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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6. 묵상글 ( 성주간 화요일. - 하느님 안에서의 반전.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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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6. 성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하느님 안에서의 반전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
그러나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
오늘 이 말씀에서 ‘그러나’라는 말이 눈에 쏙 들어오며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그러나’는 앞의 얘기와는 반전을 예고하는 표현이지요.
앞에서는 헛수고, 헛고생을 얘기하다가
그건 그렇지만은 않다고 얘기하는 것이지요.
무엇이 어떻게 그렇지만은 않다는 말입니까?
사람들은 나를 버리지만 하느님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고,
나의 일과 노력은 인간적으로 그리고 일시적으로 헛수고가 되겠지만
영적으로는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영광이 될 것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우리의 헛수고는 두 가지입니다.
일의 실패와 관계의 실패입니다.
보통은 공들인 일이 아무 성과가 없을 때 헛수고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결과가 나지 않았을 때 그렇게 얘기하지요.
그런데 신앙인인 우리는 이 헛수고의 기준을 바꿔야 할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결과가 아니라 하느님이 원하시는 결과가 나지 않은 것으로,
그러니까 하느님이 원하시는 대로 되지 않을 때 헛수고인 것으로 바꿔야.
그러니 우리 신앙인은 내가 원하는 것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다를 때
그렇게 애쓴 것이 헛수고가 된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고, 어떤 일이
내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땐 하느님 뜻과 달라 그렇게 됐다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종 곧 주님의 헛수고는 일이 아니라 인간관계의 실패,
그러니까 제자 교육의 실패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로 말하면 자식 농사의 실패입니다.
3년 동안 당신의 제자요 하느님 포도밭의 일꾼으로 그렇게 애써 키웠는데
유다 이스카리옷은 당신을 팔아넘기고 다른 제자들은 다 배반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은 아주 심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산란하시어 드러내 놓고 말씀하셨다.”
주님의 이 토로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우리처럼 마음에 담아 둘 수 없어서 터뜨리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까요?
그리고 그 심란하심이 우리와 같은 의미의 심란하심일까요?
물론 좌절감 곧 제자 교육이 내 뜻대로 안 된 것의 심란하심이 아니라
사랑의 심란하심 곧 제자의 불행을 안타까워하는 것으로 이해해야겠지요.
우리만 해도 자식 농사가 잘되지 않았을 때
내 뜻대로 안 된 것 때문에 심란하지 않고,
자식이 불행할까 봐 심란하지 않습니까?
어쨌거나 이제 주님은 제자들의 배반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당신이 죽어갈 때 제자들은 요한 외에 아무도 당신 곁에 없을 겁니다.
그럴지라도 당신 곁에 아버지 하느님이 계신다며,
당신의 죽음이 부활의 영광으로 이어질 것이라며,
그리고 제자들도 지금은 배반하지만
나중에는 참 제자로 바뀔 것이라며 심란하심을 추스르십니다.
‘그러나’의 뜻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느님 안에서의 반전 바로 그것입니다.
하느님 안에서의 반전을 살아가는 우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런 말을 듣는 사람들이 됩시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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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6. 성주간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지난 18일, 신학교 추천서를 써 주셨던 이학노 요셉 몬시뇰님의 사제 생활 50주년을 기념하는 금경축이 있었습니다. 미사와 모든 행사를 마치고 몬시뇰님께서는 당신이 추천해 줬던 신부, 수녀들을 향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시간 정말 빠르다. 나도 금경축은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벌써 금경축이다.”
50년이라는 시간, 정말로 긴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의 속도가 빠르다는 것을 떠올리면 그리 긴 시간도 아닐 수 있었습니다. 하긴 저 역시 엊그제 신학교 들어가겠다고 몬시뇰님께 추천받았는데, 벌써 사제 생활을 한 지도 25년이 지났습니다. 이렇게 지나고 나면 너무 빠른 시간입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너무나 천천히 지나는 시간이었습니다. 군대에서 제대 날짜를 기다릴 때, 사제 서품 날짜를 기다릴 때, 힘든 사목에서도 시간의 흐름은 너무나 느렸습니다.
물리적 시간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만의 절대적 시간 안에서 느리게도 또 빠르게도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나의 절대적 시간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가 중요합니다. 내가 힘들다고 해서 시간이 잠깐 멈춰서서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진행되는 시간입니다.
