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밤은 왜 다른 밤들과 다른가?">
“오늘 밤은 왜 다른 밤들과 다른가?”
이는 유대인들의 “세다 예식” 중에 있는 질문입니다.
“세다 예식”이란 파스카 축제 첫날 밤,
온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 하는 가족 식사를 말합니다.
이 식사에서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출애굽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이 질문을 던집니다.
“오늘 밤은 왜 다른 밤들과 다른가?”
오늘 우리도 이 질문을 던져 봅니다.
대체 이 밤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지금 우리에게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톨스토이가 쓴 글 중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사나운 임금님이 사제들에게 명령했습니다.
"하느님을 볼 수 있도록 해 달라."
그러나 사제들은 임금님에게 하느님을 볼 수 있게 해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양치기가 그 문제를 해결해주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임금님께서는 눈이 좋지 않아서 하느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자 임금은 말했습니다.
"하느님을 볼 수 없다면, 하느님이 무엇을 하는 지만이라도 알고 싶구나."
그러자 양치기는 말했습니다.
"그 질문에 대답하려면 임금님과 제가 서로 옷을 바꾸어 입어야만 합니다."
임금은 서슴지 않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자 마침내 양치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은 이런 일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곧 하느님은 이처럼 ‘거룩한 바꿈’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늘 밤 우리에게 ‘거룩한 바꿈’을 이루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죽음을 가져가시고, 우리에게 당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이 얼마나 고귀한 교환입니까?
이제 우리의 몸은 거룩한 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오로의 표현대로,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갈라 3,27),
‘새 인간을 입었습니다.’(골로 3,10; 에페 4,24).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죽음을 취하시어
인간이 당신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 ~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는 까닭입니다.”
(콜로 3,1-3)
이 교환을 가리,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우리의 죽음은 그분의 것이 되었고, 그분의 생명은 우리의 것이 되었다."
이렇게 오늘 우리는 하느님의 생명으로 부활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밤 우리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늘 우리에게 이루신 사랑입니다.
그러니 부활한다는 것은 단지 죽었던 생명이 다시
살아나 생명을 연장해 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변화된 생명, 곧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오늘 밤 우리는 새로이 탄생되고 변화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진정한 의미의 “생일”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의 사랑으로 이루어진 참으로 거룩한 생일,
거룩한 변화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 내가 여러분에게 신비 하나를 말해주겠습니다.
우리 모두 죽지 않고 다 변화할 것입니다.”
(1코린 15,51)
이토록 부활은 단지 우리를 새로운 삶에로 바꾸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 존재 자체를 바꾸어 놓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이 밤은 참으로 기묘한, 참으로 거룩한 교환의 밤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만들어낸 참으로 기묘한,
하늘과 땅이 결합되고 하느님과 인간이 결합된 밤입니다.
하느님의 끝 모르는 사랑이 이루신 파스카의 밤입니다.
그렇습니다.
거룩한 이 밤에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임이 바로 부활입니다.
이처럼 부활은 신앙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출발점인 것입니다.
부활을 믿고 그분을 받아들이는 것이 곧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면,
바로 지금 거룩한 교환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 새로운 창조와 새로운 탄생의
대전환의 삶이 피어나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이 부활의 밤입니다.
바로 지금이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는 파스카의 밤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마태 28,10)
주님!
당신은 제가 가는 곳에 항상 먼저 와 계십니다.
항상 먼저 오시어 나를 기다리시는 분,
결코 저를 떠나지를 못하시는 분,
제가 찾기도 전부터 저를 찾으시고,
제가 찾으면 ‘나 여기 있노라’ 하시고,
제가 숨으면 ‘너 어디 있느냐?’하고 찾으시고,
먼저 제 안에 들어와 ‘어서 가자’고 이끌어 가시는 분.
그 보고 싶은 분을 보는 일, 그보다 아름다운 일은 없습니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