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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목
봉제공장이 문을 닫고 허탈한 심정으로 지내고 있었는데, 하느님이 보우하사 H 상고 교목(校牧, 학교에서 예배와 종교 교육을 담당하는 목사)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H 상고는 재력이 있는 독지가의 육영사업이 아닌 가난한 새마을 학교에서 고등공민학교(중학교를 진학하지 못한 사람에게 중학교 과정 교육을 실시하는 학교)와 전수학교(고등학교 정도에 해당하는 교육기관)를 거쳐 정규학교까지 성장한 학교로, 교육보다는 학생들이 낸 등록금으로 장사를 하는 주야간 학생이 5,000명이나 되는 전형적인 한국형 사립학교였다.
이상한 것은 이 학교가 기독교 학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미션스쿨도 아닌데 교목이라니? 당시의 교장이 기독교인이었던 설립자에게서 학교를 인수 받을 때 교목 제도를 실시하기로 조건이 붙어있었고 학교에 교목이 있다는 것이 무늬도 괜찮고 해서 그대로 있는 것이었다. 쉽게 말해서 마치 그 학교의 교목 위치는 군대에 군목, 병원에 원목 같은 위치였다.
그러다 보니 교목의 위치가 애매모호 그 자체였다. 졸업 앨범에 교목 사진이 주임 교사와 같은 사이즈였기에 교감과 같은 크기로 해달라고 요구를 하기도 했고 교장이 교내 순시를 하면 같이 가자고 하지 않아도 옆에 붙어서 같이 다녔다. 유치한 짓이지만 조직 사회 안에서는 위치로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내 위치를 내가 스스로 만들기 위해서 하는 일이었다.
전수학교에서 정규 학교로 승진한 학교이었기 때문에 당시 그 학교 학생들의 학력 수준은 수도권에서 최저의 상태였고 교사들의 수준도 공채로 들어온 젊은 교사들 외에는 전수학교 시절부터 터줏대감으로 내려온 탓에 낮은 편이었다.
재단이라는 것은 형식적으로만 구성되어 있고 학교는 완전무결하게 교장의 개인 재산이어서 교사들은 교장이 고용하는 직원에 지나지 않았다. 이 학교에는 여선생이 결혼을 해서 임신을 하면 사직을 하는 불문율이 있었다. 교육상 보기에 좋지 않다고 권고해서 사직하게 만들었는데, 실은 교사들의 호봉이 높아지면 지출이 는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때문에 처녀 여선생들이 유난히 많았다.
나는 원래 화장을 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아내도 젊어서는 별로 화장을 하지 않아서 화장에 대해서 민감할 일이 없었다. 그런데 교사의 절반 이상인 여교사 중에 어떤 여선생은 당시의 내 기준으로는 심하게 보일 정도로 짙게 화장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만 그렇게 느낀 것이 아니었던 것이 매일 아침 교무회의 시간에 옆자리에 앉아 있는, 50대 교감 선생이 "목사님 ! 아무개 선생 좀 봐요? 저게 선생 얼굴이요? 술집 여자 얼굴이지."하고 소곤 되곤 했었다. 그래서 한 번은 친한 여교사에게 물어보았다.
"아침에 출근하기도 바쁠 텐데 도대체 왜 그렇게 열심히 화장을 하는가?" 그랬더니 “공공의 장소에 화장을 하지 않고 나가는 것은 여자로서 예의가 아니다.”라는 답이었다. 그런 말이 혹시 사서삼경에 나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내가 여자가 아닌데 어찌 알랴? 여자들이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야지. 그래서 또 물었다. "그러면 살짝 하면 되지 화장을 짙게 하는 건 왜 그러냐?" 그랬더니 "전날 술을 많이 먹었다든지 하면 화장을 더 짓게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여자들의 화장에 대해서 조금은 이해를 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교감이 여름방학에 무슨 연수라는 이름으로 열흘간 유럽여행을 다녀왔다. 개학하고 첫 교무회의 시간이었는데 교감이 내 귀에 대고 "목사님! 어째 여선생님들의 옷 색깔이 칙칙하지 않아요?"라고 했다. 나는 무심한척 "그러게요."라고 하고 앉아 있었다. 아침마다 하는 교무회의는 항상 교무주임이 형식적으로 "목사님! 하실 말씀 없습니까?" 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끝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실권도 없이 무늬만 있는 교목이 매일 할 말이 있을 리가 없기에 대게는 내가 "없습니다."하면 그 말로 교무회의는 끝나는 분위기이었는데 그 날은 그만 장난기가 발동해서 "있습니다."하고 일어섰다. 교무회의에서 내가 발언을 하는 일은 별로 없기 때문에 교사들은 '웬일?' 하는 눈으로 일제히 내게 시선을 돌렸다. 나는 교사들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짐짓 엄숙한 자세로 이야기를 했다.
