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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죄악에서 방황할 때 나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고, 사랑을 주신 천사는
하나님 한 분이셨다.
글쓰기에 앞서...
성공은 누구나 하지 않는 것이고, 설사 성공 한다 해도 그 대가는 반드시 치루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발명으로 인해서 내가 제일 사랑하는 부모형제들을 고통받게 했고, 친
구들에게 큰 상처를 주었으며, 씻을 수 없는 상처들로 가득차 있다.
이것이 내가 발명으로 얻은 댓가 이다.
발명을 하는 것보다 발명과정을 글로 적는 과정이 더 힘이 든다.
그것은 발명을 할 때는 오로지 발명에만 매달리고, 막상 발명과정을 글로 쓰려고 하니, 발명 과정이 나에게 준 아픈 기억들이 너무 많아서, 감격에 울먹이면서 써야 하기 때문이다.
무엇부터 어떻게 써야 되는지 모르겠으나, 아직 특허 심사가 끝나지도 않은 것을 가지고 글로 쓴다는 것도 허무하기만 하다.
그러나 나의 18년간에 걸친 연구 과정이 이를 증명 해 주리라 보면서 글을 적게 된다.
더 이상 구차한 변명 같은 것은 필요가 없다.
돈도 명예도 다 필요가 없다.
단 내가 발명을 해냈다는 것에 더 의미를 부여 할 뿐이다.
모든 것은 이 글을 보는 독자들이 판단하기를 바랄 뿐이다.
1987년 처음 발명의 아이디어를 가지고, 18년의 긴 여정 끝에 2006년 7월 14일 마침내
대한민국 특허청에 특허를 신청하기까지, 발명의 과정을 다 적지 못하지만, 간략하게 적는다.
-특허 제목은 보안상 생략
-특허 담당: 대한민국 특허청 기계금속건설심사본부 소속 제어기계 심사팀 공업사무관
이하는 보안상 생략
-2007년 4월 특허심사 착수
*특허 등록 날짜 7월 14일은 세상에서 제일 나를 아껴주고 사랑해 주신 외할머니 정옥량님이 나를 걱정하다가 쓰러져 하늘 나라로 가신 날 이다.
나는 외할머님의 사망 날짜를 기리면서 특허 등록을 했다.
*내가 발명한 내용은 지금까지 그 누구도 발명하지 못한 새로운 형태의 이론과 공식의
탄생이다. 지금까지 있는 전 세계의 공식들을 부정하지 않고, 새로 발견한 원형스프링을
이용한, 에너지 주입보다 많은 에너지를 발생하는 원리를 발명했다.
자세한 내용은 보안상 다 밝힐 수가 없다.
특허 심사기간이 2 ~ 3년이 걸린다고 하니 그때가서 결정이 날 사항이다.
다만, 내가 이 글을 먼저 세상에 밝히는 이유는, 만약 발명이 특허청에서 성공작으로 결과
가 나오면, 세계 최대 이슈로 부각하면서, 내가 당할 고통에 대비 차원이다.
나는 혼자다, 힘도 없다, 친척이나 가족이 없다, 솔직히 속된 말로 지금의 부를 누리는 사
람들이 쇼를 한다면, 나의 18년동안 연구가 숲으로 돌아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서 무슨 봉변을 당할 지는 모르나, 나는 지금부터라도 유서 겸, 나의 연구 과정
을 글로서 적고,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심정뿐이다.
이력서
1. 1971. 7. 12일 : 평양시 중구역 종로동 출생
2. 1976. 5월 : 황해남도 재령군 읍 47반 이사
3. 1976. 9. 1일 : 황해남도 재령군 산업유치원 낮은반 입학
4. 1977년 : 황해남도 재령군 군 유치원 높은반 입학 및 졸업
5. 1978. 9. 1 ~ 1982. 8. 30일 : 황해남도 재령군 남산인민학교 수료
6. 1982. 9. 1 ~ 1988. 8. 30일 : 황해남도 재령군 동화남자고등중학교 수료
7. 1988. 9. 1 ~ 1990. 9. 20일 : 황해북도 사리원지질탐사단과대학 자퇴
8. 1990. 11월 : 황해남도 재령군 철재일용품공장 소재반 입사
9. 1990. 12. 1 ~ 1991. 2. 28일 : 황해남도 재령군 양계리 흙깔이 동원
10. 1991. 3. 1 ~ 1991. 3. 30일 : 황해남도 재령군 철재일용품공장 소재반 근무
11. 1991. 4. 1 ~ 1991. 4. 30일 : 황해남도 재령군내에 있는 교도대 무기청소 및 관리
12. 1991. 5. 1 ~ 1991. 5. 30일 : 황해남도 재령군 종합공장 소속 아파트 건설 지원
13. 1991. 6. 1 ~ 1991. 6. 30일 : 황해남도 재령군 안전부 무기고 무기성능 검사
요원으로 파견
14. 1991. 7. 1 ~ 1991. 12. 30일 : 황해남도 재령군 철재일용품공장 소재반 근무
15. 1992. 1. 6 ~ 1992. 6. 30일 : 황해남도 해주시 해주화력발전소 건설 지원
16. 1992. 8. 12일 : 조선인민군 제 1군단 제 13보병사단 사단 직속 통신대대 유선중대
3소대 2분대 유선수로 입대
17. 1994. 9. 4일 : 조선인민군 제 1군단 직속 제 69포병여단 1대대 3중대 1소대 1분대
유선수로 근무(170mm자주포 부대)
18. 1995. 12. 23일 : 강원도 인제군 국군 제 12사단 초소로 월남
19. 1995. 12. 24 ~ 1996. 6. 30일 : 대한민국 정보사에서 생활
20. 1996. 7. 1일 : 대한민국에서의 첫 자유인으로 생활
21. 1996. 7. 2일 : 강변교회와 자매결연
22. 1996. 8월 : 정부에서 임대해준 영구임대 아파트에서 생활 시작 (강남구 일원동 도시개발 아파트 101동 306호)
23. 1997. 3월 : 한양대학 공과대학 기계공학부 입학
24. 2002. 2월 : 한양대학 공과대학 기계공학부 졸업
25. 2002. 1 ~ 2002. 7월 : 경기도 안산시 반월공단에 위치하고 있는 (주)파세코
생산기술팀, 간판관리팀에서 근무
26. 2002. 11 ~ 2003. 2월 :구로공단 단지에 위치하고 있는 동우FMS에서
영업사원으로 근무
27. 2003. 3 ~ 2003. 6. 11일 : 호수 시드니에서 관광비자를 가지고, 야채농장과 가정집
애기 관리인으로 근무
28. 2003. 8. 28 ~ 2003. 9. 10일 : 뉴질랜드 오클랜드 백백커하우스에서 생활
29. 2003. 9. 11일 : 아르헨띠나를 경유하여 브라질 쌍파울로시에 입국
30. 2003. 9. 13 ~ 2004. 1 : 브라질 쌍파울로시 봉헤찌로에 위치하고 있는 한인 식당
For you에서 써빙 근무
31. 2004. 1 ~ 2004. 10월 : 브라질 쌍파울로시 봉혜찌로에 위치하고 있는 한인 옷 가계
에서 지배인으로 근무
32. 2004. 12 ~ 2005. 6월 : 브라질 빠라나주에서 한인농장 지배인으로 근무
33. 2005. 7 ~ 2006. 1월 : 브라질 쌍파울로시 봉혜찌로 한인 선두교회에서 교인으로
봉사 활동
34. 2006. 1. 26일 : 한국으로 입국
34. 2006. 2 ~ 2006. 5월 : 대구시 경주스프링공장 핸드폰 스프링검사 현장노동자로
근무
35. 2006. 6 ~ 2006.12월 : 신림동 승지고시원에서 생활
36. 2006. 7. 14일 : 대한민국 특허청에 특허 등록
이 글을 보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 사항들을 나열 한다면?
1. 과연 누구를 위해 발명을 했는가?
2. 왜 생명을 건 모험을 계속 해야만 했는가?
3. 왜 사리원지질탐사단과대학을 도중에 포기해야만 했을까?
4. 왜 한양대학 기계공학부 과정을 5년동안 다녀야 했을까?
5. 왜 정부에서 장기임대로 살게 해준 혜택을 버려야만 했을까?
6. 왜 결혼도 할 능력은 되었는데 결혼을 포기했을까?
7. 왜 해외에서 3년 반이라는 아까운 시간을 무모하게 허비 했을까?
8. 굳이 더 좋은 방법이 있을 적도 한데?
기타 등등
모든 것은 독자들이 판단하기를 바란다.
가족 사항
아버지 : 최신원, 누나1 : 최명희, 누나3: 최명화, 형 : 최광운
어머니 : 리화숙, 누나2 : 최명숙, 누나4: 최명옥, 동생: 최광호
1. 왜 발명의 꿈을 안고, 생명의 위험을 무릎쓰고 38선을 넘어 자유 대한민 국으로 월남하게 되었는가?
1) 동기
① 북한에서 발명의 꿈을 실현하지 못한 것을 한국에서 목표를 이루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② 북한에서 발명의 꿈을 달성하여, 아버지, 어머니에게 내 생에 최고의
선물을 드리지 못한 한을 한국에서 해결하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③ 언제 어디서나 나의 발명을 돕기 위해서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나를
도와준,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동생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④ 암울해진 북한의 현실을 절감하고, 반드시 나의 꿈을 달성하여, 불쌍한 북한을
도울 수 있는 기회를 만들기 위해서....
2) 동기의 해석
① 발명을 하게 된 동기
-나는 어려서부터 매우 철부지 개구쟁이었다.
-나는 한번 밖에 나가면 눈과 이만 하얗고, 나머지 부분은 매우 어지럽게 더럽히며
동네 친구들과 놀다가 집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나의 그런 행동들을 보시던 나의 부모님들은 나에게 “제발 옷만 더럽히지 말고
놀아라“라고 당부 하시곤 하였다.
-그것은 부모님들이 나의 옷들을 매번 빨래하기가 힘에 부쳤기 때문이다.
