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671
11월11일[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연중 제31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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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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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W8p4kIasWO8
[서울대교구 이경록 스테파노 신부님 집전(길음동본당 보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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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 마음을 아신다. 사실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되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혐오스런 것이다.”
<(1)본질에로의 회귀>
바리사이들 원래 특별하고 대단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모범적이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거룩하고 흠 없이 살았으면 ‘바리사이’ 즉 ‘분리된 자들’이란 칭호까지 사용했겠습니까?
그 분리는 어디로부터 분리를 말하는 것일까요? 거짓과 악으로부터 분리, 오염되고 타락한 세상으로부터 분리, 죄와 불의로 얼룩진 사람으로부터 분리를 의미했습니다.
그런 바리사이들이었는데 예수님은 그들을 만나기만 하면 절대로 그냥 지나가시는 법이 없습니다. 듣기 섬뜩한 독설에 가까운 말씀들을 따발총처럼 쏘아붙이십니다.
그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바리사이들은 첫 마음을 잃어버렸습니다. 진실했던 신앙은 타성에 젖어 습관적이 되고 말았습니다. 말과 행동이 더 이상 일치되지 않았습니다.
신앙의 가장 본질, 곧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바탕으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일,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는 일,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는 일은 더 이상 안중에도 없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도 잠시 언급되고 있는 것처럼 바리사이들은 돈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돈을 좋아하게 되다보니 돈 없는 가난한 백성들을 위한 봉사에는 관심도 없었습니다. 자연스럽게 돈 많은 부자들, 권력가들, 정치인들에 빌붙어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물 좋은 자리, 내적 성장이나 깊이 있는 기도생활은 뒷전이 되었고 그저 남들에게 잘 보이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설쳤습니다.
집안에서 흥청망청 먹고 마시고 놀다가도 기도시간만 되면 잘 차려입고 길모퉁이에서 갖은 폼은 다 잡고 거룩한 포즈로 기도를 바쳤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사랑의 실천, 이웃봉사를 외쳤지만
정작 자신들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자신의 외적인 성공에만 몰두했지 약자들의 고통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런 바리사이들을 향해 날리시는 예수님의 공격은 무섭습니다.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 마음을 아신다. 사실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되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혐오스러운 것이다.”
오늘 바리사이들의 행실을 바라보며 과제 몇 가지가 주어짐을 느낍니다.
‘위선의 극복’
‘기도와 삶의 일치’
‘작은 일에 충실’
‘신앙의 본질에로의 회귀’
‘악과 위선으로부터의 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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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라는 표현을 자주합니다. 이 사람 저 사람, 똑같은 제목으로 쓴 책들이 돌아다닙니다. 길지 않지만, 그렇다고 짧지도 않은 우리네 인생, 누구에게나 삶이 크게 전환되는 반전의 기회가 몇 번씩 찾아옵니다.
때로 한 존재와의 만남을 통해, 때로 예기치 않았던 사건 사고를 통해, 때로 깊은 바닥 체험을 통해, 생각지도 못한 고통과 십자가를 통해, 우리네 삶은 크게 출렁거리지만, 그로 인해 우리 삶이 크게 변화되기도 하고, 크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기도 합니다.
돌아보니 제 경우도 여러분 그런 순간이 있었습니다. 사방이 높은 벽으로 가로막힌 듯한 느낌 속에 삶이 온통 짙은 회색빛이던 젊은 시절, 한 고마운 존재와의 만남은 저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어놓았고, 절망 속에서 희망을 갖게 했습니다.
난데없이 내게 다가온 병고라든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가까운 사람들과의 사별, 그로 인한 쓰디쓴 바닥 체험은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임을 알게 해주었고, 인생에 있어서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알게 해주었습니다.
돌아보니 하느님께서는 우리네 인생 여러 길목에 꼭 필요한 순간, 꼭 필요한 맞춤형 터닝 포인트들을 준비해 주셨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님의 생애 역시 이런저런 인생의 티닝 포인트들이 즐비했습니다. 보통 주교님들은 독실한 그리스도교 신앙인 가정 출신이 대부분인데, 마르티노 주교님은 이교인 가정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젊은 시절 마르티노의 꿈은 군인으로서 성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유학을 끝낸 다음 장교가 되어 승승장구하는 장밋빛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의 인생을 확 뒤집어놓는 터닝 포인트라고 할 수 있는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추운 겨울, 말을 타고 가던 청년 장교 마르티노는 추위에 와들와들 몸을 떨고 있던 걸인을 만나게 됩니다. 따뜻한 측은지심의 소유자였던 그는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다는 것을 알고 좌절합니다.
그러자 마지막 방법을 선택합니다. 자신의 허리에 차고 있던 장검을 꺼내 자신이 입고 있던 외투를 반으로 자른 다음, 반은 자신이 걸치고, 반은 그 걸인에게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마르티노의 꿈에 예수님이 나타나셨는데, 자신이 반으로 잘라 걸인에게 준 바로 그 옷을 걸치고 계셨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그는 큰 충격에 사로잡혀 자신의 삶을 스스로 뒤집습니다.
이 특별한 사건은 마르티노의 삶을 성직에로 이끌었습니다. 사제가 되고 파리 근처 투르의 주교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특별한 체험이 남긴 교훈을 평생토록 잊지 않고 자신의 사목 생활에 충실히 반영했습니다.
한평생에 걸친 마르티노 주교님의 모토는 마태오 복음 25장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마태 25, 34-36)
사제가 된 마르티노는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이웃 사람들을 개종시키는데 헌신했습니다. 당시 아리아파와 같은 이단이 횡행하던 시절이었기에 그의 복음 선포 활동은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교도들에게 매를 맞고 쫓겨나는 봉변도 부지기수로 당했습니다. 이교도들의 탄압이 극심할 때면 그는 깊은 산속에 들어가 기도 생활에 전념했습니다. 이때 그의 탁월한 인품과 영성에 대한 소문을 듣고 많은 청년들이 찾아와 수도공동체가 형성되기도 했습니다.