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세상 안에서의 삶이 영원하지 않기에 하느님 나라 안에서의 영원함을 위해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묵상하고 지금 당장 실천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배반하는 유다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가 예수님을 배반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면서 함께했던 그 모든 시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하느님의 관점을 보려고 하지 않았던 그 모든 마음이 예수님을 결국 배반하게 됩니다.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뜨끔해서 다시 마음을 되돌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순간, 그의 시간은 하느님의 시간이 아닌 인간의 시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을 팔아넘기고 자기 이득을 취합니다.
잠시만의 만족을 얻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시간은 잠시만의 만족을 가져다주는 유한한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보장되는 영원의 시간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특히 우리가 그 나라에 들어가 살 것을 떠올린다면, 이 세상 안에서도 당연히 하느님의 시간을 쫓아서 하느님 뜻에 맞게 살아야 했습니다.
지금 어떤 시간을 살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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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착한 일은 작다 해서 아니하지 말고, 악한 일은 작다 해도 하지 말라(명심보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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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6. 성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새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요한 13,38)
우리는 <성삼일>을 이틀 앞두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절망과 어둠이 더해가는 이야기입니다. 빛으로부터 떠나 어둠 속으로 빠져들어 간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는 두 개의 밤이 있습니다. 그리고 두 개의 배반이 있습니다. 하나는 유다의 밤이요, 또 하나는 베드로의 밤입니다. 유다의 밤은 캄캄한 어둠이 짙어져가는 밤이요, 베드로의 밤은 닭이 울기 전, 새벽이 밝아져오는 밤입니다.
유다의 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둠이 제자들을 덮치자, 마음이 산란하시어 드러내놓고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요한 13,21)
사실, 예수님께서는 배반하는 제자를 마지막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빵을 적셔서 그에게 주었습니다. 빵을 적셔서 주는 것은 애정의 표현이었습니다. 당신을 배반할 제자에게 끝까지 베푸는 충실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사랑을 등지고서 밤의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택했습니다. 그는 의도적으로 면밀히 계획한 바를 어둠 속에서 행했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내놓겠다고 장담하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새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요한 13,38)
베드로는 주님을 배반할 의향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약한 순간에 그만 미끄러져 넘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닭이 울면, 어둠은 밝아질 것입니다. 베드로는 지나친 자기 과신으로 넘어졌습니다. 사실, 우리가 넘어질 때는 가장 약할 때가 아니라, 가장 강할 때입니다. 반대로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우리가 약할 때 오히려 강해질 것입니다(2고린12,10).
그렇습니다. 유다의 밤은 어둠과 악으로부터 오는 밤이요, 베드로의 밤은 약함과 과신으로부터 오는 밤입니다. 또한 유다의 밤은 죄를 깨닫고서도 더 짙은 어둠으로 빠져들어 멸망으로 가는 밤이요, 베드로의 밤은 죄를 깨닫고서는 어둠을 헤치고 빛으로 나아가는 생명의 밤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베드로같이, 유다같이 곧잘 넘어집니다. 사실, 우리 인간은 넘어지는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모두가 일어서는 존재인 것은 아닙니다. 혹 넘어진 사실을 까달아 알고 뉘우치고 성사를 본다고 해도, 일어선 사람인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단지, 넘어진 채로 넘어진 자신을 본 것일 뿐, 비록 용서는 받았다할지라도 일어서서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일어서서 넘어졌던 자신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빛 속으로 건너와서 어둠을 바라보아야 할 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 일어선 자만이 빛나는 새벽을 만날 것이요, 일어선 자만이 빛 속에 들 것입니다. 먼저 베풀어진 그분의 사랑을 만난 자만이 그분의 빛 속을 걸을 것입니다.
하오니, 빛이신 주님! 저를 비추소서! 제가 일어나 빛 속을 걷게 하소서.
오늘 제가 비록 넘어지더라도 일어나 빛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요한 13,38)
주님!
어둠에 휩싸여 넘어지고 또 넘어집니다.
빛을 비추소서.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넘어지기도 전부터 베풀어진 당신의 사랑을 보게 주소서
일어나 빛 속을 걷게 하소서.
구원의 십자가를 지고 사랑의 길 걷게 하소서.
