의도입니다.
적당한 비유가 아닐 수 있습니다만
예전의 저는 누가 무엇을 제게 선물하실 때 칼 같이 거절했습니다.
저의 가난을 위해서입니다.
견물생심처럼 선물을 받기 시작하면
작은 구멍이 봇물 터지듯 하게 할 것이기에
겁먹고 미리 그리고 아예 받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때 저는 주시는 분들의 사랑을 고려하고 배려할 사랑의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와 비교할 때 저의 가난은 많이 타락했지만
사랑의 여유는 많이 생겼습니다.
그 선물을 사랑으로 받아 나의 소유로 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돌려
사랑이 순환하게 하는 것 곧 돌고 돌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허용과 사랑의 수용과 사랑을 귀히 여김이
사랑의 순환이 되게 함이 저의 목적이라는 말입니다.
주님도 이런 마음이셨을 거라고 감히 생각합니다.
마리아의 발 씻음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신 주님은
이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사랑을 모범으로 보여주실 겁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곧 나에게 해준 것이라고 선언하실 것이고,
주님의 발을 씻어드린 마리아도 주님 돌아가신 뒤에는
주님 말씀대로 가난한 이들의 발을 주님 발 씻어드렸듯 씻어줬을 겁니다.
이럴 때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하나도 대립이 되지 않고 순환이 되는데
이 사랑의 순환을 오늘 주님과 마리아의 사랑에서 배우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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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5. 성주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느 마을에 두 농부가 있었습니다. 둘 다 곡물의 씨앗을 뿌리려고 준비하고 있었지요. 그리고 씨앗을 뿌리려는데, 곡물 씨앗 안에 다른 씨앗이 섞여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너무 많아서 일일이 가려내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한 농부는 “나는 다른 씨앗이 섞여 있는 이 씨앗을 뿌리지 않겠다.”라며 씨 뿌리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반면 다른 농부는 그럼에도 씨앗을 밭에 정성껏 뿌렸습니다. 시간이 지나, 곡물을 얻을 수 있었던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다른 씨앗이 섞여 있어도 씨앗을 뿌린 사람이 분명합니다.
밀과 가라지의 비유 말씀을 떠오르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가라지는 독보리라고 불리는 잡초로, 밀의 뿌리와 뒤엉켜 자라기 때문에 이 가라지를 뽑으면 밀까지 뽑히게 됩니다. 그래서 추수 때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우리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결점과 약점을 얼른 뽑아 버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불가능합니다. 부정적인 모든 것을 없애 버리려는 완벽주의자의 모습을 가지려고 하지만, 이 부정적인 모습도 받아들이면서 밀과 같은 좋은 모습을 성장시켜야 합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는 부족함을 가지고 있다면서 대충 막살면 될까요? 아닙니다. 그래서 회개가 필요한 것입니다. 자기의 부족함과 나약함을 인정하고 하느님께 되돌아갈 수 있는 용기 있는 겸손이 필요했습니다. 이런 겸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시각도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가라지를 억지로 뽑으려 하지 않습니다. 즉, 함부로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이 아닌, 있는 그대로 모습을 받아들이고 그를 위해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다행스럽게도 이 잡초의 힘을 빼앗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잡초를 솎아내고 그 힘을 빼앗습니다. 물론 전부 제거하거나 완전히 깨끗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 하느님께서 그 불순물을 제거해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 매달리며 사랑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 발에 향유를 붓는 마리아의 모습을 떠올려 보십시오. 유다는 이 모습을 이해하지 못하지요. 쓸데없는 낭비를 하고 있다고 판단합니다. 이렇게 사리사욕이 가득 찬 계산속에서 예수님을 은돈 서른 닢에 팔아넘기게 됩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그렇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회개하는 마음으로 예수님 발에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립니다.
여기서 보이는 것이 무엇입니까? 낭비일까요? 아닙니다. 사랑만이 보입니다. 이 사랑을 예수님께서는 받아주십니다. 주님 앞에서는 완벽주의자가 굳이 될 필요가 없습니다. 오로지 사랑의 삶만이 필요합니다.