"다름이 아니라 앞으로 여선생님들은 패션에 신경을 좀 더 쓰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교감 선생님이 이번에 유럽으로 연수를 다녀오시지 않았습니까? 교감 선생님께서 여선생님들의 패션 감각이 좀 떨어지는 것 같다고 생각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라고 했다. 순간 교무실은 웃음 바닥이 되었고 교감은 얼굴이 벌게져서 내 옷자락을 휘어잡아 주저앉히며 "아니? 이 양반이 갑자기 사람 망신을 시키고 있어?"하고 당황해했다.
그렇다. 사람은 보는 대로 배우는 것이다. (그러니 Miss President는 무엇을 보고 자랐겠는가?)
매주 방송으로 15분 동안 예배를 드렸는데 교사들의 대부분이 기독교인이 아니기에 예배 시간이 전혀 통제가 되질 않았다. 실질적으로는 자유 시간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방송 예배 시간에 녹음을 해서 틀어 놓고 내가 직접 순찰을 했다. 앞에 있는 실내 스피커에서 내 목소리가 나오는데 뒷문을 열고 내가 교실에 들어서면 왁자지껄 제멋대로 떠들던 학생들이 기겁을 하고 놀라기도 했다.
부활절, 추수 감사절 예배 때는 헌금을 했다. 내가 가기 전까지는 가난한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내는 헌금이니 전교생 2500명의 헌금을 모아도 얼마 되지 않아서 교목실의 경비로 쓰고 말았었다. 한 마디로 형식적이고 무성의해서 아무도 관심갖지 않는 행사였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하면 전교생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예배를 만들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부활절 예배에서 걷는 헌금은 장학금으로 지출하겠다는 제안을 했다. 그러나 원래 개인이 집단이 되면 좋은 일에는 관심을 잘 가지지 않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사행성 심리를 조금 가미하기로 했다. 즉 장학금을 주는데 선발 기준을 성적순이 아니라 헌금을 가장 많이 한 반의 학생에게 주겠다는 의견을 냈다. 즉 몰아서 주겠다는 것이니 일부에서는 입찰 경매식이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나는 "안 해 본 방법이니 일단 한 번 해보자."고 주장을 했다. 교목이 큰 권한이 있는 학교도 아니었는데 대부분의 선생들이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식으로 무관심했던 덕분에 내 의견대로 실시했다. 일단 제도가 그렇게 되었으니 평소에 전혀 헌금에 관심이 있을 리가 없었던 교사들이 최소한 학생들에게 헌금한다는 것을 광고는 했고 결과적으로 예년에 비해서 훨씬 많은 헌금이 거쳤다.
어떤 약은 선생은 나에게 은밀하게 다가와서 다른 반의 헌금 액수를 묻고 적으면 자기 돈을 더 내서 1 등을 해서 장학금을 타 가기도 했다. 일종의 내부 거래이었던 셈이었고 좋은 의도이었지만 결국 ‘돈 놓고 돈 먹기’의 게임인 셈이었다. 물론 한번 해 보고 그만두기는 했지만, 내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어차피 교목실은 모두가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비록 학력은 높지 않더라도 대다수 학생들은 착하고 순수했지만, 불량 학생들도 있어서 학교가 항상 시끄러웠다. 이 학교에서 가장 큰 사건은 일 년에 한 번씩 폭력 서클에 의해서 학교의 유리창들이 박살이 나는 사건이었다. 도대체 연례행사로 유리창을 깨는 놈들을 퇴학을 시키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그 대답이 재밌었다.
그런 학생들을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 품고 있는 것 자체가 애국이고 교육이라는 것이었다. 사실 현실적으로 이 학교에서 퇴학을 당하면 더이상 갈 곳이 없기 때문에 문제아들을 소년원으로 가지 않도록 학생으로 끌어안고 있는 것 자체가 애국이라는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그러나 사실은 학교의 약점이 워낙 많기 때문에 퇴학을 시키지 못하는 것이었고 놈들도 그것을 알고 깽판을 부리는 것이었다.