마르티노 주교님이 지니셨던 가난한 이웃을 향한 따뜻한 마음, 큰 측은지심이 오늘 우리네 마음 깊은 곳에 큰 울림으로 남아, 작은 사랑의 실천을 계속해나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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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bi__ro1UR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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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을 다 이겨도 많이 받으면 중독된다>
오늘 복음은 ‘약삭빠른 청지기 비유’의 결론입니다. 약삭빠른 청지기는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었습니다. 재물이 모두 하느님 것임을 알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이 의롭지 않게 여겨집니다.
그러나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비웃습니다. 그들은 돈을 좋아하면서 동시에 하느님을 섬길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으니 하나를 사랑하려면 하나를 미워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돈과 명예나 육체적 만족을 좋아하는 것을 끊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세상 것들을 좋아하면서 주님을 섬길 수는 없습니다. 금송아지를 섬기며 십계명을 따를 수는 없습니다. 하나는 깨어져야 합니다. 아니면 신앙이 위선이 됩니다.
멕시코시티 근처에 아스테카 문명을 볼 수 있는 떼오띠우아칸이란 곳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이집트 피라미드처럼 생긴 고대 달과 뱀의 신을 섬기는 커다란 제단이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자신의 농사가 잘되게 해 달라고 자신들이 잡아 온 전쟁포로들을 산 채로 신에게 바치는 제사가 행해졌습니다.
과연 이들이 정말 신에게 영광을 돌리고 신을 섬기는 예배를 올렸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농사가 잘되는 것이 주요 목적이었습니다. 농사가 잘되게 하는 것이 신을 섬기는 것보다 우선되었습니다.
어떤 신학교 교수님이 방학을 맞아 즐겁게 집으로 돌아가는 학생에게 “지금 당장 천국에 갈 수 있다면 천국에 가겠느냐, 집에 가겠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학생은 “천국에 가기 전에 아무래도 집에 먼저 들러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농사가 예배의 첫 번째 목적이었을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그것으로 자신들이 높이 평가받기 위해서였습니다. 돈을 좋아하는 궁극적 목적은 ‘자기 영광’입니다. 궁극적인 우상숭배는 자기 자신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바리사이들이 돈을 좋아했던 이유는 의식주가 걱정되어서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부자라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였습니다.
어떤 유명한 개신교 찬양 전도사가 어느 날 찬양 집회를 마치고 눈물을 흘리며 이런 고백을 대중들 앞에서 했다고 합니다.
“나는 지금까지 수많은 찬양 집회를 인도했지만, 집회 후 남은 것은 허무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를 오늘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나 자신을 나타내려는 마음이 내 속에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이 하느님의 영광을 깊은 밤의 어둠처럼 가려왔던 것입니다.”
저도 주님을 전하며 많은 강의를 했습니다. 사순 강의를 20차례 하고 마치는 마지막 날, 기뻐야 하는데 공허감이 찾아왔습니다. 주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고 주님만을 전하려는 마음으로 강의를 했지만, 신자들의 박수갈채에 나도 모르게 중독이 되어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독은 갈수록 심해져 큰 박수갈채를 받아도 성이 차지 않게 된 것입니다.
자기를 섬기는 사람이 주님도 섬기겠다고 하니 주님은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부터 이용당하는 분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되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혐오스러운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의 욕구를 추구하는 사람은 위선적 신앙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 위선적 신앙에 빠지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유혹이라는 것 자체의 위험성을 모른다는 데 있습니다. 그저 영광을 주님께 돌리고 재물을 주님께 봉헌하면 된다고 믿습니다. 심지어 돈을 벌어야 교무금이라고 낼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말합니다. 자식이 성공해야 주님께 찬미라도 드릴 것 아니냐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바리사이들이 주님을 섬기는 방식입니다. 그런 욕심 때문에 우상숭배에 중독될 가능성이 큽니다.
‘반지의 제왕’이란 영화에서 ‘반지’는 힘이고 권력이고 영광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작고 착한 인물이 하나 나오는데 호빗 ‘프로도’입니다. 문제는 반지를 끼면 엄청난 힘을 발휘하여 악을 쳐부술 수 있지만 계속 끼고 있으면 빼고 싶은 마음이 점점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 착한 프로도까지 눈빛이 바뀌고 반지를 빼려 하지 않습니다.
반지를 가지고 싶어서 안달이 난 골룸이나 그 반지를 결국 내어주어야 하면서도 더 오래 갖고 싶어 하는 프로도나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영광이란 이런 것입니다. 오래 만지고 있으면 중독됩니다. 주님께 영광을 돌리려다가 영광에 중독되고 맙니다. 재물을 주님께 돌리려다가 재물에 중독됩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에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라고 하면서, 그런 유혹 거리를 내가 먼저 만져보고 즐기고 돌리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유혹 거리를 옆에 두려는 것부터가 교만입니다.
내가 주님을 섬기고 있으면서도 마음이 공허하다면 분명 내가 주님께 바치고 있는 것들에 중독되었을 것입니다. 중독되면 분명 공허함이 찾아옵니다. 자기 영광을 추구하면 하느님에게서 오는 영광은 끊어지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남들에게 성인 대접을 받게 되면서부터는 사람들을 떠났습니다. 성인들도 유혹을 이기려 한 것이 아니라 유혹을 피하려 하였습니다. 그리고 혼자 외로이 죽는 것을 택했습니다.
