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운 사명을 받은 엘리야
왕상 19:15-21
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를 통하여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16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17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18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19 엘리야가 거기서 떠나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만나니 그가 열두 겨릿소를 앞세우고 밭을 가는데 자기는 열두째 겨릿소와 함께 있더라 엘리야가 그리로 건너가서 겉옷을 그의 위에 던졌더니
20 그가 소를 버리고 엘리야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청하건대 나를 내 부모와 입맞추게 하소서 그리한 후에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돌아가라 내가 네게 어떻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21 엘리사가 그를 떠나 돌아가서 한 겨릿소를 가져다가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어 먹게 하고 일어나 엘리야를 따르며 수종들었더라
왕상 19:15-21 / 주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왔던 길로 되돌아가 다메섹 광야에 머물러 있어라. 그곳의 은신처에서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으로 삼고, 16)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삼고, 아벨므흘라 마을에 사는 사람으로 사밧의 아들인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네 후계자로 삼아라. 17) 하사엘의 칼을 피하여 살아 남은 자는 예후가 죽일 것이고, 예후의 칼을 피하여 살아남은 자는 엘리사가 죽일 것이다. 18) 그렇더라도 나는 이스라엘에서 바알에게 무릎 꿇거나 경배하지도 않고, 바알 신상에게 입맞추지도 않은 사람 7천명을 남겨 두겠다.' 19) [엘리사의 소명] 엘리야는 호렙산에서 다메섹 광야까지 480여 킬로미터를 가다가 도중에 있는 아벨므흘라 마을에서 엘리사를 만났다. 그는 마침 11명의 종들과 밭을 갈고 있었다. 모두 열두 겨리의 황소로 밭을 갈았는데 엘리사는 맨 뒤에서 열두번째의 쟁기를 붙잡고 있었다. 엘리야는 그에게 가까이 가서 자기가 입고 있던 예언자의 겉옷을 벗어 그에게 걸쳐주었다. 20) 엘리사가 즉시 소를 버리고 엘리야에게 달려와 말하였다. `제가 우선 부모님께 작별인사를 드리고 와서 선생님을 따라가게 해주십시오' 엘리야가 허락하였다. `어서 다녀오게. 하지만 내가 자네에게 한 일을 똑똑히 기억하게.' 21) 엘리사는 방금 세워 두었던 황소 중 두 마리를 끌고 가서 잡고, 쟁기를 부수어 불을 지폈다. 그는 고기를 삶아 이웃 사람들에게 대접하면서 작별의 식사를 하였다. 그런 다음에 엘리야를 따라가 그를 섬기며 제자가 되었다. 이렇게 그는 옛 생활을 청산하고 예언자로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다.
하나님은 이제 한 세대를 접으시고 다른 세대를 시작하십니다. 아람의 하사엘과 이스라엘의 예후, 그리고 엘리야와 후계자 엘리사 시대입니다.
새로운 사명을 주신 하나님(15-18) 여호와께서 다메섹으로 가서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또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되게 하라는 것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후계자로 삼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 사람은 서로 이해관계가 다르고 입장이 상충되었지만 하나님께서 이들을 세워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 중에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았던 신실한 칠천 명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이끌어갈 사람들입니다. 믿음을 지킨 사람이 엘리야 혼자가 아님을 깨우쳐 주셨고 큰 격려와 위로가 되었습니다.
엘리야의 후계자를 부르신 하나님(19-21) 엘리야는 밭을 갈고 있던 엘리사를 만나 겉옷을 그의 위에 던졌습니다. 선지자의 겉옷을 사람 위에 던진다는 것은 그의 직책의 능력과 권위를 상대방에게 건네줌으로 후계자를 삼겠다는 표시였습니다. 엘리사는 즉시 모든 것을 버리고 엘리야를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엘리사는 먼저 그의 가족과 작별을 고하는 의식을 거행했습니다. 즉, 부모에게 입을 맞추고 이제까지 쓰던 농기구를 불사르고 소 한 겨리를 잡아 그것으로 고향 사람들과 함께 잔치를 베푼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확고히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어떻게 응답하고 있습니까?