오늘의 명언: 사람들은 행복을 찾아 헤매고, 행복은 누구의 손에든지 잡힐 만한 곳에 있다. 그러나 마음속에서 만족을 얻지 못하면 행복을 얻을 수 없다(호라티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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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5. 성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 온 집안에 향유냄새가 가득하였습니다.”(요한 12,3)
오늘 <복음>은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배타니아의 라자로와 마리아와 마르타 집에서 벌어졌던 잔치 중에 있었던 일을 전해줍니다.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드렸습니다. 그러자 온 집안에 향유냄새가 가득하였습니다.”(요한 12,3)
그렇습니다. 오늘도 내가 있는 우리 집, 우리 공동체 안에는 내 형제들이 부은 사랑의 향유가 가득합니다.
그런데 나는 왜, 그 사랑의 향기를 맡지 못하는 것일까요? 내 온몸을 적시고 흐르는 그 사랑의 향기를 왜, 알지 못하는 것일까요?
- 그것은 아직도 나를 치장하기 위한 향유를 필요로 하고 있는 까닭은 아닐까요? 아직도 자신을 감추어 둔 채, 다 부수지 않은 까닭이 아닐까요? 값비싼 것을 소모하고 낭비할 수 없다면서, 오히려 물질에 애착하고 있는 까닭은 아닐까요?
나는 왜 아직도 형제들의 땀과 눈물을 닦아주지 못하는 것일까요?
- 그것은 결코 닦아드릴 머리카락이 없어서가 아니라, 머리를 수구려 발까지 자신을 낮출 줄 모르는 까닭이 아닐까요? 혹 사랑이 없어, 사랑의 마음을 듣지 못하는 까닭이 아닐까요?
오늘도 옥함을 깨뜨려 향유를 쏟아 붓듯 내 발에 우리 주님과 형제들의 사랑이 쏟아지는데 나는 왜, 이 사랑을 보지 못하는 것일까요?
- 그것은 재치기로 코를 풀어내야만하듯, 내 영혼의 옥함에 불순물이 너무도 많은 까닭이 아닐까요? 아직도 구린내를 담고 있는 나를 깨부수지 못한 까닭이 아닐까요? 아직도 자신을 깨부수지 못한 나는,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까닭이 아닐까요?
왜 나는 이 숨 가쁜 사랑의 숨결을 듣지 못하는 것일까요? 형제들 가슴속 깊게 흐르는 사랑의 마음을 듣지 못하는 것일까요?
- 이토록 눈멀고 귀먹고 마음마저 굳어져버린 나는, 오늘도 자신과 물질을 버려서 예수님을 차지하는 마리아가 되기보다, 자신과 물질을 차지하여서 예수님을 버려버리는 유다가 되곤 합니다. 그러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깨어있어야 할 일입니다.
진정, 우리 삶의 가치는 무엇인가? 우리 삶의 잣대는 무엇인가? 사부 성 베네딕도는 말합니다. “그리스도보다 아무 것도 앞세우지 말라!” 그렇습니다. 신앙인에게는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하느님을 섬기는 것에 앞세울 수는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어떤 처신을 할 때에는 “내가 어떻게 해여 하나?” 하고 스스로에게 자문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주님께서는 제가 어떻게 하길 원하십니까?” 하고 물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는 온 집안, 온 공동체를 사랑의 향유로 가득 채워주십니다. 온 집안에 가득 퍼진 이 감미로운 사랑의 향기에 종일토록 취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내내 토록 찬미해야 할 일입니다. 그 향기 온 몸에 묻혀, 바다소라처럼 향 내음 되어 날릴 일입니다. 그 향내 온통 베인, 이 집안을 사랑할 일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의 향기가 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드렸다.”(요한 12,3)
주님!
옥함을 깨뜨리듯 제 자신을 부수고, 부서질수록 사랑의 향기 짙어가게 하소서.
향유를 쏟아 붓듯, 내 발에 쏟아지는 사랑을 보게 하소서.
제 영혼에 새겨진, 사랑의 숨 가쁜 소리를 듣게 하소서.
온 집안에 가득한, 감미로운 사랑의 향기에 내내도록 취하게 하소서.
온통 당신의 숨결이 베인, 이 집안을 사랑하게 하소서.
