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새날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제 마음이 팍팍합니다.
사랑이 없어서일까....교만함 때문일까?
그 이유를 생각합니다.
어리석은 자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생명의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자기의를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주님의 보혈로 정결케 하옵소서.
오늘도 아버지 품속의 평강을 누리게 하옵소서.
성령님, 의지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6. 이스라엘의 왕 아합의 아들 요람 제오년에 여호사밧이 유다의 왕이었을 때에 유다의 왕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이 왕이 되니라
17. 여호람이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삼십이 세라 예루살렘에서 팔 년 동안 통치하니라
18. 그가 이스라엘 왕들의 길을 가서 아합의 집과 같이 하였으니 이는 아합의 딸이 그의 아내가 되었음이라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19. 여호와께서 그의 종 다윗을 위하여 유다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그와 그의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말씀하셨음이더라
20. 여호람 때에 에돔이 유다의 손에서 배반하여 자기 위에 왕을 세운 고로
21. 여호람이 모든 병거를 거느리고 사일로 갔더니 밤에 일어나 자기를 에워싼 에돔 사람과 그 병거의 장관들을 치니 이에 백성이 도망하여 각각 그들의 장막들로 돌아갔더라
22. 이와 같이 에돔이 유다의 수하에서 배반하였더니 오늘까지 그러하였으며 그 때에 립나도 배반하였더라
23. 여호람의 남은 사적과 그가 행한 모든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24. 여호람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그의 조상들과 함께 다윗 성에 장사되고 그의 아들 아하시야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25. 이스라엘의 왕 아합의 아들 요람 제십이년에 유다 왕 여호람의 아들 아하시야가 왕이 되니
26. 아하시야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이십이 세라 예루살렘에서 일 년을 통치하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아달랴라 이스라엘 왕 오므리의 손녀이더라
27. 아하시야가 아합의 집 길로 행하여 아합의 집과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니 그는 아합의 집의 사위가 되었음이러라
28. 그가 아합의 아들 요람과 함께 길르앗 라못으로 가서 아람 왕 하사엘과 더불어 싸우더니 아람 사람들이 요람에게 부상을 입힌지라
29. 요람 왕이 아람 왕 하사엘과 싸울 때에 라마에서 아람 사람에게 당한 부상을 치료하려 하여 이스르엘로 돌아왔더라 유다의 왕 여호람의 아들 아하시야가 아합의 아들 요람을 보기 위하여 내려갔으니 이는 그에게 병이 생겼음이더라
(본문 주해)
16~22절 : 여호사밧의 왕위를 계승한 여호람의 사적이다.
16~19--북이스라엘은 아합의 아들 요람이 왕이 된 지 5년에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이 왕이 된다. ‘여호사밧이 유다의 왕이었을 때에’ 라는 것은 여호사밧이 섭정을 하고 여호람을 왕으로 등극시킨 것을 가리킨다.
(이렇게 남과 북의 관계를 함께 기록하는 이유는 그들이 어떤 환경에서 어떤 영향을 서로 주고 받았는지를 보라는 것이다.)
이 여호람이 유다를 다스린 기간은 8년이었고, 그는 이스라엘 왕들처럼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는 자였다. 그렇게 된 것은 그의 아내가 우상숭배하는 아합과 이세벨 사이에서 태어난 아달랴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다 역시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기 어려운 나라이지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언약 때문에 심판이 유보되고 있었다.(19절)
20~22--하나님이 다윗의 등불을 끄지 않으셨으나 유다를 쇠락하게 하셨다.
여호람 때 에돔과 립나가 유다를 반역하였다.
여호람은 모든 병거를 출동시켜 사일로 건너갔으나 도리어 에돔 군대에 포위당하고 겨우 밤에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왔다.
그리고 군인들이 흩어져 집으로 돌아갔다는 것은 유다가 에돔에게 졌다는 것이다.
이렇게 에돔이 유다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다른 민족들도 남쪽에서 유다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가세하였으니 립나의 반란도 그에 속한다.
23~24절 : 여호람의 왕의 사적은 역대지략에 기록되지만, 여호람의 악행에 대해서는 역대기에 더 자세히 기술된다.
“선지자 엘리야가 여호람에게 글을 보내어 이르되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네 아비 여호사밧의 길과 유다 왕 아사의 길로 행하지 아니하고 오직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여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이 음행하게 하기를 아합의 집이 음행하듯 하며 또 네 아비 집에서 너보다 착한 아우들을 죽였으니 여호와가 네 백성과 네 자녀들과 네 아내들과 네 모든 재물을 큰 재앙으로 치시리라 또 너는 창자에 중병이 들고 그 병이 날로 중하여 창자가 빠져나오리라 하셨다 하였더라”(대하21:12~15)
“여러 날 후 이 년 만에 그의 창자가 그 병으로 말미암아 빠져나오매 그가 그 심한 병으로 죽으니 백성이 그들의 조상들에게 분향하던 것 같이 그에게 분향하지 아니하였으며
여호람이 삼십이 세에 즉위하고 예루살렘에서 팔 년 동안 다스리다가 아끼는 자 없이 세상을 떠났으며 무리가 그를 다윗 성에 장사하였으나 열왕의 묘실에는 두지 아니하였더라”(대하21:19~20)
여호람의 악행을 인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를 치신다. 전쟁으로 다 빼앗기고 자신도 병으로 죽게 되는데, ‘아끼는 자가 없다, 열왕의 묘실에 두지 않았다’ 등의 표현으로 보아 비록 왕이었지만 비참한 종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여호람의 뒤를 이어 아하시야가 왕위에 오른다.