적용: 하나님의 구속사를 따라가 보면 반복되는 인간의 반역에 공의로운 심판이 어김없이 내려짐을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 구원의 역사를 남은 자들을 통해서 이루십니다. 그 수요는 적을지 몰라도 거룩한 씨 남은 자들을 통해서 구속사를 이어가십니다. 거룩한 씨 그루터기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셨을 때 그들도 부모와 당시 자신들의 생업이었던 배와 그물을 버리고 부르심에 응답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가 부르심에 응답하고자 할 때 이전 것을 버리지 않고는 응답할 수가 없습니다.
< 설 교 >
엘리야와 엘리사, 닮음(imitation)의 신앙 교육
왕상19:19-21; 왕하2:1-11·15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모두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엘리야’에 관해서 살펴보는 세 번째 시간입니다. 첫 번째는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의 제사장 850명과 겨뤄 하나님이 참 신임을 증명했던 부분을 살펴 보았고, 두 번째는 갈멜산 대결 이후 ‘이세벨’의 겁박에 로뎀 나무 아래서 죽기를 구하는 엘리야의 탈진과 영적 침체를 통해, 왜 이런 영적 침체를 겪게 되는지 그리고 이런 영적 침체를 하나님은 어떻게 회복하시는지 살펴 보았고, 오늘은 엘리야의 마지막 사역, ‘믿음의 후계자, 믿음의 후대를 이을 엘리사’를 세우는 부분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엘리야’는 최선을 다해 사명을 감당할 뿐만 아니라, 그 사역을 계승할 사람을 세우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함께 읽었던 15절 말씀에서 증거하고 있는 것처럼, “엘리야의 능력이 엘리사 위에 내림”으로 마침내 엘리야의 사역은 끝마쳐지게 됩니다. 저는 이와 같은 일이 살림 공동체 안에, 그리고 저희의 가정 안에서 저희의 자녀들에게 일어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아울러 이 일이야말로 저희 부모들이 감당해야 할 가장 중요하고도 중요한 사역임을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중국 송나라 때 나온, <벽암록, 벽암집, Blue Cliff Record>에 보면,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줄탁동시’를 가장 잘 설명하는 이미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병아리는 알 안에서 껍질을 깨야만 합니다. 세 시간 안에 껍질 밖으로 나오지 못하면 질식하게 되니, 병아리는 사력을 다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 귀를 세우고 그 소리를 기다려 온 어미 닭은, 병아리가 쪼아 대는 부위를 자신의 부리로 밖에서 쪼아 줍니다. 이처럼 병아리가 안에서 쪼는 것을 ‘줄(啐)’이라 하고, 어미 닭이 화답하는 것을 ‘탁(啄)’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줄’과 ‘탁’이 동시에 일어나야 생명은 온전히 탄생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스승과 제자의 관계도, 부모와 자녀의 관계도, 신앙 안에서의 모든 관계도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줄탁동시’의 가장 좋은 예가 바로 ‘엘리야’와 ‘엘리사’의 관계입니다. 이 둘의 관계처럼, 주님과 우리의 관계가 이런 관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신앙은 어느 날 아침에 불현듯 말씀을 깨닫게 되거나 신앙이 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쪽에서 병아리처럼 알을 쪼는 ‘줄’이 있어야만 합니다. 말씀을 읽고, 듣고, 공부하고, 묵상하고, 암송하기를 쉬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숨을 쉬지 못하고, 죽을 것 같은 심정으로 매달려야만 합니다. 그렇게 순종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탁’ 하십니다. 그런 살림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와 땔래야 뗄 수 없는 두 사람이 있는데 그게 바로 ‘아합과 이세벨’입니다. ‘아합’은 북 이스라엘의 7번째 왕으로, 그의 아버지 ‘오므리’로부터 시작된 ‘오므리 왕조’의 두 번째 왕이었지만, 북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가장 타락했을 때,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왕이었습니다. 이 일의 가장 결정적인 조력자요 협력자가 ‘이세벨’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의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하나님은 구약 전체에서 가장 뛰어난 두 사람의 예언자를 통해서 ‘아합과 이세벨’과 맞서게 하시고, 또 그들을 깨우쳐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시는데 그게 바로 ‘엘리야와 엘리사’입니다.