그 사랑의 향기 뿜어대는 당신 마음 닮아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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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5. 성주간 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은 모든 것을 내어 줍니다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좋은 사람, 아니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에게는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 주고도 더 주지 못해 안타까워합니다. 다 퍼주고도 아직도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심장이라도 내어주고 싶어 합니다.
마리아는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3키로 그램)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습니다. 그러자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습니다(요한12,3). 마리아는 예수님께 자기의 아주 소중한 것을 바쳐드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에게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냄새가 가득했다는 것은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집안에 가득한 것을 나타냅니다. 이럴 때는 냄새가 아니라 향기라고 해야 하는데……
그런데 이 상황을 바라보는 곱지 않은 눈이 있었습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은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지 않는가?”(요한12,5). 하며 향유의 값어치를 계산하였습니다. 향유를 붓는 행위를 존경과 사랑, 감사와 믿음의 표현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인간적으로 계산하였습니다. ‘부처 눈에는 부처가, 돼지의 눈에는 돼지가’ 보이는 법입니다. 돈주머니를 관리한다는 것은 그만큼 능력이 있었다는 얘긴데 그 좋은 머리를 자신의 잇속을 챙기기 위해서 사용하였습니다. 남모르게 돈을 가로채던 유다에게는 돈만 보일 뿐입니다. 결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사랑이거늘, 그 사랑을 외면한 채 약삭빠른 계산을 하였습니다. 그에게는 돈이 최고였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자신의 능력에 걸려 넘어져 예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우리 마음의 중심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관심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지금 나를 비춰주는 거울입니다. 가장 좋은 것을 주님께 바쳐드려야 함을 알지만, 아는 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큽니다. 나의 시간과 재능, 능력, 재물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에 기꺼이 사용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이미 주님께서 주신 것이고 주님께 되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유자가 아니라 관리자일 뿐입니다. 모두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드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었던 라자로를 살리심으로써 부활의 생명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나 수석 사제들은 라자로를 죽이기로 결의하였습니다. 라자로 때문에 많은 유다인들이 자기들로부터 떨어져 나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요한12,11).
살리는 일을 하시는 예수님 곁에서 죽음의 어둠이 싹트고 있었습니다. 좋은 일을 하는 곳에 기쁨이 넘쳐나야 하는 데 유다의 모습도 있고, 수석 사제들의 모습도 있었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생명의 문화’와 더불어 ‘죽음의 문화’가 함께 있습니다. 살리는 일에, 생명의 문화에 우리의 마음이 머물러야 합니다. 그러나 시기와 질투, 미움, 분노, 기득권을 누리려는 욕심이 있는 곳에 어둠의 그림자가 밀려옵니다. 반면 사랑의 마음이 있는 곳에 모두를 주고도 더 주고 싶은 마음이 커집니다. 마리아처럼 주님께 존경과 사랑으로 모두를 바칠 수 있는 날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이웃을 향한 사랑도 커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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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5. 성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전에 교구 사목국에서 일할 때입니다. 당시 서울대교구는 ‘복음화’를 중심으로 소공동체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교육담당 사제였기에 복음화에 대한 교육을 각 지구로 돌아다니면서 하였습니다. 교재는 반장학교 1 단계, 2단계, 3단계가 있었습니다. 시간이 많이 흘러서 모든 것이 기억나지 않지만 두 가지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신앙인들은 모두 예수님의 사랑을 배우고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사랑의 첫 번째는 ‘죄인까지 품어 주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악인들도 자기들의 자식은 사랑한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선한 사람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 때문에 더 기뻐하신다.’라고 하셨습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라고 하셨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죄인까지 품어주는 사랑이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예전에 ‘무조건’이라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가사 중에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은 무조건 무조건이야’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어미가 어찌 젖먹이 아이를 잃어버리겠느냐? 설령 어미가 자식을 잃어버릴지라도 나는 너희를 결코 잃지 않겠다.’ 예수님의 사랑은 조건이 없었습니다. 죄인일지라도, 이방인일지라도, 마귀 들린 사람일지라도, 아픈 사람일지라도 예수님께서는 모두 다 사랑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배반하여 다락방에 숨어 있을지라도 제자들에게 ‘성령과 평화’를 주셨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조건 없는 사랑이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세 번째는 ‘수난과 고통까지 감수하는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귀보다 가난을 택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택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성인과 성녀들은 바로 이런 사랑을 실천하였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수난과 고통까지 감수하는 사랑이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네 번째는 ‘끝까지 믿어 주는 사랑’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주님 제 이웃이 제게 잘못을 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충분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곱 번씩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어야 한다.” 