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설적 표현으로 구성된 시는 서로를 위배하지 않았다. 이렇게 쓰고 보니, 마음을 먹고 손가락을 움직이면 글이 써지는 바로 그것에 대해 생각한다. 바로 손가락 가는 대로 써지는 그 순간이 오기까지는 이름모를 시간이 잠재하여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고립낙원을 다시 읽어 보았다. 정확히는 시 '고립 낙원'이다. "주인 떠난 강아지 외침과/ 스스로 떠난 들고양이 울음소리는 서로를 무너뜨리지 않는다" 깊은 곳에서 공명하는 소리는 같은 소리일테니 말이다.
'홀딱 벗고 새'는 도대체 무슨 새일까? 찾아 보았다. '검은 등 뻐꾸기'의 별칭이었다. 어떻게 들리는가? 나는 '왜 그렇게 해~'로 들리는 듯도 하고. 듣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들리는 검은 등 뻐꾸기 울음 소리처럼, 글이나 말은 서로 다르게 들리기도 한다. 어떤 글을 읽으면서 나는 내가 조금 다르게 생각하고 있었구나를 느낄 때가 있다. 그러면 어느 때의 그 '누군가"가 한 말에 대해서 더 잘 이해가 될 때도 있다. 말이란 그리고 언어란 바로 대응하기에는 늘 격양된 상태가 먼저 '있다'는 것일테다. 엔트로피가 높은 상태는 균일하지 않다. 반면에 그 불균일만이 해낼 수 있는 것도 있다. 그런 것일 것이다.
밤에 듣는 검은 등 뻐꾸기 울음 소리와 낮에 듣는 울음 소리는 다르게 들린다. 밤과 낮은 그 정서가 다르기 때문이다. "부고장이 중년을 부르는 일상이라면/ 나는 삶 뒤에 숨은 붉은 그늘입니다" 그늘이 붉으면 무엇일까? '붉은'은 강조된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중년의 청심은 붉은 것일까? 그 청심이 삶 뒤에 숨어 있다. 왜 숨어 있을까?
"출입국 소인처럼 질서를 잃었다/ 내 젊음의 질서도 낡아가는 줄 모르고/ 모순의 결핍을 짊어진 채 나는 어디에다/ 환상의 집을 지으려고 그토록 떠돌았을까/ 문득, 표상을 찾아 떠돌던/ 헛도는 바퀴의 낡은 지문처럼/ 헐거운 가방이 눈에 들었다." '아내라는 낡은 가방' 이 눈에 들어온 순간 청심은 삶 뒤로 자리를 옮긴다. 청심은 붉은 그늘로 화하여 삶 뒤에 있다. 삶 뒤에 무엇이 있는가? 삶 뒤켠에는 너무 뜨겁지 않은 붉은 그늘이 있다.
"부고장의 친구를 산에 남겨놓고도/ 생각 없이 전화를 걸어/ 술이나 한잔하자며 중얼거리는/ 중년의 이별은 삶에 밑줄 하나 긋는 것/ 계획이 자주 바뀌는 자유여행 같은 것/ 생각 없이 밤이 두려워 홀로 지새는 밤입니다" '홀딱 벗고 새'가 밤에 울면 그 붉은 그늘은 이내 그림자가 된다. 그리고 어떤 공간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리고 어떤 말들은 그 안에서 섞일 것이다. 차마 내뱉지 못한 말들은 '홀딱 벗은'채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한길수 시인의 연작시 "'가방의 어원'" 은 총 15편의 시로 구성되어 있다. '가방' 연작시를 읽으며 드는 생각은 이러했다. 가방은 '몸'이로구나! 그 모든 것이구나! 너는 그 안에 무엇을 담고 있니? 몸은 운반체다. 나를 어디든 데려다 놓을 수도 있고 중간에 방치하기도 하고 어쨌든 몸은 "나"와 동고동락을 같이 한다. 그 몸에 대한 모든 생각들이 인간의 근원인지도 모른다. 사람은 몸에 대해서 어떤 슬픔도 어떤 기쁨도 느낀다. 그러니 서로의 몸은 대상화 되기도 한다. 가장 슬픈 것은 부모의 몸이 대상화 되었을 때, 그 허물어지고 헐거워진 몸을 그래도 껴안고 같이 가야 하는 삶의 어느 그늘에서 보자면, 차라리 그때 몸은 더는 열망도 아니고 증오도 아니다. 이럴 때 몸은 대상화된다. 몸을 찬양하는 것도 몸을 짐으로 여기는 것도 극단의 대상화일지도 모른다. 즐거움과 고통이 몸 안에 갇혀 있다. 양분될 수 없는. 사람의 몸이 허물어져 가는 것만큼 애상함을 느끼는 것도 없으리라. 그 몸이 갈 곳이라고는 이제 딱, 한 곳밖에 없을 때는.