-우리 집은 황해남도 재령군에서 지대가 비교적 높은 지역이기에 수돗물이 잘
나오지 않아, 빨래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나의 어린시절 하루 일과는 학교 수업이 끝나면, 물통을 등에 지고 3~5회의 물을
길어 나르고, 토끼풀을 뜯고 난 후에 동네 애들과 밥 10시 이상까지 놀다가 집으로
돌아와 잠을 자곤 했다.
-이때 나는 생각하면서 놀기를 매우 좋아했다. 혼자서 공상에 빠져있는 시간이 많았다
-가령 실례로 “ 왜 아카시아 나무의 꽃은 먹을 수가 있는데 열매는 먹을 수가 없을가?
왜 산에 있는 산나물들은 먹을 수가 있는데, 모든 풀을 먹을 수가 없을가?
왜 북한은 먹을 것이 귀할가?“ 등등
-그때 동네 애들이 나에게 붙여준 별명은 다양했다.
-별명은 “잡 생각꾼, 허황한 공상가...등등” 그 별명이 수십가지가 된다.
-그로 인해 때로는 동네 형들에게 매를 맞기가 일쑤였다. 이유는 별명이 하도 많다보니
형들이 나를 별명으로 불러도 나는 그것이 나를 찾는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때로는 그 별명들이 싫어졌다.
-이런 나의 생활들이 발명의 밑거름이 되었는지 모른다.
-그러던 어느날, 아버님이 동화책들을 많이 사다준 일이 있었다. 이것이 나로 하여금
발명의 첫 걸음을 딛는 계기가 되었다.
-책 종류는 다양했다. 그리스의 우화, 발명이야기, 등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나로 하여금 구미가 댕기는 부분은 당연히 발명이야기었다.
-아버님은 나에게 노는데 힘을 쏟지 말고, 책속의 주인공들처럼, 너도 살라고 했다.
-그때는 나도 노는 것에 별 재미가 없던 시기였고, 다른 무언 가에 취미를 가지고 싶
었던 때인지라, 아버님이 너무 고마웠다.
-나는 발명이야기 책들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책속에 빠져들어갔다.
-발명이야기의 내용들은 주로, 에디슨의 발명이야기, 노벨의 발명이야기, 큐리부인의
발명이야기 등등 이었다.
-나는 이 책들을 보면서 밤마다 잠을 설치기가 일쑤였다.
-책속의 주인공들은 발명을 위해서 자기의 인생을 바치었고, 수많은 고난과 난관에도
굴하지 않고, 자기의 목적 달성을 위해 피타는 노력을 하였기에, 나도 그렇게 할 수는
없을가?라는 고민을 하게 되었다.
-에디슨은 백혈등을 발명을 위해서 2만개가 넘는 물질을 태워보고, 수십만번의 실험을
했다는 것을 보고, 발명은 머리로 하지 않고, 수많은 노력의 대가인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발명은 우리 주위의 일상생활에서 쉽게 발견할 수가 있는 것을
가지고 시작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무엇을 발명할가?라는 질문을 가지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우선 공부를 잘 해야겠다는 결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때부터 공부를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부모님들과 형제들은 나를 보고, “갑자기 광혁이가 이상해졌다, 적당히 공부해라,
공부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 실컷 놀면서 공부해도 된다, 그러다 머리가 돌겠다, 등등“
나를 걱정하는 말들을 많이 했다.
-그러나 나는 한번 취미에 빠지면, 누구도 나를 방해하지 못햇다. 너무 열성적이고 진취적
이어서 다들 나를 보고 고집 불통이라고 했다. 하긴 나는 3대 고집 조건을 다 가지고
있다. 우선 성이 최씨, 머리가 반 꼽슬, 이가 옹이
이만하면 나의 고집 조건에 대해 이해가 가리라고 본다.
-나는 공부하면서 생각하기를 좋아했다. 가령 예를 든다면,“운동의 1,2,3법칙을 사람들이
왜 사용하는지? 왜 좋아하는지? 왜 이것이 훌륭한지? 등등“이런 고민들에 빠지면 혼자서
마냥 행복하기만 했다.
-나의 이런 행동을 보다못한 나의 친구 김광성이가 나에게 자기가 읽은 책들을 재미있게
설명해 주면서, 나의 행동을 바꾸어 보라고 타일렀다. 그러다가 머리가 이상해 지고,
사회생활을 못한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친구는 아주 다 큰 성인 같았다.
-그러나 나의 고집을 누구도 꺽지 못했다.
-나는 공부를 해도 공부반, 생각반이었다. 오죽하면 나의 이런 모습을 보고 주변 사람들은
“너는 공부를 하는 거니? 아니면 잡 생각을 하는 거니?” 하기는 수업시간에 선생님들이
질문에도 다른 대답을 하다가 웃음거리가 된 적이 많았다.
-이런 생활의 반복속에서 나는 어느덧 고등중학교 5학년에 이르렀다.
-나는 물리학을 처음 접하면서 신기의 도가니에 빠져들었다. 그것은 내가 생가하던 것들이
물리학과 연관이 되었기 때문이다.
-물리학에 취미를 갖기 시작하고나서, 베르누이 정리를 배우면서 깊은 생각에 빠져 들어갔다.
-당시에 물리학을 가르치던 박경덕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설명하기를, “베르누이정리는 응용
분야가 무긍무진하며, 물리학의 모든 기초라고 했다, 이것을 알면, 에너지 자원을 개발할
수가 있고, 물을 이용한 새로운 발명의 기초가 된다“고 했다.
-나는 순간 “아차, 이것이다”라고 감탄을 하고, 무엇을 발명할것인가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에 물을 이용해서 영구기관을 만들 수는 없을까?라는 고민을 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나의 영구기관 발명의 첫 시작이 출발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누군가가 나에게 “누구나 꿈은 쉽게 가질 수가 있고, 그 꿈을 실현 하려면 수많은
난관과 어려움을 극복해야 한다“고 이야기를 해 주더라도 나의 고집을 꺽을 수가 없었으
이라고 본다.
②북한에서 발명과정
-나는 발명을 하리라고 결심하고 난 후에 많은 고민에 빠졌다.
-내가 과연 해낼 수가 있을가? 다른 많은 사람들이 영구기관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실패
와 난관에 빠졌던가? 어떻게 시작해야 하나? 성공하면 어떻게 될가? 무엇을 공부하고, 무
엇을 해야 하나? 등등
-처음에는 많은 생각과 고민으로 잠을 설치기가 이쑤었고, 흥분되기가 십상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영구기관을 만들려고 노력한 책들을 읽고, 실패원인을 분석하고, 그에
대한 해결책은 무엇인가를 연구하고, 물리학과 우리생활 등 여러 가지 종류의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그런 과정에 1년도 안되어 고등중하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나의 첫 난관에 부딫히게 되었다. 그것은 어느 대학을 가서 나의 연구를 계속할 수가 있
을가?라는 고민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원하는 대학에 간다는 보장은 없고, 대학에 간다
해도 연구를 할 수 있는 길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주저 앉을 수는 없었
다.
-그때 심정은 이래서 발명은 아무나 할 수가 없구나...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북한의 교육제도는 유치원 1년, 인민학교 4년, 고등중학교 6년 모두 11년제 의무교육제도
였다. 대학은 4년제이나 교도기간을 포함하면 거의 5년제이다.
-우선 대학에 가는 것에 모든 것을 몰두하기로 했다. 그래야만 나의 발명을 실현하는 지름
길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때 당시 대학에 가는 제도는 다음과 같다.
우선 전국 시,군 단위로 고등중학교 졸업예정자들을 졸업시험을 보게 하고, 랭킹을 나열
해서 대학, 전문학교에 시험 응시 자격자들을 먼저 선발하고, 나머지는 군대나 사회에
진출시키는 제도 였다.
-만일 대학에 실패하면, 나의 꿈이 무산된다는 절박관념을 가지고 졸업시험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대학시험 응시자격을 주어진다 해도 대학에 가서 또 시험을 치루어야 하기 때
문에 공부를 게울리 하면 안되었다.
-나는 친구들과 함께 코피가 나도록 공부를 했다.
-1차 시험과목은 3개었다. 김일성,김정일 혁명력사, 수학, 영어, 모두 30점 만점
-황해남도 재령군내에 있는 1988년 고등중학교 졸업예정자들은 약 2000여명이었다.
여기서 1등~80등까지 대학 응시자격이 주어지고, 81등 ~ 120등까지 전문학교 응시작격
이 부여된다. 거의 200:1이었다. 피타는 노력이 필요했다.
-대학에 가서 2차 시험과목은 6개이다.
김일성, 김정일의 혁명역사, 수학, 영어, 물리, 화학, 체육
대학 응시시험은 2:1의 경쟁률로 북한에 있는 모든 대학이 동일 제도이다.
북한은 모든 것이 계획대로 움직이는 국가이다.
-나는 1차 졸업시험에서 56등을 했다, 1등과의 차이는 0.9
-비교적 좋은 성적을 받았지만, 아쉬움이 많았다. 좀더 등수가 올라갈 수가 있었을
테데...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만족하고, 내가 희망하는 대학을 지망서에 써야 했다.
-북한의 폐쇄된 사회에서 정보공유는 나의 주변 사람들 뿐이었다.
-그래서 희망대학을 1지망: 평양 김형직 사범대학
2지망: 함흥 화학공대
3지망: 평양 전기단과대학
이 중에 3지망 평양 전기단과대학에 시험보기를 강력히 휘망했다.
-북한에서는 내가 희망한다고 해서 그 대학에 가서 시험을 보는 것은 어렵다.
-대학에서 모든 시,군에 응시 작격이 계획적으로 조금씩 배당되기 때문에 응시
자격을 가지고 비리가 많았다.
-나는 내가 희망한 지망서와 관계없이 바라지도 않던 황해북도 사리원시에 있는
지질탐사단과대학에 응시자격을 받게 되었다.
-사회 첫 단추가 잘 못 끼어지는 순간이었다. 처음부터가 난관이었다.
-그러나 희망을 갖고, 사리원지질탐사단과대학에 응시시험을 보기로 했다.
-나는 사리원지질탐사단과대학에 가서 2차시험과목 6개를 모두 치루고 결과를
확인해보니, 내가 사리원지질탐사단과대학 응시자들 중에서 2등을 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서 내가 다니던 고등중하교에 찾아 갔더니 담임선생님이
내가 첫 대학 입학신고식을 했다고 매우 좋아 했다.