‘나의 영광’을 주님께 돌리려 하지 마십시오. 내 것으로 생각할 때부터 영광에 중독됩니다. 어차피 나의 것은 없습니다. 주님께 바치는 영광에 중독되지 않게 조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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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휴가 중에 서울 ME 총회에 참석했습니다. 생각하니 휴가 중에 성지순례가 10일 있었고, 조카의 혼배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ME 총회에도 참석했습니다. 저는 2005년에 ME 주말을 체험했습니다. 어느덧 18년이 되었습니다. ME 주말 발표사제를 했었고, 서서울 지역 ME 대표, 한국 ME 부대표를 하다가 2019년 뉴욕으로 왔습니다. 뉴욕에서도 2020년에 동북부 ME 대표사제를 맡았습니다. ME 총회에서 반가운 얼굴들을 보았고, 더 나은 세상, 화목한 부부를 이루려는 ME 부부들의 열정도 보았습니다. ME 봉사의 ‘정년’을 맞이하는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었고, 이제 막 ME 발표를 시작한 부부의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모임 중에 인상적인 이야기를 들었는데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통계에 따르면 결혼한 부부 중에 50%는 이혼한다고 합니다. 성당에서 관면 혼배라도 한 부부는 30% 정도 이혼한다고 합니다. 주일 미사에 참례하며 신앙생활을 하는 부부는 10% 정도 이혼한다고 합니다. 성당에서 봉사하며, 열심히 활동하는 부부는 0.1% 정도 이혼한다고 합니다.” 저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신앙생활과 봉사활동이 부부생활에도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새삼 알았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복음 선포에 큰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의 이름을 소개합니다. 그들의 이름은 200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기억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소개한 이들의 이름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나의 협력자들인 프리스카와 아퀼라에게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그들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내 목숨을 구하여 주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에패네토스에게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그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를 믿은 첫 번째 사람입니다. 나의 동포이며 나와 함께 감옥에 갇혔던 안드로니코스와 유니아에게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그들은 뛰어난 사도로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들입니다. 내가 주님 안에서 사랑하는 암플리아투스에게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협력자인 우르바노와 내가 사랑하는 스타키스에게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이 편지를 받아쓴 저 테르티우스도 주님 안에서 여러분에게 인사합니다. 나와 온 교회의 집주인인 가이오스가 여러분에게 인사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소개한 사람은 모두 10명입니다. 이들의 열정과 헌신이 있었기에 바오로 사도는 복음을 선포하고, 교회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저의 뉴욕생활에도 도움을 주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신문사의 일을 도와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신문사의 형광등을 LED 등으로 교체해 주신 분도 있습니다. 차고의 천막을 새롭게 단장해 주신 분도 있습니다. 매달 독자들에게 구독신청서를 보내주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의 도움이 있기에 저는 잘 지낼 수 있습니다. LA에 가면 언제나 기쁜 얼굴로 대해 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제게 머물 수 있는 숙소를 마련해 주시고, 차량봉사를 해 주십니다. 덕분에 LA에 가서 편하게 신문홍보를 할 수 있습니다. 부르클린 한인 성당에도 봉사자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매주 미사 후에 친교를 나눌 수 있도록 준비해 줍니다. 가끔씩 사제관 청소도 해 줍니다. 맛있는 반찬도 마련해 줍니다. 그분들의 도움이 있기에 저는 기쁜 마음으로 부르클린 성당으로 갈 수 있습니다. 동북부 ME에도 열정적으로 헌신하는 부부들이 많았습니다. 그분들의 도움으로 팬데믹의 강을 건널 수 있었습니다. 피정, 소풍, 주말체험, 월례회의를 준비해 주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처럼 실명으로 이름을 밝히지는 않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분들의 열정과 헌신을 이미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고, 아주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일에도 불의하다.” 우리들의 열정과 헌신으로 하느님의 나라에 이름이 기록될 수 있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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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6,9-15: 세속의 재물로라도 친구를 사귀어라
어제 복음의 불의한 집사는 주인에게 영리함을 칭찬받았다. 그것은 자기 것이 아닌 것으로 자기 소유가 될 것들, 친구와 지지자들을 얻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9절) 예수님께서 가난한 사람들 안에서 우리의 사랑을 받으시기 때문에 우리는 자선을 베풀어야 한다. 자선을 베풀 때, 우리가 상대를 골라서는 안 된다. 우리는 늘 너그러워야 한다. 늘 문을 열어 두고 나그네를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물은 잘 활용하라고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것이다. 이것은 내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다. 우리는 이 재물을 잘 사용하여 백 배, 즉 현재 대신 미래, 없어질 것 대신 영원한 것을 얻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필요한 사람이 쓸 수 있게끔 그것을 나누고, 장차 그들의 도움을 받기를 기대해야 한다.
“너희가 남의 것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너희 몫을 내주겠느냐?”(12절) 여기서 남의 것이란 우리가 소유한 재물을 가리킨다. 우리는 재물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다. 알몸으로 태어났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1티모 6,7)라는 말씀대로이다. 우리는 그 재물에 대해 관리인에 불과하다. 땅의 재물로 가난한 이들에게 마음을 열어야 한다. 우리 것이 아닌 물질로 주님을 따르는 이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본래 모습인 당신과 닮은 모습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13절) 하느님과 함께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있다 생각하면 그것은 큰 오해다.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는 버려야 한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것은 주인은 오직 주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재물을 섬기는 자들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누구도 주인의 권리를 행사하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재물이 그 사람을 노예로 옭아매고 있다. 재물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재물에 대해 주인이 되는 삶이 하느님 앞에 올바른 자녀의 모습이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아버지의 뜻에 맞게 재물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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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의 요점은 ‘재물을 어떻게 이용하여야 하는가?’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재물에 관하여 어떤 입장입니까? 먼저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라는 말은 다양한 의미로 풀이됩니다. 곧 재물이 이 세상을 그것의 노예로 만들어 버린다는 의미에서부터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애덕 행위를 강조하는 의미까지 폭넓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는 ‘재물을 소유하고 있던 이가 죽을 때’ 또는 ‘세상의 종말이 닥칠 때’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는 ‘너희가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여질 것이다.’로 의역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함께 묶어, ‘세상의 종말이 닥치게 될 때, 너희가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여질 것이다.’ 정도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영원한 거처로 맞아 주시는 분’은 간접적으로 만물의 창조주 하느님을 가리킵니다.
한편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구절에서 ‘섬기다’로 옮긴 그리스 말은 종교적 신학적으로 ‘노예살이를 하다’는 뜻을 지닙니다. 그 결과 엄격한 의미에서 복음 내용은 재물에 대한 일반적 가르침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복음서 저자는 재물을 대할 때와 하느님을 대할 때 각각 어떤 마음가짐이어야 하는지 비교하며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느님과 재물에 각각 얼마만큼의 가치를 부여합니까? 하느님께 돌려드려야 할 시간과 노력과 재화를 엉뚱한 것들에 쏟아붓고 있지는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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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어제 들었던 '약은 집사' 비유의 결론입니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루카 16,9)
어제 우리가 보았듯이 주인이 맡긴 재물은 관리인이 주제넘게도 자신만을 위해 쓸 때는 낭비이고 불의합니다. 그런데 그 재물이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사용될 때, 즉 주인의 뜻에 맞게 사용되면 관리를 맡은 이에게는 어떤 기회가 주어질 수 있게 됩니다.