갈멜산의 싸움 이후에 아합도, 이세벨도, 이스라엘도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아합도, 이세벨도, 더더욱 이스라엘도 결코 포기하시지 않으시고, 끈질긴 관심과 사랑을 갖고서 그들을 대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버리고 나 몰라라 하는데, 하나님은 여전히 당신의 자녀에게 마음을 두시고, 그들을 참을성 있게 인도하시기를 원하시고, 참아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다림만 생각하는데, 하나님의 기다림도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이 바로 하나님의 기다림의 결과로 주어지는 날입니다.
‘엘리사’는 북 이스라엘의 9대왕 ‘요람’으로부터 ‘예후(주전842-745년, 거의 100년)’, ‘여호아하스’ 그리고 12대왕 ‘요아스’까지 4대에 걸쳐 무려 50여년 동안 활동한 예언자로 ‘엘리야’의 후계자입니다. 그의 이름 ‘엘리사’의 뜻은 ‘하나님은 구원이시다’라는 뜻이며, 그의 아버지는 ‘아벨므홀라의 사밧’입니다(왕상19:16). ‘엘리야와 엘리사’가 처음 만난 상황을 성서는 이렇게 증거합니다. 열왕기상19:19-21절입니다. “엘리야가 그 곳을 떠나서, 길을 가다가, 사밧의 아들 엘리사와 마주쳤다. 엘리사는 열두 겨릿소를 앞세우고 밭을 갈고 있었다. 열한 겨리를 앞세우고, 그는 열두째 겨리를 끌고서, 밭을 갈고 있었다. 엘리야가 엘리사의 곁으로 지나가면서, 자기의 외투를 그에게 던져 주었다.…그런 다음에, 엘리사는 곧 엘리야를 따라가서, 그의 제자가 되었다.”
오늘 말씀은 ‘호렙산’의 사건과 연결되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탈진과 영적 침체 가운데 있는 ‘엘리야’를 먹이시고 육적으로 회복하신 하나님은 그를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친히 만나심으로 그의 소명을 새롭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부탁하십니다. 열왕기상19:15-16절입니다. “…너는 돌이켜, 광야 길로 해서 다마스쿠스로 가거라. 거기에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서, 시리아의 왕으로 세우고,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라. 그리고 아벨므홀라 출신인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서, 네 뒤를 이을 예언자로 세워라.” 지도를 보시면 ‘엘리야’가 가야 할 길은 참으로 먼 길입니다. 엘리야는 지금 남 유다의 최남단, 광야(네게브)인 ‘호렙산’에 있고, ‘시리아의 다메섹’까지, 거기서 다시 ‘아벨므홀라’까지 가야 합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어떻습니까? 아무런 불평도, 핑계도, 왜 그 일을 왜 해야 하는지 이유도 묻지 않고 다만 순종합니다. 그렇게 호렙을 출발한 엘리야는 ‘아벨므홀라’까지 이르러서 ‘엘리사’를 만납니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만나는 장면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엘리사는 ‘열두 겨릿소’를 가지고 있을 정도의 부유한 사람 같습니다. ‘겨릿(쟁기)소’는 ‘소 두 마리가 쟁기’를 끄는 것을 가리켜서 ‘겨릿소’라고 하는데, 보통 사람의 집에는 한 겨릿소도 겨우 있을 형편인데, 엘리사의 집은 열두 겨릿소가 있었으니 그가 얼마나 부유한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그가 맨 마지막 ‘열두째 겨리를 끌고서 밭을 갈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엘리사는 자신의 ‘부’를 앞세워 일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그의 ‘부, 상황’이 어떠하든지 상관 없이 그는 자신의 삶에서 최선을 다해 일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일하는 즐거움을 알고, 그 일을 통한 리더십을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그의 이러한 성품은 그 뒤에도 나타납니다.
