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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김호정
관심
2월 초 일본에서는 피아니스트 임윤찬(20)의 공연이 열렸습니다. 1일부터 11일까지 도쿄와 오사카 등 4개 도시에서 6회에 걸쳐 공연이 이어졌는데, 모든 공연의 입장권이 매진됐습니다. 글로벌 스타 임윤찬의 인기를 피부로 느낄 수 있습니다.
현장에서 임윤찬의 연주를 들으면 이런 생각이 들죠. ‘도대체 스무 살의 저 피아니스트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연주하는 걸까.’
이번 주에는 피아노를 전공한 김호정 기자가 도쿄와 보스턴·뉴욕을 바삐 오가는 임윤찬을 직접 만나서 나눈 대화를 들려드립니다. 임윤찬의 특별하고 예술적인 상상력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요즘 쇼팽에 관한 책을 읽고 있다고 했습니다.
‘더 클래식’ 임윤찬 3부작의 마지막입니다. 이번 기사 하단의 링크를 눌러 구글 폼을 작성해주시면, 인터뷰 전문이 들어간 PDF를 e메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나면 임윤찬의 연주가 더욱 다르게 들릴 겁니다.
임윤찬 스타일 ③ : 진하고 특별한 상상에서 나오는 음악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2월 일본에서 쇼팽 연습곡을 연주하는 장면. 사진 나고야 시라카와홀
“제대로 된 음악가라면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고 매일매일 산을 넘어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스무 살의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요즘 그가 넘는 산은 쇼팽의 연습곡 전곡(27곡)입니다.
또 이런 말도 했습니다. “제 선생님(손민수 교수)이 그런 조언을 해주셨어요. 진정한 예술가들은 연습곡을 연습곡이라 보지 않는다고. 연습곡이 아니라 피아노 판타지(환상곡)라고요. 저는 사람의 인생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연습곡에 가장 많이 들어갔다고 생각해요.”
그 말을 듣고서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음악이 달랐구나.’ 지금부터 임윤찬의 쇼팽 연습곡이 다르게 들리는 이유, 그의 마음에 있던 상상의 세계를 글로 풀어내 보겠습니다. 한 시간 남짓한 연주 시간 동안 임윤찬이 꼽은 ‘최고의 순간’도 들을 수 있습니다. 그가 이 음악에서 최고라 소개한 피아니스트들의 연주를 통해서 말입니다.
임윤찬의 90초 상상
가장 유명한 곡 중 하나인 ‘흑건’(작품번호 10중의 5번)을 보겠습니다. 오른손이 검은 건반만 아주 빠르게 치도록 돼 있는 특이한 작품이죠. 악보대로만 치기도 어렵습니다. 그런데 1분30초 정도였던 임윤찬의 ‘흑건’은 독특하고 특별했습니다. 속도를 확 늦췄다가 다시 빨라지는 해석이 인상적이었고요. 연주의 끝에는 마치 크리스털이 부서지는 것처럼 소리가 분산됐습니다.
이 ‘흑건’은 무엇일까. 임윤찬이 답해 줬습니다.
그는 이런 상상을 했다고 합니다.
“오른손은 자연이에요. 반짝이는 무언가가 하늘에서 보이는데요, 그게 밝은 태양빛은 아니고요.
약간 이렇게 뿌려져 있는 빛이라고 해야 될까요. 아침에 더 밝은 그런 빛들요. 그리고 이유는 모르겠는데 동양적인 느낌이 자꾸 느껴져요. 또 선생님은 왼손 엄지가 바순 소리를 내야 한다고 하셨는데, 그 또한 시적인 노래라고 생각해요.”
이 말을 듣고 보니 임윤찬의 ‘흑건’에서 음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부서졌던 그 순간이 무엇이었는지 이해가 됩니다.
그가 “이걸 듣고 인생에서 가장 큰 충격을 받았다”고 표현한 연주를 동영상으로 들어보겠습니다. 피아니스트 이그나츠 프리드만(1882~1948)이 연주한 ‘흑건’입니다. 그리고 블라디미르 파흐만(1848~1933)의 ‘흑건’ 역시 “정말 깜짝 놀랐다”고 했는데요, 기사에 공개할 수 있는 동영상은 구하지 못해 아쉽네요.
〈처음부터 들어 보세요〉
그는 연습곡 27곡 전부에서 특별한 이미지와 감정을 상상하며 연주한다고 했습니다. 어떤 곡에서는 작곡가의 마지막 노래, 그러니까 백조의 노래를 느껴 가장 사랑하게 됐다고 하고요.