그 불의한 재물로 인해 도움을 받은 이들이 그 관리인을 친구로 여겨 그를 위해 전구하고 빌어주게 되면 그가 비록 세상에서 자기만을 위해 살며 그다지 많은 공로를 쌓지 못했더라도 영원한 거처로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는 말입니다.
재물이 주인이신 하느님의 뜻에 맞추어 사용됨으로써 사람을 살렸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루카 16,13)
물질주의, 황금 만능 시대, 소비 과시, 자유 시장 경제 체제에 젖어 사는 세상 사람들에게 이 말씀은 외면하고픈 불편한 진실일 겁니다. 재물이 주는 안정과 쾌락에 더해 종교적 보상까지 누리고 싶다면 번지수가 영 틀렸다는 뜻이니까요.
하느님은 재물을 허락하실 때 많이 받은 이나 적게 받은 이나 거리낌없이 돕고 나누며 살기를 기대하셨습니다. 누구는 이런 게 더 많고 누구는 저런 게 더 많아야 서로를 보완하는 상호적 사랑이 가능해지기 때문이지요.
이 목적에 맞게 사용되지 않은 재물, 즉 자신과 가족만의 안위와 사치를 위해 사용되는 불의한 재물은 하느님과 도무지 병립할 수 없습니다. 둘 다 손에 넣으려 한다면 하느님마저 재물 안에 끼워넣으려는 자가당착일 뿐이지요.
"사실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되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는 혐오스러운 것이다."(루카 16,15)
안타깝게도 요즘 세상은 사람에 대한 평가를 인격이나 심성, 선행이나 희생 등 그의 알맹이에 의거하기보다 재물을 기준으로 하는 듯 보입니다. 돈이 많으면 할 수 있는 일들, 외모와 몸매를 가꾸고 치장과 명품으로 과시하는 이를 관리 잘 한다 치켜 올리며 닮고 싶어하지요. 온통 껍데기에만 정신이 팔린 모습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되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혐오스럽다고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혐오스럽다"는 강한 표현까지 쓰신 이유는 예나 지금이나 모든 걸 누리면서 이기심과 탐욕을 벗을 줄 모르는 이들에게 생각할 기회를 주시려는 의도겠지요. 재물이 있다면 그 귀한 선물이 불의하게 썪어 악취를 풍기지 않도록 하느님 뜻에 맞게 선용해야 하니까요.
제1독서에서는 사도 바오로의 협력자들 이름이 등장합니다. "프리스카와 아퀼라, 에패네토스, 마리아, 안드로니코스와 유니아, 암플리아투스, 우르바노와 스타키스, 테르티우스, 가이오스, 에라스토스, 콰르투스..."(로마서 16,3-9.16.22-27)
바오로 사도는 맨 땅에 헤딩하듯 불모지인 이방 지역에서 복음을 선포했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했을 것 같습니다.
누구는 재산으로, 누구는 재능으로, 누구는 시간으로, 누구는 노동력으로, 누구는 자기 권력으로 사도의 소명에 힘을 보탰겠지요.
굳이 이 발음도 어려운 이름들을 옮겨 적어 지면을 할애한 이유는 우리에게 신앙이 전해지기까지 자신의 재물을 사심없이 내놓았던 그분들의 이름을 불러드리고 싶어서입니다. 그들의 나눔과 헌신을 통해 사도 바오로와 그들과 우리는 서로서로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일 영혼의 친구들로 엮이었습니다.
재물은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유혹과 근심을 끌어옵니다. 많건 적건 재물에 초연할 때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삶이 더 수월해지지요. 재물만 잘 사용하면 부유해도 행복할 수 있고 가난해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 집중하는 이에게는 가난도 부요도 축복이랍니다.
한 번 살다 가는 삶,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들을 잘 사용하고 잘 되돌려드릴 수 있는 벗님 되시길 기원합니다. 오늘 저도 사도 바오로처럼, 저의 협력자가 되어주신 말씀사랑 벗님들을 한분한분 떠올리며 감사와 축복의 기도를 봉헌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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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오늘 복음은 재물을 선용하는 방법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이 말씀은 불의하게 사용될 수도 있는 재물을 잘 선용하여 좋은 일을 하라는 뜻입니다.
문제는 재물을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재물을 대하는 자세이지요. 재물에 대한 집착은 인간을 무분별한 존재로 만들지 않습니까?
가진 것이 적으면 사람이 돋보이는데, 가진 것이 많으면 그것에 가려 사람이 보이지 않게 되기 때문이지요. 사람이 초라해 보입니다.
따라서 재물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더욱이 사람은 세상 물질을 많이 소유하고 세상일에 관심이 많으면 그만큼 주님의 필요성을 잊어버릴 위험이 많아지지요. 따라서 세상의 재물을 바르게 바라보며 이를 하느님 뜻에 맞게 다루어야 합니다.
세속의 재물처럼 작은 것을 다루는 데에도 성실하지 못하다면, 어떻게 크고 참된 일에, 곧 영적인 일에 충실할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우리가 집착하고 있는 것은 비단 재물만이 아닐 것입니다. 모든 것이 지나치면 결국 하느님께 가는 데 걸림돌이 될 것입니다. 무엇이든 본디 목적에 어긋나게 활용하면, 무거운 짐이 되고 말 것이 아닙니까?
따라서 스스로 질문을 던져야 하겠습니다. “나에게 힘을 주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내가 그토록 집착하는 것이 나에게 힘을 주는가? 아니면 하느님께서 힘을 주시는가?”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분명하게 이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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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신학교에서 가장 힘들었던 기억을 떠올려 보면 ‘공부’였습니다. 고등학교 때 경험했던 수업이나 시험과는 너무 달랐기 때문입니다. 특히 시험은 엄청난 고통이었습니다.