그 증거로 학생 놈들은 유리창을 깨기 전날 학교의 출석부를 모조리 훔쳐다가 흥정 대상으로 삼는 방법을 썼다. 왜냐하면 출석부에는 교육위원회에 보고되지 않은 정원 외의 학생, 장기 결석을 해도 처리를 하지 않는 학생들 등 학생 관리에 문제가 많은 것이 담겨져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교는 감사에 대비해서 출석부도 이중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런 골치 아픈 아이들을 퇴학은 시킬 수도 없고 그렇다고 처벌을 안 할 수도 없으니 명분을 세우기 위해서 징계위원회를 열어서 교목실에 위탁, 특별 교육시키기로 결정했다.
교목실에 위탁교육을 시킨다고 예수님이 직접 내려와서 생활지도를 하는 것도 아니니 무슨 뾰족한 수가 있겠는가. 이런 결정에 대해서 '도대체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하는 심정으로 교장에게 물었더니 "돈이 얼마 들어도 좋으니 목사님이 사람 개조 좀 시켜 보세요." 라고 했다. 그러나 그게 돈으로 될 일인가.
덕분에 울며 겨자 먹기로 골칫덩이들을 떠맡게 되어 정규 수업을 중단하고(일단 한동안 다른 학생들 눈에 보이지 않아야 함으로) 그 애들과 함께 캠핑도 가고 가나안 농군학교 비슷한 곳에 가서 훈련도 받아보고 했다. 나로서는 최선을 다해서 변화의 가능성을 찾아보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런 과정을 통하여 내가 얻은 결론은 교육이나 감화를 가지고는 안 되는 사람도, 시기도 있다는 것이었다. 사람들 중에는 충동적이거나 본능적으로밖에 행동할 줄 모르고 예의, 상식, 염치, 양심 등을 전혀 구비해 놓지 않은 사람도 있는 법이다.
결국 그 학생들은 유리창을 깬 일로는 퇴학을 당하지 않았지만 다른 이유들로 해서 모두들 학교를 그만두게 되어 결국 졸업한 학생은 한 사람도 없었다. 결국 나쁜 습관을 '자르지' 못해서 '잘려 버린' 것이다.
남학생들만 그런 학생이 있는 것이 아니고 여학생들도 골칫덩어리들이 있었다. 그 학교에도 어느 학교에나 있는 악명 높은 7공주가 있었다. 몇 년 후 그 중의 한 명을 버스에서 만났는데 어느 회사의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지금 회사 일로 어디를 가는 중이란다. 말썽을 부리거나 싸움질로 자주 불러와서 도저히 구제불능 같아 보였던 녀석이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한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해서 내가 의미심장한 얼굴로 자꾸 쳐다보니까 녀석도 내 시선의 의미를 눈치채고 눈을 흘기면서 "자꾸 그렇게 쳐다보지 마세요. 사람은 변하는 거 아니에요?"해서 "그래. 맞아! 변하는 거지."라고 대꾸를 했지만 자꾸 웃음이 났다.
인생의 막장처럼 학교로서의 마지막 학교이어서 문제아와 더불어 문제 선생도 많았다. 하루는 교무실에 들어섰다가 가냘픈 여학생이 무지막지한 체육선생에게 얻어터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당시는 그렇게 사람을 막 패도 되는 분위기였다. 왜냐하면 사람을 막 죽이는 사람이 대통령이었기 때문이다.
남선생이 많은 선생님들 앞에서 다 큰 여학생을 오뉴월 복날 개 패듯이 패는 모습을 도저히 볼 수 없어 때리는 선생에게 도대체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이 년은 상습적으로 자기 피를 팔아 고고장에 다니는 년입니다." 그 당시 그 애를 강제할 수 있는 것은 국가의 법도, 부모의 훈계도 아니었고 오직 '미친개'라는 별명이 붙은 무서운 체육선생 밖에 없었다. 순간의 육체적 향락을 위하여 적십자 병원 앞에 가서 줄을 서서 피를 파는 이 아이가 체육선생의 매가 무서워서라도 그런 짓을 그만두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업 시간에 에이즈에 대하여 설명할 필요가 있는 대목이 있었다. 당시는 나도 무지몽매해서 에이즈가 동성연애에서 오는 줄 알고 있었고, 그렇게 가르쳤다. 동성연애와 에이즈에 대하여 설명하는데 두 녀석이 티격태격하고 있었다.