-집에서는 내가 형제들 중에서 유일하게 실력으로 혼자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
다고 매우 기뻐했다. 형제들 중에서 대학생이 2명이었다.
-나는 입학을 했다는 안도의 숨을 쉬었지만,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연구를 위해서는 지질학과가 아니라, 물리탐사학과로 바꾸기로 결심하고, 나의
담당교수님을 찾아가서 과를 바꾸겠다고 청을 올렸다.
-그때 담당교수님은 나에게 “너는 이미 내가 우리 대학 지질학 교수로 점찍었
으니, 다른 생각을 하지 말고 공부에만 열중하라“고 했다. 이미 나의 아버님
과도 그렇게 하기로 결정을 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자식을 걱정하는 것은 좋지만, 항상 나에게
내 운명은 내가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고 늘 강조하시던 아버님이었기에 실망감
은 매우 컸다. 그래도 나는 나의 의지를 굽히지 않고 더 강하게 밀어 부쳤다.
-나는 대학 학장님에게 편지를 쓰고, 대학 교무부장님을 만나서 강력히 청을 요
청했으나, 나의 담임교수님이 나를 인재로 낙인을 찍었다고 하면서 나의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나는 이대로 주저 앉을 수가 없었다.
-나는 하는 수없이 마지막 카드를 쓰기로 했다. 속된 말로 막가파 행동을 하기로
했다. 나는 대학측에 이야기를 한마디도 하지 않고, 부모님들과 친구들에게 한마
디도 하지 않고 친척집들을 떠돌면서 6개월간 돌아다니면서 북한의 여러지역을
돌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북한은 집마다 전화기가 없기에 일일이 확인이 어려워
서 나를 찾기가 어려웠다.
-나는 6개월간의 여행을 끝내고 대학에 돌아갔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선택이었다. 대학측에서 조직생활 낙오자로 찍혀서 더
이상 대학에 다닐 수가 없었다.
-나는 내가 바라는 희망사항 이었지만, 모든 이에게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내가 원하는 대학을 다시 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
다. 북한에서는 대학을 한 개 이상 다닐 수가 없기에 나는 이렇게 해서라도
내가 원하는 대학에 가서 공부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난관은 또 있었다. 그것은 다시 대학에 가려면, 5년이라는 노동기간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고, 집에서도 부모님들은 내가 다시 대학에 가지 말라고
하면서 극구 반대 했다.
-집에는 결혼생활에 실패한 넷째 누님이 있었고, 귀 고막이 파손되어 군에도 가
지 못하게 된 동생이 있었고, 또 나까지 일이 그렇게 되자, 나의 부모님들의
근심걱정은 많았다.
-당시 북한의 경제사정이 어려워져 가고 있었다. 그래서 식량사정이 넉넉하지
못하여서 먹고 사는 것도 걱정거리였다.
-그래도 나는 영구기관만 해결하면 된다는 절박관념을 가지고 더 연구에 몰두하
게 되었다. 그리고 부모님들에게 행복을 드리고 싶은 심정 뿐이었다.
-나는 연구에 필요한 것이라면 모두 동원했다. 내가 다니던 철재일용품공장에서
실험을 한답시고, 많은 용접봉과 자재를 낭비했고, 집에 있던 철 바켓쯔, 누나
예물 이불장 재료를 모두 망가 뜨렸다.
-직장 사람들은 젊은 사람이 의욕을 가지고 그랬다고는 하지만, 집에는 가정
형편도 어려운데 부모님들은 하도 어이가 없어서 말을 못했다.
-그러던 어느날 동생이 나에게 “나는 형을 믿어, 형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최대한 모든 것을 도와 줄게“라고 말을 했다.
-나는 그런 동생에게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그러는 동생이 어느날 드닷없이
“형,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서 도와 달라고 하자”고 나에게 졸랐다.
-나도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것도 좋은 생각이라고 판단하고, 평양에 가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서 도와달라고 부탁하기로 하고, 동생과 같이 평양에
몰래 들어가게 되었다.
-북한에서는 평양에 출입허가증을 가지고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만약에 몰래
들어가다 적발되면 강제노동소에 끌려가 지옥같은 노동을 30일을 해야 한다.
-나는 동생과 함께 기차 승강기에 매달려 단속을 피하면서 평양에 들어가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거처하고 있는 중앙노동당청사로 찾아
갔다. 중앙노동당청사를 근무하고 있는 병사에게 나의 사정이야기를 했더니,
지금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없고, 설사 있다해도 그런 사연으로 만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할 수 없이 동생과 함께 기차를 타려고 대동강역에 갔다가 순찰하던 안전원
(한국에서는 경찰)에게 붙잡혀 조사를 받게 되었다. 그러다가 동생이 무엇인가를
속삭이더니 창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이때 동생이 창문으로 도망치자고 하면서
자기가 먼저 창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내렸다. 나도 덩달아서 뛰어내렸다.
높이는 꽤 되었으나, 그때는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재령으로 무사히 내려 온 후에 동생이 나에게 안전원에게 사정이야기를 하고
북한 돈 100원을 뇌물로 주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그 안전원이 내가
나의 연구를 포기하지 말고 꼭 성공하기를 빈다는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고마우면서, 뇌물을 꼭 받았어야 하는가를 생각했다. 왜냐하면 북한에서
100원은 웬만한 사무원 한달 월급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일 후에 동생이 당중앙위원회에 사연편지를 써서 올렸다고 했다.
그로 인해서 나는 재령군 당 조직비서를 만나서 핀잔을 들어야 했고, 과학기술위원장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나에게 되지도 않는 이론을 가지고 떠들지 말라고 했다.
-나는 동생으로 인해서 고통을 감수해야만 했다.
-나는 고등중학교에서 같이 공부를 했고, 전국의 대학들에 가서 공부하고 있는 친구들에
게 편지도 쓰고, 방학 때 만나서 연구에 필요한 자료를 교환 하면서 연구활동을 계속해
나갔다.
-그 중에는 포기하라는 친구들도 많았고, 끝까지 하라는 친구들도 많았다. 솔직히 계속
진행하라는 친구들이 더 많았다.
-나는 그런 세월 속에서 군대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집에서도 부모님들의 걱정도
덜어 드리고, 식의주 문제도 해결 되고, 탱크부대에서 근무하면 오히려 편하게 연구할 수
있다는 기대감 속에 군에 가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나는 1992년 8월 12일 군에 자원 입대 했다.
-북한에서 대학생들이 군에 가는 것은 자원입대가 아니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내가 군에 가기 전날에 고등중학교 친구들 중에 대학에 간 친구들이 마침 여름 방학기
간이어서, 나도 몰래 술,담대, 음식을 준비 해 가지고 우리 집에 모였다. 거기에는 담임
선생님도 왔었다. 북한에서 식의주 문제가 심각해서 음식을 준비하는 것은 많은 돈이
필요로 했다.
-나는 그런 친구들이 너무 고마웠다. 유난히도 친구들 관계는 좋았던 나로써도 그날은
많이 미안한 마음 뿐이었다. 나의 부모님들도 마찬가지었다. 왜냐하면 아들이 군에 가
는데 부모님들이 준비해야 할 것을 나의 친구들이 준비를 해가지고 집에 모였기 때문에
어머님은 부엌에서 혼자 울고 계셨다.
-송별회를 마치고 친구들과 담임선생님이 돌아간 후에는 나의 부모님들과 형제들이 많이
울었다.
-나는 1992년 8월 11일 군에 갈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서는 순간, 나를 그토록 아끼고 사랑
해 주시던 외할머님께서 나를 붙잡고 놓아 주지 않았다. 년세가 74세가 되어서인지, 마지
막으로 외손주를 본다는 것이 못내 아쉬었던 모양이었다.
-북한에서 군복무 기간이 10년이기에 외할머님의 행동은 당연한 것이었다.
-나는 그런 외할머니를 뿌리치고 기차역으로 달려갔다. 이것이 내가 좋아했던 외할머님과
의 마지막 이별이었다. 기차역으로 가면서도 뒤를 자주 돌아 보았는데 외할머님의 울음소
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내가 기차역에 도착하니, 많은 친구들과 부모님, 나의 형제들이 모여있었다.
-이때 동생은 보이지 않았다. 이유는 눈물이 하도 많이 나와서 내가 떠나는 것을 보지 못
한다는 이유다. 친구들은 나에게 북한 돈 10원씩을 주면서 가다가 사용하라고 했다.
-나는 군에 가면 돈이 필요가 없기에 어머니에게 110원을 주었다.
-어머님은 그때 나에게 충격적인 말씀을 했다. “광혁아, 너 남조선에 갈거지?” 내가 왜?
라고 질문하자, 어머님은 “너는 머지 않아 북한을 떠나게 될거야, 너는 내가 죽으면 훌
륭한 사람이 되어서 북한에 돌아올거야“라고 나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군에 가는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이 이해 할 수가 없었고, 북한에서는 그런
말을 하면 바로 총살 감이기에 내가 받은 충격은 더욱 컸다.
-유난히도 점을 잘 보시던 어머님이었기에 내가 받은 충격이 더욱 컸다. 아마도 어머님이
나에게 준 영감이기도 했다.
-나는 사랑하는 부모님들과 친구들, 사랑하는 고향산천을 차창 너머로 바라보면서, 피눈물
을 삼키면서, 기차에 몸을 싣고 이별해야 했다.
-이것이 마지막 이별이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었다.
-나는 달리는 기차안에서 많은 것을 생각했다. 왜 나의 인생은 모질고도 험난 한가? 왜 힘
든 과정만 보고 달려야만 하는가? 내가 가는 길은 나도 모르는데 내가 왜 살아야 하나?
-어느덧 기차는 황해남도 해주시 군 초모소에 도착했다. 여기서 간단한 신체검사와 서약식
을 하고 군복을 입고, 강원도 고산시로 향했다.