교수 신부님께서 칠판에 몇 자 되지 않는 문제를 적고 강의실을 나가시면, 그 문제에 대하여 자기가 이해한 것을 논리적으로 풀어 쓰는 논술 시험입니다.
이러한 시험을 한 번도 치러 본 적이 없었던 저로서는 우리가 주로 쓰는 ‘A4’ 용지의 두 배나 되는 ‘A3’ 크기의 광활한 답안지를 보며 한숨만 지었던 기억이 납니다.
나중에 받아 본 성적표에 등수가 적혀 있지 않은 것 또한 신기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때까지 학교를 다니면서 등수만 보았던 것 같습니다.
무엇을 배웠는지, 배운 것을 얼마만큼 이해하고 내 것으로 만들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보다 정답을 얼마나 더 많이 맞추었는지가 더욱 중요하였습니다.
늘 누군가와 비교하고 경쟁하면서 조금이라도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누군가를 짓밟고 일어서지 않으면 뒤처진다고 몸으로 배우며 살았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비교와 경쟁이 몸에 배어 있습니다.
내가 살아남으려면 누군가를 이겨야 하고, 때로는 밟고 일어서야 합니다.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사회에서도 ……, 어디서든 그것을 성공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한 성공을 통하여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쌓아 더 누리고 더 지배하며 만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비교와 경쟁이 아니라 ‘함께 살아감’을 이야기하십니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누군가를 이기지 않으면 잡아 먹힌다는 ‘정글의 법칙’이 아니라 자신의 것을 나누어 친구를 만들라고 하십니다.
경쟁과 비교의 삶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삶 가운데에서도, 친구를 만들어 가며 살아야 합니다. 짓밟고 일어서기보다 넘어진 이를 일으켜 주는 삶, 빼앗기보다는 빼앗긴 아픔에 함께해 주는 삶, 남기고 쌓아 놓은 것에 기뻐하기보다는 나누고 함께 배부름에 기뻐하는 삶이 더 많은 친구를 만들어 가는 삶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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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요한 신부님]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
오늘 복음은 어제 들은 ‘약은 집사의 비유’를 예수님께서 해석해 주시는 부분입니다. 그가 주인의 재산을 낭비한 것은 그의 재산을 자기 것처럼 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인을 진정으로 사랑했다면 그의 재산도 소중히 여겼을 것이고, 함부로 낭비되거나 의미없이 허비되지 않도록 철저하게 계획을 세워 잘 관리했을 겁니다. 하지만 ‘자기 것’처럼 여기지 않았기에, 어차피 그 재산은 자기와는 상관없는 ‘남의 것’이라 여겼기에,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함부로 다루었던 것이지요. 주인이 되고 싶었지만 올바른 주인의식을 지니지 못했기에 참된 주인이 되지 못했던, 집사의 단점과 한계가 명확히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그 단점과 한계 덕분에 그 집사는 자기 손에 있는 재물을 ‘불의한 재물’로 여길 줄 알았습니다. 자기 능력과 힘으로 정정당당하게 마련한게 아니니 자기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래서 집사로서의 직무를 마무리하면서, 자기 수중에 있는 것들을 다른 이들 앞에 내놓을 수 있었습니다. ‘어차피 내 것이 아니니’, 내 것이 아닌게 분명한걸 뒤로 빼돌려봐야 결국 주인이 다 찾아낼 게 뻔하니, 제가 가지려고 무리수를 두다 허무하게 뺏기는 쪽보다, 그 재물을 잘 활용하여 어려울 때 힘이 되어줄 친구를 만드는 쪽을 택한 것이지요. 그리고 그 선택이 그 집사에게는 ‘신의 한 수’가 되었습니다. 제 살길을 마련해보겠다는 불순한 의도로 시작한 일이, 자기가 가진 재물이 더 많은 이들에게 두루 이익이 되고 기쁨이 되기를 바란 주인의 선한 의도에 부합하게 되어 질책이나 비난 대신 칭찬을 받게 되었으니 그보다 더 좋은 결과는 없겠지요.
우리가 세상에서 소유하고 누리는 모든 재물은 다 ‘불의한 재물’입니다. 즉 순수하게 나의 능력과 힘만으로 만든 100% 나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덕분에 100% 거저 누리게 된 그분의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것은 나를 위해서 쓸 생각 말고 하느님을 위해, 그분 뜻을 이루기 위해 써야 합니다. 재물을 나의 것으로 여기며 집착하면 나는 하느님을 주님으로 섬기는 종이 아니라, 그분을 나의 것을 빼앗는 경쟁자로 여겨 배척하는 사탄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바리사이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돈을 좋아했고 재물에 집착했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억지로라도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하느님이 나를 불편하게 만들고 방해하는 경쟁자로 여겨졌고, 그렇게 하느님의 뜻에서 멀어져버렸습니다. 그리고 돈에 대한 욕망과 집착에 마음이 잠식당해 ‘맘몬’을 섬기는 우상숭배자가 되어버렸습니다.
주님께서 그런 그들에게, 그리고 재물에 대한 욕심과 집착에 사로잡혀 사는 우리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세상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느님이시니, 재물을 만드시고 주시는 분도 하느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재물을 주시는 분을 섬겨야지, 그분이 주신 재물 자체를 섬기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신앙인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아니라,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재물을 통해 하느님을 보지 못하면 재물 자체에 집착하다가 결국 그 재물에 종속되고 맙니다. 그러니 바오로 사도가 전하는 이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겨야겠습니다.
“나는 어떠한 처지에서도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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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몇몇 분에게 돈 얘기를 했습니다. “무엇이든 하느님께 먼저 봉헌해야 하는데 특별히 물질을 그렇게 해 보십시오. 상점이나 식당, 사업장에 오시는 첫 손님을 예수님으로 생각하고 그 몫이 얼마가 되었든 하느님께 바치십시오! 그리하면 주님께서 어떠한 방법으로든 풍성하게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랬더니 기꺼이 하겠다는 분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분이 한 달을 모은 것이라고 가져오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혹 손해를 보지 않았느냐?”고 여쭤봤습니다.