진한 드라마, 강렬한 스토리가 흘러나왔던 이유가 바로 이거였구나 싶었습니다. ‘삶의 수많은 감정, 자연의 대단한 장면이 들어 있었구나. 연습곡으로 세계의 그 어떤 일류 무대에도 설 수 있겠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통틀어 최고의 순간은 여기”
가와사키 심포니홀에서의 쇼팽 에튀드 연주. 사진 가와사키 심포니홀
임윤찬의 쇼팽은 ‘음표’보다는 ‘음표 사이의 시간’에 대한 연주였습니다. 그의 연주는 음표와 음표 사이의 간격이 독특합니다. 대화를 배열하듯, 또는 숨을 쉬듯 음 사이의 간격을 조절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임윤찬이 가장 공들인 순간은 어디일까요. “작품번호 25의 6번에서 7번으로 넘어가는 때요.” 임윤찬은 조성의 변화를 설명하면서, 6번 마지막 화음의 가장 아래 음과 7번의 시작 음이 똑같다는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7번은 G#(솔 샤프)로 시작하는 왼손이 느리고 어둡게 노래를 이끌어갑니다.
무대에서 그는 7번을 일반적 연주보다 훨씬 느리게, 체념한 듯 연주하더군요. 임윤찬은 “6번이 끝나고 7번이 시작될 때가 나에게는 최고의 순간”이라고 이야기해 줬습니다. 2019년 통영국제음악콩쿠르에서도 왼손을 건반에서 내리지 않고 그대로 이어서 연주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악보와 동영상을 봐 주세요.
6번의 마지막과 7번의 시작. 빨간 원 안의 음이 똑같다. 왼손의 가장 아래 음이다.
〈29분5초에 시작됩니다. 7번 연습곡 시작은 29분23초〉
그는 또 7번 연습곡을 “가장 중요한 연습곡, 가장 많은 상상력을 담아낼 수 있는 곡”이라고 했습니다. “쇼팽의 백조의 노래, 즉 마지막 음악처럼 느껴진다”는 이유입니다.
임윤찬이 7번 연습곡을 설명해 주기 위해 악보를 펼쳤습니다. 거기에는 손가락 번호 같은 기술적인 것은 거의 적혀 있지 않습니다. 악보는 깨끗한 편이었죠. 대신 마치 시의 한 구절 같은 글귀들이 악보 곳곳에서 눈에 띄었습니다. ‘꿈 속에서 사랑했던 여인이 사라지는 것’ ‘슬픔을 체념하고 얼어붙은 마음’ ‘왈칵 쏟아지는 눈물’ ‘점을 하나 딱 찍는 느낌’.
임윤찬의 연습곡이 시적(詩的)이었던, 또 여러 감정의 기록장과 같았던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임윤찬이 ‘꿈속에서 사랑했던 여인의 사라짐’을 떠올리는 부분, 궁금하시죠? 그가 이 곡의 최고 연주자로 꼽은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의 연주로 들어보겠습니다. 왼손의 노래가 바로 그 부분입니다.
〈1분16초부터 재생되는지 확인해 보세요〉
다음은 80분의 거대한 작품
물론 임윤찬이 무대에서 떠올리는 이미지가 항상 고정돼 있는 건 아닙니다. “쇼팽도 변덕스러운 사람이어서 연주할 때 상상하는 것이 변화했을 거라 생각해요. 어느 정도 일관성은 있지만, 의무처럼 떠올리는 건 아니에요.”
그가 일관되게 추구하는 것이 있다면 아마 ‘자연’일 겁니다. “고등학생 때인가, 모차르트를 굉장히 고르게 연주했어요. 그때 선생님이 그러셨죠. 자연에는 직선이 없다고요. 정말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어요. 자연이 없는 음악, 직선만 있는 음악은 정말 해서는 안 되겠구나.” 임윤찬의 연주가 예측 불가능한 동시에 이해 가능한 이유입니다. 그게 우리가 자연에서 느끼는 감정이니까요.
김영옥 기자
같은 이유에서 그의 음악은 다듬어진 완벽함을 일부러 비껴갑니다. 임윤찬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만의 이야기를 넣고, 자유롭게, 상상력으로 연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피아니스트 알프레도 코르토가 쓴 『쇼팽을 찾아서』라는 책을 읽었는데, 쇼팽이 제자들에게 테크닉보다 상상력으로 터치하는 걸 가르쳤다고 해요. 그리고 혼을 다 넣어 연주하라고 했다고요. 쇼팽은 악보 너머에 있는 나만의 상상력으로 쳐야 하는 것 같습니다.”