-강원도는 북한에서 군인이 제일 많은 지역이었다. 강원도에는 북한군 제 1군단이 위치
하고 있으며, 군 인원만 하더라도 거의 10만명에 이룬다. 제 1군단에는 5개 사단과 5개
여단이 있고, 군단 직속 7개 대대가 있다. 이외 군단 사령부, 군단 후방부, 군단 병원 등
모두 합치면 10만명이라는 숫자가 어림잡아도 나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는 북한군 제 1군단 제 13보병사단 직속 통신대대에서 신병교육을 2개월간 받았다.
-나는 같은 신병동기들 중에서 공부, 체육 등 모든 분야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았다.
-그리고 희망 병과를 써내라고 할 때 사단 직속 탱크대대에 지원했다. 그러나 나의 신병교
육담당 소대장님은 나를 좋게 보아서 그런지 자기가 속한 제 13사단 직속 통신대대 유선
중대 3소대 2분대에 소속 시켰다.
-나는 할 수 없이 다른 방법이 없을 가?를 고민하며 군 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첫날부터 고참병들은 나에게 구박을 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가 탱크대대를 좋아
하기 때문이었다. 자기들의 명예를 더럽힌 다는 이유에서였다.
-나는 참기 힘든 고통의 연속이었다. 할 수 없이 방법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내가 살던 고향 친구의 삼촌이 제 1군단 사령부 작전과장으로 있다는
정보를 알았다. 그래서 군단 사령부에 직접 찾아가서 나의 희망을 요청하리라 결심을 했
다. 내가 군복무를 하던 지역에서 군단 사령부까지 약 80Km이라는 이야기를 주변 동료들
에게서 들었다.
-나는 작전과장을 만나기만 하면 내가 탱크대대에 간다는 희망을 안고, 곧 실행에 착수했 다. 우선 이제 신참이라 고참의 허가를 받는 다는 것은 힘들고, 몰래 다녀오는 길밖에 없
다고 단정 지었다.
-1993년 1월 중순 밤 10시에 아무도 모르게 부대를 탈출하여, 강원도 제 1군단 사령부가
위치하고 있는 회령군으로 향했다.모든 헌병초소를 막무가내로 통과해서, 거의 뛰다싶이 하여 다음날 아침 6시경 제 1군단 사령부에 도착한 순간 민간인들로부터 이상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이상한 이야기는 엊그제 입사한 군인이 탈영을 했다는 것이다. 북한은 언론매체가 통제되
어 있어서 소문이 가장 빨랐다. 그것이 나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직감했다.
-나는 혼자서 판단하기를 이대로 작전과장을 만나면, 탈영병이 되어버린 나를 만나지도 않
을 것이고, 설사 만난다 해도 나의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는 다는 것이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에 나는 자수해서 구분대로 다시 돌아가기로 했다.
-나는 군단지휘부 헌병초소에 자진해서 찾아가서 이유를 설명하고, 다시 구분대로 돌아왔
다. 그때부터 나는 고참병들의 비난과 매를 수없이 맞아야 했다.
-허구한 날 이유없이 때리고 구박하고, 하지만 나는 그것이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고, 나의
발명의 꿈이 무산되는 것이 더 두려웠다.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나는 13보병사단 사단정치위원장을 만나기로 하고, 편지를 보냈다. 그랬더니 나에게 사단
정치위원장의 면담이 있었다. 거기서 나는 한참동안 욕을 먹고, 나의 희망을 포기하라는
권유성 압박을 받았다. 사단에서 랭킹이 사단장 다음이었다. 그런 사람이었기에 실망감은
더욱 컸다.
-나는 고참병들의 압박에 참기가 고통스러워서 통신대대 정치위원을 만나서 허심탄의하게
이야기를 하려고 점심시간에 30분 잠깐동안 자리를 비운사이 부대에서는 또다시 내가
부대를 탈영했다고 야단 법석이었다.
-나는 참으로 억울하고 분통해서 어디다 대고 하소연을 해야 할 지 몰랐다.
-하는 일마다 고통이 뒤따르고, 하는 일마다 난관 그 자체였다.
-그래서 고민 한 것이 군복무기간에 군 생활을 잘 하지 못하면 강제로 제대시키고, 산골
농장에 보낸다는 정보를 입수해서, 이미 본의 아니게 탈영이 2회가 있었기에, 나는 1회
만 더 탈영하면 된다는 오기가 생기었다.
-그리고 산골농장에서 아무도 모르게 연구를 해보리라 결심했다. 그래서 1993년 8월 작
심하고 탈영하여 10일 동안 구분대 군처에 터를 잡고 생활했다.
-아닐가 다를가 온 부대가 내가 남조선에 갔다고 야단법석이었다.
-나는 10일 후에 구분대에 스스로 찾아갔다. 그야말로 신출귀몰작전이었다.
-나는 기다리기만 하면 강제 제대 될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생각뿐
부대 지휘관들은 또 다시 나를 관대히 용서해 주었다.
-나의 오기라는 것을 간파 한것이다.
-그때 나는 자살을 하려고 결심했다.
-그런데 그때 나의 어머님이 최전방에 찾아 오셨다.
-부대에서 나의 의지를 꺽을 사람은 어머님밖에 없다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나는 그때 솔직한 심정이라면, 그 누구라도 총이 있으면 죽이고 싶었다.
-나에게 있어서, 혼자 자살을 결심했는데, 어머님이 불명예스러운 일로 최전방에까지
오게 한 것이 죽음보다 더 싫었다.
-일단 어머님이 오셨으니, 자살은 뒤로 미루기로 했다.
-그런데 눈물이 앞을 가려서 어머님을 마주 보질 못했다.
-어머님과 하루를 같이 지냈는데 헤어질 때 한번 뚫어지게 쳐다 보고는 그 전에 한번도
마주 보질 못했다. 어머님은 밤새동안 나만 쳐다보며 눈물을 훔치고 계셨다.
-나는 세상이 야속하기만 했고, 이대로 죽으면 얼마가 좋을가?라는 생각만 했다.
-다음날 아침 어머님은 나에게 또 다시 이상한 말씀을 했다. “광혁아, 너 남조선에 가라,
너는 반드시 가게 되어 있어, 가게 되면 친척이 있어, 너는 북한에서 더 이상 살수가 없다,
...“그 이후의 말씀은 눈물이 비오듯 흘러내려서 다 듣지 못했다.
-그 날 나는 마지막으로 어머님의 뒷 모습을 바라보면서 아픈 마음을 달래면서 많은 눈물
을 흘렸다.
-그것이 사랑하는 어머님과 마지막 이별이었다. 나는 어머님께 헤어지면서 “어머님, 걱정
마세요, 건강하세요“라는 마지막 당부를 했다. 그때 어머님은 나에게 마지막으로 이런 말
씀을 했다. “광혁아, 그냥 내가 없다고 생각하고 살아라, 그리고 건강해라...”
-나는 그때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세상이 야속하고, 세상이 싫었다. 그래서
어머님의 부탁인데...라고 생각하고 그 후에 부대 생활에 잘 적응해 갔다.
-나는 나의 꿈을 포기로 결심하고 군 생활에만 열중했다.
-그러던 어느날, 부대에서 통신가설 임무가 주어져서 고참병과 함께 통신선로를 수리하고
부대로 돌아오다가 잔디밭에 앉아서 무기소재를 하다가 언뜻 기발한 현상을 발견했다.
-북한군이 소지하고 있는 AK자동보총에 탄창속에 들어있는 원형 스프링이 나를 흥분케
했다. 그것이 바로 내가 원형스프링을 이용한 영구기관의 대 발견의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부터 또 다시 연구를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안고 살았다. 주머니에는 스프링종류
만 해도 여러 가지를 늘 넣고 다니면서 연구를 했다.
-이런 나의 모습을 보고 나를 그렇게 구박만 하던 고참병들이 나에게 “너는 참으로 좋은
사람이야, 우리가 잘 못했어, 너는 참으로 훌륭하다, 그런 고난 속에서도 네가 할 일을
하니 눈물이 나온다, 우리가 너에게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나는 이미 그들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모든 것이 나로 인한 것이기에 누구를
탓하지 않았다.
-나는 날마다 행복한 연구를 했다. 이미 성공한 거나 다름이 없었다고 믿고 지냈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1994년 7월 8일 김일성주석의 사망으로 인해 전군이 비상
계엄령 상태에 접했다. 외출도 삼가고, 노래도 못하고 있는데, 1994년 7월 14일
나를 아끼고 사랑해 주시던 외할머님께서 나를 걱정하시다가 쓰러져 실신해서
돌아가셨다는 편지를 받고 또 다시 슬픔에 빠져야만 했다.
-김일성주석의 사망으로 모든 통행이 금지 되어서 사망 휴가도 갈 수가 없었다.
-그때는 김일성주석의 애도 기간을 처음에는 30일, 100일, 1년으로 연장하였다.
-그리고 1994년 8월 친형님의 결혼식에도 참석 할 수가 없었다.
-또 다시 나에게 시련이 찾아 왔다.
-1994년 9월 4일 우리 소대는 북한군 제 1군단 직속 69포병여단에 차출되게 되었다.
-그것은 내가 소란을 많이 피워서, 13사단 지휘부에서는 우리 소대를 눈에 거슬렸던
모양이다.
-나 때문에 부대가 좋은 근무지역에서 더 힘든 지역으로 차출되어 가게 된것이 같은
소대 대원들에게 차마 머리를 들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찌하랴...이미 엎어진 물그릇
인데...
-그래도 고참병들은 나를 따뜻이 위로했다.
-“너는 무엇을 하는 지는 몰라도 우리는 너를 믿는다. 반드시 성공해서 우리를 도와
달라, 어차치 군복무는 고생하는 건데, 우리는 괜찮아, 너라도 꼭 성공해라“
-나는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더욱 힘을 내서 연구에 빠졌다.
-그러던 다음해 1995년 9월 나는 또 다시 슬픔에 빠졌다. 그것은 내가 존경하던
아버님께서 뇌출혈로 쓰러져서 사망직전에 있다는 편지를 받았다.
-그리고 몇일후, 어머님이 1982년에 사고로 인한 후유증으로 사망직전에 이루렀다는
것이었다. 나는 계속되는 충격에 휩쌓여서 지내야 했다. 그때는 김일성주석의 사망
애도 기간이었기에 집에 갈 수가 없었다.