그분이 말씀하셨습니다. “손해를 보더라도 신부님이 하라 하니까 순명으로 계속하겠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아마도 지난달 매상이 좋지 않았나 봅니다. 그러나 곧 알게 될 것입니다. 돈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받았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카 16,13)고 말씀하셨습니다. 둘 중의 하나를 택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을 섬길 것이냐? 아니면 물질을 섬길 것이냐?
답은 명확합니다.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마태 5,37)는 말씀을 기억하며 선택하면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하여 부끄러운 모습을 보일 때가 많습니다. 사실 재물의 축복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축복을 주시는 분을 섬겨야지 주어진 선물 덩어리를 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도 살다 보면 주시는 분은 외면한 채 주어진 선물을 더 많이 소유하려고 다툽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현세에서 부자로 사는 이들에게는 오만해지지 말라고 지시하십시오. 또 안전하지 못한 재물에 희망을 두지 말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히 주시어 그것을 누리게 해 주시는 하느님께 희망을 두라고 지시하십시오.
좋은 일을 하고 선행으로 부유해지고, 아낌없이 베풀고 기꺼이 나누어 주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시오. 그들은 이렇게 자기 미래를 위하여 훌륭한 기초가 되는 보물을 쌓아, 참 생명을 차지하는 것입니다.”(1티모 6,17-18)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렇다면 말씀에 내 영혼을 비추어 그 말씀을 행함으로써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21)고 했습니다. 혹여 물질이 우리의 보물, 주인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구약성경 집회서는 재물의 유혹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황금을 좋아하는 자는 의롭게 되지 못하고 돈을 밝히는 자는 돈 때문에 그릇된 길로 들어서리라. 많은 이들이 황금 때문에 파멸하였고 멸망이 그들 앞에 닥쳤다. 황금은 그것에 빠져 있는 자들에게 장애가 되고 어리석은 자는 모두 황금에 사로잡히리라. 아무 흠도 없고 황금을 밝히지도 않는 부자는 행복하다.”(집회31,5-8)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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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
빠른 선택이란?
가까이 있는 것을 잡는 것이 아니다.
가까이 있으면서도 확실한 것을 잡는 것이다.
정확한 선택이란?
좋은 것을 잡는 것이 아니다.
좋으면서도 내게 맞는 것을 잡는 것이다. -이규경-
쓰레기와 보물
욕심은 쓰레기와 같다.
버리고 나면 마음이 개운하다.
양심은 보물과 같다.
잃고 나면 마음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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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렸을 때, 친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바로 옆집에 사는 친구인데, 주로 그 친구의 집에서 매일 만나 놀았습니다. 왜냐하면 장난감이 가득했고, 책도 정말로 많았기 때문입니다. 세계 문학 전집, 각종 위인전 등의 그림책이 방 하나를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우리 집에는 하나도 없는 것이었기에 ‘부럽다’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우리 집은 몇 년 뒤에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갔습니다. 이사 갔던 곳에는 함께 놀 친구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함께 놀다가도 어느 정도 시간이 되면 친구들이 하나둘씩 어디를 가는 것입니다. 피아노 학원, 미술 학원, 주산 학원, 태권도 학원 등등…. 학원으로 친구들이 떠나고 결국 혼자 남은 저는 집에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렸을 때 풍요롭지 못한 것에 불만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참 다행이다’라는 생각을 갖습니다. 혼자서도 잘 노는 어른이 되었고, 그래서 신부로 어렵지 않게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책 많은 친구다 부러워 누구보다 책을 많이 읽고 책을 사랑하는 어른이 될 수 있었습니다. 형제가 많았기에, 사교육을 받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한글도 뗄 수 있었고 여러 가지 재능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부족해서 불만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보면 부족해서 감사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결국 불평불만도 감사의 이유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감사할 일이 참 많습니다. 그 안에서 주님을 발견하면서 더 큰 기쁨을 가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의 재물을 올바르게 사용해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세속의 재물을 보고 불의하다고 하는 것은, 재물 그 자체가 나쁘다기보다 사람의 마음을 흩트려 놓아 하느님 앞에 있는 참된 재물을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재물이 있는지 없는지에 집중하는 삶이 아닌, 하느님을 섬기는 데 집중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지금 부족한 것이 많지 않습니까? 특히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대한 부족함을 가지고서, 많은 불평과 불만의 시간을 갖습니다. 그런데 더 부족한 것이 있지 않을까요? 바로 하느님을 섬기는 마음이 훨씬 더 부족했습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것은 지금의 삶을 뛰어넘어 먼 미래의 나를 위해서도 반드시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를 소홀히 하면서도 전혀 부족하다는 것도 깨닫지 못합니다. 그만큼 하느님과의 간격을 띄어놓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라는 주님의 말씀을 다시금 마음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 부족함을 채워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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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과 하느님께서 주신 것 사이에서>
루카 16,9ㄴ-15 (재물을 올바르게 이용하여라. 하느님이냐, 재물이냐.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의 참모습)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고, 아주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일에도 불의하다. 그러니 너희가 불의한 재물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참된 것을 맡기겠느냐? 또 너희가 남의 것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너희의 몫을 내주겠느냐?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이 이 모든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비웃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 마음을 아신다. 사실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되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혐오스러운 것이다.”
<하느님과 하느님께서 주신 것 사이에서>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카 16,13)
우리는
하느님과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결코 함께 섬길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아낌없이 벗들과 나눕니다
그리하여
하염없이 주시는 하느님 안에서
벗들과 함께 살아갑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섬기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그저 제 안에서 썩힙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늘 주심에도 불구하고
자신마저 썩혀 죽어갑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결코 함께 섬길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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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친구를 많이 만드는 법>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가르침입니다. 어제 강론에서 저는 집사란 주님의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이고, 주님의 사랑으로 선심을 팍팍 쓰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씀드렸는데 오늘은 주님의 선들 곧 재물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재물을 불의하다고 단정하시고, 그러나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만들라고도 하십니다.
그런데 재물은 그 자체로 불의한 것입니까?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그럴 리가 없지요.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이 어찌 불의합니까?
