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비가 너무 많이 오니 걱정이 됩니다.
불쌍한 인생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또 십자가 보혈을 의지합니다.
그러지 않을 수 없는 연약한 인생입니다.
정결한 마음과 정직한 영을 허락하옵소서.
성령님,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4. 이에 님시의 손자 여호사밧의 아들 예후가 요람을 배반하였으니 곧 요람이 온 이스라엘과 더불어 아람의 왕 하사엘과 맞서서 길르앗 라못을 지키다가
15. 아람의 왕 하사엘과 더불어 싸울 때에 아람 사람에게 부상한 것을 치료하려 하여 이스르엘로 돌아왔던 때라 예후가 이르되 너희 뜻에 합당하거든 한 사람이라도 이 성에서 도망하여 이스르엘에 알리러 가지 못하게 하라 하니라
16. 예후가 병거를 타고 이스르엘로 가니 요람 왕이 거기에 누워 있었음이라 유다의 왕 아하시야는 요람을 보러 내려왔더라
17. 이스르엘 망대에 파수꾼 하나가 서 있더니 예후의 무리가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내가 한 무리를 보나이다 하니 요람이 이르되 한 사람을 말에 태워 보내어 맞이하여 평안하냐 묻게 하라 하는지라
18. 한 사람이 말을 타고 가서 만나 이르되 왕의 말씀이 평안하냐 하시더이다 하매 예후가 이르되 평안이 네게 상관이 있느냐 내 뒤로 물러나라 하니라 파수꾼이 전하여 이르되 사자가 그들에게 갔으나 돌아오지 아니하나이다 하는지라
19. 다시 한 사람을 말에 태워 보내었더니 그들에게 가서 이르되 왕의 말씀이 평안하냐 하시더이다 하매 예후가 이르되 평안이 네게 상관이 있느냐 내 뒤를 따르라 하더라
20. 파수꾼이 또 전하여 이르되 그도 그들에게까지 갔으나 돌아오지 아니하고 그 병거 모는 것이 님시의 손자 예후가 모는 것 같이 미치게 모나이다 하니
21. 요람이 이르되 메우라 하매 그의 병거를 메운지라 이스라엘 왕 요람과 유다 왕 아하시야가 각각 그의 병거를 타고 가서 예후를 맞을새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토지에서 만나매
22. 요람이 예후를 보고 이르되 예후야 평안하냐 하니 대답하되 네 어머니 이세벨의 음행과 술수가 이렇게 많으니 어찌 평안이 있으랴 하더라
23. 요람이 곧 손을 돌이켜 도망하며 아하시야에게 이르되 아하시야여 반역이로다 하니
24. 예후가 힘을 다하여 활을 당겨 요람의 두 팔 사이를 쏘니 화살이 그의 염통을 꿰뚫고 나오매 그가 병거 가운데에 엎드러진지라
25. 예후가 그의 장관 빗갈에게 이르되 그 시체를 가져다가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밭에 던지라 네가 기억하려니와 이전에 너와 내가 함께 타고 그의 아버지 아합을 좇았을 때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그의 일을 예언하셨느니라
26.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어제 나봇의 피와 그의 아들들의 피를 분명히 보았노라 여호와께서 또 말씀하시기를 이 토지에서 네게 갚으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여호와의 말씀대로 그의 시체를 가져다가 이 밭에 던질지니라 하는지라
(본문 주해)
예후가 엘리사의 제자로부터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수행할 첫 번째 과제는 아합 왕가에 속한 모든 사람을 한 사람도 남김없이 멸절시키는 것이다.
예후는 아합과 이세벨 사이에서 태어난 요람 왕을 죽이고, 남 왕국 유다의 왕이었던 아하시야도 죽인다.
14~15절 : 예후가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고서 자기와 함께한 장관들의 의향을 한 번 더 확인한다. 한 사람도 이스르엘에 가지 못하게 한 것은 모든 장관들이 다 예후를 왕으로 옹립한 일에 동의가 된 것이다.
예후가 이스르엘 성읍으로 가서 요람을 만나고자 한다. 요람은 지금 아람과의 전투에서 부상을 당해 누워 있었던 상태였고, 이때 남 왕국 유다의 아하시야 왕도 요람을 병문안하기 위해 와 있었다.
16~20절 : 파수꾼이 한 군대가 이스르엘을 향해서 오는 것을 발견하고 왕에게 보고하자, 요람 왕은 사신을 보내어 ‘평안이냐’고 묻게 한다. 병석에 있던 요람 왕은 아람과의 전쟁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매우 궁금했던 차에 군대가 오는 것을 보자 ‘평안이냐’라고 물었다. 이는 아람과의 전투가 승리했는지를 확인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두 번 사자를 보냈는데 오히려 사자들이 예후의 기세를 보고 예후에게 가담을 한다.
결국 파수꾼이 가까이 온 이들을 보자 군대 장관 예후인 것을 알아본다.
‘미친 듯이 병거를 몬다’(20절)라는 표현은 예후의 급한 성격과 동시에 병거 모는 실력이 출중함을 보여준다.
21~24절 : 그러자 요람 왕과 아하시야 왕이 승리의 희망에 부풀어서 아픈 몸을 일으켜 예후를 마중 나간다.
그런데 마침 만나는 그 장소가 나봇의 토지였다.
두 명의 전령을 보내고 돌아오지 않는 시간과 요람 왕이 이곳까지 오는 시간이 나봇의 포도원에 딱 맞추어지는 시간이 된 것이다.