-나는 아픈 마음을 달래며 애도 기간이 끝나가기만을 기대하며 지냈다.
-그렇게 지루하게 기다리던 애도 기간이 1995년 12월 초에 풀렸다.
-나는 집에 사망휴가를 신청하려고 여기저기 뛰어 다니었다.
-김정일국방위원자의 지시로 전군에 있는 개개의 중대들에서 1명씩만 사망휴가를
보내라는 것이었다. 나는 당연히 내가 가는 것으로 여기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힘있고, 빽있는 군인만 거짓말 사망휴가를 내고 집에 가는 것을 보고,
나는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그 때 처음으로 북한에 대한 반항심이
생기었고, 복수심만 가득차게 되었다. 지금까지 나를 위해서 산것도 아닌데 이렇
게 야속할 줄은 몰랐다.
-그 후의 나의 생활은 완전히 막가파식이었다. 누구도 나를 건드리지 못했다. 오죽하면
부대 지휘관들까지 나를 달래며 용소해 달라고 빌었다. 그러나 나는 그 어떤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휘관들에게도 나는 반말했다. 세상이 눈에 보이는 것이 없
었다.
-나는 더 이상 북한에서 살기가 싫어졌다. 그때 어머님의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역시 어머님은 나의 앞날을 예고 하고 있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나는 처음에 중국으로 가려고 결심 했지만, 가는 과정이 너무 힘이 들어서 무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왕 모험을 할 바에는 한국으로 가려고 결심했다.
-한국으로 가서, 그들이 죽이든 살리든 그때 가서 보자“라고 마음을 가다 듬었다.
-어차피 죽으면 죽고, 살면 살고, 남조선에서 살려주면 북한에서 못다 이룬 발명을
꼭 성공해서 다시 북한에 돌아오면 된다는 결심을 했다.
-그리하여 1995년 12월 20일 새벽 2시경 몰래 부대를 탈영하여 3일만에 38선을 넘어
강원도 인제군 국군 제 12사단으로 월남하게 되었다.
-38선을 넘어오던 과정은 생략하기로 한다.
-이로써 내가 북한에서 꿈꾸고 고대하던 발명의 쓴 맛만 체험하고, 한국에서 연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뒤늦게 알았지만, 이 모든 계획은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발명을 잘 할 수 있도록
역사 하시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 한국에서 발명 성공의 과정
*한국에 도착한 소감
- 솔직히 꿈만 같았다. 모든 것이 새롭고 신비의 세계에 빠져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한국에 도착해서, 정보 조사기관에서 조사를 받을 때, 내가 북한에서 진행한
발명에 대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다행이도 더 이상 따지지 않았다.
-나는 그냥 고참병들의 구박에 못 이기고, 배가 고파서 한국에 오게 되었다고 진술
했다. 솔직히 거짓말을 본의 아니게 한것이 미안하기도 하다.
-그러나 내가 북한에서 발명으로 인해서 주위사람들이 받은 고통을 이야기 하고 싶지
도 않았고, 또 나 자신도 발명이 성공되는 그날 까지 그 누구에게도 이야기를 하지
않고, 혼자만 알고 연구 하리라 결심을 했기 때문이다.
-지금에서야 솔직히 이야기를 하지만, 한국에서도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내가 무엇을 위
해 사는 줄을 몰랐다.
-1996년 1월 25일 서울시에 위치하고 있는 프레스센터 20층에서 전국 생방송 기자회
견을 할 때에도 내가 왜 한국에 귀순하게 되었는지 내 스스로 이야기를 한것이 아니고
사회자분이 소개를 할 정도였다.
-처음에 북한을 떠나올 때는 내가 살아서 한국에 도착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살아도 몸 어딘가에 상처를 입거나, 팔다리중에 하나는 없이 도착한다고 믿었기 때문
에 내가 무사히 한국에 도착한 것은 하나님의 기적 없이는 상상도 못한다.
-나는 남북한 군사분계선 지역에서 근무한 것이 아니고, GP뒤에서 근무를 했고, 아직
까지도 지뢰를 본적도 없고, 지뢰에 대해서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그래서 처음 한국에 도착 했을 때, 나를 보고 다들 간첩이라고 했다. 내가 넘어온 길
과 과정을 볼때 특수교육을 받지 않고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하기는 나 자
신도 모르는 일인데,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이론이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만이 이해가 갈
부분이다.
-나는 6개월간의 정보기관생활을 마치고, 1996년 6월 30일, 드디어 자유대한
민국에서 첫 자유인으로 생활을 시작했다.
-정부에서 받은 정보비 1000만원, 정착금 1700만원을 받았다.
-나는 이것을 가지고 한양대학에 입학하여 발명을 시작하기로 했다.
1) 한양공대 기계공학부에서의 연구 활동
-1997년 3월, 한양대학 기계공학부에 입학하여 공부를 시작했다.
-등록금은 정부에서 절반 보조, 한양대학에서 절반 보조 였다. 생활비는 북한
사회의 실상을 알리는 강의료, 자매결연을 맺은 강변교회에서 월 30만원, 기타
는 사회봉사단체로부터 조달 받으면서 공부를 시작했다.
-모든 연구 활동은 극도의 보안에 부치기로 했다. 왜냐하면, 내가 북한에서 쓰라
린 경험과, 내가 이야기를 한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고 “미친사람 또 한명
탄생했네“라고 놀릴 것은 뻔하기 때문이다.
-우선 기계공학에 관련된 과목을 모두 수강하는 것이 목표였다. 대학에서 공부
하는 기간을 5년으로 계획했다. 5년을 다니자면, 졸업학점 140만점을 조종하여
5년에 맞추기로 했다. 그러면서 발명에 필요한 과정인 경제, 경영, 법학, 특허,
등 다양한 수업을 더 듣기로 했다.
-그리고 좀 더 필요한 과목은 다시 수강 하기도 하고, 스프링 분야는 집중 적으로
공부했으나 나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그것은 내가 원하는 원형 스프링에 대한 이론
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서울시에 있는 소문난 교보문고, 영풍문고, 서울문고, 등 크다는 문고
들을 찾아 다니면서 원형 스프링에 관련한 자료를 찾으려고 했지만, 찾지를 못했다.
-인터넷을 이용해서 검색을 많이 해 보았지만 발견 하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걱정이 많았다. 원형 스프링에 관한 내용이 있어야 연구를 진척할 수가
있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안타가울 뿐이었다.
-그래서 일반 졸업노문으로 한양대학에 제출 할 것을 생각했으나, 안된다고 묻혀 버
리면, 나의 노력이 물거품이 될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결심 한 것이 어떤 일이 있
더라도 원형 스프링을 만들어서 실험을 해보리라 마음을 먹었다.
-서울시와 경기도 일대에 있는 크고 작은 스프링회사들에 원형 스프링을 만들어 줄것을
오다로 주었다. 그리고 원형 스프링을 한 개를 만드는 수고비는 1000만원을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나에게 오는 답장들은 하나 같이 이런 대답이었다.
“우리가 30년 이상 스프링에 종사하며 일하고 있지만, 이런 오다는 처음이며,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한국 산업 공장들에서는 원형 스프링의 수요가 없다“
-대한민국에 가장 큰 스프링회사 오다를 받는 분의 이야기이다.
-나는 한편으로는 다행이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아직 만들지 않았
다는 증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절반은 성공작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어떻게 원형 스프링을 만드느냐가 관건 이었다. 때로는 방황하기도
하고, 술로 밤을 지새기가 일쑤었다.
-나의 이런 행동들을 보고 주변사람들은 내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고 이야기가
많았다. 공부에만 치중하던 사람이 갑자기 이상한 말만 하고, 술만 먹으니 답답했던 모양
이다. 그 나이면 장가를 가야 하고, 회사에 취직 걱정을 해야 하고, 한국에 어떻게 빨리 적
응해야 하는 지 생각해야 하는데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이미 발명을 성공하기 전에는 결혼도 포기한 상태였고, 직장도 내가 원하는
회사를 잡아야 하겠기에 세상사람들이 보는 방식과 많이 어긋난 생활이었다.
-나는 대학 등록금 1000만원을 지불하고 한양대학을 5년간 공부하였다.
왜냐하면, 정부와 한양대학에서 지원하는 등록금 제도는 4년간 이었기 때문이다.
-2002년 2월 20일 한양공대 기계공학부를 쓸쓸하게 졸업하게 되었다.
-다른 친구들은 연봉 2500만원 이상을 받기로 하고 좋은 회사에 취직하고 있는데, 나는
발명이라는 무거운 짐을 안고 졸업을 해야 했으니, 누구도 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렇게 5년간의 대학 생활을 씁쓸하게 졸업해야 했다.
2)(주)파세코에서 연구 활동
-우선 실험 셋트를 만들려면 생산기술을 알아야 된다고 생각하고, 안산시에 있는 파세코에
생산기술팀에 지원했다. 여기서 생산기술을 배우고 회사에서 나에게 다른 업무를 시키게
되어, 나는 본의 아니게 회사를 그만 두었다.
3)동우 FMS에서 연구 활동
-그 다음 생각한 것이 모터에 관한 연구가 필요로 했다. 그것은 원형 스프링을 이용한 발전
시스템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구로공단에 위치하고 있는 동우FMS 에 영업사원으로 월급 100만원
에 입사하게 되었다. 나의 목표를 위해서 월급이 문제가 아니었다.
-모터에 대해 어느정도 배우고 난 후에는 곧바로 회사를 그만 두었다.
사장님과 직원들에게 미안하지만, 내가 갈 길은 가야 했다.
4)한국에서 첫 실험 셋트 완성
-비록 원형스프링은 만들지는 못했어도, 우선 발전 시스템을 한번 만들어 보아야 연구가
잘 될 것 같았다. 그래서 구로공구 상가, 청계천 기계공구 상가, 종로 상가, 신도림 지역
공구상가, 부천시 지역 공구 상가, 등 여러지역을 돌아 다니면서 필요한 부품들을 구입하
였다.
-집에 있는 공구들과 옷장들, 등 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동원하였다.