빛을 받아 빛을 밝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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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6. 성주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배신의 죄보다 사랑입니다
배신은 한솥밥을 먹는 사람이 합니다. 멀리 있는 사람은 서로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등질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있는 사람은 서로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고 그것이 채워지지 않았을 때 마음이 상해 차라리 몰랐던 사람만도 못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잘 안다는 것이 오히려 별것도 아닌 것에 서운함을 갖게 됩니다. 사람의 마음은 강한 것 같지만 연약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폭과 깊이, 넓이를 더해야 하겠습니다. 내 마음의 문을 열어 빛이 들어올 수 있도록 해야 주님께서 우리 삶의 역사 안으로 거침없이 들어오실 것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비록 예수님을 팔아넘기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여전히 예수님의 제자였고,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마음을 알고 내내 번민하셨습니다. 속을 다 아시고 그것을 품는 것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과 깊은 일치 안에서 침묵으로 철저히 고독을 이기셨습니다. 마음이 넓어야 좁은 이를 품을 수 있는 법입니다. 마침내 유다는 스승을 배반하였고 그 자책 때문에 목숨을 끊었습니다.
사실 누구나 유다처럼 약한 마음을 지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양상이 다릅니다. 베드로나 바오로는 주님을 등졌던 사람이지만 회개하여 주님의 도구로 항구하게 살았습니다. 한때 주님을 배반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 주님의 자비를 믿고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유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주님의 자비가 심판을 이긴다.’는 진리를 믿지 못한 탓입니다. 우리는 어떤 처지나 상황에서도 주님의 자비 안에 굳건해야 합니다. 주님의 가장 큰 약점은 어떠한 죄도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용서하는 데 지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또 잘못할 것을 알면서도 용서하십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유혹은 나를 볼 수 있는 기회입니다. 유혹 앞에서 나를 가장 확실하게 알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께 의탁할 수밖에 없는 나의 한계성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혹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시험입니다. 하느님 편에서 생각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면 커다란 공로가 될 것이고, 사탄의 편에 서서 그 유혹을 받아들이면 파멸의 길, 죽음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에는 항상 사탄의 말만 있는 것도, 그렇다고 늘 하느님의 말씀만 들리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끊임없는 선택의 길에 서게 됩니다. 단호하게 하느님을 선택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유혹은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요, 나에게 자유가 주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거기에는 하느님 앞에서의 그만한 책임을 져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심판보다는 자비를 갈망하는 만큼 예수님 곁에 꼭 붙어 그분만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절대 빼앗기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은 배반 앞에서도 늘 용서를 베푸셨습니다. 우리도 그 마음으로 가슴을 채워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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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6. 성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전임 신부님이면서 동창 신부님이 제게 ‘선물’을 하나 주고 갔습니다. 성당 마당에 ‘창고’를 하나 만들 수 있는 후원금을 주고 갔습니다. 신부님이 주신 후원금을 아끼기 위해서 형제님들이 팔을 걷고 나섰습니다.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서 모든 작업을 손수 하였습니다. 인터넷에서 창고를 세울 도면을 50$에 구매했습니다. 그리고 도면에 따라서 기초를 세우고, 그 위에 합판으로 바닥을 깔았습니다. 네 면의 벽을 만들어서 세웠고, 지붕으로 덮었습니다. 입구에는 문을 달았고, 벽에는 창문을 달았습니다. 이제 조금만 더 힘을 모으면 근사한 창고가 마련될 것입니다. 매주 토요일 형제님들이 모여서 작업하였습니다. 식당을 하시던 형제님은 매주 맛있는 점심을 준비해 주었습니다. 나이가 지긋하신 형제님은 집에 있는 작업 도구를 가져 오셨습니다. 젊은 형제님들은 무거운 자재를 날랐습니다. 손재주가 없는 저는 현장을 보면서 고마운 마음을 전했습니다. 오후에 작업을 마치면 형제님들과 삼겹살에 맥주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부님이 제게 준 선물은 눈에 보이는 ‘창고’가 아니었습니다. 그 창고를 만들기 위해서 모인 형제님들의 마음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묵묵히 땀을 흘리면서 창고를 만들고 있는 형제님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제게 큰 선물을 준 동창 신부님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이스라엘의 생존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의 구원이 땅 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민족들의 빛이 되는 사람,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은 아주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약하고, 부족한 사람들도, 예수님을 배반했던 사람까지도 민족들의 빛이 될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배반하였지만 절망을 버렸습니다. 마음 안에 희망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배반한 자신의 죄를 뉘우쳤고, 통회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 용서를 받았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신비입니다. ‘부활은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지어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부활은 이제 죄의 상태에서 돌아서서 다시금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고,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잘못과 허물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와 같은 잘못과 허물을 인정하고, 그것들을 정화시켜 주시는 하느님께로 우리들의 마음을 돌리는 것입니다. 절망을 버리고 희망을 간직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을 수 있으며, 그것이 신앙의 신비입니다.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었지만 부활하셨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였고,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제자들의 배반도, 외부의 박해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를 무너트리지 못하였습니다. 교회는 지난 2,000년 동안 어둠에 빛이 되었습니다. 절망 중에 있는 이들에게는 희망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현대 문명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많은 선물을 주셨습니다. 성체성사를 통해서 예수님은 몸과 피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교회를 통해서 예수님은 구원의 방주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셨습니다. 신앙인은 이웃에게 따뜻한 선물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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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6. 성주간 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누군가의 돌아설 마음을 이미 알고 있다면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요? 누군가가 자신을 팔아넘길 마음을 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요? 일이 벌어진 후 알게 되더라도 아픈데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 주님께서는 나무로 만들어진 십자가를 지기 전 이미 커다란 십자가를 지고 계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제자들의 모습을 알고 계시면서도 주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길을 걸어가십니다.