엘리사를 만난 엘리야는 기름을 붓지 않고, 자신(예언자)의 상징인 ‘외투’를 벗어 줍니다. 엘리야의 외투를 받아 든 엘리사가 무엇을 합니까? 21절입니다. “겨릿소를 잡고, 소가 메던 멍에를 불살라서 그 고기를 삶고, 그것을 백성에게 주어서 먹게 합니다. 그리고 ‘곧’ 엘리야를 따라 나섭니다.” 그의 바람대로 부모에게 작별인사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뒤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아예 뒤 돌아볼 수 있는 모든 것을 태워 없애버립니다. 그리고 엘리야를 따라 나서기 전에 무엇을 합니까? 함께 있었던 동료들, 분명 그들은 엘리사의 수하에 있던 사람들일 겁니다. 엘리사는 그들을 지극 정성을 다해,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겨릿소를 잡아 그들을 섬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엘리사의 이런 행동은 누가복음서의 말씀과 비교가 됩니다. 예수님이 길을 지나시면서 한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그의 대답입니다. “[주님,] 내가 먼저 가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눅9:59) 다음 사람입니다. “주님, 내가 주님을 따라가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집안 식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해주십시오.”(눅9:61) 이 모든 상황을 가리켜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눅 9:62) 그렇습니다. 그러나 엘리사의 모습은 전혀 그들과 같지가 않습니다. 엘리사는 아예 그 손에 있는 쟁기와 쟁기를 끄는 겨릿소까지 처리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따르는 일, 하나님을 섬기는 일꾼에게 어떤 조건도, 어떤 핑계도 있을 수는 없습니다.
또 한 가지 기억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엘리야’가 당하는 핍박과 고난을 엘리사가 모를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때문에 ‘엘리야’를 따른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일이었습니까? 나도 고난과 핍박을 당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전혀 그 일에 대해서는 생각하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참으로 용기 있는 사람이었고, 하나님께 대한 충성심이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과연 ‘엘리사’는 “…양쪽에 다리를 걸치고 머뭇거리고 있는, 주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기고 있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엘리야와 엘리사’의 사건에서 한 가지 풀리지 않는 아이러니가 하나 있습니다. 열왕기상19장에서 ‘엘리야와 엘리사’가 만납니다. 그리고 ‘엘리사’가 ‘엘리야’의 제자가 됩니다. 그런데 그 이후로 엘리야가 승천하기 전까지 엘리야에 관한 기록은 있지만, ‘엘리사’에 대한 기록은 무려 8년 동안이나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방금 살펴 본 것처럼, ‘엘리사’는 이미 준비된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은 8년을 더 기다리게 하십니다.
저는 이 기간이 ‘엘리사에게 필요했던 신앙 훈련의 기간’이었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모두가 부름 받았다고 곧바로 사역을 시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도 부름 받고 3년을 배웠던 것처럼, 그리고 성령의 충만함과 기름부음으로 사역을 시작했던 것처럼, 이 기간 동안 ‘엘리사’는 자신의 스승 ‘엘리야’의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엘리야’를 배웁니다. 언제까지입니까? 15절입니다. “그 때에 여리고에서부터 따라 온 예언자 수련생들이 강 건너에서 이 광경을 보고는 “엘리야의 능력이 엘리사 위에 내렸다” 하고 말하면서, 엘리사를 맞으러 나와, 땅에 엎드려 절을 하였다.”