요람이 혹시 전쟁에서 승리의 소식을 가지고 오는지 기대하며 예후에게 ‘평안이냐’고 묻는다. 그러나 예후는, 바알과 아세라 숭배를 만연하게 하고,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고 그를 죽인 사건을 이세벨의 음행과 술수라고 말하며 어찌 평안이 있겠느냐고 말한다.
이에 요람이 너무도 놀라 다급하게 도망치지만 그 두 팔 사이 가슴에 예후가 쏜 화살이 관통하여 죽게 된다.
25~26절 : 예후가 빗갈에게 요람의 시체를 나봇의 밭에 던지라고 말하며, 20년 전에 엘리야를 통해 들었던 하나님의 말씀을 회상하며 말한다.
이세벨의 술수로 나봇을 죽이고 포도원을 빼앗은 후에 아합이 그 포도원을 차지하려고 갈 때에 엘리야 선지자가 아합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였다.(왕상21:16~19)
이때 예후와 빗갈이 함께 갔고 거기서 엘리야 선지자의 말을 함께 들었던 것이다.
“그 주검을 들고 가서,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밭에 던지시오. 당신은, 나와 당신이 그의 아버지 아합의 뒤에서 나란히 병거를 타고 다닐 때에, 주님께서 그를 두고 선포하신 말씀을 그대로 기억할 것이오.
주님께서 아합에게 '내가 어제, 나봇과 그의 아들들이 함께 흘린 피를 분명히 보았다. 바로 이 밭에서 내가 너에게 그대로 갚겠다. 이것은 나 주의 말이다' 하고 말씀하셨소. 이제 당신은 그 주검을 들고 가서, 주님의 말씀대로 그 밭에 던지시오.”(새번역)
(나의 묵상)
요람에게 누군가 예후의 음모를 알렸다면 그는 그렇게 예후를 마중하러 가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후에게 기름부어 할 일을 주셨기 때문에 예후와 함께 한 동료들이 한 사람도 배신하지 않았고, 또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져야 하기에 요람은 자신이 피 흘리며 죽을 나봇의 토지에 딱 맞추어 도착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오늘 요람이 죽는 장면에서 성경의 표현이 눈에 띈다.
도망치는 요람의 등을 향해 두 팔 사이, 즉 활로 가슴을 겨누었고 관통했다.
“예후가 힘을 다하여 활을 당겨 요람의 두 팔 사이를 쏘니 화살이 그의 염통을 꿰뚫고 나오매 그가 병거 가운데에 엎드러진지라”(24절)
‘두 팔 사이’라는 것에서 요람이 두 팔을 들고 예후를 환영하려고 나아온 모습이 상상된다.
예후를 향해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자신이 기대하던 ‘평안’을 몇 번이나(사자들을 통해서도) 외치며 나아오는 모습이다.
그러나 기대했던 평안은 온데간데없고, 비참하게 죽고 만다.
자신이 원하는 그 평안을 찾아 헤매다가 불지옥에 들어갈 세상 사람들의 종말을 생각한다.
그 평안은 누군가에게는 돈이 되겠고, 누군가에게는 성공, 권력, 명예....등등이 되겠다.
그 걸음은 평안을 향한 것이 아니라, 불지옥을 향해 달려가는 것인데.....그것은 죽을 줄도 모르고 예후를 향해 나아가는 요람의 모습이다.
예후를 향해 들었던 그 두 팔이 정확한 과녁이 되어 화살이 관통하게 된 것이다.
복음 생명 강의를 위해 만든 ppt에, 아담의 타락 이후, 사탄이 끄는 대로 세상 것을 향해 두 팔 들고 줄지어 달려가는 사람들을 그린 그림이 있다.
오늘 요람은 꼭 그 모습과 같다.
10년 전에 나도 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교회는 다니고 있었어도, 사고 방식은 세상의 그것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부지런히 불렀어도, 그 모든 부르짖음이 나의 행복과 유익을 위한 것이었다. 내가 원하는 평안, 요람이 기대했던 평안이었다.
나를 불쌍히 여기신 주님께서 복음을 듣게 하시고 말씀으로 살게 하시니, 세상 것을 향해 들었던 옛 사람의 두 팔이 잘리고, 새 생명의 두 팔이 예수님을 향해 들려진다.
과거에 그토록 되뇌었던 ‘평안’이 참 평안이 아니라, 거짓 평안이요, 거짓 행복이었음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이제 나는 ‘참 평안’을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불타 없어질 세상 것들이 내게 주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안이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열어 놓으신 하나님 나라요, 예수님의 이름을 힘입어 들어갈 수 있는 아버지 품속이요, 또한 이 땅을 살아가지만 흔들리지 않는 아들의 나라를 누리며 사는 삶이니, 바로 영생인 것이다.
그래서 늘 질문한다.
‘영생입니까?’
세상 것에 마음이 끌릴 때도 이 질문을 하고, 슬프고 억울한 일을 당할 때도 이 질문 하나면 끝이다.
이 질문이 나를 예수님께로, 십자가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묵상 기도)
주님,
죽을 줄도 모르고 두 팔 들고 ‘평안’을 기대했던 요람이 죽습니다.
제 안에 살아있던 요람도 그렇게 죽었습니다.
옛 사람의 두 팔을 십자가에 못 박고
이제 새 생명의 두 팔을 들고 영생의 주님만을 향합니다.
‘영생입니까?’
살아가면서 무슨 일을 만나도 이 질문을 하게 하옵소서.
성령님,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