마음속으로 제자들을 위해 수없이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그들이 돌아왔을 때 교회의 머릿돌로서 그리고 교회를 위한 사람들로서 살아가기를 바라시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주님의 기도는 이루어집니다. 이스카리옷 유다 말고 모든 사도는 교회의 거름이 되고 초석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위해서도 주님께서는 기도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저버리는 상황 속에서도, 주님께 등을 돌리는 상황 안에서도, 그리고 주님을 멀리하는 모습을 보시면서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돌아와 하느님 안에서 살아가기를 바라시며 말입니다.
오늘도 우리를 위한 십자가의 길에 한 발 더 다가가십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하늘나라로 받아주시기를 바라는 기도를 담아 십자가의 길에 들어서십니다.
돌아오십시오. 주님께서는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의 십자가까지 짊어 지시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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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을 금으로 만드는 방법
돌을 금으로 만드는 방법이 어디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 마음속에 있습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
이미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 안에 넣어 주셨습니다.
그 방법은 바로 긍정이라는 힘입니다.
같은 사건을 앞에 두고
누구는 긍정의 힘으로 바라보고
누구는 부정의 힘으로 바라봅니다.
물론 그 둘의 결과는 천지 차이입니다.
긍정의 힘으로 바라본 사람은
그 사건이 깊은 고통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그 안에 있는 선물을 발견합니다.
선물을 발견하는 순간
그 고통스러운 사건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닌
좋은 경험이 됩니다.
돌이 금이 되는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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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6. 성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나는 누구인가?”
-너는 나의 종, 너에게서 나의 영광이 빛나리라-
위 말씀은 예수님은 물론 주님의 제자들인 우리 모두의 신원이자 존재이유입니다. 요즘 참 절실히 깨닫는 것은 리더인 지도자의 중요성입니다. 세계든 나라든 사회든 가정이든 언제 어디서든 지도자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위로 올라갈수록 리더의 중요함은 더욱 커집니다. 지도자에 따라 공동체의 흥망성쇠가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정치가 민생입니다. 정말 정치 지도자를 잘 선택해야 할 4월10일 총선입니다. 교부들의 가르침중 국가와 권력에 대한 내용을 일부 나눕니다.
1.국가권력은 호의와 온유함으로 지배해야 한다.
2.공평과 인내, 친절은 윗사람이 지녀야 할 아주 좋은 자질이다.
3.황제는 교회 위에 있지 않고 교회 안에 있다.
4.통치자는 많은 권력으로 구원받는게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구원받는다.
5.세상의 모든 권력은 실재가 아니라 꿈이다.
6.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 세상의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7.재물은 탐욕으로 이끌고, 권력은 교만으로 이끈다.
신자이자 국민인 우리가 알아야할 교회 교부들의 가르침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은 좌파도 우파도 아닌 예수님파 주님의 신자들입니다. 지도자의 영원한 모델 예수님을 참 지도자로 모신 우리임을 늘 명심해야 합니다. 지도자들은 물론이고 우리 역시 오늘의 다산 어른과 공자의 말씀도 유익합니다.