내가 왜 그러느냐고 하니까 '동성연애는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끼리 섹스를 하는 거'라는 것에 대해서 한 녀석이'남자와 남자가 어떻게 하냐? 김 씨하고 김 씨끼리 하면 병 걸린다는 거다. 그래서 동성동본은 결혼을 못하게 하는 거다.'라고 서로 우기다 잠시 옥신각신 했다는 것이었다. 두 놈의 설명을 듣고 교실은 순식간에 웃음바다가 되어 버렸지만 어떤 녀석들은 진짜 그런가 보다 하고 고개를 끄떡이는 녀석들도 있었다.
이 학교에서 3학년 학생들의 2학기말은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 비록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는 인문계 학교가 아니지만 진학을 원하는 학생들도 소수가 있기 때문에 학력고사를 볼 때까지는 수업이 정상적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학력고사가 끝나면 대학에 진학하는 것도 아니고 취업을 할 가능성도 없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자포자기에 빠지는 절망적인 상태인 시기가 온다.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취업이 되거나 실습을 나가지 않더라도 졸업장은 얻어야 하기 때문에 수업 일수를 채우기 위해서 학교에 나오기는 하지만 도저히 정상적으로 수업을 진행 할 수가 없는 분위기였다. 더욱이 추위가 다가오면 교실 난로에 뗄 수 있는 물건이라면 아무것이나, 심지어는 취업 실습을 나가서 빈자리가 생긴 책상 걸상까지 부셔서 난로에 처넣고 불을 폈다. 연기가 가득한 교실에서 책상에 책도 꺼내 놓지 않고 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은 채 의자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아이들의 모습은 마치 패잔병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정말로 슬픈 것은 그들은 아직 전쟁을 시작하기도 전이라는 것이었다.
교목으로 내가 학생들과 접촉 할 수 있는 시간은 1학년 윤리 시간과 공식적인 행사밖에 없었기 때문에 나는 2, 3학년의 교사들이 수업을 못 하게 되면 대신 들어가 보강 형식으로 학생들과 대화를 하는 기회로 이용을 했다. 이런 시기에는 교사들도 될 수 있으면 수업을 하기 싫어하기 때문에 내가 자진해서 수업시간에 들어가 아무 준비 없이 사회에 나가야 하는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나름대로 그들이 사회에 나가면 기다리고 있는 것들과 그것들과 맞서 싸우는 방법을 일러주었지만 그들의 미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었던 터라 수업을 할 때마다 마음이 참으로 무거웠었다.
자료가 다르다.
6.25가 끼어있는 주간에 하루는 교무실에 들어갔더니 분위기가 살벌했다. 6.25의 성격 문제를 놓고 50대의 교감 선생과 20대 후반의 젊은 교사와 한판 붙은 것이다. 교감은 교과서에 나와 있는 대로 6.25를 이해하고 있었고 젊은 교사는 당시 소개되기 시작한 미국(소련이 아니고) 군사 학자 부르스 커밍스의 이론에 근거하고 있었다.
교감은 나를 보자 마치 원군을 만난 듯 반기면서 "목사님! 마침 잘 오셨소. 아니 이 선생이 6.25를 남침이 아니라고 하는데 이야기 좀 해주시요." 했다. 나는 단번에 교무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분위기를 파악할 수가 있었다.
"제 생각에는 교감 선생님이 옳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이 선생도 옳고요."
"아니? 목사님이 무슨 황의 정승이요?"
"아니요. 교감 선생님은 교감 선생님이 가진 자료에 의하여 옳고, 이 선생님은 이 선생님이 가진 자료에 의해서 옳습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어떤 자료가 더 객관적인가를 살펴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자기에게 주어진 자료에 의해서만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자료가 부족하면 치우친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고 풍부한 자료를 가져야만 균형 잡힌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언제나 자신이 겪거나 아는 것이 유일하다고 믿는 데서 모든 대립과 갈등이 비롯된다. 그러나 내 생각만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는 순간 그 사람에게는 하나의 지옥이 생긴 것이나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자신의 절대적 옳음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느끼는 분노와 절망, 증오가 바로 지옥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슬픈 권투 시합
1982년 11월 어느 날 교장실에서 호출이 왔다. 교장실에 들어서니 웬 체구가 조그만 청년이 앉아 있었다. 교장은 "목사님! 얘 모르세요? 얘가 우리 학교 졸업생인데 이번에 WBA 라이트급 챔피언전에 나가게 된 김득구입니다." 라고 소개를 했다. 득구는 시합을 하기 전 모교의 후원을 얻기 위해서 찾아온 것이었다.