이렇게 배운 ‘엘리사’는 마치 자신의 스승 ‘엘리야’의 발자취를 따라 가듯, ‘엘리야’가 행한 기적을 거의 동일하게 행합니다. 열왕기하2:14절로 보면, 엘리야가 하늘로 들려 가면서 떨어진 ‘엘리야’의 옷을 주워 마치 마지막 요단 강을 건너며 엘리야가 했던 것처럼 요단 강물을 쳐서 갈라지게 했고, 마치 사르밧 과부의 기름이 떨어지지 않게 했던 것처럼, 가난한 과부의 기름이 떨어지지 않게 하는 기적(왕하4장)을 베풀어 그녀의 빚을 갚게 했고, 사르밧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린 것처럼 수넴 여인의 죽은 아들을 엘리야와 동일한 방법으로 살려 냈고, 적국 시리아 왕의 궁궐과 침실에서 이루어지는 군사 작전을 다 듣고 ‘시리아, 아람’ 군대의 공격에 맞서 불 말과 불 수레로 보호했던 것도 엘리야와 동일한 기적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그 비밀이 열왕기하 2장 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3번이나 작별 인사를 합니다. 첫째는 길갈이고, 둘째는 벧엘이고, 셋째는 여리고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사’는 마지막 요단 강까지 떠나지 않습니다. 무엇입니까? ‘엘리사’는 자신의 고향에서 겨릿소로 밭을 갈 때부터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성실함이 몸에 배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엘리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스승을 따르는 ‘성실함과 겸손함’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엘리사’가 엘리야를 놓아 보내지 못했을까요? 그에게는 필요한 게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9절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데려가시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해주기를 바라느냐?”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스승님이 가지고 계신 능력을 제가 갑절로 받기를 바랍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 엘리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요청합니다. “스승님이 가지고 계신 능력을 제가 갑절로 받기를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엘리사’는 자신의 능력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없음을 누구 보다 더 잘 알았고, 스승인 엘리야의 능력을 구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일은 성실함, 겸손함 그리고 나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 ‘엘리야’가 ‘엘리사’를 떼어 내려고 하는 이유는 불분명하다고 말씀 드렸지만, 분명한 것 하나는 그렇게도 만류하는 스승 ‘엘리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엘리사’가 스승 ‘엘리야’를 마지막까지 따랐던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 수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스승 엘리야의 능력, 마음, 영감을 얻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신도 ‘스승 엘리야’처럼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줄탁동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와 같은 ‘엘리야와 엘리사’의 관계는 사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람인 오늘 저와 여러분이 배워야 할 모범이고, 하나님은 이런 관계, ‘줄’과 ‘탁’의 관계를 통해서 교회 공동체를 유지 보존하시고 부흥케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스승인신 예수 그리스도를 배워 살아가는 ‘제자 공동체’입니다. 이 훈련을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3년 동안 실시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산에 올라가셔서, 원하시는 사람들을 부르시니, 그들이 예수께로 나아왔다. 예수께서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또한 사도라고 이름하셨다.] 이것은, 예수께서 그들을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그들을 내보내어서 말씀을 전파하게 하시며,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막 3:13-15)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와 ‘또 그들을 내보내어서’입니다. 엘리야에게 엘리사가 지지와 격려가 되었던 것처럼, 구원 사역을 감당하는 예수님에게도 지지와 격려자가 필요했는데, 그게 바로 예수님이 부르신 열두 명의 ‘제자공동체’였습니다. ‘함께 있음으로’ 주님은 그들을 훈련하셨고, 주님은 그들을 세상으로 ‘파송하심으로 훈련을 완성’하십니다. 이 둘의 균형이 이뤄져야만 합니다. 이 둘의 균형이 맞지 않으면 몸은 건강을 잃은 것처럼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Input과 output의 균형이 맞아야만 합니다. 그래야 건강한 공동체입니다. 이 일을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이 관계 안에서 이뤄졌던 것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인 것과 같이, 여러분은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고전11:1 빌3:17)