“인간을 수단으로 삼아 저울질한다면, 나 또한 인간의 마음을 잃은 도구로 변할 것이다.”-다산
‘계씨가 주공보다 부유함에도 염구는 많은 세금을 거둬 재산을 더 늘려줬다. 이에 공자가 말했다. “그는 나의 제자가 아니다. 북을 울려 그의 죄를 다스려라.”’-논어
성지주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입성시 군중들의 환호, “호산나!”는 우리 식으로 하면 “하느님 만세! 하느님 찬미!”와 같습니다. 새삼 하루를 시작하면서 제가 작년 8월15일 광복절이후 바치는 만세육창이 옳았음을 확인합니다.
1.하느님 만세!
2.예수님 만세!
3.대한민국-한반도 만세!
4.가톨릭교회 만세!
5.성모님 만세!
6.성 요셉 수도원 만세!(우리가정 만세!로 바꾸시길 바랍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공동체임을 확인하는 만세육창입니다. 지금은 성주간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질문하고 답을 찾는 시기입니다. 성주간, 죽음을 예감한 예수님 역시 자신이 누구인지? 처절히 찾고 계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우리 역시 나는 누구인가? 물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참 지도자인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어제 성주가 월요일 제1독서 이사야서는 주님의 종의 첫째 노래였습니다. 바로 여기 주님의 종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확인하신 예수님이셨고 우리 역시 주님과 함께 우리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향유를 부어 주었던 여인도 예수님께는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겠지만 이보다 더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주님의 종을 통한 자신의 신원확인이었습니다. 이런면에서 어제 강론 제목은 참 적절했습니다.
“주님의 종;
예수님 사랑하기, 예수님 알기, 예수님 살기, 예수님 닮기”
주님의 종인 예수님은 우리 삶의 영원한 지도자이자 중심이기에 우리의 신원확립에도 결정적임을 깨닫습니다. 어제에 이어 성주간 화요일 예수님 역시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마음이 산란하시어 드러내놓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 넘길 것이다.”
예수님은 배반자의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는 12제자들중 하나, 시몬 이스카리옷의 아들 유다임을 지목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의 애제자에게 슬며시 물어봐달라 했을 때 예수님은 빵을 적셔서 주는 자가 바로 그자임을 알려주었고, 유다가 빵을 받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습니다. 유다는 빵을 받고 바로 밖으로 나갔고 때는 밤이었습니다.
주님의 빛나는 제자공동체에서 어둠의 멸망을 택한 유다였습니다. 이런 모든 일련의 과정에서 예수님의 한결같을 수 있었음은 제1독서 주님의 종의 두 번째 노래 덕분이였음을 봅니다. 주님의 종에서 자신의 신원을 발견하고 확인한 예수님이셨음이 분명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 부르시고,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주셨다.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
어찌 주님의 종, 예수님께만 해당되겠습니까? 또 하나의 주님의 종인 믿는 이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진리입니다. 우리 또한 우연한 존재가 아니라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불림받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태중교육 역시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우리 어머니들이 이런 진리를 깨달아 안다면 낙태는 꿈에도 생각 못할 것이고 자녀들을 결코 함부로 대할 수 없을 것임은 물론 부르심에 적절한 인물로 성장하도록 자녀교육에 기도와 정성을 다할 것입니다. 화답송 시편도 이를 다시 확인합니다.
“주 하느님, 당신은 저의 희망, 어릴 적부터 당신만을 믿었나이다. 저는 태중에서부터 당신께 의지해 왔나이다. 어미 배속에서부터 당신은 저의 보호자시옵니다.”(시편71,5-6ㄱㄴ)
오늘 복음에서 유다의 배반에 이어 베드로의 배반도 예고됩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내놓겠다는 베드로의 자만을 여지 없이 꺾어버림으로 장차 회개에로 이끄는 주님의 심모원려(深謀遠慮)가 참 놀랍습니다.