교장은 "목사님! 득구를 위해서 기도를 좀 해주세요."라고 했다. 교장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득구는 소파에서 일어나 얼른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나는 갑자기 무엇이라고 기도를 해야 할지를 몰라서 "최선을 다해서 싸우게 해 달라."고 기도를 했다.
득구의 경기는 공교롭게도 일요일 예배 시간인 11시에 시작이었다. TV를 보다가 시간이 되어 예배를 인도해야 하므로 예배당으로 들어가면서 당시 6살이었던 큰 애에게 "TV 끄지 말고 잘 보고 있어. 누가 이기나."라고 했다. 예배 시간에 교인들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다 함께 김득구가 잘 싸우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예배가 끝나자마자 방으로 들어갔더니 이미 TV가 꺼져 있었다. 아이에게 "왜 껐니? 끄지 말라고 했잖아." 했더니 두 살 어린 동생과 장난감을 가지고 정신없이 놀던 아이는 "뭐?" 라고 물었다. “아빠가 누가 이기나 보라고 했잖아?" 했더니 그제야 생각이 난듯 "에이. 그 아저씨 쓰러졌던데 뭐."하는 것이 아닌가?
김득구(金得九, 1955년 1월 8일 - 1982년 11월 18일)는 대한민국의 권투 선수이다.
1982년 11월 13일 (한국 시간 14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WBA 라이트급 챔피언 전에서 레이 맨시니와 권투경기 도중 사망하였다. 당시 경기 14라운드에서 맨시니에게 턱을 강타당한 김득구는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나흘간의 뇌사상태 끝에 어머니의 동의를 얻어 산소마스크를 떼어 내고 사망했다.
이 사건은 많은 충격을 낳았다. 김득구 선수의 어머니는 이후 자살했으며, 촉망받는 권투 선수였던 레이 맨시니도 곧 권투를 그만두었다. 이외에도 김득구 선수가 쓰러지는 장면이 텔레비전으로 생생히 중계되면서 1960년대 이후로 대한민국 최고의 스포츠로 인정받던 권투가 위험한 스포츠라는 인식이 생기기 시작했다. 미국 의회에서 권투의 위험성에 대한 청문회가 열리기도 했다. 결국 권투계는 15 라운드 경기를 12 라운드로 줄였고, 매 라운드 사이의 휴식시간을 60초에서 90초로 늘리고, 스탠딩 다운제를 도입했다.
이상은 위키 백과에 수록되어 있는 김득구에 관한 내용이다.
득구가 죽은 후 학교에서 나는 다시 김득구의 추도식을 집행해야만 했다. 참으로 허망한 일이었다. 2주 전에는 잘 싸우라고 기도하고 다시 영혼의 안식을 위하여 기도를 하다니……. 추도식에서 옆자리에 있던 교장은 나에게 '목사님이 기도를 잘못했어요.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를 해야지 최선을 다해서 싸우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으니 기도대로 최선을 다해서 싸우다가 죽은 것 아니냐?'면서 슬픈 농담을 했다.
더욱 슬픈 코미디는 추도식이 끝난 후 교실에서였다. 수업을 하러 어느 교실에 들어섰더니 칠판 구석에 조그만 글씨로 '김득구 값 300원'이라고 쓰여 있었다. 일상적으로 반장이 공지사항을 칠판 구석에 적어 놓는 것인데 김득구를 위한 조의금으로 전교생이 300원씩 걷도록 결정되었으니 잊지 말라고 써 놓은 것이었다. 나는 우습기도 하고 기가 막히기도 해서 "아이고, 이 무식한 놈들아! 김득구가 300원짜리냐? 이런 경우는 조의금이라고 써야지."라고 했다. 애들은 낄낄거리고 웃고 반장은 머리를 긁으며 나와서 고쳐 썼다.