-집의 방이 17평이었는데, 빈틈이 없을 정도로 난장판이 되었다. 이웃 집들에서는 신고하고
난리 법석이었다. 한마디로 시끄럽다는 반응이었다. 나는 미안한 마음이 있었지만, 어쩔 도
리가 없었다.
-여기에 들어간 비용은 어림잡아서 1200만원이 들어갔다.우리은행에서 대출 500만원, 신용
카드 사용액이 100만원 이상, 나의 전 재산을 투자 했지만, 실험은 성공 적이었다.
-우선 전기는 생산이 되었고, 발전 시스템을 내 눈으로 확인이 되었다. 물론 나의 연구 목
표는 달성 한 것이 아니었다.
-단 원형스프링만 있으면, 그 어떤 실험도 자신이 있다는데 목적이 있었다.
-이어서 원형스프링을 만들기 위해서 여러 스프링회사들을 방문했으나, 원형 스프링의 제
작 어려움에 봉착하여, 포기해야만 했다. 그런데 문제는 당장 살아 가는 것이 우선이었다.
-백수에게 가진 돈이 100만원이 채 안 되는데, 우선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호주에 가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호주에 대해서 잘 몰랐지만, 이민을 가서라도 해외에서 만들려고 결심했다.
막연한 마지막 희망이었다. 선진국은 원형 스프링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에서였다.
5)호주에서의 연구 활동
-2003년 3월, 집을 비우고 무작정 호주 시드니로 출국했다. 호주에는 아는 사람도 없고, 기
다리는 사람도 없었다. 그냥 모험을 한 것이다.
-그러나 영어도 모르는 내가 호주에서 연구를 한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깨는 겪이 되
어 버린 셈이다. 우선 영어가 급선무고, 돈도 급했다.
-그래서 영어도 배우고, 돈도 벌고, 나 혼자만의 생각을 가질 수 있는 일을 찾기 시작했다.
-한인들의 도움으로 나는 한인 야채농장, 호주인 가정부로 들어가서 3개월간 일을 했다.
그리고 비자 완료 시한이 다 되어가자, 2003년 6월 다시 한국으로 입국 했다.
6)브라질에서의 연구 활동
-호주에서 11시간의 긴 여행을 마치고 집에 들어서니, 방안은 그야말로 전쟁판이었다. 먼지
가 3월간 쌓이여서 1cm정도가 되었고, 여기 저기 흩어진 볼트와 나사들, 우편함에는 고지
서가 두둑히 쌓이고, 살아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싫어졌다.
-“그래도 쓰러지거나 나약해 지면 안된다, 고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형제들이 성공하
기를 바라고 있다, 죽더라도 연구를 하다가 죽자“라는 각오를 가지고 5시간 동안 방안 청
소를 하고, 다시 생각을 가다 듬었다.
-무조건 원형 스프링을 만들기 위해서 해외로 나가리라고 결심을 굳게 가다듬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미국이었다. 미국은 기계산업이 발달이 되어 있고, 내가 북한군에서
보았던 원형스프링을 미국에서는 구입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였다. 미국은 북한군에서
사용하고 AK자동보총을 쉽게 구입할 수 있다고 믿었다.
-미국에 이민을 먼저 가있는 탈북자 출신의 형님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에 있을 때 친형님, 친 어머님처럼 지내던 분들이 나더러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미국에 들어오면 최선을 다 해서 도와주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마지만 희망을 안고, 수습에 들어 갔다. 우선 캐다다를 경유하여 미국으로 몰래 들어
가려고 계획을 세웠다. 강남에 있는 어학연수원 브로커를 통해서 캐나다 어학연수로 가기
위한 준비를 철저히 했다.
-나와 자매결연을 맺은 강변교회 담임목사님의 추천서, 대학 선배님의 회사 채용서, 이모
님의 도움으로 은행 잔고 1억 5000만원, 등 기타 서류를 완벽하게 준비했다.
-그러나 캐나다 대사관에는 내가 신청한 어학연수비자에 대해서 cancel을 했다. 이유는 한국 국정원에서 내가 불안한 인물이고, 혼자이고, 어학연수가 목표가 아니라고 충고를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담당 형사는 어학연수 브로커에게 나를 도와주지 말라고 협박을 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한국이 싫어졌다. 그냥 모든 사람들이 이유없이 싫어졌다.
-여기서 포기하지 않고 담당형사와 국정원의 눈을 피하기 위해 뉴질랜드로 가서 남미로
가려고 결심했다.
-2003년 8월 29일 뉴질랜드 오클랜드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정부에서 준 영구임대 아파트는 정부에 헌납하고 보증금 600만원만 가지고 무작정 모험
의 길에 올랐다. 나는 이상하게도 이사하는 날이면 비가 온다. 그날도 비가 장대비가 내
리었는데 비행기가 이륙하지 못하는 줄 알고 많이 걱정했다.
-그때 이모님은 마중나오려고 했다가, 내가 못오게 해서 마중 나오지 않았는데, 혼자
서 내가 불쌍해서 많이 울었다고 했다.
-나는 그렇게 혼자서 쓸쓸한 마음을 달래면서,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뉴질랜드로 향했다.
-뉴질랜드에 아는 사람이 없어서 걱정을 많이 했는데, 하나님은 거기서도 도움의 사람을
만나게 해 주셨다. 마침 뉴질랜드 헤밀턴에서 호텔을 운영하고 계시는 한인 한분이 다른
사람을 픽업하려고 나와 있어서, 나는 그에게 무작정 도와 달라고 청을 드렸다.
-그리고 나를 헤밀턴으로 안내해서 백백커하우스에 하루 미불로 5불씩 지불하고, 보름간
지냈다, 그리고 브라질 행 팃켓을 구입하여 주었다. 그리고 오클랜드 공항까지 바래다
주었다. 그러면서 나에게 그 누구에게도 자신이 나를 도와 주었다는 사실을 비밀에 부칠
것을 이야기 했다. 아마도 자신이 피해를 당할가 걱정했던 모양이다.
-나는 지금에서야 처음으로 그 사실을 밝힌다.
-2003년 9월 11일 브라질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비행기 안에는 나 혼자 동양인
이고, 나머지는 유럽사람들과 남미 사람들이었다. 그날은 한국에서 추석이라 온 나라가 명
절분위기였다. 나는 웃음속의 슬픔이라고 할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브라질로 또 다시 씁
쓸한 마음을 달래면서 향하고 있었다.
-비행기 안에서 걱정이 많았다. 한국을 떠날 때 600만원이 비행기 두 번 타고, 뉴질랜드에
서 생활비로 400만원을 소비하고 나니, 200만원이 채 되지도 않고, 브라질에서 어떻게
멕시코에 도달하게 될지 앞이 막막했다.
-그리고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브라질에서 어떻게 적응해야 하나? 어떻게 돈을 모아야
하나? 깡패들이 득실 거리고 치안이 불안한 나라에서 언제 어디서 개죽음을 당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왜 브라질에 가야 하나?...만감이 교차되고 있었다.
-하나님은 왜 나를 이런 고통도 모자라서, 그런 나라로 향하게 하나?..등등
-비행기 안에서 혼자 많이 울었다. 울다 지쳐서 잠이 들어버렸다.
-어느덧 비행기는 2003년 9월 11일 밤 10시, 브라질 쌍파울로 공항에 도착했다.
-나는 호텔로 향했고, 혼자 방에서 미리 준비한 쌍파울로시에 있는 한인교회들의 전화번
호책을 꺼내서, 전화를 많이 했다. 대부분 브라질 사람들이 받아서 애를 먹었으나, 다
행이도 한국에서 새로 파견된 개척교회 선교사님의 도움으로 쌍파울로에 정착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시작부터 가지고 있던 2000불을 사기 당하고 거리에 나 앉게 되었다.
-내가 식당에서 무보수로 써빙을 보았는데 식당 사정어 어려워서 조금씩 준 것이
잘 못이었다. 나중에 한푼도 받지 못했다.
-나는 사람들에게 하소연 하여 월 한국돈으로 30만원을 받고 하루 15시간 한인 옷
가계에서 일을 열심히 했다. 이러는 동안에도 나의 머리 속에는 발명의 생각, 원형
스프링의 원리 연구 뿐이었다.
-나는 돈도 모아지지 않고, 세월이 가는 것이 아까워서 옷가계일을 그만 두게 되었다.
-그래서 브라질 한인들이 교포중에 3대 악한이라는 박변호사의 별장에 가기로 했다.
-박변호사의 별장에는 책이 수천권이 넘게 있었고, 방이 10개 이상이고, 소 100마리
이상, 닭이 50마리 이상 등이 있었다. 그리고 일하는 직원이 5명 이상이었다.
-나에게 이리저리 꼬시면서, 도와주는 척 하고, 아무런 힘도 없는 나를 붙잡고 장기
적을 일을 시키려고 했다. 나는 그런 그의 마음을 알면서도 갈데가 없어서, 공부도
하고, 연구도 하고, 방목도 하리라 생각하고 6개월간 지냈다.
-내가 브라질에 오랫동안 머무르게 된 이유는 우선 돈이 부족했고, 미국에 있는 형님
이 미국에 불법으로 입국하지 말라고 했다. 그때는 2000년 9월 11일 쌍둥이 비밀테
러가 있은지 3년이 되어서, 국경경비가 강화되고, 불법으로 입국하다가 많이 죽는 다고
했다. 그리고 자기들도 불법체류자를 데리고 있으면 불이익을 당한다고 했다.
-미국의 정세가 안정이 되거나,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고 하기에 하는 수 없이 브라질에
머무르게 되었다.
-나는 박변호사의 집에서 더 이상 지체하기가 싫어서 무작정 쌍파울로시에 있는 한인
선두교회에서 머무르게 되었다. 여기서 담임목사님의 아들이 브라질어를 잘 하기 때
문에 인터넷으로 브라질에 있는 스프링 공장들을 검색하며 연구를 계속했다.
-아닐가 다를가 브라질에서도 원형 스프링을 찾아 보기가 어려웠다.
-그때 기발한 생각이 떠 올랐다. 이렇게 허송 세월을 보내느니, 차라리 한국에 다시
들어가서 스프링공장 노동자로 근무하면서, 내가 직접 스프링 기술을 배워서 원형
스프링을 만들면 모든 것이 다 해결 될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문제는 한국에 다시 들어가려고 하니 비행기 팃켓을 살 돈이 없었다.