비록 둘째 아들이 유산을 탕진하고 거지가 되어서 돌아 왔을지라도 아버지는 그 아들에게 반지를 주고, 잔치를 벌여 주는 사랑입니다. 우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게 해 주시는 사랑입니다. 우리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양털처럼 희게 해 주시는 사랑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끝까지 믿어주는 사랑이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다섯 번째는 ‘열정적인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참새도 둥지가 있고, 여우도 동굴이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누일 자리조차 없다.”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 끝까지 가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복음을 선포하여라.”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활화산처럼 터져 나오는 열정적인 사랑이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다른 하나는 복음화의 4가지 요소입니다. 첫 번째는 ‘말씀’입니다. 말씀이 중심이 되지 않으면 소공동체의 모임은 그저 독서 토론회가 될 수 있습니다. 말씀이 중심이 되지 않는 강론은 진정한 강론이 아니라 사제 개인의 넋두리가 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씀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두 번째는 ‘기도’입니다. 기도가 중심이 되지 않으면 소공동체의 모임은 곧 활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기도는 샘이 깊은 물과 같고, 기도는 뿌리 깊은 나무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밤을 새워 피땀 흘리면서 기도하셨습니다. 세 번째는 ‘지역’입니다. 지역이 중심이 되지 않으면 소공동체의 모임은 그저 신심단체 중에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구원되기를 바라셨습니다. 지역이 활성화 되면 본당은 더욱 활성화되기 마련입니다. 네 번째는 ‘활동’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실천이 없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은 하지만 실천하지 않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을 비난하셨습니다. 실천이 없는 소동동체 모임은 그저 친목단체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성주간을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을 묵상하며 복음화의 4가지 요소를 삶으로 실천하는 성주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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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5. 성주간 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마리아가 향유를 주님의 발에 붓습니다.
그곳에 함께 있던 마르타도, 라자로도, 그 누구도 마리아의 행동을 문제 삼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나 봅니다. 주님께서 수난의 길을 가실 것을 말입니다.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진짜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의 아픔과 상처까지 사랑할 수 있을 때 즉 어두운 부분마저 사랑할 수 있을 때, 그때 비로소 진짜 사랑이 시작된다고 합니다.
밝은 곳을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좋은 모습을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처를 사랑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아픔을 사랑하기는 더 어렵습니다.
가만히 앉아 마르타의 마음을 헤아려 봅니다. 라자로의 마음을 헤아려 봅니다. 그리고 향유를 붓고 젖은 눈시울로 주님의 발을 닦았던 마리아의 마음을 헤아려 봅니다.
그냥 가슴 한편이 저려옵니다. 사랑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요. 십자가의 길을 응원하는 마음 말입니다.
이 세 명과 대비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카리옷 유다와 수석 사제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만을 생각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척하면서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있습니다.
사랑과 반대되는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무엇이 진정한 사랑이고 무엇이 사랑을 위장한 이기심인지 말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십자가의 길을 준비하시고 있는 우리 주님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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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 거래
저는 가끔 중고거래를 합니다.
저렴한 가격에
생각지도 못한 좋은 물건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구두 한 켤레를 중고거래 했습니다.
여차저차 해서….
편한 구두가 필요했습니다.
구두를 가지고 온 분께 물었습니다.
‘구두가 아주 멀쩡하네요.’
그분은 답했습니다.
‘제게는 더 이상 신을 일이 없습니다. 외근을 주로 하는 직장으로 옮겼거든요.’
그분에게 더 이상 그 구두는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게는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의미를 어떻게 지니느냐에 따라 그 소중함도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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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5. 성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주님의 종
-예수님 살기, 예수님 닮기-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라?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시편27,1)
오늘 성주간 월요일 복음의 주인공은 단연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쏟아 부은 사랑의 관상가 마리아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주 찾았던 환대의 집, 베타니아집에 살았던 마르타, 마리아, 라자로 삼남매였고, 예수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고 또 예수님을 참으로 사랑했던 삼남매였습니다. 이중 마리아의 주님의 종,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가장 뛰어납니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로다.”