영어에서 ‘Goods’란 말이 있습니다. 보통 ‘재산’, ‘재물’, ‘재화’, ‘상품’ 등의 뜻으로 쓰이는데 이 말이 어떻게 이런 뜻이 됐을까 제 나름으로 추측해보면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고 좋다고 하신 것에서 나온 말일 것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선(All Good)이시고, 모든 선의 원천(Fountain of all goods)이시기에 그분에게서 나온 모든 것들도 당연히 선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재물이 불의하고 어떤 경우 불의합니까? 한 마디로 불의한 사람의 재물이 불의합니다.
하느님의 선을 자기 것으로 소유한 자의 재물이. 또 재물을 하느님 대신 섬기는 자의 재물이.
오늘 복음에서 그리고 다른 복음에서 말씀하셨지요.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이렇게 재물을 하느님 대신 섬길 때 재물은 재물의 신 곧 물신(物神)이 됩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하느님이 없어도 되지만 돈은 없으면 안 되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불의한 것일 수도 있는 재물로 친구를 만들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재물은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불의한 것이 될 수도 있고 선행의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저께는 무가 반 트럭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늘 하듯 옆 식당과 이웃들에게 무를 나눠드렸습니다. 이렇게 할 경우, 재물은 결코, 불의하지 않고 사랑의 도구입니다.
이토록 하느님의 선들(goods)을 악용하지 않고 선용하면, 어제 말씀드렸듯이 선심을 팍팍 쓰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선들을 또 주시고 더 주십니다.
지난 바자회를 통해 저희는 많은 장학기금을 마련했습니다. 작년보다 더 많은 기금이 조성되어 올해는 작년보다 13명이 더 많은 40명에게 장학금을 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사회에서 의견이 갈렸습니다. 내년에 다시 줄어들지 모르니 작년 수준으로 주자는 의견과 쌓아놓지 말고 들어온 것을 모두 그대로 주자는 의견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의견은 금세 하나로 모였습니다. 대상을 우리가 조절하려 들지 말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대로 나누자는, 그러니까 많이 주시면 많이 나눠주고 적게 주시면 적게 나눠주자는 쪽으로.
우리는 선의를 가지고 선심을 팍팍 쓰면 됩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선을 악용하지 않고 선용하는 것이고,
불의한 것이 될 수도 있는 것을 가지고 친구를 만드는 법입니다.
하느님은 많이 나눠주는 사람에게 많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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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최후의 심판>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경건하고 모없이 슬기로워서 겸손으로 티없이 보낸생애여 주께받은 생명을 꽃피웠으니 그 향기를 만세에 남기었도다."
마르티노 성인을 기리는 아름다운 찬미가 한연입니다. 오늘 11월11일은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축일입니다. 정말 다양한 가톨릭 성인들의 축일입니다. 똑같은 사람들이 없듯이 똑같은 사람들이 하나도 없습니다. 꽃마다 크기와 모양, 색깔과 향기가 다 다르듯이 성인들도 그러합니다. 어제는 위대한 대 레오 교황의 축일이었고 오늘은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축일입니다. 교회는 기념일로 지내지만 수도 주교 성인이었던 성 마르티노는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승들과는 각별한 인연이기에 축일로 지냅니다.
참으로 파란만장한 인생사를 지닌 마르티노 성인이었습니다. 베네딕도 성인이전 처음으로 서방에 수도생활의 모범을 보여준 수도 성인으로 프랑스의 수호성인이기도 합니다. 대레오 교황이 61세를 사신 반면 마르티노 성인은 81세로 그 당시로는 장수를 누린 성인이기도 합니다. 성인 축일을 지낼 때 마다 반드시 생몰生歿연대를 확인하며 제 나이와 비교해 보곤 합니다. 새삼 죽음과 최후의 심판을 생각하게 됩니다. 죽음도 머지 않았음을 봅니다.
마르티노 주교 성인의 인생 여정도 참 각별합니다. 고대 동방 수도생활에는 사막교부 “안토니오의 생애”란 책이 있듯이 경쟁하듯 서방에는 “마르티노의 생애”란 책이 있고 여기 소개된 성인에 대한 무수한 기적과 일화들입니다. 성인은 316년 헝가리 판노비아에서 태어나 당시 로마제국의 장교였던 아버지의 임지인 이탈리아 북부의 파비아에서 소년 시절을 지냈고 마지막으로 프랑스의 투르의 주교 후 물러나 수도생활에 전념하다 선종하신 분입니다. 오늘날 중국이 하나이듯이 당시 유럽은 한 나라의 로마제국이었습니다.
성인은 가톨릭 교회에서 순교자가 아니면서 성인이 된 최초의 분이었고, 최초의 양심적 병역 거부자이기도 합니다. “저는 그리스도의 병사입니다. 따라서 저는 싸울 수가 없습니다.” 전장에서 싸움을 거부한 성인은 투옥되었다 풀려나 수도여정의 길에 오르게 됩니다. 성인의 그리스도교의 개종에는 유명한 전설적인 일화가 있습니다.
그가 군복무중 자기가 지닌 것은 외투와 칼뿐이었던 성인은 낮에 추위에 떨고 있던 걸인에게 지체없이 칼로 외투의 절반을 잘라 입혀 주었고, 바로 그날 밤 꿈에 자기 반쪽 외투를 걸친 예수님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니 옷을 입혀준 걸인이 예수님이었던 것입니다.
“마르티노는 아직 예비신자이지만 나에게 이옷을 입혀주었다.”
그날 밤, 주위의 천사들에게 말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꿈속에 들었고, 잠에서 깨어났을 때 잘라졌던 외투는 완전히 새로 복구되었음을 목격했다는 일화입니다. 이런 일화가 그의 수도성소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고 18세에 세례를 받게 되고 군문을 떠나게 됩니다.
성인은 수도 주교가 된 이후로도 불굴의 열정으로 수도생활과 더불어 열렬한 사목활동을 전개했으며 이미 생존 시 많은 기적이 있었다 합니다. 성인의 죽음도 순전히 과로로 인한 병사입니다. 주님의 병사(兵士)로서 병사(病死)한 것입니다. 그의 선종시 전해지는 기도에 관한 일화입니다.