그래서 혼자 조용히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제발 나를 이대로 내 버려 두지 마소
서! 이대로 주저 앉아서 머무르게 하지 말고 나의 뜻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일이면
방법을 가르켜 주옵소서!“
-그런데 문득 어디선가 들려오는 음성이 있었다. 기도장에는 분명히 혼자 있는데 음성은
들렸다. 그 음성은 “브라질리아” “브라질리아”
-나는 정신을 차리고 브라질리아가 무슨 뜻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브라질리아는 브라질의 수도였다.
-나는 많은 생각 끝에 “아차, 브라질리아에는 브라질주재 한국대사관이 있구나! 여기에
찾아가서 나의 사연을 이야기 하자“라고 결심했다.
-나는 바로 브라질리아로 버스를 타고 12시간동안 타고 갔다. 그리고 대사관에 찾아가서
나의 사연을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대사관 직원이 하시는 말씀이 “지금까지 한인들이
그런 경우로 많이 찾아 왔었다, 그런데 한번도 그런 요구를 들어 준적이 없었다, 그러니
크게 기대하지 말고 숙소에 가서 기다리라“고 했다.
-나는 숙소로 돌아와서, 혼자서 하나님께 울면서 기도를 했다. 나를 외국에 혼자서 방황
하지 말게 해 달라고....
-그러자 하나님은 나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 주셨다. 그리고 3일 후에 대사관 직원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한국 외교부에서 비행기 팃켓값을 지불했으니, 한국으로 갈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다.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최광혁씨는 참 영리합니다. 어떻게 될 줄을 알고 브
라질 한국 대사관에 바로 찾아 왔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한국 외교부에서 바로 오케이
할 줄을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암튼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성공을 기원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다.
-2006년 1월 드디어 방황속의 이민생활을 청산하고 대사관님의 차를 타고 공항으로 향했
다. 브라질리아 쌍파울로까지 2시간, 쌍파울로에서 캐나다 토로토까지 11시간, 토론토에서
밴쿠버까지 6시간, 밴쿠버에서 한국까지 11시간, 경유시간 까지 합치면 거의 40시간동안
한국에 오게 된 것이다.
-그런데 기쁨도 잠시, 한국에 가서 생활 하려면 돈이 필요한데, 내게 남아 있는 돈은 달랑
미화로 100불, 이것으로 어떻게 사나? 라고 걱정을 하면서 캐나다 밴쿠버에서 한국 대한
항공을 탔을 때, 나는 신기한 현상을 발견했다. 내가 하나님께 나에게 지혜를 달라고
기도를 하고 눈을 뜨는 순간 비행기 차창너머로 무지개가 수십개가 보였다. 그리고 비행
기 그림자가 구름위에 보이는데 비행기 그림자 주변에 쌍무지개가 보이는 것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아!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않는구나!” 라고...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증표로 무지개를 보여 준다고 써있다.
-나는 그때에야 비로써 나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살고 있으며, 내가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와 함께 발명하신다는 것을 비로써 체험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불안하던 마음이 없어지고, 지금까지 마음이 평안하다.
7)한국에서 마침내 발명의 역사적인 성공
-2006년 1월 26일, 나는 한국 인천 국제공항에 도착하니 아무도 나를 반겨주는 사람
이 없었다. 그것은 당연하였다. 그러나 미불 100불로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우선 탈북자 출신의 친구가 사는 중계동으로 향했다. 그 친구는 마음에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나의 딱한 사정을 보고 집에 머무르도록 했다.
-나는 돈이 필요로 하기 때문에 한국에서 자매결연을 맺었던 강변교회 담임목사님을
만나기로 했다. 다른 사람들은 나에게 “네가 무슨 낮으로 목사님을 뵐려고 하냐?, 양심
이 있으면 만나지 말라“ 라고 하면서 목사님을 만나지 못하게 했다.
-그래도 나는 하나님이 나에게 목사님을 만나게 하시는 것이라 생각하고, 강변교회 담
임목사님을 마나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사연을 이야기 했다. 그러자 목사님은
걱정하지 말고 어려운 것이 있으면, 서슴치 말고 다 이야기 하라고 하셨다.
최대한 나를 돕겠다고 하시면서, 누가 너에게 무엇이라 하든지 개의치 말고 내 의지
대로 밀고 나가라고 하셨다.
-나는 목사님께 눈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나서, 일에 착수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서 내가 중계동 탈북자 친구에게서, 오늘 저녁 6시까지
짐을 가지고 무조건 나가라는 최후 통첩을 받았다. 나는 강남구 일원동에 있는 탈북자
출신의 형님 집에 들렀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인가? 형수님의 임신 해산일이 그 다음날 이었다. 나는 미안한 마음
으로 형님의 집에 계속 머무르게 되자 형님이 보다 못해 혼자 사는 탈북자 출신의 집에
연결 해 주었다. 그 당시 주변 사람들이 나를 보는 시선이 따가웠다. 이유는 한국에서
잘 적응하지 못해서 해외로 도망을 갔다가, 해외에서도 적응하지 못해 한국으로 돌아온
바보 취급을 했다.
-나는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나의 의지대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우선 한국 내에 있는 스프링회사 사장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보내기 전에 하나님께
기도를 했다. 2일 후에 사장님들의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여러개의 스프링
회사들을 방문 면접을 보고 대구시에 있는 경주 스프링회사 노동자로 근무하기로 했다.
-나는 편지 하기를 월급에 구애 받지 않고 스프링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나는 대구시 경주 스프링회사에서 핸드폰 스프링품질검사 노동자로 월 96만원을 받고
일을 시작했다.
-나는 우선 압축스프링에 관한 일을 하고 싶었는데, 10년이 된 고참이 버티고 있으면서,
좀처럼 기회를 주지 않았다. 회사에서는 나에게 막대한 엄무를 맡기다 보니 압축 스프링
을 배울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원형 스프링을 만들 수 있는지 조사에 착수했다. 그러다보니 내가 왜
원형 스프링을 구입할 수 없었던 이유를 비로써 알게 되었다.
-스프링은 기계에서 나올 때와 열처리 과정에서 모든 요소사항들이 수시로 변하는, 한마디
로 살아 있는 동물체처럼 매우 정교한 부품이었다.
-그러니 수요가 있어야만 그 기계에 대해서 연구하고, 투자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원형 스프링을 만들려면 새로운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회사에 근무하는 사람들도 지금까지 원형스프링에 대한 수요가 없다는 증명을 했다.
-나는 또 시련에 빠지게 되었다. 여기서 언제 스프링을 배워서 원형 스프링을 만들어야
하나? 이런 걱정을 하다보니 자포자기의 위기에 휩쓸리게 되었다.
-그래도 희망은 있을 것이라 믿고, 수요일 저녁에 대구시 신원교회 저녁예배에 참석하였
다. 그리고 눈물로 하나님께 기도했다. 제발 나를 버리지 마시고 도움의 손길을 바란다고
간절히 기도 했다.
-그러자 나의 근심과 걱정이 한 순간에 말끔히 해소 되었다. 그것은 나의 마음이 매우 편
안해 지는 것이었다. 나는 느낌으로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들어 주셨다는 것을 믿고, 집으
로 돌아왔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했다.
-그 다음날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 경주 스프링회사에 일상 생활대로 출근 했다.
-그리고 같은 회사 동료이자 회사 막내에게 내가 원형 스프링을 만들지 못해서 연구를 못
하고 있다고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그 동료는 자기가 2년의 샘플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
원형 스프링을 정교하지는 못해도 비슷하게 만들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순간 눈물이 앞을 가리면서, 그의 손을 붙잡고 제발 만들어 달라고 청했다.
-그는 사장님과 고참들의 눈을 피해서 몰래 원형스프링을 여러개를 만들어 주었다. 물로 실
패작도 많았다. 나는 비교적 괜찮은 것들을 골라서 그에게 사례비를 주었더니, 그는 그것
을 받지 않고, 내가 꼭 성공하기를 빈다고 하면서, 오히려 나를 격려해 주는 것이었다.
-나는 순간 세상이 확 뒤집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
렸다. “세상이 나를 수없이 버렸지만, 그때마다 나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고, 위기에서
구원 해 주신 하나님! 이 죄인을 그토록 사랑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나는 회사 동료 막내가 만들어 준 원형 스프링을 가지고, 집에서, 찜질방에서 밤을 지새워가면서, 손에 피가 나와서 피로 물들인 원형 스프링을 가지고 연구에 몰입했다.
-나는 여기서 새로운 원리와 공식을 발견 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더 이상 지체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바로 회사에 사표를 내고 서울에 올라왔다. 당장 갈데가 없어서 신림동 고시
원에 월세 22만원을 지불 하기로 하고 연구에 착수했다.
-정부에서 받았던 영구임대 아파트는 한번 반납을 하면 다시 받을 수가 없었기에 포기
하기로 하고, 기대하지도 않고, 집 따위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내가 이미 발명으로 인해서 일어난 일이니까 내가 책임을 져야 했다.
-나는 발전기 시스템은 만들지 않고 실험을 해서 나의 연구를 끝낼 수 있는 방법을 터득했
다. 그것은 원형 스프링을 이용한 힘 균형 장치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런데 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강변교회 담임목사님을 찾아갔다.
담임 목사님은 나에게 총 400만원의 후원금을 주셨다. 그리고 대학 선배님에게서 50만원,
이모님에게서 30만원, 존경하는 프란체스카 수녀님에게서 70만원을 후원 받았다.
-나는 실험셋트를 만들기 위해서 청계천 공구상가에서 살다싶이 하면서 연구에 몰입했다.
원형 스프링을 지탱할 수 있는 모형을 찾기 위해서 서울시 인형 상가를 다 돌아 다니다싶
이 했다.
-마침내 수많은 노력 끝에, 실험 셋트가 완성되었다.
-나는 밤을 지새우면서 실험을 했다. 원형 스프링들은 나의 피로 물들어서 시뻘겋게 변해버
리고, 손은 저리고, 그래도 실험을 수만 회를 반복 진행 되었다.