화답송 후렴의 고백은 예수님께 대한 마리아는 물론 우리의 고백처럼 느껴집니다. 사랑의 관상가 마리아가 상징하는 바 참으로 주님의 종 예수님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입니다. 제 옛 자작시 “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다”는 그대로 주님의 종 예수님께 대한 마리아의 사랑 고백처럼 생각됩니다.
“당신이 꽃을 좋아하면
당신의 꽃이
당신이 별을 좋아하며
당신의 별이
당신이 하늘을 좋아하며
당신의 하늘이
되고 싶다
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다”-1998.12.25.
은총의 성주간 사랑의 관상가 마리아가 되어 사시기 바랍니다. 무려 26년이 지났어도 참 많이 인용했던 시요,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 대한 마리아의 사랑도 분명 이러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주님의 종, 예수님의 죽음을 예견한 듯 마리아는 사랑의 향유를 붓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립니다. 말그대로 한폭의 살아 있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화같은 장면입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그러자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했다.’
순 나르드 향유 냄새가 상징하는 바, 마리아의 향기, 사랑의 향기, 존재의 향기, 겸손의 향기 같습니다. “난같은 당신”이란 시도 생각납니다. 바로 마리아가 그러합니다.
“당신 존재의 향기
사랑의 향기
하나만으로 충분합니다.
있음자체만으로
향기롭고 평화로운
난같은 당신, 마리아입니다.”-1998.3.37
흡사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경청하던 사랑의 관상가 마리아가, 또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드리던 예수님의 겸손한 모습이 연상되는 참 거룩하고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의 “주님의 종의 첫째 노래”가 말하는 주님의 종은 그대로 마리아가 참으로 사랑했던 예수님이심이 환히 계시되는 장면입니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참으로 하느님의 전폭적 사랑과 신뢰를 받았던 주님의 종, 예수님에 대한 하느님의 고백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종, 예수님의 모습은 마리아는 물론 우리 사랑의 관상가의 삶을 지향하는 모든 이들의 이상적 인간상입니다.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그는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는 일 없이, 공정을 펴리라.’
한결같이 자비롭고 섬세하고, 성실하고 공정하고, 고요하고 자상하고, 온유하고 겸손한 하느님을 고스란히 닮은 주님의 종, 예수님의 모습이자 믿는 모든 사랑의 관상가들이 닮고 싶은 모습입니다. 바로 이런 주님의 종을 참으로 사랑하시는 다음 하느님의 모습도 용기백배 힘을 줍니다.
‘하늘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펼치신 분, 땅과 거기에서 자라는 온갖 것들을 펴신 분, 그곳에 사는 백성에게 목숨을, 그 위를 걸어 다니는 사람들에게 숨을 넣어 주신 분,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 이런 하느님을 잊어버려, 잃어버려 자초한 인간의 불행이요 비극입니다. 새삼 이런 하느님을 경외하고 흠숭하고 찬미하고 감사함이 우리 인간의 마땅한 도리이며 살길임을 깨닫습니다. 사랑의 관상가, 신비가, 영성가로 불림 받은 우리의 보편적 성소임을 깨닫습니다. 이어 사명을 부여받는 주님의 종은 예수님을 비롯한 모든 주님의 종들, 세례받아 주님의 종, 주님의 자녀가, 복음의 일꾼이 된 우리 모두를 향합니다.
“주님인 내가 의로움으로 너를 부르고, 네 손을 붙잡아 주었다. 내가 너를 빚어 만들어, 백성을 위한 계약이 되고, 민족들의 빛이 되게 하였으니,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기 위함이다.”
우리를 무지와 허무에서 해방하는 복음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바로 이런 세상의 빛이신 주님의 종 예수님을 모심으로 무지의 눈이 열려 보게 되고, 무지의 감옥, 무지의 어둠, 허무의 감방에서 해방되어 우리 역시 주님의 종이 되고 참 자유인이 됨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예수님을 닮아 주님의 종이 되어 살게 합니다.