사도 바울이 말하려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신앙 공동체 안에서 ‘닮음, 본받음(imitation)’을 통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뤄간다는 것입니다. 마치 어린 아이가 부모를 배우는 것과도 같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부모처럼 말하고, 부모처럼 생각하고, 부모처럼 걷는 게 참으로 신기하기까지 한데, 신앙도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저희가 지금 계획하고 있는 ‘Home이나 가정교회’도 이와 같습니다. ‘Home이나 가정교회’을 통해서 여러분이 배울 분들을 여러분 가까이에 두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분들, 목자들을 배우시고, 목자들을 뛰어 넘으십시오. 목자들은 지체들을 배우시고, 주님처럼 되십시오. 서로 배우고, 서로 성숙해서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말씀 증거 초기에 사자성어로 시작했으니 마지막도 사자성어로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줄탁동시’가 서로 닮아 가려는 노력 하에 신앙이 발전하고 성숙되는 것이라면, 이에 반하는 신앙의 모습을 가장 잘 설명하는 사자성어가 ‘각자도생’(各自圖生)입니다. ‘각자도생’, ‘각자 알아서 지키고 스스로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이런 교회, 이런 사회를 아름다운 사회, 교회라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세월호를 겪으면서 이렇게는 도저히 안되겠다, 배는 기울어져 가는데, 배에 물은 차 오는데도 불구하고 선장이나 선원들은 살려고 배를 빠져 나가는데 선내방송에서는 ‘배에 움직이지 말고 그냥 계세요.’라는 말이 너무나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했던 게 바로 ‘각자도생, 각자 알아서 지키고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메르스’를 겪으면서 ‘각자도생’하려고 했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저는 무능한 정부 편을 들거나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정말 이 정부는 ‘백성을 생각하고,백성을 두려워하는 정부’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 ‘각자도생’은 아닙니다. 각자도생의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각자고생’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아름다운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서로 다르지만 그 다름을 넘어 기꺼이 닮으려는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공동체를 섬기는 목사가 예수님의 인격과 성품을 닮으려고 하고, 성도들은 목회자를 삶과 신앙의 모델로 생각하고 서로를 위한 ‘닮음’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노력 할 때, 교회는 부흥하고,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 세워져 갈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이민1.5세와 2세들이 1세대들을 존경하고 그들을 기꺼이 닮으려고 하는 교회가 아름다운 교회입니다. 관계가 단절되고, 닮음이 중단될 때, 교회는 더 이상 교회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교회에는 더 이상 생명의 소리는 들리지 않고, 다투고 분쟁하는 소리만 들리게 될 것입니다. 서로를 닮아감으로 주님을 닮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선택과 결정
왕상 19:19-21
우리의 일생은 선택과 결단의 연속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매 순간 끊임없이 선택하고 결정해야 합니다. 때로 우리가 결정한 선택이 인생에 매우 중대한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내린 한순간의 잘못된 선택이 인류의 운명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듯이, 순간의 선택이 우리의 삶을 결정짓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은 구약의 위대한 선지자였던 엘리사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믿음으로 선택하고 결단의 모습을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일생동안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선택하고 결단하여 언제나 승리하는 삶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1.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사람
