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심한 가족
이수진
가족 중 일등에서 밀려났다는 이유로 죽음을 선택한 이는 아무도 없다
배우는 것은 그저 새로운 것을 아는 일일 뿐
훈장 목에 걸고 출세 한번 하는 게 소원이란 사람도 없다
집안의 희망이었던 막내삼촌이 돌아가시지 않았으면
달라졌을지 모른다지만, 그건 아무도 모를 일이다
큰삼촌은 중간을 넘어본 적 없고
작은고모는 뒤에서 10등 밖 벗어나 본 적 없다
큰조카가 가끔 일등 근처까지 가는 실수를 저지르곤 하지만
이틀이면 관심 밖으로 밀려난다
덕분에 외국어가 아닌 모국어로 살아가겠지만
평범한 날들로 짜 맞춘 삶이 마련돼 있겠지만
아무도 출세 공식 만들어 빛나는 삶을 움켜잡으려 무리하지 않는다
고3이라서 가족행사에 빠지는 이도 없다
(큰조카가 급성맹장 수술을 받는 바람에 막내삼촌 결혼식에 불참한 적은 있다)
심지어 그 흔한 기러기 아빠 하나 없다
앞으로 태어날 가족이라면 모를까 내가 아는 한
내가 가족이라고 기억할 수 있는 직계들 가운데
일류 아니면 안 된다는 신념을 가진 이는 아무도 없다
빈 주머니 채우기 위해 남의 손 훑어 내리는 일도 없다
어느 소심한 휴일, 우리 가족은 자동차 정비소와 국밥집 문을 닫고
개울가로 나들이를 간다 삼겹살 굽는 기름진 손으로
옆에 앉은 이 입속에 억지로 구겨 넣는 방식으로
내달리는 하루를 돌보아주며 소리 없이 보낸다
—《시에》2010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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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진 / (본명 이영희) 충남 아산 출생. 계명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2009년 상반기 《현대시》신인상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