“주님, 아직 당신 백성이 저를 필요로 한다면 계속 일하는 것을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 지소서.” 기도 후 만류하는 신자들에게 “그냥 두시오. 땅보다 하늘을 더 바라보고 싶습니다. 이제 여행을 떠나려는 순간에 이 내 영혼은 하느님께로 향하고 있습니다."라는 말씀을 남기고 397년 1월8일 선종하셨다는 아름다운 일화입니다.
무엇보다 유명한 것은 걸인에게 그의 외투를 잘라 나눴다는 전설같은 일화요 여기 근거한 오늘 복음 말씀의 선정입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은 예수님께 관한 예언이면서 파견받은 우리 신자들의 사명이기도 합니다.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고, 슬퍼하는 이들을 모두 위로하게 하셨다. 슬픔 대신 기쁨의 기름을, 맥풀린 넋대신 축제의 옷을 입혀주게 하셨다.”
고해인생을 기쁨과 자유의 축제인생으로 바꿔주라 파견되신 예수님처럼 우리 모두 살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살라고 날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 하느님의 영을 우리 위에 내려 주시고, 당신 복음의 일꾼으로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오늘 예수님의 최후의 심판 이야기는 충격적입니다. 이건 비유가 아니라 최후의 심판을 서술하는 참 엄중한 서술입니다.
모든 인류가 예외없이 하느님을 대신한 예수님의 심판대 앞에 서며 심판의 잣대는 구체적 다음 여섯의 자비행입니다. 한 번 자신을 넣어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죽어서 최후의 심판이 아니라 이미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된 심판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은 오른쪽에 구원받은 이들에게 선언합니다.
“내 아버지께서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이어 구체적 사례를 열거하십니다. 모두가 추상적 사랑이 아닌 몸과 관련된 구체적 자비행을 지칭합니다. 투르의 성 마르티노의 외투에 관한 일화는 4항에 해당됩니다.
1.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2.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3.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고,
4.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5.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6.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오른쪽에 구원받은 이들은 언제 주님께 그렇게 해드렸느냐 묻고 이에 대한 답이 오늘 복음의 결론이요 우리에게는 영원한 울림을 줍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종파의 유무에 관계 없이 모든 인류중 곤궁중에 있는 가장 작은 이들 하나하나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주님입니다. 온 인류가 예외없이 자비하신 하느님의 한 가족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최후의 심판은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거룩한 전례도, 기도도, 온갖 수행이 심판의 잣대가 아니라 주변에서 곤궁중에 있는 이들을 살피고 돕는 자비행이 심판의 잣대라 합니다. 새삼 정신 번쩍 들게 하며 우리 자신의 이웃에 대한 무관심과 나태를 부끄럽게 합니다. 참으로 이런 구체적 자비행에 충실한 사람이 참사람임을 깨닫습니다. 오늘도 이런 자비행의 실천에 소홀함이 없도록 이 거룩한 미사중 주님의 자비를 청합시다.
"의인들은 빨마처럼 무성하고, 레바논의 체드루스처럼 자라나리니 주님 집안에 심어진 그들은 하느님의 뜰에서 꽃피리이다."(시편 92,13-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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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루카16,9)
<자선!>
오늘 복음(루카16,9ㄴ-15)은 세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곧 '재물을 올바르게 이용하여라.'는 단락과 '하느님이냐, 재물이냐'는 단락, 그리고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의 참모습'이라는 단락입니다.
오늘 복음의 핵심어는 '재물'입니다. '이 재물을 올바르게 사용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은 '부(재물)'를 하느님께서 주시는 복으로 여겼고, 인간의 불행과 가난은 그가 죄인이라서 하느님께서 벌을 내리신 결과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의 의로움을 드러내려고 부지런히 돈을 추구했고, 그래서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이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그들이 영원한 거처에서 우리를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을 베풀라.'는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자선이 곧, 나를 살리는 구원 행위이며, 이것이 바로 재물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이라는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유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도 그 가난으로 부유해지게 하셨네."(복음 환호송)
그렇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살리시고자 당신의 전부를 내어 놓으셨습니다.
'위령성월'입니다. 그리고 전례력으로 한 해의 끝자락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위령성월은 '비움의 성월'입니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를 묵상하는 성월'입니다.
우리는 올 때 빈 손으로 왔고, 갈 때도 빈 손으로 갑니다.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떠나갑니다. 그러니 끊임없이 채우려고만 하지 말고, 자선을 통해 비움의 삶을 살아가는 하느님의 자녀들,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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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H46LMuZb3y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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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카 16, 13)
깊어가는
가을이며
정성들여
마무리하는
우리 삶의
가을입니다.
겸손하고
겸허한 삶이란
섬겨야 할
하느님을
우리가
충실히 섬기는
정성과
섬김에서
비롯됩니다.
재물은 결코
허기진 우리
마음의
결핍을
채워주지 못합니다.
인간 생존의
기본 조건이
삶의 모든
가치가 되고
모든 삶의
목표가 되었습니다.
좋게 사용되어야 할
재물이
같은 사람이
같은 사람을
지배하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재물이 결코
지배욕의 산물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언제나 그릇된
욕망은 그릇된
관계로 치닫습니다.
이와 같이
재물에 대한
분명한
관점이나 원칙
방향성이 있어야
두 주인을
섬기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게 됩니다.
정성이 모여
기적을
만듭니다.
정성이
서로를 살게하는
사랑입니다.
재물을 쌓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중요한 역할을 할
기회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마음을 맑게하는
최고의 행복은
재물의
노예에서
우리가
벗어나는 것입니다.
조화롭게
사용하되
묶여있지
않는 자유입니다.
이것이 현재의
삶에 깨어있는
것입니다.
최고의 정성이
하느님을 향하면
달라지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우리의 생활입니다.
우리 삶의
안전장치와 보호막은
한 푼도
가져갈 수 없는
덧없는 재물이 아니라
우리를 영원한
기쁨으로 이끄시는
구원자 하느님이십니다.
가장 복된 길은
하느님만을
섬기는 길입니다.
그 길에
우리의 일상이 있고
그 길에
가장 좋은
은총이 있습니다.
가장 좋은
은총을
놓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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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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