하나님은 엘리야를 호렙산으로 인도하시고 세미한 음성으로 새로운 명령을 주십니다. 제자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하나님의 선지자로 세우라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하나님의 명을 받아 찾아왔을 그때 엘리사는 소를 몰며 열심히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이 부르시는 사람은 자신에게 맡겨진 현재의 자리에서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는 이드로의 양떼를 돌보고 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라는 소명을 받았습니다. 기드온은 타작마당에서 일하고 있을 때 미디안 족속들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구하라는 소명을 받았습니다. 다윗 역시 베들레헴에서 양떼를 돌보고 있을 때 이스라엘 왕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목자로서 뽕나무를 재배하던 중 부름을 받았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도 고기를 잡고 있을 때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고, 즉시 그물과 배와 가족을 버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평소 자신의 삶에 성실한 사람, 자기 일에 충실한 사람,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찾고 부르십니다. 성실하게 사는 삶의 현장이 바로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장소입니다. 지금 있는 자리에서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성공은 성실과 근면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 NGO단체 힘펀드(HEMEFUND) 대표 서우석 집사는 16살 때 미국으로 건너가 의료선교의 꿈을 안고 의대에 진학했지만, 어려워진 가정 형편 때문에 그만두고 사업의 실패를 거듭하다 40살에 미군에 지원하여 의무병으로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신발이 없어서 상처난 맨 발로 3일을 걸어서 군부대를 찾아왔던 할아버지와 맨발로 다니다 못에 찔려 피를 흘리고 있는 한 청년을 만납니다. 그리고 짝짝이 군화를 신고 있어 발의 통증을 호소하는 한 군인을 만나게 되는데, 그들 모두 많은 가족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형편 때문에 신발 한 켤레조차 살 수 없었습니다. 그는 미군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아다니면서 헌 군화와 운동화를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부정적으로 보던 미군 동료들이 참여하기 시작하더니, 군부대 전체가 나서서 적극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또 그의 블로그를 보고 미국에서 엄청난 양의 신발이 전달되기 시작해 결국 그는 힘펀드라는 단체를 설립하게 됩니다. 그는 자신이 처한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성실히 최선을 다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어떠한 삶의 자리에 있든지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는 삶을 살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에게 더 큰 것을 맡기십니다. 그러므로 주어진 일상에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일꾼이 되시길 바랍니다.
2. 부르심과 선택
하나님이 부르실 때 우리는 즉시 순종해야 합니다. 본문에 보면 “엘리야가 그리로 건너가서 겉옷을 그의 위에 던졌더니”(왕상 19:19)라고 말씀합니다. 엘리야는 열두 겨릿소를 앞세우고 열심히 밭을 갈고 있는 엘리사를 향하여 겉옷을 벗어 던졌습니다. 겉옷을 벗어 던지는 것은 ‘나의 직무를 대신하라’는 직무의 승계를 의미하는 표징입니다.
엘리사는 엘리야가 겉옷을 던져 줄 때 그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엘리사는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하여 밭을 갈던 소를 버리고 자신을 낳고 길러 주신 부모님과 입맞춤으로 작별합니다. 이것은 엘리사의 즉각적인 순종과 선택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면 지금 붙잡고 있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즉시 주님께로 달려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주저하지 말고 순종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끊임없는 선택과 결단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12:1)고 하시자 즉시 가나안 땅을 향해 떠났습니다. 창세기 12장 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에 아브람이 야훼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아브라함은 75년간 자신이 이루어 놓은 삶의 터전을 떠나 위험을 무릅쓰고 하나님이 지시하신 미지의 땅으로 나아가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즉각 순종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백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주저하지 않고 순종하였습니다(창 22:3). 75세에 고향을 떠나고, 100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바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아브라함의 순종을 보시고 복의 근원,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아시아로 선교를 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성령님이 마케도니아로 가라고 하시자 바울은 거침없이 빌립보로 발걸음을 돌려 놀라운 선교의 결실을 거두었습니다.