바로 이런 주님의 종으로서 예수님을 꿰뚫어 본 주님의 종, 사랑의 관상가가 오늘 복음의 주인공 마리아입니다. 누구보다 주님의 종으로서 예수님의 신원을 깊이 깨달아 알았고 이심전심 참으로 마리아를 사랑했던 예수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의 최측근에 속했으면서도 장차 예수님을 배신하여 팔아넘길 제자 유다 이스카리옷과는 극명히 대조됩니다. 말그대로 영적으로 눈먼 유물론자 유다입니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사랑에 눈멀었기에 이런 계산이요 판단입니다. 사랑은 계산하지 않습니다. 어찌 사랑을 계산할 수 있겠는지요. 유다가 보기에 마리아는 참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비쳤을지 모르나 예수님은 물론 우리는 압니다. 그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임을! 그는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돈을 가로채곤 했다 합니다.
다음 예수님의 분별의 지혜가 빛을 발하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참으로 사랑했고 자신이 참으로 사랑했던 사랑의 관상가 마리아를 더 이상 제발 괴롭히지 말라 당부하십니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하여라.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 않을 것이다.”
주변에 어른 거리는 죽음의 그림자입니다. 수석 사제들은 라자로를 죽이기로 결의했고, 주님의 종 예수님의 생명도 풍전등화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마리아의 사랑의 향유 추억을 간직하고 주님의 종 예수님을 닮은 향기로운 주님의 종으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은 늘 우리 곁에 있다 했습니다. 가난한 이들 안에 늘 현존하는 주님이시오, 가난한 이들을 통해 늘 만나는 주님의 종, 예수님을 잊지 말자는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마리아처럼 사랑의 관상가. 주님의 종, 주님의 빛이 되어 살게 하십니다.
“저는 산 이들의 땅에서,
주님의 어지심을 보리라 믿나이다.
주님께 바라라. 힘내어 마음을 굳게 가져라.
주님께 바라라.”(시편27,13-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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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5. 성주간 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랑>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요한 12,8)
나 있는
지금 사랑
언제든 사랑
나 머문
여기 사랑
어디든 사랑
내 앞에
당신 사랑
누구든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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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5. 성주간 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베타니아로 가셨다. 그곳에는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가 살고 있었다.(요한 12,1)
라자로의 부활에 대한 기억을 깊이 새겨 주시다
당신 부활의 영광을 확신하는 예수님께서는 먼저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베타니아로 가셨습니다. 그 고을에는 당신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 다음 그분은 당신께서 고난을 겪고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실 예루살렘으로 가셨습니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신 것은 그곳에서 죽기 위해서였고, 베타니아로 가신 것은 라자로의 부활이 모든 이의 기억에 더욱 깊이 새겨지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존자 베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5 만물이 존재의 평등을 공유하고 있다
신적인 존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뭔가를 얻겠다고 자신을 벗어나는 법이 없습니다. 그는 언제나 자신 속에 머무릅니다. 어떤 피조물이 이 신적인 존재로부터 무언가를 얻고자 한다면, 자신의 중심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인간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지만, 이와 동시에 모든 피조물에 대해서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전하여라" 하느님은 자신의 존재를 모든 피조물에게 골고루 부어주셨습니다. 하느님은 피조물이 저마다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 고루고루 자신의 존재를 부어주셨습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을 똑같이 사랑하고,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것을 똑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더할 나위 없는 가르침입니다. 설령 어떤 사람들이 인척 관계나 우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우리와 더 가까워진다고 해도, 우리는 만물을 대할 때와 똑같은 우정으로 그들을 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궁극적 선이신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만물을 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143)
✝️ 월요일 거룩한 독서(렉시오디비나)의 날✝️
마태 28,1-10.16-20
부활하시다
안식일이 지나고 주간 첫날이 밝아 올 무렵,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러 갔다.
그런데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났다. 그리고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더니 무덤으로 다가가 돌을 옆으로 굴리고서는 그 위에 앉는 것이었다.
그의 모습은 번개 같고 옷은 눈처럼 희었다.
무덤을 경비하던 자들은 천사를 보고 두려워 떨다가 까무러쳤다.
그때에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찾는 줄을 나는 안다.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말씀하신 대로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와서 그분께서 누워 계셨던 곳을 보아라.
그러니 서둘러 그분의 제자들에게 가서 이렇게 일러라.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이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너희에게 알리는 말이다.”
그 여자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다.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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