25~29절 : 여호람의 왕위를 계승한 아하시야의 사적을 기술한다.
아하시야가 왕이 될 때의 나이는 22세였고, 그는 1년간 예루살렘에서 다스렸는데, 그의 어머니는 아달랴는 아합과 이세벨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었으니 오므리의 손녀인 것이다.
이스라엘이나 유다의 왕들을 기록할 때에 그의 어머니를 기록하는 이유는 어머니의 신앙 배경을 보여줌으로 그 자손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유다 왕 아하시야와 이스라엘 왕 요람은 처남 매부 사이였다. 그들은 아람 왕 하사엘을 맞서 함께 싸웠다. 그러다 이스라엘 왕 요람이 부상하여 이스르엘로 후송되었고, 유다 왕 아하시야도 그를 문병하고자 이스르엘로 내려왔다. 이후 이스라엘의 예후가 반란을 일으켰고 두 왕은 한날에 죽게 된다.
(나의 묵상)
오늘 본문은 유다 왕 여호람과 그 아들 아하시야에 관한 내용이다.
두 왕이 어떠한 악을 행하였는지, 까불다가 맞이한 그 허무한 종말이 어떤지를 본다.
그런데 이 두 왕의 부정적이고 불행한 일생은 그나마 신실한 왕으로 알려진 여호사밧(여호람의 아버지, 아하시야의 할아버지)의 책임이 크다.
여호사밧이 아합의 집과 사돈을 맺음으로 아합의 딸 아달랴가 유다로 오게 된 것이다. 큰 우상과 작은 우상들을 주렁주렁 달고......
물론 유다가 그 전에 우상을 섬기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 아달랴가 남편과 아들에게 끼친 우상숭배의 영향은 막강하였고, 또 아하시야가 죽은 후에는 왕의 씨가 말려질 위기(대하22:10)에 처하여 유다의 등불이 꺼지게 될 뻔도 하였다.
그런데 이런 왕들의 행진 속에서 유다는 하나님 앞에 심판받아 마땅하지만, 하나님께서 계속 유보하신다.
그것은 유다가 조금이라도 잘한 구석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언약 때문이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자기의 종 다윗을 생각하셔서 유다를 멸망시키려고는 하지 않으셨다. 주님께서는 이미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서 왕조의 등불이 영원히 꺼지지 않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19절, 새번역)
남유다든 북이스라엘이든 다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고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힌 일 밖에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아합 가문과 교제한 여호사밧과 아달랴의 영향을 받은 그녀의 남편 여호람과 아들 아하시야를 내가 지금 판단하고 있긴 하지만, 가만히 보면 내가 여호사밧의 안 좋은 점을 닮았고, 여호람과 아하시야 모습이 내 안에도 있다는 것이다.
신앙적으로 산다고 하면서도 세상과 야합하려는 마음이 늘 들끓는 내 마음이 아합 가문과 사돈을 맺은 여호사밧의 마음이 아니고 무엇이랴?
세상적 사고방식에 절여진 나에게서 아달랴의 영향에 푹 절여진 여호람과 아하시야의 모습이 잘 연결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의 이러한 악함에도 불구하고 나를 용서하시고, 기회를 주시고 또 주신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중심이신 예수님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피가 나를 덮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은 내가 어떤 존재로 변화하려고 얼마나 노력하느냐가 아니라, 내 안에 예수님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불꽃 같은 눈이 내 안을 살피신다!)
예수님 없는 나의 변화, 나의 의지와 결심으로 이룬 변화라는 것은 또 하나의 새로운 죄악의 바벨탑을 쌓아 올리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예수님께 연합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말씀이신 예수님께 매일 나아간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 보혈의 그 자리로 나아가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다.
과거에 교회 안팎의 무수한 일을 할 때, 그 모든 일을 잘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일이 잘 되고 못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연합된 자로서 그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주님의 십자가에 연합된 자로 어떤 일을 수행할 때, 일을 그르칠 경우가 없다.
이것은 일의 결과가 좋다는 의미가 아니다. 결과야 어찌 되든지 그것이 주님의 뜻임을 인정하게 되고, 당장에는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조급하게 굴지 않게 되는 것이다. 내가 열심을 내지만 주님께서 이루시는 것을 기대하니, 내게는 평안만이 있게 되는 것이다.
열심히 일한 종의 평안함, 그것은 누려본 자만이 안다.
여호사밧이 시작한 아합 가문과의 교제를 그치고, 나는 매일 주님께로 달려간다.
주님과 교제하는 자가 된다.
그리고 주님과 교제하는 또 다른 지체들과 시공간을 초월하여 교제함으로 함께 주님을 찬양한다.
묵시적으로는 이미 다 이루신 주님의 언약 안에서, 현재적으로는 날마다 이루어지는 주님의 약속을 보면서 오늘 하루를 산다.
(묵상 기도)
주님,
밤잠을 설치다가 아침까지 늦잠을 자버렸습니다.
그래도 푹잠 자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언제나 여호와 보시기에 악한 자이지만
예수님의 이름을 힘입어 나아갑니다.
‘이미’와 ‘아직’을 생각합니다.
이미 다 이루신 주님의 약속임을 압니다.
아직 이 땅을 살아가는 자로서 주님의 그 약속 이루심을 보면서 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것은 아합 가문과의 교제를 버리고, 주님과 교제하는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 남은 제 삶을 의탁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