"삶의 띄어쓰기를 생략한 채 서둘러/ 귀항처럼 먼 곳 떠나가신 아버지/ 이제야 알겠다/ 아버지 고향이 가방인 것을/ 이산가족 상봉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라면도 챙기고/ 흑백사진도 챙기서/ 이번에는 갈 수 있을까/ (...) / 챙긴 것들은 잘 있는지/ 아버지의 가방은/ 네 개의 식도를 통과하며/ 되새김질하는 소의 위장을 닮았을까/ (...)/ 아버지, 가방 속으로 떠나셨다"
어쩌면 모든 시들은 부모의 변형인지도 모른다. 자기의 출처를 대야 하는 세상에서, 그 뿌리는 다시 보듬고 화해하는 과정에서 그 참을 수 없이 터지는 오열과 깊은 정적에서 새롭게 더 근원과 연결되는지도 모른다. 차라리 거기엔 정화보다 더 깊은 분노가 가라앉아 있는지도 모른다. 자신과 화해해야 산다는 그 비참함이 그곳에 도사리고 있는지 모른다. 그렇게 살기 싫다는 목 놓아 부르는 외침이 있는지도. 거부하고 싶은 폭풍 같은 욕동이 있다. '나는 이런거 싫어욧' 라고 외치는 골난 어린아이는 늘 그 자리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누가 그 무엇으로 그 아이를 달래겠는가. 신의 아이를 누가 뭐라고 할 수 있을까! 골난 아이와 Let it be. 괜찮다.
내가 시집에 이렇게 메모를 해 놓아서 그대로 옮겼다.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나 보다 싶다. 모든 자기와의 화해는 내면의 골난 아이와 늙어 대상화된 몸의 소유자인 부모와의 관계가 아닐까 싶다. 또는 또다른 상황에서 일지라도. 이 두 양자의 사이 간극의 차가 너무 멀어서 차라리 그 낯설은 풍경이 자화상 같은 것이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길상호 시인의 '시평'을 옮겨 보았다. 길상호 시인의 시평 정돈을 따라가 보았다.
" 그렇기에 가방 속의 것들을 꺼내놓고 "기억을 정리하"(<가방을 디자인하다>)는 작업은 욕망의 함정으로부터 자신을 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행은 자신을 돌아보는 사색의 시간이기도 할 터, 그는 자유로운 삶을 만들기 위해 행선지에 머물 때마다 불필요한 것들을 덜어내는 작업을 계속해왔는지도 모른다. (...)
" 몸은 생생한 아픔 그대로이며 더는 세계와 공간으로 나아가 그 안에서 녹지 않는다. 몸은 있는 그대로의 나인 동시에, 늙어가는 사람이 자신의 안에 켜켜이 쌓아놓은 시간 바로 그것이다" _장 아메리<늙어감에 대하여>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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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든다는 것은 이렇게 슬픈 일이지만, 장 아메리의 말처럼 "자신 안에 켜켜이 쌓아놓은 시간"이 있어서 세계를 제대로 읽어낼 눈을 갖게 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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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소 "옹이" 속에서 "나무들"의 "부러진 상처" 를 읽고 들으며 "나무에 등 비비는 사람들" 의 외로움도 온전히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런 깨달음은 '나' 를 향해 고정되어 있던 삶을 "타인의 슬픔을 지켜보는" (<안개꽃>) 쪽으로 방향을 돌리게 한다. 그러면서 세상에 태어난 존재로서 그는 하늘의 명을 다시 한 번 떠올려보게 되는 것이다.
지천명의 깨달음은 그를 가방 안의 세계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이 아닐까 싶다. 이제 그는 경쟁과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열린 시각으로 세계 속의 가방들의 삶을 찬찬히 살필 수가 있게 된다. 이때 그간 쌓아온 시간들, 기억들, 슬픔들은 그에게 마음의 "외등 하나" 를 매달게 한다. 그리하여 "달이 없는 밤에도.보름달로 환"(<벗>)한 빛을 갖게 되는 나이, 인생의 허무와도 '벗' 이 될 수 있는 나이가 지천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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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에 가까운 사랑의 감정이"이 " 캄캄한 밤과 새벽 사이" "보라"(<보라의 자세>)로 태어나기도 했다. 잊고 있던 몸의 감각들을 다시 깨우는 색들의 공간, 오늘의 행선지는 이곳으로 정해야겠다.