두환이 형 시절이라서 지금 생각하면 실소를 금할 수 없는 코미디스러운 일도 있었다. 방학이 끝나고 개학 전에 2일 동안 교목실 주관으로 교사 연수회를 하게 되어 있어서 김동길 교수를 강사로 초빙했다. 행사 후에 시교육위원회에서 왜 김동길 교수를 초청했는지 사유서를 제출하라는 요구를 받았었다. 김동길 교수가 나중에는 권력에 빌붙는 추한 모습을 보였지만 당시에는 그래도 체제 비판적 인사라고 권력층에서 신경을 좀 써주는 처지이었다.
사립학교는 공립학교처럼 교사가 순환되지 않기 때문에 물이 고이면 썩게 마련인 것처럼 파벌이 있기 마련이다. 파벌에는 '옳은 쪽'과 '틀린 쪽'이 있는 것이 아니라 '덜 나쁜 쪽'과 '더 나쁜 쪽'도 있기 마련인데, 나는 태어나기를 용뿔 난 정의감을 가지고 태어난 탓에 아무래도 덜 나쁜 쪽의 입장에 서게 될 수밖에 없었다. 원래 목사라는 입장은 폼으로라도 아무나 다 포용하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 법인데, 어찌어찌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덜 나쁜 편에 치우치게 되니 자연히 반대세력이 생겨서 내가 하는 일에 비협조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교육에 신경을 쓰는 교감파와 돈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서무과장파 사이에서 나도 모르게 교감파가 되어 서무과장파에게 견제를 당하게 된 것이다.
또 한 가지 사기가 꺾인 것은 교장과 밀착해서 야심차게 학교를 경영(운영이 아니다)을 해보려다 실패를 했기 때문이다. 교장은 박정희와의 특별한 관계 때문에 나이 30살에 서울시경찰국장을 할 정도로 유명한 정치 검사 이건개와 서울법대 동창이었다. 그냥 동창이 아니라 이건개가 상처를 하자 학교에서 인물이 잘난 여선생 한 명을 후처로 소개할 정도로 막역한 사이이었다. 따라서 그는 단순한 교육자가 아니라 세상살이에 밝은 학교 경영자이어서 그 학교를 팔고 다른 학교를 새로 해보려는 욕심이 있었다.
어느 날 나에게 그런 속마음을 보이면서 학교를 인수할 만한 기독교 재단이 있는지 알아보아 달라고 부탁을 했다. 나로서는 그런 일에 개입을 해서 성사가 되면 교목으로서 내 입지가 넓어질 것이기 때문에 부지런히 촉수를 밝혀서 수배를 해 보았다. 그랬더니 당시 재계에 혜성 같이 떠오르는 샛별이었던 명성 그룹 김철호 회장이 장로로 있는 교회 목사와 선이 닿아서 학교 매매 제안을 했다. 김 회장 쪽에서도 긍정적으로 검토를 해서 대화가 잘 진행이 되고 있었는데 갑자기 교장이 중단을 시켰다. 학교의 새 주인 밑에서 공신이 되는 꿈으로 부풀었던 내가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교장은 김철호의 배경을 알아보았더니 불안하다는 것이다. 교장의 말대로 김철호는 얼마 안 있다가 구속되고 명성구룹은 해체되고 말았다.
명성그룹 김철호 회장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교장의 정보력이다. 재계에서 궁금해 하면서도 알 수가 없었던 명성의 내막을 교장은 1년 전에 알 수 있는 정보력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대중은 삐삐로 통신하는데 인공위성으로 정보를 소통하는 이들을 당할 재간이 있겠는가? 결과적으로 나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어 버렸다. 교장과 가까워져서 권력을 누려 보려던(?) 야무진 꿈은 사라지고 무늬만 교목인 위치에 염증이 나서 결국 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사직서를 제출했더니 교장이 섭섭하다며 식사를 같이하자고 워커힐 뷔페에 데리고 갔다. 당시로써는 뷔페가 귀하기도 했지만 그 중에도 워커힐 뷔페는 최상급에 속했었다. 난생 처음 가본 호텔 뷔페식당에다가 비록 헤어지는 자리이기는 했지만 하늘 같은 교장과의 일대일 식사이다 보니 무척 조심스러웠다. 생전 처음 보는 먹고 싶은 음식이 많았지만 조신하게 한 접시만 담아서 음식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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