“나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이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여기에 해당하지 않을자 몇이나 될런지요? 베드로는 물론 모든 신자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우는 죽비같은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착잡하고 복잡했을런지요! 예수님은 다음 이사야서의 주님의 말씀에서 자신의 신원을 확인하고 위로와 힘도 받으셨을 것입니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그러나 나는 말하였다.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 그러나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
예수님뿐 아니라 또 하나의 주님의 종인 우리가 신원의 위기를 겪을 때마다 상기하여 제자리를 찾게하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구원 섭리 안에 비로소 구원의 출구를 찾은 예수님의 영적승리의 고백이 감동적이요 이 또한 우리의 고백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하느님의 영광은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The glory of God is the living person)’, 바로 이레네오 성인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된 우리들입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날로 예수님을 닮아 베네딕도회의 모토대로 하느님의 영광이 되어 “모든 일에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삶”을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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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6. 성주간 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고백>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요한 13,27)
내가 하려는 일을
당신께서 모두 아시지만
내가 하려는 일이기에
당신께서 막지 않으십니다
내가 하려는 일이
당신께 기쁨이면 좋으련만
내가 하려는 일이
당신께 슬픔일지라도
내가 하려는 일이기에
당신께서 막지 않으십니다
내가 하려는 일을
당신께서 막지 않으심이
나에 대한 당신의 사랑이기에
내가 하려는 일이
당신께 슬픔이라면
내가 하려는 일을
어떻게든 하지 않는 것이
당신께 대한 나의 사랑이건만
자주는 아니더라도
여전히 심심찮게
그 사랑 하지 못하는
내 스스로가 부끄럽고 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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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6. 성주간 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래서 시몬 베드로가 그에게 고갯짓을 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람이 누구인지 여쭈어 보게 하였다.(요한 13,24)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낸다
그래서 요한은 베드로의 고갯짓에 관해 설명하기 위해,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 품에 기대어 앉아 있었는데”라고 합니다. ‘기대어 앉아 있었다’는 말과 그들의 스승께서 그들에게 그런 대담함을 허락하셨다는 말씀에서 여러분은 뭔가 깨달으셨습니까? 그 이유를 알고 싶으신가요? 이 행동은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였다”라고 합니다. 저는 요한이 그렇게 한 또 다른 이유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자신이 그 비난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드러내 놓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그런데 왜 요한은 다른 때도 아니고 사도들의 우두머리가 고갯짓을 했을 때만 이 말을 했을까요? 베드로가 그에게 고갯짓을 한 것이 그가 더 높은 이여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도록, 요한은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에게 보여 주신 큰 사랑 때문이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요한은 왜 여전히 그분 품에 기대어 앉아 있을까요? 제자들은 아직 주님의 지고함에 대한 의식이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의기소침한 제자들을 이런 식으로 풀어 주셨습니다. 그 시점에 제자들의 얼굴은 무척 어두웠을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산란했다면 표정은 더욱 그랬을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과 물음으로 그들을 달래느라고 주님은 먼저 분위기를 잡으시며 요한이 당신 품에 기대도록 허락하십니다. 한편 요한의 겸손도 눈여겨보십시오.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도 않고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였다고만 합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5 만물이 존재의 평등을 공유하고 있다
이따금 나는 어느 한 사람을 다른 사람보다 더 사랑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이 나에게 이 우정을 더 자주 요구하고, 그래서 내가 그들에게 나 자신을 더 많이 내주는 것처럼 보일 뿐이지, 나는 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은 우정을 베풀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은 모든 피조물을 고르게 사랑하시고, 그들에게 자신을 가득 부어주십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을 똑같이 정답게 대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교도들에게서도 이러한 자세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근본적인 인간 본성에 의하여 자신들에게 주어진 앎의 능력을 통해 사랑이 넘치는 균형 감각에 도달한 자들입니다. 한 이교도 선생이 사람은 본디 온화한 동물이라고 했습니다.(143)
✝️ 화요일 성시간(성령)의 날✝️
예수님, 아무런 죄도 없이 이 세상에 오신 마리아와 함께 찬미와 영광을 드립니다. 성모님의 잉태는 인류가 처음으로 죄를 지었을 때부터 예언되었습니다. 창세기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주 하느님께서 뱀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 너는 모든 집짐승과 들짐승 가운데서 저주를 받아 네가 사는 동안 줄곧 배로 기어다니며 먼지를 먹으리라. 나는 너와 그 여자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창세 3,14-15)
오, 예수님, 창세기에 예언된 죄 없는 여인은 바로 당신의 어머니 마리아이십니다. 예수님 당신은 사탄의 머리를 으스러뜨려 완전히 파괴하신 성모님이 잉태한 자손입니다. 마리아는 영적으로 죽음을 겪거나 죄에 물들지 않으셨기에 새로운 하와, 살아 있는 자들의 참된 어머니가 되셨나이다.
0 예수님, 살아 있는 자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와 함께 당신께 감사하며 찬미하나이다.(침묵 가운데 반복한다.)(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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