쇼팽의 연구자이자 피아니스트인 알프레드 코르토가 쓴 『쇼팽을 찾아서』.
임윤찬이 아트 테이텀, 오스카 피터슨 같은 재즈 피아니스트를 자주 언급하는 것도 ‘자신만의 상상력’과 비슷한 맥락이겠죠. “그분들의 인터뷰를 많이 보니 재즈의 자유로움도 수많은 자기와의 싸움, 여러 시도를 통해 나온 거란 걸 알게 됐어요. 저도 연습곡에서 수많은 감정적인 실험을 해봤거든요. 사실 대부분은 실패했지만요.”
그는 상상하고, 또 상상한 것을 실험해 보는 시간을 ‘연습’이라고 부릅니다. 임윤찬이 연습곡을 온종일 연습한다는 말은 바로 이 뜻입니다. 피아노 앞에서 손가락을 훈련하는 시간과는 다릅니다. “늘 하루가 되게 부족하다”고 했습니다. 그의 연습곡이 보통 연습곡 해석과 다른 이유가 비로소 이해가 됩니다.
“제대로 된 음악가라면 아무 대가를 안 바라고 매일매일 산을 넘어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런 산도, 저런 산도 매일 넘어 보는 거죠.” 악보를 들고 하루 종일 연습실에 칩거하는, 이번 쇼팽 녹음 스튜디오에서는 나흘 동안 500번 정도 완주했다는 노력파인 그에게 마지막으로 물었습니다. “그렇게 산을 넘는 행복감이 있나요?” 그가 약간 웃으며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습니다. “거의 없어요. 한 번도.”
그리고 카네기홀이 2025년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임윤찬은 2025년 4월 25일 카네기홀에서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연주합니다. 30개의 변주곡으로 된 80분짜리 대곡. 모든 상상력과 진심을 동원해, 자꾸만 실패하면서도 끝까지 등정하는 임윤찬이 또 산 하나를 넘으려나 봅니다.
이제 그가 “자신만의 상상력이 가장 좋았던 연주”로 꼽은 소프로니츠키의 쇼팽 에튀드를 들어보겠습니다. 쇼팽이 마지막으로 남긴, 작품번호가 붙지 않은 3개의 새로운 에튀드 중 2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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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들어보세요〉
'스타 선생님'이었던 쇼팽의 연습곡
쇼팽의 연습곡(etudes, 에튀드)은 12곡씩 두 세트, 그렇게 24곡을 기본으로 한다. 우선 첫 번째 세트는 작품번호(Opus 또는 Op.) 10이다. 쇼팽이 19~22세인 1829~32년에 작곡한 12곡이다. 그러니까 ‘쇼팽 연습곡 10의 5’라고 하면 작품번호 10 중에서 다섯 번째 곡을 뜻한다. 두 번째 세트는 작품번호 25의 12곡. 1832~35년에 작곡됐다. 두 세트 모두 출판은 1837년에 됐다.
쇼팽은 1830년에 고향 폴란드를 떠났고, 빈에서 피아니스트로 데뷔한 후 파리에 정착했다. 1832년에 피아노 레슨을 시작했다. 그는 이름난 ‘피아노 선생님’이었다. 프랑스와 폴란드, 오스트리아, 독일, 스웨덴, 노르웨이에서까지 제자가 찾아왔다. 세심한 스승으로 소문난 그는 연습곡에도 피아노 연주의 기술을 꼼꼼하게 새겨넣었다. 화음을 펼쳐서 연습하는 10의 1번, 반음씩 올라가는 건반을 연습하는 2번, 오페라처럼 노래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3번, 3도 화음을 연습시키는 7번…. 많은 해석가가 각각 제목을 붙였지만 ‘이별’(10의 3번), ‘혁명’(10의 12번), ‘에올리안 하프’(25의 1번), ‘나비’(25의 9번), ‘겨울바람’(25의 11번) 등이 보편적으로 불리는 별명이다.
이전의 연습곡들, 무치오 클레멘티나 카를 체르니 등의 작품과 비교했을 때 쇼팽의 연습곡은 무대 위에서의 연주를 염두에 뒀다. 기술적 도전과 예술적 성취, 두 가지 모두를 목표로 하는 작품들이다.
24곡은 수많은 피아니스트가 연주했고, 전곡을 녹음했다. 하지만 작품번호가 붙지 않은 3곡은 상대적으로 적게 연주된다. ‘새로운 에튀드 3곡’이라는 이름으로 1839년 나온 연습곡이다. 임윤찬은 이 곡까지 포함해 모두 27곡을 연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