순종할 때에는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핑계를 대거나 변명해서는 안 됩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그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애굽의 바로 앞에 서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에 즉시 순종했습니다. 물론 순종의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이 따랐지만, 결국 그의 순종을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땅히 십자가를 지셔야 했지만, 예수님이 원하셨던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복종시키기 위해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십자가를 지시고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철인』이라는 책의 저자 다니엘 김 선교사(37)는 10살까지 한국에서 살다가 일본에서 국제학교를 다녔고,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육군사관학교와 트리니티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선교사로 파송 받았습니다. 그는 선교사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복음의 불모지로 들어가기 위해 자신이 가진 미국 시민권을 기꺼이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중국을 선교 거점으로 삼아 수십 개국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1년 중 한 지역에서 열흘 이상 머문 적이 없을 만큼 충성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이렇게 호소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자로 부르고 계십니다.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자, 그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무장된 ‘철인’입니다”
주님이 부르시면 우리는 세상을 버리고 주님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에는 봉사하고 섬겨야 할 많은 자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부르실 때 망설이지 말고 섬김의 자리에서 즉각 순종해야 합니다.
이사야의 6장 8절에 보면 이사야는 하나님이 부르실 때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처럼 이사야의 고백이 오늘 나의 고백이 되게 하십시오. 하나님 말씀 앞에 절대 순종하십시오. 세상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고 바르게 선택하여 나를 향한 주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살피시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 앞에서의 결단
하나님이 부르실 때 우리는 믿음으로 결단해야 합니다. 엘리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자 자신의 생업 수단인 소를 잡고 기구들은 불사르고 고기를 삶아 백성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엘리사가 그를 떠나 돌아가서 한 겨릿소를 가져다가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어 먹게 하고 일어나 엘리야를 따르며 수종 들었더라”(왕상 19:21) 엘리사가 이렇게 행동한 것은 사람들에게 결단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농사를 접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공식적으로 선포한 것입니다. 그리고 농업의 기반인 모든 도구를 불사르는 것은 다시는 옛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살겠다는 전적인 헌신과 결단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선택하였다 하더라도 결단하기 어려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기가 가진 것을 다 내려놓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십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은 말씀합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주님이 부르실 때 머뭇거리지 말고 중요한 시기에 과감히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멸망하는 소돔과 고모라에 미련을 가지고 뒤를 돌아본 롯의 처는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창 19:26) 롯의 아내가 뒤돌아본 이유는 세상의 욕심 때문입니다. 탐심은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하고 말씀을 따르지 못하게 합니다. 세상의 욕심은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가진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믿음으로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놀라운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나는 희망이다』라는 책의 저자 제프 핸더슨(Jeff Henderson)은 L. A. 사우스센트럴의 가난한 흑인 동네에서 태어나 10대 시절 마약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아 24살 때 마약 밀거래 죄로 체포되어 19년 7개월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생각했던 절망의 순간에 인생을 완전히 뒤바꾸는 기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감옥의 주방에서 빵 굽는 조리실을 보고 요리사가 되겠다는 꿈을 가졌습니다. 설거지부터 온갖 잡일을 거치며 하나씩 기술을 익혔고 10년 만에 보호관찰로 석방되었습니다. 석방된 이후 로스앤젤레스의 한 레스토랑에서 접시닦이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요리사 경력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시저스 팰리스 호텔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주방장으로 발탁된 데 이어, 미국 테이스팅 협회 선정 2001년 최고의 요리사 상 수상의 영광을 안았고, 마침내 세계적으로 유명한 벨라지오 호텔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총주방장이 되는 기적을 이루었습니다. 그는 청소년들을 만나면 “자기를 절망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나는 희망이다’라고 생각을 바꾸십시오”라고 권면한다고 합니다.
이처럼 불행한 과거를 돌아보지 마시고 하나님의 선하신 부르심을 선택하고 결단하십시오. 그리고 믿음으로 전진하십시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것을 행하기 위해 결단하는 사람을 도우십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한 사명으로 부르실 때 즉시 순종하고 믿음으로 결단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복된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모든 감사와 찬송과 존귀와 영광을 하나님께 올려 드립니다. 주님이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시며 여기까지 인도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의 인생길에서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게 하시고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선택과 결단을 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하나님의 귀한 뜻을 이루어 나가는 우리가 되게 하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영훈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