그는 가방 안의 세계에서 숨어 있던 색의 감각을 하나씩 일깨우기 시작한다. 이것은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감각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세계가 본연의 인간에게 전해주는 감각이다. 욕망을 내려놓고 또는 욕망을 넘어서고 나서야 받아들일 수 있는, "세월의 멋을 포용하는, 여유로워진"(<파란의 모습>) 감각이다.
그는 이렇게 되찾은 감각으로 시를 떠올린다. "꺼내기조차아득한 이름을 내려놓"으면서 "노을처럼 붉어지는" "가슴" 으로 언어의 절을 짓는다.
(...)
언제 꺼져도 놀라지 않을 것 같은, 검게 그을린 형광등 불빛에 알랭 바디우의 <무한과 유한> ('이숲, 2021, p.25.)을 펼쳐놓는다.
"인간의 존재가 죽음보다 더 강하다는 것은 생각이라는 일종의 작업에 의한 겁니다. 우리가 죽음보다 더 강해질 수 있는 것은, 삶에서 벌어지는 축제에서 그런 것이 아니라, 무한 그 자체를 생각으로 지배하면서입니다"
그는 유한한 인간의 삶을 무한대로 넓히는 방법으로서 시를 선택한다. '가방'이라는 대상을 통과하며 겪은 "산전수전"의 삶을 "매끈하게 다듬"기 위해 그에게 살둔이라는 공간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
그리고 겨울에는 온갖 풍경에 귀를 기울여 소리를 모으고
(<겨울.휘파람>), 그것이 시로 녹아나올 때를 기다린다. 이제 그의 가방에는 세상살이의 소란이 비워지고 자연을 닮은 참 맑은 시들이 쌓이기 시작했을 것이다.
"말이 침묵으로부터 급격히 튀어나올수록, 침묵의 태초에서 튀어나올수록, 말과 사물이 하나인 태초의 상태가 한순간 이나마 재현될 가능성이 크다."(<인간과 말>), 봄날의 책, 2013, p.161.) 한 줄의 시가 튀어나올 순간을 기다리며 침묵으로 자연과 어울릴 수 있는 곳, 그곳이 그에게는 낙원이 아니었을까?
타다닥 타다닥, 장작에서는 이따금 불티가 날리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하늘의 별은 점점 늘어간다. '유한'이 '무한'으로 이동해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듯, 모닥불 앞에 앉아 있는 그의 표정이 진지하다. "노을" 보다 "붉어"진 그의 얼굴에서도 어느새 "사과 향이 난다"(<노을에서 사과 향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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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것은 대상화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시'로 승화된 것만이 인간을 구원하는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사람들이 시를 쓰는 것인지도. 삶을 매끈하게 다듬도록 말이다. 그것은 일종의 정돈이다. 마음 역시 울퉁불퉁한 길이 정돈되면 매끈하다. 아무튼 '시'로 거듭나는 인간의 모든 사유 행위는 정당하다.
#시인한길수_시집_고립낙원_한국문연
_____고립낙원____________한길수_____
구름의 표정으로 비의 양을 측정하는 일이
간혹 들어맞는 것에 놀라지 않는다
날짜와 요일은 자주 뒤엉키므로
바깥소식은 엄나무 이파리 떨어지는 소리에도 묻힌다
주인 떠난 강아지 외침과
스스로 떠난 들고양이 울음소리는 서로를 무너뜨리지 않는다.
뉴스로 흘러나오는 소식보다
물까치 떼가 까마귀를 물리치는 것에 더 믿음이 깊다
껍질을 벗긴 다래나무는
삶과 죽음의 경계처럼 가없이 묵묵한 색을 발현한다
내 지나온 삶의 일부가 게워지듯
가령, 바람이 하룻밤을 용해하는 부피와
층층나무 끝에 걸린 계절의 층간소음을 감각하는 것에 다소 미온적이다
아무 일 없지만 하루하루가 뜨겁고
자연과 갇혀 살지만 자연과 밀접하다
##시집_고립낙원 '시는 인간에게 삶을 주었고, 앞으로도 줄 듯하다''
#살둔마을의_시인
#살둔산장_가본지_벌써_오래된_기억으로
#여름에는_겨울의_눈이_그리워진다
*2023/01/01 새해 첫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