-실험을 하던 도중에는 죽고 싶었다. 스프링이 가만히 있지 않고 자꾸만 나를 조롱했기 때
문이다. 그래도 마지막이다 싶어 더욱 열심히 실험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새로운 공식과 원리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것은
내가 18년동안 연구하면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분야였다.
-기존의 영구기관이론을 부정하지 않고, 지금까지 과학계에서 사용하고 있는 공식들을 부정
하지 않고, 다만 원형 스프링을 이용한 새로운 공식과 원리를 발견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바로 논문 쓰기에 착수 했다. 18년동안 고생을 한 보람이 있어서인지, 논문은 쓰기
시작해서 일주일만에 A4 용지로 110장을 쓰게 되었다.
-그리고 특허청에서 특허 등록 요구 사항에 맞게 교정하니 108장이 되었다. 그런데 특허청
에서는 자기들이 전자문서로 고치면서 140장이나 만들었다. 특허청 직원이 하는 말들이
이런 특허 등록은 처음이며, 신기 함 그 자체라고 했다.
-나는 논문을 다 완성한 후에 처음으로 강변교회 담임 목사님에게 보여 드리고나서, 안수
기도를 받았다. 그리고 2006년 7월 14일 대한민국 특허청에 특허로 당당하게 등록했다.
-이로써 나의 18년간 피눈물나는 긴 연구 과정을 끝내게 되었다.
-7월 14일은 외할머니가 나를 위해서 걱정하시다가 돌아가신지 만 12년이 되는 해였다.
-그리고나서 경기도 파주시에 있는 통일전망대를 찾아가서, 북녘하늘을 바라보면서 북에
있는 부모님들과 형제들, 친구들에게 속죄의 인사를 눈물로 드렸다.
-이렇게 모든 것을 끝내고 나니, 나는 마음이 허전 했다. 나는 자식을 낳아 키워보지 않았
지만, 자식을 시집,장가 보내는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18년 동안 나의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고 나를 괴롭혔고, 내가 소중하게 키워온 작품을 세상에 내놓게 되었으니,,더 말해서
무엇하랴...
-더 이상 눈물이 앞을 가려서 글을 쓰기가 힘이 든다...
-이하 생략...
8)특허 등록 후의 생활
-2006년 7월 14일, 특허 등록을 하고 지갑을 열어보니 단돈 20만원이 남아 있었
다. 나는 무엇을 먹고 살아야 할 지 급했다. 우선 회사에 취직해야 했다.
-그러나 난관은 또 있었다. 지금까지 발명의 성공을 위해 살아온 결과여서
그런지, 나는 한국사회에 적응해야 할 방법을 배우지 못했고, 새로이 적응해야
하는 과제가 놓여 있었다.
-나는 취직한 회사마다 적응을 하지 못해서 그만 두거나, 쫒겨나기도 했다.
-고시원 방세도 3개월간 밀리고, 2개월의 월급은 받지 못하고, 나는 하는 수
없이 노가다로 생활을 유지했다. 2006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날도, 2007년
1월 1일 설날도 노가다를 갔었다.
-그것도 잠시 노가다도 일자리가 없어서, 나에게는 차례가 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휴게소에서 막노동을 하고 있다.
-그러나 후회는 없다. 이제는 그냥 편하게 조용히 지내고 싶다. 시냇물처럼
세월을 보내고 싶다. 더 이상 미련도 없고, 욕심도 없고, 의욕도 없다.
그냥 불쌍한 이웃들을 도우면서 남은 인생을 새롭게 출발 하고 싶다.
9)맺는 말
지금까지 나를 위해 도와주신 모든 분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감사드립니다.
이 글을 보는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10)특허등록의 결과
-지금 국정원은 내가 하는 행동을 감시하며, 나의 특허이론이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는 흔적들이 보인다.
-우선 내가 각종 언론 매체들에 글을 올리면, 모두 나의 글들을 볼 수 없게
만들어 놓고, 나의 핸드폰과 이메일을 도청하며, 내가 철창없는 감옥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동물원에 원숭이취급을 하고 있다.
-특허청은 담당 심사관이 안영웅심사관으로부터 고준석심사관으로 바뀌었고,
내가 아에 특허 재심사행사권을 가질 수 없도록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특허청은 내가 특허이론을 공개하라고 했지만, 6개월이 지나도록 공개
도 하지 않고 있다.
-내가 각종 연구 단체들에 자문을 받으려고 특허이론을 공개하였지만, 읽은 회
원수는 3만명이상이 되지만, 나에게 전화나 메일편지는 하나도 없다.
-편지를 읽고 추천도 2000개가 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다.
-그리고 나는 3D업종에서 일을 하게끔 만든다.
-그리고 내가 해외에 나가기를 유도하고 있다는 흔적들이 많다.
-내가 연구한 이론은 지금 지구온난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결정적 이론
이다. 그런 내가 계속 힘들게 살아가야만 하는지 궁금하다.
-지금은 나는 돈도 없고, 아무런 힘도 없다.
-오직 하나님이 해결해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특허청은 나에게 서류에 문제가 있다고만 변명만 할 것이 아니라, 나의
이론에 대해서 한마디라도 반박을 하기를 충고할 뿐이다.
-특허청은 나의 이론에 대해서 반론도 못하고, 노력도 하지 않고, 덮어놓고
거절만 한 특허청의 안영웅심사관, 고준석심사관, 등 나의 특허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은 하루빨리 나의 특허내용을 공개해야 한다.
-내가 특허청에서만 보관하라고 연구한 내용이 아니다.
-2006년 7월에 특허등록을 할 때에 특허청직원들은 6개월이면 심사가 다 끝난
다고 호언장담하더니 만 2년이 다가오는 지금도 내용을 반론도 못하고, 공개
도 못하는 이유가 궁금하기만 하다.
-혹시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닌지??
-지금까지 내가 특허청직원들의 심사과정을 2년 동안 지켜본 결과, 더 이상 나
의 특허이론에 대해서 심사자격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나의 특허 이론을 공개해서라도 약자인 탈북자가 발명으로 댓가를
바란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세상에 공개함으로써 나의 18년간 노력한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줌으로써
왜 하나님이 나를 통하여서 이런 일을 하게 하였는지 알려주고 싶었다.
-나는 탈북자이기 전에 나의 발명을 위해서 한국으로 38선을 넘어온 이기주의자, 살인마
이다. 정말이지 미친듯이 발명을 위해서 살아왔다. 나의 사랑하는 동생, 부모님들을
하늘나라로 보낸 살인마이다. 인간이기 전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밖에 없다.
-탈북자들은 한국에서 영원한 이방인이며 분단의 희생자이자 조국을 배신한 사람,
가족을 버린 사람, 배가 고파서 건너온 거지, 등 탈북자가 성공한다는 것은 차라리
성공을 하지 않고 귀벙어리, 말 못하는 벙어리, 바보처럼 살아가는 것이 성공하는
길이기에 나는 특허이론을 공개하게 되었다.
-지금은 발명한 것을 후회한다. 하나님은 나를 통하여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천국이 다가왔느니라!!”
-2008년 6월 9일 다시 특허 출원을 했다.
-심사예정일을 2009년 7월 예정이다.
-특허청은 지금 나의 이론에 대해서 서로 심사를 받지 않겠다고 한다.
그만큼 자신이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나에게 이런 말을 한다.
-여자를 좋아해서 술집에 다니면서 돈을 다 소비하고 다녀서 한국에 적응을 못했다고 한다.
-맞다. 나는 여자를 좋아하고 여자를 좋아했다. 내가 여자를 좋아한 것은 총각이 여자를 만
나는 것이 자연스럽고 인간의 심리상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발명에 목숨을 건 나로써는 발명의 생각 공간을 위해서라면 천하 지옥이라도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주변에서 결혼하라는 충고의 말들을 들으면서, 차라리 내가 사생활이 복잡하면 결혼을 하
지 못하고 발명에 더 집착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으로 여자집에 잘 다닌지도 모른다.
아마도 노벨이 증기기관차를 타면서 얼굴에 뺨을 얻어 맏고 한쪽 귀가 귀벙어리가 되자
연구에 더 열심히 집착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는 것으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었는지도 모른
다.
-그리고 여자집에 있으면 발명의 기회들이 많이 생기게 되었고, 결혼도 못하게 되고,
발명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 할 수가 있어서 좋고, 부모님들과 형제들의 고통받는 생각
들을 잠시나마 잊어버릴 수가 있어서 좋았던 것 같았다.
지금 와서 하는 이야기이지만 한국의 여자집이 있어서 내가 잠시나마 행복한 시간 속에
서 발명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았다.
-솔직히 발명이 성공한다면 여자집들에도 감사의 인사를 전해주고 싶다.
-꿈에는 동생이 아무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부모님들이 매일같이 아무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잠이 오지 않고, 발명을 하지 못할 것 같아서 여자집에 가면 발명의 생각들을
잘 할 수가 있었다.
-이런 나의 마음을 누가 알겟는가?
-누가 나의 이 심정을 이해 할 것인가?
-나는 훗날 이런 행동이 욕을 먹을 것이라 각오를 했고, 미리 예상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결혼 할 생각이 없다.
나의 발명의 목적으로 인해 나의 마음은 상처투성이고, 나의 행실은 상처투성이기 때문
이다. 어차피 38선을 넘어 한국으로 귀순해 올 때부터 결심한 바로다.
이것이 내가 발명으로 얻은 결과이다.
-그러나 나는 해냈다.
이거는 참고 사항이지만 미국은 이미 냄새를 맡은 것 같다. 미국의 스프링시장에 변화가
생겼다. 내가 인터넷에 글을 올리면서 대한민국의 10만명이상의 사람들이 나의 특허 이론을 보았고, 내가 여러명에게 발명의 실험자료를 주었기 때문이다.
해외에 있는 하인 교포들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한국에 있는 많은 분들이 특히 특허 경험자들은 미국에 특허출원을 하겠다고 하였다.
한국에는 유전무죄, 유산성공, 발명가들은 성공의 길이 힘들기 때문에 이런 행동들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모든 것을 지켜볼 것이다.
나의 핸폰 번호는 010-7350-0085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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